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9 호>
19880807-태안사 하안거 용맹정진입제 대법회
*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작업용으로 큰스님 말씀 그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십마물임마래(什麽物恁麽來)
우리가 이렇게 더운 날에는 보다 시원스러운, 마음도 시원스럽고 몸도 시원스러운 그러한 청량미(淸凉味)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부처님 법 가운데는 마음의 번뇌(煩惱)가 없고 또는 환경도 쾌적한 그런 것을 가리켜서 그러한 곳의 가장 최선의 쾌적한 장소 이것이 청량지(淸凉地)라 말입니다. 청량지를 다른 말로 하면은 이것은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입니다. 다시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의 번뇌도 없고 우리 주변사정도 조금도 험난한 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날 우리가 공장에서 일을 한다거나 또는 자기 직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 그런 분들은 아무리 잘 생각한다 하더라도 화택고해(火宅苦海)라 하는 괴로움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화택고해와 청량지는 상대적인 대척(對蹠)적인 그런 말입니다.
화택고해라, 불 화(火)자 집 택(宅)자 또는 괴로울 고(苦)자 바다 해(海)자 입니다. 헌데 이렇게 더운 날 뿐만이 아니라 우리 중생계(衆生界)를 가리켜서 번뇌를 미처 못 여윈 중생계를 가리켜서 화택고해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제 아무리 시원스러운 처소(處所)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에 번뇌가 가시지 못 하면 우리는 화택고해에 있는 셈입니다.
화택고해의 특징은 무엇인가. 화택고해의 특징은 이것은 다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의 무거운 번뇌입니다. 번뇌는 어째서 있는 것인가, 번뇌는 사물(事物)을 바로 못 봐서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무명심(無明心)이란 말입니다.
이 현상계(現象界)라든가 현상계의 근본 진리(眞理)라든가 이러한 원리(原理)라든가 이걸 바로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리 사물을 바로 못 보기 때문에 바로 못 보는 이것이 바로 없을 무(無)자 밝을 명(明)자 말입니다. 밝지 못하는 무명심입니다. 따라서 무명심이 있으면 그때는 필연적으로 우리 번뇌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사물을 바로 못 보거니, 바로만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나라는 것도 사실 허망(虛妄)한 것이고 일체존재(一切存在)가 모두가 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한 것인데 이걸 잘 못 보니까 없는 것을 있다고 보고 또 있는 것을 없다고 본단 말입니다.
이렇게 바로 못 보기 때문에 집착하는데서 그때는 탐욕심(貪慾心)도 생기고 여러 가지 진심(嗔心)이나 기타 가지가지의 번뇌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어떻게 잘못 보는 것인가? 우리 일반 중생은 사실은 없는 것을 있다고 본다 말입니다. 이것이 부처님 일대시교(一代時敎)에서 말씀한 이른바 있을 유(有)자 유교(有敎)입니다. 모든 것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는 일반 물리학(物理學)도 우리 중생이 보는 차원(次元)에서 상식적으로 있다 하는 것을 그대로 긍정(肯定)을 못 합니다. 과학적(科學的)으로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중생이 있는 것 같이 있지가 않는 것입니다.
있는 것 같이 있지 않은, 참다운 지혜(智慧)로 본다 할 때에 순 객관적(客觀的)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인생(人生)이라 하는 것은 그야말로 아까 제 말씀마따나 일체 고해(苦海)라 하는 그런 고(苦)뿐입니다.
또는 모든 존재(存在)는 무상(無常)이라 하는 조금도 머물지 않는 순간순간 찰나찰나 변화해서 마지않는 그런 무상입니다. 순간순간 변화하기 때문에 나라고 고집 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사실은 내가 없는 것입니다. 무아(無我)란 말입니다.
무상이고 무아기 때문에 정말로 있다고 할 수가 없이 일체 존재는 그때는 공(空)입니다.
객관적으로 우리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인생은 고(苦)요, 또는 무상(無常)이요, 또는 무아(無我)요, 공(空)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과학적(科學的)인 진리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어디가 있는 것인가? 내내야 하나의 각 세포가 모여서 나라는 몸뚱이가 있단 말입니다. 나라는 마음은 어디가 있는 것인가? 나라는 마음은 우리가 잡을 수가 없습니다.
지나가는 마음은 벌써 지나가버려서 우리가 못 잡는 것이고 또 미래 마음은 아직 오지 않아서 못 잡고 말입니다. 현재 지금 좋다 궂다 하는 우리가 판단하는 인식(認識)하는 이 마음은 조금도 순간찰나도 머물지 않고 변해서 마지않습니다.
즉 과거(過去)라는 우리 기억은 지금 존재가 없고 말입니다. 다만 기억 속에만 있는 것이지 과거는 이미 어디에도 없습니다. 미래(未來)는 미리서 헤아리는 그 마음 가운데 미래가 있는 것이지 다가오지 않아서 미래도 어디에도 없습니다.
현재(現在)는 어디가 있는 것인가? 현재는 순간찰나도 머물지 않고 변화해서 마지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도 사실은 없고 미래도 없고 현재도 없단 말입니다.
과거나 미래나 현재나 이런 시간은 우리 번뇌(煩惱)로 해서 우리 범부(凡夫)가 미망심(迷妄心)때문에 있다고 하는 것이지 사실은 없는 것입니다. 과거가 없고 현재가 없고 미래가 없거니 나라는 존재가 사실 있을 턱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 중생은 상식적으로, 과학(科學)도 잘 모르고 또는 보다 깊은 철학(哲學)이나 그런 종교(宗敎)도 모르는 것이니까 상식적으로 그저 이런 현상적(現象的)인 모양이 보이면 내가 있다 네가 있다 무슨 좋다 궂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자님들 우리는 지금 상식만 가지고 살 수는 없는 시대입니다. 상식만 가지고 살았다가는 인간은 자기도 괴롭고 자기 가정(家庭)도 괴롭고 사회(社會)도 괴롭곤 합니다. 사회가 왜 이와 같이 혼란스러운 것인가? 이것은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없는 것을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현대학문적(現代學問的)인 결과인 과학만 가지고 본다 하더라도 분명히 인생이라 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괴로움뿐입니다. 벌써 늙어야 쓰고 아파야 쓰고 또는 죽어야 쓰고, 헤어져야 쓰고, 시간의 차이뿐인 것이지 결국은 우리가 죽어야 쓰고 아파야 쓰고 헤어져야 쓴단 말입니다.
이것만 생각한다 하더라도 인간은 좋을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 외에도 얼마나 번뇌가 많습니까. 또 모든 것은 어느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가 않는 것입니다. 좋은 것도 머물러 있지가 않고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細胞)도 역시 순간순간 변화해서 마지않습니다.
나는 늙지 않는다. 나는 젊다. 젊음이 어지간히도 있다 생각하고서 자기 과시를 하고 지냅니다만 젊음도 그야말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좋은 꽃이 열흘을 미처 못 가듯이 결국은 이울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젊음도 늙음도 소년도 순간순간 변동해서 마지않습니다. 따라서 무상(無常)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그와 같이 그런 변화를 잘못 보는 것입니다. 못 보기 때문에 나는 젊다, 나는 어리다, 나는 건강하다 이와 같이 장담하는 것입니다. 장담할 건덕지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무상하거니 나라고 고집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내가 없고 미래에는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것이고 말입니다. 현재는 순간순간 변화해 가거니 이놈의 몸뚱이가 어디가 상주부동(常主不同)하게 어디가 일정하게 머물러 있다고 하겠습니까. 어느 순간도 자기 몸이 머물러 있지가 않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세요. 지금 우리 현대인들은 대부분 다 과학을 배웠으니까 짐작을 할 것입니다. 물리학을 여러분들 아십니다. 보통은 다, 나와 같은 이 몸이 과거에 절대로 있지가 않았단 말입니다. 미래에는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것이고 말입니다. 또 현재도 자기가 소중하게 아끼는 이 몸이 순간찰나도 머물지가 않습니다.
다만 중생은 그렇게 변화해가는 변화의 과정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상하기 때문에 항상(恒常)이 없이 변동(變動)해서 마지않기 때문에 이것은 무아(無我)인 것이고 내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상이고 무아거니 결국은 사실은 텅텅 비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도인(道人)들은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모두가 공인 것을 그렇게 역설(逆說)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지혜(智慧) 가운데서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 지혜입니까. 모든 것이 비었다 하는 바로 그 모든 것이 제법(諸法)이 공(空)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항시 외우는 반야심경(般若心經)도리가 내내야 모든 것이 비었다는 도리 아닙니까. 모든 것이 비었다 하는, 우리가 보는 것이 사실은 비었다하는 그 진리를 우리가 딱 느껴야 씁니다. 그래야 적어도 부처님 법문(法門)에 우리가 귀의 했다고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실은 비어있는 것인데 있다고 보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때는 우리가 번뇌가 나오고 인생고가 안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원래 없거니 내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내 몸뚱이가 사실은 텅 비었거니 어떻게 내 물건, 내 존재가 무엇이 있습니까. 내 존재가 아닌 것을 내 것이다 이러니까 결국은 거기에서 싸움이 안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에 그렁저렁 할 때에 상식적으로만 살아도 무방할 때는 모르거니와 현대 산업사회(産業社會)에서 복잡다단할 때는 그렇게 상식만 가지고 못 살아갑니다. 사물을 바로 봐야 쓰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苦)요,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요, 또는 공(空)이요. 이것보고 우리 불교(佛敎)에서는 사정견(四正見)이라, 네 가지 바른 견해(見解)라 합니다.
사정견이라,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우리 불자님들은 사정견을 분명히 외이시기 바랍니다. 네 가지 바른 견해란 말입니다.
인생은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거니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 같거니 인생은 고(苦)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선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비롯해서 가지가지 고(苦) 뿐입니다. 낙(樂)이라 하는 것은 내내야 우리 고(苦)에서 우러나오는 잠시간 하나의 거품 같은 것이지 사실은 완전한 안락(安樂)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苦)요, 무상(無常)이요, 또는 무아(無我)요, 공(空)이요. 이것이 네 가지 정견입니다. 적어도 정견을 딱 가져야 불교인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할 때는 앞서 제가 말씀드린바 화택고해(火宅苦海)라 인생고해(人生苦海)를 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본 다 할 때에 고(苦)요 무상(無常)이요 또는 무아(無我)요 공(空)인 것이지 정다웁게 그때는 그야말로 참 궁극적(窮極的)인 철학적(哲學的)인 의미, 궁극적인 종교(宗敎)의 의미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공(空)도 역시 아직은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진리(眞理)가 못 됩니다.
다만 과학적인 객관적인 진리로 봐서 고(苦)요 또는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요 공(空)인 것이지 정다웁게 실상지혜(實相智慧), 실상지혜로 봐서는 그것은 아직은 완전무결한 진리가 못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중도실상지혜(中道實相智慧)라. 이런 지혜로 봐서는 그때는 공이나 무상이나 또는 무아나 그런 것을 초월(超越)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궁극적인 도리는 뭣 인고 하면 제법(諸法)이 실상(實相)이라. 모든 법이 모두가 다 부처님의 청정미묘(淸淨微妙)한 공덕(功德)으로 충만(充滿)된 지혜란 말입니다. 부처님 지혜는 이러한 공덕으로 충만 된 지혜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불성(佛性) 부처님 광명(光明), 모든 행복(幸福)과 지혜(智慧)라든가 자비(慈悲)라든가 일체공덕(一切功德)이 충만(充滿)한 경계(境界), 충만한 가르침 이것이 이른바 중도실상의 지혜 입니다.
따라서 중도실상의 지혜를 우리가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도실상의 지혜를 얻지 아니하면 인생의 화택고해를 못 면합니다. 허무(虛無)를 못 면합니다.
우선 아까 제가 말씀드린 네 가지 정견, 과학적으로 봐서 객관적인 네 가지 정견, 고(苦)요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요. 공(空)을 느꼈다 하더라도 이것만 가지고서는 참다운 행복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무상을 느끼고, 허무를 느끼고, 잘못은 좀 안 저지른다 하더라도 참다운 영생(永生)의 행복, 불멸(不滅)의 행복은 못 느낍니다. 따라서 그것은 불교의 근본적인 목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신 가장 큰 뜻이 무엇인가? 가장 대사(大事)가 무엇인가?
우리 중생은 조그마한 소사(小事), 작은 일만 가지고 평생 취생몽사(醉生夢死)하고 말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은 그런 자그마한 것에 머물지 않고 대사, 일대사, 가장 큰일을 말씀한 것입니다.
가장 큰일은 뭣 인고 하면은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일체중생의 본 실상(實相), 가상(假相)이나 허망상(虛妄相)을 떠나서 본 실상을 우리가 증명(證明)하는 것입니다.
오늘 법회는 주로 정기법회지만은 3박4일 동안 공부하고자 하는 참선(參禪)하는 기초로 해서 하는 법회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해야만이 우리가 제법실상, 모든 존재의 바른 모습을 볼 것인가. 모든 존재의 바른 모습을 못 보면 아까 말씀마따나 인생의 참다운 청량지, 극락세계의 행복은 얻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길로 가나 얻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현대와 같이, 난마(亂麻)와 같이 이렇게 혼돈스러운 때는 특히 부처님 가르침 같은 제법실상(諸法實相)같은 구경적(究竟的)인 지혜(智慧), 조금도 방편성이 안 깃들여있는 근본적인 본질지혜 이것이 아니고서는 구제(救濟)할 길이 없습니다.
공자님 가르침이나 노자님 가르침이나 또는 예수님 가르침이나 다 선(善)을 권장하고 악(惡)을 없애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그 분들의 본뜻은 다 제법실상, 모든 것의 본 참모습을 다 말씀 하셨겠지만 그 당시는 사회가 하도 미혹해서, 사회가 무지하기 때문에 가장 고도한 법문은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자님 가르침이나 노자님 가르침이나 예수님 가르침이나 모두가 대체로는 악을 떠나서 선을 행한다는 윤리적(倫理的)인 면에서 그쳐버렸던 것입니다. 우주(宇宙)의 본 실상을 바로 말씀한 법문이 별로 없습니다.
그 분들은 성인(聖人)이기 때문에 알으셨다 하더라도,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우주의 실상을 바로 가르쳤단 말입니다.
우주의 실상을 바로 가르친 그런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종교(宗敎)가 이와 같이 다양하고 모든 문제가 이렇게 복잡하고 혼돈스러운 때는 각기 자기가 옳다고 내세우고 각종 이데올로기가 서로 이렇게 착종(錯綜)해서 혼란스러운 때는 가장 긍정적인 가르침, 모두를 하나로 뭉쳐버리는, 모두를 하나로 해결 시켜버리는 그런 원리를 모르면은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앞으로 몇십년 몇백년을 더 고생고생 하고 서로 싸우고 분열투쟁을 한다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구제할 길이 없습니다. 어째 그런고 하면은 부처님 가르침만이 다양한 모든 복잡한 문제, 복잡한 종교, 복잡한 이데올로기 이것을 다 하나로 딱 합해가지고서 그야말로 참 뜨거운 화롯불에 눈 몇 송이가 내려지면 금방 녹아버리듯이 사실은 부처님의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진리만 가지면 어떤 것이나 다 녹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어째서 그런 것인가, 부처님의 중도실상의 진리로 봐서는 이것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질성(異質性)인 것이 아무것도 없이 모두가 다 동일성(同一性)이라 동일률(同一律)이란 말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로 뭉쳐버리는 것입니다.
하나의 진리는 그냥 다만 하나의 진리가 아니라 모든 다양한 것을 다 포함하고 말입니다. 선이나 악이나 또는 시(是)나 비(非)나 어떤 것이나 다 포함한 하나의 진리(眞理)란 말입니다. 하나의 진리는 하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의 행동은 인연(因緣) 따라서 또 무수한 다양한 것을 창조(創造) 할 수가 있고 또는 분출(噴出)해 낼 수 있는 그런 하나란 말입니다.
일반 중생은 본질이 하나인 것을 모르니까 나요 너요 구분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것을 분명히 안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의 것을 그냥 이론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와 딱 합일 되어버리는 그런 계기에서는 그때는 구분 할 래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부처님 가르침이 유포(流布)가 돼있는 지금 현대 사회에서 우리 같이 이와 같이 청정한 법의(法衣)를 입고 있는 분들도 역시 모순을 많이 야기 합니다.
그건 어째 그런 것인가. 그 분들도 방금 제가 말씀마따나 모든 것을 다, 모든 걸 하나로 통일 시키는 하나의 진리를 압니다. 이른바 간혜지(乾慧智)로 해서는 바싹 마른 지혜로서는 안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체험(體驗)이 안 되었기 때문에 하나의 진리와 자기와 온전히 융합(融合)이 안 돼서 체험이 안 되었기 때문에 그때는 실천을 못 하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은 더 낫습니다. 아는 것이 더 낫다 하더라도 아는 그걸로 해서는 우리가 실천(實踐)으로 행동으로 옮기지 못 하기 때문에 모순적인 행동은 그대로 지양(止揚)을 못 시키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이도 역시 말은 꼭 자기한테 유리한 말을 합니다. 행동 역시 알기는 알지만은 결국은 다 체험을 못 해 놓으면은 자기한테 유리한 행동 밖에는 못합니다.
그런데 있어서 참선(參禪)이나 염불(念佛)은 뭐 때문에 하는가 하면 그러한 우리가 아는 것을 실지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체험을 하기 위해서 염불도 하고 참선도 하고 주문(呪文)도 외이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다.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가 오직 하나의 진리로 통일 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생각하고 하다보면 결국은 처음에는 그럴 런지 모르겠구나. 석가모니께서 말씀했으니 그럴 런지 모르겠구나. 이와 같이 긴가민가하다가도 차근차근 하나 되는 쪽으로, 본래 구분해있는 다양한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 되는 쪽으로 자기 마음이 차근차근 모아지는 것입니다.
수행(修行)해서 도(道)가 깊어지고 수행력(修行力)이 높으면 높을수록 하나라는 진리 나와 남의 모서리를 떠나버려서 하나의 진리로 차근차근 모아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공부하면 할수록 유연선심(柔軟善心)이라. 부드러울 유(柔)자, 연할 연(軟)자 말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그냥 강강하니 나와 남이 둘이 있고, 또 내 것, 네 것이 있거니 하마 자기 것 빼앗길 새라 경계하고 긴장하고 합니다마는 나와 남이 원래 둘이 아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차근차근 모서리가 무디어온단 말입니다.
모서리가 무디어오면 그때는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유연선심이라, 부드러울 유(柔)자, 마음도 더 부드러워지고 연할 연(軟)자 마음이 상냥해지고 말입니다. 착할 선(善)자 마음 심(心)자 유연선심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부가 되면은 될수록 사람이 유연선심이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가다가 참말로 익어지면 그때는 우주의 참다운 진리 불성(佛性)과 하나가 딱 돼서 그때는 완전히 깨달아 버린단 말입니다.
재가불자님들은 이와 같이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하신다 하더라도 오로지 잘 못 하십니다. 일상생활에서 허다말다 허다말다 하시니까 알기는 좀 알지만, 우리가 잘못 봤을 때는 모두가 있지만 조금 더 우리가 객관화 시키면 그때는 고(苦)요 공(空)이요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다. 이와 같이 알기는 알지만 그것을 넘어서 참다운 것은...
그야말로 참 모두가 다 부처님뿐이다. 모두가 중도실상, 우주의 실상은 모두가 부처님뿐이다. 이와 같이 알지만은 바로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것은 뭣 인고 하면은 이른바 오로지 염불도 하고 참선도 해서 우리의 마음의 습기(習氣)나 번뇌의 뿌리가 못 녹아서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입이나 몸이나 생각이나 모두가 부처님 진리 천지우주(天地宇宙)는 부처님의 불성(佛性)뿐이다 하는 진리쪽으로 옮길라면은 자꾸만 우리가 되풀이해서 공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자 해서 이와 같이 오늘 3박4일 동안의 이런 법문이, 법회가 시작 되는 것입니다.
헌데 부처님 법문 가운데도 가장 중요한 압축된 법문이 무엇인고 하면은 이것은 참선 아닙니까. 참선입니다. 참선을 지금은 우리 불교인만 들먹이는 것이 아니라 불교인 아닌 사람도 역시 참선을 들먹입니다.
기독교의 신부나 수녀도 역시 참선 법회를 한단 말입니다. 물론 그분들이 참선 법회의 참다운 의의(意義)를 아는가는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한다고 합니다. 그러고 지금 도시에는 상당한 여러 가지 악 조건을 다 물리치고서 시민선방(市民禪房)이라고 하는 선방들을 많이 꾸미고 있습니다.
이걸 본다고 할 때에도 역시 과연 참선은 현대적으로 상당히 어필되는 구나. 현대인(現代人)들이 굉장히 중요시 하는구나 이렇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참선은 우리 불교 가운데서 가장 고도한 수행법입니다. 불법의 가르침이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인간의 가장 대사(大事) 인간의 행복을 이어온 가장 근본적인 문제, 인간의 본질을 파헤치는 밝히는 가장 근본적인 진리인데 그러는 가운데도 역시 부처님의 진리를 밝히기 위해서 가장 지름길 가장 첩경(捷徑)이 참선입니다.
무서울 정도로 많은 종교 또는 여러 가지 각 주의나 사상 이런 가운데서 불법의 가르침이 가장 우수한 가르침 아닙니까. 여기 계시는 분들은 다 그렇게 믿기 때문에 불교를 믿으시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가장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일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행복을 위한 최고 지상의 말씀을 했던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이 불교 아니겠습니까.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우리가 부처가 돼가는 하나의 진리를 깨닫는 지름길 이것이 참선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참선 이것은 인류의 60억 가까운 우리 인총 가운데서 최고 지상의 문화적(文化的)인 수행법(修行法)입니다. 이보다 더 고도한 문화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는 일 가운데서 제일 좋은 일, 제일 높은 일, 제일 기쁜 일, 이것이 이른바 참선(參禪)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이번에 공부하는 동안에 참선을 해가지고서 참선의 목적인 성불(成佛)까지는 미처 못 가신다 하더라도 참선은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이 정도는 분명히 아셔야 씁니다.
참선이 뭣 인가? 참선이 뭣인가 말입니다. 참선이 뭣 인가는 우리 불교인들이 언제나 문제로 하는 것이고 또는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불교인 뿐 만이 아니라 지금 현대 문화인들은 자기들의 긴장감 현대의 불안감 상대적인 인간(人間)의 문명(文明)은 발전 되면은 될수록 사람 마음은 더욱더 갈등(葛藤)지고 불안(不安)스러운 것입니다.
이런 불안스러운 마음 어떻게 해소(解消)해야 쓸것인가? 불안스러운 마음을 해소를 않고서는 인간의 행복은 없습니다.
갈등이나 분열이나 또는 인간의 증오(憎惡)나, 지금 현대적으로 문제시 하고 있는 그런 문제는 다른 방법으로는 해소시킬 방법이 없습니다. 어째 그런고 하면은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다른 종교나 그런 가르침은 모두가 상대적(相對的)인 문제를 떠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서 참선 이것은 꼭 누구나가 현대인들이 한사코 해야 쓸, 아니 하시면 인생고(人生苦)를 면할 수 없는 긴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꼭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보통은 참선 좀 하면 머리가 좋아지고 몸도 개운해지고 여러 가지로 상대적인 공덕(功德)을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분명히 있습니다. 참선을 잘 하면 그야말로 참 가슴도 시원하고 몸도 시원하고 머리도 시원합니다. 따라서 판단도 빠르고 이러한 유위적(有爲的)인 상대적인 그런 공덕이 분명히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만 가지고도 참선하는 공덕이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는 기독교의 피정(避靜)도 다 이런 것을 말씀했고, 요새 요가라든가 또는 초월적(超越的) 명상법(瞑想法)이나 마인드컨트롤이나 이런 것도 역시 상대적인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면은 불교의 참선은 이런 것과 어떠한 특징이 있는가? 이 특징을 꼭 아셔야 씁니다. 그래야 나중에 돌아가서라도 참선을 별로 부담 없이 하시는 것입니다. 참선 이것은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까 굉장히 어렵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사실은 가장 쉬운 것입니다.
참선이 가장 쉬운 것입니다. 어째서 가장 쉬운가 하면 자기 몸도 우주(宇宙)의 근본순리(根本順理), 근본이치(根本理致)에 맞추어 있단 말입니다. 마음도 역시 우주의 근본도리(根本道理)에 맞추어 있습니다. 참선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이나 자기마음을 천지우주의 도리에 딱 맞추는 것입니다.
인간이 버릇이 잘못 들어서 우주의 도리에 맞출라면 어려운 것이지 버릇만 잘 들여 놓으면 사실은 우주의 근본도리에 맞추는 데에 참선(參禪)이 제일 쉽단 말입니다.
우리 생각은 우선 참선을 생각하면 어떤 생각인가. 참선은 그냥 묵묵하니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사람들은 이것이 무엇인가, 저것이 무엇인가 의심(疑心)해야 참선이다. 의심하는 화두(話頭)를 안 들면 참선이 아니다. 이렇게 참선을 좁게만 봐서는 참 곤란스럽습니다. 의심하는 것도 하나의 참선의 방법이지만 그것만이 참선은 아닙니다.
우선 참선을 하려면 참선의 마음자세, 내내야 마음이 주인(主人)이기 때문에 참선의 마음자세가 확립이 돼야 바른 참선이란 말입니다.
마음자세가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천지우주(天地宇宙)의 도리(道理)에 딱 맞아야 쓴단 말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천지우주의 도리에 맞는 것인가. 천지우주의 도리는 무엇인가 말입니다.
천지우주의 도리는 앞서 제가 언급을 했습니다마는 일반 중생은 번뇌(煩惱)에 가리어서 미처 계합(契合)도 못 하고 못 느끼고 있다 하더라도 조금도 차별이 없이 평등(平等)하고 무차별(無差別)인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천지우주(天地宇宙)라는 것은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불성입니다. 평등무차별의 미묘청정(微妙淸淨)한 불성입니다.
이 말은 여러분들이 들으시면은 안 보이고 지금 감이 안 잡히니까 별로 재미가 없지만 이것은 몇 천번 되뇌여도 우리가 부족할 정도로 고맙고 감사한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안 보인다 하더라도 천지우주 도리라는 것은 평등무차별의 청정미묘한 불성이란 말입니다.
우주에 참말로 있는 것은, 나라는 것도 이것도 역시 허망 무상한 거품 같은 것이고 말입니다. 또는 모든 존재가 모두가 다 거품 같은 현상(現像)에 불과합니다. 나타날 현(現)자, 형상 상(像)자, 현상은 이것은 물위에 뜬 거품과 똑 같은 것입니다. 잠시간 존재하다가 마는 것이 그것이 오랫동안 있지가 않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있지가 않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순간도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순간도 있지가 않은것을 우리가 상식적으로 상만 보고서 내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사정견(四正見)을 되풀이해서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그야말로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요 공(空)입니다.
과학적(科學的)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여러분들이 한번 각 소립자(素粒子)나 각 원소(元素)의 결합이나 또는 원자구조론(原子構造論)이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원자를 구성한 원자핵(原子核)이나 또는 원자핵의 주변에 도는 전자(電子)가 조금도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존재나 모두가 다 원자핵으로 해서 온 거 아닙니까. 헌데 원자핵을 구성 하는 양자(陽子)나 중성자(中性子)나 이것도 조금도 머물지 않고 또 그 핵 주변을 도는 전자 역시 어느 찰나 순간도 머물지가 않습니다.
이렇게 동요부단(動搖不斷)하게 움직이고 이렇게 무상한 이런 것이 모여서 하나의 현상(現像)을 만든단 말입니다. 따라서 현상 역시 어느 순간도 같은 모습이 없습니다.
어느 순간도 같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조금 더 어려운 말로 하면은 어느 시간(時間) 어느 공간(空間)도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 인간이요. 우리가 사랑하는 자기 아내요. 사랑하는 자기 자식이고 남편이곤 합니다.
앞서도 말씀 드렸으나 과거에 상식적으로만 살 때는 모르거니와 현대와 같은 고도한 문명사회에 와서는 그런 상식만으로는 바로 못 사는 것입니다. 바로 못 사니까 가정도 찌욱짜욱하고 사회도 혼란스럽고 하지 않습니까.
분명한 바른 지혜, 제일의(第一義)적인 바른 지혜, 다시 또 에누리 없는 지혜, 그런 참다운 실상지혜(實相智慧)가 아니고서는 바로 못 삽니다.
말이 또 옆길로 나가 버렸습니다마는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바른 정견(正見)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기 때문에 이와 같이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식(常識)의 범주(範疇)에서만 살고 있습니다. 상식의 범주에서는 우리의 행복은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화택고해(火宅苦海)는 면할래야 면할 수가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공(空)지혜는 이른바 반야지혜(般若智慧)입니다. 참 지혜는 반야입니다. 반야라는 것은 공 지혜입니다. 참 지혜는 반야지혜입니다. 반야지혜는 모든 것이 다 공이고 실상은 천지우주가 청정미묘한 평등무차별의 불성, 불심,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제가 항시 말씀 드리는바와 같이 부처님이나 불성이나 불심은 똑 같습니다. 마음으로 표현하면 그때는 불심(佛心)인 것이고 또 성품(性品)은 불성(佛性)인 것이고 생명(生命)이기 때문에 인격적(人格的)인 표현은 부처님이라 합니다.
참말로 있는 것은 불심, 불성, 부처님뿐입니다. 부처님뿐만이 그때는 실존(實存)합니다.
그 외에는 모두가 다 가상(假想)이고 현상(現像)이기 때문에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요 공(空)이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딱 느껴버려야, 이렇게 더운 때라도 마음이 개운합니다. 하찮은 이놈의 몸뚱이가 내 것이다. 하마 늙을새라 하마 아플새라 말입니다. 자꾸만 근심합니다. 하마 남한테 가서 우리가 미웁게 보일새라 말입니다.
참선은 아까 말씀마따나 가장 구경지(究竟地), 제일의제(第一義諦) 조금도 방편(方便)도 아니고 실상지혜(實相智慧)를 우리가 문제시해야 만이, 실상을 문제로 하고 참다운 자기 참 진아(眞我) 또는 대아(大我) 말입니다.
부처나 대아나 다 같은 뜻 아닙니까. 부처를 문제로 하고 제일의제를 문제로 하고 말입니다. 참다운 나를 문제로 해야만이 그때는 참선(參禪)이란 말을 붙이는 것입니다.
만약 참선을 한다 해서 모양은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별스럽게 긴장된 모습을 취하고 장엄스럽게 할망정 자기 마음이 제일의제 근본에서 어긋나버리면 그때는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마인드 컨트롤이나 일반 유루(有漏)적인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공덕(功德)을 바라는 그런 것은 하나의 모양은 좌선은 된다 하더라도 참선은 못 되는 것입니다.
일반 요가나 또는 마인드컨트롤이나 기타 그런 정도의 정신통일법 하고 우리 참선하고는 엄격한 구분이 있습니다. 근본적인 근본실상을 문제로 하고서 그 문제를 밝힐라고 할 때에, 생각할 때 비로소 참선이란 말이 들어간단 말입니다.
이 가운데도 혹시 기독교를 믿으시다가 들어오신 분들은 하나님 하면 좀 가까웁고 부처님 하면 좀 어쩐지 거부감 있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참선 할 때 구태여 부처님이고 또는 ‘이뭣꼬’ 그와 같이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대로 구하십시오. 하나님을 그대로 구하신다 하더라도 다만 하나님의 그 개념내용, 의미내용이 부처님의 법신(法身)부처님 같이 나나 너나 천지우주(天地宇宙)에 조금도 간격도 없이 충만해있는 청정미묘(淸淨微妙)한 하나의 신성(神聖)이다. 이렇게 느끼시면서 해야 비로소 참선(參禪)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다 더 강조하기 위해서 6조혜능(慧能)스님은 그야말로 참 참선으로 해서는 아주 대가 아닙니까. 달마(達磨)스님, 2조 혜가(慧可)스님, 3조 승찬(僧璨)스님, 4조 도신(道信)스님, 5조 홍인(弘忍)스님 그러고 육조 혜능스님 아닙니까.
그래서 이 분들은 중국(中國)에 와서 달마(達磨)스님 때부터서 육조(六祖)때까지는 순선시대(純禪時代)라, 순수한 선 시대라 말합니다. 그 뒤에는 ‘이뭣꼬’다, 무(無)자다, 묵조선(黙照禪)이다. 이와 같이 모다 분열이 돼버렸지만, 물론 그것도 다 참선(參禪)이지만 달마 때부터 육조 까지는 순수한 선 시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순수한 선 시대를 거듭 돌아가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육조스님 하고 육조스님의 법을 계승한 남악회양선사(南嶽懷讓禪師) 두 분 사이에 거량된 선문답(禪問答)입니다.
육조혜능스님께 남악회양선사가 공부하러 왔단 말입니다.
남악회양선사 그 밑에가 마조도일(馬祖道一)스님입니다. 다 위대한 그야말로 쟁쟁한 도인(道人)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의 진리(眞理)를 흠축 없이 이 분들은 다 깨달은 분들입니다.
남악회양선사가 오시니까 스승 되는 육조스님께서 ‘그대는 어디서 왔는고’ 물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남(嶺南)에서 왔습니다.’ 영남은 양자강 남방지방 아닙니까. 영남에서 왔습니다.
그 다음에 육조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 정도는 외워두시면 참 좋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부러 이렇게 써가지고 나왔습니다.
이것은 열 십(什)자, 우선 한문도 같이 공부를 좀 하시고, 십장(什長) 할 때 이 자를 씁니다. 또는 가산직물(家産織物)이라, 우리 세간살이를 말할 때는 집(什), 세간 집 그렇게 말합니다. 열십 또는 세간집 그럽니다.
이것은 어찌 마(麽), 만물 물(物), 이러할 임(恁), 어찌 마(麽), 올 래(來), 십마물(什麽物) 임마래(恁麽來)라, 십마물임마래(什麽物恁麽來)꼬? 이렇게 물었단 말입니다.
이것은 중국 당(唐)나라 때나 송(宋)나라 때 속어(俗語)입니다. 속언데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면은 ‘십마물’ 이 말은 ‘무엇이’ ‘어떠한 것이’ 입니다. 무엇이 ‘임마래’오, ‘이렇게 왔는고’ 즉 ‘무엇이 이렇게 왔는고’ 입니다.
여러분들이 나중에 벽암록(碧巖錄)이나 기타 부처님의 참선에 관한 법문을 보신다고 생각할 때는 이런 문투가 많이 나오니까 하도 괴상하니까 여러분 들이 잘 모르시면 그때그때 답답하시니까 제가 이와 같이 훓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문제니까 말입니다.
어떠한 것이 ‘무엇이 이렇게 왔는고’ 물론 남악스님이 왔으니까 사람은 사람이겠지요. 수행자는 수행자고 말입니다. 육조스님이 보시고 남악스님이 사람인줄은 분명히 알고 말입니다. 또 불법을 구하는 수행자인줄은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왔는고’ 허나 사람인가 아닌가 그런 물음도 아닌 것이고 또 그대 이름이 무엇인가 그런 것도 아닌 것이고 그대의 존재(存在)가 과연 무엇인가 말입니다.
이런 선문답(禪問答)은 그때그때 순간찰나에 모두가 다 근본적인 문제와 상관이 있습니다. 즉 그대는 대관절 누구관데 그대의 본바탕은 무엇이관데 그대의 실상(實相)은 무엇이관데 대관절 무엇이 이렇게 왔는고, 무엇이 어떻게 왔는고 말입니다.
참선(參禪) 이것은 앞서도 말씀마따나 우주의 근본을 구합니다. 우주의 근본은 바로 나의 근본입니다. 참 자기입니다. 우리는 과연 참 자기가 누구인지 뭣인지 압니까. 내가 뭣인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인간(人間)의 실존철학(實存哲學)은 인류문화(人類文化)의 실존철학은 모두가 다 그러한 자기실존 자기의 본바탕을 우리가 탐구(探究)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뭣 인가 하는 인간이 뭣 인가 하는 그런 문제를 그렇게 탐구도 하고 오랫동안 무수한 철학자(哲學者)가 굉장히 연구했지만 사실은 부처님 가르침 아니고서는 자기가 뭣인가 인간이 뭣인가 모릅니다.
어떠한 것도 유추(類推)만 해서 하나의 체계(體系)만 세웠을 뿐이지 정말로 참다운 진리(眞理), 진리와 하나가 돼서 자기 본바탕을 파헤치지는 못한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만이 참 자기를 아는 것입니다.
참 자기를 모르면 ‘무엇이’ 즉 ‘그대가 무엇인가’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이 몇 백 명 되십니다마는 사실은 그대가 뭣 인가? 당신이 뭣 인가? 이렇게 물을 때는 자기가 뭣인 것을 깨닫지 못 하면 모르는 것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왔는가? 우리 사회는 지금 혼란스럽습니다. 어디가 뭣이 있어 놓으면 누가 비리다. 어쩐다. 막 남한테 욕만 한단 말입니다.
이 온 세계(世界)가 모두가 다 중생(衆生)의 공업(共業)입니다. 어느 한사람이 세계를 창조(創造)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이 창조한 것도 아닌 것이고, 중생의 공업 무수한 중생의 그런 업이 뭉치고 뭉쳐서 천지(天地)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텅텅 비었던 제로(zero)의 세계에서 말입니다. 제로의 세계도 역시 물론 불성(佛性)은 충만(充滿)해 있습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가 파괴가 되고 그야말로 허물어지고 또는 성겁(成劫)이 되고 한다 하더라도 역시 불성 자체는 조금도 변치가 않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나 우주의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천만번 되풀이 된다 하더라도 천지를 구성한 순수에너지 불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순수에너지 가운데서 어떻게 해서 천지 현상계가 이루어졌는가? 은하계나 또는 태양계나 그런 우주가 있는가 말입니다. 이것은 중생의 공업이라. 몸뚱아리는 다 허물어지고 없다고 할망정 당하 불성(佛性)하고 하나가 못 돼있는 저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에 있는 중생들의 마음 그런 업(業)이 쌓이고 쌓여서 그것이 우주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와 똑 같이 우리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은 어느 한사람이나 어느 몇 사람만의 허물이 아닙니다. 우리 번뇌(煩惱)를 가지고 있는 무명심(無明心)을 미처 못 떠난 우리 중생(衆生)의 모두가 다 공동(共同)으로 이루어진 업(業)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쓰는 것입니다. 이걸 모르니까 자꾸만 남한테만 책임 전가를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치(政治)를 하나 학교의 선생(先生)이 되나 교수(敎授)가 되거나 간에 이거는 분명히 알아야 쓰는 것입니다.
강도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현상적인 그 사람 무상한 존재, 박가면 박가, 김가면 김가, 그 사람만의 허물이 아닌 것입니다. 중생의 공업으로 해서 하나의 강도가 나왔단 말입니다.
이른바 인연생(因緣生)이라. 인과 무수한 연이 쌓이고 쌓여서 하나의 강도가 나왔습니다. 하나의 죄인이 나왔다 하더라도 그 죄인만의 허물이 아닙니다. 무명스러운 번뇌에 가리어있는 무명 중생이 공동으로 이루어진 이런 사회에서 그런 모습이 나왔단 말입니다.
따라서 가정의 모습이나 사회의 모습이나 어떠한 모습이나 간에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우주의 본바탕을 바로 보는 부처님의 진리가 아니고서는 바른 해결을 못하는 것입니다. 바른 해결을 할 만한 지혜(智慧)가 없으면 그때는 자기 공부를 해야 쓰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렇게 왔는고? 남악회양스님이 아직은 그때는 범부(凡夫)인 때라 무엇이 자기존재의 바탕을 모른단 말입니다. 자기존재의 바탕을 모르거니 자기가 실상(實相)을 모르거니 확연한 답변을 할 수 없었단 말입니다. 육조스님께서 이와 같이 ‘무엇이 이렇게 왔는가?’ 물었을 때 자기존재의 바탕을 모를 때에 답변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말없이 물러가서 8년 동안 공부하고 연구하고 수행도 하고 해서 그래도 8년 만에 비로소 그때는 ‘무엇이’ 즉 말하자면 본바탕을 알았단 말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네가 무엇인가, 우주의 바탕은 무엇인가 알았단 말입니다. 알아가지고 그때는 당당히 왔단 말입니다. 와서 대답이 그 해답이 뭣 인고 하면은 남악(南嶽) 왈(曰) 이라.
이것은 8년 동안 궁구(窮究)해서 연구하고 연구한 끝에 대답한 말입니다. 말씀 설(說), 같을 사(似), 한 일(一), 만물 물(物), 곧 즉(卽), 아니 불(不), 가운데 중(中) 아닙니까. 이 말은 뭣 인고 하면 이것은 설사일물즉부중(說似一物卽不中)이라. ‘설사 무엇이란 그것을 하나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맞지가 않습니다.’
분명히 불성(佛性)이고 불심(佛心)이고 또는 부처님이고 하나는 하난데 말로만 해서는 그건 맞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말로만 해서는, 즉 다시 말하면 참다운 진리는 말로 해서는 하나고 둘이고 부처요 한다고 하더라도 표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대답 가운데 벌써 남악회양선사는 하나의 진리...,
이 말 가운데 자기가 깨달아버린 내용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천지우주가 둘이 아니고 말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에 묶여 있는 것이고 나나 너나 갑이나 을이나 모두가 다 하나의 중중무진(重重無盡)한 고리에 우주(宇宙)라 하는 이런 법계(法界)의 고리에 다 얽혀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하나의 그물을 우주라고 한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하나 하나는 그때는 그물코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모두가 다 그물 전체와 관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사회비리나 또는 누구 죄나 뭣이나 모두가 다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중생(衆生)의 무명(無明), 중생의 공업(共業)입니다.
‘설사일물즉부중’이라. 하나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맞지가 않습니다. 이것은 말이 아니라 결국은 우리가 공부해서 우리 마음을 깨달아 통하는 길입니다. 이렇게 그런 의미가 내포돼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돌아올 환(還), 옳을 가(可), 닦을 수(修), 증명할 증(證), 아니 부(否)자 말입니다.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라,
육조스님께서 그 말씀 뒤에 하시는 말씀이 ‘그러면은 우리가 가히 닦고 증명하는 법이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 닦고 증명할 것인가?’ 이 말이나 같습니다. 과연 하나라고 해도 역시 오직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어떻게 닦고 증명할 것인가 이 말씀입니다.
이런 참선의 법문은 굉장히 고도한 법문인지라 아주 어려운 것 같지마는 또 이와 같이 제가 이렇게 문투로 문자로 쓰니까 어렵다고 생각될란가 모르지마는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가장 쉬운 것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의 도리(道理)에 따른단 말입니다. 천지우주의 참 모습에 따르는 것입니다.
다만 중생이 모르기에 이렇게 저렇게 또는 중국(中國)말로 무슨 말로 한문(漢文)으로 이와 같이 모두 표현 돼서 어려운 것이지 사실은 가장 쉬운 것입니다.
남악(南嶽) 왈(曰), 남악선사가 또 말씀하시기를 닦을 수(修), 증할 증(證), 곧 즉(卽), 아니 불(不), 없을 무(無), 또는 더러울 오(汚), 물들 염(染), 곧 즉(卽), 아니 불(不), 얻을 득(得) 말입니다.
수증즉불무(修證卽不無)라. ‘닦고 증명하는 법이 없지 않습니다마는’ 오염즉부득(汚染卽不得)이라, ‘오염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말했단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문제를 깊이 생각하시고서 두고두고 앞으로 연구를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이 가운데는 아주 참 고도한 학식(學識)을 가지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따라서 이런 중요한 문제에 관해서는 관심을 가지시고서 제 말씀을 전폭적으로 다 옳다고 생각을 마시고 참고로 하시고서 앞으로 두고두고 연구를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제가 더 언급 할 이런 문제는 굉장히 아주 논쟁 꺼리가 돼있단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논쟁 꺼리가 안 되는 가장 쉬운 것인데 논쟁 꺼리로 삼는 것입니다.
저번에 송광사(松光寺)에서 보조국사연구회(普照國師硏究會), 그때도 여러 학자님들이 모여서 이렇게 저렇게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거기에서 말씀한 말도 제가 지금 언급해 가는 이런 말씀하고 상관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나중에 이런 문제는 중요한 문제고 또 지금 우리 불가에서 논쟁 꺼리가 되는 문제니까 잘 들으시고서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닦아서 자기 본바탕을 깨닫는 이것이 분명히 닦고 증 하는 것이 있습니다마는 오염즉부득(汚染卽不得)이라. 오염은 내내야 더러움 즉 더럽히는 것 아닙니까. ‘오염해서는 안 됩니다.’ 란 말입니다.
그러면 오염이란 건 어떤 것인가? 깨달아버리면 깨달아버렸지 오염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오염 이것은 뭣 인고 하면은 번뇌, 번뇌(煩惱)가 바로 오염(汚染)입니다. 또 번뇌는 뭣이 번뇌인가. 우리가 번뇌 할 때는 좋은 생각은 번뇌가 아니고 나쁜 생각만 번뇌다. 남을 자비심(慈悲心)으로 이끌고 또는 그야말로 좋은 생각 이것은 번뇌가 아니라고 하지만은 엄격한 의미에서는 좋은 생각 나쁜 생각 다 두리뭉실해서 분별시비(分別是非)하는 것은 모두가 다 번뇌입니다.
우주의 진리가 하나의 진리로 해서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미묘청정(微妙淸淨)한 하나의 진리(眞理)로 해서 뭉쳐있는 것인데 여기다 대고서 그냥 좋다 궂다 말입니다. 옳다 글타 하는 시비분별(是非分別)하는 그때는 모두가 다 번뇌(煩惱)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오염이란 말입니다.
범부(凡夫)가 있고 부처가 따로 있고 중생(衆生)이 있고 성자(聖子)가 있고 말입니다. 천지우주가 청정미묘한 다 불성(佛性)뿐이다. 이런 자리에서는 중생이고 성인이고 부처고 범부이고 그때는 차이가 없습니다. 범부고 중생이고 부처고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부처거니 어따 대고서 부처요 중생이고 또는 선(善)이고 악(惡)이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선도 역시 그때는 다 부처고 말입니다. 악도 역시....
겉만 현상적인, 사실 있지 않은 허망무상(虛妄無常)한 현상적인 그런 면에서 이것이 나쁜 것이지 악도 없단 말입니다. 강도(强盜) 역시 어쩌다가 인연 따라서 겉만 강도의 모양을 취한 것이지 알맹이는 부처란 말입니다.
따라서 겉만 보고 속 알맹이 불성을 못 볼 때는 그냥 미운 놈은 분명히 밉단 말입니다. 나쁜 놈은 분명히 밉습니다. 나쁜 놈은 그냥 곧 때려죽이고 싶단 말입니다. 그러나 역시 속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알맹이를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생명(生命)이 하나거니 저절로 그때는 동체대비(同體大悲)라. 같은 몸에 우러나오는 참다운 자비(慈悲)가 나온단 말입니다. 남한테 우리가 아무리 보시(布施)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나와 남의 구분을 딱 세우면 그때는 상(相)이 있습니다. 상이 있는 보시는 해탈(解脫)의 법문이 못 되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거니 자타(自他)가 둘이 아니거니 하는 그 동일성을 분명히 우리가 느끼고서 상을 털어 버려야 해탈의 법문이 돼서 참다운 보시란 말입니다. 참다운 자비입니다.
우리는 다 범부니까 마땅히 그야말로 성불(成佛)은 저만치 높고 우리는 여가 있다. 이와 같이 부처는 높고 난 여가 있다. 부처한테 올라가려면 보살 십지(十地)요, 또는 몇 지요, 이와 같이 한계가 많이 있다. 이렇게 차별 분별 하는 것은, 잘 외워두십시오. 이런 것이 아주 그 공부를 많이 해본 분들이 아니면 별로 취미가 없는 문제입니다마는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취미가 없더라도 바른 실상(實相), 바른 실상을 우리가 못 느끼고 못 깨달으면 그때는 우리가 바로 못 살아 간단 말입니다.
불교(佛敎)도 바로 못 서고 또는 불교도 그때는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또는 현대도 역시 이러한 부처님의 진리가 아니고서는 현대적인 인생고(人生苦)를 해결을 못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범부가 따로 있고, 우리는 범부고 석가모니(釋迦牟尼)나 육조(六祖)스님이나 오조(五祖)스님이나 모두가 성인(聖人)인지라 성인과 범부의 차이는 있습니다.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그 차이도 우리 중생의 상대적인 그런 안목으로 보는 것이니까 범부가 있고 또는 석가모니가 있고 우리가 이와 같이 차이가 있는 것이지 참말로 본바탕에서 불성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도 차별이 없습니다.
고하(高下)도 없고 그땐 그야말로 범부(凡夫)와 성인(聖人)과 중생(衆生)과 또는 부처가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분명히 우리가 닦아서, 우리는 범부니까 성불(成佛)을 해야 하기 때문에 닦고 우리가 증명하고 하는 그야말로 이렇게 수증(修證)이 닦고 증명하는 것은 이것은 없지가 않습니다. 있다 하더라도 부처는 높고 난 낮잡고, 또는 부처한테 갈라면 오랫동안에 올라가야 하고 이런저런 구분, 이런저런 구분을 없애버려야 됩니다. 올라갈 때는 분명히 우리가 닦아서 올라갈망정 본래는 하나단 말입니다.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도 모두를 다 하나로 보는 것은 성자가 억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자(聖者)의 청정(淸淨)한 안목(眼目), 우주의 바탕을 바로 보는 청정한 안목에서는 나쁘게 안 보인단 말입니다. 모두가 다 불성으로 보이거니 어떻게 나쁘게 보이겠습니까.
중생은 없는 것을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사실은 없는 것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나쁜 것 좋은 것이 사실은 없습니다.
청정미묘한 모두를 바로 보는 불성 안목에서는 그렇게 안 보인단 말입니다. 그렇게 안 보이니까 본래에서는 성자고 범부고 선이요 악이 없다는 것이지 억지로 중생 때문에 없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범부지(凡夫地)에 있어서 당하 못 깨닫고 앞으로 오랫동안 공부해서 금생(今生) 내내에도 못 깨달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관념(觀念)은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안 나왔으면 모르거니와 석가모니가 나왔고 또 그 뒤에도 무수한 도인(道人)들이 나와서 본래 모두가 바로 보면 다 부처라고 했거니 부처란 자리 그 자리를 딱 지켜야 쓴단 말입니다. 부처란 자리를,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부처란 자리를, 그 자리를 딱 지키고서 그 자리를 이탈하지 않아야 쓰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이탈 않고서 공부하는 것이 이것이 즉 말하자면 오염(汚染) 되지 않는 공부란 말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애쓰고 아무리 공부하는 모양을 잘 취한다 하더라도 부처님은 저 위에 계시고 그리고 나는 여기 있다. 이렇게 자기를 낮잡게 해서 고하(高下)를 둘 것이 아니라 비록 내가 지금 이렇게 있다 하더라도 비록 내가 욕심(慾心)도 부리고 또는 진심(嗔心)도 부린다 하더라도 나의 본질이나 석가모니의 본질이나 조금도 호리(毫釐)가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마음을 깨닫지 못해서 내 본바탕을 당하 못 볼 뿐입니다. 따라서 지금 나라는 사람도 역시 석가모니가 보면 그때는 똑같은 부처입니다. 석가모니가 본 다고 생각할 때는 갑이나 병이나 을이나 박가나 김가나 다 석가모니와 똑같은 부처로 보여야 쓰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처님 도리란 말입니다. 우리 불교(佛敎)는 지금 이렇게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탐욕심(貪慾心)도 많이 있고 곧 지금 욕심 부리고 한다 하더라도 역시 나는, 내 본질은 나한테 잠재해 있는 힘이라는 것은 석가모니와 똑같다. 이렇게 느껴버려야 그래야 참다운 불교인 입니다.
그렇게 말씀하니까 육조스님께서 육조(六祖) 왈(曰),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차(只此), 다만 지(只) 이 차(此), 아니 불(不), 물들 염(染), 더러울 오(汚), 모두 제(諸), 부처 불(佛), 갈 지(之), 바 소(所), 지킬 호(護) 보호할 호자, 생각 염(念), 너 여(汝), 또 역(亦), 같을 여(如), 이 시(是), 이것은 옳을시 또는 이시라 합니다. 또는 나 오(吾), 또 역 (亦), 같을 여(如), 이 시(是) 말입니다.
지차(只此), ‘다만 이와 같이’ 지금 그대가 말한 이와 같이 불염오(不染汚), ‘염오가 없다는’ 즉 말하면 ‘오염이 안 된다는’ 비록 닦기는 닦는다 하더라도 고하도 안두고 시비도 안두고 차별도 안 두는 그런 툭 티인 마음에서 닦는 이것이 제불지소호념(諸佛之所護念)이란 말입니다. 석가모니나 또는 ‘모든 부처님께서 다 생각하고 지키는 보호하는 그런 가르침’이고 말입니다.
석가모니께서 말씀은 많이 했지마는 다른 방편설(方便說)은 그때그때 임시로 말씀하신 것이고 이러한 ‘본래 오염이 없다.’ ‘본래청정(本來淸淨)’이라는 말입니다. ‘본래청정한 이런 법문은 삼세제불(三世諸佛)이 항시 지키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이래야 만이 삼세제불 이것이 본뜻입니다. 즉 말하자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역(汝亦), ‘그대역시 그와 같이 말씀을 했고’ 오역여시(吾亦如是)라, ‘나 역시 그와 같이 말씀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은 지금 우리 불교계에서 문제가 돼 있는, 즉 아주 가장 중대한 그야말로 참 이슈가 돼 있는 그것이 뭣 인고 하면은 우리 수행(修行)하는데 있어서 말입니다.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란 말입니다. 이 말을 가지고서 시야비야 논쟁도 하고 또는 불법이 기다 아니다. 이것만 기다. 마치 어느 분들은 지금 운동권 학생들 모양으로 목소리가 굉장히 높단 말입니다. 이래야 할 것인가? 이럴 필요가 있는 것인가 말입니다.
어려운 문제니까 조금 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또는 제 말씀이 난해(難解)하다 하더라도 이런 때 기억해 두셨다가 나중에 두고두고 비교도 해보시고 말입니다. 참고로 해 보시기바랍니다.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란 말입니다. 공부할 때도 책을 좀 본 분들은 참선에 관한 책을 본 분들은 이것이 옳을 것인가 저것이 옳을 것인가 자꾸만 의단이 생기는 말입니다. 훤히 풀으셔야 씁니다. 그래야 막힘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돈오돈수라, 문득 깨닫고 문득 닦는다. 이렇게 말씀하신 그런 큰스님들 하고 말입니다. 또 한 가지는 문득 깨닫지만은 점차로 닦는다 하는 이런 말씀, 이렇게 주장하는 분들하고 논쟁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것인가 하면 마땅히 우리 어느 누구나가 점차로 오랫동안 걸려서 깨닫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기왕이면 빨리 깨닫고 싶은 맘은 누구나 있습니다.
다만 여건이 안 닿으니까 빨리 깨닫지 못 하는 것이지 ‘문득 깨닫고 문득 닦는다’ 이렇게 누구나가 하고 싶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응당 그래야 쓰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희망적인 상황에서는 응당 그래야 쓰겠지요.
그러나 사실 우리가 금생(今生)에 업장(業障)도 무겁고 과거업장(過去業障)도 무겁고 이런 중생(衆生)인지라 사실은 문득 다 공부를 해치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선 저 같은 사람 두고 보십시오. 이와 같이 승복 입고서 이 산으로 저 산으로 40년 동안 헤맸습니다. 그래도 역시 아직도 공부가 다 돼서 끝났다 하는 공부는 당하 멀었단 말입니다. 공부의 정상에 올라가려면 지금도 천리만리입니다. 40년 동안 집을 나와서 해도 이렇게 되거니 사실은 문득 되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물론 제가 미련하고 또는 게으름부려서 그렇다고는 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일반적인 차원에서는 문득 다 해치울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그러면 돈오점수가 옳을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꼭 돈오(頓悟)와 점수(漸修)만이 옳다고는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어폐는 아닙니다.
만약에 돈오와 점수가 옳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돈오와 돈수는 나쁘다고 봐야지요. 그런데 과연 큰스님들이 나쁜 말을 뭘하러 하겠습니까.
제가 생각할 때는 돈오돈수란 말도 옳고 돈오점수란 말도 옳습니다. 어째서 옳은고 하면은 이 구분을 잘 들으셔서 판단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돈오돈수란 말은 어째서 옳은고 하면은 말입니다.
비록 천지우주가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천지우주(天地宇宙)가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조금도 차이가 없고 흠축도 없고 아주 원만스러운 다 불성(佛性)뿐이다. 다 부처님뿐입니다. 천지우주가 원만스러운 부처님뿐이다. 이렇게 못 느끼면 그때는 돈오하고는 거리가 천리만리입니다.
마땅히 우리가 증명(證明)을 미처 못 했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은 거짓말이 아닌 것이고 무수한 도인(道人)들이 증명한 것이니까 우리는 믿어야 쓰는 것입니다. 종교(宗敎)는 신앙(信仰)아닙니까. 안 본 것을 믿기 때문에 종교는 신앙이 아니면 그때는 종교가 성립이 못되는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고대로 믿어야 쓰는 것입니다.
비록 중생이 안 보인다 하더라도 천지우주를 바로 보는 정다운 정견(正見)에서는 천지우주가 평등무차별의 청정미묘한 다 불성뿐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자타시비(自他是非) 선악(善惡)을 다 떠나서 또는 부처와 중생과 이런 차별을 떠나서 모두가 다 평등무차별의 일체공덕(一切功德)을 갖춘 불성(佛性)뿐이다. 이렇게 분명히 느끼면 그때는 일차 돈오(頓悟)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비록 증명은 못했다 하더라도 간혜지(乾慧智), 인식적인 지혜라 하더라도 이렇게 분명히 느끼면은 그때는 돈오인 것입니다. 누구나 말입니다. 그러고 돈오가 아니면 참선이 못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 뒤에 따르는 돈수와 점수는 그 어떤 문제인가 말입니다.
비록 지금 우리가 닦아갈 길은 천리만리라 하더라도 부처님의 그런 정견에서 본다고 할 때에는 보살십지(菩薩十地)고 그야말로 참 사십육위(四十六位) 사만성불(四滿成佛)이고 또는 높고 낮잡고 말입니다. 부처와 나와 그런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높고 낮잡고 부처와 나와 차별이 없다는, 차별이 없다는 그 생각을 순간도 놓치지 않고 닦으면 그것이 바로 돈수(頓修)가 됩니다.
만약 부처와 나와 둘이 따로 있고 저 올라 갈라면 지금도 그냥 천리만리 아득하고 이와 같이 분별시비(分別是非)하고 고하(高下)를 두고, 고하를 생각하고 또는 방편(方便) 계제(階梯)를 위차(位次)를 우리가 설정하고 이러한 관념을 둔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이 점수(漸修)란 말입니다.
따라서 보조국사(普照國師)가 말씀하신 돈오점수란 말도 분명히 옳고 말입니다. 마땅히 우리가 그야말로 참 본래로 하나라 하더라도 역시 우리는 중생이니까 어느 한계는 느껴야 쓰겠지요. 따라서 일반 중생차원(衆生次元)에서 말할 때는 돈오점수(頓悟漸修)란 말이 옳을 것이고 말입니다. 또는 부처님의 참다운 정지견(正知見) 차원에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시각적인 차이뿐인 것이지 어디가 글타 옳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염(汚染)하지 않으면, 오염이란 것은 분별시비(分別是非)입니다. 오염하면 그때는 그것이 참다운 도(道)가 못 되는 것이고, 점수가 되어 버리지요. 그러나 오염을 한다 하더라도 도인들은 우리 중생 때문에 부득이 하니 차별을 시설하고 한계를 둔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나 도인들이 당신들께서 바로 보는 당신들 마음 보조스님의 마음, 원효스님의 마음, 서산대사의 마음, 또는 석가모니의 마음, 이런 마음은 그때는 차별(差別)을 안 두는 것입니다.
차별을 안 두나 다만 중생 차원에서 중생 때문에 부득이해서 차별을 둔단 말입니다. 따라서 중생 때문에 부득이해서 차별을 두는 그런 의미에서는 점수라고 해야 쓸 것이고 말입니다.
부처님 차원에서 조금도 차별이 없는 평등무차별의 모두가 다 진리뿐이거니 비록 2지에 올라가고 3지에 올라가도 그도 역시 그것은 중생에서 밑에서 보는 것이지 저 위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똑 같은 평등무차별의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그때는 그야말로 돈오돈수가 된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육조스님께서 말씀한 육조단경(六祖檀經)에서는 법무돈점(法無頓漸)이라, 법에는 원래 돈과 점이 없단 말입니다. 법(法)은 그야말로 일승묘법(一乘妙法)이고 삼승도 없는 것이고 오직 일불승(一佛乘)이란 말입니다. 오직 실상적인 한 부처님 법, 그 법만 있는 것이지 중생이고 뭣이고 원래 법에는 없습니다.
다만 중생차원에서 도인들이 짐짓코 구분해서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범부다 나는 못났다 이것도 역시 내가 봐서 그러는 것이고 중생이 봐서 그런 것이지 부처님이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석가모니나 또는 원효나 우리나 똑같이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차원 즉 부처님의 참다운 심심(深深)한 그런 법 가운데는 돈이고 점이고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시각 따라서, 중생이 영리하게 보는가 본래로 보는가 또는 방편으로 보는가 이런데 따라서 그때는 인유리둔(人有利鈍)이라. 사람 가운데서 보다 영리하고 둔하고 또는 사람 가운데서 어떻게 보는 것인가 시각 따라서 돈이요 점이요. 점수요 돈수요 하는 것이지 사실은 법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담 같습니다마는 제가 이와 같이 이런 것이 상당히 중요한 문제기 때문에 나중에 참고가 되시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곁들였습니다.
우리는 참선을 다시 바꿔서 말하면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 총림은 떨기 총(叢)자, 수풀 림(林)자, 공덕이 마치 수풀 같이 많이 있단 말입니다.
부처님 불성(佛性)가운데 있는 지혜공덕(智慧功德)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하다 하더라도 우리가 참선(參禪)을 많이 해서 공덕을 불성을 증명을 못 하면은 그런 공덕을 못 쓰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에 나오는 부사의(不思議)한 기적들, 그런 부사의한 신통(神通)을 대부분 무시합니다마는 사실은 그런 것이 모두가 참말입니다. 부처님의 신통공덕(神通功德)은 우리가 말로는 다 못 하는 것입니다. 하도 심심미묘(甚深微妙)하니까 말입니다.
부처님뿐 만이 아니라 우리가 정작으로 그와 같이 불성(佛性)을 증명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도 역시 그와 같은 공덕이 나와야 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고로 부처님법을 제대로 공부한 분들은 많이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불성까지 온전히 하나가 못 되니까 알뚱말똥 하고는, 하나가 못 되니까 우리가 못 하는 것이지 사실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위대한 도인들은 다 증명을 많이 했습니다. 중국의 당나라 때 등은봉(鄧隱峯)이라, 지금 등소평이란 사람도 중국에서는 굉장히 구세주 같이 추앙을 받습니다. 그렇게 꽁꽁 묶은 나라를 풀어서 어느 정도 자유화 시키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참 고마운 사람이고 하기 때문에 우리가 본다고 할 때도 저 사람 과거전생(過去前生)에는 보살후신(菩薩後身)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입니다.
근데 그 등소평하고 같은 등씨 입니다. 등은봉이라, 숨을 은(隱)자, 맷부리 봉(峯)자 말입니다 등은봉은 굉장히 위대한 분입니다. 그러니까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 그 다음에 남악회양(南嶽懷讓)스님 그다음에 마조도일(馬祖道一)스님 그 다음에 마조도일스님 한테 법을 받은 분이 여러분이 많이 있지마는 이제 등은봉(鄧隱峯)이란 분도 받았단 말입니다.
같은 도인도 여러 가지 괴벽스런 도인이 많이 있습니다. 아주 점잖을 빼는 도인도 있고 또는 참 괴벽스러운 도인도 있단 말입니다. 괄괄한 사람들이, 이 분은 괴벽스런 도인(道人)입니다.
그러기에 자꾸만 그 도인은 되었지만 결국은 자기 원래 습기(習氣)때문에 이따금은 우스갯말도 하고 또는 괴상한 짓도 하고 신통(神通)도 부리고 한단 말입니다.
이 분은 여름에는 오대산(五臺山), 오대산을 청량산(淸凉山)이라 그래요. 그야말로 참 시원스러운 거기는 산의 고도가 해발 1000미터가 넘습니다. 따라서 굉장히 시원하겠지요. 1000미터가 넘는 고지대에 가서 그야말로 참한 절이 100개 남어 있단 말입니다. 그와 같이 광대한 땅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 가봐서 모르겠습니다마는, 따라서 이 분은 여름에 더운 때는 그냥 저 밑에가 있지 않고서 오대산에 올라간단 말입니다. 시원한데로 청량산에 올라가서 여름에는 지낸단 말입니다. 또 겨울에는 추우니까 다스운 데로 영남으로 온단 말입니다. 영남으로 또는 오대산으로 그와 같이 그이는 갔다 왔다 하고 지냈습니다.
그렇게 할 때도 그냥 보통대로 걸어서 몇 천리 길을 갔다 왔다 했겠지요. 허나 어떠한 때는 중생이 불쌍한 때는 자기가 신통을 부린단 말입니다. 신통을, 한번은 여름에 더워서 오대산 청량산에 갈려고 마음먹어서 자기가 길을 나섰단 말입니다. 걸망을 지고 한여름에 길을 나섰거니 그 굉장히 덥겠지요.
그래도 더운가 안 더운가 차별을 떠나버린 경계기 때문에 멀고 가깝고 더웁고 춥고를 떠난 사람이기 때문에 그때는 걸어가나 조금도 상관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전쟁이 일어나서 그 적군들하고 정부군하고 싸우고 있단 말입니다. 마침 당신이 오대산에 올라가는 길목에서 그렇게 하고 있으니 어떻게 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 싸우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화살 맞아 죽고 칼 맞아 죽고 하는 걸 참담한 꼴을 본다고 생각할 때에 아- 보통사람도 불쌍한 것인데 하물며 대도인(大道人)인지라 자비심(慈悲心)때문에 굉장히 불쌍하단 말입니다. 따라서 내가 이 싸움을 그치게 해야 쓰겠구나. 이렇게 당신이 자비심으로 해서 다짐 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늘로 자기 주장자를 훅 이렇게 올렸단 말입니다. 올려 가지고서 자기 몸도 그냥 그렇게 신통으로 해서 하늘로 솟아 버렸단 말입니다. 자기 몸도 솟구쳐 올라가서 주장자를 턱 탔단 말입니다. 턱 타고서 전쟁하는 그 싸움터를 이렇게 몇 바퀴 빙빙 돌았단 말입니다. 대낮에 웬 사람이 말입니다. 웬 승려가 주장자를 타고서 이렇게 전쟁터를 도니 아무리 싸움이 중요하지만 그 이상한지라 안 보겠습니까. 오색이 찬란한 그런 빛을 보이면서 그 전쟁터의 공중위에서 돌고 있으니 아무리 영악스러운, 아무리 표독한 마음에서 싸운다 하더라도 역시 그 찬란스러운 광경 때문에 마음 팔려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 그 순간 사람은 대체 뭣이 간디 싸우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사람은 뭣 이간디 말입니다. 공부해서 저와 같이 훌륭한 신통지혜(神通智慧)를 나투는 분도 있고 우리 같이 이렇게 못 나게스리 서로 죽이는 사람도 있구나. 이렇게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등은봉스님이 그와 같이 신통으로 해서 공중에 비행자재(飛行自在) 하는 그런 모습을 보임으로 해서 그 싸움을 말렸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일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참선공덕(參禪功德)입니다. 제2의 석가라는 용수보살(龍樹菩薩)께서는 대중을 모아 놓고서 오늘보다도 훨썩 많은 대중이 되겠지요. 어느 자리에서 참선공덕을 말했단 말입니다. 참선은 그야말로 신통도 나오고 뭣도 나오고 다 한다. 참선은 그야 머리도 좋아지고 다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많이 했지마는 거기에 모인 관중들이 여실히 알아먹을 수 없단 말입니다.
제가 이와 같이 서투른 말로해서 말씀을 많이 드린다 하더라도 여러분께서 참선의 공덕을 말해도 잘 감이 안 잡히십니다. 참선은 신통도 한다. 머리도 좋아진다. 몸도 가벼워진다. 감이 안 잡히십니다. 그러나 실지로 그런 공덕을, 이런 때에 법력(法力)있는 분들은 실지로 그런 공덕을 보이는 것입니다.
용수보살께서 이렇게 참선공덕을 말씀한 뒤에 턱 들어앉으니까 용수보살의 모양은 간 데가 없단 말입니다. 간 데가 없이 다만 찬란스런 원광(圓光)만 둥그런 원광만 훤히 빛나는 것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은 참선공덕을 안 믿겠습니까. 이런저런 공덕이 참선공덕에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께서 반문하실 것입니다. 아- 그러면 그대는 과연 40년 동안 공부 했거니 무슨 힘이 있는 것인가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저는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회고해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그때 게으름 부리고 망상(妄想)을 많이 했단 말입니다.
그때그때 갔다 왔다 안 해도 될 것을 갔다 왔다 많이 하고 말입니다. 회고해 보면은 결국은 부처님 말씀을 여실히 그대로 못 지키고서 자기 번뇌(煩惱) 때문에 많이 움직였단 말입니다.
번뇌 때문에 움직인데가 허물이 있는 것이지 부처님 법에는 조금도 허물이 없습니다. 제가 바로 여실히 여법이 못 닦았던 것입니다. 지금 제 심정을 말하면 정말로 여실히 닦는다고 생각할 때는 절대로 먼 길이 아니란 말입니다. 절대로 먼 길이 아닙니다.
정작 1주일 동안만 한 생각도 후퇴가 없이 한 생각도 잡념이 안 끼게시리 잘 닦으면은 1주일 동안에 분명히 불성(佛性)을 훤히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달마스님도 관심론(觀心論)에서 초범증성(超凡證聖)이 목격비요(目擊非遙)라, 범부를 넘어서 범부를 초월해 성인 되는 것이 눈 깜짝할 동안에 있도다. 어찌 센머리 날 때 까지 우리가 수고해야 하리오. 이렇게 말씀했던 것입니다. 절대로 먼 길이 아닙니다.
참선공덕은 아까 말씀마따나 공덕총림이라, 지혜(智慧)도 원만(圓滿) 자비(慈悲)도 원만(圓滿) 공덕(功德)도 원만(圓滿)입니다. 정말로 원만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미처 성불까지는 못 간다 하더라도 거기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때는 우리가 공덕(功德)이 차근차근 증장해 오는 것입니다.
지금 과학자는 누군가? 원소(元素)를 발견하고 또는 원자핵(原子核)을 발견하고 소립자(素粒子)를 발견하고 이 분들도 우리 참선(參禪)하는 사람 이상으로 현미경(顯微鏡)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오로지 잡념을 떠나서 그야말로 응집하고 말입니다. 관찰하고 하기 때문에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과학자가 소립자나 원자나 이런 것을 보는 것도 역시 부처님의 불성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하나의 공덕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도 불성과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성 가운데 있는 어느 정도 상대적인 공덕인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자의 현미경을 우리가 빌려 쓰는 그런 것은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제한을 못 벗어납니다.
참다운 순수에너지 과학적인 여러 가지 기기로 해서 못 보는 순수한 생명 이것은 마음 깨달아서 참선이나 염불이나 그런 마음 깨달아서 공부하는 청정한 마음에서 밖에는 못 보는 것입니다.
과학이 원자를 봤거니 앞으로는 과학이 불성도 볼 것이 아닌가 절대로 못 보는 것입니다. 번뇌가 없는 성자의 견해 아니면 참다운 불성 우주의 본바탕인 순수한 생명을 못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을 닦아서 불성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원자력 가지고 하는 컴퓨터나 레이더나 말입니다. 어떠한 기계문명(機械文明)보다도 훨썩 더 고성능한 신통지혜(神通智慧)를 다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과학시대의 모든 막힌점, 과학시대의 모든 갈등 이런 것을 메우기 위해서라도 지금 도인들은 정말로 공부해서 그와 같이 불성을 증명을 딱 해서 아까 용수보살 같이 말입니다. 그와 같이 불성을 내보이는 그런 힘이 있어야 쓰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틀림없이 그런 분들이 많이 나오시리라고 저는 확신을 합니다.
헌데 그러면은 참선은 앞서 말씀마따나 부처님이 뭣인가? 나와 부처가 뭣인가 말입니다. 우주의 본질 이른바 정견(正見),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성불의 길인 팔정도(八正道)는 항시 우리한테 다만 한순간도 잊을 수가 없이 있어야 쓰는 것입니다. 팔정도의 정견(正見)이란 말입니다.
정견 이것이 부처님 참다운 실상, 부처님이 바로 보신 것입니다. 부처 밖에 없다는 생각, 이 생각을 해야 그래야 이것이 정견인 것입니다.
그러면 정념(正念)은 뭣인가, 바른 생각은 뭣인가 말입니다. 이것도 역시 부처 밖에 없다는 견해를 보다 더 우리가 깊이 깊이 심화(深化)를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정견(正見) ․ 정사유(正思惟) ․ 정념(正念)이라, 바로 보고 또는 바른 생각 하고 말입니다. 바른 기억, 바른 억념하고 이렇게 하므로 해서 우리가 정정(正定)이라, 바른 참다운 삼매(三昧)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삼매라는 것은 이것은 참선이나 삼매나 모두가 다 대동소이(大同小異)한 말인 것입니다. 조금은 약간 뉘앙스의 차이는 있습니다.
정견하고 정사유하고, 정사유는 바른 생각 아닙니까. 정념은 그 생각을 보다 더 그야말로 사무치게시리 우리가 명심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므로 해서 그때는 정정이라, 참다운 삼매가 온단 말입니다.
따라서 정견 바른 견해 또는 바른 생각 바른 억념 바른 기억 이렇게 안 되면은 참다운 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루종일 이뭣꼬 이뭣꼬 한다 해도 역시 그런 정견이 앞서지 않으며는 이것이 뭣인가? 본질이 뭣인가?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이것이 뭣인가? 이것의 본질은 부처란 말입니다.
어떤 것이나 본바탕은 부처입니다. 붉은 것이나 누런 것이나 강가나 김가나 박가나 모두가 다 결국은 본질은 부처란 말입니다.
따라서 정견은 부처라는 생각, 조금도 흠축이 없이 부처라는 생각을 떠나면은 그때는 정견은 못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뭣인가 하는 이뭣꼬 선도 역시 이뭣꼬가 그냥 아무렇게나 우리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그 뭣인고가 아니라, 오직 불성이 뭣인가 하는 말입니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뭣인가 하는 이것을 우리가 분명히 들어야 이뭣꼬 선(禪)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화두(話頭)나 다 모두가 그와 같이 화두 의심할 때는 본래면목이 뭣인가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본래면목을 대변해서 무(無)자요 뭣이고 있는 것이지 딴 것이 아닙니다. 판때기 이빨이요 또는 뭣이고 다 있지마는 결국은 내내야 본래면목자리란 말입니다. 본래면목이라는 정견 떠나버리면 그때는 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건 느껴야 쓰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사 의심(疑心)도 않고 딴 것을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정견 ․ 정사유 ․ 정념에 입각할 때는 그때는 참선이란 말입니다.
참선은 지금은 꼭 해야 씁니다. 인류문화(人類文化)가 지금까지 20세기 동안 이와 같이 문명사회(文明社會)가 되었지마는 문명사회 가운데서 가장 고도한 인간의 본래면목을 찾는 자리, 인간의 본래면목을 찾는 가장 수승한 수행법 이것이 참선입니다.
따라서 우리 현대인들은 참선을 꼭 알아야 쓰는 의무가 있습니다. 이렇게 문명사회의 모든 모순(矛盾)을 지양시키는 유일한 법이 참선인데 말입니다. 불법문중에 참선 모르면, 불법문중에 그런 가치가 없습니다.
이렇게 정견 정사유 정념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가부좌(跏趺坐)를 안 틀어도, 걸어가면 입선(立禪)인 것이고, 누우면 와선(臥禪)인 것이고, 앉으나 서나 누우나 말하나 또는 말 안 하나, 밥을 먹으나 모두가 그때는 참선이 됩니다. 마음만 그 자리 마음만 실상자리에 안주(安住)하면 그때는 참선입니다.
한데 지금 말씀이 너무 장황히 됩니다마는 몇 말씀만 더 부언(附言)해서 그만둘까 생각합니다마는
지금 또 문제시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은 참선(參禪)과 염불(念佛)은 그건 다르다. 이렇게 말한단 말입니다.
저한테 와서 우리 불자님들이 스님네나 또는 일반 재가불자님들이나 공부에 관해서 가장 질문이 많은 것이 무엇인고 하면은 참선 염불의 차이란 말입니다.
보통은 다 염불(念佛)은 저만치 하근중생(下根衆生)이 하는 방편(方便)인 것이고, 참선(參禪)은 저만치 고도한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한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내 본바탕이 부처고 말입니다. 일체중생(一切衆生) 그대의 본바탕이 다 부처거니 모든 존재의 본 실상이 부처거니 말입니다. 본바탕을 생각하는 것이 염불 아닙니까. 생각할 염(念)자 부처 불(佛)자 말입니다. 부처라는 것은 본바탕에 대해서 한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一物) 또는 부처(佛), 극락(極樂), 도(道), 진리(眞理), 진여(眞如), 법성(法性) 똑 같은 뜻입니다. 법성, 부처, 도, 진리, 하나 말입니다. 주인공(主人公)도 같은 뜻입니다. 모두가 다, 주인공을 참나를 대명한 것이 부처거니 말입니다.
관음보살(觀音菩薩)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모두가 다 참 나를 대명한 대명사(代名詞)입니다. 참 나를 대명한, 내가 부처님을 외이는 것이 염불인데 내가 참 나를 외이는 것이 염불인데 내가 참나를 생각하는 그것이 염불인데 말입니다. 우주의 본바탕을 생각하는 것이 염불인데 그 염불이 왜 방편이 될 수가 있습니까? 방편일 수 없습니다.
다만 방편이 될 때는 까닭이 있습니다. 부처가 나나 우주의 본바탕이 아니고 그냥 저만치 내 밖의 어디가 계시다가 우리가 간절히 바라면 기도 모시면 그때는 우리를 돕는다. 그 정도로 생각하는 부처 같으면 그때는 참다운 공부가 못 돼요. 그렇게 생각 할 때는 참선은 저 위에고 염불은 밑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염불의 본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내 본질을 재인식하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도 우리가 종송(鐘頌) 할 때에 말입니다. 일십일만구천오백(一十一萬九千五百) 동명동호대자대비아미타불(同名同號大慈大悲阿彌陀佛)이란 말입니다. 도마죽위무한극수(稻麻竹葦無限極數)라, 마치 삼대같이 저 벼논에 있는 벼 포기 같이 말입니다. 들에 있는 벼 포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와 같이 많듯이 대밭에 대의 포기가 많듯이 말입니다. 그와 같이 많듯이 천이나 억이나 일십일만 구천오백이라 동명동호란 말입니다.
그와 같이 많지만 동명동호라, 다 같은 이름, 김 아무개 박 아무개 또 누구누구 서양사람 동양사람 이와 같이 천차만별(千差萬別)로 있다 하더라도 동명동호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똑 같은 모두가 다 같은, 참다운 이름에서는 같은 이름의 부처님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하는 염불은 바로 그것이 참선입니다. 이것보고 염불선(念佛禪) 그래요 염불선 말입니다.
염불선이라, 이런 염불이 어떡해서 무자 화두나 이뭣꼬 화두나 그런 화두 하고 차이가 있겠습니까. 무자 화두나 이뭣꼬 화두도 역시 모두가 다 내 본래면목을 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을 자기생명 자기자성 자기 본바탕으로 생각 할 때는 그때는 화두나 염불이나 둘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원효(元曉)스님이나 의상(義湘)스님이나 서산(西山)스님이나 보조국사(普照國師)나 대각국사(大覺國師)나 그런 분들은 사실은 대부분 다 염불선(念佛禪)을 하신 분들 입니다.
또는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달마(達磨)스님 때부터서 육조혜능(六祖慧能)까지는 제가 생각할 때는 여러분들이 나중에 연구해 보십시오마는 특히 4조 도신(道信)스님 같은 분들은 분명히 염불선(念佛禪)을 한 분입니다.
그 뒤에도 우리 한국에서 신라 때 간 무상(無相)스님, 무상스님이 중국 들어가서 세운 종파가, 자기는 짐짓코 종파를 안 세웠지마는 그 후대에 이루어진 것이 정중종(淨衆宗)이라.
저기 지금 정중당(淨衆堂)이라고 있습니다. 정중당 그 이름은 사실은 애초에 제가 알고 지은 것은 아닙니다마는 무상스님이 지은, 무상스님 때문에 이루어진 종파가 정중종인데 정중종도 역시 염불선입니다.
또는 남산 염불종이라, 이것도 역시 염불선입니다. 또는 그 뒤에도 송나라 때나 특히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때 말입니다. 당나라 때나 또는 송나라 때까지는 일반 선이 좀 많이 있었으나 송나라 때 이후부터서 적어도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때는 딴 방법도 있었으나 대체로 가장 많이 한 즉 다시 말하면 그 당시에 있어서 임제선이나 조동종이나 가장 그 시대를 주름 잡던 위대한 선사들이 한 것이 뭣인가 하면은 주로 염불선이란 말입니다.
제가 이름 하면은 그야말로 참 청료장노(淸了長蘆)라 중봉명본(中峰明本)이라 자백진가(紫栢眞可)라, 운서주굉(雲捿株宏)이라 또 감산덕청(敢山德淸)이라,
이런 그 당시의 임제종(臨濟宗) 조동종(曹洞宗) 그런 종파들을 그런 선종을 이끌어 가는 그 분들이 모두가 다 주로 염불선(念佛禪) 쪽으로 했던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무슨 문화나 시대가 걸러지고 고도로 발달되면 그때는 종합적으로 지향돼 갑니다. 지향성이 다 종합되어 갑니다. 그런데 같은 행법도 원융적(圓融的)인 즉 말하자면 원통적(圓通的)인 행법을 취할 때는 필연적으로 염불(念佛)쪽으로 안 갈 수가 없습니다.
원불교(圓佛敎)나 또는 무슨 불교나 종파가 많이 있으나 대체로 염불하는 수행법은 다 무시를 못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가장 많이 말씀한 법문이고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한국에서나 또는 중국에서나 인도에서나 가장 많이 한 분들이 내내야 그것이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염불하는 수행방법인데, 그 염불도 방편염불(方便念佛)은 그것이 저만치 참선보다 못 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지만 말입니다. 염불의 뜻을 바로 알 때는 바로 그것이 염불선(念佛禪)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정견을 가지면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부처거니 우리가 염불을 할 필요가 뭣이 있는가 가만있으면 쓰겠지. 천지우주가 부처거니 새삼스럽게 부처이름을 부를 필요가 뭣이 있는가 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면 좋습니다. 즉 그렇게 하기 때문에 조금도 문제성을 문제의식이 없이 모두가 부처거니 하고서 묵조(黙照)하는 잠자코서 하는 참선도 좋습니다.
또는 그러한 것을 다, 부처를 내가 못 봤거니 아미타불도 못 보고 관음보살도 못 보고 또는 우리가 불성을 못 봤거니 못 본 그것을 우리가 의단(疑端)을 해 가지고서 의심하는 행법도 물론 좋습니다.
다 좋지만 어느 한 가지만 옳다고 고집 하면 그건 좀 곤란스럽습니다. 고집하면 그건 부처님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평등무차별의 진여불성(眞如佛性) 가운데서 하나를 고집하면 벌써 고집하는 그것이 법집(法執)이 되어서 불성을 바로 못 보는 하나의 증좌입니다.
참선공부는 불교의 고도한 수행법이고 인류문화(人類文化)의 가장 최선의, 최상의 수행법입니다. 그러나 참선이 최선의 수행법이 되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마따나 바른 견해가 분명히 있어야 씁니다. 바른 견해가 있으면 여러분들은 지금 돈오(頓悟)를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 인식으로 바로 돈오를 하신 것입니다. 돈오를 해버려야 그래야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염불이고 참다운 선(禪)인 것입니다.
아무리 모양은 좋아도 돈오를 못 하면은 바른 견해가 못 서면은 그때는 참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꼭 참선을 하셔야 씁니다.
참선을 하셔 가지고서 지금 갇혀있는 마음, 범부의 마음은 갇혀 있습니다. 범부의 마음은 지금 번뇌의 탐욕심(貪慾心)이나 번뇌의 여러 가지 그런 얽힘으로 해서 꽁꽁 묶여 있단 말입니다.
이 마음 없으면 우리는 성불을 못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식으로 해서 비록 내가 지금 당장에 부처는 증명하지 못 했다 하더라도 이 마음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여러분 마음 떠나서 부처가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과, 여러분 마음의 본바탕의 불성과는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의 본마음은 부처인 것이고 말입니다. 우리는 본마음을 못 봅니다.
어째서 못 보는 것인가? 우리 마음은 확신을 못 가지니까 못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말로만 인식가지고서는 간혜지(乾慧智)로 해서는 확신을 못 갖습니다. 확신을 갖게시리 하기 위해서 염불도 천 번도 헤아리고 만 번도 헤아립니다.
만약 염불을 헤아리는 것이 공(功)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그건 할 필요가 없지마는 아까 말씀마따나 부처님 법문을 우리가 확신하기 위해서 우리 마음이 맑지가 않으면 참다운 도리를 잘 인정을 못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흐리멍덩하면 흐리멍덩할수록 우리는 바른 신앙(信仰)이 못 되는 것입니다.
즉 그러기에 부처님 공부는 되풀이 되풀이 하는, 좀 지겹더라도 되풀이 되풀이 하는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되풀이 하다 보면 한번 하면 한 만치 하루 하면 하루 한 만치 맑아온단 말입니다. 그렇게 맑아오다가 종당에 가서는 온전히 하나가 되어버린단 말입니다. 온전히 하나가 못 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애써서 하나가 되고자 하는데서 우리 불자(佛子)의 참다운 사명(使命)과 의무(義務)가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 제가 해드릴 것이 뭣인고 하면은 우리는 지금 보통은 다 복(福)을 빕니다. 저 한테 와서 말씀한 분도 공부를 어떻게 했으면 쓰겠습니까 묻는 분들은 십분의 일도 못 되시고 십상 아홉쯤은 모두가 대부분 다 그와 같이 자기 운수나 그런 복을 말씀 하십니다. 그것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응당 그래야 할 것입니다. 어머니가 되고 아내가 되고 남편이 되고 해놓으면 응당 책임감, 좋은 아버지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응당 복이 있어야 씁니다. 복 없으면 사실은 그때그때 우리가 고(苦)가 더 많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참선하는, 자기 본바탕을 구하는 문제와 복 받는 문제와 길이 다르다고 생각할 때는 참 그러면 딱합니다. 복은 복대로 또는 공부는 공부대로 그래 버리면 결국은 불법의 참다운 뜻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다행스럽게도 우리 공부를 바로 하면은 복도 결국은 우리가 최상으로 받는단 말입니다. 그걸 꼭 명심하십시오.
참선 공부가 따로 있고 기도는 우리가 별도로 모셔야만 복이 있다. 꼭 천배 만배 해야 우리가 복이 있다. 우리 불법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물론 절을 많이 하고 그럴 때는 우리 마음이 하나로 딱 모아 지겠지요. 모아지기 때문에 우리가 공(功)을 더 받고 공부도 빠른 것이지마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설사 절을 한 번도 안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동요가 없이 불심 자리에서 안 떠나고서 순수하니 불심을 지키면 벌써 그것이 우리가 그만치 공부도 잘 됨과 동시에 그때는 복도 많이 받는단 말입니다.
불성 가운데는 제가 아까 말씀마따나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 불성은 무한공덕(無限功德)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불성에 접근되면 되어 갈수록 무한공덕이 우리한테 오는 것입니다. 무한공덕이 말입니다.
사실은 바른 사람이 있으면 바른 사람 때문에 그 주변은 정화(淨化)된단 말입니다. 방안이 찌쁘듯 한다 하더라도 공자 같은 그런 도인들이 딱 계시며는 그때는 그야말로 참 푸근하니 온화한 분위기가 생긴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여기가 계시며는 이쪽에 있는 악귀가 저리 다 몰려 가 버립니다. 못 배기고 말입니다. 그 대신 호법선신(護法善神)들은 또 부처님 계신대로 다 모여든단 말입니다.
부처님뿐만 아니라 착한 사람들 바른 생각하고, 같은 염불 한다 하더라도 바른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냥 신장(神將)들이나 우주의 가장 으뜸 성령(聖靈), 신장 가운데 가장 본래 성령은 내내야 부처님 아닙니까. 부처님까지 미처 못간 그런 신장이나 호법선신들이 많이 있습니다.
헌데 그런 선신들은 몸이 우리 같은 오염된 몸이 아니기 때문에 많이 본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도 보고 우리 행동도 보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신장이나 뭣이나 모두가 다 본바탕은 부처입니다. 곤충이나 말입니다. 자동차나 또는 뭣이나 비행기나 본바탕은 다 부처입니다. 모두가 말입니다.
본바탕은 부처기 때문에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그 자리를 딱 생각하면 말이요. 딱 생각하면 그 순간 신장들은 다 아는 것입니다. 안단 말입니다. 비행기를 구성한 순수한 생명도 안단 말입니다. 또는 자동차를 구성한 생명도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항시 말씀드린바와 같이 가사 우리가 차를 타서 그 차를 이렇게 물리적인 힘으로 해서 전복이 될 때도 말입니다. 정말로 신심(信心)이 있는 분들 정말로 신앙(信仰)에 사무친 분이 딱 탔다고 생각할 때는 그 사람 때문에 신장들의 가호로 해서 그 차가 전복(顚覆)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수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운수가 나쁘면 그건 왜 나쁩니까. 운수가 나쁜 것은 우리 집안에 모다 삿된 기운들이 많이 모여 온단 말입니다. 내 마음에도 삿된 기운이 모여오고 내 남편한테도 삿된 기운이 모여오고 우리 집안에 삿된 기운이 많이 있단 말입니다.
집이 있으면 또 집을 지키는 신이 있는 것입니다. 집신도 집에 사는 사람들 불량하면 불량한 만치 집신도 그에 나쁜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에 사는 사람들이 바른 생각하면은 바른 생각하는 순간 그때는 신장이 안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때는 집을 지키는 신도 역시 그만치 감화를 받는 것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다 부처다. 일체만유(一切萬有)는 다 부처님뿐이다. 이와 같이 생각 할 때는 신들도 가장 좋아 하는 것입니다. 신들도 내내야 자기들 신들의 본질도 부처니까 말입니다.
또한 동시에 부처님의 호념(護念)이라. 보호할 호(護)자, 생각할 념(念)자, 부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천지 우주가 부처거니 나는 나고 부처는 부처다. 이런 때는 부처님께서 부처님 기운이 우리한테 온전히 못 온단 말입니다.
허나 천지우주가 부처님뿐이다. 부처님과 나와 둘이 아니다. 이 생각은 천지우주의 참다운 생명인 나와의 통로를 놓는단 말입니다. 나와의 통로가 생깁니다. 부처와 나와의 사이에 중력이 자용해서 말입니다. 같이 이끌림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나 너나 모두가 부처뿐인 천지우주가 부처님 아님이 없다. 이 생각을 딱 한다고 생각할 때 이 생각만으로 해서 벌써 가피를 입습니다.
집안에 운수를 바라고 복을 바라시는 분들 절도 많이 하시고 염불도 많이 하십시오. 그러나 그렇게 하신다 하더라도 마음 자세는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참선하는 마음자세 말입니다. 바른 정견, 바른 정견을 가지고 하셔야 공부도 속 빠르고 또 가장 많은 가피를 입고 복을 많이 받는 것입니다.
짧은 동안입니다마는 3박4일 동안 사정이 있어서 가실 분들은 가셔서 집안에서도 꼭 바른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념(正念)으로 해서 정정(正定), 정정은 정다운 삼매(三昧)입니다. 정다운 삼매가 되어야 우리 습기(習氣)를 녹여서 참다운 해탈(解脫)을 증(證)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 생명의 본 목적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정다운 삼매가 못 되어 해탈을 못 하면은 우리 생명은 윤회(輪廻)한단 말입니다. 고생바다에 윤회합니다. 우리생명의 목적은 해탈에 있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번뇌(煩惱), 탐욕심(貪慾心) 또는 무명심(無明心) 분노심(忿怒心) 말입니다. 삼독심(三毒心)을 떠나지 못 하면은 인간의 해탈은 없습니다. 참다운 해방은 없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무슨 제도나 물질이나 그런 걸로 해서는 하나의 기본은 될망정 인간의 참다운 해탈은 못 되는 것입니다. 참다운 복리는 못 됩니다.
우리는 지금 복잡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가치(價値)가 전도(顚倒)가 되어서 인간의 죄가 뭣인가 죄의 원인을 모릅니다. 인생고(人生苦)의 원인을 모릅니다. 인생고(苦)의 원인은 분명히 사제법문(四諦法門)에 있듯이 말입니다. 인간의 번뇌에가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과 또는 무명심과 인간의 분노심과 이것이 인생고의 원인이란 말입니다.
나한테 너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번뇌 이것이 인생고의 원인이란 말입니다. 사회고나 인생고나 모두가 다 고의 원인은 우리 번뇌에 있습니다.
마땅히 번뇌의 반대가 바른 정견 아닙니까. 정견으로 해서 공부하시는 분들은 3박4일 동안에 부처님마음 불심과 내 마음과 둘이 아닙니다. 분명히 둘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이 마음 바로, 이 마음 떠나서 부처가 아니라 이 마음 바로 부처입니다. 이 마음 바로 부처입니다.
이 동안에 꼭 활연대오(豁然大悟)를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씀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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