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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제64호 성륜사 하안거 해제법문

                           <제 64 호>

* 20010804-성륜사  하안거 해제법문*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작업용으로 큰스님 말씀 그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참선공부는 본체(本體)만을 문제시 합니다.


사바세계(娑婆世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이것은 참 고해(苦海)입니다. 괴로울고(苦)자 바다해(海)자 인생고해(人生苦海)입니다.

우리가 사바세계라 하더라도 불교(佛敎)인생관에서는 삼계(三界)를, 사바세계를 다시 구분해서 3가지 경계(境界)를 구분 짓습니다.

어떤 것인고 하면은 우리 인간존재가 사는 욕계(欲界)가 있고 그보다 높은 차원의 색계(色界)가 있고 더 높은 차원의 무색계(無色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와 같이 공부를 하는 것은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고 하면은 우리 인간 존재의 마음이라 하더라도 즉 욕계에 있는, 색계중생의 마음이나 또는 무색계중생의 마음이나 마음자리는 똑 같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마음이라는 것은 한계가 없습니다. 국한이 없어놔서, 국한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좁다 크다 이렇게 구분할 수가 없는 문제 아닙니까. 김가 마음이나 박가 마음이나 그 누구 마음이나 나쁜 사람 마음이나 좋은 사람 마음이나 마음이라는 차원(次元)에서는 똑 같습니다. 똑같이 국한이 없기 때문에 광대무변(廣大無邊)합니다.

우리가 불행(不幸)한 것은 어째서 불행한가 하면은 우리 마음이 본래로 광대무변한 것인데 마음의 광대무변한 자리를 그대로 수용을 못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참 그야말로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 우리 마음을 스스로 분별시비(分別是非)로 해서 좁히고 괴롭게 한단 말입니다. 우리 욕계 중생의 사는 생활은 그렇기 때문에 욕계산지(欲界散地)라. 산지란 것은 흩을산(散)자, 산란스러운 흩을 산(散)자, 땅지(地)자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생활은 산지란 말입니다. 항시 마음이 산란스럽습니다.

왜 산란스러운가 하면은 아까도 말씀마따나 우리 마음을, 본래 마음자리를 광대무변하게 확장(擴張)을 시키고 무한대(無限大)의 마음을 쓴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나나 너나 이것이나 저것이나 그런 시비도 없고 항시 마음이 개운하고 허공(虛空)같이 영롱할 것인데 우리가 그렇지를 못하고서 마음을 좁히기 때문에, 한계 있게 어느 국한 내에다 마음을 두기 때문에 꼭 우선은 자기 몸뚱이, 이 색신(色身)을 나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기본적인 번뇌(煩惱)가 자기라는 존재(存在)가 실존적(實存的)으로 이렇게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아견(我見)입니다. 아견, 나아(我)자 볼견(見)자 아견이란 말입니다.

일반 중생(衆生)과 성자(聖者)의 구분은 어디가 있는가 하면은 우선 가장 근원적(根源的)인 문제가 우리 중생은 아견을 참다운 나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성자는 아견의 한계(限界)를 초월(超越)해서 본래적인 우리 마음자리로 돌아간 분이 성자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와 같이 삼복더위에 이렇게 애쓰고 공부한 것도, 공부하는 뜻이 다른 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아견에서 풀어서 본래적인 마음자리로 돌이킨단 말입니다.

세상이란 것은 굉장히 참 불안스럽지 않습니까. 참 불안스럽단 말입니다. 우리가 어느 누구나가 행복(幸福)을 추구하고 또는 마음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바랍니다. 기독교(基督敎)나 불교(佛敎)나 이슬람교나 무슨 종교(宗敎)나 또는 다른 도덕적인 가르침이나 모두가 다 안심입명을 바라지 않습니까. 마음이 우선 불안스럽지 않아야 행복이니까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마음 따로 몸 따로 생각 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참 불안스러워도 몸으로 편안하고 잘 먹고 잘 지내고 안일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구분해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과 몸은 절대로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음이 불안스러운데 몸은 불편하지 않고 편할 수가 없습니다. 순간순간 우리 몸이라 하는 것은 마음자리 반영을 받는단 말입니다.

지금은 세상이 개명(開明)이 많이 되어서 명상(瞑想)들을 할려고 애씁니다. 다른 나라 가서 보더라도 meditation이라 아주 참 명상 공부가 이래저래 여러 가지 종류도 많고 합니다. 그런 것은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명상(瞑想)을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어느 사람들은 우선 공리적(公利的)으로 일을 좀 도모할려고 그래서 마음도 편하고 몸도 가볍고 몸에 있는 잔병도 떨어지고 그렇게 해서 명상을 도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들이 하는 명상, 부처님 사상에서 부처님 공부를 하는 명상은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이른바 상대적(相對的)인 것을 구하는 명상이 아니라 절대적(絶對的)인 우리 마음의 본래(本來)의 자리, 마음의 본성(本性)자리를 구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가서 일반적인 명상(瞑想)과 불교명상(佛敎瞑想)의 근원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흘이고 나흘이고 닷새고 참 애쓰고 공부를 한다고 하더라도 공부하는 근본적인 명상법 이런 것을 잘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큰 소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란 것이 신비(神秘)로운 것이어서 우리가 지은대로 간단 말입니다. 나쁜 것 생각하면 나쁜 쪽으로 우리 마음이 흘러가서 자기 마음도 괴롭고 말입니다. 우리가 남을 관용(寬容)하고 관대하게 마음 가지면 마음도 역시 너그럽고 또는 동시에 마음도 참 편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불교명상(佛敎瞑想), 불교명상을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들이 지금 하시고 계시는 참선법(參禪法) 이것이 본래적인 근본명상(根本瞑想)입니다.

참선법이라 하는 것은 아까도 얼핏 말씀드린바와 같이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무슨 공리적인 그런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본 성품, 본래적인 마음 성품을 깨닫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면 마음성품 그것이 어떠한 것인가? 불교(佛敎)의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이 가지가지의 여러 가지 교리(敎理)와 체계(體系)가 있지만은 궁극적인 문제는 역시 마음을 깨닫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달마(達磨) 혈맥론(血脈論)도 보면 마음의 풀이에 있어서 관시변법계(寬時遍法界)라, 관시에 변법계라. 너그러울관(寬)자, 마음을 키우고 확장을 시키고 한다고 생각할 때는 온 세계, 법계(法界)라 하는 것은 끝도 갓도 없는 우주(宇宙)의 모든 존재의 근원적인 세계가 이것이 법계입니다. 비단 물질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다 포함해서 끝도 갓도 없는 한정도 없는 세계가 이른바 법계란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너그럽게 하면은 그 마음이 법계에 충만(充滿)해 있단 말입니다. 그 반대로 착야불용침(窄也不容針)이라. 우리 마음을 좁혀서 잘못 쓰면은 마음이 옹졸하고 좁기가 바늘귀 하나도 못 들어간단 말입니다.

우리가 남을 미워하고  또 지나친 욕심을 내고 그런 경우는 결국은 바늘귀 같은 마음입니다. 우리 소중한 마음을 바로 쓰면은 방금 말씀드린바와 같이 한도 끝도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것이고, 우주와 나와 결국은 둘이 아닐 정도로 되어버리는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서 자기 개인적인 내 존재는 내 몸뚱아리다. 내 몸뚱이보다도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른바 아견(我見)이라, 나아(我)자, 볼견(見)자, 아견이라 자기중심의 생각은 아까 표현한 바와 같이 바늘귀 하나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우리마음이 협소해진단 말입니다.

평생 사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 역시 마음 쓰는 생활이 우리가 하는 생활 아닙니까. 생활이 전부인데 마음을 금생에 잘 쓴다고 생각할 때는, 무던히 잘 쓰면 도로 사람으로 태어날 수도 있겠지요.

육도윤회(六道輪廻)라는 것은 그냥 하나의 방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불교(佛敎)의 실존적(實存的)인 가르침입니다. 우리 지은대로 받습니다.

사람 같은 행동을 하면 그때는 분명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고 또는 천상같이, 천상(天上)같다는 것은 십선계(十善戒)라. 우리가 열 가지 계율을 지키는 그런 정도란 말입니다. 그런 정도의 마음가지면 틀림없이 천상에 태어납니다.

같은 천상도 십선계를 지킬 정도의 계를 지키고 동시에 우리 마음이 고요히 참선(參禪)에 잠긴단 말입니다. 이른바 선정(禪定)에 든단 말입니다. 이런다고 생각할 때는 십선계와 참선공덕으로 해서 천상에 태어난단 말입니다.

현대적(現代的)인 공부를 하신 분들은 천상(天上)이고 지옥(地獄)이고 이런 얘기를 하면은 그런 것은 하나의 권선징악(勸善懲惡)적으로 과거에 성인들이 우리한테 좋은 일 하라 그래서  방편(方便)으로 내놓은 것이지 천상이 우리가 실지로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도 않는 것이고 지옥도 마찬가지고 그런 것은 하나의 가정적(假定的)으로 가설(假說)인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성자의 말씀이라는 것은 가정적으로 한 말씀은 절대로 없습니다. 꼭 근거 있는 말씀을 우리한테 하셨단 말입니다. 또 그 뒤에,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 뒤에도 무수한 성자가 다 증명(證明)한 말씀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천상도 분명히 있는 것이고 지옥도 있는 것이고 또 최상의 경계 영생(永生)의 행복을 누리는 극락(極樂)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 인간존재로 해서 아까 허두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인생고해(人生苦海)라, 고생고생 받지 않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이 몸뚱이도 아팠다가 무슨 실패를 했다가 결국은 늙어서 죽어버린단 말입니다. 우리 부처님께서 출가하셔 가지고서 공부하신, 난행고행(難行苦行)을 하신 의도가 어디가 있는가 하면은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 과거전생(過去前生)에 우리가 인간만치 밖에 업(業)을 못 지었기 때문에 금생(今生)에 인간으로 태어났고, 인간으로 태어나서도 쉴새없이 인생고를 느낀단 말입니다.

현대사회(現代社會)도 얼마나 불안스럽습니까. 지금은 사회나 현대적인 인간의 문명이 어디로 갈라는지 우리가 예측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 수는 얼마나 많습니까. 또 차량 수는 얼마나 많습니까. 공해는 얼마나 심각 합니까. 이런 것을 생각 하고 있어 놓으면 불안스럽기가 한이 없단 말입니다. 이렇게 인촌이 많이 퍼지고 차가 많고 공해가 심각하다고 생각할 때에 틀림없이 인간의 족속이 지상에서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단 말입니다.

그래서도 우리들은 그냥 뜬뜬 하게 삽니다. 아무런 그런 것은 생각지도 않는단 말입니다. 그저 말로만 하는 것이지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지를 않습니다.

제가 8.15 해방 막 돼서 서울 올라가니까 서울 인구가 40만 정도라 그래요. 40만 정돈데, 지금 서울인구가 참 얼마입니까. 인구란 것은 가속도(加速度)로 올라갑니다.

지금 지구인구가 60억 정도라 하는데 앞으로 10년 후면 또 얼마나 인구가 더 팽창이 되겠습니까. 그러면 거기에 곁들여서 우리 인간이 받는 인생고(人生苦)는 얼마나 더 경쟁적이고  비참해 지겠습니까. 우리가 생각을 좀 지켜야 됩니다.

지금 여기에도 젊은 남녀들도 많이 계십니다만 특히 젊은 사람들, 젊은 사람들은 욕망(慾望)을 좀 절제해야 됩니다. 욕망을...... 욕망을 절제해서 인구팽창(人口膨脹)을 막는 것도 역시 인류(人類)에 대한 굉장히 지대한 봉사(奉仕)란 말입니다. 그 남녀 간에 서로 피차 애정(愛情)을 가지고 지내는 것은 좋습니다. 좋으나 우리 인간 존재가 금생에 지구상(地球上)에 인구로 태어나서 가장 할일이 최상과제가 무엇인가?

이것은 아까 명상에 대해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 인간 존재로 밖에는 안 될 정도로 좁은 마음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확장(擴張)을 시킨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해방(解放)을 시키는 작업입니다. 그런 작업이 제일 중요합니다. 비단 사회적인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의미에서도 그것은 하나의 각기 우리 인간에 있어서 지상 명령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우리한테 모범을 주신 것, 또 예수가 우리한테 모범을 준 것 말입니다. 역대조사(歷代祖師), 역대성인(歷代聖人)들이 우리한테 모범을 주신 것도 모두가 다 그런저런 근본적인 문제가 들어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특히 우리 기성세대는 이미 다 가정(家庭)을 구성하고 그래 버렸으니까 벌써 늦어버렸지만은 적어도 젊은 세대는 참 결연(結緣)한 자세를 가져야 됩니다.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가 그렁저렁, 그렁저렁 남녀 이성간에 욕망가지고 산다고 생각할 때는 인류란 것은 오래 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더구나 지금 노령층(老齡層)이 얼마나 많이 수가 불어납니까. 저 같은 사람도 그전 같으면 진작 죽었을 것인데, 80가까이 살고 있다는 것, 이것도 하나의 노령화현상(老齡化現像)아닙니까.

위대한 사람들 그 분들 전기를 더듬어 보면은 그 분들은 그야말로 참 아주 인간적인 상대적인 천재일 뿐만 아니라 역시 근원적인 우주(宇宙) 인생(人生)의 장래(將來)까지 내다본 그런 분들이라고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석가모니께서나 또는 예수나 플라톤이나 말입니다. 또는 근대에 있어서는 칸트나 니체나 말입니다. 음악가로해서 슈베르트나 베토벤이나 또는 예술가로해서 미술가 조각가로해서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말입니다. 모두가 다 보면은 평생(平生)에 독신(獨身)으로 살았단 말입니다.

여러분들 자녀 간들 낳으면 하마 자기 짝을 얻지 못할까봐서 굉장히 부모님들은 여러 가지로 고민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의 행복이 내외간(內外間)같이 결합해서 자식 많이 낳아서 살고 그런 것에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욕계중생(欲界衆生), 욕심을 못 떠난 욕계중생이 욕망(慾望)때문에 못 떠나는 것이지, 욕망 그것은 우리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이나 사회 혼란이 어디서 옵니까. 집단적인 욕심 또는 개인적인 욕심 이런 것을 우리가 못 떠난 데서 인간의 불행이 온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은 우리 마음이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차근차근 좁아집니다. 좁아지면 좁은 마음 그 때문에 우리가 저승에 갑니다. 저승,

내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육도윤회(六道輪廻)라. 지옥(地獄)이나 아귀(餓鬼)나 축생(畜生)이나 수라(修羅)나 인간(人間)이나 또는 천상(天上)이나 그런 육도란 것은 우리가 지은대로 꼭 받습니다. 우리의 행동 또는 말 한 마디 우리 생각하나 모두가 다 우리생의 형태를 금생(今生)과 내생(來生)을 결정한단 말입니다.

여러분 지금 아주 참 더우신데 제가 여러 말씀을 드리면 고통스러우시겠지요.

그러나 아까 말씀마따나 마음을, 누구나가 다 하루 살면 하루 살만치 마음을 열으셔야 됩니다. 마음 연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몸도 그냥 편안합니다.

명상(瞑想)생활, 참선(參禪)이란 것은 마음 여는 공부가운데서 제일 본래적인 수행법(修行法)이 이른바 참선공부란 말입니다.

참선 공부라 하는 것은 본체(本體)만을 문제시 합니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인 우리 마음만을 문제시 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런 정도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본바탕은 마치 빙산의 일각 모양으로 바닷물에 잠겨있는 것은 한도 끝도 없이 크지만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하는 것은 뾰쪽이 수상에 물위에 나와 있는 모서리 아닙니까. 그와 같이 쓰는 마음은 좁은 마음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 밑에 깔려있는 마음은 얼음 산 뿐만 아니라 한도 끝도 없이 우주와 더불어서 같이 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파고 들어가면 결국은 끝도 갓도 없는 광대무변(廣大無邊)의 본래 마음자리가 나온단 말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부처입니다.

그래서 화엄경(華嚴經)에서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 마음과 중생과 부처와 이것이 절대로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니란 말입니다. 꼭 하나의 것입니다.

하나의 것 가운데서 어떻게 마음 쓰는가, 마음을 얼마만치 우리가 넓히고 확장을 시키는가, 여기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뿐이란 말입니다.

지금 비록 사람의 몸을 받아가지고 산다고 하더라도 사람 같은 마음도 못쓰고 너무 욕심에 지나치면 그때는 짐승 같은 마음도 쓰지 않습니까. 또는 표독스러운 맹수 같은 마음도 쓴단 말입니다. 하루에도 우리 마음이 몇 번씩이나 변화무쌍(變化無雙)합니까. 그래서 우리 마음 평탄히 평정을 가지고 아까 말씀마따나 본래마음자리, 본래 마음자리가 바로 부처입니다.

따라서 본래 마음자리만을 굳건히 거기다가 마음을 안주를 시키고 지내는 것이 참선공부입니다.

우리가 주체성(主體性)이라, 상당히 우리 사람이 불행(不幸)스럽고 또는 그때그때 마음이 동요(動搖)해서 흔들거리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 마음이 주체성이 없는 탓이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자리를 어디다 둘 것인가? 학문(學問)에 두기도 하고 또는 여러 가지 것에 두지 않습니까. 일에다 두기도 하고 거기다가 마음을 두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것에다가 우리 마음을 둔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마음의 불안을 가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불안스러우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 행복스러울 수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최상의 행복이고 또 인류사회(人類社會)의 최선의 봉사(奉仕)를 한다고 생각 할 때는 꼭 마음자리를, 근본 마음자리 부처의 마음자리 이 자리를 가리켜서 불교적인 용어로 해서 자성(自性)그래요. 자성이라, 스스로자(自)자, 성품성(性)자, 자성 그럽니다. 자성이나 불성이나 똑 같은 뜻입니다.

금생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기 마음의 근본자리를 모르는 것 같이 어리석고도 한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금생에 태어나지 않은 것만 같지 못합니다. 비록 담박에 마음의 본래자리, 불성을 부처님 자리를 얻기가 어렵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설사 금생에 나와서 바른 생활을 못했다 하더라도 본래 마음자리, 부처불(佛)자, 성품성(性)자, 또는 스스로자(自)자, 성품성(性)자, 불성(佛性). 자성(自性)자리는 조금도 오염(汚染)이 안 되었습니다. 우리가 실망을 품을 필요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음은 원래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과거사에 어떻게 나쁘게 살았다 하더라도 나쁜 버릇만 좀 붙은 것이지 근본적으로 오염이 안 된단 말입니다. 마음은 언제나 청정(淸淨)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자(聖者)의 가르침 따라서 한 생각 돌이키면 그때는 바로 성자란 말입니다.

우리 생활이라는 것은 순간순간 우리가 초월(超越)해야 됩니다. 비약(飛躍)이라, 흔히 실존주의철학(實存主義哲學)에서도 비약이나 초월이나 그런 말을 쓰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금 가상(假相)에 얽매여 있으니까 우리 실상(實相), 우리 실존(實存), 우리 본래(本來)의 고향(故鄕)자리로 우리 마음을 항시 비약을 시키고 초월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금생에 인간으로 사는 보람입니다.

말씀을 또 한없이 많이 하고 싶으나 여러분들이 땀을 뻘뻘 흘리시니까 제가 미안해서 말씀을 그만 줄이겠습니다.

정말로 마음공부 부지런히 하셔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은 절대로 청정하고 절대로 오염이 안 되었습니다.

따라서 마음 돌이키는 그때, 순간순간 영원의 자리로, 영원의 고향으로, 영원의 행복의 자리로 우리 마음을 비약을 시키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이번 기회에 정말로 대단히 훌륭한 깊은 공부를 하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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