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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제57호 성륜사 5월 정기 법회

제 57 호

* 20000507-성륜사 5월 정기 법회 *


       무연자비(無緣慈悲)


 지금 젊은 한글세대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그런 말씀입니다만 우리 같은 나이라든가 50대 이상 그런 분들은 더러 제가 말씀 하고자 하는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좀 있을 것입니다.

봄도 이른 봄에 부는 바람은 혜풍(惠風) 그럽니다. 혜풍, 은혜 혜(惠)자, 바람 풍(風)자, 마치 아늑한 어머니의 다스운 품 같은 그러한 바람이 이른바 은혜 혜(惠)자, 바람 풍(風)자 혜풍에 해당하는가 하면은 지금 같이 이 4월 달, 5월 달에 부는 바람은 훈풍 그럽니다.

훈풍은 이것은 이른바 훈텁을 훈(薰), 또는 다스울 훈(薰), 훈기란 그 훈(薰)자입니다. 훈풍(薰風)그럽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훈풍, 훈풍이 정말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또 부처님 오신날을 미리서 축복 한듯한 그러한 반가운 바람입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릴 것은 부처님오신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부처님오신날은 아마 제가 구체적으로 부처님의 과거전생공덕(過去前生功德)에 관해서 말씀을 드릴 기회가 없을 성 싶어서 오늘 미리서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은 정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 그런 정도의 분이 아닙니다. 정말로 불가설(不可說) 불가설(不可說)이라. 어떻게 부처님 공덕을 다 말씀해도 말씀을 다할 수 없는 그러한 거룩하고도 위대한 분이란 말입니다.

자비(慈悲)로운면도 한도 끝도 없고 지혜(智慧)로운 면으로 봐도 한도 끝도 없고 또는 능력으로 봐도 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참선(參禪)도 하고 염불(念佛)도 하면 곧 성불(成佛)한다. 그럼 그렇게 되겠지, 물론 그렇게 충분히 됩니다. 충분히 되나, 같은 그런 마음을 깨달은 이른바 도인들도 천층만층입니다. 부처님은 그 완벽한 분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뒤에도 무수한 성자(聖者)가 나왔지만은 그런 분들이 성자니까 우주(宇宙)와 인생(人生)의 도리는 부처님같이 근본적인 도리는 알 수가 있었지만 이른바 일체종지(一切種智)라, 모든 그런 사소한 능력까지 다 완벽하니 갖추지를 일반 도인들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땐가는 부처님같이 완벽한 성자가 돼서 성불(成佛) 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헌데 부처님은 그러한 원만한 공덕을 갖추기 위해서는 그냥 우연히 갖춘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꼭 거기에 걸맞는 무량(無量)의 자비행(慈悲行) 무량(無量)의 계행(戒行)을 다 닦으셨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불경(佛經)을 보면은 40겁(四十劫)동안에 모든 중생(衆生)을 위해서 일체존재의 행복을 위해서 자비행과 희생행을 취하셨단 말입니다.

40겁이라 그러면은 여러분은 잘 감이 잡히시지가 않으시지요. 한 겁도 무량세월입니다. 한 겁도 무량 세월이기 때문에 어떻게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세월이란 말입니다. 한데 그 40배니까 더욱더 훨썩 많은 세월동안 중생을 위해서 그때그때 몸을 바치고 또는 진리를 찬탄도 하고 그런 공덕으로 해서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같으신 그런 완벽한 성인(聖人)이 되셨단 말입니다.

우선 여러분들이 대체로 들어서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은 성불(成佛)하시기 전에 설산동자(雪山童子)라, 부처님 태어나서가 아니라 그 전에 부처님의 즉 말하자면 성불을 하기 위한 그런 원인을 닦을 때에 수행하실 때에 그때에 설산동자라.

설산은 히말라야 산이 설산 아닙니까. 설산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실 때란 말입니다. 그때도 그야말로 참 진리를 꼭 깨달아야 되겠다는 사무치는 마음 을 가지셨기 때문에 천지신명(天地神明)이 다 굽어보고서 여러 가지로 도와준단 말입니다.

사실 이 우주(宇宙)라 하는 것은 우리하고, 우주의 모든 존재는 우리하고 절대로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생명(生命)이라는 것은 우주 전체가 하나의 생명입니다. 하나의 생명이라 하는 그런 우주의 기운 밑에서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렇게 저렇게 차이가 있는 것이지 본질적인 근원적인 의미에서는 똑같은 하나의 생명입니다.

산이나 물이나 또는 우리 눈에는 보이지도 않고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그런 하나의 전자라든가 그런 미세한 이른바 미시적인 그런 것까지도 모두가 다 이런것은 부처님의 생명인 이른바 하나의 똑같은 생명이 아닐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것이 가끔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른바 불성(佛性)아닙니까.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그때그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지금 느껴야 할 것은 지금 미처 모른다 하더라도 모든 존재가 다 본래로 부처 아님이 없다. 부처 아님이 없다는 그 소식도 그냥 부처가 아님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본래로 부처 아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닦아서 부처 아님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본래 생긴대로 어려운 말로 하면은 법이자연(法爾自然)적으로 부처 아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하(菩提樹下)에서 성도(成道)를 하신 그 뒤에  말씀하신 것이 뭣인고 하면은 내가 지금 깨달아서 부처가 돼서 이 법계 우주를 보니까 어떻게 보이는고 하면은 초목국토실개성불(草木國土悉皆成佛)이라. 풀이나 나무나 또는 국토나 어느 것도 모두가 다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말씀했단 말입니다.

이런 말씀이 굉장히 참 중요합니다. 이런 말씀은 그 대승적(大乘的)인 말씀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닦아서 애쓰고  닦아가지고서 부처가 돼서 마음이 개운하고 또는 모든 것도 잘 알고 행복스럽다. 이런 정도가 아니라 그 대승 불교적인 그런 뜻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천지 우주가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生命)이란 그 자리가 굉장히 소중한 것이 무엇 인고 하면은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을 우리가 깊이 느끼고 느껴져야 참다운 지혜(智慧)와 참다운 자비(慈悲)가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한테 뭘 좀  보시(布施)한다 하더라도 뭐 저 사람 좀 곤란스러우니까 내 것 좀 나누어 준다. 그런 정도로는 그것은 참다운 자비가 못된단 말입니다. 저 사람과 나와 본래(本來) 로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본래로 둘이 아니라는 그런 소식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본래로 둘이 아니라는 것은 그 전부터서 시초부터서 둘이 아니란 뜻입니다. 우리가 공부(工夫)를 해가지고서 닦고, 닦고 마음을 수련(修練)하고 말입니다. 번뇌(煩惱)를 없애고 그런 뒤에 둘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자연(自然) 생긴대로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衆生)이 어리석어서 중생(衆生)이 번뇌(煩惱)에 가리어서 모를 뿐인 것이지 본래로 둘이 아닙니다.

지금 어떻든 부처님께서는 과거 전생부터서 무수생(無數生)동안에 닦아 오신 분이란 말입니다.

그 전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그런 번뇌 가운데서 단견(斷見) 상견(常見)이라.

우리 인간은 금생(今生)으로 끝나서, 금생에 살다가 죽어지면 그때는 뭐 아무 것도 없지 않는가? 분명히 몸뚱아리가 없어지니까 없다고 보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그 업습(業習), 우리 업식(業識)은 남아 있단 말입니다.

금생에 이 몸뚱이가 있다 하더라도 우연히 생긴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무수 생 동안에 쌓이고 쌓인 그런 업식(業識)이 금생에 부모님 연(緣) 만나서 이와 같이 몸을 받았던 것입니다.

또 내생(來生)도 마찬 가집니다.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금생에 어떻게 살았는가. 그것 따라서 내생 가면은 똑같이 금생에 우리가 마음 쓴 대로 받는단 말입니다.

이러니까 이른바 육도윤회(六度輪廻)라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은 불교(佛敎)의 하나의 기본적인 상식(常識) 이지만은 우리가 알 듯 하면서도 잘 느껴지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과거전생(過去前生)이나 금생(今生)이나 내생(來生)이나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있고 또 모양도 같지가 않고 말입니다. 전생은 전생대로 그 전생에 닦은 대로  태어났을 것이고 금생은 또 전생에 닦은 대로 우리가 태어나고 말입니다. 내생도 마찬가집니다.

인생이란 것은 잠시간 금생에 머무는 것이지 똑같은 몸은 절대로 없습니다. 업(業)이 다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께서 그 설산동자, 히말라야 산에 들어가서 과거 전생(過去前生)에 도(道)를 구할 때 그때 말씀인데 간절히 도를 구하니까,

제석천왕(帝釋天王)도  분명히 존재하는 욕계천(欲界天)의 임금이란 말입니다.

불교(佛敎)나 다른 종교(宗敎)나 마찬가집니다만 이 종교란 것은 모두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우리 눈에 안 보이는 그런 차원(次元)에서 말씀한 가르침이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은 부인해 버리니까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 좀 도와주면 고맙고 안 도와주면 또 섭섭하고 그러겠지요.

그러나 눈에 안 보이는 소식을 긍정할 때는 그런 것 저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마음 쓰는가. 남이 자기를 조금도 안도와 준다 하더라도 남이 자기를 위해서 간절히 기원도 하고 마음을 써준다 그러면은 굉장히 고마운 거란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 중생(衆生)들은 그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눈에 안 보이는 세계(世界)를 꼭 긍정(肯定)해야 됩니다. 어느 철학(哲學)이나, 철학도 철학 다울려면 눈에 안 보이는 세계(世界) 즉 말하자면 인생과 우주(宇宙)의 근원자리를 밝히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져야 그래야 우리의 인간성도 그마만치 깊어지는 것이고 그렇게 해야 우리 인생의 참다운 가치관(價値觀)을 우리가 확립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석가모니 (釋迦牟尼)부처님 과거전생(過去前生)에 설산동자(雪山童子)일 때에도 그 진리(眞理)를 구하는 마음 따라 과거 또 그 전생부터서 많이 닦아 나왔기 때문에 진리를 구하는 마음이 사무치셨겠지요.

그래서 제석천왕(帝釋天王)도 감동을 해서 지금 저 사람을 내가 조금 훈련을 시키고 저 사람을 정말로 성불(成佛)을 위해서 도와줘야 되겠구나 그래가지고서 그  설산동자인 때에 아주 그 진리를 구해서 마지않는 그 청년한테 대해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이요, 시생멸법(是生滅法)이라.

부처님 오신 날을 통해서 그런 구절은 여러 분들께서 잘 기억해두시고서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요, 시생멸법(是生滅法)이라. 모든 존재(存在)는, 제행은 모든 존재 모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존재는 무상(無常)하다. 그 항상(恒常)이 없단 말입니다. 그 말은 그때그때 변화해서 마지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체존재는 변화해서 마지않습니다. 그리스의 철인 가운데도 헤라클레이토스 그 분도 만법유전(萬法流轉)이라, 그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성자(聖者)의 말이 아니기 때문에 확실한 말은 못했지요. 헌데 그 제석천왕(帝釋天王)이 나와서 설산동자(雪山童子)한테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모든 존재는 다 이것은 무상(無常)하다. 항상이 없다. 항시 움직여서 마지않는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은 제법무아(諸法無我)라. 모든 것은 모든 존재는 움직여서 마지않기 때문에 일체존재(一切存在)는 ‘나’라고 할 것이 없단 말입니다.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은 나고 그렇게 고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은 이것은 이른바 공간성(空間性)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행무상은 시간적으로 모든 것이 움직이면 얼마나 오랫동안 움직이는가? 일초 동안 움직이는가? 또는 한 시간 동안 움직이는가? 시간적인 관념(觀念)이 있어야 제행무상(諸行無常)을 말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제법무아(諸法無我)는 어느 존재(存在)나 움직여서 마지않으니까 사실은 있다고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가만히 그 자리 가서 한 시간 이면 한 시간, 두 시간 이면 두 시간 그렇게 가만히 어느 위치에 가서 그것이 있어야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어느 순간도 머무름이 없이 항시 움직이고만 있으니까 사실은 따지고 보면 있다고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른바 공간성이 없단 말입니다.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이라는 것은 이것은 뭣이 있을 때는 꼭 시간성과 공간성이 같이 아울러 있어야 뭣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헌데 시간적으로 없으니까 또 공간적으로도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지금 학생들이나 그런 분들은 그냥 짐작하면 알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시간성과 공간성이 아울러 있어야 됩니다.

우리 인식(認識)이라는 것은 시간 공간이 있어야 그래야  인식할 수가 있는 것이지 뭣이 항시 이렇게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어디에 가서 그것이 있다고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설산동자(雪山童子)가 그 말을 들으니까 굉장히 환희심(歡喜心)이 난단 말입니다. 도(道)를 구하지 않고 보통 평범하니 산에 가서 인삼이나 캐고 말입니다. 무엇인가 요행(僥倖)이나 바라고 들어갔으면 느끼지를 못 했겠지요.

그러나 과거전생(過去前生)부터서 선근(善根)이 많아서 닦고 갈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그런 진리에 관한 말씀을 들을 때는 번뜩하니 눈에 불을 키운단 말입니다.

정말로 그렇다. 모든 것은 다 무상하다. 무상하니까 또 내 것이나 네 것이나 나다 너다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이것은 불교(佛敎)의 굉장히 중요한 진리(眞理)입니다.

제행무상이란 도리 제법무아란 도리 이것은 삼법인(三法印) 가운데 하나여서 삼법인이 있어야 불법인 것이고 삼법인이 없으면 불법이 아니란 말입니다. 불교와 다른 가르침과의 구분도 삼법인이 있는가? 없는가? 거기에 따라서 우리가 가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르침이 얼마나 감사하든지 그 뒤에 틀림없이 모두가 다 무상하고 모두가 다 무아라 나랄 것이 없다. 이걸로만 해서는 해결이 안 된단 말입니다. 무상하고 허무하다. 그것은 있지만은 또 허무하지 않다는 뭣이 좀 있어야 우리가 닦을 맛이 나겠지요. 그래서 그 둘러보니까 아무도 없이 나찰로, 나찰이라는 것은 하나의 무서운 귀신인데 말입니다. 제석천왕(帝釋天王)이 나찰 귀신 모습으로 와서 그런 말을 했단 말입니다. 나찰 밖에는 없어놔서 나찰한테 말 했단 말입니다.

내가 내 평생을 다 당신한테 바쳐서 당신 종노릇을 할 테니까 나한테 그 뒤에 있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그 뒤에 있는 가르침을 해 주십시오. 이러니까 그 나찰이 하는 말이 글쎄 내가 하고 싶은데 배가 고파서 지금 못하겠다. 그러니까 뭘 좀 먹어야 되는데 내가 먹는 것은 다른 것은 못 먹고서 사람의 붉은 피, 피도 보통 피가 아니라 아주 그 순결한 사람피를 내가 마셔야 기운이 나서 말을 이어서 할 수가 있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 종노릇을 하는 것은 쉬운데 그 사람 다른 사람도 없고 자기 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사람의 그 선지피를 마셔야 만이 얘기를 할 수가 있다 하니까 어떻게 그야말로 참 다르게 할 수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그 다음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 자기 몸을 조금도 주저 없이 몽땅 바치기로 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나뭇가지에 올라가서  높은데 올라가서 낮은데 올라가면 또 피가 안 나오니까 말입니다. 높은데 올라가서 그 나찰 있는 데로 향해서 몸을 던졌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몸을 던져가지고 죽어 버렸으면 또 못 듣고 또 말겠지요.

그런데 그 제석천왕(帝釋天王)이 나찰로 화현한 그런 하나의 이른바 방편을 그렇게 나투는지라, 그 천왕이 떨어진 그 설산동자를 받았단 말입니다. 받아서 그대 뜻이 하도 갸륵하니까 내가 말을 하지,

그래서 그  뒤에 말한 귀절이 무엇인고 하면은 생멸멸이적멸위락(生滅滅已寂滅爲樂)이라. 낳고 죽고 하는 그런 것을 모두 다 없애 버리면 생사(生死)를 초월(超越)해 버리면 그때는 적멸위락(寂滅爲樂)이라. 모든 번뇌(煩惱)가 다 가신 영원의 행복, 영원한 행복을 얻으리라. 이런 뜻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공부 할 때도 공연히 고생고생 분별시비(分別是非)를 한다든가 그런 걸로 해서는 진리(眞理)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근원적(根源的)으로 그 나라는 생각 너라는 생각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이 갖고 있는 그런 부질없는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생각 그런 것을 다 없애버려야 그래야  절대적인 영원의 진리를 우리가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멸멸이적멸위락 (生滅滅已 寂滅爲樂)은 이것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그런 상대유한적인 것은 다 허망(虛妄)한 것이니까 이런 것을 몽땅 모조리 없애 버려야 참으로 영원한 참다운 자기 참다운 해탈(解脫)의 지혜(智慧) 이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그 설산동자(雪山童子)가 자기 피를 다 주기로 했으니까 진리(眞理)만 듣고서 말 것이 아니라 약속을 또 지켜야 되겠지요. 그래서 그 도리를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보고서 깨달으라고 말입니다. 나무에다 써놓고 또는 돌위에다 써놓고 땅에다  써놓고 말입니다. 그렇게 써놓고서  그야말로 참 다시 몸을 던져서 이른바 아까 말한 그 나찰 귀신한테  바쳤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이  조금도 주저 없이 자기 몸의 무슨 어깨 한 조각 줬다든가 또는 손가락 몇 개나 태웠다든가 그런 것도 아니라 몽땅 그대로 바쳤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걸로 해서 부처님이 12겁 동안 한 겁도 무량(無量) 세월인데 그렇게 해서 자기 몸뚱이를 온전히 바치지 않았으면 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고 뭣으로 태어나고 모다 그렇게 했을 것인데 12겁 동안  이렇게 생사윤회(生死輪廻)할 것을 그때는 다 감해서 말입니다. 성불(成佛)할 수 있는 그런 공덕을 얻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12겁 동안 줄여서 즉 말하자면 성불할 수 있는 그런 걸 얻었는데 부처님 성불하시는 그 연한을 따지고 보면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 성불(成佛)하시기 위해서는 40겁동안 닦아야 그래야 성불할 것인데 이미 12겁은 그걸로 해서 즉 말하자면 제행무상시생멸법(諸行無常是生滅法),생멸멸이적멸위락(生滅滅已寂滅爲樂)이라.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고 모든 것은 나라고 할 것도 없고 너라고 할 것도 없고 그러나 그런 저런 모든 분별시비(分別是非)를 몽땅 없애 버리면 그때는 그야말로 참 영원적(永遠的)인 해탈(解脫)을 행복(幸福)으로 한다는 그런 도리를  앎으로 해서 받은 아주 감사한 표시로 해서 아까 말씀 마따나 자기 몸을 주저 없이 바친 그걸로 해서 열두겁 동안 줄여서 성불(成佛)하게 됐단 말입니다.

그리고 40겁 동안인데 또 무슨 말이 있어야 되겠지요? 부처님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마흔겁 동안 여러 가지 그런 수행 (修行)을 다 해서 자기 몸을 돌보지  안했습니다.

그래서 또 그 다음은 부처님께서 과거전생(過去前生)에 과거세(過去世)에  유동보살이라. 또는 유동신선이라. 하나의 신선(神仙)으로 해서 공부하실 때 말입니다. 그렇게 신선으로 해서 공부하는데 꼭 그 무상(無常)의 진리(眞理)를 알고 싶단 말입니다.

과거전생(過去前生)에 많이 닦아놔서 그러겠지요. 위없는 진리를 알고 싶은데 어디 가서 배울 데가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말을 들으니까 정광(淨光)부처님이란 부처님이 오시는데 그분은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천상천하(天上天下)에서 가장 위대(偉大)한 분인데 그분은 모든 진리(眞理)를 다 알고 하신다는 그런 말씀을 들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나도 이번에 꼭 그 정광부처님을 만나 뵈어서 가르침을 받아야 되겠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데 마치 그 날 비가 왔단 말입니다. 비가 와서 질컥질컥 땅이 아주 흙이나 모다 그야말로 진창으로 이겨져 있단 말입니다. 그때에 그 유동보살은 부처님을 드리고자 해서 일곱송이의 꽃을 준비를 했습니다. 물론 꽃을 준비할 때도 여러 가지 사연이 있지만은 그런 것은 줄이고 꽃을 준비해 가지고서 부처님한테 어떻게 공경(恭敬)스럽게 부처님을 받들어서 법을 물어야 할 것인가? 궁리했는데 그 땅이 질퍽거리고 땅이 흐리가 있으니까 자기 옷을 벗어서 깔아도 어떻게 그 흐리나 또 진창거리는 땅을 덮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머리를 옛날인지라  자기 머리가 남자지만은 길겠지요. 그 머리를 풀어서 머리로 해서 진흙창을 또 덮었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오신다고 그러니까 지나가실 그 길목에다가 말입니다.

즉 자기 옷으로 그 진창길을 덮고 그래도 부족하니까 자기 몸뚱이사 몸뚱이를 밟고 누가 갈라고 할 것입니까. 하기 때문에 머리를 풀어서 머리로 진창을 덮었단 말입니다.

그렇게 조금도 사심(邪心)이 없이 자기 모두를 바치겠다는 그런 정성이 거기에 스며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와 같이 함으로 해서 또 8겁동안 결국은 윤회(輪廻)하지 않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태어나고 또 태어나고  고생고생하고 그럴 것인데 8겁동안 결국은 성불(成佛)을 더 빨리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12겁하고 벌써 그것이 20겁이지요, 20겁.

또 부처님이 과거(過去) 어느 시대에 살타왕자로 또 태어나가지고서 그때에 여러 가지로 공부도 하고 그런 때란 말입니다.

우리는 과거 전생부터서 많이 닦아왔기 때문에 자비심(慈悲心)도 한량이 없이 깊고 다 그러시겠지요.

그 살타왕자 때 왕자가 3분인데 부처님은 그때 이른바 막내란 말입니다. 셋이 밖에 나갔다가 산속에 들어가서 있는데 마침 그 호랑이란 놈이 새끼를 일곱마리나 낳아가지고서 다른 먹을 것이 없으니까 자칫하면 결국은 새끼도 죽고 호랑이 어미도 죽게 생길 판이란 말입니다.

그때 그 자기 두 형에게 형님들은 먼저 집에 돌아가십시오. 나는 여기서 좀 더 있다 가겠습니다. 이래놓고서 자기가 그 범한테, 새끼를 낳고 굶주리고 있는 새끼들도 다 죽게 생긴 그 판에 자기가 자기 몸을 또 바쳐서 그 범을 호랑이를 구제하려고 맘먹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나무에 올라가서 자기가 떨어지고 그래야 범이 자기를 먹을 성 싶으니까 나무에 올라가서 아래로 그냥 툭 내려 떨어졌단 말입니다.

그 범한테 자기 몸뚱이를 모조리 바치겠다는 그 정성, 그 위력이 그것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 위력이 하도 위대하니까 아무리 미울망정 범한테도 그것이 감동이 돼서 말입니다. 어떻게 그 잡아먹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마치 그 옆에 가서 대꼬챙이가 있으니까 대꼬챙이로 자기 목을 찔렀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선지피가 분출해 나오겠지요.

그 짐승이란 놈들은 사람 피나 그런 것을 보면은 그때는 그야말로 더욱더 영악스러워져서 아주 표독한 마음이 생긴다고 합니다.

역시 그 범도 피가 나오니까 그때는 그냥 우선 배가 고프고 또 주리니까 빨리 그걸 먹을려고 해가지고서 그  살타왕자의 머리에서 부터서 다 먹었단 말입니다. 그렇게 그 주린 범한테 투신아호(投身餓虎)라, 이렇게 한문자로는 돼 있습니다.

그 주린 범한테 자기 몸뚱이를 주었단 말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11겁 동안 윤회(輪廻)할 것을 또 감해서 말입니다. 11겁 동안 더 빨리 성불(成佛)하게 되었단 말입니다.

40겁을 채워야 성불할 것인데 그러니까 아까 20겁하고 또 11겁이니까 31겁이 되겠지요. 인제는 9겁이 남았습니다.

9겁을 더 채워야  이른바 부처님께서 성불(成佛)할 수 있는 공덕(功德)을 다 채울 수가 있는데 부처님께서 그 제사불, 제사불이란 부처님 당시에 또 태어났단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앞으로 미륵불(彌勒佛)하고 석가불(釋迦佛)하고 제사불 한테 같이 공부할 때란 말입니다. 그런데 제사불이  보니까 그 미륵불(彌勒佛)은 더 영리하고 석가불(釋迦佛)은 결국은 나중에 부처가 되면은 아주 자비(慈悲)스럽고, 위대할망정 우선은 재주는 좀 못하거든요. 그래서 자비스러운 그런 분을 더 빨리 제도(濟度)해줘야 그래야 많은 중생을 더 건지겠구나 이래서 그때는 석가불(釋迦佛)을 내가 도와서 미륵불(彌勒佛) 보다도 더 빨리 성불(成佛)을 시켜야 되겠다.

이렇게 작심을 딱 하고서 그래서 그 제사불이 너희들 지금 나를 따라온나. 이렇게 해가지고서 제사불은 신통(神通)으로 산꼭대기 올라가서 화광삼매(火光三昧)라. 자기 몸에서 광명(光明)을 내는 그런 삼매(三昧)에 들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석가불은 하여튼 부처님께서 훅 떠나 버리시니까 산에서 제사불을 찾을려고 무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래서 가까스로 산꼭대기 산봉우리  올라가서 보니까 그 제사불께서  화광삼매(火光三昧)라. 자기 몸에서 빛나는 광명을 내고 삼매(三昧)에 딱 들어계신단 말입니다.

화광삼매(火光三昧)란 것은 우리가 선정(禪定)을 닦아서 선정(禪定)이라는 것은 깊은 명상(瞑想)인데 깊은 명상을 닦아서 자기 몸에서 불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가 다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닦지를 못하고 우리 마음이 그 분별시비(分別是非) 때문에 자꾸만 헤아리고 갈등이 되고 해서 안 되는 것이지 정말 우리가 깊은 삼매(三昧)에 든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누구나가 다 자기 몸에서 불을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뿐만 아니라 그 뒤에 위대한 성인(聖人)들도 자기 몸에서 불을 내가지고서 자기 몸을 스스로 태워가는 그런 분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사불께서 자기 몸에서 불을 내는 그런 삼매(三昧)에 들었단 말입니다.

부처님 광명(光明)은 보통 이런 광명이 아니란 말입니다. 한도 끝도 없이 우주(宇宙)에 빛나는 그런 찬란한 그런 빛인 것입니다. 이른바 생명(生命)의 빛이란 말입니다.

그런 빛이 어떻게 영롱하고 찬란스럽든가 도저히 그냥 어떻게 눈으로 볼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 제사불께서 삼매(三昧)에 들어서 광명(光明)을 내는 찬란스럽고 장엄스러운 모습에 도취가 돼서 말입니다. 그래서 한 발을 든 채로 한 발을 들었으면 다시 땅에다가  발을 내딛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감격했든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그냥 한 발을 든 채로 이레낯 이레밤 동안 칠주야(七晝夜)동안 부처님을 찬탄했단 말입니다.

찬탄한 내용이 간추리면은 ‘시방세계(十方世界) 모든 것을 다 본다 하드라도 우리 부처님 같은 그런 위대한 분은 없도다’ 하는 즉 말하자면 게송을 찬탄하는 그런 노래를 읊으시고 하여튼 그 칠주야(七晝夜)동안 거기서 한 발을 든 채로 부처님을 찬탄(讚嘆)했단 말입니다.

그걸로 해서 그렇게 한다는 부처님 찬탄공덕(讚嘆功德) 우리가 절에 오면 부처님한테 참배(參拜)하고 또 불상(佛像)을 우러러서 부처님 공덕(功德)을 찬탄(讚嘆)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는 절에 가서 불상(佛像) 좀 참배(參拜)하는 것이 무슨 공덕이 있을 것인가 하지만은 그것이 그렇지가않아요. 우리가 부처님 앞에 향을 사르고 찬탄(讚嘆)하는 그 공덕(功德)이 우리 업장(業障)을 가속도(加速度)로 정화(淨化)를 시키는 것입니다.

헌데  그와 같이 석가모니 전신(釋迦牟尼前身) 석가불(釋迦佛)은 제사부처님께서 그렇게 찬란스럽고 장엄(莊嚴)스러운 그런 광명(光明)을 내면서 삼매(三昧)에 들으신 이른바 명상(瞑想)에 들으신 그 모습을 보고서 칠주야(七晝夜) 동안 한발을 든 채로 부처님을 찬탄(讚嘆)했단 말입니다.

그 공덕(功德)으로 해서 또 9겁을 당겨서 결국은 성불(成佛)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래저래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설산동자(雪山童子) 때 온전히 제행무상시생멸법(諸行無常是生滅法)이라. 모든 것은 다 무상하고 모든 존재는 나라 할 것이 본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저런 모든 번뇌망상(煩惱妄想)을 다 없애 버리면 영생해탈(永生解脫)의 그 자리를 가장 중요시하는 행복으로 가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가르침을 얻고서 12겁 동안 닦으셔서 12겁 동안 빨리 성불(成佛)할 수 있는 그런 공덕(功德)을 지었고,

또 전등불(傳燈佛)때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땅이 질컥거려서 부처님께서 그 자리로 땅을 밟고 가시는 것이 송구스러워서 그래서 자기 옷을 벗어서 깔았지만은 다 덮이지가 않으니까 자기 머리채를 풀어가지고 덮어가지고서 부처님을 지나가시게 한 그 공덕으로 해서 8겁 동안 역시 당겨서 성불(成佛)할 수 있는 공덕(功德)을 지었고,

또 한 가지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살타왕자 때  주린 범한테 조금도 회한이 없이 조금도 주저 없이 자기 몸을 바쳤단 말입니다. 그걸로 해서 11겁 동안 또 당겨서 성불할 수 있는 공덕을 지었고,

맨 나중에 제사불 때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부처님께서 화광삼매(火光三昧)라. 부처님께서 광명(光明)을 나투고 명상(瞑想)에 들어 계시는 그런 찬란스러운 장엄스러운 모습 보고서 칠주야(七晝夜)동안 한 발을 든 채로 그 찬탄(讚嘆)해마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40겁을 다 채워서 그야말로 40겁을 당겨서 성불(成佛)하셨습니다. 우리 부처님은 그 런 부처님입니다. 과거에 그렁저렁 살다가 부처님이 되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우리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시는 그 마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대자대비(大慈大悲)아닙니까. 대자대비(大慈大悲)라. 우리 보통사람은 자비심(慈悲心)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인데 부처님의 자비심은 보통 자비심이 아니라 조금도 다른 것이 섞여 있지 않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은 자비심이나 남한테 좀 베푼다 하더라도 꼭 뭣인가 좀 남아있단 말입니다. 내가 남한테 베풀면 저 사람 나를 좀 좋게 알겠지 라든가 말입니다. 또는 그 눈에 보이는 보상(報償)이 아니더라도 무슨 보상 이 좀 있겠지 하는 그런거라든가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는 그런 것이 아니라 조금도 그런 삿된 것이라든가 개인적인 헤아림이 없단 말입니다.

어째서 부처님은 그러한 대자대비(大慈大悲)를 낼 수가 있는가? 우리 불자님들, 우리는 한 점도 오류가 없고 조금도 염오(染汚) 안 된, 조금도 때 묻지 않은 부처님을 우리가 본받아야 됩니다.

우리 마음도 부처님 마음하고 지금 똑같은 마음입니다. 설사 금생(今生)에 잘못 우리가 살았다 하드라도 그것은 우리 차원(次元)에서 볼 때에 내가 아직 멀었구나 그러는 것이지 부처님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똑같단 말입니다.

왜 같을 것인가? 부처님도 역시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같이 몸으로 나투신 화신(化身) 부처님이 있고, 우리 불자님들께서는 잘 알으실 것입니다만, 잘 모르시면 부처님의 개념정리를 분명히 하셔야 됩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 같은 모양으로 나투신 부처님도 계시는 것이고 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이 없이 이른바 진리(眞理)부처님, 진리부처님은 언제나 우주(宇宙)에 계신단 말입니 다. 따라서 진리부처님은 이 세상에 둘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세상모두가 다 진리 부처님으로 해서 세상이 되었단 말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이나 또는 이슬람교의 알라나 말입니다. 유교(儒敎)의 도(道)나 말입니다. 모두가 다 진리(眞理)아닙니까. 그런 진리도 내내야 한가지입니다 다만 우리가 어떻게 얼마만치 깨달았는가. 그 깨달은 정도의 차이 뿐인 것이지 우주(宇宙)란 것은 모두가 다 진리(眞理)로 해서 우주가 이루어졌단 말입니다. 우주의 진리란 것이 다만 이치가 아니라 하나의 그건 생명입니다.

이 종교(宗敎)란 것은 그 이치(理致)만 가지고 따질 것이 아닙니다. 우주(宇宙)를 다스리는 진리가 바로 생명(生命)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차원에서는 모든 종교(宗敎)가 하나의 생명으로 다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헌데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런 우주(宇宙)의 도리 인생(人生)과 우주의 참다운 도리를 알고 보면 그때는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란 말입니다. 하나의 도리를 알고서 행동해야 참다운 보살행(菩薩行)이 됩니다.

자비(慈悲)도 방금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衆生)들이 차별을 두고서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조금 인심을 쓰는 정도 그런 것은 참다운 자비(慈悲)가 못된단 말입니다. 꼭 나와 남이 둘이 아닌 도리 우리 생명(生命)이란 것은 본래 뿌리가 다 같은 것이고 또는 본래로 다 하나란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 우리 불자님들이 상당한 수로 지금 많이 계십니다만 옆에 있는 사람하고 다 뿔뿔이라고 생각을 하시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지금 각 분자(分子)라든가 또는 원자(原子)라든가 그런 것을 이른바 소립자(素粒子) 같은 아주 미시적(微視的)인 보통 우리 평상적인 눈으로 볼 수가 없고 현미경(顯微鏡)으로 볼 수 있는 그런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어떻게 보일 것인가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옆에 이렇게 다 있고 저 사람은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가? 저 사람은 나하고 아주 판이하다. 이렇게 보통은 느끼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현미경(顯微鏡)을 놓고서 그 분자(分子)라든가 원자(原子)를 볼 수 있는 현미경 놓고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는 모두가 다 붙어있는 것입니다.

이 공간(空間)에 가서 산소나 수소나 그런 것이 없는 공간이 있겠습니까. 어느 공간이나 다 그 산소나 수소나 그런 걸로 해서 꽉 차 있단 말입니다.

저는 가끔 비유를 듭니다만 저 바닷가에 가서 다도해(多島海)를 본다고 생각할 때에 물이 들 면은 섬이 여기가 있고 저기가 있고 모다 하겠지요. 그러나 물이 다 쓸어버리면 그때는 뻘로 해서는 다 하나의 육지란 말입니다. 모두가 말입니다. 지금 일본열도도 모두 구주(九州)나 또는 사국(四國)이나 모다 그런 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또 그런 것도 바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하나의 육지입니다.

영국(英國)도 스코틀랜드나 또는  아일랜드나 모두가 다 이렇게 떨어져 있지만은 내내야 이른바 육지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육지란 말입니다.

물이 있으니까 섬으로 보이지만 그와 똑같이 이렇게 많은 수의 우리 불자님들이 다 계시지만은 우리 중생(衆生)의 제한된 눈으로 보니까 네가 있고 내가 있고 하는 것이지  현미경(顯微鏡)만 놓고 본다고 하더라도 벌써 우리가 다 지금 붙어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깨달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깨달은 눈이란 것은 모두가 다 진여불성 (眞如佛性)으로 보이는 것이 깨달은 눈입니다. 그런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근본바탕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거든 다 부처님으로 안보이겠습니까.

우리 공부가 부족해서 우리 업장(業障)으로 보는 것이니까 너로 보이고 나로 보이고 밉게 보이고 좋게 보이는 것이지 우리가 정말로 성자(聖者)의 깨달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그립고 다 사랑스럽고 어느 때 가서는 자기들이 바라면 자기 몸도 줄 수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렇게 안보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타의 구분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내 몸이라 그래서 특별히 좋고 그대 몸이라 그래서 별것도 아니고 이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 대자대비(大慈大悲) 부처님의 그런 자비라는 것은 우리 중생(衆生)들이  느끼는 그런 선심 좀 쓰고 뭐 좀 베풀어 주고 그런 동정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동정하는 자비(慈悲)보고는 불교(佛敎)말로 해서 애견대비(愛見大悲)라. 잘 외워두십시오.

여러분들께서 누구한테 무얼 베푸실 때나 자기  아들이나 딸한테 줄 때도 애견대비(愛見大悲)라. 애견대비(愛見大悲) 이것은 나와 남을 구분하는 자리에서 베푸는 그런 자비(慈悲)가 애견대비(愛見大悲) 입니다. 사랑애(愛)자 볼견(見)자 중생견해(衆生見解)를 미처 못 떠나고서 베푸는 자비(慈悲)를 가리켜서 애견대비(愛見大悲)라 그래요. 우리 중생들은 보통은 애견대비(愛見大悲)입니다.

애견대비(愛見大悲)는 자타를 구분하는 중생심에서 남한테 보시(布施)도 하고 베푸는 그런 자비(慈悲)란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나 성인(聖人)들은 그렇지가 않단 말입니다. 명명백백(明明白白)히 저 사람이나 나나 똑같이 다 부처님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저 사람만 부처님이고 나는 부처님이 아니라고 그렇게 보면 그러면 안 되겠지요. 똑같이 부처란 것은 어디가 있고 어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 (天地宇宙)가 다 하나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이란 하나의 생명(生命)으로 이루어 졌단 말입니다.

바다 위에서 무수한 거품이나 파도가 있다 하더라도 내내야 물이란 점은 똑같지요. 그와 똑같은 것입니다. 이른바 수파(水波)의 비유(比喩)라 그 파도 같은 것은 그것은 우리 중생(衆生)에 해당하고 물 자체는 진여불성(眞如佛性)에 해당한단 말입니다. 파도가 바로 물이고 물이 바로 파도이듯이 우리 중생이 바로 부처고 부처가 바로 그때는 우리 중생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의 자비(慈悲)라는 것은 대자대비(大慈大悲)기 때문에 대자대비는 조금 더 어려운 말로 하면은 무연자비(無緣慈悲)라,

그러니까 불교(佛敎)를 공부하실 때는 우리 불자님들께서 그 어려운 말씀도 좀 외워둘 것은 외워두시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어느 사회에서나 자기 스스로 공부를 않고서는 살수가 없는 것이고 부처님 가르침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눈에 안 보이는 세계를 더 많이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눈에 안 보이는 세계는 자연적으로 또 어려울 수밖에는 없겠지요. 아무리 쉽게 말해도.

헌데 우리 중생들의 자비(慈悲)는 이것은 아(我)를 자기를 못 떠나는 그런 자비(慈悲)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의 제한돼있고 참다운 사랑, 참다운 자비가 못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자기한테 기분 나쁘면 그냥 그때는 성내고 또 그야말로 자기를 위해서 남을 해치고 때리고 그럴 수도 있게 안 되겠습니까.

헌데 그런 무연자비(無緣慈悲), 무연자비란 것은 불심(佛心)자리에서 일체존재(一切存在)가 다 똑같은 한결같은 모두가 부처님이다. 그런 자리에서 마음으로 헤아림이 없이 저절로 베푸는 자비(慈悲)가 무연자비(無緣慈悲) 입니다. 없을 무(無)자, 인연 연(緣)자, 무슨 인연(因緣)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因緣)을 초월(超越)해서  말입니다. 저절로 불심자리에서 남한테 베풀고 잘하는 자비(慈悲)가 이것이 무연자비(無緣慈悲)란 말입니다.

또 한 가지는 그 보다 조금 못한 것은 또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면은 법연자비(法緣慈悲)라, 법법(法)자, 인연 연(緣)자 말입니다. 제법공(諸法空)도리에서 우리는 제법공(諸法空)하면 상당히 마음으로 부담을 느끼실 분도 계시겠지요. 공(空)이 아닌데 꼭 공(空)이라 하니까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고민을 좀 하시고  마음으로 연구(硏究)를 하셔야 됩니다. 꼭 이것은 공(空)을 알지 못 하면은 불교(佛敎)를 모르는 것입니다. 소승(小乘)밖에는 모르고 대승(大乘)은 모르는 것입니다. 대승(大乘)이 되어야 참다운 불교(佛敎)인데 말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은 대승(大乘)이 돼야 그래야 공(空)이 아닌 참다운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우리가 안단 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천지우주(天地宇宙)가 오직 부처님뿐이라는 소식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인데 그 자리를 알라고 하면은 그냥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 이 보는 이것은 모두가 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하다. 허망(虛妄)하단 말입니다. 그 허무하다는 것은 사실로 있으면 허망(虛妄)하지가 않겠지요. 그러나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사실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기 이렇게 많은 수가 지금 계시지만은 저 사람과 나와는 모두가 이것은 무관한 사이다. 저 사람은 저 사람이고 나는 나다. 이렇게 보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못 보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수가 모두가 다 불성(佛性)자리에서 잠시간 인연(因緣) 따라서 나요 너요 이렇게 구분해 나타난 것이지 이것이 근원적으로 다른 사람이 아니다. 모두가 하나의 생명(生命)에서 우러난 하나의 불성 (佛性)에서 우러난 모두가 다 화신(化身)부처님이다. 이렇게 봐야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것이 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선은 우리가 보는 것은 이것은 잘못 본다. 이렇게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여러분들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그리스의 철인(哲人)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가 가장 중요한 말을 해온 것이 즉 그 말 때문에 철학(哲學)의 아버지라고 그분을 말하지 않습니까만은 ‘먼저 그대 스스로를 알아라 먼저 그대 스스로의 무기를 알아라’ 우리 중생(衆生)들은 자기가 좀 배워 노면은 자기 아는 것이 상당히 많이 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사실은 별것도 아닌 것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생(衆生)들은 중생(衆生)이란 허물을 못 벗어나면 사실은 뭐 안다고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분별시비(分別是非)하는 것만 그렇게 좀 우리가 외웠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생(衆生)들은 꼭 먼저 자기 무지(無知) 자기가 지금 아직은 범부(凡夫)다. 내가 성자(聖者)가 아닌 범부(凡夫)다. 이것을 우리가 사무치게 느껴버리면 남하고 다툴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옳다고 고집한 것이 사실 옳은 것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무슨 맑스주의요. 무슨주의요. 모다 그 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대체로 잘 모르고 그래요. 잘 모르고. 그러기 때문에 이른바 독단, 도그마에 빠진단 말입니다. 독단에,

그런데 그런 분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衆生)들이란 그런 입장에서는 그런 차원에서는 어느 누구나가 독단에 빠집니다.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도 우리 중생(衆生)들은 꼭 자기가 아는 것이 옳다고 고집을 해진단 말입니다.

더구나 무슨 권위(權威)가 있으면 더욱 그럽니다. 우리가 대통령이 되면 자칫하면 독재(獨裁)하기가 쉽지 않습니까.

어떠한 분야에서나 독단이란 것은 도그마란 것은 굉장히 그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독단을 부리기 때문에 남하고 화합(化合)도 못하고 또는 사회(社會)도 혼란스럽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독단을 않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먼저 자기가 아는 것이 이것이 다 아는 것이 아니다. 우리 범부 (凡夫)는 지금 다 무지(無知)한 상태단 말입니다. 자기 무지(無知)를 알아야 돼요. 자기 무지(無知)를 알아야 그래야 사람도 겸손하고 또 그마만치 남하고 화합(化合)도 되고 그러겠지요. 그렇게 하는데서 자비심(慈悲心)을 내야 그래야 이른바 부처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가 됩니다.

부처님의 그런 무량공덕(無量功德)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그 무수생(無數生)동안에 여러 가지로 자기 몸을 불사르고 자기 몸을 희생하고 말입니다. 그런 순교적인 희생을 했기 때문에 그것이 모두가 공덕(功德)이 쌓이고 쌓여서 오늘날 부처님 같으신 우리들의 위대한 스승을 지금 모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부처님 오신 날을 당해서 정말 우리 부처님께 대해서  감사를 해야 할 것이고 감사함과 동시에 우리도 성불(成佛)하기 위해서는, 꼭 성불(成佛)하고 마는 것인데 사람으로 태어나서 부처님 가르침을 만나고서도 우리가 성불(成佛)을 못 하면은 그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이겠습니까.

성불(成佛)은 절대로 어려운 것이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부처님께서 안 계셨더라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성불(成佛)의 가망이나 있겠습니까.

그러나 부처님께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무수한 세월동안에 자기를 희생하고 또는 고생고생하고 난행고행(難行苦行)도 해가지고 또는 금세에 태어나서도 부처님께서는 육년 고행(苦行)을 했습니다. 6년 고행(苦行) 그래가지고서 부처님이라 하는 위대한 그런 성자(聖者)가 되셨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고생을 않고도 성불(成佛)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고생을 기반으로 해서 우리는 더 쉽게 성불(成佛)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런 처지에 있으면서 우리가 부처님 공부를 않는다고 생각할 때는 정말로 참 바보스러운 일이고 부처님한테 죄망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깊이 생각해서 정말로 부처님 오신날 며칠 안 남았는데 우리가 부처님에 대해서 감사를 느끼고 우리 생활이 그 한 시간 한 시간 또는 하루하루 부처님한테 가까이 갈 수 있는,

우리생명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세상에서 그야말로 어느 것이나 어떠한 것이나 비교할 수 없는 가장 높고 위대한 것입니다.

또는 그 부처님 도리가 부처님이라 하는 하나의 생명(生命)이 말입니다. 그 부처님이란 생명이 하도 위대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이름이 많이 있단 말입니다.

인격적(人格的)으로 표현하면은 부처님이고 말입니다. 또는 성품(性品)으로 표현하면 그때는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고 말입니다. 또는 지혜(智慧)로 표시하면 그때는 반야(般若)의 지혜(智慧)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이고 말입니다. 또는 법성(法性)이고 실상(實相)이고 우리가 일체존재(一切存在)의 모든 존재의 근본(根本)자리다. 이런 때는 이른바 실상(實相)이고 또는 실성(實性)이고 실존(實存)이고 말입니다.

지금 모다 철학계(哲學界)에서도 가장 진보적(進步的)인 철학(哲學)이 이른바 실존철학(實存哲學)인데 실존도 내내야 우주(宇宙)의 근본실상(根本實相)이 무엇인가. 우주(宇宙)의 근본생명(根本生命)이 무엇인가. 이런 데를 캘려고 애쓴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제 아무리 그 머리 좋은 철학자(哲學者)들이 애쓰고 머리를 싸맨다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으로 해서 이른바 성자(聖者)가 돼야 참다운 실존(實存) 참 실상(實相)을 아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을 온전히 믿고 우리 마음을 다스려서 염불(念佛)도 하고 참선(參禪)도하고 한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철인(哲人)보다도 어느 종교인(宗敎人)보다도 우리는 훨썩 더 앞서있고 행복스럽고 또 성불(成佛)은 기약을 다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다른 때는 혹시 잊어버린다 하더라도 적어도 부처님오신날 정도, 부처님이 오신 그 날 정도는 우리가 모든 정성을 다해서 부처님 되는 그러한 공부를 하시도록 그렇게 하십시다.

대단히 감사하십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20000507-성륜사 정기법회-청화대선사 설법

20000507-삼영불교음반-학무 유락재 촬영

20050824-DVD작업-본정 김영동

20080321-워드작업-주안 한동일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작업용으로 큰스님 구어체 그대로 받아 정리한 것입니다.*

        

 

<주석 : 인간은 시간성(변화성)과 공간성(차별성)을 갖는 사건(事件)만을 인식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사건을 실존으로 착각(錯覺)을 하고 있다.

자세히 사유(思惟)해 보면 시간성(변화성)을 갖기 때문에 어느 한 순간도 고유하니 머물러 있지 아니 한다.

그리고 변동하고 순간순간 훈습되어 차별화(공간성)가 생겨 서로 다른 사건들이 연속되는 것으로 착각 인식의 한계성 때문에 고유한 존재로  영원히 소유하려고 한다.

자기 자신도 고유한 것이 아니요 모든 존재가 고유한 것은 없다.

인간의 인식기관으로 인식되어지는 것은 모두가 무상(無常)한 것이다. 인간이 알고 있는 일체존재는 무상한 것이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상호의존적으로 아울러져 있어 독립된 실체는 없다. 어느 사건에든 전 우주가 다 참여하고 있다.>



 <본문과 관련된 큰스님 친필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