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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제72호 순선안심법문(純禪安心法門)-02

                         <제 72 호>

*19981115-성륜사 대웅전 순선안심법회-02*


순선안심법문(純禪安心法門)-02


*수행(법修行法)의 차서(次序)


수행법의 차서 이런 것이 어느 것도 흠절이 없는 것이 바로 진여불성이고, 또는 우리가 금생에 잘 못살았다 하더라도 석가모니 부처님같이 온전히 나한테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내가 할 일은 무었인가? 오직 우리가 부처가 되는 길이란 말입니다. 어느 것보다 더 바쁜 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나 불교나 이것저것 다 뿌리치고 예수도 마태복음서 보면은 자기제자가 말입니다. 제자가 주여 지금 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제사를 모시고 주를 따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하는 말이 ‘죽은 자는 죽은 자 스스로 장사케 하고 그대는 당장에 나를 따르라,’ 자기 아버지 장례모실 그런 시간을 유예도 주지 않고서 진리(眞理)를 따르라 했단 말입니다. 그렇게 진리는 소중한 것입니다.

수행법(修行法)의 차서(次序)라, 이것은 근본불교(根本佛敎)에서 우리가 대승법(大乘法)을 안다고 하더라도 수행을 차근차근 들어갈 때는 소승을 참고로 해야 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가 과거전생(過去前生)부터서 지어내려온 업장(業障)이 많기 때문에 업장을 녹여갈 때는 그때는 순서 있게 녹여야지 단박에 부처는 못 된단 말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아, 단박에 부처가 된다. 그래서 화두(話頭)만 들고 있으면 꼭 부처가 된다. 이렇게 함부로 말해서는 또 안 되는 것입니다. 역시 순서를 가려서 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 한국 선방(禪房)에서도 아, 선방에 몇십년 동안 다닌 사람도 역시 화두해도 별로 얻음이 없으니까 스리랑카나 소승불교(小乘佛敎) 국가에 가서 비파사나(毘婆舍那)를 배운단 말입니다. 비파사나는 순서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대승법은, 대승법 그래서 우리가 딱 우리마음에다가 주축(主軸)으로 해서 앉혀놓고서 다만 참고로 해서 닦아나가는 우리 번뇌(煩惱)가 녹아지는 것은 참고로 해서 보면 됩니다. 그런 정도로 우리 그쳐야하지 이쪽을 그만두고 소승 나라에 가가지고서 새삼스럽게 비파사나를 우리가 배울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1.오정심관(五停心觀)


1) 부정관(不淨觀)


부정관(不淨觀)이라, 이것은 탐욕다인(貪慾多人)이라,  보통 우리 몸이 제일 중하다고 그러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가 다 우리가 번뇌를 다 범하는 것은 자기 지식 자기소임을 말입니다.

한국은 지금 그야말로 참 외환 문제 때문에 외화가 부족해서 우리가 여러 가지로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만 외화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우리마음이 철학(哲學)이 없습니다. 철학이 없어서 그런 것이지 정말로 각자 각자가 특히 재벌가(財閥家)들이 철학(哲學)이 있다고 생각 할 때는 자기 것을 그대로 두고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볼래야 볼 수가 없단 말입니다. 왜 그러는가 자기와 남이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기독교도 이제 자기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는 논리입니다. 하물며 불교는 다시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마음도 하나 몸도 하나입니다. 몸도 하나,  몸은 따로따로 있지 않는가?. 우리 중생(衆生)이 봐서 따로따로 있습니다. 성자(聖者)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저사람 세포나 내 몸 세포나 같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세포가 저사람 몸이고 우리 지금 다 붙어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지금 여기가 몇백명 계시지만은 모두가 지금 각 산소나 수소나 또는 질소나 탄소나 그런 차원에서는 모두가 다 지금 붙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공간성(空間性)이 있다고 생각하지만은 여기나 저기나 공간이나 산소나 수소나 모두 다 있단 말입니다.

바로 우리가 그런 차원(次元)을 사실 못 보니까 그와 같이 뿔뿔이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한데 하물며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어떠한 공간 내에도 빈틈없이 우주(宇宙)에 충만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여불성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내 몸 네 몸도 하나고 내 마음 네 마음도 하나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어느 것이 내 것이고 지 몸뚱이도 지 것이 아닌데 다른 것이 자기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단박에 그런 도리를 확실히 여러분들이 증명(證明)해서 재현을 하기는 어려울 테지요. 그러나 그런 도리만은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입니다. 이것이, 반야(般若)의 지혜(智慧)라는 것은 도리만이라도 먼저 알아야 됩니다. 그래가지고 나중에 체험(體驗)해야 한단 말입니다. 삼매(三昧)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탐욕(貪慾)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있다고 생각 하니까 탐욕이 많겠지요. 따라서 부정관(不淨觀)이라, 이 몸뚱이는 침이나 가래나 오줌이나 똥이나 눈꼽이나 귀지나 이런 것이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우리 신장을 헤쳐 놓고 본다고 생각할 때는 얼마나 복잡하니 지독하겠습니까. 이렇게 따지고 따지면 결국은 부정관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은 우리가 욕심을 낼래야 낼 수가 없습니다.


2) 자비관(慈悲觀)


자비관(慈悲觀)이라. 나나 너나, 지금 저같이 70이 넘은 사람이 얼마나 살겠습니까. 저는

저를 설사 좀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저놈의 노장 몇 년 안 가서 죽을 것인데 지금 미워해서 되겠는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몇 년 뒤, 몇 십년 뒤에는 다 죽게 됩니다. 따라서 그때는 몸뚱이 이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그러한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애쓰고 있으니 참으로 불쌍합니다.

  그러기에 자비관(慈悲觀)이라. 툭하면 남을 비판하고 미워하고 때리고 하는 사람들은 자비관(慈悲觀)을 해야 됩니다. 자기가 별것도 아니면서, 또한 자기가 보는 것도 바로 보는 것도 아닌데 그러한 도리를 잘 모르므로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비관(慈悲觀)을 해야 됩니다.


3) 인연관(因緣觀)


유한적(有限的)인 그런 세계에 대해서 차별 분별을 내면은 그때는 그것이 바로 무명(無明)입니다. 무명은 무엇 인고 하면은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다 불성(佛性)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은 참다운 반야지혜(般若智慧)인 것이고, 성자(聖者)의 지혜인 것이고, 그렇지 않고서 눈곱만큼 이라도 분별을 내면은 그것이 바로 무명입니다.

우주는 본래 하난데 하나로 보지 않으니까 무명이 되겠지요? 밝지가 않단 말입니다. 무명이 되도 그때는 나라는 관념이 생긴단 말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다 무명(無明)이 있기 때문에 행(行)이라, 우리가 행동도 바르게 못하는 것이고 또 행으로 해서 그때는 식(識)이라 말입니다.

식은 이것은 삼세인과(三世因果)를 따질 때는 과거(過去)무명 때문에 즉 말하자면 우리가 지금 태어나기 전에는 하나의 영(靈), 식(識)으로 해서 업식(業識)으로 해서 존재합니다.

우리가 죽어지면은 영가(靈駕)란 것도 하나의 업식 입니다. 업식이 헤매다가 갈 곳을 잘 모르니까 그때는 자기하고 정도가 맞는 부모를 따라서 우리가 나온단 말입니다. 그래서 어머니 태(胎)안에 들어 갈 때가 이른바 식(識)이란 말입니다.

명색(名色)은 태(胎) 안에서 이른바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로 성장할 때가 이것이 명색입니다. 구체적인 설명은 제가 생략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육처(六處)라, 그때는 더 성장이 되어 가지고서 어머니 태 안에서 그야말로 참 곧 출태 할 때 안·이·비·설·신·의가 제대로 생성(生成)될 때가 육처란 말입니다.

그 다음에 촉(觸) 이것은 우리가 탄생(誕生)해 가지고서 감촉(感觸)할 때 말입니다. 어릴 때도 감촉은 되겠지요. 뜨거운 것을 아따 뜨거워라 하고 피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모두 다 감촉이 된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조금 더 나이가 더 먹어져서 더 먹으면 그때는 감수(甘受)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좋다고 느끼고 싫다고 느끼고 그런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 애(愛). 사랑 애(愛)자 이것은 나이가 14 - 5세 이후가 돼 가지고서 남녀 이성간에 그때는 애욕(愛慾)을 느낀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취(取)라. 그때는 자기가 마음에 좋은 것을 취할 라고 애쓴단 말입니다. 물질도 그렇고 사람도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은 또 자기가 얻을 라고 애쓰겠지요?

그 다음은 유(有)라, 유(有) 이것은 그렇게 함으로 해서 우리가 과거세(過去世)에 태어날 원인을 즉 말하자면 업(業)을 함장 시킨단 말입니다. 유(有)라, 그래서 미래세(未來世)에 다시 태어나고 그리고 다시 늙어서 죽고 말입니다.

아무튼 삼세(三世)를,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우리가 삼세를 통해서 무명이라 하는 무지무명(無知無明) 때문에 이와 같이 윤회(輪廻)하는 이것이 이른바 인연법(因緣法)입니다. 인연관(因緣觀)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나라는 것은 꼭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나가 똑같지 않구나. 지금 나와 또 미래의 나도 같지 않겠구나. 미련한 사람들은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나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단 말입니다.

과거 업식이 금생에 나와서 금생에 뭘 좀 더 배우고, 깨달으면 그때는 과거와는 좀 다르겠지요. 또는 금생에 업을 많이 지어노면 또 우리가 엉뚱한데 태어나가지고서 아, 지옥(地獄)도 간단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미래세는 금생과 같지가 않단 말입니다. 따라서 과거세에 천상(天上)사람이 금생에 사람으로 올 수도 있고 또 금생에 사람이 지옥도 갈 수가 있고 천상도 갈 수가 있고 그러는 것입니다.

금생에 어릴 때부터서 부처님 법을 독실히 믿고 또 법회 때마다 쫓아다닌 사람들은 틀림없이 과거 전생부터서 많이 닦아 나온 천상에서 온 그런 분의 후신(後身)이라고 볼 수가 있단 말입니다.


4) 관불관(觀佛觀)


관불관이라, 그 업장 많은 사람들, 부처님의 상호(相互)는 이것은, 우리가 뒤에 부처님 모시고 있지 않습니까? 부처님 상호는 그냥 보통 상호가 아닙니다. 32상 80종호라, 모든 덕을 무수한 세월 동안에 자기 몸뚱이를 몽땅 바치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 남은 동안에 남이 자기를 모멸도 하고 때리기도 하고 또는 사형도 시키고 이런 사람들도 미워하지도 않고 마치 예수 같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을 때도 자기를 핍박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모셨단 말입니다. 무아(無我)의 도리가 아니면은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무수한 세월 동안에 그 굶주린 호랑이한테 자기 몸을 몽땅 바치기도 하고 하여튼 부처님의 전생담(前生談)보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도안보시(挑眼布施)라, 자기 눈알을 누가 달라 하면은 그때는 눈알을 빼서 주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남한테 보시(布施)한 공덕으로 해서 32상 80종호 이와 같이 원만덕상(圓滿德像)이 되신 것입니다. 얼굴이 잘 생긴 사람들은 보통 또 역시 덕상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은 과거전생에 보시도 많이 하고 남한테 많이 베풀고 또 인욕(忍辱)도 많이 했단 말입니다.

검사가 되고 또는 경찰관이 돼 가지고서 남을 닦달하고 아, 그런 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이 이상하게 또 얼굴도 그냥 찌푸리고 한 것이 보통 많지 않습니까? 국회의원 되어서 다른 당을 그냥 그렇게 헐뜯고 그런 사람들은 또 아주 고약한 그야말로 매서운 눈초리가 생긴단 말입니다. 그런 것도 모두가 자기 업으로 다 그렇게 현재 되는 것입니다.

헌데 그 만덕(萬德)을 갖춘 과거전생에 무수한 보시행, 또는 육바라밀(六波羅密)을 닦아 가지고서 만덕을 갖춘 것이 부처님 상호입니다. 부처님 상호를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부처님을, 본래가 부처기 때문에 부처님을 닮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 때문에 부처님 상을 우리가 우러러 봐야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상만 보고 찬탄(讚嘆)해도 역시 찬탄 공덕이 굉장히 큰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부처님, 만덕을 갖춘 과거 무수한 무량(無量)세월 동안 육바라밀을 닦고서 희생을 하신 그런 부처님의 상호를 봄으로 해서 우리 업장(業障)을 녹인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업장 무거운 사람들은 그렇게만 해도 좋습니다. 부처님 상호를 보고서 1.000배 10.000배 한단 말입니다. 업장 무거운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하십시오. 업장 무거워서 마음이 성급해서 곧장 참회(懺悔)할 것을 못 참는 사람들은 부처님 앞에 가서 1.000배, 10.000배, 하시면서 참회를 하시기 바랍니다.


5) 수식관(數息觀)

 

이것은 산심(散心)이 많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산란스러운 마음이 그런 망상(妄想)이 많은 사람들은 호흡(呼吸)을 헤아리면서, 호흡을 헤아림으로 해서 우리 마음을 통일을 시킨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도 수식관(數息觀), 호흡을 헤아리는 것과 부정관(不淨觀), 우리 몸뚱이가 본래 더러운 것이다. 부정관을 초보인들 한테 굉장히 많이 권장을 하셨습니다.

수식관을 할 때도 그냥 덮어놓고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되풀이해서 헤아리는 것이 좋습니다. 불경(佛經)에 그렇게 돼 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 백이고 스물이고 마흔이고 모다 그렇게 많이 헤아리지만은 그렇게 많이 헤아리다 보면 다시 헤아리는 그 수치에 따라서 마음이 산란스러워 진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한 수치로 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되풀이해서 헤아리면 마치 알맞습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것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2. 사념처관(四念處觀)-사념주(四念住)


그 다음에는사념처관(四念處觀)이라.

이렇게 오정심관(五停心觀)으로 해서 우선 우리 기본적인 마음을 다스린단 말입니다. 컴컴한 사람들이 아, 참선(參禪)방에 막 들어가서 화두(話頭)들고 있다 그래서 공부가 쭉 쭉 잘 나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업장이 가벼운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보통은 우리가 기본적인 훈련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내가 탐심(貪心)이 많은가, 진심(嗔心)이 많은가, 산심(散心)이 많은가? 그렇게 해 가지고서 자기 업장(業障)이 무거운 쪽을 다스리는 공부를 해 가다가 들어가야 이른바 삼매(三昧)에 들어간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아함경(阿含經)에, 사아함경(四阿含經)에서는 그런 것을 이와 같이 아주 세밀하게 말했기 때문에 비파사나 하는 사람들도 역시 의의가 있어요. 그것이 모두가 다.

비파사나는 보통은 이 사념처관을 합니다.


1) 신념주(身念住)


 이것은 우리 몸은 원래 신부정(身不淨)이라. 부정한 것이다. 아까 부정관이나 거의 비슷합니다.


2) 수념처(受念處)

 

우리가 지금 받는 고(苦)나 또는 락(樂)이나 이런 것들 모두가 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한 것이다. 또는 모두가 다 지금은 락(樂)이라 하더라도 고(苦)라는 것도 역시 락(樂)도 끝나면 결국 고(苦)가 아닌가?

따라서 우리가 지금 몸을 받아 가지고 받는 것은 모두가 사실은 락(樂)은 그것은 잠시 순간 찰나뿐인 것이고 참다운 락(樂)은 없습니다. 모두가 고(苦)가 원인이 돼서 잠시간 즐거움 같은 것이 보이는 것이지 그것은 참다운 즐거움이 못된단 말입니다. 참다운 즐거움은 우리 번뇌(煩惱)를 다 없앤 극락(極樂)의 참다운 열반락(涅槃樂)이 되어야 참다운 즐거움이 됩니다. 이른바 해탈락(解脫樂)이 되어야 참다운 안락(安樂)입니다.


 3) 심념처(心念處)

 

심무상(心無常)이라, 우리 마음은 순간 찰나도 머무름이 없습니다. 이 분별시비(分別是非)는 모두가 다 무상(無常)하단 말입니다.


4) 법념처(法念處)

이것은 법무아(法無我)라. 좋다 궂다 또는 옳다 그르다 그런 시비도 역시 이것도 본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따라서 본래 아(我)가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이것은 비파사나에서 하는 것이고 아까 말 한 오정심관 이것은 사마타. 사마타, 비파사나 이것은 삼매(三昧)에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준비 과정입니다.

이렇게 해 가지고서 우리가 삼매에 들어가는 것인데 삼매에 그냥 들어가지 말라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참고로 이런 것을 우리가 자기 스스로 나는 번뇌(煩惱)가 어느 것이 무거운가? 자기 스스로 내성을 해가지고서 우선 자기 번뇌, 무거운 번뇌를 떼는 그런 쪽으로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비약적으로 바로 들어가는 것도 좋습니다.


3. 제법개공관(諸法皆空觀)


이것은 오온개공관(五蘊皆空觀)이라. 반야심경(般若心經)이나 금강경(金剛經)이나 반야경 사상은 대체로 오온개공관, 제법개공관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대체로 다 알으시지요.

오온개공(五蘊皆空).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하니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이 모두가 인생고인데 인생 고(苦)를 없애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이것은 오온이 다 비었음을 조견(照見)이라, 비추어 봄으로 해서 도일체고액이라. 인생 고(苦)를 여윈단 말입니다.

우리는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 중생들은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두가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이기 때문에 모두가 사실은 마음의 소조, 물질이 아닌 것을 우리가 스스로 그걸 잘 모르고서 내 몸뚱이도 있고, 또는 내 몸뚱이에 따르는 자기 권속도 있고 자기 재산도 있고 자기 감투도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오온개공(五蘊皆空)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감투나 자기 명예나 그런 것 가지고 싸울 만한 아무런 건덕지가 없습니다.

우리 부처님 법을 믿는 사람들로 해서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매일 매일 외우는 사람들로 해서 무슨 필요로 무엇 때문에 싸우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 할 때는 참 슬픈 일이 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자기한테나 누구한테나 아무 도움도 안 됩니다.


4. 실상관(實相觀)


우리 불자님들 오온개공관(五蘊皆空觀) 또는 앞에 있는 오정심관(五淨心觀) 또는 사념처관(四念處觀) 이런 것을 설사 않고서 그냥 비약적(飛躍的)으로 실상관(實相觀)에 막 들어가도 좋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지금 대승기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실상관을 막 들어와서도 좋은데 그렇더라도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허망무상(虛妄無常)한 것을 이것이 모두가 다 몽환포영(夢幻泡影)이다. 이렇게 분명히 볼 줄은 알아야 된단 말입니다.

그래야지 그렇지 않으면 괜히 교만심(驕慢心)이 됩니다. 내가 원래 부처인데 내가 부처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는가? 이래 버리면 자기가 그냥 그것 좀 안다고 그래서 지금 자기가 공부가 많이 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것 좀 알아서 공부가 상당히 됐다고 생각하고서 거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증상만(增上慢 )이라. 이런 사람들은 고칠 병이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가장 두려워 한 것이 무엇인고하면 못 깨닫고 깨달았다 생각하고 어느 수승한 경계를 못 이르러서 있으면서도 자기가 어느 수승한 경계(境界)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이런 증상만, 증상만을 제일 부처님께서는 경계를 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 하면은 야호선(野狐禪)이라. 여우란 놈이 그냥 거짓말 잘 하는 것 아닙니까? 꾀가 많아서, 여우란 놈이 거짓말 잘 하듯이 자기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증명(證明)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 없는 것이 아닙니다.

불경(佛經) 조금 알아놓고서 불교(佛敎)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선방(禪房)에 몇 철 다녀서 뭐 좀 알음알이가 생기면 그때는 상당히 공부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굉장히 미련한 사람입니다. 미련한 사람인데도 70년 동안 이 삼동결제(三冬結制) 또는 여름결제를 한 번도 저는 빠뜨린 적이 없습니다. 제가 장담이 아닙니다. 이것은, 3년 결사도 아마 다섯 번 이상은 저는 했습니다. 그랬어도 제 공부가 지금 아직도 멀었습니다. 제가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그런 말씀을 제가 드리는 것입니다. 무던히 애는 썼습니다.

부처님 법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본래가 부처라고 해도 우리 범부(凡夫)가 과거전생(過去前生)부터서 얼마나 업장(業障)을 많이 지었는가? 금생에 잘못 배우고 잘못 느끼고 잘못 행동하고 잘못 생각하고 이런 것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것을 온전히 녹일라면은 오랜 동안 삼매(三昧)에 잠겨야 됩니다.

아까 말한 바와 같이 화두(話頭)를 하든 염불(念佛)을 하든 주문(呪文)을 하든 그 무념(無念)이 돼서 무념 가운데 보임수행(保任修行)을 오래 해야 진여불성 공덕이 나온단 말입니다.

삼명육통(三明六通)이나 만덕(萬德)이 분명히 다 갖추고 있는 것인데 우리가 그런 공덕(功德)이 못나오는 것은 왜 못나오는 것인가? 저 같이 제대로 자기의 습관성(習慣性)을 다 미처 못 뽑았단 말입니다.

과거세에 대해서 훤히 트여 버리는 숙명통(宿命通)을 다 하고 또는 미래세에 대해서 영원히 트여 버리는 천안통(天眼通)을 다 하고 말입니다. 모든 번뇌를 다 뿌리를 뽑아버리는 누진통(漏盡通)을 하고 이렇게 해야 신통자재(神通自在)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못 하면은 그때는 공부 했다고 내세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실상관(實相觀)이라. 실상관 이것은 우주를 비약적으로, 부처님께서 대승경전에서 말씀하신 능가경(楞伽經)이나 화엄경(華嚴經)이나 또는 법화경(法華經)이나 말입니다. 그런 경전에서 말씀하신 그런 경계를 바로 그때는 관(觀)한단 말입니다.

그런 경계는 어떠한 것인가? 아까 제가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두가 다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이렇게 관(觀)하는 것 이것이 실상관(實相觀)입니다.

 

*일진법계관(一眞法界觀)이라, 

우주는 모두가 다 진리(眞理)만으로 충만된 하나의 법계(法界)란 말입니다. 이렇게 관(觀)한단 말입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두가다 진여불성(眞如佛性) 뿐이다. 이것이 일진법계관(一眞法界觀)입니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이라, 

이것도 역시 모두가 다 하나의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진여불성 뿐인 것이고 다른 것은 조금도 없다.

우리 인간이 보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虛妄)한 제법이 공(空)인 것이다. 제법(諸法)이 공(空)이고 따라서 이것은 제법이 공인데 다만 공이 아닌 공의 정체가 바로 진여불성이란 말입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중생(衆生)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지만은 그것은 중생 견해에서 그런 것이고 반야의 지혜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제법이 공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다만 공(空)이 아니라 진여불성(眞如佛性), 중도실상(中道實相)으로 충만 돼 있는 그런 지혜가 바로 반야바라밀이다.


 *여삼매(眞如三昧)라.

이것도 역시 진여불성으로 충만 된 그런 자리를 우리가 명상(瞑想)하는 그런 삼매가 진여삼매입니다.

 *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라.

모두가 다 불상(佛相), 모두가 다 부처님의 그런 하나의 상(相),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부처님이라는 하나의 실상(實相). 부처님이라 하는 하나의 실상을 관하는 삼매가 일상삼매(一相三昧)입니다.

일행삼매(一行三昧)는 무엇이고 하면은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다’ 이런 생각을 조금도 끊임없이 생각 생각에 지속시켜 나가는 것이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육조단경(六祖壇經)에도 일행삼매(一行三昧) 말씀이 여섯 군데나 있습니다. 또는 4조 스님도 마찬가지고 5조 스님 말씀에도 그런 법문에도 있습니다.


* 해인삼매(海印三昧)라.

마치 바다 가운데, 맑은 바다 가운데 만상(萬象)이 다 비춰오듯이 우리 마음이 청정무비(淸淨無比)해서 모든 것이 조금도 이루어지지 않고서 제대로 비추어지는 따라서 우리 불성(佛性)이 만상을 제대로 다 갖추고서 그렇게 갖추어 있는 지혜(智慧)를 발휘하듯이 모든 존재가 다 우리 마음의 맑은 마음 바다에 제대로 갖추어지는 삼매가 해인삼매입니다.


* 금강삼매(金剛三昧)라.

이것은 다시 동요할 수 없는 다시 움직일 수 없는 영생불멸(永生不滅)의 영원적(永遠的)인 삼매라. 삼매(三昧)는 무엇인가? 우리 마음이 가장 고요해서 조금도 분별시비(分別是非)가 없이 그 불성(佛性), 우리 본래적인 생명 자체에 몰입되어 있는 명상(瞑想) 이것이 삼매입니다.


* 여래선(如來禪)이라.

부처님께서 하신 그런 선(禪). 즉 말하자면 여래선, 부처님께서 들어가신 그러한 명상이란 말입니다.


* 조사선(祖師禪)이라,

조사가 들어가는 그러한 명상이란 말입니다.


* 자성선(自性禪)이라,

우리 자성은 무엇인가? 사람 자성도 불성(佛性)이고 다른 동물의 본성(本性)도 불성이고 자연계(自然界)도 불성이고 지구(地球)나 모두의 본성은 다 자성(自性)입니다. 더 구체화 시키면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성이나 자성이나 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지금 제가 앞에 제목으로 내세운 순선(純禪) 이것은 바로 자성선(自性禪)을 의미합니다.


부질없이 송(宋)나라 이후에 있어서 조사선(祖師禪), 여래선(如來禪)을 또 굉장히 들먹여서 싸움을 많이 했단 말입니다. 여래선 그것은 별것도 아닌 것이고 조사선이 돼야 바로 옳다. 이래가지고서 부질없는 논쟁(論爭)을 했습니다. 이런 것은 사실은 희론(戲論)입니다. 희론 이라는 것은 유희할 희(戲)자, 논리란 말씀 론(論)자, 희론(戲論)이란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달마(達磨)때부터 육조(六祖)스님 때까지는 조사선, 여래선이란 구분이 없습니다. 또는 마조(馬祖)스님이나 임제스님이나 백장스님이나 황벽스님이나 그런 때, 그런 당(唐)나라 때도 조사선, 여래선 그런 말도 그런 구분이 없습니다. 여래선이라는 말은 그전에 다 있습니다만은 그런데 송나라 때 가서 조사선을 들먹여 가지고서 여래선보다도 높다. 이렇게 말 했단 말입니다.

진리(眞理)에 대해서 별로 자기 생명(生命)을 걸고서 공부하지 않은 분들이 남의 말 꼬리만 따라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지금은 도태가 돼야 됩니다. 지금 무서운 세대 아닙니까? 이 정보(情報)란 것은 그 무시무시한 정보의 혼란(混亂) 가운데서 꼭 순수(純粹)한 정보, 부처님의 정법(正法), 부처님께서 어떻게 했던가? 이런 것을 분명히 알아서 부처님께서 하신 대로 정통조사(正統祖師)가 말씀한 대로 우리가 공부해야 됩니다.

우리가 공부를 좀 했으면은 내 공부가 정통조사가 말한 대로 바로 들어맞는가 안 들어맞는가? 이와 같이 점검을 해야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선(禪) 그러는 것은 적어도 오온개공관(五蘊皆空觀) 또는 제법개공관(諸法皆空觀)까지도 다 준비과정으로 몰아넣고서, 이 4번에 있는 실상관(實相觀), 일진법계관(一眞法界觀) 또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 진여삼매(眞如三昧), 일상삼매(一相三昧), 일행삼매(一行三昧), 해인삼매(海印三昧), 금강삼매(金剛三昧), 여래선(如來禪), 조사선(祖師禪), 자성선(自性禪) 이것이 모두가 다 똑같은 하나의 참다운 참선법(參禪法)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선 한다고 생각할 때는 이렇게 돼야 참선이 됩니다. 다시 바꿔서 말씀 드리면은 우리 마음이 지금 현재는 어떤 마음이든지 간에 우리 마음의 본래 자성, 본래 불성, 자성, 불성은 똑같습니다. 우리 마음이 본래 우주(宇宙)에 충만(充滿)해 있는 모든 존재가 하나의 불성(佛性)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만 공덕(功德)이 다 원만히 갖추고 있다.

이렇게 느끼면서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실상관이고 일진법계관이고 반야바라밀이고 진여삼매고 일상삼매고 일행삼매고 또는 해인삼매고 금강삼매고 여래선이고 다 그러는 것입니다.

      

오종선(五種禪)


그 다음에는 선(禪)의 종류(種類). 이것은 도서(都序) 여러분들 강원에서 배우신 분들은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를 알으시지 않습니까? 도서가 비록 사실 쉽게 배우기는 해도 굉장히 위대한 논장(論藏)입니다. 화엄경(華嚴經)을 실은 마스터 하고서 사실은 배우는 것이 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선교일치(禪敎一致)를 말하는 것이 즉 말하자면 이 도서에가 들어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보조국사(普照國師), 보조어록도 이 도서에서 참고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도서에서 있는 이른바 선(禪)의, 참선(參禪)의 도리란 말입니다.


1) 외도선(外道禪)


그래서 외도선(外道禪)이라. 외도선, 그러니까 우리가 참다운 선(禪)은 아까 실상관에서 말한 일진법계관(一眞法界觀)이나 일상삼매(一相三昧)나 일행삼매(一行三昧)나 여래선(如來禪)이나 금강삼매(金剛三昧)나 그러한 것이 참다운 선(禪)인데 우리가 구태여 다른 명상법(瞑想法)에다가 비춰봐야 쓴단 말입니다.

그래서 외도선(外道禪)은 무엇인고 하면은 대이계(帶異計) 흔상염하이수(欣上厭下而修)라. 대이계라, 이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무슨 재주를 구할라 하고, 또는 무슨 명상 하면은 가족적으로 화합이 된다. 사람 사람끼리도 서로 좋아진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세간(世間)적인 기능적(機能的)인 문제를 목적으로 하고서 그 윗 것은, 나쁜 것을 싫어하고, 그보다 더 수승한건 좋아하는 그런 마음에서 닦는 이른바 일반적인 명상법은 모두가 다 이것은 외도선(外道禪)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분명히 그 한계를 알으셔야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법의 진여불성 자리를 모르고서 그냥 자기 몸이 좋아진다거나 또는 기(氣)운동 하면은 아, 호흡이 좋아져서 머리가 맑아온다든가 말입니다.

이런 저런 하나의 그 유위법(有爲法)적인 세간적인 기능을 위해서 그런 어떤 재주를 위해서 산에 가서 공부를 하면은 아, 영통(靈通)해 가지고서 뭘 좀 많이 안다든가 말입니다.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외도선(外道禪)에 해당합니다.

지금 마인드 콘트롤이다 모다 그런 것은 사실은 외도선에 모두가 다 해당하는 셈입니다. 범주로 봐서는 말입니다.


2) 범부선(凡夫禪)


그 다음엔 범부선(凡夫禪)이라. 이것은 불법(佛法)문중에 들어 와서 정신인과(正信因果) 역이은염이수(亦以欣厭而修)라.

이것은 무슨 뜻 인고 하면은 불법문중에 들어 와서 비로소 인과(因果)를 믿는단 말입니다. 인과를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아무리 복(福)을 구할 라고 애를 써도 먼저 복을 지어야 복을 받지 않습니까? 착한 행동을 해야 복을 받는 것이지 아무렇게나 해놓고서 남을 미워하고 또는 남한테 진심(嗔心)을 내고 남을 짓궂이 생각하고 이런 사람들이 복이 될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따라서 인과라, 선인락과(善因樂果)라. 우리가 착한 행동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필연적으로 안락(安樂)을 받는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할 때에 탐(貪), 진(嗔), 치(痴) 삼독심(三毒心)을 미처 못 떠나고서 탐욕(貪慾)을 부리고 진심(嗔心)을 내고 어리석은 마음을 품었다고 생각할 때는 아, 그때는 필연적으로 우리가 고(苦)를 받는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서 닦는 선법(禪法)이 이른바 범부선(凡夫禪)입니다.


3)소승선(小乘禪)


그 다음에는 소승선(小乘禪)이라. 이것은 오아공(悟我空) 편진지리이수(偏眞之理而修)라. 이것은 나라는 존재가 부처님 법을 조금 더 알아서 말입니다. 알아가지고서 나라는 것이 원래 오온(五蘊)이 합해져서 내가 되었거니 원래는 참다운 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공(我空)을 느끼고서 느꼈지만은 다른 존재, 다른 존재는 그대로 있는 것이겠지? 이렇게 생각하고서 닦는 것 이것이 소승선이란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라는 존재(存在)가 원래 있지가 않은 것인데, 따라서 나라는 존재가 이대로 꼭 존재한다. 나라는 것이 꼭 이렇게 있다. 이렇게만 생각 할 때는 그때는 아직은 닦아도 소승선입니다.

자기가 염불(念佛)을 하건, 또는 화두(話頭)를 참구하든 그런 것은 별도의 문제라 하고라도 그와 같이 자기라는 것을 있다고 생각할 때는 아직은 소승선이란 말입니다.

자기가 다 공(空)했다고 생각을 하지만은 아직은 결국은 다른 것은 존재한다는 그런 생각을 미처 못 여의고서 닦는 선(禪)이 소승선인 것이고


4) 대승선(大乘禪)


대승선(大乘禪)은 이것은 오아법이공(悟我法二空) 소현진리(所顯眞理) 이수자(而修者)라. 이 뜻은 무엇 인고 하면은 나만 빈 것이 아니라 일체존재(一切存在), 우리 주변에 있는 산이나 냇이나 또는 무슨 다른 학설(學說)이나 다른 어떤 책이나 말입니다. 이런 것이 모두가 본래(本來)로 허망(虛妄)한 것이다.

이렇게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떠나서 이런 것이 다 비어있다. 비어 있고 참말로 있는 것은 진리(眞理)뿐이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닦는 것이 대승선인 것이고,


5) 최상승선(最上乘禪)


그리고 그 다음에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 이것은 모두를 다 포괄해서 말입니다. 이 법문이 좀 어려우나 이것은 아까 도서에도 있고, 보조국사어록(普照國師語錄)에도 아주 역력히 있는 법문이고, 또 대승불교(大乘佛敎)에도 이와 같이 표현 안했다 하더라도 이런 뜻이 다 포함돼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설명을 드립니다. 이런 것은 외두면은 참 좋습니다.

약돈오자심(若頓悟自心), 만약 자기 마음이 본래 청정한 것을 문득 깨닫고서 이것이 약돈오자심(若頓悟自心) 본래청정(本來淸淨) 거까지 풀이입니다. 만약 우리 마음이 본래 청정한 것을 문득 깨닫고서,

원무번뇌(元無煩惱)라. 문득 깨달아 버렸으니까 그때는 그야말로 본래 번뇌가 없단 말입니다. 본래, 우리가 번뇌가 있다는 것은 나한테 자기의 본래 참다운 성품(性品), 불성(佛性)을 깨닫지 못 할 때에 번뇌가 있다고 보는 것이지 우리가 자기 본래성품(本來性品)이 청정한 것이다. 이렇게 이론적으로라도 알았으면은 그때는 아, 나한테는 본래는 번뇌가 없는 것이 구나 이렇게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루지성본자구족(無漏智性本自具足)이라. 조금도 때 묻지 않는 그 부처님의 지혜(智慧)가 본래 스스로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다만 우리가 제대로 삼매(三昧)를 못 닦아서 결국은 광휘(光輝)를 발현을 못한 것이지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은 본래 내가 청정한 것이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무루지성, 때 묻지 않는 반야바라밀 지혜가 다 원만히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차심즉불(此心卽佛)이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필경무이(畢竟無異)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여서 필경에 다르지 않는단 말입니다. 부처와 더불어서 똑같단 말입니다.

그래서 의차이수자(依此而修者) 이렇게 해서 닦는 것이 비로소 ‘최상승선(最上乘禪)’이란 말입니다. 또한 이것이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이고 이른바 일행삼매(一行三昧)고 또는 진여삼매(眞如三昧)고 해인삼매(海印三昧)고 금강삼매(金剛三昧)고 한단 말입니다.



수행(修行)의 계제(階梯)


제 5페이지입니다.

이것은 수행(修行)의 계제(階梯)입니다. 우리가 본래로 부처라 하더라도 업장(業障)을 많이 지어놔서 나쁜 버릇을 많이 붙여 놔서 이것을 녹여 들어갈 때는 상당히 어느 순서가 필요합니다.

그러게 이것도 역시 근본불교(根本佛敎)에 있는 것을 다 원용(援用)을 했습니다. 수행의 계제. 닦아 나가는 하나의 순서란 말입니다.


1. 사선근(四善根)


첫 번째는 사선근(四善根)이라.

이것은 사가행(四加行)이라고도 합니다. 우리 범부 중생이 견성오도(見性悟道)까지 들어갈 때에 4가지 단계 한계를 말 한 것입니다. 이것은 구사론(俱舍論), 또는 성실론(成實論), 유식론(唯識論), 지도론(智度論) 이런 논장에 다 들어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제 말씀은 조금도 없습니다. 부처님이나 조사스님 말씀을 저는 그대로 제가 조금도 보태지 않고 옮기고 있을 뿐입니다.

사선근(四善根),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범부중생(凡夫衆生)이 성불(成佛)까지 가는 그런 과정이 4단계인데 맨 처음에가 난법(煖法)입니다.


1) 난법(煖法)-명득정(明得定)

난법(煖法)에는 명득정(明得定) 그럽니다. 이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가 참선(參禪)이나 염불(念佛)이나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우리 마음이 통일(統一)이 되겠지요? 고요해지면은 그때는 고요한 가운데서 우리 마음이 시원해 옵니다. 시원한 맛을 다소라도 봤으면은 참선을 자꾸만 할 라고 하는 것인데 시원한 맛을 제대로 못 봤으면은 참선은 항시 괴롭기만 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명득정(明得定)이라. 밝은 기운이 들어 와서 자기 가슴도 시원하고 등골도 시원하고 머리도 시원하고 눈도 시원하단 말입니다. 그런 것을 자기 몸에 대해서 별로 무게를 느끼지 않습니다. 가뿐하니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공부하는 것이, 참선하는 것이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참선하는 것이 사실은 제일 쉬운 것입니다. 제일 쉽고 제일 행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드디어는 그걸로 해서 우리가 깨달아서 우리 본래 성품, 우리 고향 자리로 들어가지 않습니까?

이 난법(煖法)상, 명득정(明得定) 그렇게 시원스럽게 되는 것이고,


2) 정법(頂法)

2에 있어서는 정법(頂法)이라. 이마 정(頂)자. 이것은 우리 마음이 맑아지면은 욕심도 차근차근 줄어집니다. 진심(嗔心)도 차근차근 성숙해 집니다. 우리가 성을 잘 내고 또는 욕심을 많이 내고 하는 사람들은 그만치 마음이 어두운 증거입니다.

마음이 개운하고 시원스러워 지면은 다른 사람이 모두가 다 곱게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같은 달도 우리가 슬퍼서 보면은 달도 아, 울어서 보이고 말입니다. 또 우리가 기분 좋아서 보면은 달도 미소를 띠고 보이지 않습니까? 그와 똑같은 것입니다.

정법(頂法), 이것은 우리 욕심이나 탐심이, 욕심이나 진심이 줄어져서 훨썩 더 맑아온단 말입니다.

이런 때는 맑은 기운 가운데서 그때는 어렴풋이 빛이 비춰옵니다. 빛이 비춰온단 말입니다. 왜 빛이 비춰오는 것인가? 우주란 것은 사실은 ‘빛’ 뿐입니다.

아까 제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에서 말한 비로자나란 것은 무엇 인고 하면은 광명변조불(光明遍照佛)이라. 부처님은 그 청정광명이, 눈에 부신 눈부신 광명이 아닙니다. 그런 광명이 아니라 청정적광(淸淨寂光), 청정광명(淸淨光明)이 우주에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우주에 충만해 있는 것인데 그런 광명 가운데서 그 공덕(功德)이 하도 많은 무량공덕(無量功德)이기 때문에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별이요, 은하계요, 태양계요, 또는 나요, 너요, 자연계요 모두가 다, 그와 같이 우주에 들어 있는 순수(純粹)에너지, 순수 에너지의 광명(光明)으로 부터서 이 만유(萬有)가 나온단 말입니다.

만유가 나왔다가 종당에는 다시 그와 같이 광명으로 돌아갑니다. 만법(萬法)이 귀일(歸一)이요, 또는 일(一)이 다시 만법(萬法)으로 된단 말입니다.

우주란 것은 그야말로 신비(神秘)에 차 있습니다. 청정무변한 진여불성이 광명으로 부터서 다시 성겁(成劫)이 되고, 또는 만유가 사는 주겁(住劫)이 되고 다시 엔트로피(entropy)가 증장 돼서 파괴되고 말입니다. 그때 가선 텅텅 비어지는 제로(zero)가 된단 말입니다. 제로가 되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광명은 그대로 충만해 있습니다. 무색계(無色界)는 그대로 있습니다. 물질이 아니니까. 따라서 무색계에는 또 역시 중생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2. 정법(頂法)이라, 이것은 맑은 기운이 조금 더 증장이 돼서 더 불어나서 밝은 빛이 솟아 온다 말입니다. 솟아 오다가,


3) 인법(忍法)

제3에 가서 인법(忍法)이라. 인법(忍法), 이것은 모든 것을 잘 참는단 말입니다. 아직은 성자(聖者)가 아니기 때문에 온전히 다는 못 참아도 그래도 상당히 모든 것을 잘 참습니다.

누가 기분 나쁜 소리해도 아, 모두가 허망(虛妄)한 것이지 않는가? 누가 지금 따귀를 까닭 없이 때려도 그때는 ‘아, 이런 허망한 내 몸도 허망하고 그대도 허망한 것이지 이거 별 것이 아니지 않는가? 딱 참아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인법(忍法)이라. 인순정(印順定)이라, 이때는 우리가 경(經)을 그렇게 많이 안 배워도 경만 보면 문자만 봐도 아, 그렇구나, 그렇구나  이렇게 알아진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신비부사의(神秘不思議)한 것입니다.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이 불경(佛經)을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을 다 보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마음이 맑아서 그 마음의 무량공덕(無量功德)이 솟아 올라와서 그와 같이 무수한, 무수무량의 법문을 다 알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성자(聖者)가 못되어서 인법, 그 인순정 인데 이것은 모든 진리에 대해서 별로 헤매지 않는단 말 입니다. 불경을 본다 하드라도 안 배웠어도 ‘아, 이것은 옳구나, 그르구나 그냥 분별이 다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빛도 아까 정법 보다는 그때는 더 빛나고 말입니다.


4) 세제일법(世第一法)-무간정(無間定)

그러다가 4에 가서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

인간 세상에서는 즉 말하자면 성자(聖者)가 못된 범부(凡夫)의 차원에서는 제일 높은 법이 이 4의 세제일법(世第一法)입니다.

그래서 무간정(無間定)이라. 번뇌가 사이에 낄 수가 없는 명사이기 때문에 무간정(無間定) 그럽니다. 그래서 무간정에 들면 그때는 다만 시간문제인 것이지 꼭 성자가 된단 말입니다. 꼭 도인(道人)이 됩니다. 꼭 이래야 불성(佛性)을 본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세제일법 일때는 그때는 빛이, 빛이 참말로 온전한 빛을 비춰온단 말입니다.

제가 이런 것을 너무 말씀드리면은 아, 빛을 안 보고도 봤다고 거짓말을 할 사람들이 나올 염려가 있기 때문에 제가 더 말씀은 않습니다.


2. 구차제정(九次第定)


이렇게 됐을 때는 선정에 들어갑니다. 선정에, 선정은 사선정(四禪定), 사공정(四空定) 멸진정(滅盡定) 그래서 구차제정이라 합니다.


1)사선정(四禪定)

사선정은 초선정(初禪定) 이선정(二禪定) 삼선정(三禪定) 사선정(四禪定). 이것이 사선정(四禪定)입니다.

2) 사공정(四空定)

그리고 사공정은 공무변처(空無邊處) · 식무변처(識無邊處) · 무소유처(無所有處) ·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이것이 사공정입니다.

그리고 모든 번뇌를, 나라는 뿌리나 모든 무명 번뇌의 뿌리를 뽑아 버리는 선정, 그러한 명상이 이른바 멸진정(滅盡定)입니다.

그래서 사선정(四禪定) 사공정(四空定) 멸진정(滅盡定) 합해서 구차제정(九次第定)입니다.


제가 아함경(阿含經)을 연구해 봤더니 아함경 가운데는 구차제정(九次第定) 말씀이 41번이나 들어 있습니다. 41번이나, 그렇게 많은 것을 본다고 생각할 때에 얼마나 부처님께서 이 구차제정을 역설했던가를 알 수가 있겠지요.

부처님께서 열반(涅槃)들으실 때도 구차제정에 들어서 열반 들으시고 말입니다. 성도(成道)하실 때도 구차제정에 들어서 성도를 하셨다는 것이 선교사에 나와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 말씀은 절대로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할 때도 정다웁게, 헛것을 깨달아서는 안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제대로 깨닫기 위해서는 꼭 구차제정을 거쳐서 선정(禪定)을 거쳐서 깨달으셔야 됩니다.

물론 이것도 하루에 깨달은 분도 있고 몇 십년 가도 못 깨달은 분이 있고 또는 몇 생(生)을 가도 못 깨달은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여튼 순서만은 이런 것이니까 빠르고 더디 가는 그 사람 근기에 매였습니다. 얼마만치 용맹정진(勇猛精進)하는가. 용맹정진 하는 분들이 이정만 되어도 이레만에 깨닫고 다 멸진정(滅盡定)을 성취할 수가 있겠지요. 부처님 가르침은 그와 같이 어느 때 어느 순간에나 우리가 비약(飛躍)할 수 있는 대자유의 길이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산꼭대기에서 한 발도 움직이지 않고서 거기서 살다가 죽어라. 그렇게 운명 지워졌다 하드라도 그렇더라도 우리가 그 자리에서 바로 성불(成佛) 할 수가 있습니다.

사형수가 사형대에 지금 내가 올라 있다. 이런 찰나에도 말입니다. 정말로 마음이 사무쳐서 내 본래면목(本來面目)은 아무 번뇌(煩惱)가 없는 석가모니(釋迦牟尼)와 똑같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이렇게 100%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사형대 위에서도 순간 깨달아서 그래서 우리가 주검을 받지 않고서 영생(永生)의 길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 법입니다.

이 구차제정(九次第定)에 관해서 이 쪽, 이 별표가 있습니다. 별표, 여기는 아함경(阿含經)에 들어있는 아함경은 부처님 육성 같은 경입니다.

아함경에 들어 있는 제정중(諸定中), 모든 선정 가운데서 구차제정 이것이 최제일(最第一)이라. 최제일, 또는 최대(最大)라, 가장 크고 최상(最上)이라, 또는 최승(最勝)이라, 가장 수승하고 또는 최묘(最妙)라, 가장 신묘하다고 설했단 말입니다.

얼마만치 중요하기에 최제일, 최대, 최상, 최승, 최묘라고 이렇게 중언부언(重言復言)을 해서 설명을 하셨겠습니까?

중아함경(中阿含經) 168 의행경(意行經)에 들어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4아함경 중에서 아함경이 4권으로 돼 있습니다만은 4아함경 중에서 사선, 사공정, 멸진정을 성취해서 우리가 제대로 진여불성 자리를 깨닫는다는 그 법문이 마흔 한군데가 있습니다.


3)멸진정(滅盡定)

멸진정, 멸진정(滅盡定)을 설명을 합니다.

멸수상정(滅受想定). 색온(色蘊) 또는 이에 염오된 사온(四溫), 사온은 수상행식(受想行識) 아닙니까? 염심(染心)을 멸진(滅盡)하고 정심(淨心)에 주(住)하여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일대아(一大我)를 성취하는 삼매(三昧)가 멸진정입니다.

즉 말하자면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라 하는, 나라 하는 근본 뿌리, 우리 범부성의 근본 뿌리, 생사윤회(生死輪回)하는 근본 뿌리를 몽땅 없앤단 말입니다.

없애고서 참다운 진리의 본체, 진리의 고향에 들어가는 삼매가 멸진정(滅盡定) 또는 멸수상정(滅受想定) 그럽니다.

따라서 어느 도인이나 제대로 멸진정에 들어가야 비로소 참다운 도인이란 말입니다. 아무리 똑똑한 짓을 하고 아무리 큰스님 말을 듣는다 하더라도 멸진정에 못 들어 갔으면은 참다운 성자는 아직은 못 돼는 것입니다.


선정(禪定) 10종공덕(十種功德)


그 다음 6 페이집니다. 이것은 참선(參禪)의 10가지 공덕(功德)입니다.

이런 것이 공덕이니까 그때그때 외 두시고서 참선을 절대로 어렵다고 생각을 말으십시오. 우리 마음이 가장 순조롭게 들어가는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부처님 법은 대자유인의 법인 것이고 우주의 법도에 따르는 법이기 때문에 가장 온당한 법입니다. 온당한 법이나 계행(戒行)을 지키지 않고 닦을 라고 하면 그때는 연목구어(緣木求魚)입니다. 증사(蒸砂)가 작반(作飯)입니다. 능엄경에 있는 법문입니다. 증사(蒸砂)가 작반(作飯)이란 것은 모래를 삶아서 밥을 짓는다는 말입니다. 모래를 삶아서 밥이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도덕적 도덕률(道德律)을 지키지 않고서 계행을 지키지 않고서 아무리 참선해서 애써도 그때는 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법은 준엄한 것입니다. 엄숙한 것입니다.


1. 안주의식(安住儀式)


안주의식이라, 이것은 참선함으로써 자기 행동도 맑아지고 또는 예의도 밝아집니다. 참선이라는 것이 좀 어렵지만은 아, 몸을 단정히 하고 그야말로 계행도 밝아야 참선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때는 자기 행위가 말입니다. 예식도 바르고 다 그러겠지요.


2. 행자경계(行慈境界)


행자경계(行慈境界)라. 참선을 좀 했다고 하면은 그때는 불성에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자비(慈悲)스럽습니다. 남한테 다 양보하고 항시 그야말로 참 남한테 좋게 하고 말입니다. 보시(布施)도, 보시도 자기 힘 따라서 하고 이런 것이 이른바 자비수행자 경계입니다.


3. 무번뇌(無煩惱)

무번뇌(無煩惱)라, 번뇌가 없단 말입니다. 아, 불성에 가까워지니 번뇌가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견성오도(見性悟道)하면 다시 말할 것도 없지만은 견성오도를 미처 못 했다 하드라도 들어가는 그런 과정에 있어서도 차근차근 그때는 번뇌가 줄어진단 말입니다. 


4. 수호제근(守護諸根)

수호제근(守護諸根)이라. 참선 하면은 귀도 더 밝아지고 눈도 밝아지고 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 참선하면 몸을 버린다.’ 참선하는 사람들이 그 걸망에다가 약봉지나 지고 다니고 그러면은 참선을 바르게 안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참선하면 모두가 다 수호제근(守護諸根)이란 말입니다. 피가 맑아진다고 생각할 때에 피가 맑아지면 가슴도 맑아지고 또는 머리도 맑아집니다. 그리고 어느 기능도 훨썩 좋은 것입니다.

여기에 계시는 어느 보살님 한 분도 제가 제 눈으로 지금도 보고 있고 지금도 상당히 여러 해 동안에 제가 느끼고 있습니다만은 그 전보다 훨썩 건강하고 훨썩 모든 기능이 더 우수해 진 것을 본인도 느끼고 있고 저도 옆에서 보고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5. 무식희락(無食喜樂)

무식희락(無食喜樂)이라. 사실은 참선 할 때는 그 법희선열(法喜禪悅) 때문에 안 먹어도 별로 배고프지도 않단 말입니다. 꼭 음식만으로 해서 우리 몸뚱이를 자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덜 먹는다 하더라도 정말로 공부를 부지런히 한다고 생각할 때는 며칠 안 먹어도 그때는 별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40일 단식(斷食)한 분도 있고 한 달 단식한 분도 있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나 꼭 여러분들 더러 단식을 하시라는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여튼 같은 것을 먹는다 하더라도 참선하면서 자시면은 훨썩 더 그것이 모두가 다 살로 가고 피로 갈 것이고 그러나 너무 많이 먹으면 그때는 참선에도 해롭고 몸에도 해롭습니다. 가급적이면은 적게만 자시고 깨끗이 자셔야 됩니다.

오신채(五辛菜), 고기 이런 것은 안 먹어야 됩니다. 우리 승방(僧房)에서도 그런 것을 먹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존엄하게 생각을 않는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거짓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꼭 우리가 공부하기 쉽게 시리 우리 몸에도 좋고 마음에도 좋고 누구한테도 좋고 말입니다.

우리가 육식(肉食)한다고 생각할 때는 손자비(損慈悲)라, 우리 자비심을 손상한단 말입니다. 악귀나 나쁜 귀신들은 그런 나쁜 고기냄새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천성원리(天聖遠離)이라. 아, 훌륭한 그야말로 참 좋은 신(神)들은 다 싫어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하나도 찌꺼기가 없습니다.

우리가 맑은 마음으로 부처님 경전(經典)을 본다고 생각할 때에 정말로 어떻게 고마운지 눈물이 한없이 솟아나올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고맙습니다. 꼭 우리가 성불(成佛)하는 길, 우리 몸에도 마음에도 다 좋습니다. 누구한테나 좋은 길입니다.


6. 원리애욕(遠離愛慾)

원리애욕(遠離愛慾) 이라, 애욕을 떠난단 말입니다. 이성(異性)적인 욕심은 우리가 마지막까지 범부(凡夫)성을 뗄 때가지 따라다닙니다. 그렇게 지겨운 것입니다. 이성간의 욕심이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달라붙는 것이니까 우리가 비로소 견성오도를 정확히 하고 그 다음에 보살 제2지(菩薩 第二地) 이욕지(離慾地)라, 이욕지가 돼야 비로소 온전히 이 성욕을 뗍니다. 그러니까 무서운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재가불자님들은 무리를 말으시고 내외분, 내외분 정조를 지키시고서 그렇게 지내시면서 같이 동지가 돼서 불법을 탁마(琢磨)를 하시기 바랍니다.


7. 수선불공(修禪不空)

수선불공(修禪不空)이라. 우리가 제법공(諸法空)을 닦으면은 공(空)에 떨어진다. 무기공(無記空)이다. 그렇게 염려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적으로 따져서 그런 것이지 우리가 닦아 나갈 때는 공(空)에 안 떨어진단 말입니다.

수선불공(修禪不空)이라, 왜 그런고 하면은 공(空)의 정체가 공(空)이 아니란 말입니다. 공(空)이 어디가 따로 공(空)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空)의 정체는 바로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불성이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 보는 것만 다 부정(不正)을 해서 우리가 제법공 도리가 되면 그때는 바로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불성을 증명한단 말입니다. 그래 수선불공(修禪不空)이라.


8.해탈마견(解脫魔羂)

해탈마견(解脫魔羂)이라, 모든 우리 마음을 얽어매는 삿된 것을 우리가 다 풀어버린단 말입니다.


9.안주불경(安住佛境)

안주불경(安住佛境)이라. 부처님의 위없는 행복의 경계에 우리가 편안히 머문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편안히 하는 것 가운데서 다른 것은 편안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돈도, 지위도, 감투도, 이성도 어느 것도 우리 마음을 참말로 편안히는 못 합니다. 오직 우리 마음이 우리 생명의 본래의 자리, 진여불성에 안주할 때만이 비로소 우리는 참다운 안주(安住), 안심(安心)과 안락(安樂)이 있습니다.


10. 해탈성숙(解脫成熟)

그래서 해탈성숙(解脫成熟)이라,

그 때는 성불 경계에 들어간단 말입니다.


선정(禪定) 10종공덕(十種功德) 이것은 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 7에 가 있습니다.


* 염력강고(念力强故) 오욕적중(五慾賊中)

  불위소해(不爲所害)

그 다음에 염력강고(念力强故) 오욕적중(五慾賊中)  불위소해(不爲所害)라.

이건 유교경(遺敎經)이라. 부처님께서 맨 나중에 설하신 경이 유교경입니다.

염력(念力)은 이것은 우리가 부처님이라든가 또는 염불이라든가 화두라든가 그러한 염력이 오로지 통일이 되어서 딱 강할 때는 그때는 오욕적중(五慾賊中)이라.

오욕은 다 알으시지 않습니까? 재(財)색(色)명(名)식(食)수(睡)라, 재물욕(財物慾) 이성욕(異性慾) 명예욕(名譽慾) 또는 식욕(食慾), 수면욕(睡眠欲) 말입니다.

일반 세간인들, 세간인들도 오욕을 부리는 것이 그렇게 속물(俗物)로 보이는 것인데 하물며 이런 법의(法衣)를 입고서 오욕을 부리는 사람들을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참 정말로 아연실색(啞然失色)이 됩니다. 얼마나 불쌍한지를 모릅니다.

그 신성한 이 법의(法衣)라는 것은 비록 가사(袈裟)를 수(受)했지 않다 하드라도 법의(法衣)는 법의(法衣)입니다.

법의(法衣) 이것은 인욕복(忍辱服)이라. 법의(法衣) 입을 때는 모두를 다 인욕을 하는 것입니다.

또는 자비복(慈悲服)이라, 어느 누구한테나 자비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청정복(淸淨服)이라, 청정한 계율(戒律)을 다 지키라는 것입니다.

또는 복전의(福田衣)이라, 모든 중생이 이 옷만 보고도 환희심(歡喜心)을 느끼고 공경(恭敬)을 느끼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법의(法衣)입니다.

법의(法衣)를 입고서 오욕(五慾), 오욕(五慾)은 뭣인가? 재물욕, 식욕, 명예욕, 이성욕, 잠욕 이런 등등이 오욕(五慾) 아닙니까? 오욕을 못 떠나면 그때는 속물이 됩니다.

세속 분들은 어떤 때는 속물이 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적어도 여기 계시는 우리 출가스님들은 그런 분들이 한 분도 안계시고 또는 우리가 성불(成佛)할 때까지 그런 분들은 절대로 안 나올 것입니다만은 우리는 한사코 맹세코 그러한 속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염력(念力)이 강고(强故)라, 오욕의 원수 가운데 있다 하드라도 오욕적중(五慾賊中)이라, 불위소해(不爲所害)라, 우리가 공부가 딱 우리 마음에 들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오욕이 설사 우리 환경에 엄습해 온다 하더라도 절대로 거기에 해로움을 받지 않습니다.


* 일체범부(一切凡夫) 유관어과(唯觀於果)

  불관인연(不觀因緣) 여견축괴(如犬逐塊)

  불축어인(不逐於人)

그 다음에 일체범부(一切凡夫) 유관어과(唯觀於果)라, 불관인연(不觀因緣) 여견축괴(如犬逐塊) 불축어인(不逐於人)

일체 모든 범부는 원인은 보지 않고서 결과만 본단 말입니다. 원인은 무엇인가? 원인은 바로 일체존재(一切存在)의 불성(佛性)이 바로 원인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원인은 못 보고서 단지 사람이라든가 미운사람 고운사람 또는 뭐이다 다이아몬드다 금이다 뭐다 이런 하나의 물질적인 과(果)만 본단 말입니다.

이른바 불관인연(不觀因緣)이라, 인연을 모른단 말입니다. 참다운 원인인 불성을 봐야 참다웁게 인연을 아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치 여견축괴(如犬逐塊)라, 개란 놈이 사람이 흙덩이 던지면은 개란 놈이 미련해서 사람을 쫓아가야 할 것인데 흙덩이를 쫓아간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사람들, 미련한 사람들은 원인을 본다고 생각할 때에 성품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마음이 항시 편안하고 우리 마음에 공부에 손해를 안 볼 것인데 그런 상(相)만 본단 말입니다. 상만 보고 성품을 못 보는 것이 마치 개란 놈이 흙덩이를 던지면은 그 사람을 쫓아가지 않고서 또는 흙덩이만 쫓아가는 그런 것이나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열반경(涅槃經) 25에 있습니다.


* 명여풍중등(命如風中燈)

  부지멸시절(不知滅時節)

  금일부명일(今日復明日)

  불각사시지(不覺死時至)

  명명수업연(冥冥隨業緣)

  부지생하처(不知生何處)

명여풍중등(命如風中燈)부지멸시절(不知滅時節) 금일부명일(今日復明日)불각사시지(不覺死時至) 명명수업연(冥冥隨業緣)부지생하처(不知生何處)이라.

명여풍중등(命如風中燈)이라, 우리 목숨은 우리 사바세계 무상한 목숨은 정말로 허망무상(虛妄無常)한 것입니다. 바람 가운데 등불이나 똑같습니다. 어느 때 꺼질지를 모릅니다.

한 생각, 우리가 지금 숨 쉬고 있는 숨 한 생각 다시 되돌리지 못 하면은 바로 죽음입니다. 오늘인가 내일인가 그것도 모릅니다. 불각사시지(不覺死時至)라. 오늘 죽을 것인가 내일 죽을 것인가 그도 모르면서 언간에, 언간에 주검의 때에 이른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 때는 명명수업연(冥冥隨業緣)이라. 어둡고, 어둡고 그런 어두운 저승 가운데서 방향도 없이 헤맨단 말입니다.

부지생하처(不知生何處)라, 어느 곳에 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이것이 인과경(因果經)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우리 생명이 이와 같이 허망무상(虛妄無常)한 것을 되뇌어서 부지런히 해태심(懈怠心)을 부리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精進)해야 할 것입니다.



19981115-성륜사 대웅전-순선안심법회-청화큰스님 설법

19981115-촬영자 미확인

19990729-‘순선인심법문’ 소책자로 출간-성륜사

20050911-DVD 작업-본정 김영동

20080705-재정리-주안 한동일


*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용으로 큰스님 말씀 그대로 받아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