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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제56호 성륜사 4월 정기법회

                             <제 56 호>

20000402-성륜사 4월 정기법회

 

<대총상법문(大總相法問)>


부처님 법문 가운데는 방편가설인 그런 법문도 있고, 또 그런가 하면은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라! 대총상법문이 있곤 합니다.

대총상법문은 무슨 법문인고 하면은 이것은 그 부분적인 또는 임시적인 시설로 이루어진 법문이 아니라 부처님 법의 체용성상(體用性相)이라. 그 부처님 법의 본체(本體)라든가 또는 현상적인 문제라든가 모두를 다 모조리 담아서 총괄적으로 말씀하신 법문이 대총상법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다 같이 외우고 있는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은 이른바 대총상법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 법문 가운데는 이른바 삼신일불(三身一佛)이라, 부처님의 그 본체(本體) 본바탕인 법신(法身)과 또는 부처님한테 갖추어 있는 모든 성품공덕(性稟功德) 한량없는 지혜(智慧) 또는 만 가지 그런 억만 가지의  여러 가지 공덕상, 그런가 하면은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이 현상계 모두가 다 이것이 이른바 화신(化身)인데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법문의 본체인 법신(法身)과 또 법신에 들어 있는 일체 성품 공덕인 보신(報身)과 법신과 보신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이른바 활용적인 그런 면인 이 현상계(現象界) 이러한 화신(化身)과 세 가지를 다 겸비해 있는 법문이 이것이 이른바 삼신일불(三身一佛)인데 이런 법문을 가리켜서 대총상법문 그럽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독교를 설사 공부하고 또는 상식적으로 좀 알아본다 하더라도 기독교의 핵심 가운데가 어떤 법문이 있는가? 이것은 이른바 니케아 공의회, 니케아 공의회는 그 당시 동로마 제국 때 그 때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하나의 지명인데 그것은 서기 325년에 그 때 콘스탄티노스 그런 황제가 즉 말하자면 기독교의 교리를 다 제대로 체계화시키기 위해서 이루어진 하나의 그것이 이른바 주교 회의인데, 추기경이나 모다 주교 그런 분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기독교 교리를 점검하는 그런 회의인데, 그때에 결정을  했단 말입니다.

서기 325년에 그것이 니케아 공의회인데 그 때 결정한 그 내용이 무엇이고 하면은 이른바 삼위일체(三位一體)입니다. 삼위일체라, 석 삼(三)자, 자리 위(位)자, 한일(一)자, 몸 체(體)자. 삼위일체(三位一體)란 말입니다.

우리 부처님 법문인 삼신일불(三身一佛)하고 비슷비슷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 같이 그 합리적이고 또는 모두를 다 우주(宇宙)만유(萬有)를 다 포괄한 그런 점은 좀 미흡 합니다만 그래도 비슷비슷합니다.

인간의 지혜라는 것이 동(東)에 가 있으나 서(西)에 가 있으나 다 인간 자체가 본래로 이 불성(佛性)을 갖추고 있어 놔서 정말로 깊이 우리가 탐구를 하고 또는 천착(穿鑿)을 하다 보면은 결국은 다 같아 버린단 말입니다.

지금 이 다종교(多宗敎)사회기 때문에 우선 세계적인 큰 종교만 하더라도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불교 또 기독교 이슬람교 아닙니까. 이렇게 돼 있으나 역시 그런 가운데 그 내용에 있어서는 모두가 다 서로 상통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공부한 분도 역시 어느 정도 마음 깊이 공부한 분들은 불교를 충분하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불교를 공부한 분들은 마치 산봉우리 올라가서 보면은 사방이 다 훤히 보이듯이 다른 종교(宗敎)나 다른 철학(哲學) 체계나 그런 것은 다 저 밑에  어느만큼 한계가 있구나 우리가 짐작할 수 있단 말입니다.

다 그런 정도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을 알고 보면은 다른 것을 그때그때 비판하기도 쉽고 또 다른 어중된 어중간한 그런 신앙체계(信仰體系)나 또 철학(哲學)적인 체계나 그런 것에 우리가 혼란을 느끼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 대총상법문(大總相法問)인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을 깊이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부처님 때부터서 중국의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까지 33분의 정통조사(正統祖師)가 계셨습니다. 정통조사란 것은 무엇 인고 하면은 조금 표현은 좀 달리한다 하더라도 부처님 그 정통법문은 조금도 어긋남이 없단 말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 할 때는 정통조사(正統祖師)라 해야 억지로 그냥 후대인들이 그렇게 조금 똑똑하고 훌륭하니까 꾸며서 만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 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정말로 그 삽삼조사 가운데 하신 법문(法問)을 보면은 약간의 표현의 차이 뿐인 것이지 법문이 똑같단 말입니다. 어떤 점에서 똑같은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 똑같단 말입니다.

육조혜능스님께서 그이가  스스로 저술한 것은 아니지만은 그 어른의 즉 말하자면 어록(語錄)을 그 어른의 법문말씀을 제자 분들이 다 수록해 가지고서 편집한 책이 육조단경(六祖壇經)인데  육조단경 보면은 충분히 그것을 느낄 수가 있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 말따나 대총상법문이 온전히 들어 있단 말입니다. 법신이나 또는 보신이나 화신이나 그러기에 여러분들께서 좀 어려우시더라도 적어도 체계적으로 불교를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는 대총상법문인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이 3가지 법문이 모두가 다 하나의 몸이다. 이른바 삼신일불(三身一佛)이란 말입니다.

원래 부처란 것이 법신 따로 있고 보신 따로 있고 화신 따로 있고 뿔뿔이 있으면 그때는 불교가 못 됩니다. 비록 우리 중생이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본바탕인 법신을 말 하고 또는 법신 가운데 들어 있는 만공덕인 보신을 말 하고 또는 법신과 보신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그것이 화신인데 그렇다 하더라도 3가지가 모두가 다 편의적으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그렇게 시설한 것이지 따로 따로 뿔뿔이 있지가 않습니다.

비단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계도 세밀히 미시적(微視的)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하나의 몸으로 돼 있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지금 모두가 하나의 몸으로 돼 있다는 이런 말씀을 납득하시기가 좀 어려우시지요?

우리가 우선 원자 차원만 생각해 보십시다. 지금 우리들 이 방 안에는 벌써 몇 100명 우리 불자님들이 계시지만은 우리가 겉으로 거시적(巨視的)으로 이 모양으로만 본다고 생각할 때는 김씨가 따로 있고 박씨가 따로 있고 인제 뿔뿔이 따로 있겠지요. 그러나 원자 차원으로 산소나 수소나 그런 원자 차원으로 우리가 생각해 볼 때는 내 몸도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그런 것으로 돼 있고 저이 몸도 마찬가지고 또는  우리 몸들을 담고 있는 이 공간도 내내야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그런 원소가 없는 데가 있습니까. 약간의 질량만 차이 뿐인 것이지 결국은 저 사람 몸이나 내 몸이나 이 공간이나 모두가 다 산소나 수소나 질소나 그런 걸로 해서 지금 돼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차원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잘 구분이 안 돼 버립니다. 거시적(巨視的)으로 겉으로 보이는 것은 분명히 내 몸 따로 있고 니 몸 따로 있고 하지만은 우리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원자 현미경 놓고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지가 않단 말입니다.

 저 사람 몸에도 각각 원자가 지금 꾸물꾸물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이고 지금 진동하고 있고 이 사람 몸도 마찬가지고 이 공간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더 들어가서 소립자라. 그 소립자 같은 그 에너지 단계, 에너지 단계에 들어가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결국은 거의 다 하나가 돼 버린다.

우리 불자님들 불교를 공부할 때는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 이란 말씀을 그때그때 순간 찰나도 놓치지 않고서 상기를 하셔야 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그 불성(佛性)으로 부터서 우리 존재나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모두가 다 이루어져 있단 말입니다.

불성을 떠나서 이루어져 있다고 하면 그때는 불교가  돼버리지가 않습니다.

불성 위에서 이루어져 있고 또는 그것이 비단 우리 인간뿐 만이 아니라 다른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든 존재 우리 사람 눈에 보이는 존재나 안 보이는 존재나 우리 사람 눈에 안 보이는 존재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그 세상이라 하는 것은 굉장히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모른다 그래서 안 보인다 그래서 없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귀신세계(鬼神世界)도 분명히 있는 것이고 또는 천상세계(天上世界)도 분명히 있습니다. 극락세계(極樂世界)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 실증적인 것만 좋아하는 사람들은 사람 눈에 안 보이는 것은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우리가 어떻게 믿을 것인가? 공연시리 우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큰스님들이나 모다 도인들이 말씀 해놓은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성인(聖人)들 말씀은 거짓말이 없습니다. 허투로 그런 과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인들 말씀은 진실어(眞實語)라. 진실을 그대로 말씀 하시고 그리고 여어(如語)라. 여법히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불경에 있는 말씀이나 또는 어디가 있는 말씀이나 그런 말씀을 가리켜서 금구성언(金口聖言)이라. 금구성언이라, 쇠 금(金)자, 입 구(口)자, 또는 성인 성(聖)자, 말씀 언(言)자, 말입니다. 다시 어떻게 에누리로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보탤 수도 없고 말입니다. 꼭 그대로 사실 대로 말씀한 말씀이 이른바 금구성언(金口聖言)입니다.

금구성언이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100% 믿으셔야 됩니다. 우리 생명 그대로 표현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불성(佛性)이란 것은 정말로 이것은 우리가 불성을 몰라서는 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손해입니다.

불성공덕(佛性功德)이 어디가 뭐 한계가 있다든가 불성공덕이 조그만 하고 그럼 모르겠지만은 불성공덕이 없는데가 없단 말입니다.

흔히 불경에 열반경(涅槃經)에 있는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 皆有佛性)이라. 이 말은 ‘모든 중생(衆生) 가운데 부처가 있도다’ 하는 그런 부처님 말씀 아닙니까. 모든 사람 가운데 불성이 다 있다. 부처의 성품이 다 있다.

이렇게 말 하면은 잘 모른 사람은 불성이 그러면 내 머리에 가 있을 것인가? 내 심장에 있을 것인가? 또 그렇지 안하면 우리 몸 어느 부위에가 있을 것인가? 또 그렇지 안하면은 우리 몸뚱이에 불성이 가득 차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우리가 의심을 품겠지요.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 말입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적인 생명이 불성이란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오셔서 불성이란 것만 깊이 외셔도 굉장히 큰 소득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천지우주(天地宇宙)의 보배 가운데 불성보다도 큰 것도 없고 더 귀한 것도 없단 말입니다. 제일 귀하고 제일 높고 제일 깊고 제일 행복한 생명 자체가 이른바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헌데 그 불성은 우리 몸 어느 부위에 가서 부분적으로 국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뚱이 온전히 다 불성으로 돼 있단 말입니다. 불성으로... 다른 사람 몸도 마찬가지고 또는 천지우주의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안 된 것이 없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진리(眞理)기 때문에 진여불성이라. 이렇게도 말도 합니다. 또는 법법(法)자, 성품 성(性)자, 법성(法性)이라. 우리 사람한테 있는 그런 불성은 그냥 인격화 시켜서 불성 그러는 것이고 우주에 있는 우주의 본성 그럴 때는 법성 그러는 것인데 내내야 똑 같은 뜻입니다. 다 우주의 참다운 성품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사실은 불성을 모르면은 자기 바탕을 모르는 것이나 똑 같습니다. 자기 고향(故鄕)을 모른단 말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고향을 ‘잃어버린 고향’이라. ‘상실된 고향’이라. 또는 우리가 지금 참다운 자기를 모르고 있으니까 ‘자아(自我)의 회복’이라. 이런 말씀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참다운 자기 회복이라. 그러면 참다운 자기가 무엇인가?

우리 불자님들 우리 중생은 사실은 우리 중생은 참다운 자기를 지금 잘 모르고 삽니다. 참다운 자기가 어떠한 것인가 모르고 삽니다. 또는 우리 인간의 고향인 참다운 고향도 모르고 삽니다. 우리가 자기 태생인 고향을 모른다고 생각 할 때에 얼마나 그것이 참 절망적인 일입니까?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기 고향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그와 같이 허무하고 절망적인 것이 없습니다.

헌데 하물며 그 생명의 고향 우리 생명의 근본 고향이 무엇인가? 이걸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구제할 길이 없습니다.

생명의 고향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바로 불성이란 말입니다.

극락세계(極樂世界)란 뜻도 똑 같습니다. 극락세계는 어느 특별한 사람만 따로 따로 모여서 가는 세계가 아니라 우리 인간 존재나 모든 것의 모든 존재의 근본 고향이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란 말입니다.

극락세계가 없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 인간이 얼마나 살벌하겠습니까. 행복스럽고 영원히 죽지 않고 모든 것을 모든 좋은 것을 다 갖춰 있는 세계가 극락세계란 말입니다.

그 유한적(有限的)인 상대적인 우리 인간이 절대적이고 또는 영생(永生)으로 살 수 있는 그러한 우리의 근본 고향이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우리가 안 가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본래 우리 고향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가 꼭 가야 한단 말입니다.

그 못 가면 어떠는 것인가? 못 가면은 죽도록 고생고생 하다가 아! 남들은 금생(今生)에도 갈 수가 있는 것인데 몇 천생 몇 만생 헤매도 극락세계(極樂世界) 종당에는 꼭 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의 본 고향이고 우리 생명이 거기에서 부터서 나와 있는 그런 우리 뿌리 그런 것이 그런 최상의 나라가 극락세계(極樂世界)기 때문에 우리가 안 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 업(業을) 지어서 뱅뱅 도는 윤회(輪廻) 가운데 개 같이 살다가 개가 되었다가 소 같이 살다가 소가 되었다가 윤회(輪廻) 가운데서 그 극락세계(極樂世界)를 우리 고향을 우리가 잊어버렸단 말입니다.

성자(聖子)의 길이란 것은 다른 길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우리 참다운 자기가 무엇인가? 참다운 자기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른바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이란 말입니다. 불성을 우리가 불성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참다운 자기를 모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아의 회복이라. 잃어버린 자기를 찾는다 하지만은 어떻게 찾을 것인가? 잃어버린 자기가 어디가 있을 것인가? 이걸  모르면 은 찾을 길이 막연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우리 고향(故鄕) 우리의 참다운 생명의 바탕이 바로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불성을 찾아야 비로소 자기를 찾는 것이 됩니다. 불성을 온전히 불성과 하나가 되면 그때는 인제 성자(聖者)가 되고 부처가 되겠지요. 그러나 온전히  체험적(體驗的)으로 하나가 못 된다 하더라도 아 내 참다운 생명은 불성이구나. 이렇게 이해라도 해야 된단 말입니다. 이해라도. 우리 공부는 항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귀로 듣고 또는 머리로 헤아리고 해서 우선은 깊은 이해(理解)를 가져야 됩니다. 깊은 이해를 가진다 하면은 우리가 실천적으로  참 그야말로 체험적으로 불성과 하나가 되어야 되겠지요. 그런데 우리 중생(衆生)들은 불성(佛性)을 잃어버린지가 불성하고 멀리 살아온지가 오래 됐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불성 있는 불성이라는 그런 정말로 우리의 본바탕에 대해서 소홀히 생각한단 말입니다. 소홀히 생각하다가 부처님이나 성인들이나 큰스님들 말씀 듣고서 그때는  빨리 깨달은 분도 있고 또는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아! 그렇겠구나. 역시 그 길로 가야만이 되겠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그때그때 번연히 가질 수도 있습니다.

헌데 우리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살다보면 그래그래 이 현상적인 문제가 쉽지가 않지 않습니까. 정말로 하여튼 한 가족을 꾸려 간다든가 또는 사회에서 어느 지위를 한다든가 말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중요한 그런 가르침이 부처님 가르침이고 성자(聖者)의 가르침이다. 이렇게 안다 하더라도 소홀히 생각하기가 쉽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선 느껴야 할 것은 무엇 인고 하면은 우리 몸뚱이만 생각하는 이른바 육신이라. 살 육(肉)자 몸 신(身)자 육신(肉身)이라. 우리 몸은 이대로 지금 육신 아닙니까? 일반 사람들은 저속하고 또는 생각이 짧을수록 이 육신은 다 누구나가 다 긍정(肯定)을 합니다. 그러면 육신(肉身)보다도 더 깊은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업신(業身)이라. 업업(業)자,  몸신(身)자  업신(業身)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업신은 지금 안 보인단 말입니다. 안 보이나 업신이 분명히 또 존재합니다.

그 업은 무엇인가? 업은 이른바 신구의(身口 意) 삼업(三業)이라. 우리 입으로 말로 해서 짓는 우리 행위, 또는 우리 몸으로 하는 그런 행위, 우리 뜻으로 헤아리는 그런 우리 사고 활동,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업이란 말입니다. 이른바 삼업이라. 몸과 또는 자기 언어와 자기 뜻으로 짓는 그 행위가 이것이 우리가 그때그때 욕도 하고 또는 좋은 말도 하고 또는 좋은 생각도 하고 이렇게 할 때 이런 것이 그때그때 순간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아! 저 놈 나쁜 놈이다’ 이렇게 생각 했으면은 그 생각이 에너지화 되어서 그대로 또 남습니다. 우리 몸에 와서 그 흔적을 둔단 말입니다. 남 미워 하면은 미워하는 그 생각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도 역시 우리 의식에가서 우리 잠재의식(潛在意識)에다가 흔적을 둡니다.

우리가 그 염불(念佛)해라 뭣해라. 이렇게 부처님 법문에 따라서 다 구할려고 하는 것도 무엇인고 하면은 훌륭한 그런 말씀을 우리가 기억한다거나 또는 부처님 이름을 외인다거나 그러면 선악여하에 따라서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모두가 다 우리 잠재의식 (潛在意識)에다가 흔적을 두는 것이 모두가 다 업신(業身)이라. 업신이라.  육신이나 그 업신이나 이 모든 그런 우리 중생(衆生)의 눈에 보이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도 더 깊은 그 본래적인 것은 아까 삼신일불(三身一佛) 이라고 그렇게 했듯이 삼신일불(三身一佛)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인데, 법신 보신 화신 가운데서 법신만 뚝 떼어서 법신이 기본이기 때문에 법신만 똑 떼어서 우리가 업신 다음에 법신을 내세워서 그 육신과 또는 업신과 법신과 이 셋을 또 삼신이라고도 합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이 셋, 그 삼신에 대해서 깊이 기억을 해 두셔야 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이런 것은 우리 생활과 밀접 불가결한 그런 관계가 있단 말입니다.

우리 육신은 금생에 살다가 한정된 자기 수명(壽命)이 다하면 그때는 그대로 사라지고 말겠지요. 그러나 업신은 이 몸뚱이가 설사 사라진다 하더라도 업업(業)자, 몸신(身)자, 우리 뜻으로나 우리말로나 우리 몸으로나 행동한 그 이른바 훈기(薰氣) 에너지인 그런 업신은 사라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업신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윤회(輪廻)를 계속합니다. 윤회를.... 어떤 사람들은  윤회도 역시 부처님께서나  성인들이 우리들한테 좋은 일을 이른바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시키기 위해서 나쁜 일은 않고 좋은 일을 시키기 위해서 지어낸 하나의 방편설(方便說)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은 그렇지 않는단 말입니다.

우리가 업을 지어 놓으면 분명히 업이 남아 있기 때문에 또 우리가 죽어 지면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육체적인 덩어리는 그때는 내내야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모다 그런 것으로 임시간 모아 놓은 것이 몸뚱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없어지겠지요.

그러나 우리  의식에다가 잠재의식(潛在意識)에다가 심어 놓은 업의 종자(種子)는 그대로 남아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업의 종자가 남아 있는 한에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때는 지옥(地獄)으로 아귀(餓鬼)로 축생(畜生)으로 또는 좀 더 나은 걸로 그야말로 아수라(阿修羅)로 인간(人間)으로 천상(天上)으로 우리가 뱅뱅 왔다 갔다 육도윤회(六道輪廻)한단 말입니다. 육도윤회란 것이 그야말로 참 지겨운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런 정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살다가 죽어서 개나 소나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것이 흔히 없는 것이 아니라 흔히 있습니다. 그런 것이 말입니다.

부처님 경전 보면은 자기 집서 기르는 개 한 마리가 지난 세상에 자기 어머니 후신(後身)이란 말입니다. 지금 우리하고 같이 지내고 있는 아들이나 딸이나 또는 부모나 형제간이나 모두가 다 그 윤회(輪廻) 과정에서 뱅뱅 돌아가면서 윤회(輪廻) 과정에서 만나고 또 만나고 다 했던 것입니다.

금생에 아내라 그래서 항시 아내만 되는 것이 아니라 전생(前生)이나 또 그 앞에는 서로 바꿔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행동 하나 말 하나가 불경에서는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일념오백세(一念五百歲)라. 한 생각 얼른 지나가는 그 생각도 오백세 동안이나 결국은 흔적을 둔단 말입니다.

다념무량겁(多念無量劫) 이라. 오랫동안, 가사 남 미워 할 때도 오랫동안 지독히 미워 하면은 그 생각이 무량겁이라. 수많은 세월 동안 그 생각이 그대로 남아 간단 말입니다. 참 지겨운 것입니다.

 우리 생각이라는 것이 이것이 정말로 우리를 행복(幸福)으로 인도하고 우리를 불행(不幸)으로 전락을 시키고 말입니다. 이런 것이 불을 보듯이 다 훤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 업신(業身), 업신을 우리가 소멸을 시켜야 그래야 비로소 우리가 육도윤회(六道輪廻)의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수라(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육도(六度)에 윤회(輪廻)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천상을 말하면 천상이 지금 보입니까? 안 보여도 분명히 천상도 존재합니다.

불교에서 십선업(十善業)을 닦으면은 열 가지 선업을 닦으면은 왕자가 되든가, 금생에 사람으로 태어나면 왕자나 대통령이나 그런 자리가 되든가, 주어지는 그런 과보로 해서 천상으로 태어난단 말입니다.

그 천상락(天上樂)이란 것도 굉장히 훌륭한 행복의 안락세계(安樂世界) 입니다. 천상락도. 이 천상 가운데는 그 여러 가지 건달바 긴나라 모다 그런 여러 가지 선신(善神)이 많이 있어요. 선신이 말입니다.

우리가 하여간 기도(祈禱)를 잘 모시면 그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향내를 우리가 맡을 수가 있습니다. 아주 진동한 향내가 풍겨온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것인가? 이른바 건달바가 좋아해서 선량한 사람이나 또는 우리가 부처님 명호(名號)를 자주 외이면은 그때는  그런 선신(善神)들이 모두가 다 거기에 따라서 아주 환희심(歡喜心)을 냅니다. 그래서 건달바가 우리한테 가까이 와서 향을 풍기고 우리를 갖다가  찬탄한단 말입니다.

또는 그런가 하면은 천고자연명(天鼓自然鳴)이라. 하늘 천(天)자, 북 고(鼓)자, 하늘에서 그 신묘한 정말로 참 아주 그 신묘한 멜로디로 해서 북이 울려온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기도를 열심히 모시고 참선도 열심히 해서 그런 경계를 스스로 꼭 맛 보셔야 됩니다. 분명히 있는 좋은 것인데 우리가 맛을 못 본다고 생각할 때는 얼마나 큰 손해입니까. 하늘에는 분명히 그 북이 있는데 그 북을 가리켜서 하늘 천(天)자, 북고(鼓)자, 천고(天鼓)라 그래요. 천고자연명(天鼓自然鳴)이라. 그 하늘에 있는 북은 저절로  울려옵니다.

하늘에 있는 그 북소리가 그것이 이 세상에서 어떠한 명곡도 그와 같이 신묘(神妙)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런 북 소리를 들으면은 그 제아무리 거치럽고 악독한 사람도 그때는 마음이 유연히 참 그야말로 불교 말로 유연선심(柔軟善心)이라. 아주 부드럽고 정말로 애틋하고 말입니다. 그런 마음을 그냥 느낀단 말입니다.

그런 북 소리가 천상(天上)에는 항시 울려와요. 울려오고, 천상까지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천상적인 마음도 다 갖추고 있고 우리 마음은 본래의 자리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로 불성(佛性)이라. 바로 부처님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 닦기 여하에 따라서는 별스러운 신비로운 것을 다 우리가 맛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원통스럽게도 우리 중생들이 눈앞에 보이는 이 몸뚱이 육신(肉身)만 생각하고 말입니다. 가시적(可視的)으로 우리가 느껴지는 그런 재산이라든가 또는 여러 가지 그런 감투라든가 이런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것에 가리어서 그런 신비로운 행복스러운 신묘(神妙)한 경계가 우리가 모르게 되는 것이지 정말로 우리가 마음을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그 성자의 가르침 따라서 불성의 길을 바로 간다고 생각할 때는 그 불경(佛經)에 있는 가지가지의 신통묘지(神通妙旨)가 다 그대로 나올 수가 다 있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말씀은 이것은 허설(虛說)이 없단 말입니다. 허망한 말씀이 없습니다. 다 그래서 그 업신(業身) 업신을 우리가 항시 느껴서 속상해서 남한테 함부로 말을 할라 했다가도 이래버리면 또 그냥 또 업이 되어가지고서 이것이 몇 생 갈려는지 잘 모르겠구나.

금생에 남한테 미움 받는 것도 과거(過去) 전생에 자기가 남을 미워해서 그럽니다. 어느 것도 우리가 받는 지금 현세에 받는 가난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나, 또 몸이 자주 아파서 병고 때문에 곤란 받는 것이나, 어떠한 것이나, 금생에 자기 집이 불나서 타지는 것이나, 모두가 다 과거 지어서 다 받아요. 모두가 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 같이 그와 같이  무수겁(無數劫) 동안에 선근(善根)을 닦고 모든 공덕(功德)을 다 심은 분도 금생에 또 10번이나 어려운 때가 많이 있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한 동안은 저 아디다 바라문 촌에 가서 3개월 동안에 오백비구(五百比丘)와 같이 모두 더불어서 그때 마침 흉년(凶年) 들어 가지고서 쌀도 다른 아주 그 알곡은 별로 없단 말입니다. 귀리만 잔뜩 수확 되어 가지고서 오백 비구와 더불어서 그 3개월 동안 귀리만 자시고 살았단 말입니다.

그것도 역시 부처님께서 우연히 금생에 받은 것이 아니라 억지로 고행(苦行) 할라고 그래서 그러신 것이 아니라 과거 전생에 부처님께서 복을 좀 덜 지었어요.

무슨 복을 덜 지었던가? 그런 것이 불경에는 다 나와 있습니다. 금생에 부처님께서 제바달다 자기 종제한테 그때그때 짖궂게 당한 일이 많이 있지만은 그런 것도 모두가 다 부처님께서 과거 전생에 제바달다 자기 종제한테 또 그마만치 짖궂게 굴었단 말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그런 그 업을 생각할 때는 절대로 함부로 우리가 못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업신(業身)을 생각해서 우리가 업을 지어서 우리가 죽을 때는 몸뚱이는 버리고 업신 가지고 갑니다. 업신 가지고, 그 업신과 걸 맞는 또 부모를 발견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보통은 부전자전(父傳子傳)이요 또는 모전자전(母傳子傳)이요. 인제 부모를 닮지 않습니까.

닮은 꼴로 다 자기 부모를 고른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모를 고르는 것도 결국은 자기 업으로 고르기 때문에 금생에 우리가 잘 닦아야, 닦고 죽어야 만이 결국은 육신 버리고 갈 때에 우리가 업신 가지고 간다 하더라도 같은 좋은 업끼리 만나는 부모하고 인연이 된단 말입니다.

헌데 그 업신을 우리가 빨리 녹이고서 삼계(三界) 육도에서 윤회를 안 해야 할 것인데 윤회를 않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가장 옳을 것인가? 언간에 그냥 아차 하는 동안에 업을 지어 버리지 않습니까.

남 미워도 안 해야 되겠다 하면서 또 누구 만나서 그 과거 전생에 미워 할 인연이 닿으면 그때는 또 미워지고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저런 여러가지 업을 녹이는 작업이 또 우리 불교에는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이른바 법신(法身)이라. 법신 자리에 법신 자리에다가 우리 마음을 항시 머물게 한단 말입니다.

법신이란 것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 불(佛)자, 마음 심(心)자, 바로 불심(佛心)이고 말입니다. 또는 부처 불(佛)자, 몸 신(身)자, 그때는 불신(佛身) 그래도 무방한 것이고 말입니다. 또는 법 법(法)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 그래도 무방한 것이고 같은 뜻 이예요.

모두가 다 법성이나 불성이나 불신이나 또는 불심이나 똑 같은 뜻입니다.

그것은 모두가 다 일체존재의 근본 바탕을 말 한단 말입니다. 사람의 바탕을 말 할 때는 그때는 불심 말해야 가장 더 타당이 되겠지요.

그 어떻게 말 하든지 간에 모든 존재의 근본바탕 자리인데 거기다가 마음을 두지 않는 한에는 우리 마음은 온전히 다스려지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러한 우리 마음을 안정되게 할라면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을 근본성품(根本性品) 자리에다가 머물게 할 것인데 머물게 하는 공부 가운데서 가장 그런 수승한 공부가 이른바 참선(參禪)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참선에 대해서 너무나 그냥 첫 박스로 어렵게 생각을 하시는 그런 분들이 더러 계십니다. 근데 참선이라는 것도 역시 우리가 알고보면은 가장 쉬운 것입니다. 부처님 법이 알고보면은 사실은 가장 쉬운 법이란 말입니다. 어디서 꾸어 온 것도 아닌 것이고 말입니다. 내내야 자기가 다 본래 갖추고 있는 그 자리를 계발한 것이기 때문에 제일 쉬운 것이 부처님 법이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참선법도 따지고 보면은 부처님 법 가운데서 부처가 되기 위한 가장 간편하고 가장 압축된 이른바 대총상법문이 바로 참선법이기 때문에 가장 쉽습니다.

그러면 그 참선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여러 가지로 말씀들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우리 한국도 각 불교 그 다종교(多宗敎)사회인지라 종파(宗派)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말씀들을 많이 합니다. 이 종파는 또 어느 참선법을 말 하고 저 종파는 또 다르게 말 하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여러 가지 참선법이 대체로 세 가지로 구분해 있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이런 그 부처님 법 가운데 성불하기 위한 가장 지름길이 이른바 참선의 길인데 참선 길이 세 가지 법으로 보통 구분 돼 있단 말입니다.

한 가지는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 한국 지금  조계종(曹溪宗)에서 일반적으로 하는 바와 같이 어느 문제 어느 화두(話頭)를 우리가 의심(疑心)한단 말입니다.

어느 문제를 의심 하면서 그 화두를 풀어 나가는 그런 방법이 있습니다. 화두란 말은 또 공안(公案)이라고 말도 합니다만은 그러한 그 공안을 풀어 나가는 그런 참선법이 있고,

또 한 가지는 그런 공안 법이 아니라 그런 문제를 설정 하지 않고서 그냥 명상적으로 우리 마음이 원래 부처거니 이렇게 생각 하면서 그 부처를 잠자코 비추어 보는 그러한 법도 있습니다.

이것은 학문 적인 술어로 하면은 그때는 아 묵조선(黙照禪)이라 이렇게 말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일본(日本) 사람들은 주로 그 묵조선 쪽에다가 관심을 더 두어서 묵조선 하는 사람들이 훨썩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은 특히 조계종(曹溪宗) 같은 그 종파(宗派)에서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화두공안(話頭公案)을 의심 하는 그런 참선법이 거의 대부분이란 말입니다.

또 한 가지는 어떤 법인고 하면은 그 우리가 본래 부처고 앞으로도 우리가 부처가 돼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본래 부처인지라 본래 부처인 자리를 떠나지 않고서 꼭 앞으로 부처가 돼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부처님을 순간 찰나도 놓치지 않고서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 마음을 깨닫게 하는 그런 방법이 이른바 염불(念佛) 참선법(參禪法)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법이 있습니다.

세 가지 법이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쁘다고 할 수가 없어요. 다 도인들이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모두 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세 가지 법을 우리가 다 놓고 본다고 생각할 때에 따져 보면 결국은 다 하나의 법이란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내내야 결국 우리가 본래로 부처인 것이고 또 우리가 앞으로도 부처가 되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내내야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고 걸음걸음 부처가 되어 가면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가 않은 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우리가 하도 금생에 나와서도 업을 많이 지었단 말입니다. 이래저래 우리가 그런 부질없는 망상분별(妄想分別)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화두(話頭)를 의심 하나 또는 화두가 없이 그냥 잠자코 묵묵하니 명상적으로 공부하는 우리가 묵조선(黙照禪)을 하나 또는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가 되어가는 그런 염불선(念佛禪) 공부를 하나 그렇게 쉽지가 않단 말입니다.

쉽지가 않더라도 우리가 참선을 해야 하니까 인제 꼭 우리가 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이른바 우리가 업식(業識)을 녹여서 법신(法身)하고 하나가 돼서 즉 말하자면 우리가 성불(成佛)의 길로 나아갈 수가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불자님들은 이 가운데서 여러 가지로 그런 공부 문제에 애를 많이 쓰시기도 하시고 경험도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재차 한번 생각을 깊이 해서 말입니다. 정말로 내가 어떻게 참선을 해서 성불을 빨리 할 것인가?

사실 부처님 가르침을 바로 안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가 되는 길 보다도 더 수승(殊勝)한 길은 없습니다. 부처가 되는 길 보다도 더 급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 생명이 이것이 얼마나 허망합니까. 저 같은 사람도 작년에라도 죽어버렸으면은 여기 와서 이런 말씀을 드릴 수가 없지요. 그 어느 누구나가 언제 안 죽으라는 법이 없단 말입니다. 나이 먹어지면 그 응당 그것은 다 죽는 것이고 말입니다.

따라서 죽음 이라는 것은 노소부정이라. 늙다 그래서 빨리 가고 젊다 그래서 늦게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그때 인연(因緣)이 닿으면 결국 가진단 말입니다. 인연이 가기 전에 인연이 다 하기 전에 우리가 공부(工夫)를 익혀둬야 공부의 습관성(習慣性)을 많이 붙여둬야 그래야 우리가  업신(業身)으로 윤회(輪廻)를 안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냥 죽자마자 몸뚱이 버리자마자 그 업신 가지고서 다시 우리가 뱅뱅 도는 윤회의 과정에서 고생한단 말입니다. 호리찰나도 그때는 사정이 없습니다. 꼭 자기가 지은 대로 받는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금생에 공부를 부지런히 해서 즉 성불(成佛)의 지름길이 참선(參禪)인데 참선을 부지런히 해서 공부를 해야 할 것인데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화두공안(話頭公案)을 의심하는 그런 법 또는 화두공안이 없이 그냥 마음을 명상으로 비추어 보는 그런 묵조선(黙照禪), 또 한 가지는 부처님을 생각하고 순간 찰나도 부처님을 놓치지 않고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부처가 되어 가는 염불선(念佛禪 ) 3가지가 있단 말입니다.

이 3가지 가지고도 여러 스님네나 위대한 분들이 여러 가지로 논쟁(論爭)을 많이 했습니다. 논쟁이 지금도 끝나지 않으니까 그때그때 모다 일본(日本)은 뭣이 더하고 한국(韓國)은 어떤 것이 더하고 그런 차별이 있게 되겠지요? 여러분들께서도 여러분의 성격을 스스로 반조(返照)를 해서 말입니다.

나한테는 과연 이 3가지 방법 가운데 어느 방법이 가장 맞을 것인가? 이렇게 선택을 빨리 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거기다가 온 혼신의 힘을 다 경주해야 한단 말입니다.

인생(人生)이 허망(虛妄)한 것인데 허망한 인생 가버리기 전에 우리가 힘을 얻어야 됩니다.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이른바 득력(得力)이라. 득력이란 것은 우리 공부가 행습(行習)이 돼서 다른 삿된 것이 거기 낄 수가 없이 오롯이 이렇게 물이 흘러가듯이 흘러가는 것이 이른바 득력이란 말입니다.

기왕 불교를 믿으면 또는 불교를 믿는 것이 참다운 자기를 찾는 길이고 참다운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가장 좋은 길이라고 하면은 그보다도 더 위대하고 급한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 길은 또 우리가 어디서 누구한테 빌려서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른바 우리가 지금 가는 길은 소를 타고 소를 지금 찾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법을 모를 때는 자기가 소를 타고 소를 찾고 있는 것을 모르지만은 그 불성(佛性)이라는 것은 어디가 다른 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본바탕이 부처고 우주(宇宙)의 본바탕이 바로 부처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은 소를 타고서 지금 소를 찾는 것이나 똑같은 이치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디에다가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한테 갖추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다만 얼마만치 우리가 습관적으로 우리 마음을 훈련을 시켜서 그 부처님 공부가 계속 되도록 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한단 말입니다.

다 그렇게 돼  놓으면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이 흘러가듯이 인제 공부가 흘러간단 말입니다. 몸도 가벼워지고 머리도 시원해지고 말입니다. 판단도 명석해지고 동시에 하늘에서는 또 그 알 수 없는 신묘(神妙)한 그런 멜로디가 흘러나온단 말입니다.

인생이란 것은 그 여기나 저기나 행복으로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제대로 그것을 발견을 못한단 말입니다.

참선(參禪)하는 것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부처가 되는 것이 최상(最上)의 지상의 위없는 길이라고 하면은 위없는 그런 참선의 길을 이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축복(祝福)입니다.

만약 참선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인생의 최상의 행복(幸福)을 우리가 놓치고 만단 말입니다. 우리가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다른 종교(宗敎)도 다 숭상을 합니다. 숭상을 하나 우리가 아무리 우리 불교(佛敎)를  겸허하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우리 불교는 다른 모든 종교를 다 포함해 있습니다.

지금 이 현대란 사회가 참 그야말로 아주 과학만능시대(科學萬能時代) 안 되겠습니까? 그리고 더구나 지구촌이고 또는 세계화시대고 여러가지 그런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합니다만은 이러한 그 복잡다단한 때라 놔서 이런 모든 세계(世界)의 문화현상을 다 우리가 아주 포괄해서 말입니다. 하나의 체계로 딱 묶어야할 것인데 그렇게 할려고 생각할 땐 불교 아니면 그런 가르침이 없습니다.

불교 가운데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기독교나 또는 이슬람교나 그런 세계적인 종교도 다 다 들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씀 하시는 그런 일신교(一神敎)도 역시 사실은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슬람교 일신교도 역시 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철학(哲學)도 가사 그야말로 실존철학(實存哲學)이나  또는 이른바 분석철학(分析哲學)이나 어떠한 철학도 그 체계가 그대로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부처님 법 가운데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러한 것은 어느 부분만 말씀하신 것인데 부처님 가르침은 모두를 다 원만무결하게 원융(圓融)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설사 우리 불자님들이 지금 불교를 공부 않고 다른 것을 공부한다 하더라도 우선 그 다른 것을 보다 더 훌륭하게 성취를 시키기 위해서라도 불교를 해 두면은 굉장히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 불자님들 그러한 그 보배의 우리가 곳집을 마다고 해서는 자기 인생의 큰 손해입니다. 그러기에 불교(佛敎)를 믿는다는 것은 불교를 믿는 그것이 그보다도 더 큰 축복(祝福)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 하는 사람들이 불교가 그렇게 여러 가지로 해서 공덕(功德)이 많다 하더라도 불교를 공부할려면 그것이 어렵지 않겠는가? 절대로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 한문(漢文)자 일일이 다 배워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다 우리가 독파(讀破)할라면은 어렵겠지요. 저 같은 사람도 몇 십년동안 불경(佛經)을 했다 하더라도 팔만장경 다 본 것이 아닙니다.

그런 문자로 해서 그런 교리로 해서 할라고 들면은 그때는 그거는 안 되는 것인데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다 불성 가운데 다 들어 있단 말입니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 참선 하나 염불 하나 불성이란 그런 관념을 그런 개념을 절대로 놓치지 말으십시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가 가령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외인다 하더라도 그냥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을 그 애쓰고 외우면은 우리한테 부처님이 우리를 도와서 가피(加被)를 주신다. 이렇게 생각하는 그런 염불(念佛)은 이것은  방편염불(方便念佛)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본래로 부처고 이 우주(宇宙)의 모든 존재가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본래로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그때는 염불선(念佛禪)이란 말입니다.

또 더 풀이해서 말씀 드리면은 같은 염불이나 또는 다른 공부나 말입니다. 다른 공부나 간에 모두가 다 모든 공부가 참선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참선이라는 것은 부처님 성품을 부처님 법을 우리가 깨닫는데 있어서 가장 최상의 길이라고 하면은 그런 최상의 길인 참선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이것도 역시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본바탕을 떠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본바탕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이것은 이른바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를 안 떠나고 우리가 공부한단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화두공안(話頭公案)을 의심(疑心)해서 나한테 갖추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내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 이렇게 의심을 한다 하더라도 그 본래면목자리 본래 우리 불성(佛性) 자리를 놓치지 않고서 불성 자리를 우리가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것도 역시 훌륭한 참선법(參禪法)이 됩니다.

아까도 얘기 한 바와 같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 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우리가 외인다 하더라도 막연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많이 외이면은 그것도 공덕(功德)은 공덕이지 만은 그것만으로 해서는 참선(參禪)이 못 된단 말입니다.

참선이 되기 위해서는 그 불성(佛性)을 떠나지 않고 내 본래(本來) 마음이 본래로 바로 부처님이다. 우주(宇宙)의 모든 존재가 바로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염불(念佛)을 해야 그래야 이른바 염불참선(念佛參禪)이란 말입니다.

너무 말씀을 많이 드리면은 또 외시기도 곤란스럽고 하실 것입니다. 한데 아까도 이 말씀마따나 인제 불교(佛敎)는 정말로 가장 쉬운 공부입니다. 왜 쉬웁는가 하면은  없는 것을 억지로 구하는 것도 아닌 것이고 있는 그대로 또는 우주의 궤도를 그대로 가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은 어느 누구나가 다 본래로 부처기 때문에 장차는 다 부처가 돼 갑니다. 부처가 돼 갑니다. 따라서 부처가 되는 길이 바로 우주(宇宙)의 정다운 궤도입니다. 부처가 안 되는 것은 우리가 궤도를 이탈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궤도, 궤도에 진입해서 궤도를 따라 간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삿된 것이 침범을 못 합니다.

우리가 재수나 운수나 모든 것이 나한테 빨리 와야 되겠다. 이렇게 마음먹을 때도 그 부처의 길을 제대로 따라서 가야 된단 말입니다. 그래야 재수나 운수나 어떤 면으로 보나 우리한테 최상으로 인도하는 법문이 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선(參禪) 하는 법을 제가 다시 한번 되풀이하고 제 말씀을 끝맺겠습니다.

참선 하는 법은 이것은 최상(最上)의 성불(成佛)하는 지름길인데 한 가지 법(法은) 그 어느 문제를 의심(疑心)으로 풀어가는 말입니다. 의심으로 풀어서 우리가 본체(本體)를 놓치지 않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놓치지 않는 그런 의심을 주로 하는 법이 화두공안(話頭公案)의 그런 참구(參究)하는 법이고,

또 한 가지는 화두공안이 없이 잠자코 명상적으로 말입니다. 마음을 비추어서 명상적으로 우리가 관조해 나가는 그런 법이 이른바 묵조선(黙照禪) 법인 것이고,

그리고 한 가지는 우리가 본래 부처인지라 본래 부처고 우리가 본래 또 부처이니까 인제 반드시 앞으로도 부처가 돼야 되겠지요. 부처가 부처 되기 위해서 부처님을 순간 찰나도 놓치지 말고 원칙은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인데 우리가 지금 놓치고 산단 말입니다.

순간 찰나도 부처를 놓치지 않고서 그 진여불성(眞如佛性) 그 불성을 온전히 우리가 느끼고 찾고 그런 그 불성을 그대로 보존해서 부처가 바로 되어 간단 말입니다. 이른바  염불참선(念佛參禪) 3가지 법이 있단 말입니다.

3가지 법 가운데서 여러분들께서 그때그때 생각을 많이 해서 나한테는 대관절 어떠한 것이 가장 맞겠는가? 내 성질이 감성적(感性的)인가? 내 성질이 그야말로 이지적(理智的)인가  말입니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해서 역시 감성적이고 정서가 풍부한 분들은 생명(生命)을 생명으로 구하는 그런 참선법이 이른바 염불참선법(念佛參禪法)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로 우리가 불성(佛性) 그러면은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부처님 성품인 것이니까 인격적으로 생명(生命)을 생명으로 구하는 법은 이것은 역시 염불 참선법이고 말입니다.

또는 그 화두로 해서 의심으로 풀어 나가는 것은 이것은 하나의 추구하는 그런 법이기 때문에 이른바 이지적인 말입니다. 지성적인 그런 쪽으로 인제 나가니까 인제 쉽겠지요. 따라서 그런 성격의 소유자는 이른바 철학적(哲學的)으로 탐색해 나가는 이지적인 그런 법도 좋겠지요.

아무튼 3가지 법 가운데서 여러분들께서 재량하셔서 스스로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본사아미타불!


20000402-성륜사 정기법회-청화대선사 설법

20000402-촬영-정안 이성도

20050912-DVD동영상작업-본정 김영동

20080316-녹취 워드작업-주안 한동일


*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용으로 큰스님 말씀 그대로 받아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