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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제66호 성륜사 정기법회

                       <제 66 호>


2002년 6월 2일 - 성륜사 정기법회


    구해탈(俱解脫)


지금 우리 불자님들이 같이 깊이 음미하신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은 이것은 그냥 보통 우리가 누구나 할 수 있는 법문(法問)이 아니라 이 협소(狹小)한, 협착하고 옹졸한 우리 마음을 한도 끝도 없이 무한대(無限大)로 확장(擴張)하고 확대(擴大)하는 그러한 법문입니다.

우리 마음은 본래 모양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원래로 한도 끝도 없이 무변무량(無邊無量)한 것이지만은 우리 중생(衆生)이 잘못 살아서 버릇 때문에 우리 마음이 아주 옹색(壅塞)하게 됐습니다.

우리 마음을 본래(本來) 마음자리로 돌리지 못 하면은 우리 인간은 참다운 발전이 없습니다. 참다운 해탈(解脫)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불(成佛)이라 해탈이라 그러지 않습니까. 허나 성불이나 해탈이란 것도 그냥 이 마음 그대로 두고서 해탈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한도 끝도 없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한 본래(本來)의 마음자리로 돌아가고 동시에 우리 몸도 그마만치 변화(變化)가 되어야 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마음 따로 몸 따로 생각 합니다만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 가령 한 5쯤이나 정화(淨化)가 되면 우리 몸도 역시 5쯤이나 정화가 되어야 됩니다.

부처님 법(法)을 정확히 잘 모르는 분들이 더러는 우리 몸 행동은 설사 어떠한 경우에 음식도 함부로 먹고 남녀 이성간에 사귀는 것도 함부로 그렇게 불순하게 하고 그렇더라도 우리 마음만 깨달으면 그만이 아닌가, 이렇게 그릇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또는 근대(近代)에 있어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음 따로 몸 따로, 마음은 깨달았는데, 마음은 도인이 됐는데 몸은 무애행(無碍行)이라,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함부로 행동한 도인(道人)도 있다. 이렇게 그릇 전달이 된 그런 가르침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령 계율(戒律)을, 계율이란 것은 도덕적인 행위가 계율이 아닙니까. 계율을 두고 봅시다. 이 계율은 도덕적인 행위인데 도덕적인 행위가 없이 우리 마음이 해탈이 될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은 우리가 해탈이란 것이 깨달음이란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욕계번뇌(欲界煩惱), 욕계번뇌를 떠나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욕계에 있지 않습니까. 우리 중생(衆生)이 업(業)따라서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이쪽으로 갔다가 저쪽으로 갔다가 전락(轉落)이 됐다가 또 훨썩 더 초승이 됐다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우리가 지은 업(業)따라서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 그렇게 됩니다.

헌데 우리 중생의 업이 제일 무거운 데가 욕계 아닙니까. 욕심이 좋기야 상당히 좋겠지요. 뭘 잘 맛있게 먹어도 좋고 또 자기 마음에 내키는 이성(異性)과 같이 그렇게 사랑해도 좋고 또는 명예욕(名譽慾)도 좋고 말입니다.

요즘 더구나 선거철이라 놔서 그 명예 때문에 모든 문제가 상당히 복잡이 되고 본인들도 괴롭고 여러 사람한테도 괴로움을 주고 그런 사례(事例)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는 선거가 필요 없다고 말씀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그 5욕(五慾)이라, 오욕은 이른바 음식 욕심, 잠 욕심, 이성 욕심, 명예 욕심, 재물 욕심이 5욕 아닙니까. 이 다섯 가지 욕심이, 이 욕심으로 꽉 차있는 것이 이른바 욕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 인간이 누구나가 다 보통은 추구(追求)해서 마지않는 오욕이 차근차근 줄어져야 그래야 우리가 욕계에서 벗어나는 것이지 그렇지 못 하면은 절대로 욕계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욕계에서 벗어나지 못 하면은 참다운 자유인(自由人)이 못됩니다. 자유가 없이 행복(幸福)이나 또는 우리 바라는 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해탈(解脫)이 있겠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은 정확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아주 수학(數學)같이 정확합니다. 꼭 우리가 사는 대로 우리가 느낀 대로 그 과보(果報)를 받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욕계번뇌(欲界煩惱)를 해탈(解脫)하고 또 색계번뇌(色界煩惱), 색계번뇌란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 인간은 지금 물질(物質)이란 것이 우리가 소박하니 보는 대로 내 몸뚱이도 있고 저 대상도 있고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 반야심경(般若心經)에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모든 법이 나라는 것이나 너라는 것이나 이 대상적으로 우리한테 감각 되는 것이나 모두가 이것은 허망(虛妄)한 것이다. 이런 말씀으로 허두(虛頭)에 나와 있지 않습니까. 이른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색즉공(色卽空)이라, 그 간단한 말씀 입니다만은 심심미묘(深深微妙)한, 우리 인생관(人生觀), 세계관(世界觀)이 거기에 다 들어 있습니다.

즉 그래서 그 색계번뇌, 색계번뇌란 것은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가 여가 태어나고 또는 여기서 죽고 또 저가 태어나고 하는 그러한 윤회(輪廻), 윤회의 가르침 지금 우리 불교인(佛敎人) 가운데도 불교를 깊이 음미하지 못하신 분들은 그 윤회하는 여기서 죽고 저가 태어나고 그렇게 뱅뱅 개미 쳇바퀴 모양으로 죽고 살고 하는 그런 가르침은 이것은 하나의 방편설(方便說)이다.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衆生)들한테 바르게 살게 하기 위해서 방편으로 말씀하신 것이지 불교의 본래 깊은 심오(深悟)한 진리(眞理)는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윤회란 것은 이것은 비단 부처님만 그렇게 역설한 것이 아닙니다. 저 그리스 철인 그 520년 전에 나오신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520~440 B.C.), 이 분도 역시 윤회설(輪回說)을 말하고 있고 이 보다 더 앞선 그리스의 아주 위대한 분들 그런 분도 다 또 말씀했고, 또 지금 서구철학(西歐哲學)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 (Socrates:469~399 B.C.)라든가 플라톤이라든가 또는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C 384~BC 322)나 이런 분도 다 모두가 윤회설(輪廻說, reincarnation)을 긍정(肯定)을 하고 역설을 했습니다. 이른바 오르피슴(Orphisme)이라, 이 윤회설이란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진리란 것은 우리 동양(東洋)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불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 그 마음을 깨닫는 성인(聖人)들 말씀은 다 똑같습니다. 얼마만치 성인들이 투철하게 인생(人生)과 우주(宇宙)의 진리를 깨달았는가, 그런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진리(眞理) 지향점(指向點)은 다 똑같습니다.

참선(參禪) 공부란 것은 우리마음이 본래(本來)로 부처다. 이런 자리에서 부터서 출발해야 한다고 저번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참선(參禪)은 그와 같이 돈오(頓悟)라, 우리 마음이 문득 내 마음이 본래로 부처고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모두가 다 바른 눈으로 보면 부처 아님이 없다. 여기에서 부터서 출발해야 그래야 참선이 됩니다.

참선 공부와 다른 공부와의 차이는 거가 있습니다. 다른 공부는 점차로 한 단계씩 올라가는 그런 공부지만은 적어도 참선을 한다 이럴 때는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인생과 우주의 참다운 자리, 이런 자리를 문득 깨달아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화두(話頭)를 들고 의심(疑心)을 하고 또는 염불(念佛)을 하고 잠자코 명상(瞑想)하고 이런 것도 모두가 다 본래면목 자리를 문득 깨닫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문득 깨달아서 나나 또는 이것저것이 모두가 본래로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알면은 그때는 이른바 참선의 본래적인 의미에서 말하면은 그때는 화두타파(話頭打破)라고 그러죠, 타파라. 화두 타파를 미처 못 하니까 의심이 필요하고 뭣이 필요한 것이지 나나 너나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다 본래로 부처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다시 의심할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참다운 참선의 시초(始初), 돈오(頓悟)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이치로 해서는 조금도 의심이 없이 확실하니 안다 하더라도 우리가 과거(過去)세 부터서 지어 내려온 그런 나쁜 습관성(習慣性),

그 불경(佛經)에 보면은 일념오백세(一念五百歲) 계념무량겁(繫念無量劫)이라, 이런 법문이 있어요. 이 말은 무슨 말씀 인고 하면은 일념(一念)이란 한 생각, 한 생각 우리가 낸다고 생각 할 때는 한 생각이 우리가 순간 동안 한 생각을 내지 않겠습니까. 밉다든가 좋다든가 욕심을 내든가, 한 생각 내는 그 생각이 오백세라. 그대로 사라지지가 않고서 한 생각 내면은 오백생(五百生)동안이나 우리 마음 우리 잠재의식(潛在意識)에 가서 흔적에 남아 있단 말입니다. 계념무량겁(繫念無量劫)이라, 그 미운 사람 그냥 저 놈 참 꼭 저 놈이 못됐으면 되겠다. 저 놈 죽었으면 되겠다. 이렇게 계속 해서 생각한다고 생각할 때 맬계(繫)자 생각념(念)자 계념(繫念)이라. 계속해서 우리 마음으로 생각한다고 할 때는 무량겁(無量劫)이라, 오랫동안 그 우리 잠재의식에 흔적(痕迹)이 남는단 말입니다.

사람 미워하면 더욱더 미워지지 않습니까. 누구 사랑하면 더욱더 사랑해지지 않습니까. 이런 것도 모두가 다 우리 잠재의식에다가 우리가 그때그때 생각을 내는 족족 흔적을 둡니다. 자리를 둔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문득 내 본래면목(本來面目)이나 모두가 이것이 본래로 부처다. 이렇게 재주가 있는 분들이 문득 깨달아서 이것도 업장(業障)이 무거우면 잘 안됩니다. 업장이 가벼워서 부처님 말씀을 100% 잘 믿어 들이는 그런 분들은 아까 말씀마따나 본래(本來)로 내가 부처가 아닌가, 천지우주(天地宇宙)는 모두가 다 텅텅 비어있는 제법공(諸法空)이 아닌가, 이렇게 해서 우리가 납득이 되었다 하더라도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잠재의식(潛在意識)에 남아있는 그때그때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하고 그 이른바 습기(習氣)라, 이것보고 불교(佛敎)에서 습기라 그래요. 익힐습(習)자 기운기(氣)자 말입니다. 습기(習氣)란 것은 그냥 쉽게 단박에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능엄경(楞嚴經), 능엄경은 이것은 선수(禪髓)라 그래서 참선(參禪)의 골수(骨髓)같은 경(經)이라고 그래요. 능엄경은, 능엄경에 보면은 참선하는데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 것인가, 그런 것이 아주 소상히 다 나와 있습니다.

참선 할 때는 전제(前提)적으로 먼저 준비적(準備的)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런 가운데서 중요한 것 하나가 선단음심(先斷淫心)이라, 선단음심이라. 먼저선(先)자 끊을단(斷)자 음탕할음(淫)자 마음심(心)자, 먼저 음탕(淫蕩)한 마음 끊으란 말입니다.

우리 욕계번뇌(欲界煩惱)가운데서 식욕(食慾)도 무섭지만은 남녀(男女) 이성간(異性間)의 욕심(慾心)이 굉장히 무서운 것 아닙니까. 우리 인간이 지금까지 이와 같이 번창(繁昌)하고 있다는 것도 역시 그 음탕(淫蕩)한 마음 때문에 지금 그럽니다.

잘 모른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더욱 더, 더욱 더 수가 많아져서 인구(人口)가 더욱더 팽창(膨脹)되어서 지금보다도 2배 3배 더해도 무방(無妨)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나 그런 분들은 자본주의(資本主義)의 폐해만 없어지면 인구야 얼마든지 팽창해도 무방하다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팽창해서는 안 됩니다. 너무 팽창해서는 그때는 인구 과잉이 되서 우리가 못살아 갑니다. 지금 2차 대전 이후에 우리 세계인구(世界人口)가 거의 1~2배 가까이나 불었다고 그래요. 한 50~60년 동안에 우리 인구가 2배 가까이나 불었다고 생각 할 때는 앞으로 또 한 50~60년 100년 지나 가면은 우리 인구가 얼마나 불겠습니까.

사람이 불어지면 자동차도 그마만치 수가 불어나겠지요. 이것은 남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인구를 줄여야 합니다. 전쟁해서, 전쟁 일어나면 많이 죽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나 하고 그런 비도덕적(非道德的)인, 비윤리적(非倫理的)인 행동(行動)으로 해서 인구(人口)를 감소(減少)를 시킬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우리 인간의 자제력(自制力)으로 해서 우리 인간의 기본적(基本的)인 욕망(慾望) 가운데 무서운 욕망의 하나인 그 음욕(淫慾)을 남녀 간의 음욕을 우리가 절제해야 한단 말입니다.

기독교를 보고 이슬람을 보고 또 불교를 보십시오. 성직자(聖職者)한테 어떻게 부처님께서나 성인(聖人)들이 말씀하셨습니까. 기독교 신부나 수녀나 또 불교의 비구나 비구니나 모두가 다 독신(獨身)생활을 강력히 요구 하셨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내야 식욕(食慾)이나 음욕(淫慾)이나 욕계번뇌(欲界煩惱)입니다. 욕계번뇌를 한사코 우리가 떠나야 됩니다.

가령 우리가 부부(夫婦)관계가 되어서 아주 화목(和睦)하고 좋은 2세를 후대인(後代人)들을 길러내고 그런 것도 중요한 일 아닙니까. 그러나 그 못지않게 아까 말씀마따나 욕계번뇌를 절제하는 것은 그 못지않게 그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저는 가끔 육재일(六齋日)말씀을 드리지 않습니까. 육재일은 8일 14일 15일 23, 29, 30일 한 달에 여섯 번 재일이 육재일 아닙니까. 재일이란 것은 우리 인간이 정말 청정(淸淨)하니 욕계번뇌(欲界煩惱)를 하다못해 그날만이라도 꼭 지켜야 한다는 부처님의 간곡한 가르침이 육재일입니다.

육재일은 어떻게 사는고 하면은 우리 중생은 평소에 너무나 많이 먹어요. 많이 먹으니까 하다못해 육재일만이라도 하루에 한 끼를 먹으라는 것입니다.

또는 그날만이라도 아무리 내외간(內外間) 금술이 좋다 하더라도 그날만이라도 절대로 남녀 이성 관계를 말라는 것입니다.

술도 먹지 말고 담배나 그러한 불필요한 것은 먹지도 말고 하룻동안 만이라도 그렇게 해야 우리의 자제하는 좋은 습관(習慣)이 길러집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는 그렁저렁 지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의 자리가 바로 부처기 때문에 우리는 한도 끝도 없는 무량공덕(無量功德)을 갖춘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우리의 본래(本來)의 자리입니다. 이 본래의 자리로 우리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냥 아무렇게나, 아무렇게나 거기에 따르는 그런 공덕(功德)이 없이 우리의 선근(善根)이 없이 들어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선근도 길러야 되고 또는 이른바 도업(道業)이라, 길도(道)자 업업(業)자 도업을 길러야 됩니다.

도업은 무엇인고 하면은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가 해탈(解脫)하기 위해서, 해탈이란 것은 우리 모든 존재의 지상명령(至上命令)입니다. 사람만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동물도 그렇습니다.

비록 현세에 소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돼지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항시 돼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차근차근 그네들이 영원(永遠)의 길로 해탈의 길로 지금 가고 있습니다.

풀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풀이 이파리 나와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다 모든 것이 영원적인 자리, 영원적(永遠的)인 하나의 진리(眞理)자리,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플라톤(Platon.BC428~BC348)이나 또는 플로티노스(Plotinos)나 그런 위대한 철인(哲人)들은 다 그와 같이 말씀을 하셨어요. 모두가 다 지금 어느 것이나 한결 같이 영원적인 해탈로 나가고 있습니다.

가장 선구적인 분들이 성인(聖人)으로 해서 먼저 해탈을 했고 또 우리한테도 해탈을 종용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해탈에도 구해탈이라, 함께구(俱)자 구해탈(俱解脫)이라,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우리 중생(衆生)들이 우선 이치(理致)로 철학적(哲學的)으로 꼭 해탈(解脫)을 해야 돼겠다는 그런 당위성(當爲性)을 알아야 되겠지요.

우리가 남한테 뭘 베푼다 하더라도 그냥 저 사람 불쌍하니까 베푼다. 이보다도 저 사람과 나와 본래(本來)로 하나의 생명(生命)이 아닌가. 이와 같이 철학적(哲學的)으로 동일성(同一性)을 알고서 베풀어야 그래야 무주상(無住相), 상이 없는 베풀음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탈하는데 역시 아까 말씀드린바 구해탈이라, 이론적(理論的)으로 먼저 체계(體系)를 갖추어야 된단 말입니다.

하이젠베르크(Heisenberg:1901~1976)와 같은 분도 위대한 물리학자(物理學者) 아닙니까만은 훌륭한 실험(實驗)을 하려고 할려면은 먼저 이론이 앞서야 합니다. 정확한 이론 없이 훌륭한 실천(實踐)이나 또는 실측(實測)이나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이론적(理論的)으로 부처님 가르침, 예수님 가르침, 또는 공자님 가르침, 노자님 가르침 모두가 다 한결 같습니다. 먼저 이론적으로 꼭 우리가 정말로 해탈(解脫)하지 않으면 안 된다. 꼭 욕계번뇌(欲界煩惱)를 떠나야 된다. 이런 당위성(當爲性), 즉 말하자면 이런 것을 먼저 우리가 철학적(哲學的)으로 굳건히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재주가 좀 있는 사람들은 철학적으로 알면은 내가 지금 공부를 무던히 했다. 나는 지금 공부가 다 됐다. 이렇게 해서 제가 아까 허두(虛頭)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치로 알고서 공부가 다 되었다 해가지고서 함부로 행동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제가 함부로 지적하면은 그야말로 상당히 문제가 생기겠지요. 저는 그런 지적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만 구해탈(俱解脫)이라,

구해탈은 참말로 결국은 우리 마음이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증명(證明)을 해야 됩니다. 증명을, 그래서 우리 생리자체(生理自體)도 정화(淨化)를 시켜야 된단 말입니다.

공자님은 나이70에, 나는 지금 70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法道)에 어긋남이 없다는 말씀을 했지 않습니까.

그것은 마음대로 술도 먹고 담배도 먹고 이것저것 그냥 마음대로 하라는 그런 것이 아니라 공자님이 70이 되어서 좋은 일만, 아무렇게나 그냥 그렇게 자기 스스로 마음으로 조작(造作)을 않더라도 모두가 다 좋은 행동(行動)만 해진단 말입니다.

자기 몸뚱이가 자기와 남이 둘이 없고 천지(天地)와 더불어서 내가 둘이 없다는 그렇게 사무치게 확실히 안다고 생각할 때에 그런 분들이 함부로 행동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그와 같이 우리가 이치(理致)로라도 즉 당위적(當爲的)으로 철학적(哲學的)으로 우리가 천지우주(天地宇宙)가 원래 뿌리가 같고 나와 남이 더불어서 다 하나다. 이렇게 우리가 앎과 동시에 우리 스스로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생명(生命)의 본래(本來)의 자리, 생명의 본래의 자리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불성(佛性)아닙니까. 부처불(佛)자 성품성(性)자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자리가 이 자리가 바로 모든 존재(存在)의 근원적(根源的)인 자리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와서 거기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生命)은 모두가 다 우리 근본고향(根本故鄕)이 진여불성입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빠르고 더디고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다 불성자리로 지금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대로 다른 짐승은 짐승대로,

따라서 그 불성 자리를 증명을 해야 이른바 함께구(俱)자 구해탈(俱解脫)이라. 온전히 해탈이 된단 말입니다.

성자(聖者)란 분들은 온전히 해탈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성자가 미처 못 되어서 이치로 확실히 안 분들은 그때는 불교적(佛敎的)인 의미에서는 현자(賢者)라고 그래요. 어질현(賢)자 놈자(者)자 말입니다.

따라서 현자도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사람이 절대로 아닙니다. 충분히 자기 의지(意志)로 해서 도덕적(道德的)인 행동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분이 현자란 말입니다.

성자는 그러한 우리의 인간적인 욕계번뇌(欲界煩惱), 색계번뇌(色界煩惱), 무색계번뇌(無色界煩惱) 모두를 다 떠나버린 영원적(永遠的)인 참다운 진리(眞理)의 당체(當體)인 아까 말씀드린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온전히 깨달은 분이 이른바 성자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을 짧은 인생에 내가 어떻게 다 할 것인가 이렇게 생각을 말으십시오. 사실은 그 길이 제일 쉬운 길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는 지금 그런 길로 가고 있어요. 모두가, 가고 있는 것인데 우리가 업장(業障)때문에 자꾸만 그냥 그렇게 정지을 시키고 후퇴를 할 라고 그런단 말입니다.

함께구(俱)자 구해탈(俱解脫)이라, 구해탈을 꼭 명심해 두시기 바랍니다. 이치로만, 이치로 본다고 할 때는 모든 동양권(東洋圈)의 성자들 또는 그리스 로마의 성자들 모두가 다 영원적인 길, 영원적(永遠的)인 진리(眞理)의 길로 지향 하도록까지 우리를 편달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만 만족하지 말고서 아까 말씀마따나 우주(宇宙)가 하나의 생명(生命)이다. 고향(故鄕)으로 우리가 다들 돌아가고 있다. 우리 중생(衆生)은 더불어서 서로 피차 돕고 돕고 내외간(內外間)이 구성되더라도 좋은 동기가 돼서 말입니다. 남편이 너무 욕심내면 또 아내가 그만치 견제하고 말입니다. 아내가 욕심내면 또 남편이 또 견제하고, 이렇게 더불어서 동기가 되어서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구해탈(俱解脫), 영원한 우리의 고향(故鄕), 자유(自由)와 행복(幸福)과 모든 가능성이 깃들어 있는 영생불멸(永生不滅)한 고향자리로 일로매진(一路邁進)하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20020602-청화대선사 설법

20020602-학무 유락재 촬영

20020602-정안 김성도 촬영

20040509-본정 김영동 DVD영상작업

20080507-주안 한동일 워드작업


*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작업용으로 큰스님 말씀

그대로 정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