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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제63호 성륜사 하안거결제 법회

                                <제 63 호>

* 20010508-성륜사 하안거결제 법회

*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작업용으로 큰스님 말씀 그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이왕이수(易往易修)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의 근거를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제가 간단히 우선 설명을 좀 합니다. 보리방편문은 이것은 근래에 와서 어느 분  이 갑자기 만든 그러한 수행법문(修行法門)은 아닙니다.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은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참선(參禪)으로 해서는 아주 그야말로 참선의 모든 성과를 모조리 다 합해 가지고서 하나의 경전(經典)을 아주 보배 같은 경전을 만든 그런 어른이고 또 참선에 있어서  참선의 완성자(完成者)같은 입장에 계시는 그런 분입니다.

달마(達磨)스님께서 참선으로 해서는 이쪽 중국(中國)에 가서 초조, 1조가 되어 계시지만은 육조스님같이 참선의 가지가지의 모든 구체적인 수행 법(修行法)을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달마스님께서는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 적당한 법문은 좀 하셨어도 체계 있게 참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 그런데 까지 깊은 말씀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육조스님께서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은 마치 참선의 교과서 같은 그러한 참 보배로운 경전(經典)입니다. 우리 인간성(人間性)이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 인간성이라는 문제에 관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보리방편문은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께서 하신 법문(法問)을 골자로 하고서 그리고 지금으로 부터서 한 50년 전에 입적(入寂)하신 금타(金陀)스님께서 그것을 보다 더 윤택하게 이런 윤문(潤文)식으로 해서 내놓으신 법문입니다.

따라서 그 내용에 있어서는 여러분들이 지금 읽으셔서 대체로 짐작이 되시겠지만 우리 인간의 성품(性品)이 본래로 부처다. 이런 소식은 대체로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조금 더 구체화시켜 가지고서 인간의 성품이 부처인데 그 부처란 것은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 그런 것이 또 우리가 의문이 가지 않습니까.

헌데 부처라는 속성, 부처에 들어 있는 공덕(功德)상 이런 것을 더 깊이 말씀하신 것이 이른바 삼신일불(三身一佛)이라. 단순히 부처 그러면은 부처란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부처의 공덕(功德)을 우리가 또 의심(疑心)을 품을 수가 있습니다.

마치 기독교에도 삼위일체(三位一體)라. 삼위일체하면은 이른바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성령(聖靈) 아닙니까. 기독교의 삼위일체도 그냥 하나님 그래 버리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하나님 속에 들어있는 모든 만공덕은 어떠한 것인가? 그런 것에 대해서 일반 사람들이 의심을 품을 수가 있는 것이고, 또 그 공덕이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맨 처음에 초기에 예수님이 나오실 때는 삼위일체란 그런 말이 안 나왔겠지만 그 뒤에 체계를 세우다보니까 하나님 가운데 속성이 다만 성부뿐만 아니라 성자도 있고 성령도 있어야 되겠구나. 그래서 서기 325년 니케아 공회에서 비로소 삼위일체의 학설(學說)이 정립이 되었어요.

그런데 불교(佛敎)의 삼신일불(三身一佛), 이른바 청정법신비로자나불(淸淨法身毘盧遮那佛), 원만보신노사나불(圓滿報身盧舍那佛), 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千百億化身釋迦牟尼佛), 삼신이 원래   세 부처님이  아니고서 본래 하나의 부처님 이라,

진리(眞理)라 하는 것이 부처님 따로 계시고 인간 따로 있고 자연 따로 있고 그래 버리면 이것은 진리가 못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를 하나의 체계로 포괄해야 그래야 진리가 된단 말입니다. 진리에 무엇이 빠져 버리면 이것은 완벽한 진리가 될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삼신일불에는 청정법신, 원만보신, 천백억화신, 이런 부처님뿐만 아니라 이 자연계라든가 모든 존재가 그 속에 다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불교를 아는 분들은 삼신(三身) 사지(四智)라, 삼신사지라는 정도를 좀 알아야 불교의 윤곽을 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삼신사지는 어떠한 것인가? 삼신사지란 것은 부처님한테 들어있는 만공덕상(萬功德像)이란 말입니다. 대원경지(大圓鏡智), 또 묘관찰지(妙觀察智), 평등성지(平等性智), 성소작지(成所作智), 이것은 그야말로 참 풀이하자고 들면 굉장히 난해(難解)해집니다. 다만 네 가지 공덕이 부처님의 한도 끝도 없는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다 대표해있다. 이렇게 생각 하시고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삼신사지에 대한 윤곽만 잡으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영생불멸(永生不滅)하는 영생의 자리 시간적(時間的)으로 공간적(空間的)으로 한도 끝도 없는 자리가 이른바 청정법신비로자나불, 그런 자리란 말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법신(法身)자리란 말입니다, 법신이라. 그와 같이 시공(時空)을 초월(超越)하고 인과율(因果律)을 초월한 영원의 생명자리가 이것이 청정법신비로자나불, 즉 법신 자리인 것이고,

또 원만보신노사나불은 어떠한 자리인가? 이것 은 끝도 갓도 없는 생명의 본체인 법신에 들어있는, 법신이라 할 때는 일체 존재가 거기에 다 포함이 됩니다. 우리 인간이 포함이 안 되면 그때는 부처님의 완벽성에 흠이 간단 말입니다. 부처님 그러면은 다른 것이 조금도 거기에 빠짐이 없이 모두가 다 거기에 함장(含藏)이 되어야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심리학(心理學)적으로 우리 마음이 부처 다. 이런 말씀을 많이 듣지 않습니까. 헌데 사실은 우리가 쓰는 이 마음이 전부마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잠재의식(潛在意識), 우리가 안 쓰고 있는 다시 바꾸어서 말하면 우리는 이것을 짐작을 못하지만은 우리 마음의 밑에 숨어 있는, 잠재해 있는 의식은 끝도 갓도 없이 한량(限量)이 없습니다.

우선은 지금 쓰고 있는 우리의식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식(六識)을 우리 인간은 지금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6식 밑에는 또 7식(七識) 말라식(末那識)이라고 그래서 식(識)의 보다 깊은 의식(意識)이 있어요. 그러면 말라식 이것이 또 전부인가 하면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지금  현대심리학(現代心理學)이 자꾸 발달되어 있어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유식설(唯識說)이라. 부처님께서 말씀 하신 의식에 대한 말씀을 다 못했어요. 그러니까 심리학을 공부하는 칼융 이라든가 모다 그런 위대한 심리학자도 다 부처님 가르침을 숭상(崇尙)하지 않습니까.

한데 우리의식 밑에 숨어 있는 것은 제7 말라 식이고, 말라식 이것이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의식일 것인가? 그도 아닙니다. 말라식 보다 더 깊은 식이 있단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아뢰야식이란 식이 있단 말입니다. 그럼 아뢰야식이 마지막 우리 의식의 끄트머리인가 하면은 그보다 더 깊은 곳이 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이른바 여래장(如來藏)이라. 여래장, 여래란 것은 부처 아닙니까. 우리 의식의 저 밑창에는 사실 부처가 숨어 있습니다. 부처가, 부처가 숨어 있다하면 좀 어폐가 될 수 있겠습니다만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심리학적으로 파고 들어가서 우리 마음의 저 밑에는 바로 부처님이다. 이렇게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야말로 참 놀랄 일이고 한편으로는 또 아주 그야말로 참 희망에 부풀어있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마음이 잘나고, 못나고 현상적(現象的)으로 의식차원(意識次元)에서는 천차만별(千差萬別)이 된다 하더라도 저 깊이 들어가면 결국은 차근차근 들어가서 보면은 제7 말나식이라, 제8 아뢰야식이라, 그 다음은 결국 여래장(如來藏)이라,  부처님이 숨어 있단 말입니다. 제9 암마라식(菴摩羅識)이라. 아홉번째는 암마라식인데 아주 그야말로 참  여래장(如來藏)의 청정무비(淸淨無非)한 공덕을 암마라식 그런 것이고,

또 나누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 다음에 또 열까지를 보태서 그 속에다 불식(佛識)이라. 부처불(佛)자 알식(識)자 불식이라. 이렇게도 말씀하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학자(學者)분들이라든가 불교(佛敎) 도인(道人)들도 그때그때 중생(衆生)의 그릇이 다르니까 거기에 맞추어서 복잡하게 말씀 을 많이 하신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중생(衆生)을 가르치기 위한 하나의 방편(方便)이었단 말입니다.

그나 어떻든 간에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의 본체(本體)는 바로 부처인 것이고 또 그 부처 가운데는 부처의 공덕상이 삼신일불(三身一佛)이라. 청정법신비로자나불(淸淨法身毘盧遮那佛), 원만보신노사나불(圓滿報身盧舍那佛), 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千百億化身釋迦牟尼佛)이,

삼신일불에 우리 인간의 본성(本性)뿐만 아니라 우주(宇宙)의 모두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끝도 갓도 없는 우주의 여러 가지 가능성 이런 것도 모두가 다 부처님이라는 하나의 생명체에 다 들어있는 것이고, 

또는 산하대지(山河大地) 삼라만상(森羅萬象)이라. 산이요, 냇이요, 하늘에 있는 천체요 이런 것도 모두가 다 부처님 화신공덕(化身功德)으로 나와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 (化身), 이것은 바로 일체존재(一切存在),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산이요, 냇이요, 천체 모다 하는 것이니까, 우리 인간의 생명과는 무관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은 또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만약 우리 마음을 떠나서 다른 존재가 물질이라든가, 고정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부처님 가르침이 성립이 안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부처님 가르침은 사실은 다른 물질(物質)이란 것은 다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허망하게 간주한단 말입니다. 허망하게 억지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가 허망한 것입니다. 허망한 것인데 우리 중생이 잘못 본단 말입니다.

그 과거에 도인들이나 또는 우리들 부처님 제자가 부처님 법문을 한다고 생각할 때에 제일 어렵게 걸리는 것이 뭣 인고하면은 우리 중생들은 중생의 지각(知覺) 따라서 이렇게 대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은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런데 실지로는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있지가 않은 것인데 우리 중생들의 소박한 생각으로 해서 저 산은 푸르게 저렇게 있고 미운 것은 미운 것대로 해서 별도로 미운 존재가 있는 것이고 또 예쁜 것은 예쁜 대로 별도로 예쁜 존재가 있는 것이고 우리 중생들은 중생(衆生)의 업(業)으로 비추어진 것을 본연(本然)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고 실지로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물질은 사실은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몽환포영(夢幻泡影)이란 말입니다. 몽환포영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다행이도 천만 다행이도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이 물질이 원래 있지 않다고 증명(證明)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증명하고 있는가? 물질은 분석하고 들어 가면은 저 끄트머리 알갱이가 전자(電子)요, 양자(陽子)요, 중성자(中性子)요, 모다 그래요.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그것이 항시 그대로 고유하게 있으면 물질이 있다고 보겠지요. 물질을 쪼갠 것이 알갱이가 그런 것이니까 물질이 있다고 보겠지요. 그러나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그런 것은 시시각각(時時刻刻) 변화무상(變化無常)합니다. 생겨나면 곧 소멸(消滅)됩니다.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그것은 평균 수명이 백만분의 일초도 못 됩니다. 이런 것은 물리학자(物理學者)가 다 말한 것입니다.

이런 꽃은 이대로 이렇게 보일 때 있는 것인가? 우리 중생이 봐서 중생의 때 묻은 눈으로 봐서 이와 같이 있는 것이지 물리학자가 분석적 (分析的)인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보일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주에 충만해 있는 장 에너지가 소립자화(素粒子化)되어 가지고서 그것이 적당히 모여서 이와 같이 보일 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자기 집이라든가 뭐 라든가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라. 모두가 다 유위법 속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다 허망한 것입니다.

우리 몸뚱이가 허망하듯이 우리 몸뚱이가 과거(過去)에 없다가 과거의 업장(業障) 따라서 금생(今生)에 잠시간 이와 같은 존재(存在)가 있지 않습니까. 내생(來生)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가 다행히 부처님 공부를 많이 해서 금생에 해탈(解脫)해 버리면 좋겠지만 윤회(輪廻)를 벗어나지 못 하면은 또 우리가 지은대로 가서 몸을 받습니다.

우리 생명이란 것은 무시이래(無始以來) 끝도 갓도 없이 과거로부터서 몇 천생, 몇 만생 태어나고 죽고 해오는 것이고 미래도 마찬가집니다.


그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생명의 근본인 부처님, 부처님을 법 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으로 속성을 나누어서 본 것이고,

부처님의 근본(根本) 자리가 끝도 갓도 없이 시간(時間) 공간(空間)을 떠나 있는 부처님의 바른 생명자리가 법신(法身)인 것이고,

그 속에 들어 있는 자비(慈悲)나 지혜(智慧)나 능력(能力)이나 모든 공덕(功德)이 보신(報身)인 것이고,

또 그 자리를 근거로 해가지고서 이루어지는 일체존재(一切存在), 산하대지(山河大地)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자연계 모두가 다 사실은 화신(化身)입니다.

불교란 것은 일체생명(一切生命)을 다 하나의 진리(眞理)로 포괄한단 말입니다.


결제라는 것은 우리가 부처님 지혜를 정말로 몸소 증명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결제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행사입니다. 이른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 우리 중생이 한 일 가운데서 가장 큰일이 무 엇 인가? 그것은 우리가  윤회고(輪廻苦)를, 윤회하는 우리의 업장(業障)을 녹여서 윤회를 뛰어넘어서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증명(證明)한단 말입니다.

우리 본래면목은 분명히 명명백백(明明白白)히 부처인 것인데 우리가 자기 본래면목이 부처인 것을 안다 하더라도 아는 그걸로 해서는 해결이 안 됩니다. 아는 그걸로 해서는 우리가 실험적으로 체험(體驗)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본래가 부처 아닌가. 저 사람도 밉게 보이지만 바른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가 아닐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 마음이, 우리 업장(業障)이 바꾸어져서 우리 마음이 개혁(改革)이 되어서 우리가 정작 부처가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참선(參禪)도 하고 염불(念佛)도 하고 우리 습관성(習慣性), 과거 무수생(無數生)동안에 우리가 붙여 내려오고 그때그때 잘못 살고 잘못 생각하고 하는 것이 우리 의식에 딱 젖어 있습니다.

금생(今生)에 있는 그런 번뇌(煩惱)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불교(佛敎)의 전문술어로 하면은 금생에 지은 번뇌는 분별기번뇌(分別起煩惱)라. 우리가 금생에 나와서 배우고 느끼고 이것저것 모다 쌓고 한 번뇌가 분별도 하고 해서 더 우리한테 축적이 된 번뇌가 이것이 분별기 번뇌인 것이고,

전생부터서 무수 생 동안에 우리 의식에 담겨 있는, 숨어 있는 번뇌를 가리켜서 불교 전문술어로 하면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라. 함께구(俱)자 날생(生)자 우리 생과 더불어서 묻어온 번뇌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금생에 지은 번뇌도 떼기가 어려운데 금생에 지은 번뇌만 떼어서는 성불(成佛)을 못합니다. 이치로 해서는 그런가 보다 하지만은 실지로는 우리가 부처의 자리, 영생불멸(永生不滅)한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를 증명(證明)을 못합니다. 

증명을 하려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분별기번뇌와 아울러서 과거 전생부터서 무수생 동안에 우리가 축적 해온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라. 우리 생과 더불어서 저지른 번뇌를 녹여야 한단 말입니다.

녹이는 그것이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하루 이틀에 녹여 버렸으면 얼마나 좋으리요만 그렇게 되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마음으로는, 자기 마음으로는 내가 이렇게 해야 되겠다, 그러나 경계에 부딪치면 미운 사람은 분명히 미워지고, 자기한테 좋은 사람은 또 좋아지고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 마음이란 것은 요물입니다. 참 잘 쓰면 부처고 잘못 쓰면 굉장히 지겹고 참 옹색(壅塞)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혈맥론(血脈論)에도 우리 마음이란 것이 관시변법계(寬時遍法界)요. 우리 마음을 확장을 시키고 우리 마음을 넓히고 하면은 온 세계(世界)를 다 감싼단 말입니다.  그나 그 반대로 착야불용침(窄也不容針)이로다. 우리 마음이 남을 미워한다던가, 부정적(否定的)인 것을 생각한다든가 그렇게 해서 마음이 옹졸할 때는 바늘구멍도 안 들어간단 말입니다.

우리는  자기 마음 충분히 다 짐작하시겠지요. 그 마음 좁을 때는 얼마나 옹졸합니까.

불교란 것이 마음을 넓히는 작업입니다. 한도 끝도 없이 우주 같이 끝도 갓도 없이 넓히면 그때는 성인(聖人)이란 말입니다. 성인과 범부(凡夫)가 별 신통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마음을 보다 더 우주대로, 우주의 생명으로 해서 확장을 시키는 것인가. 현실적(現實的)인 눈앞에 보이는 여러 가지 것에 경계(境界)에 부딪혀서 거기에 얽매일 것인가. 집착하고 얽매이면 그때는 범부요 마음 풀어서 본래 마음자리로 돌아가면 그때는 성인이란 말입니다.

저는 여기서 어떤 때는 한 20분이나 말씀을 해야 되겠구나 생각을 했다가도 서울서나 부산서나 오신 것을 생각하면  하찮은 그 말을  20분, 30분하고 그치기가 도저히 마음으로 허락지 않으니까 또는 40분도 하고 50분도 하고 그렇게 됩니다. 정말로 참 서울이나 부산이나 가 가지고서 한번이나 시내에서 빠져 나올려면, 빠져 나올려는 그것만도 얼마나 그것이 어려운 일입니까. 여까지 오신 우리 불자님들한테 대해서 대단히 참 감사의 합장(合掌)을 드립니다.

어떻게 해야만 우리가 그런 번뇌를 없애 버리고서 본래적인 자기 생명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 인고 하면은 우리한테는 지금 별 공덕이 없지만은 우리한테는 본래(本來)로  무량무변(無量無邊)한 만공덕(萬功德)을 다 갖추고 있다. 이렇게 확신하는 것이 굉장히 필요합니다.

우리가 뭘, 어떤 것을 얻고자 노력한 다 하더라도 자기한테 본래로 다 갖추고 있어 가지고서 노력하는 것과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을 새삼스럽게 밖에서 끌어 와서 자기 것을 만드는 것과는 굉장히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교(佛敎)의 인생관(人生觀)에서 본다고 생각을 할 때는 우리가 구하는 것이 본래로 나한테 지금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께서는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상당히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공부를 하시다가 정말로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법희선열이란 것은 진리(眞理)에 따라서 진리란 것은 만능(萬能)의 자리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진 만치 우리의 행복(幸福)도 전율(戰慄)을 느낄 정도의 우리 행복감도 더욱 더 증장(增長)이 되는 것입니다.

한데 그와 같이 공부를 하셔서 상당히 높은 경계를 그리 음미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처님, 부처님한테 가는 길을 닦아가지고서 느끼는 환희용약(歡喜勇躍)하는 그런 것은 한계(限界)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하가섭 같은 분은 그야말로 참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전수(傳受)받으신 대성자(大聖者)아닙니까. 마하가섭 같은 그런 어른도 초환희지(初歡喜地)라. 우리가 공부해 가지고서 참선(參禪)을 하나 염불을 하나 공부야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선택해서 하면 되는 것인데 공부해 가지고서 보살초지(菩薩初地), 보살초지가 초환희지입니다.

환희지라, 환희란 것은 마음이나 몸이나 몸만 좋은 것이  아니라 마음도 몸도 조금도 흠결이 없이 기쁨을 느끼는 것이 환희 아닙니까. 환희용약한단 말입니다.

환희지에 들어가는 것이 이른바 보살초지인데 환희지를 성취해야 이른바 참다운 보살이라 할 수가 있어요. 환희를 성취 못 하면은 사실은 원칙적으로 보살은 못됩니다. 우리가 보살이 될려고 애를 쓰는 것이지...,

환희지를 성취해야 그래야 이른바 나나, 너나, 모든 상을 떠난단 말입니다. 일체존재(一切存在)가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진여불성(眞如佛性)아님이 없다. 이런 자리는 보살 초지의 환희지를 성취해야 그래야 비로소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 할 때는 행복이란 것은 내가 내 스스로 나라는 존재를 귀엽게 생각하고 그래야 행복감이 있을 것인데 자기를 떠나버리는 자리에서 무슨 행복이 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으시겠지요.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자기 몸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아(我)를 미처 못 떠난 것은 불교에선 환희라고 말을 못 붙입니다. 중생(衆生)의 속적인, 상대적인 하나의 쾌락(快樂)인 것이지 환희라고 부칠 때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번뇌(煩惱)를 녹여서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生命)자리 거기에서 오는 우주(宇宙)에 본래(本來) 갖추어진 참다운 안락(安樂) 그런 것을 우리가 우리 스스로 음미를 해야 환희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헌데 마하가섭 같은 분은, 굉장히 참 그 어른께서는 아주 근엄한 분입니다. 평생 동안 그이도 부처님같이 탁발(托鉢)을 하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 검소하고 참 그야말로 자기 생활이 어떻게 검소했던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검소한 분인데 그런 것을 일일이 다 예를 들어서 말씀할 시간이 없습니다만 그런 근엄한 분도 환희지를 성취할 때는 어떻게 재미있던가 그냥 그대로 베길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 우주(宇宙)란 것은 신비부사의(神秘不思議)한 것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하늘에는 긴나라, 건달바 모다 그런 존재들이 항시 신묘(神妙)한 멜로디로 해서 음악(音樂)을 연주하고 있고 말입니다. 또는 꽃비가 항시 내리는 것입니다, 꽃비가. 꽃비도 보통 꽃비가 아니라 만다라화(曼茶羅華) 마하만다라화(摩訶曼茶羅華), 만주사화(曼珠沙華) 마하만주사화(摩訶曼珠沙華), 영생(永生)의 꽃, 영생불멸(永生不滅)한 꽃들이 쉴 새도 없이 꽃비를 내리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한 꽃들은 모두가 다 빛으로 되어 있습니다. 광명(光明)으로 되어 있단 말입니다. 하늘에서는 그와 같이 광명으로 된 꽃비가 내리고 있고 또는 모든 존재가 다 빛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자기 몸을 돌아보면 자기 몸도 빛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진정으로 깨달은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빛이 아님이 없습니다. 다 빛이란 말입니다. 꼭 무슨 천상에 올라가고 어디로 가야만이 빛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 이 자리에서 그대로!

우리 중생은 번뇌(煩惱)로 보니까 빛으로 안 보이는 것이지 정말로 투철한 안목(眼目)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영롱 무비한 빛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빛으로 보이거니 누가 밉다 좋다 또 뭣이 어떻다 그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빛으로 보이는 단계 같으면 자기란 관념(觀念)을 벌써 초월(超越)해 있단 말입니다. 자기 몸이 어디가 찌뿌드드하고, 소화도 안 되고, 또 조금 거북하고 그래야 찌푸린단 말이지 자기 몸도 그냥 개운하고 아무런 무게도 없고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인간존재라는 것이 이 욕계(欲界)에 사는 우리 정도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한도 끝도 없는 가능성이 우리에게가 있는 것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와 나와, 예수와 나와 아무런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다만 개발하고 못 개발하고 그 차이 뿐입니다.


우리 인간이 욕계번뇌(欲界煩惱)라, 욕계번뇌는 내내야 음식욕, 잠욕, 이성욕, 모다 그런 것이 욕계 번뇌 아닙니까. 욕계번뇌를 떼면은 욕계번뇌를 완전히 다 뽑아버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몸이 하늘로 뜨는 것입니다. 그나 기왕이면 하늘 로 뜨기 위해서는 음식을 좀 깨끗이 잘 먹어야 되겠지요. 그 많이 먹어서 비대하면 하늘에 뜨더라도 더디 뜨지 않겠습니까. 우리 불자님들 음식 좀 줄이셔야 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가 다 우리 공부와 관계있는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일종 (一種)위주라. 삼세제불이 하루 한 끼 자신 것도 무슨 식량이 부족하고 물질(物質)을 아끼기 위해서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많이 자실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무슨 방법을 써야 부처가 빨리 될 것인가? 그런 것을 또 말씀을 드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해서, 화두를 의단(疑端)을 품고서 공부를 하는 것도 우리가 부처가 되는 하나의 좋은 방법입니다.

또는 주문(呪文)을 외어서 티벳트인들 모양으로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하는 것도 그도 참 좋은 방법입니다.

또는 우리가 불경(佛經)을 외어서, 법화경(法 華經)을 외운다든가 또는 보문품(普門品)을 외운 다든가 금강경(金剛經)을 외운다든가 경을 외우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육조단경(六祖檀經)에 보면 육조스님께서도 여러분들이 금강경을 열심히 독송을 하면은 틀림없이 마음이 맑아져서 마음을 해탈(解脫)한다는 그런 법문(法門)도 있습니다.

비단 금강경뿐만이 아니라 다른 경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그때그때 중생의 경우에 따라서 달리 말씀 하셨지만은 핵심내용은 다 똑 같습니다.

모두가 다 인간의 욕계번뇌(欲界煩惱), 색계번뇌(色界煩惱), 무색계번뇌(無色界煩惱) 즉 삼계번뇌(三界煩惱)를 떠나서 참다운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참다운 영생해탈(永生解脫)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법문입니다.

헌데 우리같이 참선(參禪)을 주로 한 사람들은 선방(禪房)에서 오로지 공부하니까 쉬운데 재가(在家)불자님들은 참 공부하시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어떤 공부가 가장 쉬울 것인가? 가장 쉬워도 그것이 다른 것 보다 못해 버리면 쉬워도 택할 수 없겠지요.

이왕이수(易往易修)라, 이왕이수라. 쉬울이(易)자 갈왕(往)자 이왕(易往)이라, 또는 이수(易修)라, 쉬울이(易)자 닦을수(修)자, 닦기 좋고 또는 도달도 할 수가 있고 닦기 좋고 빨리 갈수가 있고 그런 방법이 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 방법이 염불(念佛)입니다. 그러니까 오로지 공부하신 분들은 아까 말씀마따나 그대로 해서 이것저것 따질 필요가 없이 자기가 공부 방법을 선택했으면 거기다가 자기 전념(專念)을 해서 나가면 되시겠지만 일반 재가 불자님들이라든가 공부하기에 어려운 처지에 있는 그런 분들은 제일로 쉽고 쉬우면서도 또 닦기도 쉽고 말입니다. 또는 도달도 빨리 할 수가 있고 그런 법이 염불이란 말입니다.

염불이란 것이 여러분들 깊게 생각을 하십시오. 왜 그런고 하면 사실은 어느 도인들치고서 염불법문을 빠뜨린 분이 한분도 없습니다.

한국도 신라(新羅)때 원효대사(元曉大師), 의상대사(義湘大師)는 다시 말할 것도 없고 또 고려(高麗)때 와서 대각국사(大覺國師), 보조국사(普照國師), 나옹대사(懶翁大師), 이조(李朝)때 와  서 서산대사(西山大師), 사명당(四溟堂), 평양대사, 그런저런 위대한 선지식들이 염불법문을 빠뜨린 분은 없습니다.

참선 공부하는 화두(話頭)를 창도(唱導)하고 역설하는 분도 역시 꼭 곁들어서 염불법문(念佛法門)을 했습니다.

보조국사 같은 어른들도 참선공부를 해서 경절문(徑截門)이라, 경절문을 말씀했지만은 또 염불요문(念佛要門)으로 해서 고구정녕하게 염불을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또는 송(宋)나라때 위대한 선지식인 영명연수선사(永明延壽禪師), 영명연수선사는 종경록(宗鏡錄) 100백권이라, 종경록 100권이니까 상당히 구질이 많지 않습니까. 종경록 100권 가운데는 조사스님들 훌륭한 분들 가르침이 거기에 다 수록이 돼 있어요. 그리고 그분은 법안종(法眼宗)이라 하는 선종(禪宗)의 삼대조사(三代祖師)입니다. 선종의, 법안종의 삼대조사이면서도 그와 같이 염불(念佛)에 대해서도 굉장히 고구정녕으로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염불을 중요시하고 말씀을 했던가? 그것은 부처님이란 것이, 지성적으로 이치가 아니지 않습니까. 부처님이란 것은 바로 우리 생명, 우리 생명(生命)의 근원적(根源的)인 뿌리 자체입니다. 또는 우리가 생각할 때는 우주(宇宙)란 것은, 우주의 도리가 하나의 논리라든가 이치로 해서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분도 있을 란지 모르겠지만은  사실은 우주 자체가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자연계(自然界)가 있어 가지고 산이 있고, 나무가 있고, 소가 있고, 또는 돌멩이가 있고 하는 것이니까 저런 것은 우리가 보는 그대로 객관적인 걸로 해서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은 이런 것은 현상적인 겉의 모습뿐일 것이고 그런 것도 내내야 파고 들어가면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아까 제가 물질을 대강 분석해서 말씀을 했듯이 물질(物質)이란 것은 강도가 제일 높은 다이아몬드라든가, 금이나 어떠한 것도 분석(分析)해놓고 보면 내내야 전자(電子), 양성자(陽性子), 중성자(中性子), 그런 것이 적당히 결합이 돼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어느 것도 모두가 다 우리 중생이 상식적으로 보는 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우주의 생명이란 것은 사람의, 우리의 각기 개별적으로 김가, 박가, 따로 있듯이 그렇게 분리돼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란 것은 하나의 원만한 생명인 것인데,

그러기에 불교(佛敎)말로 하면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이라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 중생은 현상적(現象的)으로 상만 보는 것이니까 천차만별(千差萬別)의 상으로 해서 구분이 되지만은 성자(聖者)의 깨달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근본성품(根本性品)을 본단 말입니다. 근본성품을 봅니다.

성품으로 볼 것인가? 또는 겉으로 볼 것인가? 이런 차이란 말입니다. 성자들은 성품으로 보는 것이고 우리 중생들은 겉으로 상으로 봅니다. 상(相)이란 별 상이 다 있지 않습니까. 나라는상, 너라는상, 좋다는상, 한도 끝도 없단 말입니다.

현대학문(現代學問)이란 것도 모두가 다 상(相)으로 본단 말입니다. 특히 정보화시대 (情報化時代)라는 것은, 얼마나 정보가 많습니까? 정보 과다라, 정보가 너무 많으니까 우리가 그 정보를 다 수용하다 보면 우리 마음이 안정 될 수가 없습니다. 고도의 산업사회(産業社會)가 우리의 생활을 위해서  상당히 편리하지만은 또는 각종 몹쓸 지식도 많이 생기는 것이고, 우리가 텔리비전이나 얼핏 보고 있어 놓으면 우리 인간 생활의, 우리 인간의 참다운 발전을 위해서 꼭 필요할 것인가? 필요 없는 것인가? 필요치 않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질없는 정보가 너무나 많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 저런 것을 소비를 해야 자본주의(資本主義)사회가 실행이 되기 때문에 또 생산(生産)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필요가 없는 것을, 우리는 이런 저런 정보과다, 정보가 너무 많아서 혼란 가운데 있어놔서 우리 스스로 굳건한 주장 밑에, 인생관(人生觀)밑에서 정리를 해야 됩니다.

그래야 이른바 성불(成佛)이라 하는 우리 지상과제를 성취를 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 되는 공부 가운데도 염불공부가 어째서 중요한가 하는 것을 제가 역설하고자 해서 말이 조금 옆으로 빗나갔습니다만은 사실 그와 같이 복잡한 사회에서 우리가 현재 생활 하고 있어놔서 그렁저렁한 순탄한 방법으로 해서는 우리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삼매(三昧)란 말씀은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요. 그러나 삼매가 얼마만치 중요한가는 잘 느끼시지 못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삼매란 것은 우리 불자가 꼭 어느 때 들어가더라도 거쳐야 됩니다. 삼매를 거치지 않고서 성불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매란 것은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심일경성이라. 우리 마음이 오로지 하나로 모으는 경계가 이른바 삼매란 말입니다.

어떤 경로로 들어가던지 간에 꼭 삼매를 거쳐야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부처를 성취할 수가 있습니다. 헌데 삼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 여러 가지 법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저런 명상법(瞑想法)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일반적인 명상법으로 해서는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명상법이 보다 더 부처님 사상으로 이행해 와야지 그냥 세속적인 명상법으로 해서는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왜 못 들어가는가 하면은 일반 세속적인 명상법은 아(我)를 못 떠납니다. 아(我)를, 나라는 아를 못 떠납니다. 제법공(諸法空) 도리를 그네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제법공 도리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아를 떠나야 제법공을 알겠지요. 자기라는 것을 초월할 수 있어야 삼매에 들어갑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자기의 본래면목을 깨달는단 말입니다.

그래야 할 것인데, 우리 재가(在家)불자님들이 집안에 계시면서 삼매에 들어가기가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재가불자님들 처지에서 삼매에 들어갈려고 하면은 집안에서 소리 안내고 공부도 하고 소리 내고 공부도 하고 자면서 공부도 하고 또 막 일어나자마자 공부하고 그렇게 해야 되겠지요.

그렇게 할려고 할 때는 염불공부 보다 더 하기 좋은 공부가 없습니다.

그러고  부처님은 사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의 이론(理論)이 아니라 지성적(知性的)인 어떠한 지식(知識)이 아니라 바로 생명(生命)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생명을, 부처님을 생명으로 우리가 그대로 믿고 간단 말입니다.

우리도 생명이고 또는 만중생들이 내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생명 아님이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중생들은 알고 모르고 상관이 없이 사실은 우주 생명자리를 항시 그리워하는 추구하는 흠모심이 있단 말입니다. 마음이 맑은 사람들은 갈앙(渴仰)하는 간절히 그리워하는 우리 생명의 중심을 흠모하는 마음이 더욱 더 강렬할 것이고  마음이 어두운 사람들은 그때는 별로 마음이 강하지가 않단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세속에서도 시(詩)를 쓴다거나 또는 그야말로 감성(感性)이 더 풍부한 분들은 예술적인 재량이라든가 여러 가지 그런 걸로 해서 종교심(宗敎心)도 보통은 강합니다. 위대한 시인치고서 종교심이 강하지 않은 분이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영원(永遠)의 세계(世界) 우리 생명(生命)의 본 고향(故鄕)자리, 그런 자리에 대한 동경(憧憬)이 항시 강렬하게 움직이고 있단 말입니다.

일반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物質世界)만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간절한 동경이나 흠모나 갈앙심(渴仰心)이 별로 많지가 않겠지만은 보다 깊이 생각하고 또는 마음이 예술적(藝術的)으로 그만치 수련(修練)이 돼서 마음이 그야말로 온유(溫柔)하고 이런 분들은 갈앙심도 더 강하단 말입니다.

사실은 우리 중생들은 누구나가 다 강강한 마음을 녹여야 됩니다. 우리가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춰보더라도 짐작이 되지 않습니까. 그냥 아주 버티고 있고 또 자기가 무슨 교만심(驕慢心)이나 있고 우쭐 하면은 그 얼굴이 얼마나 참 굳어버립니까. 그러나 부처님 앞에서 다 풀어버리고 모든 사람을 다 수용하고 용납하는 관용(寬容)스러운 마음을 품은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얼굴도 그냥 그야말로 참 봄바람같이 훈훈하게 보인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부처님을 우리가 생명으로 받아들여서 부처님 명호(名號)를 외우는 것이 우리가 바쁜 중에 공부를 할 때 있어서는 가장 하기 쉽고 통하기 쉽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아까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왕이수라, 닦기 쉽고 또는 깨닫기가 쉽단 말입니다.

이것도 제가 지어서 한 말이 아닙니다. 용수보살이란 제2석가, 제2석가라고 할 수 있는 그 어른께서 했단 말입니다. 용수보살은 14대 조사입니다. 조사고, 팔종(八宗)의 조사(祖師)라 모든 종파(宗派)가 다 그 어른을 이른바 아주 윗 조사로 모셨단 말입니다. 선(禪)이고, 정토(淨土)고, 염불(念佛)이고, 어떠한 것이나 용수보살을 다 조사로 받드는 그런 분입니다.

그러고 또 용수보살 보다 더 앞서서 마명대사(馬鳴大師)라, 마명스님은 이분은 12번째 분이여요. 용수보살은 14번째 조사고 마명스님은 12번째 분인데 한문자로 마명을 표현하면은 말마(馬)자 울명(鳴)자 마명입니다,

어째서 마명이라 했던가? 그 당시에 인도에는 북인도에서 카니시카 왕이라는 왕자가 있었어요. 인도북부에 가서, 한데 그 사람이 중인도를 중화인도를 점령을 했습니다. 점령을 했는데 중화인도가 하도 가난해서 뭣인가 참 배상금이라든가, 어떤 이득을 받아야 할 것인데 가져갈 것이 별로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마치 마명대사가 하도 위대하다 하니까 카니시카왕이 불심은 좀 있었든가 그러면 그대들이 전쟁에 진 배상금 대신에 마명대사 그분을 달라고 그러니까 마명대사가 그만 포로로 해서 말입니다. 배상금 대신으로 결국은 북인도로 끌려갔단 말입니다. 끌려가 놓으니까 북인도 대신들이라든가 모다 일반사람들이 지지리 전쟁해가지고서 그와 같이 많이 희생을 해서 우리가 이겼는데 하필이면 저, 뭐 중 한사람 데리고 왔냐고 말입니다. 이미 데리고 와서 말은 못하지만 불평이 많단 말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일반 대중한테 보여줘야 할 것인데, 그래서 그 마명대사를 카니시카 왕은 굉장히 숭상(崇尙)을 하기 때문에 틀림없이 무엇인가 기적적인 일이 있을 것이다고 생각을 해서 말을, 망아지를 갔다가 한 여남은 말을 마당에다 끌어다 놓고서 말입니다. 말이 제일 좋아하는 말 먹이를 주었단 말입니다. 먹이를 주고 또 그와 동시에 마명스님 보고 당신이 위대한 도사(道師)라고 하니까 저 말에 대해서 부처님 설법(說法)을 한번 해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명대사가 부처님 법문을 아주 간곡하니 말씀을 하셨단 말입니다. 사람도 결국은 참 감동시키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한데 동물을 감동시키기가 그것이 얼마나 어려울 것입니까. 신통(神通)아니면 안 되는 것이지요, 마명대사가 설법 하니까 그 말들이 자기들이 제일 좋아하는 말 먹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서 먹지 않고 눈물을 주룩 주룩 흘렸어요, 눈물을. 그래서 말마(馬)자 울명(鳴)자 말이 울었다고 그래서 마명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위대한 스승이 마명대사입니다.

그래서 이 마명대사가 지은 책에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라, 기신론. 일어날기(起)자 믿을신(信)자 대승의 믿음을 일으키는 책이란 말입니다. 여러분들 대승기신론은 꼭 보셔야합니다. 마명스님은 대승불교(大乘佛敎)의 할아버지라고 할 정도로 우리가 숭앙(崇仰)합니다. 한데 마명대사가 대승의 할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정돈데 그런 분들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염불(念佛)을 역설 강조했단 말입니다.

제2석가라고 할 수 있는 제14대 조사인 용수 보살도 염불을 창도하고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명스님, 그 마명스님도 역시 염불을 그렇게 지성으로 우리한테 권유하고 말입니다.

그러고 여러분들이 거의 다 보셔서 알으시겠습니다만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염불문으로 해서는 정토삼부경이 가장 중요한 핵심(核心) 가르침입니다. 정토삼부경의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경(阿彌陀經) 꼭 여러분들 보시기 바랍니다.

그 가운데 가면은 극락세계(極樂世界)가 얼마나 행복스러운가 말입니다. 그래서 극락세계 가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그것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극락세계란 것은 없는 세계가 아닙니다. 극락세계는 비단 저 십만억국토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衆生)이 지금 업장(業障)이 가벼워서 모든 존재(存在)의 실상(實相)을 볼 수 있는 투철한 안목(眼目)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이대로 이 자리가 바로 극락 세계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는 모두가 다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다만 중생이 자기 업장 따라서 보고 못보고 또 많이 보고 적게 보고 그 런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염불을 하는데 있어서는 꼭 염념상속(念念相續)이라 생각생각에 상속해야 됩니다.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했다말았다, 했다말았다 해서는 우리 마음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삼매(三 昧)에 들어가야 우리 범부(凡夫)가 바꾸어져서 성자(聖者)가 될 것인데, 우리 목적은 내내야 범부가 성자가 되는 것 아닙니까. 자기 혁신을 해 야 됩니다. 자기 초월(超越)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생각 생각에 끊임없이 지속을 시켜야 됩니다. 그래야 심일경성이라, 삼매에 들어간단 말입니다.

삼매에 들어가면 여러분들이 생각할 수 없는 기기묘묘한 행복이 다 거기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몸도 가벼워지고 마음도 가벼워지고 평소에 모르는 것도 알아지고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래자리가 바로 부처인데, 또는 부처는 만공덕의 자리기 때문에 부처의 자리 우리가 걸음걸음 접근되어 간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한테도 그와 같이 부처의 공덕(功德)이 하나 둘씩 차근차근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 행복 되기가 참 쉬운 것입니다. 우리 인간 존재가 원래로 행복(幸福)되기 위해서 금생(今生)에 나와서 고행(苦行)을 좀 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가 정말로 참다웁게 부처를 증명하기 위해서 금생에 우리가 이와 같이 인생고(人生苦)를 느끼면서 다행히도 부처님법 만나서 걸음걸음 지금 부처님한테 다가서고 있단 말입니다.

금생에 닦아 나가는 그것이 그야말로 참 희유(稀有)한 일입니다. 그야말로 참 희귀한 일입니다. 이런 기회를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 인생이 너무나 허무하지 않습니까. 자기라고 그래서 꼭 명년까지 건강하게 내가 꼭 버틴다. 이럴 수 없는 문제 아닙니다. 언제 갈는지 모릅니다. 꼭 바람 앞에 등불이나 똑 같습니다. 아무리 건강하다 하더라도 자기 남편이 또는 자기 아내나 자식이 금방 어떻게 될 런지 또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나한테는 무슨 불행이 당장에 오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또는 그런 것이 나쁜 것만도 아닙니다. 자기 눈앞에서 자기 부모가 돌아가시건 형제간이나 자식이 어떻게 해서 불행을 당하건 이런 것도 사실은 불행이 아닙니다. 불행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 중생은 본래로 죽음이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몸만 바꾸는 것이고 당장에 자기 형제간이나 누가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즉 그 양반 돌아가시는 것이 꼭 그 양반 위해서 손해가 아니란 말입니다.

보통은 생(生)을 한 번 옮길 때는 더 높은 차원(次元)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교통사고를 만나서 가시던 어떻게 가시던 간에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중생은 절대로 어떻게 죽어진다 하더라도 그 사람 자체를 위해서나 이 사회를 위해서나 절대로 그것이 불행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 존재가 개벽(開闢)이후에 얼마나 많은 진화(進化)를 해 왔습니까. 무수한 사람들이 죽고죽고, 나고죽고, 나고죽고 이렇게 하다가 지금 얼만치 우리가 발전됐습니까.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佛敎) 인생론으로 해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주가 앞으로 수백억년뒤에는 다 괴겁(壞劫)이라, 파괴가 됩니다. 파괴될 때는 그냥 사람이 산채로 해서 파괴 돼가지고서 무참히 죽고 그런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공부해서 저 높은 무색계(無色界)나 올라가서 편안히 지내고 그 뒤에 우주(宇宙)가 파괴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이 지금 세월이 가면은 갈수록 차근차근 이렇게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 아주 그 정보 과다시대, 혼란스럽지만은 그래도 우리 사람의 본래 성격이 바로 부처기 때문에 차근차근 또 부처님 가르침 같은 가르침으로 해서 정보를 정리를 할 것이고 말입니다. 그래서 좋은 정보만 남아진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떠한 고민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 나나 너나 누구한테 대해서나 가장 좋은 것이 우리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한테든지 자기 남편한테나 자기 아내한테나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서로 피차 격려해서 부처 쪽으로, 부처가 되어가는 쪽으로 한걸음씩 우리가 진일보(進一步)한단 말입니다. 이보다도 더 큰 선물이 없습니다.

염불(念佛)이란 것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삼매 (三昧)에 들기 위해서 일반 세속적인 생활에서는 삼매란 것은 심일경성이라, 마음이 오로지 하나로 모아지는 것인데 일반 세속적인 명상(瞑想)같은 것은 그때그때, 그때는 그야말로 참 어느정도 머리 좋기 위해서 하기도 하고 또는 몸이 더 날씬하니 예쁘기 위해서 하기도 하고 모다 하겠지요. 하나 그런 것은 하나의 유위법(有爲法)이라, 세간적(世間的)인 중생(衆生)들이 생각하는 차원(次元)에서 머무는 것이고 이것 은 해탈(解脫)의 공부가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들어와야 비로소 해탈의 공부입니다.

그래서 비록 선방(禪房)에서 재가불자님들 이 공부는 못하신다 하더라도 인역(자기) 집에서라도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 같이 염불공부, 염불공부는 지속을 시켜야 불념이념(不念而念)이라, 그래야 생각지 않아도 저절로 염불이 나온단 말입니다. 꼭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무실 때도 역시 주무실 때 염불하다가 주무시고 말입니다. 주무시면 그때는 여러분들은 스스로 잠들어서 모른다 하더라도 옆에 사람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자면서도 염불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저는 저 도반(道伴)들하고 같이 지낼 때도 봤습니다만 공부를 열심히 하고서 그냥 잠들어 놓으면 그 도반이 자는 가운데도 공부를 하고 있단 말입니다. 

잔다는 것이 굉장히 손해 아닙니까. 인생이 그야말로 짧은 것인데 자는 동안 빼버리면 얼마나 큰 손해입니까. 하기 때문에 자는 동안에 우리가 손해 안보고 공부하기 위해서는 잘 때까지, 자리에 누워서까지, 여러분들이 장좌불와(長坐不臥)는 못하시겠지요. 그러나 자리에 누워서까지 공부를 하시다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잠들어 버리면은 잠든 가운데도 공부가 됩니다. 또는 잠든 가운데 또 엉뚱한 망상(妄想)을 했다가도 일어나자마자 그냥 마음을 추스러셔 또 염불을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어 가도록까지 하면은 나중에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념이념이라, 불념이념이라. 생각지 않아도 저절로 염불이 된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바람불면은 바람소리도 염불하고 또는 시냇물이 흘러가면 시냇물 소리도 염불하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부처님의 광명(光明)이 눈앞에 훤히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없는 행복을 누리시고 또 금년 여름 공부에 어디서 공부를 하시든지 간에 꼭 우리 공부가 부처님한테 한걸음씩, 한걸음씩 나가셔서 꼭 여름동안에 본래 부처인 것을 우리가 깨닫는 것이 그렇게 사실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본래 부처인 자리를 꼭 한사코 우리가 금생(今生)에 올 여름에 증명(證明)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만 말씀 드립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20010508-성륜사 하안거결제 법회-청화대선사 설법

20010508-삼영불교음반 학무 유락재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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