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 호>
20001105-성륜사 정기법회
실상염불(實相念佛)
바야흐로 한참 단풍의 계절입니다. 그 단풍계절에 단풍구경이 얼마나 좋습닙까만은 단풍구경안하시고 법회(法會)에 참여하여주신 우리불자님들에 대해서 대단히 감사하고 또 한편은 단풍구경보다도 더 유익한 법문(法門)을 해드려야 할 것인데 그것까지 제가 염려가 되어서 송구스럽습니다.
종교(宗敎)라고 하는 것은 아시는 바와 같이 유위공덕(有爲功德)을 떠나서, 불교(佛敎)는 무위법(無爲法) 유위법(有爲法) 그럽니다. 상대유한적인 법(法)은 유위법이고 있을유(有)자 할위(爲)자 우리 인간적으로 조작도 하고 또는 그때그때 어느 한계가 있는 법이 이것이 이른바 유위법 이란 말입니다.
무위법은 상대적인 것을 떠나서 절대적인 진리가 없을무(無)자, 할위(爲)자 무위법입니다.
그래서 종교라는 것은 어느 종교나 모두가 다 제한(制限)된 복(福)을 떠나서 무제한적인 영원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가르침이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특히 우리 불교는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는 아주 그 야말로 참 거창한 명제(命題)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생사해탈이란 그 말은 사실은 적어도 술어 적으로는 불교 외에는 없습니다. 종교의 본뜻은 영생해탈(永生解脫)의 뜻이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다 들어있다 하더라도 아주 직설적으로 바로 생사를 떠난다는 것은 우리가 죽고 사는 한계상황을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런 가르침은 불교 외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생사를 떠난다는 커다란 문제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커다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활짝 열어야 되는 것인데 마음을 열지 못 하면은 생사(生死)를 떠난다는 커다란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슨 종교나 마음을 열려고 아주 무진 애를 많이 씁니다. 애를 많이 쓰나 애를 너무 많이 쓰기 때문에 자칫하면 집착(執着)을 해버립니다.
우리가 집착한다는 문제가 아주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역사적(歷史的)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에 우리 불교는 그와 같이 너무 잔인한 그런 것은 없습니다만은 기독교도 사실은 예수님의 뜻도 얼마나 숭고(崇高)합니까.
숭고하지만 중세기(中世紀)에 있어서 기독교의 카톨릭 사회에서 이른바 종교재판(宗敎裁判), 종교재판문제는 굉장히 그야말로 참 잔인하게 이루어 졌습니다.
16세기부터서 17세기까지 그 90년 동안에 이단자로 몰려서 불에 태워서 죽인 사람이 10만명 됩니다. 10만명을 한번 상상을 해 보십시오.
여기가 지금 옥과면(玉果面)입니다. 옥과면 인구가 만명 조금 넘습니다. 10만명은 옥과면 전체 인구 10배란 말입니다. 10배가 90년 동안에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90년 동안에 10만명을 불에 태워서 죽였단 말입니다.
이것은 카톨릭 법왕의 로마 법왕청의 공인 밑에서 도미니쿠스가 맡아가지고 했단 말입니다. 얼마나 참 무시무시한 일입니까. 그 절대평등 (絶對平等)을 주장하는 하느님의 사랑의 이름 밑에서 그랬단 말입니다.
비단 기독교뿐만 아니라 일본(日本) 불교사(佛敎史)를 또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불교도 종파(宗派)가 이렇게 나누어지면 말입니다. 자기 종파의, 종파 이기주의(利己主義) 그런 의미에서 다른 종파 가령 법화경(法華經)을 신봉(信奉)하는 법화종(法華宗)이 있지 않습니까. 또는 염불을 주로 하는 염불종(念佛宗)이 있고, 일본은 종파끼리의 대립이 아주 첨예 합니다.
그런데 그런 염불종과 법화종 또는 천태종 사이에서 같은 스님 네끼리 서로 자기이익을 주장하기 위해서 서로 싸워서 코를 베고 귀를 자르고 했단 말입니다. 얼마나 참 끔찍스런 일입니까. 이른바 독단 도그마 말입니다. 집착이란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저는 여기저기 법회에 나다니면서도 많이 보고 있습니다만은 가령 우리가 염불을 한다. 염불을 하는 것이 사실은 그야말로 얼마나 쉽습니까. 생각염(念)자 부처불(佛)자 아,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 이름을 부르고 싶으면 부르고 부르기 싫으면 속으로 또 외고 말입니다. 그러면 되는 것을 꼭 자기 식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리도 꼭 자기 식으로 내야하고, 그리고 같은 염불종도 특히 일본종교에서 있는 것입니다만은 생각을 말고 꼭 소리만 내서 하라는 종파가 있어요. 일본 진종(眞宗)같은 참진(眞)자 마루종(宗)자 그런 종파는 꼭 소리만내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염불하는 법에서는 여러분들 대체로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습니다만은 가령 관상염불(觀像念佛)이라 관상염불은 무엇인고 하면은 부처님의 원만스러운 모습을 우리가 관찰한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란 것이 얼마나 산란스러움이 많습니까. 그 산란스러움이 많고 분별시비가 많아놔서 그냥 염불하면 마음이 잘 통일이 안돼요. 그러니까 부처님의 원만덕상(圓滿德像)을 이렇게 상상하면서 보면서 하는 염불이 관상염불 아닙니까.
가령 우리가 여기 부처님 관음상(觀音像)을 모시고 있는 셈인데 부처님을 우리가 참배하면서 우러러보면서 염불하면은 훨썩 더 마음도 차분하고 공부가 잘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불상(佛像)을 순수한 우리 마음을 지속을 시키기 위해서 불상을 모시는 것인데 그 불상을 상상 말고서 꼭 소리만 내야 된다.
또는 염불 가운데는 이런 염불도 있습니다. 이른바 실상염불(實相念佛)이라. 실상염불은 무엇 인고 하면은 이것은 부처님의 진리(眞理)자체를 우리가 상상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의 진리가 우리 눈에 지금 보이지 않지 않습니까. 따라서 실상염불은 우리에게 보이는 대상이 아닙니다. 보이는 대상이 아니지만은 이 우주란 것은 바로 부처님 생명이란 말입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아주 훌륭한 말씀이 있습니다.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아주 고도한 진리를 담은 그런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인고하면은 모든 부처님은 여래 (如來)라는 것은 부처님 아닙니까. 시방여래는 모두 부처님이란 뜻입니다. 모든 부처님은 법계신이라, 이 법계라는 것은 바로 우주를 말합니다. 모든 부처님은 우주를 몸으로 한단 말입니다. 우주를 말입니다.
이런 말씀은 방편(方便)을 떠나버린 진리 그대로의 말씀입니다. 우주(宇宙) 자체가 이것이 부처님의 몸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이른바 불교의 대승불법(大乘佛法)이 됩니다.
이리 나누고 저리 나누고 둘로 나누고 셋으로 나누고 그런 것은 참다운 대승불법이 못되는 것입니다. 나까지도 포함해서 이 우주 자체가 오직 하나의 생명(生命)이란 말입니다. 우주가..........
시방여래는 법계신이라, 모든 부처님은 우주를 몸으로 한단 말입니다. 우주를 말입니다.
우주를 몸으로 한다고 생각할 때는 산도 부처님 물도 부처님 곤충도 부처님 다 부처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가 어디가 있는가? 그것은 중생들은 자꾸만 이렇게 나누어서 본단 말입니다. 나누어서....
어째서 그런 것인가. 중생(衆生)은 겉에 뜬 상(象)만 본단 말입니다. 나라는 상(我相), 너 라는 상(人相) 밉다는 상 사랑한다는 상 그런 상만 집착한 것이 중생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자(聖者)란 것은 모든 존재(存在)의 본바탕을 봅니다. 본바탕을 본다고 생각할 때 똑같단 말입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항시 우리가 인용해서 비유할 수 있는 수파(水波)의 비유라 물수(水)자 물결파(波)자 물과 파도의 비유란 말입니다. 바람 따라서 파도가 천파만파 일어난다 하더라도 내내야 똑같은 물이란 말입니다. 그렇듯이 부처님은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우주바다의 물에 비길 수가 있는 것이고 또 중생의 분별 따라서 일어나는 우리 번뇌망상(煩惱妄想)이나 모든 상은 이것은 하나의 그야말로 파도에 비긴단 말입니다. 파도와 물과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내야 파도가 천파만파 일어난다 하더라도 결국은 다 물이란 말입니다.
그렇듯이 우리 중생이 인과(因果)의 법 따라서 산이 되고 하늘의 별 되고 인간이 되고 또는 도둑놈이 되고 또는 범이 되고 그렇다 하더라도 똑같이, 모두가 다 똑같이 우주의 법에서 나왔단 말입니다. 우주의 법인 부처님 몸에서 모두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보나 금강경(金剛經)을 보나 모두가 다 그런 도리로 해서 성품(性品)과 현상(現象)의 관계를 말씀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현상만 보는 것이고 성자란 것은 본바탕을 본단 말입니다. 따라서 아까 말씀드린 실상염불(實相念佛)이라.
실상염불이란 것은 가장 고도한 염불(念佛)이 실상염불입니다. 우주의 본바탕 우주의 실상(實相)을 우리가 관찰하면서 하는 염불이란 말입니다.
비록 똑같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우리가 외인다 하더라도 우리 맘이 덮어놓고 부처님은 저 밖에 계시다가 우리가 염불을 많이 하면 우리한테 와서 도와 주시겠지, 이런 정도의 이것은 이른바 타력염불(他力念佛)이라. 보통 그렇게 많이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애쓰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하면은 그때는 그야말로 참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와서 가호(加護)를 하시고 복(福)을 주고 그렇게 하신다고 생각되는 것이 보통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은 가장 소박한, 하나의 방편염불(方便念佛)입니다. 염불은 염불이지만은 참다운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꼭 하시고 싶은 그런 염불법은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꼭 하시고 싶은 염불법은 무엇인고 하면은 아까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실상염불이라, 우주(宇宙) 생긴 대로, 우주진리(宇宙眞理) 생긴 대로 그런 염불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아까도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소승법(小乘法)과 대승법(大乘法), 소승법은 부처님께서 편의에 따라서 중생의 그릇 따라서 그때그때 중생 근기에 맞게 시리 하신 법문이 이른바 소승법이고 말입니다.
그러나 진리란 것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소승이고 대승이고 가르는 것도 그도 하나의 방편인 것이지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뿐이란 말입니다.
법화경(法華經)을 이른바 모든 경론(經論) 가운데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 법화경은 모든 경론 가운데서 통일(統一)된 경이라고 합니다. 화엄경(華嚴經)도 마찬가지고 법화경, 화엄경 뜻은 무엇인고 하면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모두가 둘이 있고 셋이 있고 이런 것이 아니라 한결 같이 하나의 진리뿐이다. 일불승(一佛乘)이다. 한일(一)자, 부처불(佛)자 탈승(乘)자, 일불승이라, 모두가 다 부처님 가르침뿐이다. 이런 것이 법화경이나 화엄경이나 대승불교의 본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염불(念佛)을 하든 또는 화두(話 頭)를 들고서 의단(疑端)을 품고 공부를 하든 우리 근본적(根本的)인 목표는 어디가 있는고 하면은 우리가 부처님이 돼가는,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이 돼 가는데 있습니다.
왜 부처님이 꼭 돼야 할 것인가? 부처님이 되지 못 하면은 참다운 행복(幸福)을 얻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어느 누구나가 다 한도 끝도 없는 행복을 구한단 말입니다. 아는 것도 기왕이면 세상만사 다 알아버리고 싶고 말입니다. 어떤 면으로 보나 우리 인간은 최선(最先)의 것을 다 구합니다. 제일 부자가 되고 싶고 얼굴도 제일 잘나고 싶고 그런단 말입니다.
한편 생각 할 때는 아이참 별스럽게 욕심도 너무 많구나 생각할 란가 모르겠지만은 우리 인간존재는 원래 그런 존재여요. 어째서 그런고 하면은 우리 인간의 본바탕이 부처기 때문에 우리 본바탕이 그렁저렁한 존재 같음사 한도 끝도 없는 것을 구하겠습니까만은 우리 인간이 본래가 부처란 말입니다. 본래가 부처...
부처란 것은 어느 면으로 보나 완벽한 것이 부처 아니겠습니까. 자비(慈悲)로 보나 지혜(智慧)로 보나 능력(能力)으로 보나 어떠한 면으로 보나 완벽한 것이 부처인데 따라서 우리 본 성격이 바로 부처기 때문에 우리가 구하는 것도 항시 한도 끝도 없이 다 구한단 말입니다. 다 구하나 상대적인,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것은 어떻게 우리가 다 구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상대적인 것은 그런 한계가 있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욕망(慾望)은 한도 끝도 없는 것인데 물질(物質)도 한계가 있고 또는 이런 자원(資源)도 한계가 있고 말입니다. 그렇게 상대적인 이 물질 한계가 있는 물질을 구한다고 할 때는 그때는 필연적으로 그야말로 치열한 경쟁이 안날수가 없단 말입니다. 즉 인간사는 모습이 주로 지금 그런 모습 아닙니까.
그러나 종교(宗敎)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존재(存在)를 허망(虛妄)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실로 있지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제법이란 것은 모든 존재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현상(現狀)이 공이라. 또는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유위법이란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상대유한적인 모든 존재가 유위법이란 말입니다. 그 유위법은 여몽환포영이라, 마치 꿈이요 또는 허깨비요 그림자요 거품 같다는 것입니다.
꿈이 있습니까. 꿈 꿀 때는 실제같이 실제로 있는 것같이 보이지요. 꿈을 깨버리면 무엇이 남습니까. 그림자요 분명히 이렇게 빛이 볕이 비추고 또는 모양이 있으면은 모양에 따르는 그림자가 보이지 않습니까. 분명히, 분명히 보이지만은 또 분명히 없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중생이 지금 나요 너요 밉다 또는 좋다 이런 것은 사실은 그림자 같고 꿈같은 것입니다.
우리 불교인들이 꿈같고 그림자 같은 것을 이해를 못 하면은 그때는 불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허망(虛妄)하다 하더라도 우리가 꼭 이해를 해야 한단 말입니다. 억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가 꿈이고 허깨비 같은 것을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어째서 없는 것인가? 우리가 깨달아서 성자가 되어놓으면 분명히 다 허망하게 여실하게 보일 것인데 우리 중생은 꼭 있게만 보인단 말입니다. 미운사람은 꼭 밉게만 보이고 사랑한 사람은 그냥 또 사랑스럽게만 보인단 말입니다. 그것은 중생의 착각(錯覺)입니다. 중생이 잘못 보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서 잠시간 허망 상을 지금 보이고 있단 말입니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라, 제행이 무상이란 것은 모든 존재는 어느 순간도 고유한 존재가 없습니다.
이쁜 사람은 지금도 이쁘고 또 그 다음도 이쁘고 미운사람도 지금도 밉게 보이고 그 다음도 내일도 미울 것이고 이런 생각이 보통 아닙니까.
그러나 그것은 중생의 착각입니다. 미운 사람도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생겨난 존재이기 때문에 일초동안도 같지가 않단 말입니다. 우리 세포도 역시 일초의 몇 천분의 일 동안도 그대로 있지가 않습니다. 순간순간 신진대사(新陳代謝)해서 변화해간단 말입니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그때는 조금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어느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강도가 제일 강한 다이아몬드 같은 금강석도 역시 정밀(精密)한 현미경(顯微鏡)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순간순간 마멸돼 간단 말입니다. 존재(存在)하는 것은 다 그런 것입니다.
같은 것이 언제 어느 시간(時間)대에도 없고 어느 공간(空間)대에도 없단 말입니다.
다만 중생이 잘못보기 때문에 중생은 뚜렷하게 못 봅니다. 천안통(天眼通)을 통해야 우리 육안(肉眼)의 참다운 실성(實性)을 회복해서 천안통을 통해야 비로소 존재의 본바탕을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때는 못 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제아무리 정밀한 현미경을 놓고 본다 하더라도 물질의 한계 내에서 보는 것이지 물질을 떠나버린 저쪽세계는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정신을 현미경으로 볼 수 있습니까.
우리 불자님들 그 모든 존재가 다 꿈이요 허깨비요 또는 거품이요 그림자 같다. 이 소식을 아무리 섭섭해도 꼭 이것을 깊이 생각해 두셔야 됩니다.
우리가 결혼하고 가정을 꾸며서 산다는 것도 얼마나 참 좋은 일입니까. 얼마나 이것이 좋기는 좋은데, 이것도 사실은 허망(虛妄)한 거란 말입니다. 이것도 다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신부가 있고 수녀가 있고 우리같은 비구가 있고 비구니 스님들도 계시지 않습니까. 성자(聖者)의 길이란 것은 꼭 결혼해서 자식 낳고 그것이 별로 소중한 것이 아니어요, 그것이...
오직 문제는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 우리가 꿈을 깨어서 꿈같은 모든 것을 우리가 깨서 참다운 진리(眞理)로 가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서 결혼 안하신 분들은 가급적이면은 안하시면 참 좋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아까 제 말씀마따나 그야말로 참 실상염불(實相念佛)이라. 실상염불, 염불 하실 라면은 기왕이면 제일 고도한 염불을 하십시오.
실상염불은 우리 마음으로 그냥 소리만 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본바탕을 그대로 생각하시면서 하신단 말입니다. 그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천지우주(天地宇宙)는 모두가 다 부처님뿐이다.
이 사람 보나 저사람 보나 이것 보나 또는 우리가 길을 가다가 하나의 독사를 보나 뭘 보든지 간에 그렇게 모든 존재가 본래로 부처님이니까,
부처가 아닌 것을 억지로 보라는 것이 아니라 본래가 부처인 것을 우리 중생이 지금 잘못 봐서 부처라고 보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저는 지리산서 조금 살았습니다만은 저 지리산 천왕봉 밑에 거가 부도암 이란 암자가 있었어요. 거기서 제가 몇 철을 좀 지냈는데 거기 옆에 집에 가서 처사가 살아요. 처사님 한분이, 근데 그 처사님이 불교도 독실하게 믿지만은 굉장히 강직한 분입니다. 강직한 분이어서 산에 다니면서 가다가도 독사를 만나면 독사보고 서라고 말 합니다. 아주 호랑이 같이 독사보고 서라고 말 하면은 독사가 꼿꼿이 서요. 독사가 말입니다.
사람의 정신이라는 것은 사무치면은 그렇게 위대한 힘을 내는 것입니다. 그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중국에 들어와서 법을 펼칠 때에 달마대사 법을 반대한 사람들이 굉장히 달마대사를 중상모략도 하고 달마대사를 독으로 죽일라고 말입니다. 독살 할라고 독을 여섯 번이나 드렸어요. 그러나 다섯 번째까지는 독이 닿지를 않아요. 독이 말입니다.
정말로 사무치게 모든 것이 다 부처다. 천지우주가 다 오직 부처님 아님이 없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는 독도 내내야 부처 아닙니까. 독도... 우리 중생이 독은 독이고 약은 약이고 우리 중생은 이렇게 분별하니까 중생이 독 먹으면 그때는 죽습니다. 그러나 깨달은 분상에서 독도 저것도 내내야 저도 본래는 불성(佛性)이 아닌가. 이렇게 바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독이 사람을 중독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의 본래 성품은 그렇게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염불 하실라면 바르게 이른바 실상염불이라. 실상염불 해야 그래야 참다운 공(功)이 있단 말입니다.
실상염불의 공은 어디다가 비길 수가 없습니다. 글쎄 그것은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좋은 사람 보나 나쁜 사람 보나 장사할 때 고객이 오나 인상이 나쁜 사람이 오나 다 부처님같이 생각하면은 그때는 또 서로 상통(相通)이 됩니다.
내외간 같이 살 때도 남편을 부처님같이 대하고 또 남편은 아내를 부처님같이 대해보십시오. 그보다 더 훌륭한 부부관계가 없습니다. 친구지간도 마찬가집니다.
여기 선생님들도 많이 계시지만은 교단에 서서 학생들 70명, 80명 앞에다 두고서 저들 모두가 다 부처님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실 때는 얼마나 귀엽게 보이고 그야말로 참 좋은 말씀을 많이 하실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어떠한 면으로 보나 실상염불로, 실상식으로 하는 것이 참다운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바라시는 염불법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을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꼭 자기 식으로 소리만 낸다는 염불종파를 하나 만들어가지고 꼭 그 범주에다 딱 집어넣을라하고 그렇게 해서 싸우면 서로 꼴이 그것이 뭣 되겠습니까.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16세기에서 17세기동안에 그 90년 동안에 10만명을 그냥 불에 태워서 이단자(異端者)로 몰아서 죽였단 말입니다.
그 브루노 같은 분은, 브루노란 분은 16세기 때 분입니다. 브루노라고 아주 유명한 수도사입니다. 도미니크스 교단의 수도회의 수사인데,
그 전에 니코라우스 코자누스(Nicolaus Cusanus 1401~64)라고 훌륭한 신학자(神學者)가 있어요. 신학자가 어떤것인고 하면은 이른바 범신론(汎神論)이라,
기독교는 일신론(一神論) 아닙니까. 오직 하나의 하느님만 믿는 것이 그것이 기독교 일신론인데,
우리 불교와 같이 힌두교와 같이 그와 같이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신이 아님이 없다. 일체존재(一切存在)가 모두가 다 신이다. 우주(宇宙)가 바로 신이다. 자연(自然)도 바로 신이다. 이런 것이 이른바 범신론(汎神論)입니다. 넓은범(汎)자 귀신신(神)자, 그래서 자고로 범신론 일신론은 논쟁을 많이 하고 서로 싸움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그 브루노는,
니콜라우스 코자누스라는 분 이분도 역시 기독교 신부입니다. 신부고 로마 교황청에서 추기경을 지냈어요. 추기경을 지내서, 그 사람 지위는 법왕의 다음가는 높은 지위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 분이 굉장히 총명한 분이어서 법왕의 다음가는 높은 지위에서 있으면서도 그 양반 사상은 기독교적인, 카톨릭적인 일신교가 아니라, 이른바 범신론을 주장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이나 모두 그리스 철학(哲學)을 공부해가지고서 거기에서 영향을 받았겠지요. 그래서 이분은 이른바 범신론을 주장한 것인데 브루노란 수사도 역시 니콜라우스 코자누스라는 그 선배 따라서 그야말로 일신론을 자기도 주장하지 않고서 이른바 범신론을 주장했단 말입니다.
그 당시는 기독교 카톨릭 측에서 범신론을 주장한 사람을 제일 미워했습니다. 이단으로 몰았단 말입니다. 이단으로 몰아서 로마 법왕청에 잡혀 들어갔지요. 잡혀 들어가서 네가 살려면 네 주장을 포기를 해라. 용기가 없는 사람이고 신념(信念)이 약한 사람 같으면 살기위해서, 불에 태워서 화형 시키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형벌입니까. 면하기 위해서 마땅히 그야말로 참 자기 신념이 그렇지 않더라도 그러면 제가 포기하겠습니다. 그러면 될 것을 그 수사는 신조가 강한 사람이라서 포기를 안했단 말입니다. 그렇게 7년 동안이나 옥중에다 가둬 놓고서 차마 또 죽이기도 곤란스럽겠지요. 같은 수사니까 같은 기독교인이니까 말입니다. 그 7년 동안 내내 굴복 안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7년 만에 결국은 화형을 불에 태워서 죽게 했습니다. 브루노란... 그렇게 신념이 강한 분도 있고 그랬어요.
접때 제가 어느 신문을 보니까 갈릴레오 갈릴레이 여러분들 물리학에서 배워서 알으시겠지 요. 갈릴레오 갈릴레이 말입니다. 이분도 16세기부터 17세기 때 분입니다. 그런데 로마 교황청에서 이분한테 대한 그 당시에 17세기에 재판을 내린 것이 잘못되었다. 그러한 즉 말하자면 사과문(謝過文)을 냈단 말입니다. 그 당시 로마법왕의 바올로 2세가 그와 같이 사과문을 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동설(地動說)이라, 그때 천동설(天動說) 지동설 문제가 굉장히 문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서양사(西洋史)를 공부하신 기억을 더듬어보면 알것입니다만은 지동설은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이 지동설입니다. 지금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카톨릭 사회에서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이 아니라 태양과 천체가 지구를 돈다고 그렇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카톨릭의 하나의 세계관(世界觀)으로 확립이 되어놔서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주장하면은 그때는 그야말로 참 카톨릭의 권위에 큰 손상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지동설 부르짖는 사람들을 그냥 그때도 이른바 종교재판(宗敎裁判)에 몰아가지고 죽였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해서도 그때 종교재판에 회부했단 말입니다. 지동설을 부르 짖으니까 코벨리우쿠스나 모다 그분들 말대로 따라서 결국은 지동설을 말하니까 이단이라고 몰아가지고서 감금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분은 좀 신념이 약하던가 브루노 같이 그렇게 강한 신념이 없었던가 제가 잘못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저는 지동설을 다시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고 지동설을 말한 사람들을 제가 그야말로 혐오(嫌惡)하고 비판(批判)하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화형(火刑)을 시키지 않았단 말입니다. 화형을 시키지 않았으나 그 대신 8년 동안이나 자기 집안에다가 감금을 시켰어요. 그 심판을 받을 때가 나이가 일흔 살인데 78세 죽을 때까지 자기 집에다가 감금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갈릴레이가 심판 받을 때에 자기가 나오면서 하는 말이 이 말도 유명한 말로 남아 있습니다만은 ‘그래도 지구(地球)는 돌고 있다’ 이 말을 했단 말입니다. 자기는 지구가 태양(太陽)주위를 돌고 있는 지동설을 부르짖는 것인데 지동설을 폐기(廢棄)하라고 한 것을 표면으로는 폐기한다고 해 놓고서 자기 신념은 결국은 지구가 분명히 도는 데 안돈다고 할 수가 없어서 내가 비록 부인은 했더라도 지구는 그대로 돌고 있다고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 하나의 유명한 말이 되었습니다만은 아무튼 그러한 독단주의(獨斷主義), 도그마 독단주의라는 것이 그렇게 참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독단주의를 없애는 것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가 이말 저말 모다 많이 꺼낸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여러분들께서 앞으로 종교를 어떠한 방식으로 믿든지 간에 절대로 독단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꼭 내식만 옳다 해서는 안 됩니다. 아들한테나 딸한테나 우리가 그렇게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독단주의를 우리가 지양(止揚)해서 정말로 성자(聖者)의 바른 자세로 우리가 종교(宗敎)를 생각할 수가 있을 것인가.
이것은 아까도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현상적(現象的)인 문제는 내내야 아무리 우리가 이론적(理論的)으로 많이 공부했다 하더라도 이것이 하나의 상대적(相對的)인 범주(範疇)를 넘어 설수가 없지 않습니까.
책을 많이 봤다 해도 세상 책을 우리가 다 볼 수가 있습니까. 수학(數學)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모든 수학을 다 풀 수가 없는 문제 아닙니까. 어떠한 면으로 보나 세상의 인연(因緣) 따라서 이루어진 문제는 우리가 완벽을 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 한계(限界)가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독단을 부리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한계를 더 알고 덜 안다고 해서 차별할 것이 아니라 모두를 다 근본(根本)자리에서 본단 말입니다. 근본자리에서 보는 것이 이것이 본래 생긴 대로 보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衆生)들은 본래 있는 대로 보지를 않습니다. 자기 업(業)대로 본단 말입니다.
유명한 일수사견(一水四見)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똑같은 물을 우리가 상대할 때도 물은 우리 중생들이 먹는 것이 물 안 되겠습니까. 그 러나 귀신(鬼神)은 물을 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은 물을 피로 본단 말입니다. 고기는 또 물을 자기가 사는 집으로 본단 말입니다. 천상(天上)사람들은 물을 어떻게 볼 것인가 천상사람들은 영롱한 구슬로 봅니다. 영롱한 보배로 본단 말입니다. 부처님은 물을 어떻게 볼 것인가. 부처님은 물을 신묘(神妙)한 불성(佛性)으로 본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은 지금 착각(錯覺)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생이 본다는 것은 자기 업(業)의 거울로 본단 말입니다. 업의 거울로 보는 것이지 사실 있는 대로 보지를 않습니다.
사실대로 보는 것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실상관(實相觀)이라, 실상관 이것이 사실로 보는 거란 말입니다. 우주란 것은 모두가 다 실상 대로 있는 것입니다.
생긴 그대로가 이것이 즉 말하자면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부처님의 견해로 보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조금도 가림이 없이 하나의 불성으로 본단 말입니다.
유명한 유마경이 있습니다. 유마경은 우리 거사님들 재가불자 거사님들을 위해서 설해놓으신 아주 심오한 경전인데 그 유마경 가운데 가서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라 들입(入)자, 아니불(不)자, 두이(二)자 모든 것이 둘이 아니고 분열돼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하나의 법(法)이다. 하나의 법으로 들어가는 그 법문이 입불이법문입니다.
입불이법문인데, 우리 중생들은 둘로 보고 셋으로 보고 나누어서 보는 것인데 부처님께서 바로 보시는 참다운 혜안(慧眼) 참다운 부처님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 다 하나로 본단 말입니다. 간단명료합니다.
다만 중생들이 하나로 보는 견해를 자기가 모른다고 그래서 인정하는가, 않는가, 그것이 문제인 것이지 업장(業障)이 무거운 사람들은 정말로 그렇게 될 수가 있을 것인가. 꼭 자기 견해(見解)대로 자기가 대학(大學) 나왔으면 대학교 나온 자기 지식(知識)대로 그렇게 본단 말입니다.
그러나 업장이 가벼운 사람들은 우리 불자님들은 업장이 다 가벼운 분들입니다. 따라서 부처님말씀 그대로 믿으셔야 됩니다. 자기 교양(敎養)은 그렇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처님께서 거짓말 하실리는 절대로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금강경(金剛經)에도 있는바와 같이 여어(如語)라.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 하시고 또 진어(眞語)라 부처님 말씀은 참다운 진리만 말씀하시고 또는 불이어(不異語)라 부처님 말씀은 그 헛된 말씀이 없단 말입니다. 또 부처님 말씀은 불광어(不迋語)라 우리 중생(衆生)을 속여서 하는 말씀이 없습니다.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정말로 온전히 그대로 인정하고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신앙(信仰)은 그래야 신앙이 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부처님 말씀에 우리가 따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의 그 좁은 소견대로 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소견을 우리가 그대로 따라야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소견을 따르는 것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입불이법문이라. 그 우주(宇宙)를 하나의 생명(生命)으로 본단 말입니다. 그렇게 보면 다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이란 분은 위대한 도인(道人)인데 그 분은 일자무식(一字無識)입니다. 그분은 공부를 전혀 안했습니다. 그러나 도(道)를 깨달아 놓고 보니까 우주(宇宙)가 훤히 보인단 말입니다. 우주가 말입니다. 우주가 훤히 하나의 생명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양반한테 법문을 들으러 수천 명이 모여 드니까 육조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여러분들 먼데서 나 같은 사람 법문을 들으러 이렇게 많이 올 것이 아니라 부처님 법문은 제일 간단하니까 꼭, 꼭 이번 한번만 듣고서 다시는 오지 마십시오. 부처님 법문은 제일 간단하고 가장 확실한 명백한 가르침인 것이니까 여러 분들이 꼭 믿어 버리면은 다시 나한테 두 번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저 같은 사람 말씀이라도 저는 제가 지어서 하는 말은 절대로 않습니다. 부처님말씀을 저는 그대로 옮김니다. 따라서 저한테 다시 안 오시더라도 부처님의 간단명료한 말씀은 꼭 그대로 신인 하시고 바른 신앙을 가지셔야 됩니다. 그러면 사실 다시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부처님 말씀은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심즉시불이라.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심작시불(心作是佛)이라, 우리 마음으로 부처를 다 이룬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란 것이 그와 같이 위대한 부처님하고 대비해서 호리도 차이가 없는 생명의 실상입니다.
달마스님께서 이조 혜가스님한테 하신 법문도 마음의 실상을 그대로 보이신 것 입니다. 이조 혜가스님이 달마스님한테 가서 스승이시여 제 마음이 괴롭습니다. 제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해소를 시켜주십시오. 그러니까 달마스님께서 그러면 그대 불안한 마음을 한번 내 놔봐라. 내놔보면 내가 그 불안한 마음을 가시게 해주마. 그래 혜가스님이 아무리 생각해도 그 불안한 마음이 어디가 있는가 아무리 찾아봐도 안보 인단 말입니다.
마음이 무슨 모양이 있습니까. 우리가 어디가 아프면은 그 아픈 마음이 어디가 있습니까. 남을 미워 하면은 미워하는 마음이 어디가 있습니까. 남을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마음이 어디가 따로 있습니까.
좋아하는 마음도 모양도 없고 남 미워하는 마음도 모양도 없고 그 똑똑한 척하는 마음도 모양도 없고 모양이 없단 말입니다. 모양이 없으면서 분명히 존재하고 또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한도 끝도 없는 모두를 구한단 말입니다.
그 아인슈타인 같은 대천재도 내내야 마음 바꿔서 천재가 되었지 자기가 무슨 참 별사람 입니까. 그런 천재적인 아인슈타인 마음하고 우리 마음하고 그러면 다를 것인가? 조금도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왜 차이가 없는 것인가? 모양이 없는 것은 이것이다 저것이다 구분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김가 마음이나 박가 마음이나 누구 마음이나 예수마음이나 또는 맹자 마음이나 마음은 다 모양이 없단 말입니다.
모양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은 똑 같은 것입니다. 모양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이 집만큼 크다, 방만큼 크다, 마음이 어디 국한되게 시리 그와 같이 크고 작은 걸로 비교할 수 없단 말입니다.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아까 여러분들 맨 첨에 입정(入定) 삼매(三昧)에 든다고 생각할 때에 ‘심(心)은 허공(虛空)과 등(等)할새’ 라고 그렇게 하셨지요. 마음은 허공 과 같을 새, 마음은 사실 허공과 똑같은 것입니다.
허공이 한도 끝도 없지 않습니까. 마음이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성자(聖者)는 한도 끝도 없는 그 마음을 그대로 마음을 온전히 열어서 한도 끝도 없는 그 마음자리를 그대로 간직한 분이 성자인 것이고 우리 중생들은 내 마음 이것은 내 몸뚱이 어디가 무슨 내 머리나 내 심장에 있겠지 마음을 열어서 자기 마음이 끝도 갓도 없이 광대무변한 사람은 지 몸뚱이도 이것도 지것이 아닙니다.
범부(凡夫)로 해서, 우리가 범부와 성자와 그런 구분을 한다고 생각할 때에 범부라는 것은 꼭 지것, 지몸, 또는 자기 집, 자기 가정만 생각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남한테 봉사(奉仕)를 하려고 남한테 베풀어 주십시오. 사회봉사(社會奉仕)를 하십시오. 그런 일을 우리가 권장하고 역설한다 하더라도 마음을 열지 못한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결국은 자기중심을 못 벗어납니다.
남한테 베풀어도 기왕 베풀어도 남 주고 자기 몫으로 조금 남겨둬야 되겠지 이렇게 돼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나 성자란 것은 조금도 주저가 없습니다. 주저가 없으니까 주린 범한테도 순간도 주저 없이 자기 몸을 몽땅 바쳐버린단 말입니다.
그 설산동자(雪山童子)가 진리(眞理)를 구하기 위해서 나찰 귀신(鬼神)한테 진리의 가르침을,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조금도 주저 없이 나뭇가지에 올라가서 나찰한테, 나찰 귀신한테 자기 몸을 던져버렸단 말입니다. 과거전생(過去前生)의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은 그런 진리를 깨닫고자 해서 조금도 주저 없이 자기 몸을 모조리 바쳐버린 그걸로 해서 12겁 동안이나, 12겁 동안을 당겨서 성불(成佛)했단 말입니다.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서 그러 는고 하면은 아까도 제 말씀마따나 자기 몸뚱이를 자기 개인적인 존재라고 생각을 하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이와 같이 모양을 나툰 것이지 이것이 꼭 무슨 어느 누구 것이라고 그런 소속이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내 몸이나 또는 그대 몸이나 자기 남편 몸이 나 내 몸이나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와 같이 사람모양을 나투었고 또 금생(今生)에 잠시간 만난 것이지 꼭 내생(來生) 가서 다시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업장(業障)이 같으면 다시 만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도 역시 그냥 또 헤어지고 맙니다. 기왕 만날라면 영원히 만나야 됩니다.
영원히 만나는 것은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가서 만나셔야 됩니다. 극락세계에서 만나는 것은 영원히 만나는 것입니다. 불이일체(不二一體)라,
우리가 업장이 같고 또 부처님 공부 잘하고 염불(念佛) 많이 하면은 그때는 일념왕생(一念往生)이라 순수(純粹)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임종(臨終) 때 죽어질 시에 순식간에 업장을 다 녹여버립니다. 그때는 우리가 극락세계 가서 초월(超越)해서 거기에서 영원(永遠)한 생명(生命)을 얻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 말씀 요지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절대로 하나를 자기 소견(所見)으로 해서 옳다고 고집을 하지 말으시고 모든 문제를 부처님 법에 비추어서 부처님 법으로 따지면은 이런 문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다시 더 어려운 말로 하면은 그 본체(本體), 본바탕 더 쉬운 말로 하면은 주체성(主體性)이라 우리 사람들이 인생관(人生觀)도 바르게 못 세우고 또는 세계관(世界觀)도 바르게 못 세우니까 함부로 덤벙거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자기 주체성이라, 주체성 이라는 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는 그냥 어느 정도 아, 소양(素養)이 좀 있으면 주체성이 있다고 보겠지요.
그러나 우리 불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정말로 본래적인 부처님 정신, 본래 부처님 성품 더 어려운 말로 하면 진여불성이라. 우리 인간의 마음이 우주(宇宙)의 참다운 실상(實相)인, 참다운 진리(眞理)인 진여불성이라. 진여불성(眞如佛性)이란 말이 우주의 참다운 실상이란 뜻입니다.
그 진여불성으로 부터서 천지우주가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냈단 말입니다. 모양을 냈지만은 그 모양도 역시 진여불성에서 왔 기 때문에 조금도 그때는 다른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저 위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바다에서 그 바람 따라서 파도가 천파만파 친다 하더라도 똑같은 물이듯이 산이나 냇이나 사람이나 모두가 다 본래의 자리 본래 근원적인 바탕자리는 다 부처기 때문에 부처한테서 나왔기 때문에 나와 있는 이 모양스러운 현상도 역시 똑같이 사실은 다 부처인 것입니다.
사람같이 태어나고 개같이 태어나고 또는 나쁜 짓도 많이 했다 하더라도 나쁜 짓을 많이 한 악인(惡人)이라 하더라도 근본(根本)바탕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다 부처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좀 좋은 일 하면 저 사람은 부처한테 더 가깝고 저 사람은 그야말로 앞으로 부처가 쉽게 될 것이고 나쁜 일 많이 한 사람은 저런 사람들은 영원히 부처가 못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로 본 근원(根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좋다 궂다 그런 것이 모두가 다 하나의 순간적인 우리 중생의 헤아림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일매지게 천지우주가 다 불교말로 하면 일미평등(一味平等)이라,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하게 모두가 다 부처뿐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부처님의 사상대로 생각하는 것이고 또는 우리의 불안의식(不安意識)을 온전히 없애는 그러한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참 그야말로 아주 좋은 단풍계절에 붉게 물들어서 얼마나 참 고운 단풍입니까. 여러분들께서 제가 허두(虛頭)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가서 구경 안하시고 이렇게 불편한 자리에 오셔서 법문 들으시는 것이 참 감사하고 대단히 여러분들 선근(善根)에 대해서 축복(祝福)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도 서울 갔다가 어제 내려오면서 봤습니다만은 정말로 서울서나 먼데서 한번 씩 오신다는 것이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정말로 아주 결심하고 마음먹고 굉장한 신심(信心)가지고 오시는 것이지 한번 씩 왔다 가시는 것이 가정적으로 보나 여러 가지 점에 있어서 그야말로 지극한 신심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오셔서 법문 들으실 때에 정말로 참 유익한 부처님 말씀 에누리 없이 그대로 말씀을 드려야 되겠다고 생각을 해도 또 말해놓고 보면은 나중에 생각해보면 좋은 말을 많이 놓쳐버리고 그렇게 자기 후회를 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역시 그 소승적(小乘的)인 생각 이것은 잠시간 부처님께서 방편(方便)으로 하신 것이고 부처님의 본뜻은 대승적(大乘的)으로 오직 그야말로 진리(眞理) 그대로 한 말씀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금강경(金剛經)을 인용해서 정말로 부처님 말씀은 사실 그대로 한 말씀입니다. 사실 그대로 말씀이란 것은 불교적인 술어(述語)로 하면은 같을 여(如)자, 말씀어(語)자, 여어(如語)라. 사실 그대로 하신 말씀이란 말입니다. 또는 참진(眞)자, 말씀어(語)자, 진어(眞語)라. 그 부처님 말씀은 진리만 꼭 그대로 말씀한단 말입니다. 또는 불이어(不異語)라. 아니불(不)자, 다를이(異)자, 말씀어(語)자, 부처님 말씀은 다른 말씀은 전혀 없습니다. 꼭 올곧은 진리 그대로 말씀이란 말입니다. 또는 불광어(不迋語)라. 아니불(不)자, 속일광(迋)자, 부처님 말씀은 절대로 우리 중생을 속여서 하는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이러한 그 불이어라 이런 것이 금강경에 나와 있습니다만은 이와 같이 부처님말씀은 역시 우리 중생의 최상의 행복을 이룬 말씀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할 때는 본바탕은 정말로 본래 다 부처라고 할지라도 인간 세상은 역시 업장(業障)많은 중생들이 사는 세계이기 때문에 역시 괴로움이 많단 말입니다.
자기가 제아무리 자기 혼자는 바르게 살고 그렇다 하더라도 옆에서 모두 다 미혹중생(迷惑衆生)이 많아 놔서 여러 가지로 혼란스럽고 또 불공정 하고 그런 사회, 특히 산업사회라는 것은 그야말로 무서운 사회가 아닙니까. 그야말로 산업입국이라, 될수록 많이 만들고 많이 소비하고 그래서 결국은 많이 쓰고 모두 다 그러는 것인데, 그 여러 가지 유행도 많고 뭣도 많고 하여튼 유행 따르다 보면 한도 끝도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렇게 그래저래 어려운 세계입니다.
어려운 세계인데 어려운 세계에 휘말리지 않고서 아까 브루노 이탈리아의 수사인 브루노같이 7년 동안이나 옥중에서 아주 그야말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을 종용을 받고 했지만은 끝끝내 자기 신념(信念)을 변치 않고서 불에 타서 죽은 그 브루노같이 우리가 부처님 신앙심(信仰心)만 굳건히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 자체가 어디가 있으나 부처님 사상 따르면은 바로 그것이 최선의 사회적인 봉사가 됩니다.
잘 모른 사람들은 사회봉사가 남한테 그냥 물질로 베풀고 남 곤란한데 가서 도와 주고 같이 일해주고 이런 것만을 봉사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출가(出家)한 스님네 같이 산중에서, 우리가 선방(禪房)에서 공부만 한다 하더라도 선방에 앉아 있으면 결국은 중생이 해놓은 음식을 우리가 먹어야 되고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 선방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남들이 해주는 것을 다 먹고 쓰고 하기 때문에 한편 생각할 때는 봉사와는 관계가 없는, 일반 중생들한테 신세만 끼치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할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어째서 그렇지 않는가 하면은 우리 생명이라 하는 것은 내 생명 네 생명 이렇게 뿔뿔히 따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이 생명이라 하는 것은 끝도 갓도 없는 바닷물같이 우주의 생명이 충만해 있습니다. 우주에너지가 충만해 있습니다. 우주에너지가 어떻게 진동(振動)하는가? 어떻게 운동하는가? 그것 따라서 전자(電子)가 생기고, 뭣 생기고, 또 그것이 결합해서 각 물질(物質)이 생기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나 생명자체는 에너지 불변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항시 그대로 영원히 존재합니다.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고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부증불감(不增不感)이라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그 생명자체는 에너지의 실질 자체는 항시 그대로 있습니다.
그대로 있어놔서 우리가 산중에서 선방에서 가만히 눈감고서 참선(參禪)하고 있더라도 자기 마음을 정화(淨化)시키고 있으면 마음을 정화시키는 그것이 바로 우주(宇宙)를 정화시킨단 말입니다.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산에서 공부하면 저 사람은 그냥 사회봉사나 사회참여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저한테 대해서도 인터넷을 통해서 어느 분이 항의를 했어요. 아, 스님께서는 깨달음만 말씀하시지 보현보살(普賢菩薩)의 행(行)은 별로 말씀은 안하신다고 말입니다. 아, 참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겠구나. 제가 생각했습니다만은 깨달음하고 사회봉사하고 그것이 둘이 아닙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 자리를 깨달아 버리면은 그때는 어느 데가 있으나 집에가 있으나 산중에 있으나 어디가 있으나 결국은 다 그 사람 마음이나 행동이나 모두가 그때는 사회적으로 봉사 한단 말입니다. 사회적으로 공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사 자기가 돈으로, 많은 돈으로 시주하고 또는 사회봉사를 한다 하더라도 마음이 저 사람은 저 사람이고 나는 나다. 이와 같이 구분세우고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은 오래도 못가요. 그것이 오래도 못가고..
불교로 말하면 그때는 유주상보시(有住相布施)라, 상을 떠나지 않는 보시란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이라. 참다운 지혜(智慧)는 반야바라밀이 참다운 지혜 아닙니까? 이것은 아까도 제가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생명(生命)이 하나라는 지혜가 이것이 반야바라밀 지혜입니다. 제법공(諸法空)인 지혜입니다.
소극적(消極的)으로 말하면 제법공이고 또는 적극적(積極的)으로 말하면 그때는 모두가 부처란 말입니다. 똑같은 자리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제법공이라 공(空)그러면 허망한 것 아닌가. 너무나 허무하지 않는가.
그러나 공이 다만 공이 아니라 그 공자리가 이른바 진여불성(眞如佛性)이란 말입니다. 진여 불성으로 충만 되어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제법이 공(空)자리입니다.
말로 하면 제법공이지만은 정말로 우리 마음을 깨달아서 마음이 자타(自他)를 떠나서 그 하나의 자리, 공 자리에 들어가 버리면 벌써 성자가 돼버린단 말입니다.
그럼 벌써 그 자리가 바로 우주의 참 진여불성이 충만(充滿)한 자리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중생이 버릇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치는 그렇다 하더라도 금방 또 자기가 속된 것에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고 집안에서 들어갔다 오면 사회적인 버릇이 여러 가지 분위기에 그냥 말려버린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공부한 분들은 제일 마음을 가다듬기 좋고 쉬운 것이 염불(念佛)입니다.
염불이 좋다는 것이 무엇 인고 하면은 우리가 본래부처이니까 당연히 또 우리가 부처를 생각해야 되겠지요.
염불이란 것은 간단히 말하면 본래부처가 본래부처인줄을 잊어버리고 있다가 부처님 가르침을 만나서 본래 부처인 줄을 알고 그래서 부처를 생각하고 부처님의 이름을 찾고 다시 부처가 돼야하는 그것이 불교란 말입니다.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생각하면 또 부처님 이름을 불러야 되겠지요.
우리가 아까도 말씀드린바 같이 우리 환경이 너무나 조잡하고 복잡하니까 우리마음을 부처한테로 귀일(歸一)을 시킬 라면은 부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주 굉장히 중요한 공부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한번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면 한번 부른 만치 우리 업장을 소멸한단 말입니다.
서산대사(西山大師) 염불송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의 할아버지라는 마명보살(馬鳴菩薩), 마명보살도 염불을 하고 대승보살의 아버지라는 용수보살(龍樹菩薩)도 염불을 했거니, 나 같은 사람이 무엇이기에 염불을 안 할 것인가. 이렇게 자기 하심(下心)을 하면서 염불을 주장하고 그렇게 하면서 염불을 하는 방식으로 해서는 심즉연불경계(心則緣佛境界)라, 우리 마음을 부처의 경계에 딱 머물게 하고 이른바 실상염불(實相念佛)을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부처님의 경계, 부처님의 경계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오직 우주 전부가 다 하나의 부처라는 경계입니다. 우리 마음을 그런 경계에 머물게 하고 구즉칭명불호(口則稱名佛號)라 입으로는 부처님의 이름을 분명히 외인단 말입니다. 속으로 생각해도 물론 염불이 됩니다. 되나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세계가 얼마나 혼란스럽습니까. 혼란스럽기 때문에 소리를 내면 그때는 우리 마음이 또 그만치 가다듬어져 온단 말입니다.
구즉칭명불호(口則稱名佛號)라 입으로는 부처님의 이름을 분명히 외이면서 그 마음으로 부처님의 경계를 생각하는 그것과 입으로 부처님을 외우는 것이 하나가 딱 되어서 염불한다고 생각할 때는 팔만사천 번뇌(煩惱)를 소멸하고 동시에 팔만사천 공덕(功德)을 성취 한다, 이렇게 말씀했단 말입니다.
지관론(止觀論)에 보면
보보성성염염(步步聲聲念念)
유재아미타불(唯在阿彌陀佛)이라.
우리 불자님들 오늘 꼭 그 구절을 외어가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보보(步步)라, 걸음보(步)자 걸음걸음, 성성(聲聲)이라 소리성(聲)자 소리소리 성성(聲聲)이라, 또는 염염(念念)이라 생각염(念)자 생각생각,
유재아미타불(唯在阿彌陀佛)이라.
오직유(唯)자, 있을재(在)자, 말입니다. 오직 아미타불(阿彌陀佛)만 그렇게 외어라 이런 뜻이란 말입니다.
보보(步步) 걸음걸음, 걸음걸음, 성성(聲聲) 소리소리, 소리소리, 염염(念念) 생각생각, 생각생각에 오직 아미타불 부처님만 외란 말입니다.
이렇게 해야 염불삼매(念佛三昧)에 들어갑니다. 염불삼매에 못 들어가면은 그때는 업장(業障)을 온전히 소멸(消滅)은 시키기가 어렵습니다.
한번 하면 한번 한만치 공덕이 있습니다. 제불(諸佛) 모든 부처님이 가호(加護)도 하고 또는 여러 선신(善神)도 지키고 여러 가지 공덕이 많이 있으나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음을 우리가 깨닫기 위해서는 조금 더 나아가서 매서운 결단(決斷)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우리 번뇌가 금생번뇌(今生煩惱) 또는 전생번뇌(前生煩惱)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번뇌를 우리 녹이기 위해서는 깊은 명상(瞑想)을 해야 됩니다. 가장 깊은 명상이 내내야 이것이 참선(參禪)이란 말입니다. 가장 고도한 그런 명상이 참선입니다.
참선이 바로 그때 삼매(三昧)입니다. 염불삼매(念佛三昧)라는 것은 염불로 해서 우리가 깊은 참선에 들어간단 말입니다.
염불로 해서 깊은 명상에 들어가야 그래야 우리 근본번뇌(根本煩惱)의 뿌리를 녹이고서 우리 마음을 깨닫는단 말입니다. 마음을 깨달아야 그래야 참다운 우리 중생들이 바로 그때는 마음을 깨닫는데서 이른바 성자(聖者)의 경계(境界)라, 모든 존재의 근본 바탕을 우리가 훤히 그야말로 참 성자의 길을 온전히 자기 스스로 그 길을 비로소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이라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업장중생이 되어서 여러 가지로 이치로 해서는 비록 느낀다 하더라도 과거 전생이나 금생에 버릇이 너무 많아서 갑자기 우리가 성자는 못됩니다.
성자가 못된다고 생각할 때는 항시 상대적으로 조금 더 낫고 더 못하고 한 차이는 있을지언정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 하는 우리 중생이 근본적(根本的)으로 구하는 영원한 참다운 행복은 얻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비록 금생에 못되면 우리가 극락 가서, 극락도 여러 층이 있습니다만 극락의 하품(下品)이나 중품(中品)이나 그런 단계에서는 아직은 온전히 번뇌를 다 여의어 버리는 다 뗀 그런 단계는 못됩니다. 상품상생(上品上生)이 되어야 참다운 깨달음의 단계란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단계가 될라면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오로지 우리 마음이 삼매에 들어야 됩니다.
삼매란 것은 여러분들이 외어두셔야 할 것이 가장 깊은 명상이 삼매입니다. 우리가 보통 명상이란 것은 지금 세간에서 여러 가지 명상법이 많이 있지만은 그런 법은, 그것은 하나의 유위적인 상대적인 하나의 마음을 다스리는 법이지 정말로 완벽한 행복을 추구하는 그런 법은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만이 영원불멸한 끄트머리까지 다 밝혀서 우리 행복(幸福)의 구경지(究竟地)라, 최상의 행복을 이루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이른바 삼매법(三昧法), 명상법(瞑想法)입니다.
따라서 다른 명상법이나 그런 법을 여러 가지 말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런 법에 우리 마음이 끌려가지를 않고서 정말로 부처님 명상법, 부처님 명상법은 다시없는 가장 쉽기도 하고 가장 효과적이고 또는 최상의 구경각(究竟覺)이라, 최상의 행복을 보장하는 명상법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바 염불(念佛)이 제일 쉽기도 하고 제일 효과적이고 금생(今生)에는 부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고 또는 모든 선신(善神)들이 우리를 지키고 말입니다. 또는 우리 중생의 모든 액운으로 부터서 우리를 막아주고 동시에 우리 몸도 마음도 그때는 안락(安樂) 행복을 느낀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일보, 한걸음 더 마음이 정화가 되면 마음도 몸도 더 가벼운 것이고 또 두 걸음 정화가 되면 더욱더 가벼운 것이고 합니다. 우리가 부처님이 되어 가면 되갈수록 우리 마음이 깊을수록 우리 몸도 마음도 쾌적하고 더욱더 가볍고 더욱더 행복스러운 것입니다.
따라서 최상의 명상법, 최상의 명상법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선법이고 우리가 불교 술어로 말하면 삼매란 말입니다.
삼매(三昧)하고 참선(參禪)하고 개념상 조금 차이는 있으나 내내야 똑같은 법입니다. 우리 마음을 바르게 하고 맑게 하고 깊게 해서 우리 본래의 자리, 본래고향(本來故鄕)자리로 가게 하는 것 이것이 부처님의 삼매법인 것이고 부처님의 참선법이란 말입니다.
그 법 가운데서 많은 법이 있지만은 화두(話頭)도 있고 또는 우리가 무슨 경(經)도 외이고 모두가 다 우리 마음을 맑히는 법입니다.
그런 법 가운데서 제일하기 쉽기에 부처님께서 말씀을 제일 많이 한 것이 염불(念佛)이란 말입니다.
이왕이수(易往易修)라 닦기쉽고 행하기 쉽고 하기 쉽단 말입니다. 금생에 좋고 또는 내생에 극락에 태어나는 것을 보장하고 말입니다.
따라서 보보성성염염(步步聲聲念念)
유재아미타불(有在阿彌陀佛)이라.
외우시겠습니까?
보보라 걸음걸음 걸음보(步)자 보보라, 성성이라 소리성(聲)자 또 두자 겹칩니다. 소리소리 염염이라 생각생각, 유재아미타불이라 오직유(唯)자 있을재(在)자 아미타불이라, 오직 아미타불(阿彌陀佛)만 외운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염불삼매(念佛三昧)에 드셔야 됩니다.
그러고 조석(朝夕)으로도 될수록 시간을 많이 내셔야 됩니다. 우리가 잘 때도 염불(念佛)을 하다가 잠들면 잠자는 동안에 꿈속에서 염불하고 있단 말입니다.
저는 어느 도반하고 같이 제가 한방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데 그 도반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인데 그 도반이 틀림없이 자고 있는데 염불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 몸에 딱 배어서, 몸 생리가 염불하게끔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공부는 그렇게 해야 삼매에 듭니다.
삼매(三昧)에 들어야 그 습기(習氣)가 녹아집니다. 습관성(習慣性)이 없어진단 말입니다. 했다 말았다 했다 말았다 하면은 안한 것 보다는 좋지만은 그것으로 해서는 큰 득력(得力)을 힘을 얻지를 못합니다.
기왕 하려면 우리가 힘을 얻고 덕(德)도 많이 보고 또 그래가지고 우리가 부처가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제일 쉬운 것 제일 쉽고 제일 행복스럽고 부처님께서 가장 말씀을 많이 하시고 이런 법으로 해서 보보성성염염(步步聲聲念念) 유재아미타불(有在阿彌陀佛)이라, 걸음걸음 소리소리 생각생각에 아미타불해서 그렇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아미타불!
20001105-성륜사 정기법회-청화대선사 설법
20001105-정안 이성도 촬영
20051112-DVD작업-본정 김영동
20080415-워드작업-주안 한동일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작업용으로 큰스님 말씀 그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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