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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제59호 성륜사 정기 법회

                            <제 59 호>

* 2000년 6월 4일 성륜사 정기 법회 *

   

   심즉시불(心卽是佛)


오늘 이렇게 모이신 여러분들은 정말로 참 정다웁고 그리운 고향(故鄕)사람들입니다.

우리 인간 존재라 하는 것은 그냥 우연히 이렇게 모여지고 또는 태어나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 과거무수생(過去無數生)부터서 지어내려온  인간의 이른바  업식(業識), 업이라 하는 그러한 하나의 힘 때문에 이와 같이 우리가 모여지고 헤어지고 자연계(自然界)가  이루어지고 우주(宇宙) 전체가 형성이 되고 다시 또 파괴가 되고 그러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인간의 업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업은 그것은 그냥 개업(個業)인 것이고  낱 개(個)자, 개업인 것이고, 또는 공동적인 업은 한가지 공(共)자,  공업(共業) 그럽니다.

즉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가 이루어져서, 불교(佛敎)인생관으로 하면은 우주라 하는 것은 텅텅 비어있는 그런 공겁(空劫) 으로 부터서 우주가 이루어져서 하나의 모양이 생기고 그러면은 각 존재물, 여러 가지 식물 또는 동물 나아가서 우리 인간이 거기에 생기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시 찌꺼기가, 현대적인 말로 하면은 엔트로피가 차근차근 쌓이고 쌓이면 그때는 우주가 파괴가 됩니다. 파괴가 되면 다시 그때는 우주가 텅텅 비어 버려서 물질은 없게 됩니다. 물질은 없게 된다 하드라도 인간의 업력(業力)은 거기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가지고서 또 오랜 세월이 경과가 되면 다시 세계가 이 우주가 이루어지고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생각 할 때는 굉장히 살기가 어렵지 않는가? 여러 가지 모순도 많이 있고 부조리가 있고 그렇지 않는가? 이러지만은 사실은 과거에 우리가 비교한다고 생각할 때는 굉장히 지금 살기가 참 좋은 때입니다.

저 같이 백세도 미처 못 먹었지 만은 지나온 과거를 생각해 보면 아주 어두운 그런 세계를 거쳐 왔습니다.

왜정(倭政) 때도 그 가지가지 탄압이라든가 또는 식민지에 살고 있는 우리  국민으로 해서 여러 가지 핍박이 참 심했습니다.

또 8·15해방 된 뒤에도 좌익, 우익 싸움 때문에 그런 틈바구니에서 저 같은 사람은 그 때에 젊을 때 겪은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제 고향에도 제 또래가 이른바 갑계 (甲稧)라 하는 계를 두었단 말입니다. 계를 그렇게 묻었는데 그런 계원 가운데서 6·25사변 때 반수 이상이 죽었습니다.

좌로 죽고 우로 죽고, 좌익 우익의 필요 없는 명분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와서는 가서보면 몇 사람이나 있을뚱말뚱 합니다.

그때 계를 묻을 땐 한 80명 됐는데 그걸 본다 하드라도 인간이라는 것이 그렇게 살기 어렵고 또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6·25사변 뒤에도  여러 가지 독재(獨裁)적인 그런 분들 또는 우리 스스로의 업 때문에 항시 여러 가지로 해서 모순이나  부조리나 핍박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행히 참 오늘 더구나 쾌청한 날이기 때문에 정말로 하여튼 이정도 같으면 우리 인간이 살만 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이 되고 앞으로는 더욱더 좋은 세상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한데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가 고향 사람이라 한 것은 비단 오늘 오신 여러분들한테 듣기 좋으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사실이 참 그렇습니다.

저는 틀림없이 우리는 과거 전생에도 극락(極樂)이나 천상(天上)이나 또는 우리 인간 사회나 그렇게 더불어 살다가 금생(今生)에 이렇게 또 만나게 되고 내생(來生) 가서도 틀림없이 또 천상이나 극락이나 그런데 가서 다시 그때는 영원히 만날것으로 저는 확신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한테 고향 사람들이라고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생활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인고 하면은 가장 무서운 것이 이것이 우리 인간의 이른바 무지, 무지무명(無智無明)입니다. 그 뭣이 무섭네 해도 무지무명같이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고난은 이것은 누가 준 것도 아닌 것이고 무지무명 때문에 우리 스스로 지어서 우리가  받습니다.

금생에 우리가 수명이 짧은 것이라든가 어디가 몸이 아픈 것이라든가 또는 얼굴이 못난 것이라든가 아주 그냥 얼굴 잘 나고 싶어 하겠지요. 그러나 모두가 다 이것은 우리 업으로 받습니다. 과거 전생에 우리가 잘못 맘먹고 잘못 행동하고 또는 금생에도 마찬가지고 하여튼 잘못 생각하는 그 삿된 견해, 무지무명 때문에 없을 무(無)자, 밝을 명(明)자, 우리가 밝지가 않단 말입니다. 밝아서 훤히 뭘 알면 좋은데 밝지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 못 봅니다.

바로 못 본다는 것은 사람이 대체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 내 생명의 본질은 무엇 인가? 인간 존재의 모든 바탕은 뭣인가? 이런 근원(根源)을 모른단 말입니다.

우리가 남을 미워한다는 것도 근원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미워할래야 할 수가 없습니다. 또는 남을 지나치게 사랑한다는 것도 역시 우리가 근원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적당히 좀 좋아하는 것이지 지나치게 좋아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적당히 중도(中道)를 취해서 적당히 싫어하고 좋아하는 그렇게 우리가 못 사는 것은 방금 제가 말씀마따나 그런 참다운 지혜(智慧)가 없는 무지무명 때문에 그런단 말입니다.

그럼 무지무명의 반대가 무엇인가? 반대가 이것이 이른바 참다운 지혜, 참다운 지혜인데 참다운 지혜가 바로 반야(般若)의 지혜입니다. 더 어려운 말로 하면 그때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 반야의 지혜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행이, 우리 인간 존재의 불행이 무지무명에서 왔다고 하면은 그 반대로 우리 행복이라 하는 것은 어디서 올 것인가?

이것은 뭐 뻔한 일 안되겠습니까. 참다운 지혜, 이른바 반야의 지혜란 말입니다. 우리가 반야의 지혜를 가지고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그래야 자기 개인한테나 또는 우리 사회, 이 공동 사회나 모두가 다 참다운 행복(幸福)이 온단 말입니다.

그 중국(中國) 진시황제, 진시황제는 우리가 대체로 들어서도 많이 알지 않습니까. 진시황제는 서기 2세기 전 분입니다. 전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아직 나오시기 전이지요. 그런 서기 2세기 전에 분인데 이른바 그때 아주 혼란스러운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라 하는 혼란스러운 세상을 진(秦)나라라 하는 하나의 나라로 통일(統一)을 시켰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중국 민족으로 해서는 상당히 공로가 있다고 보겠지요. 그러고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 그 유명한 만리장성,

저는 가서 보고 싶어도 한 번도 아직 못 봤습니다만 만리나 되는 그런 성을 쌓았단 말입니다. 그것은 북방민족(北方民族)을 방어(防禦)하기 위해서 쌓은 성입니다. 그러나 굉장히 규모가 크단 말입니다.

만리장성을 쌓고 또 아방궁(阿房宮)이라 하는 그런 그  야말로 굉장히 으리으리하기도 하고 참 무시무시할 정도로 큰 하나의 궁전을 지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사회나 마찬가집니다만 그때도 역시 비판세력(批判勢力)이 있었겠지요. 여기서 저기서 모다 비판이 많이 들어온 단 말입니다. 너무 돈을 많이 들여 가지고서 헛된 일을 하지 않는가? 지금 같음사 비판이 들어온다 하드라도 민주주의적(民主主義的)인 그런 원칙에 따라서  여러 가지 대의원들이 결의해서 적당히 할 일을 하겠지만 그런 때는 왕의 그야말로 독단적으로 하는 그런 때기 때문에 비판 세력을 그대로 둘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비판세력은 대체로 유식(有識)한 사람들이 되지 않겠습니까. 무식한 사람들은 비판 할 논리적(論理的)인 근거도 부족하고 여러 가지 그야말로 참 합리적(合理的)인 이론도 부족하니까 못하지만 배운 사람들은 또 그 나름대로 비판할 능력이 있어가지고서 비판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네들 비판한 세력을 없애야 정치(政治)를 자기 맘대로  할 것인데 비판세력 때문에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책도 의술서(醫術書)라든가 또는 농경(農耕)에 관한 농사나 그런 것에 관한 책이라든가 또는 점하는 책이라든가 그런 책만 내놓고서 다른 책은 유가(儒家)나 또는 도가(道家)나 그런 책은 다 태워버렸단 말입니다. 이것보고 이른바 태울 분(焚)자, 글 서(書)자, 분서(焚書)라 그럽니다.

책을 그와 같이 소중한 역사책이나 무슨 책이나 하여튼 자기를 진시황(秦始皇)을 비판할 만한 꺼리는 다 없애고자 해서 책을 태워버렸단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은 또 지독스럽게도 460명의 학자(學者)들을 몽땅 한 번에 잡아다가 굴을 파고서 다 묻어 죽여 버렸단 말입니다. 얼마나 참 무시무시한 짓입니까. 460명을 다 묻어서 죽였단  말입니다.

이것보고 갱유라, 묻을 갱(坑)자, 선비 유(儒)자, 갱유(坑儒)라 합니다.

그래서 분서갱유(焚書坑儒)라, 책을 다 태우고 또는 위대한 선비들을 갖다가 땅에다 파묻고 하는 분서갱유가 진시황의 즉 말하자면 독재의 표본으로 해서 후대인이 겨누고 있단 말입니다.

이것도 모두가 다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른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무지(無智)에서 옵니다. 무지에서,

그 왜정 때 일본(日本)사람들한테 압제 받은 것을 생각하면은 저희들은, 여러분들 젊으신 분들은 잘 모르지만은 나이 많은 분들은 대체로 생각할 것입니다. 저 같이 그래도  일본유학도 좀 해보고 한 사람들은 그 일본 가서도 식민지(植民地) 백성이라고 그래서 그네들이 굉장히 핍박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핍박당하면 당할수록  반일감정이 더 강해지겠지요. 그래서 친구들이랑 같이 모다 항일운동도 하고 했습니다만 그걸 본다 하드라도 하여튼 아까 말씀마따나 사람이 무지하지 않으면 그런 비합리적인 짓을 할 수가 없는 것인 인데 무지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은 그 반대적인 아까 말씀드린바 반야(般若)의 사상은 대체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반야의 사상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사상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무지무명 때문에 모든 존재의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를 못 한단 말입니다. 사실을 사실 대로 보는 지혜를 반야라고 하는데 또 다시 바꿔서 말하면 부처 불(佛)자, 지혜 지(智)자, 불지(佛智)라고 말합니다.

법화경(法華經)에 보면 부처님께서 금생에 세상에 나오실 때에 나오시는 서원(誓願)이 무엇인고 하면은 그 불지라, 부처님 지혜를 모든 중생한테 깨닫게 하기 위해서 나오셨단 말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은 불출세일대사인연(佛出世一大事因緣)이라. 부처님께서 금생에 나오신 것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참다운 지혜인 부처님 지혜, 불지를 또 바꿔서 말하면 반야바라밀 지혜를 일반 중생들한테 가르치기 위해서 나오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과거(過去)나 현재(現在)나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가정(家庭)도 마찬가집니다. 참다운 지혜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가정에 풍파가 생겨날 아무런 까닭이 없습니다. 무슨 단체(團體)나 우리 승가(僧家)도 마찬가집니다.

우리 승가도 그 부처님 지혜, 참다운 반야바라밀이 없으니까 이래저래 싸우는 것이지 있다고 생각할 때는 싸울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런 반야의 지혜는 쉽게 말하면 어떠한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런 것은 모두가 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하단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들으신 바와 같이 제법공(諸法空)이라, 인연(因緣)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가 다 공(空)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또는 산이 있고  두두물물(頭頭物物) 산하대지(山河大地)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만 이런 것이 우리가 보는대로 존재 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그야말로 몽환포영(夢幻泡影)이고, 꿈같고, 그림자 같고 허깨비 같단 말입니다.

불교(佛敎)를 믿는 분들로 해서 이와 같이 모두가 다 비었다하는 이 소식을 알기 위해서는 공부를 좀 많이 하셔야 됩니다. 이론적으로 한번 두번 들어봐 가지고서는 잘 느끼지를 못 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 중생의 상식 밖의 지혜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의 상식으로 생각할 때는 꼭 나 같은 것이 이렇게 존재하고 너 같은 것도 있고 미운 것은 미웁고 좋은 것은 좋고 우리 중생들은 상식만 보는 것인데 상식 그것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른바 무명(無明)이란 말입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고 또는 참말로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참말로 있는 것은 그때는 그 불지(佛智), 부처님 지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로 비추어 보는  지혜가 참답게 있는 것이고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참답게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여기 뒤에 지금 산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생각할 때는 산이 지금 한 100미터나 얼마나 높고 산에는 푸른 나무가 있다. 이렇게 보지만은 참다운 지혜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보지를 않는 것입니다.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이 안 나올 때는 그전에는 인간의 상식을 우리가 부숴버리기가 쉽지가 않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반야 600부라,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만 해도 600부라, 600부나 되는 그런 경전 (經典)이 모두가 다 제법이 공이라, 모두가 다 본래로 허망무상하다. 이런 것을 말씀했단 말입니다.

부처님 같은 대 사자후(獅子吼) 가지고도 역시 공(空)이라는 말씀을 그렇게 일반 중생이 납득이 가게시리 하시기가 어렵단 말입니다.

그러나 방금 말씀드린바 다행히도 현대물리학이 모두가 다 허망하다는 그런 자리를 지금 증명(證明)을 합니다. 우주란 것은 하나의 에너지의 파동(波動)에 불구한 것이지 사실은 결국은 우리 중생들이 상식적으로 보듯이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물질을 각 분자(分子)로 쪼개고 분자를 원자(原子)로 쪼개고 원자를 또 소립자(素粒子)로 쪼개고, 그 쪼개고 쪼개고 들어가면 그 때는 뭣이 남는가? 그 에너지라 하는 하나의 힘, 이른바 우주의 기(氣) 말입니다. ‘기’만 남는단 말입니다.

다만 우리가 보이는 것은 우리 몸뚱이도 각 원소가 적당히 상호작용(相互作用)으로 해서 합해서 이와 같이 이런 모습이 보이는 것이고 산도 마찬가지고 어느 것이나 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다이아몬드도 내내야 탄소가 적당히 합해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현대물리학은 우리가 보는 것이, 우리 인간의 육안(肉眼)으로 보는 것이 그것이 다 허  망무상(虛妄無常)한 것이다. 허망무상하다는 그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또는 제법공(諸法空)의 부처님 도리를 다행히 현대물리학이 증명을 다 해주니까 우리가 알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또 물리학적인 소양(素養)이 없어 놓으면 정말로 그럴 것인가? 그 현대 물리학이란 것이 참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힘을 내지 않습니까. 조그마한 우리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이론적(理論的)으로만 알 수 있는 하나의 광자(光子), 이 광자란 것은 그것은 이른바 전기(電氣)나 자기(磁氣)나 그런 전하(電荷)도 없습니다. 또는 그것은 진동(振動)도 않습니다. 이른바 질량(質量)도 없고 또는 전기도 자기도 없는 그런 것이 눈에도 안보이고 이론적으로만 알 수 있는 광자라 하는 그런 가운데도 하나의 광자가 가지고 있는 힘이 얼마나 큰고 하면은 일초 간에 30만km를 갈 수 있는 위대한 힘이 있단 말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조그마한 것이 그와 같은 힘이 있단 말입니다.

이 우주란 것은 어느 것이나 어디에나 광자라 하는 그런 에너지가 꽉 차있습니다. 그것은 현대물리학이 증명을 합니다. 그런 것을 적당히 충돌을 시키면 그때는 원자폭탄이나 수소폭탄이 되지 않습니까. 그 원자폭탄, 수소폭탄이 얼마나 또 무서운 힘을 냅니까.

일본 광도에 떨어진 원자폭탄 때문에 몇 십만이 한번에 죽었습니다. 몇 십만이. 그 어머니와 아들, 또 아버지와 딸, 같이 서로 어울러서 서로 부르고 서로 비명을 지르면서 죽는 모습을 지금 일본 문학들은 대체로 쓰고 있는 모양 같은데 그런 그 비참한 그런 것도 모두가 다 하나의 원자의 힘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그 원자란 것은 그와 같이 우리가, 우리 인간들은 알 수도 없는 물리학자만 알 수 있는 그런 힘으로 해서 이루어져 가지고서 원자력이라 하는 여러 가지 에너지를 거기서 내곤 한단 말입니다.

아무튼 그와 같이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모두가 다 우리 인간이 지금은 눈에 보이는 대로 있지가 않고서 사실은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우주의 기라 하는 하나의 기의 상호작용 때문에 이루어진단 말입니다.

이런 쪽에다가 너무 또 말씀을 많이 드리면 여러분들한테 소중한 시간이 너무 걸려서 이런 말씀을 줄이고 들어가겠습니다만 그러면은 모두가 다 비었으면 우리가 살 필요가 없지 않는가? 에너지만 있고 에너지가 적당히 모여서 이것저것 되었다고 생각할 때는 참, 너나 나나 분석해 보면 다 에너지뿐인 것이고 또는 제아무리 좋은 것도 에너지뿐인 것이고 미워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모다 에너지라 하는 우주의 ‘기’ 뿐이지 않는가? 이래 버리면 굉장히 허망 하겠지요. 그러면 에너지의 정체가 무엇인가?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우주의 이른바 장 에너지, 에너지의 정체가 무엇인가? 정체를 현대과학(現代科學)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잘 생각 하십시오. 현대과학은 그 정체를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에너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왜 알 수가 없냐면 측정을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측정을 말입니다. 어째 측정을 할 수가 없는가? 공간성(空間性)과 시간성(時間性)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뭣이 있다는 것은 공간성과 시간성 이 있어야 안다 할 수 있는 문제 아닙니까. 그런데 공간성과 시간성 이른바 에너지는 없기 때문에 어찌 측정(測定)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에너지를 알 수 있는 것은 과학자(科學者)가 아무리 몸부림 쳐도 하나의 가정뿐인 것이지 도저히 발견할 수 없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자(聖者)의 가르침뿐입니다.

공자(孔子)나 또 예수님이나 또는 석가님이나 말입니다. 그런 성자만은 성자들은 그런 형체(形體)가 없는 시간성 공간성이 없다 하드라도 순수(純粹)정신으로 해서 순수정신인 맑은 식(識)으로 해서 본단 말입니다.

그 마태복음서에도 이런 대목이 있어요. ‘마음이 맑은 자는 행복할 지니 그들은 하느님을 볼 수 있느니라’  우리 마음이 청정하면은 과학적으로 볼 수 없는 우주의 순수한 생명자리, 그 자리를 훤히 본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절대로 우리 스스로 아는 것 가지고서 자만한다거나 그것 가지고서 고집을 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아까 제가 얼핏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자의 가르침은 다 똑같습니다. 표현만 차이가 난단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성자란 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대 물리학이, 이렇게 고도로 발달된 현대물리학이 도저히 볼 수 없는 우주의 순수한 에너지의 정체를 그대로 정신적으로 감득해 본단 말입니다. 이른바 신비적직관(神秘的直觀)이라, 이것보고 철학적(哲學的) 술어로 말하면 신비적직관 그럽니다. 신비적직관으로 본단 말입니다.

참선이란 것은 뭣 때문에 하는 것인가? 참선은 이것은 허튼 허망한 것에 걸려있는 허망한 것에 집착해 있는 우리 마음을 다 풀어버리고서 본래의 마음자리, 본래의 순수한 마음자리로 간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할 일은 무엇인가? 인간의 할 일도 그러니까 훤합니다.  무명을 떠나서 참다운, 참다운 깨달음으로 간단 말입니다. 참다운 깨달음은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 번뇌, 그 모양에  사로잡혀서 모양보고 참말로 있다고 생각하고 모양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 우리가 부숴버리고서 모양을 떠나버린 이른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그런 참다운 생명(生命)을 얻는단 말입니다.

우리 범부(凡夫)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양만 가지고 상만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상만 말입니다. 상만 있다고 생각 하고 거기에 딱 우리 마음이 구속되기 때문에 모양이 없는 그 자리는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지금 모양이 있습니까. 우리 마음은 모양이 없습니다. 부처님이나 하나님은 지금 모양이 있습니까. 그도 없습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한테 우리 인간 존재에 대해서 가장 귀중한 그런 선물이 무엇인가? 가장 귀중한 가르침이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마음이.

우리 마음도 모양이 없잖습니까. 모양이 없다는 것은 어느 공간 속에 제한돼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모양이 없다는 것은 천지우주(天地宇宙)에 두루해 있다는 말이나 같습니다. 우리 마음도 모양도 없고 또 부처님도 모양이 없단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하나의 역사적으로 나오셔서 닦아서 성인이 되어서 비로소 우주의 도리를 아신 분이란 말입니다. 다른 도인(道人)도 사실 다 마찬가집니다. 다만 표현만 다르고 그때그때 역사적인 발달과정 따라서 조금 다르게 표현된 것이지 내내야 우리가 철학적(哲學的)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그렇습니다. 공자나 예수님이나 석가님이나 다 닦아가지고서 마음이 청정해서 우주의 도리와 하나가 됐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바꿔서 말하면 사실은 예수님이나 공자님이나 우리 석가모니나 모두가 다 우주와 하나가 돼버렸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자리에서 보면 다 부처님  아님이 없고 하나님 아님이 없습니다.

제가 아직 지금 본론(本論)에 안 들어갔습니다. 본론에 안 들어가서 너무 그냥 서론(序論)이 길어지면 지리하실 것이고 저도 그렇고 해서 본론에 들어가겠습니다.

그 중요한 문제가 우리가 어떻게 가장 쉽게 생명의 근본 자리인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이 문제가 제일 크지 않습니까.

제가 여기서 몇 시간 동안 얘기 해 봐도 무슨 이것저것 제가 주워 외인 것을 갖다 얘기 해봐도 그것은 하나의 참고 밖에 안 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우리가 성불(成佛)할 것인가 말입니다. 즉 이 문제 단 말입니다.

성불 하는 것, 부처가 되는 것, 영원한 도리와 하나가 되는 것, 이것보다도 더 중요한 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석가모니께서 우리한테 주신 가장 귀중한  선물이 무엇인고 하면은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란 가르침입니다.

그러면은 지금 선방에서 우리 스님네가 참선을 하고 계십니다만 참선은 뭣 때문에 하는 것인가? 참선은 이것은 다른 자질구레한 이론들은 거기다가 마음을 두면은 가장 소중한 우리 마음이 부처라는 도리를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복잡한 것은 다 그만 두고서 그냥 비약적(飛躍的)으로 마음이 바로 부처라, 마음이 바로 부처기 때문에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마음 깨달아야 되겠지요.

우리가 생각할 때는 석가모니 같은 마음이나 공자 같은 마음이나 예수님 같은 마음은 바로 마음이 부처라 해도 좋지만은 우리같이 더러는 이상한 생각도 하고 모다 그런 별 보잘것없는 마음이 어떻게  부처가 될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중생 차원에서 봐서 그런 것이지 본래의 자리,

불교는 본래(本來)란 말씀을 굉장히 소중 하니 여깁니다. 본래의 자리. 본래 생긴 대로, 본래 실존(實存)대로 즉 실상(實相)대로 얘기하면은 잘난 사람 마음이나 도둑놈 마음이나 석가모니 마음이나 똑같단 말입니다.

깨달아서, 깨닫고 난 뒤에가 아니라 깨닫기 전에도 역시 지금도 이 가운데는 상당히 공부도 많이 하고 또는 학식도 높으신 석학들도 많이 계시고 또는 정히 하여튼 별로 그렇게 신앙적(信仰的)으로 탐구 하지 않는 그런 분들도 계시고 그렇게 그러시겠지요. 그러나 그 분들 마음이 겉에 뜬 그런 마음은 천차만별이 되겠지만 밑에 바탕 이른바 성품(性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똑 같습니다.

참다운 성품이 불교에서는 불성(佛性)그 래요. 불성이라,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아닙니까. 또는 우주를 말 할 때는 법 법(法)자, 성품,성(性)자 법성(法性) 그럽니다.

이것도 표현만 차이가 있을 것이지 우리 마음의 본성인 불성이나, 또는 우주의 근본 바탕인 법성이나 똑같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인위적으로 그때그때 편의 따라서 이루어진 이름 때문에 자꾸만 걸린단 말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꼭 그 이름 때문에 허망한 그런 그야말로 가명(假名)이라 가짜 이름 때문에 걸려서는 안 됩니다.

김 아무개 박 아무개도 모두가 본래 타고 나온 이름이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은 다 가명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가명이나 가상(假相)을 떠나서, 철학(哲學)이나 종교(宗敎)를 공부 할 때는 될수록 가명가상을 떠나야 됩니다. 이른바 쉬운 말로 하면은 상을 떠난, 상을 없앤단 말입니다.

그러게 금강경(金剛經)에도 아상(我相)이라, 나라는 상, 인상이라 너라는 상 또는 중생이라, 본래에서 보면 결국  다 같은 똑같은 하나의 진리 존재인데 이것저것 우리가 하나의 것을 설정해 가지고서 거기다가 우리 마음을 잡아맨단 말입니다.

그러니 중생상이라 또는 수명도, 우리 목숨도 역시 본래 길고 짧은 그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조금 어렵게 들어갑니다만 원래 우리가 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시간성 공간성이 없기 때문에 사실은 수명이 짧다 길다 한 것도 이것은 없단 말입니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불교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생사(生死)가 없다고 하지요. 왜 그런고 하면은 원래 우리 생명이라 하는 것이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낳고 죽는 것도 역시 우리가 모양만 각 물질로 이루어진 허깨비 같은 모양만 없어지고 있어지고 보이고 안보이고 하는 것이지 생명 자체는 본래 죽엄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불생불멸이라. 낳을 것도 없고 죽을 것도 없단 말입니다.

이런 도리가 염불(念佛)도 많이 하고 참선도 많이 하고 하면은 그때는 저절로 마음이 맑아지는 정도에 따라서 차근차근 더 선명해 집니다.

그러기에 경에도 구구순숙(久久純熟)이라, 구구순숙, 생각 생각에 오랫동안 진리를 지향해 닦다 보면 아주 순수하게 닦다 보면 그때는 자연내외타성일편(自然內外打成一片)이라. 밖에 보이는 것이나 우리 마음이나 타성일편이라. 모두가 다 하나가 돼버린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 얼마나 분열돼 있습니까. 너 따로 나 따로 이것 따로 저것 따로 짧다 길다 여러 가지로 분열돼 있지만은 우리 마음이 순수화 되면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겉으로 집착한 모든 것이 다 하나가 돼버린단 말입니다.

하나가 돼버린 그런 정도가 돼야 참다운 자비심(慈悲心)이 나옵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그런 관념적(觀念的)으로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중생의 나쁜 버릇 때문에 꼭 나한테는 좋게 해주고 또 나 아닌 사람한테는 그때는 소홀히 대해진단 말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나와 남이 원래 둘이 아니다. 이런 것이 차근차근 더 확신이 깊어 지면은 처음에는 확신이 깊어지지 않겠지요.

그러나 구구순숙이라. 오래 구(久)자, 오래 구(久)자 오래 오래 우리 마음이 하나의 진리로 해서 이렇게 딱 모아지다 보면 그때는 차근차근 나와 남의 관념(觀念)이 다 흐려지고 말입니다. 나와 남의 관념이 흐려지면 그때는 그에 정비례해서 우리 자비심이 생겨납니다.

누구한테 보시(布施)를 많이 해라, 또는 사회적으로 희사를 많이 해라. 그런 말 저런 말 많이 하지만은 그 말로 해서 그것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음이 그도 어느 정도 맑아져야 되는 것이지 억지로 시켜놓으면 그것이 그땐 위선(僞善)이 되고 만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 상이 없이 해야 위선이 안 되는 것이지 상이 있는 것은 항시 그때는 해도 위선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불(成佛)하기 위해서 하는 법은 여러 가지가 많이 있잖습니까. 그 참선(參禪)하는 법이나 또는 기타 주문(呪文)을 외이는 법이나 또는 경(經)을 베끼는 법이나 여러 가지 법이 있습니다.

아무튼 모두가 다 요체(要諦)는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 마음을 하나로 통일(統一)시켜서 통일된 염력(念力)이라.

염력이라 하는 것은 진리(眞理)에 대해서 거기다가 우리 마음을 모은 이른바 집중력(集中力)이란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涅槃) 들으실 때에 경이 이것이 유교경(遺敎經)이라. 그것은 짤막한 경입니다만 부처님께서 마지막 설법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경이지요. 거가서 이런 말씀이 있어요.

염력강고(念力强故) 라. 염력이 하나의 진리에다가 마음을 딱 붙여 가지고서 생각 생각에 변치 않는 그 마음, 염력이 강한 고로, 염력이 강하고 오욕적중(五欲敵中) 불위소해(不爲所害)라,

오욕을 우리가 탐심(貪心)을 내고 진심(嗔心)을 내고 남을 미워하고 또는 재물에 대해서 욕심을 내고 감투에 욕심을 내고 그런 여러 가지 인간적인 욕망들이 오욕인데 그것이 오욕적중이라. 적어도 진리를 배우는 사람들은 그런 오욕을 원수같이 봐야 됩니다. 사실 그것 때문에 그 오욕 때문에 우리가  생각을 바로 못 하고 나쁜 행업(行業)을 지어서 고를 받으니까 말입니다.

혹업고(惑業苦)라. 우리가 무명(無明) 때문에 업(業)을 짓고 업 때문에 고(苦)를 받는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업을 짓는 그런 원인은 무엇인가? 내내야 우리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무명심(無明心) 때문에 결국은 바로 못 보는 것인데 우리 마음을 한가지 진리에다 딱 붙여가지고서 생각 생각에 힘을 모으면 그때는 차근차근 염력이 강해집니다. 염력이 강해지면 그때는 오욕적중불위소해라. 그 오욕이라 하는 재물욕(財物慾), 명예욕(名譽慾), 자기 생명욕(生命慾) 그런 욕심의 원수 가운데 있다 하드라도 우리 불자님들은 꼭 그런 욕심이나 우리가 세간적으로 보통 생각하는 상에 대한 것을 모두가 다 원수같이 봐야 됩니다.

그런 오욕의 욕심 그런 원수 가운데 있다 하드라도 불위소해라. 어떻게 해치지를 못 한단 말입니다.

수행이 많이 된 스님 네한테 가서 당신한테 무슨 감투를 줄 테니까 써라 하면 쓰겠습니까.

중국에 장자(莊子)가 있습니다. 장자는 노자(老子)의 제자 아닙니까. 장자도 살기가 굉장히 아주 구차했습니다. 구차해서 그 나라에서 와서 사람이 똑똑할 뿐만 아니라 총명하고 또 아주 경륜이 밝으니까 장자를 참 등용을 시킬라고 장자한테 와서 재상을 줄 터이니 왕자 신분에 와서 재상을 줄 터이니 가셔서 재상이 되시라고 그러니까 껄껄 웃으시면서 나는 하루에 설사 한끼 먹고 죽을 먹고 산다 하드라도 나는 왕자의 녹을 먹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역시 위대한 사람들은 그런 것에 대해서 아무런 흥미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그런 것 때문에 가장 소중한 일을 할 수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가장 소중한 일은 우리 마음을 닦아서 본래 우리 마음자리는 마음자리가 이것이 불교로 말하면  불성(佛性)이고 또 기독교로 말하면 그때는 하나님 되지 않겠습니까. 그 자리까지 갈려는 것이 우리 할 일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구복(口腹)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 입을 채우고 창자를 채우려고 또는 부당한 욕망을 위해서 뭣 때문에 가서 재상은 될 것인가? 이렇게 해서 거절했단 말입니다.

요새는 국회의원 되기 위해서라도 얼마나 참 경합이 심합니까. 그걸 생각하면은 그 벌써 2000년 전 이상 분들인데 그런 분들이 그렇게 청렴하게 했다고 생각할 때에 굉장히 참 소중한 위대한 분들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참 수행할 때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런 저런 여러 가지 그런 상을 떠나야 쓰고 오직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공부 할 것인데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마음을 가장 잘 모으는 그런 방법이 될 것인가? 이 문제가 또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마음을 우리 중생들은 그 흩어질 산(散)자, 마음 심(心)자, 산심(散心)이라. 이른바 산란한 마음을 도저히 잠재우기가 어렵습니다. 온전히 산란한 마음 산심을 잠재웠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성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중생심을 완전히 끊어 버리기 전에는 산란한 마음을 우리가 이길 수가 없단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가 이길 것인가? 그것이 여러분들이 지금 공부하시는 그런 방법입니다.

그야말로 참 주문(呪文)도 외이고  경(經)도 쓰고 또는 참선(參禪)도 하고 모두가 다 우리 마음을 영원적인 진리에다가 딱 붙여서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서 그 자리를 생각 생각에, 생각 생각에  간단이 없이, 끊임없이 그 자리에다가 우리 마음을 집중을 시켜 나간단 말입니다.

맨 처음에는 우리 버릇이 별로 좋지가 않기 때문에 잘 안됩니다. 그것이 그래서 참선(參禪)도 하다 보면은 맨 처음에 들어온 사람들은 자꾸만 지금까지 버릇이 된 그런 산란한 마음 때문에 이른바 상 때문에 걸려서 공부가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러면 억지로 앉으면 그때는 기(氣)가 올라가 가지고서 상기(上氣)가 되어서 병나고 하지요.

따라서 우리 재가 불자님들이 그렇게 어려운 공부는 하시기가 좀 곤란스럽지 않습니까. 선방에 공부하는 것도 우리가 밖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쉽지만은 하루에 그렇게 몇 시간씩 한 여남은 시간씩 앉아서 지내는 것이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누구 자기 무슨 어머니가 계시는 것도 아닌 것이고 또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말입니다. 오직 그냥 외로운 데서 그렇게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재가 불자님들은 그 선방(禪房)에서나 산중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을 상당히 생각을 많이 해서 도와주시기도 하고 동정을 좀 하셔야 됩니다.

제일 쉬운 방법이 무엇인고 하면은 종교가 다 거의 공통이 됩니다. 공통이. 기독교도 ‘오, 주여!’ 하고 ‘하느님이시여!’ 하지 않습니까.

역시 그 표현은 좀 다르다 하더라도 불교도 그와 거의 다 같습니다. 표현만 차이가 있지 말입니다.

오직 부처님의, 부처님의 이름을 외인단 말입니다. 왜 그냥 가만히 있어놓으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금생(今生)에도 어려서 부터서 가지가지의 여러 가지 업을 많이 지어놔서 그 업 때문에 공부가 어디로 그냥 간곳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이름을 외는 것은 그래도 하면 좀 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한 시간도 염주(念珠)를 헤아리면서 할 수도 있고 또는 염주 없이도 할 수가 있고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이름을 외이는 이른바 염불(念佛)이 제일 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도 공부하는 수행법에 관해서 염불 말씀을 제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염불 그러면은 잘 모르는 사람들은  염불은 그냥 무식한 사람들이나 하고 우리 노인네나 하는 것이지  유식한 사람들이나 현대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염불 할 것인가. 이렇게 쉽게 생각한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염불도 염불의 차원(次元)이 있단 말입니다. 그냥 덮어놓고서 부처님 이름만 외이는 그런 염불도 있습니다.

이런가 하면은 우리 마음이 산란스러운 것이니까 산란스러운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부처님 얼굴같이 원만덕상 (圓滿德相)이 없지 않습니까. 부처님 얼굴은 삼십이대인상(三十二大人相)이라, 눈이나 코나 입이나 모두가 다 아주 완전한 상호란 말입니다.

부처님 얼굴이 왜 그렇게 태어났는가 하면은 부처님은 무량(無量)세월 동안에 상을 떠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때그때 몸을 몇 번이나 몇 천 번 바치고 했단 말입니다.

우리가 팔상록(八相錄) 보면은 추녀개용(醜女改容)이라. 추녀개용. 추녀는 무엇인고 하면은 더러울 추(醜)자, 여자라 하는 녀(女)자 말입니다. 그 추녀가 개용이라. 고칠 개(改)자, 얼굴 용(容)자, 못생긴 추녀가 얼굴을 다시 아주 예쁘게 고쳤단 말입니다. 그런 것이 팔상록에가 있습니다. 추녀개용이라.

어떻게 해서 한 번 태어난 사람이 얼굴이 그렇게 예뻐질 수가 있는 것인가? 분명히 그것은 있습니다. 있으니까 부처님께서도  말씀을 하시겠지요.

그 파사익 왕자의 딸이 있는데 그 왕 딸이니까 그야말로 참 귀한 딸 아닙니까. 그런데 굉장히 얼굴이 못생겼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대신들이 와도 통 보이지도 않고 말입니다. 딱 그냥 어떻게 유폐(幽閉)해 가지고 숨겨서 저녁에 만난단 말입니다. 그러나 어려서는 모르거니와 그렇게 과년이 되어서 결혼하게  됐으니까 어떻게 참 그야말로 염려가 더 크겠지요. 왕자로 해서는. 그러나 왕자니까 대신 아들 가운데서 제일 구차한 사람, 대신 아들도 부자는 이놈이 아상(我相)이 좀 있을 것이고 하기 때문에 거부할지 모르니까 제일 구차한 사람한테 억지로 공주를 맡겼단 말입니다.

그렇게 공주는 결혼식 때도 얼굴이 하도 못생겨 놓으니까 얼굴도 안 내놓고 말입니다. 비밀로 해가지고서 꼭 자기 방 하나 만들어 가지고 거기다가 유폐를 시켰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새아씨 마음이 얼마나 참 고독하고 슬프겠습니까. 그 귀한 공주인데도 그렇게 하니까 말입니다.

다행히도 부처님 세상이니까, 또 자기 아버지인 파사익왕은 부처님한테 굉장히 잘 한 분입니다. 아주 독실하게 부처님을 신봉(信奉)한 분이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이 어떤 분이란 것을 자기 딸도 들어서 알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은 그야말로 참 모두를 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부처님한테 내가 상의해야 되겠구나. 그래서 하여튼 자기 온 힘을 다해서 부처님한테 기원제(祈願祭)를 드렸단 말입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저는 과거세(過去世) 무슨 죄로 금생에 이와 같이 얼굴이 참 못나게 생겼습니까. 그야말로 참 죽고 싶을 정도가 됐겠지요. 그러니까 하여튼 우리가 같은 기원도 죽을 정도로 간절할 때에 그런 기원은 굉장히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나쁜 짓을 많이 해가지고서 죽을 때 그때는 영락없이 삼악도에 가야 되겠지요. 그러나 죽을 임시에, 나쁜 짓을 많이 했지만은 죽을 임시에  선지식 만나서 정말 지성으로, 지성으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한번만 한다고 생각할 때에 한번 한 공덕(功德)으로 해서 지옥(地獄)에 안 가고서 극락세계(極樂世界)에 태어난단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나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그러는가보다. 생각 할란가 모르겠지 만은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란 것이 본래로 부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형상이 없는 부처기 때문에 형상(形相)이 없다는 것은 사실은 오염(汚染)이 안 됩니다. 모양이 있어야 자취가 있어야 그래야 오염되고 말고 하겠지요. 본래 우리 마음은 자취가 없는 하나의 부처와 똑같은 생명 자체기 때문에 오염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래놔서 우리가 사무치게 기원드릴 때는 그때는 우리 마음이 비약적으로 맑아온단 말입니다.

맑아지면 우리 몸이라 하는 것은 결국 하나의 우리 마음의 형상에 불과합니다. 과거전생(過去前生)에 어떻게 살았든가? 우리 업 따라서 금생에 우리가 몸을 받는단 말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의 삼십이대인상, 부처님의 원만덕상(圓滿德相)은 우연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과거세에 무수한 동안에 이렇게 저렇게 중생한테 보시하고 말입니다. 그때그때 남한테 듣기 싫은 말 않고 우리가 남한테 듣기 싫은 말 할 때에 거울로 자기 얼굴을 봐 보십시오. 얼마나 추한가 말입니다.

그래서 사무치는 마음으로 파사익 왕자의 못난 딸이 부처님한테 기원 드리니까 부처님한테 기원 드리는 그 공덕(功德)으로 해서 그렇게 못생긴 얼굴이 모양을 바꾸어서 아주 정말로 참 아름다운 얼굴로 해서 바꿔졌단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추녀개용입니다.

헌데 사실 참 그야말로 우리가 염불(念佛)할 때 있어서도 부처님 이름만 외일 때 하는 염불도 있고, 또 그런가 하면은 부처님의 원만상, 법당에다 모시고 모다 여기도 뒤에 가 부처님 화상이 있잖습니까만 부처님의 그런 원만한 상호를 우리가 관찰하면서 말입니다. 관조(觀照)하면서 염불하는 것과

또 한 가지는 뭣인가 하면은 부처님이라 하는 것은 끝도 갓도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우주에 끝도 갓도 없이 가득 차 있는 하나의 생명이다. 따라서 그러한 부처님의 생명을 우리가 상상하면서 하는 염불은 이른바 실상염불(實相念佛)입니다. 실상염불이라. 우주의 참다운 도리를 생각한단 말입니다. 다시 바꿔서 말 하면은 우주(宇宙)의 근본(根本)바탕, 근본바탕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른바 불성(佛性)이고 또는 법성(法性)이고 합니다. 그래서 불성이나 법성이나 또는 보리나  열반(涅槃)이나 다 같은 뜻입니다.

그때그때 편의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달리 부를 뿐인 것이지 불성이나 법성이나 또는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진여(眞如)나 또는 일자(一者)나 한 일(一)자, 놈 자(者)자, 일자나 다 같은 뜻이란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고구정녕으로 이 사람한테는 이렇게 가르치고 저 사람한테는 저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그 편의에 따라서 약간 차이가 있을 뿐인 것이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래생명(本來生命)자리로 돌아가는 본래생명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그러한 것은 다 똑같습니다.

하여튼 우주의 근본 생명 이것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인 것이고 진리(眞理)로 말하면 진여(眞如)고 또 생명으로 말하면 그때는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불성을 찾는 것이 우리 인간이 해야 될 가장 중요한 일인 것인데 찾는 방법이 여러 가지 방법이 많이 있으나 특히 우리 재가불자님들은 부처님의 이름을 외이는 염불(念佛)공부가 제일하기가 쉽단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슨 이름, 무슨 이름 무슨 명사가 있고 무슨 개념이 있고  다 그렇지만은 그런 모든 관념이나 개념 가운데 가장 귀하고 가장 무섭고 가장 자비스러운 이름이 부처님 이름입니다.

부처님 이름은 여러 가지 많이 있지만은 포괄적으로 말하면 내내야 가장 쉬운 아미타불(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아닙니까. 나무를 보태서 나무아미타불! 해도 좋고 또는 나무를 보태지 않고서 그냥 아미타불! 해도 똑 같습니다. 아미타불해도.

우리 중생의 그 이름들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때그때 자기 부모가 짓던가 작명가(作名家)가 짓던가 그래서 박아무개, 김아무개 하지만은 부처님 이름은 우리 중생견해(衆生見解)로 짓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무량공덕(無量功德)이 거기에 깃들어 있어 놔서 무량공덕을 다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말로 하면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라, 명호부사의라. 이름자체가 부사의한 공덕이 있단 말입니다.

불자님들 쉽게 생각을 말으십시오. 명호부사의라. 부처님 명호는 우리사람만 두려워하고 좋아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천상인간 이나 귀신이나 신장이나 다 좋아하고 다 두려워합니다. 우리가 어머니나 아버지, 아버지 부르고 어머니 어머니만 부른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얼마나 더욱더 그리워지고 그렇게 거기에 마음이 가까워지고 하지 않겠습니까.

한데 하물며 내 생명(生命)의 근본(根本)자리 내 마음의 근본자리가 바로 부처고 또는 우주(宇宙)의 생명자리가 바로 부처기 때문에 부처의 이름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냥 보통 이름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우주의 진리가 거기에 담아 있도록 지은 이름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명호부사의라, 이름 자체가 부사의한 공덕이 있단 말입니다. 한번 외이면 외인만치 우리의 업장(業障)이 녹아진단 말입니다.

우리가 나는 업장이 없지 않는가. 내가 무슨 금생(今生)에 나와서 큰 죄도 안 짓고 무슨 업장이 있는가 하지만은 우리 중생들은 사실은 업장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중생인 한에는 지금 업장으로 꽁꽁 묶여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공부를 하면은 그 업장 때문에 분별시비(分別是非)라든가 여러 가지 망상(妄想)때문에 우리가 공부가 하기가 어려워요. 그것이.

더구나 집안일은 또 봐야 되고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재가 불자님들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일 쉬운 공부인 동시에 사실 은 제일 속빠른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경(佛經)에서 이왕이수(易往易修)라.

이왕이수(易往易修). 쉬울 이(易)자, 갈왕(往)자 말입니다. 또는 쉬울 이(易)자, 닦을 수(修)자. 닦기도 쉽고  또 성취가 쉽단 말입니다.

모든 존재의 근본 이름자리 또는 그것이 바로 따지고 보면 내 스스로의 이름입니다. 김아무개, 박아무개 그것은 그때그때 편의에 따라서 지어 붙인 하나의 가명에 불과하고 참다운 진짜 이름은 결국은 내내야 아까 말씀드린바 우리 마음이 본래 부처인지라. 우리 마음이 결국은 생명 아닙니까. 따라서 그 마음자리 이름인 부처님 이름이 바로 내 이름이란 말입니다. 

어느 누구나가 다 자기 참 이름은 바로 부처님 이름이기 때문에 내가 바로 아미타불이라. 불교에서 자성미타(自性彌陀)라, 자성미타. 내 본래가 바로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나 같은 것이 어떻게 아미타불일 것인가? 이렇게 생각을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 생각인 것이고 본래로,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에는 내가 설사 무슨 살인죄를 범했다 하드라도 죄란 것은 모양이 없습니다.

업은 있으나 모양은 없습니다. 모양이 없어 놔서 내가 지금 살인죄를 범했다 하드라도 모양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물들지가 않아요.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나쁜 업을 했다 하드라도 사실은 우리 마음을 오염 시킬 수는 없습니다. 다만 잠시간 업이 가려있다는 한계를 분명히 알으셔야 됩니다.

우리모양이 우리 마음이 오염(汚染)이 되어 버렸으면 그때는 상당히 오랫동안 닦고, 닦고 또는 깨끗이 빨고 그래야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 마음은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양이 없는 하나의 생명자체기 때문에 순수생명(純粹生命)이기 때문에 어떤 업으로나 죄로나 그런 거로 해서 오염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다만 가리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사무치면 과거에 무슨 백정을 했든가 도둑놈이 됐든가 말입니다. 그런 것도 사실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으로 해서 내 마음이 본래는 부처다. 저 사람 마음도 본래는 부처다. 내 마음만 부처가 아니라 저 사람도 부처기 때문에 내 마음도 우주에 가득 차 있고 그대 마음도 우주에 가득 차 있고 말입니다.

굉장히 이것이 심오(深悟)한 문젭니다. 심오한 문제고 모든 철학(哲學)이 사실은 다 들어 있는 문젭니다.

그 머리 좋은 철학자들이 인간이 대체로 무엇인가? 인간 생명은 무엇인가? 그걸 알려고 수 백년 동안 모다 애쓰고 하는 그것이 하나의 그런 문젭니다. 그런 문젠데. 

부처님 가르침은 별로 많은 말씀이 아니라 그런 말씀으로 해서 우리한테 다 밝혔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내 마음 이대로 바로 이대로 바로 부처다. 이것이 대승불교(大乘佛敎)의 핵심입니다.

제 아무리 공부한다고 애쓴다 하더라도 이런 도리를 알고 닦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수고를 많이 하고 별로 이익(利益)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달마스님 관심론(觀心論)에도 요심수도(了心修道)면, 마음이 뭣인가를 알고 닦으면  생공이이성(省功而易成)이라, 별로 공을 안들이고서 빨리 성취가 되고 또는 불료심수도(不了心修道)면 만약 우리가  마음이 무엇인가 모르고 닦으면 그때는 증사작반(蒸沙作飯)이라. 마치 모래를 삶아서 밥을 만드는 것이나 같단 말입니다. 모래를 삶으면 밥이 되겠습니까.

그와 같이 우리가 공부 할 때는 꼭 근원적인 자리를 안 떠나야 됩니다. 이른바 본체(本體)를 안 떠난단 말입니다.

그래서 염불(念佛)을 하시기 바랍니다.

염불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일하기도 쉽고 사실은 제일 행복(幸福)한 자립니다. 염불하면 어떠한 공덕이 있는 것인가? 이 시간에 너무 말씀을 다 하면 나중에 제가 밑천이 짧아지면 곤란스럽고 염불한 공덕은 다음으로... 만공덕이 있습니다. 만공덕이.

한량없는 공덕이 있는 것인데 한량없는 공덕은  다음에 말씀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부지런히 외셔서 꼭 성불(成佛)하시기 바랍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20000604-성륜사 정기법회-청화대선사 설법

20000604-정안 김성도 촬영

20051019-DVD작업-본정 김영동

20080330-워드작업-주안 한동일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작업용으로 큰스님 구어체 그대로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