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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제53호 성륜사 정기법회

                 <제 53 호>       


20000305-성륜사 정기법회


     상락아정(常樂我淨)


리 마음은 하루 낮 하루 밤에 팔억사천만념이라, 팔억사천 생각이 오락가락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 마음 그러면 쉽게 간단하게 생각합니다만 마음이란 이것이 굉장히 심수오묘한 것입니다.

내 마음 하고 또 그대 마음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또는 부처님 마음하고 우리 마음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이런 것을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이 복잡해지고 어려워집니다. 이렇게 우리 마음이 하루 밤 하루 낮만 하더라도 팔억사천 생각이나 오락가락하니까 마음을 자기 뭣대로 내버려두면 큰 탈입니다.

따라서 그 방일한 마음을 다잡아서 본래의 마음자리, 본래의 마음자리를 깨달은 분이 이른바 성자(聖者) 아니겠습니까. 우리 중생들은 본래의 마음자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범부(凡夫)요 중생(衆生)입니다.

우리는 공부를 좀 한다해도 했다 말았다 하는 그러한 게으른 생활을 흔히 하게 됩니다. 이런 때는 우리들의 선배로 해서 정말로 신명(身命)을 내 걸고서 도(道)를 구하고 공부하신 그런 분들을 귀감(龜鑑)으로 본보기로 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그런 분들 가운데서 그 중국에서 인도로 가서 법을 구하여 온 구법승(求法僧)들, 구법승들의 행적은 우리한테 정말로 비장한 각오와 뜨거운 감격을 일으키게 합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에 다만 몇 시간동안 가령 두 시간이나 한시간동안 참선한다 하더라도 오로지 공부가 순일(純一)하게 한결같이 되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밤에 안자고 철야 공부를 한다 하더라도 그 밤 동안에 오로지 온전히 망상(妄想) 없이 공부했다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성자 외는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한 3개월 동안이나 또는 한 3년 동안이나 공부한 사람도 그렇게 많지도 않지만 또 그분들도 만족허니 내가 조금도 회한(悔恨)이 없다 후회가 없다 이렇게 만족하는 분들은 성자 아닌 한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5세기부터서 6세기, 7세기 8세기 그동안의 중국의 구법승들 인도로 가서 법을 구해온 분들, 그분들을 생각하면은 정말로 우리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그 중국에서 고비사막을 건너야 되고, 고비사막 건너는 것도 그냥 하루 이틀에 건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몇 달 걸린단 말입니다,

그 풀 한 포기도 없고 하늘에는 나는 짐승도 없는 그런 벌판을 몇 달을 걸려서 간단 말입니다. 또는 사막에 바람이 불면은 있던 언덕도 무너져버리고 없던 언덕이 다시 생기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저는 큰 사막은 못보고 작은 사막만 봤습니다만 정말로 그 몇 달이고 그런 큰 사막을 우리가 건너간다고 생각할 때는 고생이 얼마나 심허겠습니까.

그런데 도를 구해서 중국에서 인도로 가신 분들 그런 분들은 보통은 자기들이 하나의 팀을 짜겠지요. 한 30명이나 10명이나 그렇게 적당히 팀을 짜겠지요. 그러면은 정작 출발할 때는 보통 한 30명 짜도 그 3분의 1도 남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저래 사정 때문에 또는 결심이 안서서 중도에 그만 둔단 말입니다.

그래서 정작 중국에서 인도까지 건너가서 법을 구해 오는 분들은 정말로 십진구퇴(十進九退)라 열사람 가운데 한사람 정도라는 것입니다.

고비사막을 건너고 또 파미르고원, 파미르고원을 가리켜서 옛날에는 총령(叢嶺)이라, 이렇게 말을 합니다. 떨기 총叢자, 뫼뿌리 령嶺자, 총령이라, 총령은 파미르고원이기 때문에 평균 고도 한 오천 미터나 되는 그런 고원지대입니다. 그런 고원지대도 몇 일 동안 건너는 것이 아니라 몇 달 동안 건넌단 말입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인도까지 갈라면 적어도 그 당시 한 30여 나라의 국경을 거친단 말입니다. 오늘날 같이 편리한 때도 그 비자가 있고 뭣이 있고 하는데 하물며 천년이상 되는 그때 있어서 한 국경을 넘고 길도 없는 길을 헤쳐 나가는 그런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그래서 그 편도, 중국에서 인도까지 가는, 가는 기간이 보통 3년 동안 걸린다고 합니다. 3년 세월을 사막에서 고원에서 보낸단 말입니다.

그렇게 오랜 동안 시일을 보내고서 무사하면 모르겠지만 가다가 쓰러진 분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막을 지나갈 때나 고원을 건널 때나 그 구법승들 도를 구해서 인도로 가신 분들의 해골이 여기 저기 널려 있단 말입니다. 그런 것을 본다고 할 때에 얼마나 적막하고 또는 구슬프고 그러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중국으로 건너온 불경을 우리가 지금 우리 한국말로 번역해서 또 어렇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기만 해서 3년 세월 동안 걸리고 또 가면은 말이 안 통하니까 말을 배워야 되겠지요. 말 배워서 그 쪽 공부 그 쪽에서 공부하는 것이 또 한 6, 7년 걸려버린단 말입니다. 외국어 공부라는 것이 어려운 공부 아닙니까. 그 심오한 뜻을 알려고 생각할 때는 그냥 한 해 두 해 해서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한 7, 8년 걸려버리면 또 올 때는 살아올지 죽어올지 모르는 길을 또 출발한다는 말입니다. 그냥 배낭하나 짊어지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가급적이면 많은 불경을 낙타에다 지우고 일꾼에게 지우고 자기도 지고 온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아까 말씀마따나 파미르고원을 넘어야 되고 고비사막 건너야 돼서 또 3년 넘게 걸립니다. 그래서 갔다 왔다 하다보면 한 20년 세월이 걸려버린단 말입니다.

다행이도 우리나라의 그 혜초(慧超 704~787)스님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혜초스님도 그 가운데 한 분입니다. 구법승이 한 둘이 될리오만은 그래도 유명한 구법승들은 중국의 5세기 때 법연대사, 법연대사가 맨 처음에 구법승으로 해서 인도에 갔다 오신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그분은 갔다 와서 불국기(佛國記)라 하는 아주 훌륭한 하나의 여행기를 자기가 견문한 것을 부처님 법에 비추어서 여행기를 지었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아는 현장법사 서유기(西遊記)에 나오는 현장법사. 현장법사도 중국에서 인도로 가서 법을 구해 왔습니다. 그분은 아까 그 법연대사는 육지로 갔다가 바다로 왔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기왕이면 보다 더 견문을 넓히고 많이 공부를 하기 위해서 그렇겠지요.

육지로 갔다가 바다로, 육지를 갈 때는 아까 말씀마따나 사막을 건너고 파미르고원을 넘고 바다로 올 때는 저쪽 스리랑카 옛날에는 거기가 사자도(獅子島)인데 그쪽으로 해서 뱅뱅 돌아온단 말입니다. 그때도 몇 번이나 풍파를 만나고 죽을 고비를 그때그때 다 맞이한단 말입니다.

그래가지고서 법현스님은 육지로 갔다가 바다로 오고 아까 현장법사는 육지로 갔다가 바로 육지로 왔습니다. 또 그 다음에는 의정법사, 의정법사라고 이분은 바다로 갔다가 바다로 왔단 말입니다.

그렇게 그 한 길로 갔다가 아는 길로 갔다가 다시 그 길로 오면 훨썩 쉬울 것인데 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하기 위해서 그런 길을 자꾸만 바꾸니까 훨썩 고생도 더 많아지겠지요.

우리 혜초스님은 바다로 갔다가 육지로 왔습니다, 그래서 혜초스님께서 전해준 것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란 훌륭한 또 견문기를 냈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불경이 그렇게 많은 그런 구법승들 또는 제대로 법을 구하지도 못하고 순교한 순교승(殉敎僧)들 그분들 덕분에 우리가 지금 불경을 앉아서 배우고 편안히 수행하고 다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갔다 왔다 하기만 해도 한 6년 세월 걸려버리고 거기 가서 공부한 세월까지 합치면 적어도 한 20년 동안의 세월이 거의 걸려버립니다. 그런 동안에 그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그런 일을 참고해 볼 적에 우리가 얼마만치 우리 생명을 아껴서 공부해야 할 것인가를 깊이 느껴야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한 3개월 동안이나 3년 동안을 공부하기도 사실은 참 지리합니다. 저 같은 사람도 삼년결사(三年結社)를 몇 번 했습니다만 처음에는 그냥 뭐 번쩍하면 가겠지 도리어 너무 짧은 동안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은 허다보면 그렇지가 않단 말입니다.

그 동안에 여려가지 장애가 많이 있습니다. 건강도 어떤 때는 거북한 때가 있고 또 사람 장애가 있고 또는 도반들 지지리 애쓰고 우리가 신명을 다해서 공부하겠다는 분도 역시 마음이 또 변한단 말입니다.

한 20명이나 삼년결사 한다고 앉아 보면 보통은 한 반 정도는 마음이 변한단 말입니다. 그것이 여러 가지 부득이한 그런 이유도 있겠습니다만 그렇지 않고 공부에 대한 그런 해태심(懈怠心) 때문에 변하는 경우가 많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란 것이 아주 그야말로 잘못 쓰면 그런 요물이 없습니다. 잘 쓰면 그때는 바로 부처가 되니까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만 우리가 잘못 쓰고 잘 쓰고 함에 따라서 그런 큰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요물 같은 그런 마음을 우리가 다잡아서 정말로 그 부처가 되는 그 길로 일로매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별시수행(別時修行)이라 오로지 사흘이고 또는 한 달이고 3개월이고 몇 년이고 공부하는 것도 필요하지만은 먼저 우리가 이론적(理論的)으로 체계가 안서면 안 된단 말입니다. 우리가 하루 길을 가더라도 길목을 잘 모르면 불안스럽지 않습니까.

따라서 먼저 논리적(論理的)으로 우리가 공부하는 그런 체계를 명확히 한단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 어떠한 것이 가장 중요한가? 그러면은 우리가 흔히 많이 알고 있듯이 또는 법문도 많이 듣고 또는 불경가운데서 여러 가지로 좋은 말씀도 많이 읽어서 알고 있듯이 우리 마음이 어떠한 것인가? 우리 마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고 마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면 마음을 깨닫는 그런 가장 지름길인 동시에 확실한 길을 우리가 잡아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 내 마음 뭐 내가 충분히 알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랑가 모르겠지만 우리는 우리 마음을 잘 모릅니다. 우리의 그런 번뇌망상으로 분별하는 그 마음가지고서는 우리 마음의 본바탕을 모릅니다.

우리 마음은 분명이 체(體)와 용(用)이 있습니다. 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마음의 그 본래면목(本來面目) 마음의 본래 성품자리란 말입니다. 용이라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성품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이루어지는 모든 그런 현상적인 이런 명상(名相) 이름과 하나의 허망한 그런 상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쉽게 인연법(因緣法), 인연법을 들먹이고 예기합니다만 사실 인연법이란 것이 어느 것도 우리 눈에 보이는 어떠한 것도 인연따라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중론(中論)이라는 용수보살(龍樹菩薩), 제2의 석가(釋迦)라는 용수보살이 중론에서 말씀하시기를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이라, 인연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바로 그대로 빈 공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인연따라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선 우리 몸이 그렇고 우리 마음도 그렇고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모두가 다 인연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나투었단 말입니다.

인연따라서 모양을 나투고서 그대로 고정적으로 가만히 있으면 모르겠지만 인연따라서 모양을 나툰 것은 이것은 어떠한 것이든 간에 조금도 머물러 있지가 않습니다. 그때그때 변화무상하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고통이 어째서 오는가 하면은 인연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것을 우리가 고유한 걸로 집착(執着)한단 말입니다. 우선 그런 집착 가운데 우리 망상 가운데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른바 아견(我見)이라, 나 아我자, 볼 견見자. 나라는 것에 집착하는 그 마음이 제일 무섭습니다.

왜 무서운고 하면은 나라는 존재에 집착하는 그 마음 때문에 모든 죄악(罪惡)이 생긴단 말입니다. 우리가 많이 듣고 많이 알아서 알지만은 불교는 무아(無我)의 길이라, 없을 무無자, 나 아我자 내가 없는 그런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불교는 무아의 도리만 알면 다른 것은 쭉쭉 풀려갑니다. 내가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왜 내가 없는가? 부처님 가르침은 이론적(理論的)으로 조금도 흠결(欠缺)이 없습니다. 가장 철학적(哲學的)이고 가장 과학적(科學的)이고 말입니다. 또는 가장 고도한 심오한 종교적(宗敎的)이고 부처님 가르침은 그와 같이 그러한 것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봐서 조금도 모순도 없고 아까 말씀마따나 체와 용을 근원적인 그런 본체(本體)와 또는 현상적인 용을 갖추고서 조금도 흠결이 없고 또는 나아가서는 우리 인간과 모든 존재의 근본 생명자리인 부처를 성취한단 말입니다.

다른 성자의 가르침도 다 필요한 가르침이나 적어도 하나의 체계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 가르침 같이 완벽한 그런 체계는 없습니다. 제 말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불교를 연구해본 분들이나 또는 지금은 동서 철학자나 그런 분들도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긍정을 다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 같이 가장 궁극적(窮極的)인 그런 철학적 진리(眞理)인 동시에 가장 합리적인 과학이고 또는 동시에 그 모든 존재의 생명의 본바탕인 부처를 성취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우리 마음, 우리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가 확실히 알고 공부를 해야 공부도 쉽고 또는 다른 것에 대해서 우리가 침해를 안당한단 말입니다.

근데 쉽게 보통 마음이 바로 부처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 불교인들로 해서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기 때문에 마음 닦으면 부처가 되겠지 이렇게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마음이 어째서 부처인가? 이렇게 우리가 또 파고 들어가면 그때는 좀 멍해진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지금 모양이 있습니까? 내 마음 네 마음 그러지만은 모양이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복잡한 말로 하면 그때는 시간성(時間性)도 공간성(空間性)도 없는 것이 우리 마음 아닙니까. 모양이 없으면서 내가 지금 살아 있으니까 분명히 마음은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 부처님은 모양이 있는가 없는가? 우리가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을 얘기할 때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해서 역사적으로 나오셨다가 이미 가셔 버렸기 때문에 모양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숭상하는 부처님은 무엇인가? 우리가 마음을 닦아서 깨달아서 부처가 되는 부처님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그런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오시고 안나오시고 상관이 없이 천지우주에 언제 어디에나 항시 계시는 이른바 법신(法身)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추구하는 것은 법신부처님입니다. 원효(元曉)스님이 나오시고 안나오시고 상관없이 언제 어느 때나 계시는 참다운 부처님 조금 더 어렵게 말하면 우주 모든 생명의 근본자리, 근본자리는 바로 법신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법신부처님과 화신(化身)부처님의 한계를 모르면 참 답답한 일입니다.

역사적인 부처님은 화신 부처님이고, 석가모니 부처님인 역사적인 부처님이 나오시고 안나오시고 상관이 없이 우주에 언제 어디에나 계시는 우주의 생명으로 해서 부처님, 우주 생명의 부처님은 항시 계신단 말입니다.

우리 불교를 믿는다 해도 우리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 항시 갔다 왔다 갔다 왔다 그래버리면 법신 부처님을 잘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자리가 바로 부처님하고  같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을 자꾸 추수리고 마음으로 우리가 참선(參禪)을 하고 염불(念佛)을 하고 그러면은 그때는 아, 정말로 내가 안보이지만 참말로 부처님은 언제나 계시는구나 이와같이 우리 마음의 부처님의 실존(實存)이 차근차근 깊이 와 닿는단 말입니다.

산이나 냇이나 또는 다른 동물이나 우주는 그런 생명으로 해서 다 충만해 있습니다. 또는 우리가 볼 수 없는 현미경으로만 거의 겨우 볼 수 있는 그런 소립자(素粒子), 전자나 양자나 그런 것도 내나해야 역시 끄트머리에 가서는 하나의 생명이라고 보는 것이 지금 현대과학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그런 모든 존재의 끄트머리 전자나 양자나 중성자나 그런 것의 정체(正體)를 현대과학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잠정적으로 이름을 붙여서 양성자(陽性子)요 중성자(中性子)요 또는 장에너지(장(場energy)요 모다 그러는 것이지 그런 것의 정체를 모릅니다.

어째서 정체를 모르는가하면 지금 사람의 과학적인 지혜로 해서는 모양이 있는 것은 알지만은 모양이 없는 것은 모르는데 그런 전자나 양성자나 그런 것은 모양을 확실히 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운동(運動)을 측정하려고 하면 그때는 위치(位置)를 모르고 말입니다. 위치를 측정할려고 하면 그때는 운동을 잡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주의 모든 것을 구성한 우리 몸의 세포라던가 금이나 은이나 모두를 구성한 가장 적은 알갱이 그런 것은 사실은 현대 정밀 물리학도 모르는 것입니다. 무엇인지 모른단 말입니다. 모르는데 분명히 움직이고 또는 운동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대 물리학자는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아무리 작은 것도 다 그 안에는 무시무시한 에너지가 포함되어있다, 광자(光子)라 하는  그 눈에 보일 수도 없는 겨우 미시적인 현미경으로 볼 수 있는 빛 광光자, 광자 그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런 광자 속에도 일초 동안에 30만 킬로미터나 갈 수 있는 그런 무시무시한 힘이 있단 말입니다.

즉 어느 것에나 속에는 그 원자폭탄(原子爆彈) 같은 그런 무시무시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질이란 것도 역시 우리가 봐서 물질이라고 간단히 말하는 것이지 캐고캐고 들어가면 알 수가 없어지고 다만 종당에 가서는 우주에 가득 차 있는 그 에너지 기(氣)만 존재한단 말입니다, 기만. 우주라는 것은 에너지라 하는 기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런 기 위에서 그 기가 어떻게 모아지는가, 어떻게 합해지는가, 상호작용(相互作用)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된단 말입니다. 금이요 은이요 다이아몬드요 하지만은 그런 것도 내내야 우주 에너지가 이렇게 저렇게 모인 상태를 잠시간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모두가 다 따지고 보면 가상(假相) 가명(假名)이란 말입니다. 허망한 모습인 것이고 가짜로 임시동안 붙인 이름이란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몸뚱이도 그렇습니다. 우리 몽뚱이도 우리가 아무리 귀엽게 생각하지만은 이것도 역시 가상가명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 산소 수소 탄소 질소 그런 것이 잠시간 인연따라서 이 몸뚱이를 구성했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또 무엇인가? 마음이 원래 부처라 하건만은 보통 우리가 쓰는 마음은 본래로 부처인 망정 지금 우리 범부심(凡夫心)이란 것은 내내야 감수(感受)하고 상상(想像)하고 의욕(意慾)하고 분별시비(分別是非)하고 그런 부스러기가 모아서 우리 범부의 마음이 된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뚱이나 우리 마음을 분석해 놓고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런 것은 고유한 존재가 아니라 사실은 이런 것은 다 허망하단 말입니다. 인연따라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것도 역시 따지고 보면 공(空)입니다.

공이기 때문에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오온개공이라 하는 것도 오온이라 한 것은 우리 마음과 우리 몸을 합한 이 존재가 오온 아닙니까.

우리 사람을 구성하는 것은 오온인데 오온도 역시 이것도 결국은 다 빈 것이란 말입니다. 다 공이란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고통은 무엇인고 하면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오온 이것이 다만 인연따라서 잠시간 모습을 나툰 하나의 가상에 불과하고 김 아무개 박 아무개는 하나의 가명에 불과한데 이것이 고유하게 존재한다 이것이 내것이다 그런 것 때문에 우리의 여러 가지 번뇌(煩惱) 망상(妄想)이 생기고 고통(苦痛)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따라서 우리 인간의 인생고(人生苦)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인고 하면은 아견(我見)이라 나 아我자, 볼 견見자 나라는 존재를 고집하는 그런 마음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공부하려고 애써도 나라는 것이 원래 비어 있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이론적인 체계가 서야 그래야 우리 공부가 진척이 빠르단 말입니다.

나는 항시 나고 죽고서도 이런 몸뚱이 다시 또 곧 받을 것이고 과거 전생도 이런 몸뚱이 받아왔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때는 공부가 안 되는 것입니다. 과거는 또 과거의 업(業)으로 해서 그때 또 몸을 받았겠지요. 또 금생에는 과거의 지은 업으로 해서 금생에 그 업을 지운 그대로 닮게시리 금생의 몸을 받는단 말입니다.

내생은 또 우리 몸뚱이 헌옷 같듯이 아, 그냥 다 벗어놓고 가더라도 금생에 어떻게 살았던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밤이나 낮이나 분별시비하고 그런 것들이 모두 가 다 우리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남아 있다가 그것에 맞게시리 또 금생에 우리가 몸을 받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우리 그런 업식(業識)이라, 업 업業자, 알 식識자, 의식이란 식識자 말입니다. 업식이라, 우리 업식 따라서 몸을 받는단 말입니다. 

그런 문제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논쟁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은 조금도 모순도 없고 흠절이 없습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부처님 말씀은 꼭 사실 그대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른바 여법(如法)한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보나 어떤 것으로 보나 조금도 그런 것에 그런 이치에 논리에 어긋나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마음과 몸이 구성되었는데 이것이 나라고 고집하는 존잰데 이 존재가 본래 비어있다는 이 생각을 가져야 공부가 된단 말입니다.

그러게 우리가 반야심경(般若心經)이나 금강경(金剛經)이나 그런 경을 많이 보지 않습니까. 그런 경들은 본뜻이 무엇인고 하면은 색즉공(色卽空)이라, 모양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공이란 말입니다.

육조스님께서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은 부처님의 정법을 받아오신  33번째 분인데 육조스님께서 그 인가를 받을 때게 하신 그런 법문이 무엇인고 하면은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也塵埃)라, 본래무일물 하처야진애리요, 본래 아무것도 없는데 어디에 가서 티끌이 낄 것인가. 본래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은 무슨 소식이겠습니까?

우리 육조스님도 몸도 있고 여러 가지 그야말로 주변도 다 산도 있고 냇도 있고 다른 사람도 있고 모다 그러겠지요. 그러는데 본래 무일물이라 본래 이것저것 아무 것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본래무일물 소식을 알아 두셔야 그래야 불교를 공부했다고 우리가 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본래 없으니까 없다고 하는 것이지 본래 있는 것을 우리가 부처님 공부를 하기 위해서 그저 억지로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무일물이란 것은 누가 억지로 만든 것도 아닌 것이고 본래로 근본적으로 아무 것도 없단 말입니다. 어째서 아무것도 없는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보일 뿐인 것이지 모양도 잠시간 가짜요 거기다 붙인 이름도 가짜란 말입니다.

아, 지금 김아무개를 부모를 달리 해서 태어나면 박씨도 되겠지요. 인연 따라서 잠시간 가짜로 붙인 것이지 그것이 고정불변한 그런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본래 무일물이라, 그와 같이 모든 존재가 다,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존재가 다 공입니다. 모든 존재가 다 분명이 있는데 본래로 아무것도 없다 그러는 것이 아니라 본래로 이것은 참말로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왜 아무 것도 없는 것인가? 아까도 여러 차례 제가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좀 보이고 가짜로 이름을 붙인 것이지 사실로는 그것이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불교를 공부하실 적에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공 소식을 우리가 알아야지만 공부가 훨썩 빨리 나가고 공 소식을 안 그 자리에서 공부가 되어야 비로소 대승(大乘)인 것입니다. 공 소식을 모르면 대승이 못된단 말입니다. 그 소승(小乘)밖에는 못됩니다.

소승은 무엇인고 하면은 이것은 우리 중생들이 근본적인 본바탕을 못 보고서 겉만 본단 말입니다. 겉만 보기 때문에 우리 번뇌도 근본적으로 우리 번뇌를 다 녹일 수가 없습니다.

분명이 있는 대로 생긴 대로 봐야 그래야 비로소 번뇌를 없앤단 말입니다. 그런데 본래로 다 비어있단 말입니다.

그러면은 비어 있으면 아, 비어 있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이 다 그러면 끝끝내 다 공뿐인가? 이래 버리면 그때는 우리가 공부할 아무런 무슨 어떤 희망이 없어진단 말입니다. 희망이 없어지니까 인제 억지로 무엇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다 비어있지만은 빈 그 자리, 빈 그 자리가 바로 부처님 성품 그 진여불성(眞如佛性)이란 말입니다.

아무것도 없다고 그러면 없어버리고 말면 우리가 너무나 허망하지 않습니까? 공부할 것도 말 것도 없이 아무것도 없는데 뭐, 무슨 필요로 공부할 것인가? 그 행복도 없고. 아이... 무슨 도인도 없고 인제 성인도 없고 모다 그래 버리면 무슨 필요로 공부할 것인가? 이렇게 또 반문할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다행이도 다행이 아니라 사실대로 다 비어 있지만 바로 빈 그 자리, 빈 그것의 그 알맹이, 실체가 그때는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바로 부처님 성품으로 가득 차 있단 말입니다.

진여불성이라 우주의 진리니까 거기다가 진여(眞如)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우주의 진리란 말입니다. 우주의 진리라 하면 아까 말씀드린대로 인연 따라서 잠시간 태어나고 없어지고 하는 그런 허망한 것이 아니라 그런 허망한 것을 다 제쳐버리고서 허망한 것의 그 근본, 근본 도리, 근본생명이 바로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바로 불성이란 말입니다.

불성, 법 법法자 성품 성性자 법성(法性), 또는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진여(眞如), 또는 보리(菩提)라, 또는 열반(涅槃)이라, 다 그런 뜻은 같은 뜻입니다. 극락(極樂)이라, 그런 뜻도 다 같습니다.

우리가 허망한 것을 허망하다고 분명히 봐 버리고서 허망하지 않은 우주와 인생의 참다운 그런 성품자리인 진여불성을 체험한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자리가 바로 성인(聖人)이고 도인(道人)이고 바로 부처님 입니다.

금강경에도 나라는 상(我相), 너라는 상(人相) 또는 중생이라는 상(衆生相) 또는 시간이 짧다 길다하는 그런 수자상(壽者相) 이런 상을 다 없애면 그때는 바로 성인이고 부처고 이런 상이 있으면 그때는 범부고 중생이란 말입니다. 그 금강경 도리 어렵다고 여러분들이 생각하시지요. 그러나 따지고 보면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한 경이기 때문에 굉장히 쉬운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외면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안보고 우리 중생이 번뇌망상(煩惱妄想)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지 사실대로 사실대로만 우리가 볼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그것을 염두에 두고서 사실에 입각하면 그때는 쉽단 말입니다.

그 반야심경도 짧막한 그런 경이지만 그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우리 중생이 보는 모든 존재는 이것은 본래 다 비어있다. 색(色)도 비어있고, 색은 내내야 인제 눈에 보이는 물질이 색 아닙니까? 색도 비어 있고 우리의 생각도 비어있고 다 비어있다, 제법(諸法)이 공이라, 모두가 다, 제법은 이것은 모두를 말합니다. 모두가 다 공이란 말입니다.

제법이 다 비어 있는 그 공의 바탕, 그 공의 근본자리, 그 자리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로 도(道)요 진리(眞理)요 법성(法性)이고 또는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법성, 불성 그렇게 말을 해서 우리가 일단은 이론적으로 봐서 아,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이렇게는 납득이 된다 하더라도 법성 불성 그것이 뭣 허는 것인가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허망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헌데 법성 불성은 이름만으로 있는 그런 허망한 것이 아니라 법성 불성 이것은 하나의 생명(生命)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잘 깊이 생각하십시오. 법성, 불성 이것은 생명이고 그 생명 속에는 만덕(萬德)이 갖추고 있어요.


우리 불자님들 열반사덕(涅槃四德)이라고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열반사덕이라. 열반이라는 것은 영생(永生)의 진리를 말하는 것인데 열반은 어째서 영생의 진리인가 그러면은 모든 헤아릴 수 없는 그런 덕이나 그런 진리를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도 많고 끝도 갓도 없이 많은 공덕인지라 일일이 헤아릴 수는 없고 다만 간단히 간추리면 그때는 4가지라 말입니다. 4가지는 우리가 외어두면은 좋습니다. 간단하니까 말입니다. 그래야 내 마음의 본성에는 이런 공덕이 있구나, 내 마음에는 이런 부사의(不思議)한 힘이 있구나. 이렇게 느낄 수 있고 우리가 깨달을려고 또 보다 더 용맹정진(勇猛精進)하고 그러겠지요.

그런데 4가지 덕은 어떤 것인고 하면은 그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항상 상常자, 어째서 항상 상 자를 써서 상이라고 했는고 하면은 우리 생명은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그때그때 있다가 없어지고 또 인연이 생기면 없다가도 생기고. 그러나 우리 생명의 본체인 그 불성자리는 불성 그 자리는 그때는 있다 없다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의 실상(實相)입니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그때는 생명의 실존(實存)이란 말입니다.

실존철학(實存哲學)도 그 어렵게시리 모다 그 여러 가지로 이론체계를 많이 세웠지만은 사실은 그 자리를 우리 스님네 같이 깨달아서 성자가 되는 그런 법으로 공부 해야지 말로만 제아무리 무성하게 하나의 철학체계를 세운다 하더라도 그걸로 해서는 그 부처님 공덕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은 그런 4덕을 제대로 체험을 못합니다.

그렁께 다른 철학자들도 모두가 다 정말로 그것을 체험적으로 알자면 싫던 좋던 간에 부처님 공부를 해야 됩니다.

상락아정 이것은 영생불멸(永生不滅)하니까 상 자를 항상 상常자를 써서 상 그러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그때그때 인연이 다하면 소멸되고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있어지고 하지만은 그 우리 진여불성 우리 생명의 본바탕에 있는 그러한 공덕은 그렇지가 않고서 항시 존재한단 말입니다. 영원히 생명도 마찬가지고 우리 생명은 죽음이 없습니다.

예수님만 부활(復活)한 것이 아니라 우리 생명은 본래로 누구나가 다 부활합니다. 인연 따라서 있어진 것만 그때그때 변화가 되는 것이지 그  근본바탕 진여불성자리는 변화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보고 항상 상자 상(常)이라고 하는 것이고, 락은 안락할 락(樂)자 말입니다. 우리 생명이 있는 존재는 어느 것이나 안락(安樂)을 다 구합니다. 개나 소나 돼지나 더구나 우리 사람은 또 의식이 있어놔서 더욱더 우리가 의식적으로 안락을 구한단 말입니다. 행복(幸福)을 구한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적으로 행복을 구하는 존재입니다. 행복도 그냥 행복이 아니라 완벽한 행복을 구한단 말입니다. 우리 사람들을 가리켜서 인간이란 것이 인간 존재가 너무나 욕심이 많지 않은가? 허나 욕심이 많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본래 성품이 본래가 부처기 때문에 부처가 될라는 그런 마음이 본래로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 존재가 부처가 못되면 항시 마음으로 불안스럽습니다. 본래 부천데 부처가 되어버려야 그래야 마음이 흐뭇하고 행복스러울 것인데 본래 부처님인데 부처가 못되어 놓으니까 그때는 마음이 부족을 느끼고 불안스럽지 않습니까.

그렇게 뭐 지금 현대를 가르켜서 아이... 참... 위기의 시대라 또는 불안의 시대라 그런 말들을 많이 하지요. 어쩔 수가 없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사람들이 지금 옳게 살지를 않고 있단 말입니다.

허망한 것을 있다고 생각하고 감투나 또는 재산이나 그런 것도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다 변동하는 것인데 거기다가 마음을 붙여서는 항시 불안스럽고 염려가 됩니다.

그 감투도 높은 감투나 쓸려고 하면 얼마나 많은 것이 괴롭습니까? 참 정말로 중상모략(中傷謀略)하고 별별 짓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당을 또 만들고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 그걸 보면 굉장히 미련하단 말입니다. 참 미련해요, 그렇지 않고 생긴대로 살면은 참 좋은 것인데.

부처님 법은 그 아까 말씀마따나 여법히 모두를 다 우주의 진리대로 한단 말입니다. 허나 당장에는 그것이 안 되겠지요. 왜 그런고 하면 우리 사람들이 너무 업을 많이 지었단 말입니다.

허망한 것 때문에 업을 많이 잔뜩 지어놔서 그런 업을 소멸시키려면 그냥 몇 년 동안에 소멸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러나 끝끝내 가서는 앞으로 몇백년 몇천년 가서는 다 그렇게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왜 안 될 수가 없는고 하면 우리가 본래로 부처님 같은 마음 그 부처의 마음이 우리 마음의 본 마음이기 때문에 누구나 다 고생도 하고 또는 넘어지고 자빠지고 그 가지가지 그런 고초를 겪은 다음에는 우리가 부처 쪽으로 부처가 되기 위해서 온 힘을 그리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리다 말았습니다만은 그 우리 행복은, 근원적으로 행복을, 우리 불자들은 행복을 구하는 존재란 말입니다.

낙(樂)이라 안락 락樂자, 그다음에 나 아我자. 그 나는 4가지 덕에 있는 나 아我자 나는 이것은 그냥 허망무상한 아가 아니라 허망무상한 아가 다 비었다는 소식을 사무치게 알고서 말입니다. 참다운 나, 죽지 않는 나, 인연 따라서 생기고 인연 따라서 없어지는 그런 나가 아니라 인연을 초월한 참나가 이것이 이른바 열반의 4가지 덕 가운데 나입니다.

그래서 참다운 나는 이것은 그냥 우리 같이 보통 그런 현상적인 허망무상한 그러한 것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모든 그런 신통지혜(神通智慧)를 다 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불경에 보면은 팔대자재아(八大自在我)라, 팔대자재아 그것은 그 아라는, 깨달아버린 그런 대도인에 갖추어진 아라는 것은 이것은 자기 마음대로 자기 몸도 나툴 수가 있단 말입니다.

비행자재(飛行自在)라 공중으로 비행도 마음대로 할 수가 있고 또는 자기 몸을 우주에 가득 차게 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이런 저런 불경을 보면 충분히 그런 부사의한 대목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다 할 수 있는 그러한 정도가 이것이 거기 열반의 4가지 덕 가운데 나 아자, 아라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이런 말씀을 들으실 때 그냥 건성으로 생각을 말으십시오. 참말로 우리한테는 그런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금생에 복을 못 짓고 전생에 우리가 업장을 많이 지어서 제대로 부처님한테 갖추고 있는, 부처님은 바로 우리 마음의 본 성품과 똑같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에 갖추고 있는 그런 공덕을 본래로 다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래로 다 할 수가 있도록 우리가 지금 태어난 것입니다. 마음이 없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음 그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주 신묘해서 잘못 쓰면 참 옹졸하고 정말로 바늘귀 하나도 안 들어갈 만치 마음이 좁지만은 마음의 또 본바탕은 끝도 갓도 없이 우주를 다 감싸고 있단 말입니다.

김가 마음이나 박가 마음이나 지금 사형수 마음이나 또는 도둑놈 마음이나 그 마음의 본바탕은 다 우주를 감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마음에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상락아라 항상 영생, 그 사람 마음도 똑같이 영생하고 또 그 사람 마음도 똑같이 한도 끝도 없는 행복을 또 구하고 말입니다. 또 구할 수가 있는 것이고 그런가 하면 신통묘지를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그런 부처님의 법문을 안 봤으면 아이...뭐...그렁저렁 어떻게 살아도 되겠구나. 그렇게 마음먹었을 것인데 그런 것을 분명히 다 인제 봐노니까 말입니다. 지금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은 나도 닦으면 부처가 되겠구나! 부처가 되면 만 공덕을 충분히 할 수가 있구나! 그런 가능성이 나한테 있는데 그것을 무시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불자님들 나이가 많다고 실망을 말으십시오. 학문을 많이 안 배웠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것과 마음 닦는 공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일자무식자고 나이가 많건 나이가 적던 간에 마음 통해서 부처가 되는 것은 조금도 장애가 없습니다.

서기 200년 전에 성세존자는 일곱살에 아라한도(阿羅漢道)를 성취했습니다. 다라표 비구는 부처님 당시에 14살에 승려가 되야 가지고서 16세에 아라한도를 성취해서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했습니다.

우리는 나이 적고 많고 또는 세간적인 지식이 많이 있고 또는 없고 하는 그런 것에 구애될 필요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얼굴이 못난 것도 그런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아무리 못났다 하더라도 역시 마음은 마음자리는 다 똑같습니다.

마음이란 것이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자리는 김가 마음 박가 마음 또는 석가모니 마음 예수 마음 똑 같습니다. 그분들 성인들은 보다 더 마음을 잘 쓴 분들이고 우리는 마음을 잘못 써서 지금 범부중생(凡夫衆生)으로 머물러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맑을 정(淨)자, 맑을 정(淨), 청정(淸淨)이란 정(淨)자 말입니다. 그 정은 무엇인고 하면은 이것은 번뇌 망상이 조금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자리는 본래 번뇌 망상이 조금도 없이 청정무구(淸淨無垢)한 것인데 우리가 괜시리 자꾸만 분별을 내어 가지고서 망상을 한단 말입니다. 본래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망상할 건덕지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 내 몸뚱이도 아까 말씀마따나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그런 것이 잠시간 모여서 시시각각으로 변화가 돼 있고 내가 쓴다는 지금 마음도 마찬가지고 마음도 이것 배우고 저것 배우고 모다 군더더기가 잔뜩 많이 들어서 좋다 굳다 밉다 사랑한다 모다 그러지 않습니까. 이런 것도 허망한 것이고 그래서 우리 중생 마음은 청정할 정淨자 청정하지가 못합니다.

그러나 불성을 깨달아서 불성자리에 우리가 들어가면 그때는 그러한 번뇌망상이 조금도 없단 말입니다. 거꾸로 뒤바꿔 보고 그런 전도몽상(顚倒夢想)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때는 마음이 훤히 틔어버리기 때문에 우주를 다 내다본단 말입니다.

과거도 끊임 없이 보고 미래도 끊임 없이 본단 말입니다. 일념보관무량겁(一念普觀無量劫)하니 한 생각에 무량겁을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다 우리가 통해서 보니,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來亦無住)라,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것을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 중생들이 잘못 생각하고 잘못 봐서 자꾸만 막히고 꺼끄럽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항상 상常자, 그 영생불멸한 것이 우리 불성자리 불성을 깨달은 그 자리의 마음인 것이고, 또 락이라 안락 락樂자 말입니다. 즐거울 락樂자 모든 행복을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 몸뚱이 때문에 우리 나쁜 생각 때문에 우리가 안락하지 못하고 스스로 고통을 사서 하는 것이지 우리가 바로 보고 바로 느낀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고통스럽게 느낄 필요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와 똑같이 우리가 병들어서 아프다 하더라도 아, 이 병든 병 이것이 어디가 무슨 근거가 있는 것인가? 마음으로 아프다 하는 것도 이것이 마음이 괜히 그러는 것이지 마음이란 것은 원래 모양도 없고 또는 자취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플 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해서 아프다 하는 것이지 말입니다.

따라서 그 가장 원만한 그런 행복은 또 우리가 갖추고 있는 것이고 그리고 나 아我자, 아라 이것도 역시 나 아자 아는 잘못 생각하기가 싶습니다만 모든 신통자재를 갖추어 있는 그런 이른바 대아(大我) 큰 나 또는 참 진眞자 나 아我자 진아(眞我)라 이런 단계란 말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한테 우리 이것이 본래면목(本來面目)인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이것은 본래면목이 아니라 과거 전생에 업을 지어서 금생에 받은데다가 금생 나와서도 아, 부모한테 이렇게 저렇게 배우고 학교 가서도 그 세속적인 지혜를 이것저것 배우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잡탕되어서 느끼는 이런 것은 사실은 허망한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모든 것을 다 알고자 할 수가 있고 그러한 것이 참다운 내 본래면목이고 또 번뇌도 조금도 없고 훤히 틔어서 천지우주 어디에도 다 막힘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참 신묘(神妙)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분 좋을 때나 부처님 법문을 듣고서 마음이 그 쾌적할 때 도인의 마음은 미처 못되었다 하더라도 그런 마음은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마음이 툭 틔여서 과거에 막힘이 없고 미래에 막힘이 없고 현재에 막힘이 없고 산이나 벽이나 아무 것도 걸림이 없이 훤히 내다 볼 수 있는 그런 지혜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지혜가 본래로 갖추고 있습니다.

아, 지금까지 내 나이가 벌써 50이나 먹었는데 본래로 갖추고 있더라도 인제는 가망이 없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도의 협존자는 나이 70에 출가했단 말입니다,  나이 70에 집을 버리고 출가했단 말입니다. 출가 안 해도 무방하겠지요. 나이 70에 출가해 가지고서 3년 동안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통달하고 또는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했습니다.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을 다 통했단 말입니다.

어느 누구나가 다 할 수가 있습니다. 어느 특수한 사람만이 한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는 없습니다. 좀 더디고 빠른 것은 있겠지요. 이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누구한테나 개한테나 소한테나 어느 누구한테나 다 최상의 희망을 주는 가르침입니다.

자기 집에서 지금 키우고 있는 개라 한다 할지라도 지금 개인 것이지 과거에도 꼭 개가 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자기 친 아버지고 자기 친 어머니가 자기가 키우고 있는 개가 된 그런 사례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떠한 것이든 간에 사람 사람끼리 뿐만 아니라 개를 보나 소를 보나 하나의 독사를 보나, 그대 발보리심(發菩提心)하라, 보리심을 내란 말입니다. 우리는 개미를 보나 무엇을 보나 그대 보리심을 내서 빨리 성불하라 그래야 그것이 보살 마음이란 말입니다.

아까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는 어떠한 그런 비참한 경우에 있다 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인제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 여러분들 많이 읽으시지요. 보문품 보십시오. 저 수미산 꼭대기에서 누가 뒤에서 그냥 미끄러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면 천야만야(천길만길)한 낭떠러지에서 떨어져서 꼭 죽어야 되겠지요.

그래도 그 관세음보살을 염원한 마음 때문에 여일허공주(如日虛空住)라 저 해나 달이 공중에 달아 매 있듯이 그 관세음보살을 생각하는 간절한 마음 때문에 허공에 달려서 안 떨어진단 말입니다.

신앙에 사무치면 불도 못 태우고 물도 빠뜨리지 못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가 성자가 미처 못 된다 하더라도 우리 범부의 지금 신분이라 하더라도 정말 순간 사무치면 순간 사무치는 그런 신심으로 해서 모든 그런 신장(神將)이 돕고 부처님께서 호념(護念)한단 말입니다. 보호할 호護자 생각할 념念자 부처님께서 호념하신단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불경을 외우면 불경을 외우는 그것이 그냥 뭐 조금 기분 좋고 그런 정도가 아니라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외우는 그 즉시 바로 모든 신장들이 다 듣고 계십니다. 감동 안 받을 것입니까.

우리는 눈에 불을 쓰고서 공부를 하셔야 됩니다. 우리는 어떠한 비참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사업에 실패한다든가 슬픈 이별을 했다든가 그런 것도 다 이것은 허망한 일입니다. 만나면 어쨌든 헤어져야 되겠지요. 또 난 사람은 어차피 죽어야 되겠지요.

우리가 그 소중한 우리의 생명의 본바탕, 영원한 고향으로 가는 그런 길로 가기 위해서 중국에서 인도로 가서 그 20년 동안이나, 가는데 3년 오는데 3년 거그 머물러서 10년 말입니다.

우리가 자기 집에서도 배가 고프다 뭣이 맛이 없다 다 그런 불평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허나 20년 세월동안 그도 나이가 먹어서가 아니라 한창 젊은 동안, 한창 꽃다운 젊을 동안 20년을 몽땅 바친단 말입니다. 그러고도 아무런 후회도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다 도를 구했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지금 어떻게 해서 도를 구합니까?

우리 그 불성, 불성에 대해서 정말로 보다 더 깊이 느끼셔야 합니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 불성 이것은 나의 마음인 동시에 모든 인간 존재, 존재의 본래 이것은 생명입니다. 또는 우주 만유의 근본 생명입니다.

어느 것도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으로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불성을 깨달으면 바로 성인이요 부처요, 불성을 깨닫지 못하면 중생이요 범부고 합니다.

우리 인간이 갈 길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다 우리가 부처가 되는 길입니다. 본래 우리가 부처님을 간직허고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가 부처가 안 되고 그대로 마는 것이 아닙니다.

금생에 못되면 내생에 되고 몇 만생 지내가도 본래가 부처인지라 부처가 꼭 되고 만단 말입니다. 부처가 못되면 어떠는 것인가? 그때는 윤회(輪廻)합니다. 뱅뱅 돕니다, 우리 업식(業識) 따라서.

하루 밤 하루 낮에 팔억사천만념(八億四千萬念)이나 생각이 오락가락하는 그런 생각 그런 생각을 망상으로 지새워 버리면 우리는 천년만년 또 개가 되고 소가 되고 사람되고 무엇되고 다 그러는 것입니다.

금생에 부처님 법 만났을 적에 우리는 기왕이면은 본래 내 생명의 실존자리 본래 내 생명의 본체자리 그 자리로 가는 것이 우리 생명을 가장  효과적이고 우리 생명을 가장 최고도로 살리는 길입니다.

부처님 되는 그 길 외에 다른 부처님 되는 길 그 반대 길은 이것은 우리 생명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자기한테도 해롭고 집안사람한테도 해롭고 이 사회에도 그때는 해를 끼칩니다. 부처님한테 가는 길은 어느 누구한테나 가장 훌륭한 이른바 보살(菩薩)의 길이고 보시(布施)의 길입니다.

아까 말씀 드린 상락아정(常樂我淨) 분명히 잘 외우시기 바랍니다.

우리 불성 가운데는 정말로 불성은 죽지 않는 것이고 허망한 인연 따라서 잠시간 헤어졌다가 또 만나고 만났다가 헤어지고 이런 단계에서는 즉 다시 말하면 현상적인 그런 것은 변허고 없어지고 죽고 만나고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 불성은 영생한단 말입니다. 영생불멸(永生不滅)한 생명자체(生命自體)입니다. 또는 모든 행복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영원히 멸치 않는 참다운 행복이 불성 가운데는 갖추고 있습니다.

또는 우리 불성, 우리 본래 생명자리인 불성은 일체의 신통묘지(神通妙智)를 다 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70세 먹으나 80세 먹으나 또는 어린이나 우리 마음이 순수하고 부처님 가르침 따르면 다 신통묘지를 다 할 수가 있습니다. 7살에 아라한도를 성취하고 16살에 아라한도를 성취한 분들도 다 있지 않습니까.

본래가 우리 불성은 청정미묘(淸淨微妙)해놔서 우리가 불성을 따르면 정말로 번뇌(煩惱)나 그러한 뒤바뀐 생각은 일어 날라야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불성에 들어있는 무한공덕(無限功德) 자리인 상락아정(常樂我淨), 상락아정 이것이 열반사덕(涅槃四德) 그럽니다. 열반 이것은 영생 행복한 생활이 열반인데 열반에 갖추고 있는 그런 공덕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하지만 간추리면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덕 상락아정이란 말입니다.

상락아정을 정말로 한시도 잊지 마르시고 조금 조금 괴로우시더라도 아, 나한테는 만능(萬能)이 원래 갖추고 있는데 만능을 끄집어낸다는 것이 그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참선(參禪)하고 염불(念佛)하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또는 화두(話頭)하는 사람은 화두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부처님, 부처님을 믿을 때는 역시 부처님 이름을 외우는 것이 가장 이것이 가장 쉽습니다. 본래 부처인데 본래 부처인 부처님의 대명사가 아미타불(阿彌陀佛)이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니까 부처님 외우는 것이 제일 속 빠릅니다.

내가 나를 부르는 것이 됩니다. 그것이 내가 나를 부르고 또는 우주의 이름도 내내야 아미타불입니다, 우주의 이름도. 우주가 모두가 다 불성으로 되어 있거니 불성의 대명사가 아미타불인 것이니까 불성으로 된 우주 역시 아미타불입니다.

또 극락세계(極樂世界)는 무엇인가? 극락세계도 내내야 불성으로 되있거니 극락세계의 교주(敎主)도 역시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여가나(여기나) 저가나(저기나) 내 몸이나 내 마음이나 본래는 다 아미타불인 것이고 우주도 마찬가지이고 말입니다. 따라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천지 우주의 바로 생명의 이름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려운 것은 또 어렵게 한다 하더라도 가장 쉽고 누구나 하기 쉽고 또 공(功)도 제일 많은 그런 것이 염불(念佛)공부입니다.

부지런히 공부하셔서 꼭 금생에 열반사덕(涅槃四德)을 성취하시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


*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용으로 큰스님 말씀 그대로 받아쓴 글입니다.*



* 본문과 관련된 큰스님 친필법문*



        *실상관(實相觀)*

                     <청화대선사(淸華大禪師) 법문중에서>


       '나라는 이 몸뚱이나 너라는 몸뚱이나

       천지(天地) 우주(宇宙) 모든 두두물물

       (頭頭物物)이 다 비어 있다'본래무

       일물(本來無一物)자리를 먼저 생각해

       야 합니다.      <주 : 아공(我空) 법공(法空)>

       '그러나  다만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本來) 비어 있는  무량무변(無量

       無邊)한 자리에 무량공덕(無量功德)을

       갖춘 청정적광(淸淨寂光)이 충만(充滿)

       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마음을 붙

       들어 매는 것이 실상관(實相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