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 호>
20000401-창원 성주사 법문
<진여연기(眞如緣起)>
우리 부처님 법은 진실로 불가사의(不可思議) 합니다. 모양이 있는 것이나 모양이 없는 것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 법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끝도 갓도 없는 무량한 우주 법계(法界)도 부처님 법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헌데 우리 중생(衆生)들은 모양이 있는 것은 보고 느끼고 해서 알지마는 모양이 없는 것은 잘 모릅니다. 잘 모르니까 인정 하지를 안으려고 합니다.
헌데 부처님 법은 모양이 있는 것 뿐 만이 아니라 이른바 상(相)뿐만이 아니라 상이 아닌 그 본체(本體) 근본 본체까지도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근본본체가 무엇인가는 대체로 아르시겠지요. 근본본체는 바로 부처 불 (佛)자, 성품 성(性)자, 바로 불성(佛性)입니다. 불성!
우리 부처님 법이 하도 다양하고 또는 그때그때 역사적으로 발전을 거듭해 와서 가지가지로 부처님 법에 대한 여러 어려운 그런 술어가 있습니다.
방금 제가 말씀 드린바와 같이 모든 존재의 근본자리인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이라. 또는 부처 불(佛)자, 마음 심(心)자, 불심이라 말입니다. 또는 법 법(法)자, 성품 성(性)자, 법성이라. 이러한 술어가 사실은 모두가 다 같은 뜻입니다.
그때그때 선지식(善知識) 따라서 또는 시대에 따라서 변천이 많이 되고 또는 중생의 그 근기(根機) 따라서 말씀을 하시다 보니까 그와 같이 어려운 그런 술어가 됐단 말입니다.
오늘 제가 말씀을 드릴 요지는 이 현상적인 그런 상적(相的) 법문, 상적 법문은 시간이 많지가 않아서 제대로 다 말씀을 드릴 수가 없고, 방금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 본질적인문제 본질적인 그런 불성문제 불심문제 이런데다가 주안점을 두고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기는 불모산(佛母山)입니다. 불모산 여러분들이 저보다도 더 잘 아르시지 않습니까. 불모산. 불모라는 것은 반야(般若)의 지혜(智慧),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을 불모라 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부처님이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무수한 부처님이 많이 나셨고, 또는 현겁 천불(千佛)이라, 지금 우리 중생과 인연이 있는 그런 세계가 이것이 현겁인데 현겁에도 천불이 나오시는데 그런 천불이나 또는 만불(萬佛)이 나오신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근본은 모두가 다 참다운 지혜에 있단 말입니다. 참다운 지혜가 이른바 반야바라밀 반야의 지혜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근본, 부처님의 어머니가 바로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에 그런 반야바라밀 참다운 지혜를 상징해서 이 산이 바로 불모산입니다.
불모산에다가 또 성주사 성인 성(聖)자, 머물 주(住)자, 성주사(聖住寺) 아니겠습니까. 그 불모산에 가서 성인이 머무니 얼마나 참 신성한 것을 역설한 그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거기다가 첫 창건하신 대선지식이 무염(無染)대사(大師)라, 없을무(無)자, 물들 염(染)자 말입니다.
지금 젊은 세대들은 한글만 주로 하고 한문을 안배우셔서 한문에 대해서 지식이 부족 합니다 만은 공부를 좀 하셔야 됩니다.
우리 이 대한민국 초기에 문교정책이 좀 서툴렀어요. 한문이란 것은 우리가 폐지 할 수가 없는 것인데 한문을 폐지한다고 생각 할 때는 우리 전통문화의 반 이상을 잃어버린 꼴이 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서서히 눈을 좀 떠서 한문을 조금씩 배우고 있으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한 번도 그런 한문폐지나 그런 말이 있어 가지고서 한문공부를 중단한 적이 없습니다.
아무튼 우리 불자님들 그 아까 제가 말씀드린 불모산 이라든가, 부처 불(佛)자, 어머니 모(母)자, 불모라던가, 또는 성인 성(聖)자, 머물 주(住)자, 성주라던가 말입니다. 또는 이 거의 초조이신 무염대사, 오염 되지 않은 그런 불명(佛名)입니다.
구산선문(九山禪門)은 여러분들이 대체로 아르십니다 만은 저는 구산선문을 다른 데는 다 가봤습니다. 폐허가 된데도 가보고 했으나 제가 과거에 복이 부족해서 여기 성주사는 미처 제가 참배를 못했습니다. 어쩌다가 수승한 인연(因緣)이 도래해서 저 같은 사람을 그렇게 초청해 주셔서 대단히 수승한 인연이라고 제가 감사의 합장을 드립니다.
아무튼 그 불모산의 성주사 또는 무염국사가 창건했단 말입니다. 여기 와서 주지스님이나 같이 계신스님들 보아하건대 모두가 다 세속적인 때가 묻지 않은 그러한 훌륭한 스님들 입니다. 제 마음 환희심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부처님 법은 불가사의 법인데 이 화엄경(華嚴經), 화엄경은 부처님 같은 경전 가운데도 소승이나 대승이나 모든 그런 법문을 다 총 망라했단 말입니다.
그런 총 망라한 법이기 때문에 우리 중생들의 안목에는 다 이해 할 수가 없는 것도 있습니다.
가령 화장세계(華藏世界)라, 화장세계는 그야말로 참 훤히 핀 그 연꽃 같은 세계, 연꽃도 그냥 연꽃 같은 세계일뿐만 아니라 광명(光明)으로 충만 된 세계란 말입니다.
광명으로 충만 된 세계이기 때문에 이른바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는 그때는 바로 말 하면은 광명세계(光明世界)입니다. 광명세계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또는 광명세계가 바로 실상세계(實相世界)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이것은 하나의 가상세계(假想世界)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 자체가 지금 어떠한 정도가 돼있는가? 우리가 지금 범부인가 성인인가 우리가 아는 것이 얼마만큼 모든 것의 참다운 모습을 알고 있는 가? 이런 것에 대한 깊은 내성이 필요합니다.
자기 존재 한계를 알아야 보다 깊은 진리를 탐구하게 되겠지요. 헌데 방금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화장세계 즉 광명세계인데 광명세계는 그 끝도 갓도 없이 광명으로 충만 된 세계입니다.
그런 광명도 태양광선이나 또는 기타 다른 엑스레이(X ray) 그런 광선이나 말입니다. 그런 정도의 광선이 아니란 말입니다.
바로 생명(生命)의 광명입니다. 태양광선이나 엑스레이 광선이나 그런 것은 기멸(起滅)이 있습니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있지마는 부처님 세계인 그 광명세계, 광명은 낳고 죽음도 없고 일어나고 소멸도 안 되는 영원히 존재하는 그러한 생명의 광명세계입니다. 따라서 그 세계는 바로 모든 세계의 근본자리입니다.
우리 마음도 역시 광명으로 충만 된 그런 세계입니다. 또는 다른 산천초목(山川草木)이나 하늘에 있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이나 모두가 다 그런 것도 모양은 산이요 냇이요 또는 해요 달이요 그런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근본 본바탕에 있어서는 모두가 다 광명세계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연기법(緣起法)에 대해서 말씀을 많이 들으셨지요.
연기법을 모르면 불법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말씀도 ‘연기를 알면 부처를 아는 것이고 부처를 알면 바로 우주의 진리 법을 안다’ 그런 말씀을 하셨단 말입니다.
헌데 유감스럽게도 연기법을 소개 하시는 분들이 그냥 그 소승연기, 소승연기법(小乘緣起法)을 주로 말씀하시고 대승연기법(大乘緣起法)은 별로 말씀을 안 하신단 말입니다.
다 그럴 바는 아니지만은 일반 그 학자 분들도 그런 분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대승연기법을 별로 말씀을 안 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나 대승연기법을 말씀하셔야 그래야 온전한 연기법이 됩니다. 대승연기법을 제가 말씀 드리기 전에 대승과 소승에 대한 간단한 그런 한계를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소승불법(小乘佛法) 에서는 모든 것이 상식적으로 우리 인간이 보는 그대로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그런 쪽에다 주로 말씀을 하셨고, 또는 더 나아가서는 모든 것은 다 참다운 나랄 것이 없이 내 몸뚱이도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四大)와 또 우리 의식(意識)은 우리 관념인 수상행식(受想行識) 이라, 우리가 감수(感受)하고 상상(想像)하고 의욕(意慾)도 하고 우리가 분별시비(分別是非) 하고 그런 것이 합해서 우리란 인간존재가 있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인제 이런단 말입니다.
즉 잠시간 물질적인 요소와 또는 정신적인 요소가 합해서 우리 인간존재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만 말씀합니다.
즉 따라서 그런 것은 모두가 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하지 않는가? 물질적인 존재도 시시각각으로 전변(轉變)무상(無常)해서 변화무상한 것이고 우리 마음도 역시 우리가 감수 하는 것이나 우리가 상상 하는 것이나 우리 의욕이나 모두가 다 순간순간 그 지나가고 만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관념이나 우리 육체나 기타 이 우주를 구성한 모든 것은 다 다 허망한 거란 말입니다. 허망무상 한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존재 하는 것이지 참말로 실지로 있지가 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여러 경전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一切有爲法 如夢幻包影)이라, 이 눈에 보이는 모든 존재 이것은 꿈이나 또는 허깨비나 그림자나 또는 물속에 비친 달그림자나 이런 것에 불과한 것이지 사실로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먼저 이러한 그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모두가 다 무상 한 것이다. 항상 존재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조건부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분명히 알으셔야 됩니다.
그렇게 알아야 욕심도 낼 필요가 없는 것이고 감투나 그런 것 때문에 우리 마음이 혼미를 느낄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것이 중요한가 잘 모르니까 이것저것 우선 우리 범부중생의 눈으로 좋다는 것은 좋다고 생각이 되는 것이고 하지만은 그 눈으로 보이는 것이 모두가 다 정말로 다 꿈같은 것이다. 분명히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것 때문에 우리 마음을 혼란스럽게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소승불법은 주로 방금 제가 말씀 드린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상식적으로 보는 이런 것은 잠시간 이지만은 무상한 것이지만은 존재 한다고 본단 말입니다.
또는 내 몸뚱이나 내 마음도 나는 김 아무개 박 아무개 이와 같이 존재 한다고 본단 말입니다. 이런 차원의 가르침이 소승불법입니다.
지금도 참다운 가르침은 그야말로 심오(深奧)해서 잘 알 수가 없는 것인데 하물며 2500년 이상 그 오랜 옛날에 또는 일반 사람들은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닌 것이고 무식대중이 대부분인데 말입니다. 그런 때 있어서 부처님께서 고도한 그런 법문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이 알아먹을 수 있는 차원에서 말씀을 하셔야 되겠지요.
그러나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그 상식적인 차원에서 말씀을 하셨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본뜻은 그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상식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불법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인생의 번뇌(煩惱)는 놓을 라야 놓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고는 없앨래야 없앨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그냥 우리가 생각하고 또는 우리말도 함부로 하고 또는 행동도 우리가 함부로 하고 이런 차원에서는 업(業)만 짓고, 업을 지어 놓으면 또 필연적으로 우리가 고통을 받아야 되겠지요.
그러나 부처님 법의 대요는 우리 인간 존재나 삼계 모든 존재의 그런 고통을 떠나게 해서 영생해탈(永生解脫)의 영원한 행복(幸福)을 우리한테 맛보게 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요체란 말입니다.
따라서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그 중생차원에서 근기에 맞추어서 하신 법문은 이것은 소승불교인데, 소승불교는 우리 인간의 그런 고통이라든가 인간 번뇌를 모조리 소멸을 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부처님께서는 우리 중생들 근기가 조금 그 순숙(純熟)돼서 좀 익어져서 성숙단계에 이르를 때는 그때는 대승불법(大乘佛法)을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대승법 초기에는 주로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여러분들 반야심경(般若心經), 반야심경을 항시 외이시고 또 금강경(金剛經)도 여러분 외이시지 않습니까.
반야심경 도리나 금강경 도리는 모든 법이 본래(本來)로 공(空)이다. 이런 소식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모든 법이 본래로 공이라는 소식을 모르시면 대승불법이 못 됩니다. 대승불법이 못 되면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인생고(人生苦)를 인생의 그런 고액(苦厄)을 모조리 없앨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깊이 명심 하셔야 됩니다. 인생고를 떠나서 영생해탈의 참다운 자기, 참다운 자기를 발견해서 영원한 행복을 도모하는 것이 불법인데 방금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 불법은 그냥 그렁저렁 해서 얻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생각이 발라야 됩니다. 우리 생각이 바르다는 것은 뭣인고 하면은 사실을 사실대로 봐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사실을 사실대로 못 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은 그 무명심(無明心) 때문에 무지(無智) 때문에 어두워서 탐욕심(貪慾心)이나 또는 성 내는 마음이나 또는 어리석은 마음이나 그런 마음을 항시 지금 내고 우리가 업장을 짓고 있단 말입니다.
이래서는 우리가 항시 제자리걸음, 금생에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다시 또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때는 고통을 맛보고 생사(生死)를 떠날 수 없겠지요.
부처님 법은 생사를 초월해서 앞서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영원한 영생의 죽지 않는 그런 행복을 우리가 얻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이 세상에 이 보다도 더 귀중하고 이 보다도 더 심오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 법 가운데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승려라고 해서 아전인수(我田引水)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서구(西歐)의 그런 지성들이나 말입니다. 동양의 그런 위대한 학자들이나 모두가 지금은 그렇게 인정들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과 우주의 그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인생과 우주의 근원자리 이러한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면 제대로 밝히지를 못했다 이런단 말입니다.
기독교나 유교나 도교나 이슬람교나 그런 종교도 마찬가집니다. 모두가 다 부처님 법 가운데가 다 들어있습니다. 제가 시간이 많으면 그런 것을 아주 예를 들어서 증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만은 그런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런 어느 것이나 심오하고 심오하지 않고 또는 이 정밀 현대의 정밀과학이나 말입니다 모두가 다 부처님 법에 다 들어 있습니다.
아까 제가 지금 일반 분들이 소승연기법을 주로 말씀하시고 대승연기법을 별로 말씀 안하신다고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근데 대승연기법 대승연기법을 꼭 깊이 새기셔야 됩니다. 대승연기법을 새겨 두셔야 그래야 우리 생활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대승연기법은 이것은 마명(馬鳴)대사(大師) 마명스님은 부처님으로 부터서 정통조사 가운데 12대째 분입니다. 열두 번째 조사가 마명대사입니다. 마명대사는 대승불교의 할아버지라고 하는 그런 분입니다.
마명대사가 내 놓으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라, 일어날 기(起)자, 믿을 신(信)자, 대승의 믿음을 일으키는 대승의 믿음을 내는 그러한 내용을 담은 경전이 대승기신론입니다.
우리 스님네는 다 공부를 하셨지만 일반 불자님들은 대승기신론을 안 보신 분들은 꼭 지금 한글로 풀이한 것도 있으니까 꼭 보시기 바랍니다.
대승불법의 할아버지 같은 분이 마명스님인데 마명스님께서 비로소 그 대승의 참다운 신앙을 일으키는 그러한 법문을 체계 있게 말씀하신 것이 대승기신론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대승 소승을 다 포함해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는 중생의 그릇이 짧아서 어려운 법문을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대승법문은 될수록 숨기고 말입니다. 중생이 아는 그런 차원 법문을 많이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근기가 조금 성숙한 다음에는 꼭 대승법문을 해야 온전히 중생을 다 중생의 고액을 완전히 제도 할 수가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신데서 마명대사가 방금 말씀드린바와 같이 대승기신론을 냈단 말입니다.
대승기신론 가운데서 이른바 대승의 연기법이 있습니다. 연기법, 연기법이란 것은 인연 연(緣)자, 일어날 기(起)자, 무엇으로 부터서 인연이 화합되어서 무엇이 된다. 쉽게 말하면 그런 것입니다.
어느 것이나 조건이 없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주의 만법은 모두가 조건부(條件附)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헌데 그런 조건부도 역시 소승연기법은 이것과 저것과 합해서 된다. 상대적인 무엇 무엇이 어울러져서 무엇이 있다 이런 정도란 말입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그런 식이란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는 우리인간의 참 깊은 그런 뿌리 깊은 번뇌를 다 녹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는 그런 연기법은 부처님 법의 밑바닥 까지 다 드러내서 하신 그러한 법문은 못 됩니다.
대승연기법은 뭣인고 하면은 우리 중생의 제한된 안목에서는 안 보인다 하더라도 이 우주에는 본래로 근원적으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존재합니다.
이런 부처님 술어는 여러분들이 꼭 외어 두셔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인제 불법을 그냥 그렁저렁 상식적인 차원에서 공부하지 않고 정말로 깊이 있는 우리 생명자체의 공부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승법이란 것은 우주의 생긴 모습 그대로 우리 마음의 그 본래 실상 그대로 말씀한 법문입니다.
이른바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모든 존재의 참다운 성품을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우리 중생이 알고 모르고 상관이 없이 본래로 불교말로 무시이래(無始以來)로 끝도 갓도 없이 끝도 갓도 없는 그런 과거로부터서 또는 현재를 거쳐서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자체가 바로 진여불성입니다.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왜 진여라고 하는가 하면은 허망 되지 않고서 사실이라 말입니다. 진실하니까 참 진(眞)자를 썼고 또는 같을 여(如)자는 언제나 변하지 않고서 항상 존재하는 영원히 변치 않는 항상 존재하는 여여히 존재하는 그 생명이라는 뜻으로 해서 같을 여(如)자를 넣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여래(如來)라, 여래는 바로 부처님을 의미 하지 않습니까, 여래라, 여래는 이것은 그 진리 그대로 깨달으신 분이 바로 부처님인데 여래란 말입니다, 여래라!
진리에 조금만 흠결이 있다고 생각 할 때는 여래가 못 되겠지요. 진리 그대로 깨달으신 분이 여래란 말입니다. 그러니 그 여래가 어디에만 깨달으신 그런 성자의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에나 우리 마음에나 어디에나 그 여래 부처님이 존재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무시이래로 본래로 진여불성이 존재 하는 것인데 이 말씀은 진여불성이 어디 부분적으로 어디가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온 천지에 빈틈도 없이 진여불성 이라하는 생명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우주와 더불어서 있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할 때도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나 그런 화신불(化身佛) 모양으로 나투신 부처님은 우리가 인식 할 수가 있는 것이고 알 수가 있지마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이 없이 우주에 언제나 머물러 계시는 참다운 부처님 참다운 부처님더러 그때는 법신부처님이라 합니다. 법신부처님이라!
아까 우리 주지스님께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축원 때 말씀하셨습니다.
보통은 제불 보살의 가피(加被)로 그렇게 축원을 다 하는데 우리 주지스님께서는 갖추갖추 그 법신불도 다 들먹여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이 삼신(三身) 부처님의 가피로 우리 중생들이 모두가 다 편안하게 안온을 기원한다는 그런 뜻으로 축원하셨단 말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법신부처님은 언제 어느 때나 존재하는 영원한 부처님입니다. 그리고 과거에 깨달으신 부처님이나 성인들은 모두가 다 법신부처님이라 하는 우주의 생명자체를 깨달으신 분들이란 말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들도 역시 공부를 잘못해서 아직은 온전한 부처님이 다 못됐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은 석가모니부처님 마음이나 또는 그 법신부처님 마음이나 똑 같습니다. 이렇게 알으셔야 그래야 참다운 우리 신심(信心)이 됩니다.
내 마음 밖에 어디 가서 부처님이 따로 있다. 이러면 그때는 불법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설사 지금 욕심을 부리고 우리 마음이 한치 앞도 못 보는 그런 아주 폐쇄된 그런 마음이라 하더라도 우리 마음의 근본 성품은 부처님과 똑 같단 말입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잘못 생각하고 잘못 말하고 잘못 행동해서 스스로 보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허물은 우리가 잘못 살아서 보지를 못하는 것이지 우리한테 본래로 갖추어있는 그런 그 부처님 법신 부처님은 똑 같습니다.
그러면은 법신부처님은 어디가 있는 것인가? 우리 몸의 어디가 있는 것인가?
우리가 생각 할 때는 우리 뇌나 뇌세포에 가서 어디 가서 부처님이 계시겠지? 보통 우리 마음이나 의식, 우리 의식 활동 같은 것이나 그런 관념형태도 역시 우리 뇌세포의 조작으로 본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설법은 그렇게 서투러운 설법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은 이것은 뇌세포나 심장 어디에 가서 부분적으로 국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몸 전체가 그 불심 불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가 잘못 살아서 더러 암도 걸리고 심장병 걸리고 그렇게 우리 몸이 그때그때 병고(病苦)로 시달리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몸이라 하더라도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몸은 머리카락부터서 발끝까지 그 불성 부처님 성품 그 법신부처님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조금 여러분이 납득하시기 곤란하니까 제가 부연해서 좀 말씀을 해드립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몸이라 하는 것은 몸뚱이 이것은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나 각 원소가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잠시간 합한 것이 우리 몸뚱이 아닙니까.
우리 마음은 금생에 우리가 느끼고 또는 상상하고 또 그리고 의욕도 하고 분별시비하고 이런 것이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구성한 것은 아예 모양이 없으니까 우리가 인제 생각 할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몸뚱이를 구성한 산소나 수소나 그런 것은 우리가 지금 물리학을 좀 배웠으니까 알 수가 있단 말입니다.
산소나 수소나 그런 것은 원래 무엇인가? 그런 것은 내내야 각 전자(電子)나 양성자(陽性子)나 중성자(中性子)나 그런 것이 어떻게 모여 있는가? 어떻게 모여 있는가에 따라서 산소나 수소나 그런 원소의 구분이 있지 않습니까?
자 그러면은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그런 것은 무엇인가? 그런 것은 알 수없는 하나의 에너지, 에너지의 파동(波動)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현대 물리학자가 말 한 것입니다.
가장 미세한 그런 가장 미미한 그런 전자나 양성자나 그런 것은 어느 물질이 있어 가지고서 그래 가지고서 그런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아닌 에너지 이른바 우주의 기(氣) 우주의 기가 어떻게 진동 하는가 어떻게 운동 하는가 그런 그 운동 상태에 따라서 전자가 되고 또는 양성자가 되고 다 그런다는 것입니다.
기 따라서 물질이라는 것은 이렇게 분석하고 분석하고 들어가서 보면은 나중에는 하나의 우주의 기만 남는단 말입니다. 이른바 에너지만 남는단 말입니다.
에너지 불멸이라, 즉 현대 물리학은 에너지 불멸이라, 그 우주의 기 에너지는 그때는 불멸이라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그 양이 조금도 줄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현대 물리학의 결론입니다.
기 따라서 우리 눈에 보이는 우리 몸뚱이나 말입니다. 자기가 지금 끼고 있는 다이아반지나 그런 것도 이것이 원래 본래로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그 우주의 기 우주의 에너지의 하나의 진동, 진동 따라서 운동 따라서 잠시간 잠시간 이렇게 저렇게 모양을 낸 것이 또 그것들이 모여서 이른바 금이 되고 은이 되고 인제 다이아몬드가 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양이 있는 것은 부처님 말씀대로 하면은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라, 일체유위법은 모양이 있는 모든 존재를 말합니다. 일체유위법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이 모양이 있는 이 현상적인 존재, 상이 있는 존재는 모두가 이것은 꿈이요 허깨비요 다 그림자란 말입니다.
그 무슨 형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분명히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림자 자체 그것은 있는 것 같지만은 사실은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거울에 비치는 그런 허상(虛像) 이것이 분명히 거울에 자기 모양같이 비추기도 하고 다른 또 아주 미운사람 비추면 또 미웁게 보이기도 하고 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헛된 허상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실지로 있지가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자(聖者)가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우리 중생이 봐서는 내 몸 이대로 반드시 있고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고 금이면 금이고 그러겠습니다 만은 성자들은 우주의 순수한 상태를 바로 보는 것입니다. 우주의 기 어디에나 충만 돼있는 우주의 에너지를 성자는 바로 감득(感得)한단 말입니다.
현대물리학은 에너지뿐이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 이상은 모릅니다. 왜 모르는고 하면은 현대물리학은 증명이 안 되는 것은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허나 성자는 증명이 안 되는 그러한 순수생명자리도 성자는 충분히 다 감득 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가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에너지 그것이 그냥 보통 에너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 그 자체가 바로 광명이 충만한 우주의 생명의 빛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이 유정무정(有情無情) 유상무상(有相無相) 모든 존재를 구성한 근본적인 것이 이것이 바로 에너진데 에너지의 그 정체가 바로 불성(佛性)이고 불심(佛心)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하면은 우주라는 것은 모두가 불성과 불심으로 충만 돼있습니다. 불성과 불심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한 그런 찬란한 광명의 바다위에서 잠시간 이것이 되고 저것이 되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진여연기(眞如緣起)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것이 본래로 우주에 충만해 있는 것인데 그런 자리로 부터서 이 만유(萬有)가 이루어졌단 말입니다. 만유가,
이것이 대승연기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잘나나 못나나 잘 생기나 또는 고체나 또는 액체나 이 공기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 근본이 돼서 이루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진여불성이 근본이 돼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 바다에서 바람 따라서 파도가 치는데 높은 파도 낮은 파도가 있겠지요. 그 파도가 똑 같은 다 물이지 않습니까. 그와 똑 같이 그 진여불성 이라하는 그 광대무변한 우주법계(宇宙法界)에서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것이 하늘에 있는 태양계(太陽系)요 또는 지구(地球)요 나요 너요 하기 때문에 어느 것도 모두가 다 진여불성으로 돼있단 말입니다.
납득이 가시겠습니까? 어느 것도 진여불성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다만 우리 중생들은 겉만 보니까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이러지만은 그 근본바탕 진여불성을 깨달은 분이 이른바 성자라 말입니다.
견성오도(見性悟道)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주만유의 근본성품, 근본성품인 진여불성을 체험했단 말입니다. 체험 못 하면은 그때는 우리보통 범부가 되겠지요.
그러나 참선(參禪) 염불(念佛)을 많이 해서 그래서 우리 마음의 업장(業障)이 녹아져서 모든 습기(習氣)가 다 녹아서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같이 또는 정통조사 같이 우주만유의 근본자리를 체험(體驗)했단 말입니다.
체험했다고 생각 할 때는 이것을 보나 저것을 보나 그때는 모두가 다 부처님뿐이란 말입니다. 어느 것도 진여불성으로 안된 것이 없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 승가도 마찬가지고 이 세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얼마나 참 혼란스럽습니까? 이런 것은 그 원인이 어디가 있는 것인가?
외화가 많고 무슨 금덩이가 많고 또는 부존 자연자원이 많고 이러면 좋을 것인데 그런 것이 부족해서 물질이 부족하니까 서로 아귀다툼 하고 싸우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사실은 물질의 부족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우리 인간의 마음이 근본도리를 미처 모른단 말입니다. 우리 생명의 정체를 모른단 말입니다.
내 생명이라 하는 것은 내 몸뚱이가 이것이 생명이 아니고 내 몸뚱이나 내 마음의 그런 본래의 자리 우리 불심자리가 바로 내 생명의 주인공인데 그 자리는 모르고서 겉에만 우리가 집착한단 말입니다. 겉에만 집착하면은 옷도 기왕이면은 더 좋은 옷 입을라 하고 음식도 맛진 음식을 먹을라 하고 그런 쪽으로만 다니겠지요. 감투를 써 놓으면 또 그런 것이 하기가 좀 쉬우니까 감투를 쓸라고 애쓰고 말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대학 나오고 대학원 나오고 박사학위도 받고 다 그렇게 공부를 또 많이 한 분들이 주로 국회의원 되고 모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도 가만히 보면은 자기 집안끼리도 국회의원 서로 나올라고 서로 공천 받을라고 또 이제 싸우고 한단 말입니다.
평소에 같은 친구들도 자기들 하는 정당이 다르면 그때는 치고받고도 하고 추태를 부리고 한단 말입니다. 그런 것이 모두가 다 본래의 자리 본래의 그 본체를 몰라서 그럽니다.
세계의 모두가 지금 다 그렇습니다. 저 유고의 지금 코소본가 뭣인가 그 사태도 지금 보십시오. 그 모든 사람들이 본래의 자리 본래진리를 안다고 생각 할 때는 홍로일점설(紅爐一點設)이라, 순식간에 다 끝나 버릴 것을 그렇지 못 하고 겉만 보니까 말입니다. 민족이 좀 다르다고 해서 같은 인간끼리 말입니다. 같은 인간이고 또 같이 다 불성인 인간들인데 무슨 아르바니아 인이나 뭐 세르바니아 인이나 모다 그런 것이 무슨 그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 이른바 민족청소라 그런 더러운 말이 생긴단 말입니다. 자기하고 다른 민족이라 해서 그냥 아주 완전히 청소를 시킨단 말입니다. 얼마나 참 그 못난 짓입니까. 그러면은 청소하는 쪽이 좋을 것인가 그렇지가 않습니다. 본래가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아르바니아 인이나 또는 세르바니아 인이나 내내야 다 똑 같은 본래로 불성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불행 하면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또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도 똑 같이 불행한 것입니다.
천지는 나와 더불어서 뿌리가 같단 말입니다. 천지는 나와 더불어서 뿌리 같기 때문에 그때는 만물은 나와 더불어서 하나의 몸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다. 불교말로 하면은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 둘이 아닌 법문이란 말입니다.
둘이 아닌 법문을 모르면은 불교를 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둘이 아닌 법문을 안다고 생각 할 때는 나나 너나 나나 도독놈이나 또는 좋은 사람이나 모두가 다 그것은 겉에 있던 겉에 이루어진 하나의 업장의 차이뿐인 것이지 생명자체는 동일한 그런 생명입니다.
그렇게 안다고 생각 할 때는 나쁜 놈이라고 해서 우리가 함부로 사형도 시킬 수가 없습니다. 사형시킨다고 그래서 우리 인류를 위해서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오직 불심으로 나아가도록 까지 우리가 교화를 시키면 된는 것입니다. 한번 안 되면 두 번, 죽을 때 까지 안 듣는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잠재의식에는 교화를 받으면 정말로 참 내가 미처 내가 나쁜 버릇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대로 내가 못 나아간다 하더라도 부처님이라는 것은 내 생명의 근본이구나 우주의 근원이구나 이렇게 생각을 한단 말입니다.
그럼 그때는 죽은 뒤에라도 내생 가서 또 공부를 하겠지요. 부처님 법은 심심미묘한 법입니다. 모든 만법이 다 거기에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행복 할라고 생각 할 때에는 우리 인간으로 손해 없이 살라고 생각 할 때에는 부처님 법을 일로매진(一路邁進)해서 닦으셔야 됩니다. 정말로 부처님 법만을 부처님 법만을 찬탄하고 부처님 법만을 닦기 위해서도 우리 인생은 너무나 짧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진여연기라, 진여불성이라 하는 것은 그냥 보통 ‘우주의 에너지다’ 이런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여불성은 만덕(萬德)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자비(慈悲)나 또는 지혜(智慧)나 행복(幸福)이나 능력(能力)이나 모든 것을 갖춘 것이 이것이 진여불성입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같은 진여불성이니까 말입니다. 어느 누구나가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것은 만덕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현재 해야 할 일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우리 생명에 대해서 가장 커다란 일이 뭣인가?
이것은 우리 마음, 우리마음에 갖추고 있는 불성을 깨닫는 일입니다. 이것보다도 더 급한 일은 없습니다.
석가모니를 위시해서 공자나 또는 노자나 마호메트나 또는 소크라테스나 예수나 말입니다. 다 부처님 법을 따라서 가신 분들입니다. 말만 다른 것이지 우주에 그 변만해 있는 우주의 근원적인 진리를 따라서 가신 분이 이른바 성자란 말입니다. 성자가 아니면은 그 분들 가르침 따라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 공산주의 보십시오. 그렇게 애쓰고 많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했지만 뭐 100년이 미처 못 갔단 말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안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의 길이기 때문에 그런 길로 가는 것이 모두의 행복을 여는 길이기 때문에 안 따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무서운 그런 그 혼란스러운 이 정보화시대(情報化時代) 이런 정보화시대에 있어서는 우리가 현상적인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문제 이런 문제만 생각해서는 그 혼란스러운 정보를 우리가 맑힐 수가 없습니다. 가닥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모든 존재 모든 철학(哲學) 모든 과학(科學)의 근본을 이루고 있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우리가 대중해서 거기에서 비추어 본다고 생각 할 때에는 모두가 그때는 가닥가닥 다 질서 있게 풀리는 것입니다.
저 중세기에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참 그야말로 소크라테스 이후에 있어서 철학적으로 굉장히 위대한 분으로 해서 우리가 숭앙들을 합니다. 스피노자 프랑스의 스피노자 말입니다. 스피노자가 주로 불교 공부를 많이 한 분이어요. 불교 공부를 그래서 이른바 범신론(汎神論)이라, 범신론은 이것은 넓을 범(汎)자, 귀신 신(神)자 말입니다.
그런 해설은 지금 시간이 없고 이것은 우주가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을 갖춘 신이다. 즉 이런 거란 말입니다. 자연계(自然界)가 바로 생명(生命)을 갖춘 신(神)이다. 신이 바로 자연이고 자연계가 바로 신이다 말입니다.
우주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신적 요소, 신(神)같은 그런 요소를 갖추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표현은 좀 다르나 부처님 공부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이런 말씀을 했어요. ‘영원의 차원에서 현실을 관찰하라, 그러면은 현실의 모든 것은 영원에 참여 한다’ 이런 말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현실에서 현실만 지금 볼 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 배운 대로 지금 느낀 대로 그냥 즉흥적으로 보니까 밉고 좋고 모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인제 그런 게 생기겠지요.
그러나 영원의 차원은 바로 근본을 뜻합니다. 근본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진여불성의 차원에서 하나하나 이것을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 현실이 됐기 때문에 진여불성이라는 것에 다 모두가 거기에다 포섭되고 만단 말입니다.
우리가 자기한테 짓궂게 구는 사람들이 굉장히 밉지요. 저 같이 출가한 승려도 승려 사회도 이따금은 시기심도 많고 해서 엉뚱한 중상모략도 하고 그런 일이 더러 있어요. 그런 말 그 근거 없이 무슨 말 들릴 때는 굉장히 속상합니다. 그 주먹이라도 몇 대나 쥐어 박히면 되겠다. 그런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단 말입니다.
물론 법이 있고 그러고 행동으로는 옮길 수는 없지만은 그렇게 생각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것이 모두가 다 근본 본바탕에서 보지를 못 해서 그런다 말입니다. 근본바탕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미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나치게 좋아 할 것도 없습니다.
재산을 좀 그렇게 모으기 위해서 다른 이웃사람은 곧 굶주려서 잘 못 먹는데 자기만 잘 살고 잘 입고 잘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옆에 가난한 사람이나 누구나 모두가 다 본래로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명을 우리가 소홀히 대하면 우리 생명에 훼손을 받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꼭 그 대승불법을 생각 하셔서 모두가 다 진여연기라,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인연 연(緣)자, 일어날 기(起)자 말입니다.
진여불성이라 하는 것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언제나 존재하는 우주의 생명자체입니다. 우주의 아주 실상자체입니다. 이 자리가 바로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이 자리는 조금도 치우침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비록 인간존재로 태어나서 몇십년 동안 살다가 죽어갑니다만 그렇더라도 우리 인간 자체는 절대로 우리 물질적인 몸뚱이와 더불어서 소멸이 안 됩니다. 우리 인간존재는 바로 생명자체 생명 진여불성이 바로 우리마음 자리이기 때문에 이 자리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즉 따라서 무시이래로 과거에 이 지구가 생겨나고 우주가 생겨나기 전에는 그때는 그냥 광명천지(光明天地)입니다. 진여불성만 우주에 충만해 있던 것인데 그때 여러 가지 그런 그 중생의 공업(共業)으로 해서 그때는 우주가 형성 되어 나온단 말입니다.
우주가 형성되는데 그 가운데 우리 지구가 생겨나고 하겠지요. 그래서 인간존재가 나오는 것인데 따라서 지금 현재 인간존재로 있다 하더라도 우주의 본래의 자리는 우리인간존재의 본래의 자리는 모두가 다 진여불성입니다.
진여불성이란 것이 이것이 모든 만유의 근본생명이다. 이렇게 깊이 외이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진여(眞如) 이것은 불심(佛心) ․ 불성(佛性) 또는 법성(法性) ․ 법계(法界) 또는 열반(涅槃) ․ 극락(極樂) ․ 도(道) 이것이 모두가 다 같은 뜻이어요. 불자님들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이런 도리만은 이런 술어만은 외어두시면 굉장히 편리합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열반이나 극락이나 또는 보리(菩提)나 또는 불심이나 불성이나 법성이나 또는 실상(實相)이나 중도(中道)나 이런 것은 같은 뜻이어요. 모두가 다.
이명동의(異名同意)라, 이름은 달라도 뜻은 똑 같습니다. 따라서 이 자리가 바로 우리 생명의 진짜 본래면목(本來面目)입니다.
이 자리에다가 마음을 두기 위해서 우리가 참선(參禪)도 하고 염불(念佛)도 하고 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여불성을 그렇게 명심 하시고 외워두시기 바라고 또 한 가지 제가 더 말씀드릴 것은 뭣 인고 하면은 우리 지금 불교도 그런 경향이 있는 것도 같고 다른 종교도 그렇습니다 만은 우리의 본래 생명자리인 부처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너무 소홀히 생각한단 말입니다.
부처라는 것은 하나의 그야말로 참 우주의 생명인데 우리 마음의 바로 근본생명 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자리를 찬탄(讚嘆)하고 찬미(讚美)하고 한없이 찬탄하고 찬미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부족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찬탄하는 그런 정도가 지금 미약하단 말입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외인다 하더라도 우선 현상적인 문제를 생각해서 현상적인 자기의 소원성취를 위해서 모두가 하는 것이지 정말로 그 생명의 내 생명의 본래면목자리를 찬탄하고 찬미하고 우리가 추구해서 하는 것은 보통 아니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님들은 그 우리생명의 본 고향자리에 대해서 보다 더 간절한 그런 동경심(憧憬心)과 흠모(欽慕)하는 마음을 가지셔야 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 본래의 그런 고향자리 우리 본래 생명자리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을 거기다가 딱 집중을 시킨다고 생각할 때는 현재 모든 문제가 현상적인 문제도 가장 좋은 쪽으로 풀려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이 아프면 몸이 건강하기 위해서 기도를 모시고 집안의 운수가 나쁘면 운수가 잘되기 잘 풀리기 위해서 기도를 모시고 하지요. 그러나 그 잘 되기 위해서 일부러 생각하고 꼭 그 자리를 생각하는 것보다도 그 진여불성자리 진여불성 자리에다가 우리 마음을 거기다가 두어서 우리가 기도를 모시고 부처님 명호를 외이고 한다고 생각 할 때에는 다른 것은 저절로 다 이른바 법이자연(法爾自然)적으로 다 풀려가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진여불성 자리 이것은 한계가 없단 말입니다. 김가의 진여불성이나 박가의 진여불성이나 또는 돼지나 소의 진여불성이나 또는 나무의 진여불성이나 또는 그 철 가운데 있는 무쇠에 있는 진여불성이나 어떠한 것에나 진여불성은 본래로 존재하는 생명자체 생명의 광명자체인데 그 자리는 한계가 없는 것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은 시간성 공간성이 없습니다. 따라서 진여불성에다가 우리 마음을 두고서 기도를 모신다고 생각할 때는 다른 것은 그때는 따라서 저절로 다 풀려가는 것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모르면은 참다운 불법이 아닙니다. 불법 가운데도 소승에 머물고 맙니다. 따라서 진여불성을 꼭 알으시고 진여연기(眞如緣起)라, 더 나아가 진여연기라, 모두가 다 진여불성 자리에서 인연 따라서 잠시간 내가 되고 너가 되고 이 산천초목(山川草木) 모두가 됐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본래에 있어서는 똑 같단 말입니다.
모두가 하나의 진리(眞理)입니다. 우주(宇宙)가 하나의 생명(生命)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부처님 법문 가운데서 불이법문(不二法文)이라 둘이 아닌 법문이란 그 법문이 굉장히 중요해요. 여러분 유마경(維摩經)을 보셨으면 알으시겠습니다 만은 유마경에서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라, 둘이 아닌 진리에 들어가는 법문이라 말입니다.
화엄경(華嚴經)도 모두가 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두가 다 불심이라 하는 불심이라는 그 마음으로 우주가 됐단 말입니다. 우주가 다 물질은 이것은 다만 그런 불심이 어떻게 진동 하는가 불심에너지가 어떻게 진동 하는가 그런거 따라서 진동하는 모양이 하나의 전자요 양성자요 한다는 말입니다.
우주 생명 에너지의 파동에 불과한 것을 사실은 물질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이나 색즉공(色卽空)이라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이런 것은 뭣 인고 하면은 일체존재는 모두가 다 본래로 비었다는 것입니다.
본래로 비었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빈 것이 아니라, 그 빈자리, 빈 그 정체는 바로 불성이고 진여고 그럽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알기 위해서는 모두가 다 비었다는 소식을 알아야 그 자리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21세기 뭐 세기를 따른다면 우리가 한계를 지을 필요도 없지만은 앞으로도 오는 세대는 말입니다. 꼭 부처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해야 될 그런 세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전쟁이라든가 인간끼리 갈등이나 반목이 도저히 그치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때는 우리 모두가 인제 불행에 불행의 혼탁한 그런 탁류에 휩싸이고 말겠지요.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을 우리가 아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정말로 감사하고 감사하고 부처님 공덕(功德)에 대해서 한도 끝도 없이 우리는 찬탄해도 오히려 부족합니다. 내 생명의 근원인 동시에 또는 우리 생명이 그 진여불성으로 부터서 왔습니다. 다시 또 진여불성이 됩니다. 진여불성이 못되면 또 괜시리 잘못 살아 가지고 지옥도 갔다가 어디로 갔다가 우리가 헤매는 것입니다.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의 길은 오직 외길 한길뿐입니다. 성불의 길이란 말입니다.
뭐 때문에 성불의 길을 우리가 주저하고 더디게 갈 것인가? 그 하찮은 물질들 음식은 많이 먹어서 좋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음식 많이 먹는건 도리어 해롭습니다. 고기를 많이 먹어서 꼭 그것이 다 우리 살로 가고 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기를 너무나 많이 먹어서 도리어 지금은 이른바 문명병(文明病)이 더 많이 생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돼지나 소나 그것도 역시 우리 생명과 더불어서 같은 생명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존중해 줘야 됩니다. 왜 그네들을 함부로 우리가 죽여서 우리가 먹을 것인가 말입니다.
부처님 계율(戒律)은 그냥 아무렇게나 된 계율이 아닙니다. 우주의 도리에 비추어서 꼭 우리가 성불하기에 알맞는 그러한 도덕률(道德律) 이것이 부처님 계율이란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갈 길은 다른 길은 우리 생명을 낭비하는 길입니다. 부처님 가르침만이 부처가 되는 그 길만이 우리가 꼭 가야할 당연한 길인 것이고 또는 우리를 최상의 행복(幸福)으로 인도 하는 그런 오직 하나의 청정한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사실은 제일가기가 쉬운 것입니다. 불자님들 부처님 되는 것이 어렵다고 절대로 생각을 말으십시오. 우리가 본래로 부처입니다.
진여불성은 우리도 똑 같이 석가모니 같은 자비심 또는 지혜 또는 모든 능력을 다 온전히 갖추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들 때문에 우리 눈이 멀어서 그런 온전한 능력을 개발 안 한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앞서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생명의 근본인 동시에 우주 만유의 근본자리인 진여불성, 진여불성을 꼭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진여불성은 이것은 내 마음이 바로 생명인데 내 생명의 근본자리가 진여불성 자리기 때문에 우리가 혼신의 힘을 다해서 그 자리를 흠모하고 추구하고 그 자리를 우리가 구해야 됩니다.
그 우리 진여불성의 이름이 하나의 인격이기 때문에 인격적인 이름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 문수보살(文殊菩薩) 다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 진여불성 하나의 공덕(功德) 이름이란 말입니다.
진여불성은 만 공덕을 갖춘 자리이기 때문에 하나의 이름으로 해서는 다 표현을 못 합니다. 전체를 포괄해서 말할 때는 그때는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인 것이고, 또는 진여불성 자리에 있는 그 한도 끝도 없는 대자대비(大慈大悲)를 말할 때는 관세음보살, 지혜를 말할 때는 문수보살, 우리 원력(願力)을 말할 때는 보현보살(普賢菩薩) 말입니다.
우리 중생의 영혼을 다스리는 쪽에서 말할 때는 지장보살(地藏菩薩), 그 자리는 모두가 하나의 자린데 만 공덕의 자리이기 때문에 하나의 이름으로 해서는 다 표현을 못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인연 따라서 관세음보살을 외이시든 또는 지장보살을 외이시든 다 같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모두가 진여불성의 무한공덕자리를 표현한 이것은 다른 공덕 이름이구나 이렇게 생각 하시면서 그 부처님 명호(名號), 부처님 명호를 외이면은 바로 그것이 진여불성의 인생과 우주의 근본생명 이름이기 때문에 우리 생명이 차근차근 정화가 되고 또는 진여불성으로 접근되는 것입니다.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화두(話頭)를 드나 무슨 공부나 모두가 다 그 자리 우리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자성 불성자리를 우리가 다 개발하고 얻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오늘은 또 영가(靈駕)들 천도식이 있습니다. 영가들 천도식에 대해서 제가 또 몇 말씀 주지스님께서 부탁 하시고 해서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영가라는 것은 우리 인간존재가 무상하나마 존재하듯이 영가도 우리 중생의 우리 인간존재의 눈에는 지금 안 보이지 않습니까. 안 보이나 분명히 무상하지만은 항시 그대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은 그러지만 인간존재가 존재하듯이 존재 하는 것입니다. 지옥(地獄)도 마찬가집니다.
지옥이나 또는 아귀(餓鬼)는 내내야 영가나 모다 그런 귀신세계 아닙니까. 아귀나 또는 축생(畜生)은 인제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런 세계가 아닙니까. 또는 아수라(阿修羅) 아수라도 우리 사람의 눈에는 안보입니다. 그러나 싸움 좋아하는 싸움을 좋아하는 그런 또 영체의 세계가 있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 가서 우리 인간(人間) 아닙니까. 인간 그 다음에 가서 천상(天上)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천상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데 우리 사람들 더러 좋은 일 해가지고 천상에 나라고 하는 권선징악(勸善懲惡)적으로 그렇게 방편을 말한 것이 아닌가. 방편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것도 역시 무상하지만은, 우리 인간도 무상한 것입니다. 우리가 실존적인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무상하지만 존재하듯이 천상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따라서 그 영가도 존재합니다. 우리가 죽어지면 영가가 됩니다. 아주 나쁜 사람들 나쁜 행동을 많이 하는 그런 영혼들은 우리가 죽자마자 바로 지옥으로 직행을 합니다.
또는 죽자마자 욕심 많고 시기심 많고 그런 걸로 해서 딱 뭉친 사람들은 죽자마자 독사가 되기도 하고 구렁이가 되기도 하고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은 어느 동안은 상당히 중음(中陰)이라 저승세계에서 헤맨단 말입니다. 아주 선량한 영혼들은 그때는 극락세계(極樂世界)로 직행을 합니다.
그래서 나쁜 영혼은 지옥으로 직행 하는 것이고 또는 훌륭한 이런 상을 떠나고서 남한테 베풀기도 많이 하고 그런 영혼들은 그때는 극락세계로 직행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영혼들은 어느 동안 상당히 상당한 동안 저승에서 머뭅니다. 저승에서 머물면 그것이 상당히 저승에서 머무는 동안이 긴 영혼도 있고 또는 짧은 영혼도 있습니다.
업장(業障)이 무거운 영혼들은 더 길겠지요. 그러나 저승이라 하는 것은 어두운 세계란 말입니다. 불교말로 유명계(幽冥界)라 어두운 세계인데 어두운 세계는 스승도 없습니다.
사람세상 같음사 선지식도 있고 경(經)률(律)도 있고 하니까 우리가 배우고 듣고 하겠습니다만은 영혼세계는 그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영혼을 꼭 좋은 길에 인도하는 그런 법문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절 집에서 하는 천도(遷度)법문(法門)입니다.
오늘 인연(因緣) 따라서 이 천도법문을 들으시는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이시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영가들은 지금 저승에서 유명계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가들이 돌아갈 곳은 그러한 저승이 아닙니다. 또는 지옥도 아니고 천상도 아니고 영가들이 돌아갈 곳은 우리 인간도 아닙니다. 영가들이 마지막 그 도착 마지막 종착점은 이것은 역시 극락세계입니다.
모든 중생이 다 본래로 진여불성이 우리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가 다 꼭 극락세계로 가셔야 됩니다. 극락세계라는 것은 이것은 천상이나 다른 세계와는 그건 닳습니다. 극락세계는 성자만이 갈 수 있는 상을 떠나 버린, 나라는 상 너라는 상 그런 상이라든가 모든 상을 떠나버린 그러한 성자만이 갈 수 있는 세계가 극락세계입니다.
영가들이시여!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극락세계는 우리 인간 또는 모든 존재가 필경으로 마지막으로 거기에 태어나는 그런 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영생의 세계이기 때문에 죽음과 또는 낢이 없습니다.
다만 그 세계에서 중생을 굽어봐서 중생이 불쌍하니까 그때는 중생계에 나와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잠시간 중생계로 태어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원력 따라서 오는 것이지 업장 따라서 오는 것은 아닙니다.
영가들이시여! 깊이 명심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극락세계에 계시는 분들은 조금도 고통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모두가 다 몸이 광명(光明)의 몸이란 말입니다. 그냥 물질의 몸이 아닙니다. 모양이 있는 몸이 아니라 모양이 없는 순수생명(純粹生命), 순수광명(純粹光明)의 몸이 극락세계에 있는 그러한 분들의 몸입니다. 따라서 이 성자의 몸이란 말입니다. 생사가 없고서 언제까지나 영생으로 극락세계에서 안락(安樂)을 누리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러는 그냥 우주의 불성하고 하나가 돼 버려야 되겠다. 그렇게 하신 분들은 그때는 극락세계에서 다시 그때는 인제 삼매(三昧)에 들어서 열반(涅槃)에 들으셔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우주의 불성과 하나가 돼버리겠지요. 그러나 그렇지 못 하고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인간이 불쌍해서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서 올 때는 그때는 자기 스스로 원력 따라서 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이 지금 있는 몸도 역시 허망한 몸입니다. 영가들이 평소에 인간세상에서 살 때에 아들이요 딸이요 남편이요 아내요 한 그러한 인연도 역시 잠시간 인연에 불과한 것입니다. 영원의 인연이 못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인연도 무상 무상전변(無常轉變)이라 다 허무한 인연이라 말입니다.
영가들이 평소에 지상에서 누리던 그런 지위나 또는 재물이나 이런 것도 사실은 영가들의 것이 아닙니다. 영가들의 몸도 영가들의 것이 아니어서 몸을 버리고 지금 영가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물며 영가들의 그 몸에 따른 그런 재산이나 또는 권속이나 또는 명예나 그런 것도 역시 영가의 것이 아닙니다. 영가의 것은 무엇인가? 영가가 지금 짊어지고 있는 영가의 업장(業障)만이 영가의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영가들이 업(業)을 지어서 지금 저승에서 유명계에서 헤매고 있다 하더라도 영가들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은 영가들의 본래의 생명은 역시 바로 불성(佛性)입니다 바로 부처님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자리는 그때는 오염도 안 되고 또는 더 한것도 아니고 덜 한것도 아닌 것입니다.
영원히 멸치 않는 우주의 참다운 불성과 더불어서 둘이 아닌 자리입니다.
영가들이시여! 불성을 모를 때는 그 물질이 내 몸이다 지수화풍 4대가 합해진 원소가 합해진 이 물질이 내 몸이다 이런 때는 물질의 애착 때문에 윤회(輪廻)를 합니다. 잘못 살아서 지옥도 가는 것이고 또는 축생도 가는 것이고 합니다.
그러나 내 생명은 참다운 생명은 바로 진여불성이라, 이럴 때는 영가들은 다른 모든 그런 유한적인 것 한계가 있는 것은 자기의 소유가 아니고 자기의 것이 아니니까 그런 것은 다 부정을 해버리셔야 됩니다.
영가들이시여! 극락세계는 절대로 먼 길이 아닙니다. 극락세계는 우리가 물질적인 그런 관념 사바세계(娑婆世界)에서 누리던 그런 애착(愛着)이라든가 그런 우리 미련이나 그런 것을 다 버리면은 그때는 훨히 즉시에 그냥 비약적으로 극락세계에 태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모든 허망한 것들을 다 버리고서 극락세계에 고이 왕생극락(往生極樂)하소서!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20000401-창원성주사 니르바나대법회-청화대선사설법
20000401-삼영불교음반-학무 유락재 촬영
20040506-DVD동영상 작업-본정 김영동
20070305-녹취 워드정리-주안 한동일
*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용으로 큰스님 말씀 그대로 받아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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