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4 호>
2000년 7월 2일 성륜사 정기법회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 작업용으로 큰스님 구어체 그대로 정리한 글입니다.*
염불참선(念佛參禪)
아직도 장마가 개이지 않아서 대단히 무덥습니다. 마땅히 여러분들께서 편하게 쉬시기도 하시고 법문도 들으시고 하실 장소를 만들어놔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해서 대단히 죄만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많이 우리 불자님들이 오셔서 정말로 참 제 마음은 환희심(歡喜心)에 충만(充滿)해 있습니다. 다 모두가 반가운 얼굴들이십니다.
우리가 부처님 법(法)을 믿는다는 것은 부처님 법이 다시 위없는 진리(眞理) 우주(宇宙)의 무상(無常)의 최상무상의 진리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 법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부처님법과 다른 법의 차이는 어떤 것인가? 이런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다른 법은 이른바 모든 문제를 이렇게 저렇게 여러 갈래로 구분해서 생각을 합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은 이원론적(二元論的)인 그런 견해(見解)도 있고 또는 다원론적(多元論的)인 견해도 있습니다.
이원론 이라는 것은 알아듣기가 좀 거북하게 생각되실지 모르겠지만 모든 문제를 모든 생명(生命)의 본바탕을 둘로 본단 말입니다. 물질(物質)이면 물질이 따로 있고 정신이면 정신이 따로 있고 그렇게 보는 것이 이원론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이원론적인 또는 다원론적인 그런 생각은 이것은 이른바 불교에서 말할 때는 외도(外道)란 말입니다. 참다운 진리가 못되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러면은 그러한 이원론이나 다원론이나, 다원론은 우주의 진리를 구성하는 것이 하나나 둘일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가 많단 말입니다. 마치 원소수가 많듯이 여러 가지가 집합되어서 하나의 진리를 구성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이원론이나 다원론이 되는 것은 모든 존재의 근본(根本)바탕을 모르는데서 그렇습니다. 즉 다시 말씀드리면 현상적(現象的)인 상(相)만을 보고서 본바탕인 성품(性品)을 모른단 말입니다.
어느 철학(哲學)이나 또는 어느 종교(宗敎)나 그 성품을 알려고 무던히 애를 많이 씁니다. 그러나 우리 생각이 짧아서 성품까지 미처 이루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성품이라는 것은 이른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그러한 경계(境界)입니다. 우리 인간적인 인간경계가 제대로 보이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깨달은 성자(聖者)만이 볼 수 있는 그러한 경계가 그런 성품경계이기 때문에 우리 중생(衆生)들은 현상만 보는 그러한 아직은 얕은 그런 사고방식 때문에 참다운 종교가 되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기독교(基督敎)라든가 또는 이슬람교라든가 유교(儒敎)나 도교(道敎)나 모두가 다 성품자리에서 우러난 그런 가르침입니다.
즉 바꾸어서 말씀드리면 성품을 깨달은 분들은 이른바 성인(聖人)인데 그 성인들이 말씀한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다만 그러한 가르침가운데서 성자의 깨달음도 똑같지는 않는 것입니다. 보다 완벽한 깨달음도 있고 또는 아직 완벽하지 못한 깨달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범부(凡夫)를 초월(超越)한 우리 중생의 범부를 초월한 그러한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성품을 깨달아 가는 가르침인 것은 다 똑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도 역시 우리가 부처님 공부라 하는 것은 그 상(相)을 떠나서 현상적인 것을 떠나서 참다운 성품으로 가는 길입니다.
어째서 우리가 구태여 현상적인 것에 머물러 살아도 무방한데 애쓰고 성품까지 꼭 가야 할 것인가? 그런 또 의문이 제기가 되겠지요.
이 성품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그 우주만유의 근본자리이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인 즉 말하자면 물질이나 그러한 현상적인 것을 초월한 자리이기 때문에 이런 자리는 변질이 없습니다.
현상적인 우리 몸뚱이가 그때그때 인연(因緣)따라서 죽고 살고 변화가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상에 대해서 있는 말인 것이지 본질적인 성품에서는 그런 변화가 없단 말입니다. 죽음도 없고 남도 없고 또는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법문 가운데서 일체유위법여몽환포영(一切有爲法如夢幻泡影)이라, 우리 눈으로 보는 것은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보는 한계(限界)에서는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나 똑 같습니다.
우리 중생의 고통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것은 우리 중생이 근본(根本)자리, 변치 않을 근본자리를 미처 모르고서 이른바 근원적인 본체(本體)를 모르고서 변하는 현상에다가 마음을 두고 산단 말입니다.
당연히 하나의 우리 생명이 있으면 늙어지고 아파지고 죽고 그런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데 있어서는 우리 마음이 어느 때나 참말로 안심입명(安心立命)은 못 되는 것입니다. 항시 불안(不安)하단 말입니다. 내일 죽을지 오늘 죽을지 모르는 것이 사실 우리 인생(人生)의 생명인 것이고 우리 생활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교(佛敎)를 공부 할 때에 삼계윤회(三界輪廻)라, 또는 삼세윤회(三世輪廻)라, 그런 말씀을 많이 듣습니다. 우리가 보통 인과(因果)를 이야기 할 때에 악(惡)을 행하면 반드시 과보로 해서 고(苦)가 있고 또 선을 행하면 과보로 해서 안락(安樂)이 있다. 이런 것은 누구나 알지 않습니까.
그러나 누구나가 알고 있는 것인데도 그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번연히 알면서도 번연히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게 된단 말입니다.
하루생활만 우리가 반성해 본다 하더라도 하루 동안 한 번도 짜증도 안내고 성도 안내고 그렇게 지낸 분들은 극히 참 드뭅니다.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면은 우리가 금생(今生)에 나와서 눈에 보이는 것만이 사실인 것이고 눈에 안 보이는 것은 사실이 아닌 하나의 허무(虛無)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또는 금생에 뿐만이 아니라 과거전생(過去前生)에 지은 업(業)의 힘으로 그럽니다.
이른바 카르마(羯磨,karma)라, 업(業)보고 카르마라, 인도 말로 하지 않습니까. 우리 중생은 어느 누구나가 지금 업에 제한돼 있습니다. 업의 굴레에 지금 우리가 칭칭 묶여 있단 말입니다.
성자(聖者)만이 성품(性品)을 깨달은 성자만이 업을 비로소 떠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자가 아닌 한에는 어느 누구나가 정도의 차이뿐인 것이지 업에 지금 꽁꽁 묶여 있단 말입니다. 구속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자유스럽지 못 합니다.
그러니까 참다운 자유라는 것은 진리를 깨달은 성자에게만 있는 그러한 하나의 특권(特權)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너무 업을 생각하면은 우리가 우울해 집니다. 지지리 결국은 그야말로 자유스럽게 행복스럽게 살기 위해서 종교를 믿는 것인데, 업에 우리가 아주 묶여 있다고 생각하면 아주 어두어지고 또 업이라는 것이 과거전생(過去前生)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급해 올라가면 전생이 한도 끝도 없이 많단 말입니다.
그래서 불교말로는 무시이래(無始以來)라, 없을무(無)자, 비롯할시(始)자, 처음이 없는 과거가 그야말로 몇만생 몇천생이 과거로 소급해서 위로 올라가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생명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 할 때는 금생에 육체적인 생명에 한한 걸로 알지만은 우리가 과거를 더듬어 본다고 생각 할 때는 한도 끝도 없이 우리 생명이 처음이 없단 말입니다. 무시이래(無始以來)라.
또는 우리가 죽어지면 그대로 말 것인가? 종교(宗敎)를 안 믿는 분들은 대체로 과거(過去)나 현재(現在)나 미래(未來)에 있어서, 과거도 무시하고 미래도 무시합니다. 우연히 우리가 생겨난 줄로 안단 말입니다.
그러나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과거세에 가지가지 여러 가지 우리가 지어내려온 업, 업의 제약(制約) 밑에서 우리 현재 생명이 있는 것이고 또는 거기다가 금생(今生)에 업이 또 플러스(plus)가 되어서 그래서 미래에 또 우리 생(生)을 받는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불교를 믿는 분이나 기독교를 믿는 분이나 무슨 종교를 믿든지 간에 과거 현재 미래에 있어서 우리 생명(生命)존재가 어떻게 지금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가? 이것을 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 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그런 도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모르는 종교인들이 자기 멋대로 자기 개인적인 의사를 거기다가 개입을 시킨단 말입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불교인 같으면 부처님 경전(經典)을 중심해서 우리 사고활동을 해야 할 것이고 또는 기독교인 같으면 바이블(Bible)을 중심으로 해서 생각하고 그래야지 그렇지 않고서 자기가 좀 배운 철학적(哲學的)인 무슨 생각 또는 과학적(科學的)인 생각 이런 것 가지고서 성자(聖者)의 가르침을 좌지우지 하려고 생각하면 큰 오류를 범합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 인간 생명이라 하는 것은 처음이 없는 과거로부터서 현재에 이와 같이 있고 또는 미래에 있어서는 끝이 없는 끝마침이 없는 그때까지 우리 생명이 존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려운 말로 하면은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우리 생명은 처음도 없고 끝도 없단 말입니다.
다시 바꿔서 말하자면 그렇게 되기 때문에 처음도 없고 끝도 없기 때문에 다만 그때그때 우리 현상적(現象的)인 몸뚱이만 보였다 안보였다 하는 것이지 있다 없다 하는 것이지 우리 생명자체는 절대로 변동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우리가 쉽게 항시 외우고 있지만은 불생불멸이란 뜻이 그렇게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뜻이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 생명은 처음에 낳지도 않고 또는 죽지도 않는단 말입니다. 과거에도 처음도 없고 또는 미래에도 그런 끝이 없거니 당연히 그때는 죽지 않고 낳지 않고 그래야 되겠지요.
또는 생명의 자체는 우리가 눈으로 보이는 현상적인 상이 아니기 때문에 즉 물질(物質)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더함도 덜함도 없단 말입니다. 물질이 되어야 줄어지고 증가가 되고 하겠습니다만은 우리 생명자체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더함도 덜함도 없단 말입니다. 또는 그와 동시에 오염(汚染)도 안 되고 또는 물들지 않는단 말입니다.
물질이 되어야 푸른색을 칠하면 푸르게 보이고 누런색을 칠하면 누렇게 보이겠습니다만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어떠한 것이나 설사 우리가 잘 못살아서 무슨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우리 생명자체는 절대로 오염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반야심경에 말한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 아니불(不)자 때구(垢)자 말입니다. 때 묻지 않는단 말입니다. 때 묻지 않았거니 부정(不淨)이라. 그때는 새삼스럽게 우리가 정화(淨化)를 시킬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생명이 그와 같이 본래 죽지 않고 낳지 않고 또는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또는 오염도 안 되고 오염도 안 되니까 그때는 청정(淸淨)하다는 이른바 본래청정(本來淸淨)이라, 그런 말을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런 것이 우리 생명입니다.
우리가 여러모로 지금 불안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른바 위기시대란 말입니다. 세상도 위험스럽고 또 우리 지도적인 어른들의 생각이 각기 달라가지고서 서로 경쟁 중에 있고 어떤 면으로 보나 우리 인간 생활이라는 것은 항시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불안스러울 때에 불안한 마음을 품지 않고 그 안심입명(安心立命)이라. 항시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서 살아야하는 것이 종교인들의 보람되지 않겠습니까.
종교를 지지리 믿으면서 항시 불안스럽고 일반사람과 똑 같을 때는 믿으나마나 하지 않겠습니까. 헌데 그 불안스러운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는 우리 생명자체의 본래모습을 우리가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생명 자체는 이것은 우리가 잘났던 못났던 그것은 현상적(現象的)인 문제인 것이고 생명 본바탕은 본래로 죽지 않고 본래로 낳지 않고 또 본래로 오염되지도 않고, 본래로 오염되지 않았으니 새삼스럽게 정화시킬 필요도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본래로 영생불멸(永生不滅)한 영원히 존재(存在)하고서 멸(滅)하지 않는 또는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오염이 안 되었으니 청정무비하단 말입니다.
청정무비한 그러한 즉 말하자면 하도 보배로운 존재가 우리 생명입니다. 이것이 우리 불자님들이 잘 아시는 이른바 부처불(佛)자 성품성(性)자 불성(佛性)입니다. 불성이라,
또는 이것은 바로 다만 우리 생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주(宇宙)의 도리기 때문에 진여(眞如)라, 진리(眞理)란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 할 때는 사람은 그렇다 치고 다른 동물은 또 그렇지 않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진리라는 것은 어디가 있고 어디가 없고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불성, 부처불(佛)자, 성품성(性)자 불성 그러면은 불성은 이것은 우리 마음의 본바탕이다. 이렇게만 생각하고 다른 동물은 불성이 없다고 생각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불성이란 이것은 구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명은 구분이 안 되는 것입니다.
나한테 있는 생명이나 너한테 있는 생명이나 딱 갈라서 너한테 있는 생명 다르고 나한테 있는 생명 다르고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모양이 있어야 다를 수가 있는 것이지 모양이 없는 이른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그러한 생명자체는 절대로 구분이나 분할이 안 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나한테 있는 생명이나 너한테 있는 생명이나 또는 다른 동물이나 다른 식물이나, 이 우주에는 모두가 사실은 따지고 보면 다 불성뿐인 것입니다. 불성 하나뿐이란 말입니다. 일원적(一元的)인 불성(佛性)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가르침과 우리 부처님 가르침은 그러한 근본적인 명확(明確)한 구분이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천지가 오직 하나의 생명인 불성뿐이란 말입니다.
다행히도 그런 도리를 현대과학(現代科學)이 차근차근 증명(證明)을 지금 해주고 있습니다. 이른바 어느 물질(物質)이나 쪼개고, 쪼개고 분석(分析)하고 보면 그때는 에너지만 남는단 말입니다. 이른바 우주(宇宙)의 기(氣)만 남는단 말입니다.
그 에너지라는 것도 역시, 어느 것이나 어느 물질이나 모두가 다 분석해 보면 에너지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장 에너지라든가 그야말로 참 그런 에너지론이 있지 않습니까만 우리는 과학도가 아니기 때문에 잘 모르고서 과학인들이 해준 것을 그대로 보고서 느끼기만 하고 고맙게 압니다만 아무튼 우주라는 것은 분석해보면은 다 모두가 에너지뿐이란 말입니다.
그 에너지가 어떻게 모여 있던가. 어떻게 상호작용(相互作用)으로 해서 무슨 모양을 나투든가. 그것 따라서 이와 같이 천차만별(千差萬別)로 구분 있는 것이지 그 본바탕은 모두가 에너지뿐입니다.
이른바 약력장 강력장 전자기장 중력장 그런 에너지장입니다.
앞으로 세월이 흘러서 우리가 조금 더 힘이 생기면 보다 큰 광장을 지어서 우리 불자님들을 모시도록 그렇게 원력(願力)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력이 저 같은 사람은 부족하고 그래서 이렇게 좁은데서 여러 불자님들이 고생스럽게 되서 대단히 죄만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선은 모두를 다 하나의 생명으로 우리가 볼 줄을 알아야 그래야 안심입명(安心立命)이 됩니다.
우리마음이 어디가 근원적인데 의지가 딱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누구하고 싸우고 누구하고 겨루고 한다하더라도 굳건한 의지가 있으면 우리가 안심하고 싸울 수도 있는 것이고 믿고서 할 수가 있는 것인데 의지가 없으면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존재(存在)가 의지할 것은 일체존재(一切存在)의 근원(根源)자리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성품(性品)자리 우주의 성품자리인 그 불성(佛性)에다가 의지해야 비로소 안심입명이 된단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불성자리를 바르게 이해를 하고 거기다 의지한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한테는 불안은 없습니다. 불안은 절대로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죽을 염려도 없고 또는 실패한다 하더라도 내내야 겉만 허망(虛妄)한 겉만 변동이 있는 것이지 참다운 성품자리에서는 손해 볼 것이 없단 말입니다. 변동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재산으로 해서 우리가 지독한 손해를 봐가지고서 재산의 여러 가지 손해 때문에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겠지요. 형제간에 재산가지고 싸우는 분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은 하나의 변화(變化) 무상(無常)한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야말로 꿈이나 허깨비 같은 것입니다.
참다웁게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결국은 모두가 다 불교(佛敎)적인 의미에서 보면 다 공(空)인 것입니다. 제법(諸法)이 공(空)이란 말입니다.
인연(因緣)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다 공이란 말입니다. 인연이 흩어지면 그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나무를 준비해가지고 하나의 집을 짓는다고 생각을 해도 인연이 다해서 집을 해체 할 경우에 기둥을 떼 내고 서까래를 떼 내고 다 떼 내버리면 나무만 남지 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와 똑같이 물질이라는 것은 그때그때 조건부로 해서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사실은 존재(存在)하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참말로 존재하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바 같이 진여불성(眞如佛性)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님들 우리 종교인(宗敎人)들은 진여불성에다가 우리마음을 항시 못 박아 둬야 됩니다. 진여불성에다가 못 박아둬야 진여불성하고 가까워진단 말입니다.
진여불성하고 가까워져야 우리 생명이 비로소 진화가 되고 생명이 비로소 그때는 보다 더 본래 고향(故鄕)과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을 모르면은 다 모두가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자기를 상실한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시 불안스럽지요.
밥을 먹으나 또는 어떤 경우에 우리가 지독한 고생 속에 있으나 어느 때나 인간이라는 것이-그 인생은 고(苦)라,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이별도 더러는 해야 되는 것이고, 구부득고(求不得苦)라. 우리가 제아무리 애쓰고 구한다 하더라도 구한 것을 다 얻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참다운 성품(性品)을 구하고 불성(佛性)을 구하고 진리(眞理)를 구한다고 생각 할 때는 한번 생각하면은 한번 생각 한 만치 진리로 차근차근 우리가 다가서 갑니다만은 물질이라는 것은 그렇지가 않단 말입니다.
물질은 한계가 있어놔서 자기가 많이 가질라고 하면 옆에 사람들 하고 반드시 갈등이 온단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 할 때는 우리 인생이 참 그야말로 재미지고 인생이라는 것이 아주 행복스러운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되지만은 깊이 생각하면 생각해볼수록 인생은 참 고생바다입니다. 조금 행복스러운 것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 밑바닥은 다 고생의 원인입니다.
그러기에 참다운 불교인들은 윤회(輪廻)를 그렇게 싫어하고 윤회를 피할라고 애쓰지 않습니까. 윤회라, 윤회는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 생명이 과거(過去)에서 부터서 금생(今生)으로 금생에서 내생(來生)으로 항시 이와 같이 뱅뱅 돌아간단 말입니다.
과거 전생에 죄를 많이 짓고 잘못을 많이 했으면은 금생에 또 잘 못되게 태어나는 것이고, 사람만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개나 돼지나 다른 걸로도 분명히 태어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조금도 거짓이 없습니다.
금생에 우리가 마음 쓴 대로 내생에 가서 몸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 부처님을 믿는 분들은 그러한 금생에 우리가 태어나고 또 내생에 태어나고 그러한 뱅뱅 도는 것을 안 할라고 애쓴단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아까 말씀마따나 모두가 고생뿐이란 말입니다. 고생뿐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는 사랑하는 분들과 다 해어지고 그래야 되기 때문에, 금생에 잠시간 만나서 친한 경우도 슬프고 그럴 것인데 하물며 부부(夫婦)간되고 부자(父子)간되고 모자(母子)간되고 이래 보십시오. 이런 분들이 해어질 때에 얼마나 마음의 상처가 큽니까.
그러나 우리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뱅뱅 도는 그런 업장 따라서 카르마 따라서 이렇게 옮아가는 그런 생활에서는 그런 이별이나 우리가 구해서 얻지 못하는 그런 고통이나 말입니다. 병이나 늙음이나 도저히 면할 수가 없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이제 80이 거의 다 되어 가니까 더러는 꼭 죽을라고 한번 해보고 또는 자연적으로 노령 때문에 찐이 빠지니까 꼭 죽음이나 마찬가지의 경우도 격어보고 했습니다만은 어느 누구나가 다 피할 수가 없어요.
저보다도 더 나이 젊은 스님들도 굉장히 많이 갑니다. 저보다도 부처님 일도 훨썩 많이 알고 똑똑하고 그런 스님들도 가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더러는 아이, 참! 나 같은 사람이 너무나 늑장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가야할 것인데 지금 너무 오래 살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이따금 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가 인연 따라서 과거에 죽고 또 현재에 태어나고 내생에 가 태어나고 또 죽고 또 태어나고 -나고 죽고 나고 죽고 수천번 수만번 되풀이 되는 것이 이것이 윤회(輪廻)생활인 것입니다. 윤회라. 삼세윤회(三世輪廻)라,
인생에 있어서 좀 복이 있는 사람들은 인생이 재미지고 유쾌하고 그런 일도 많이 계시겠지요. 그러나 응당 닥쳐올 죽음을 생각 해 보십시오. 재미지고 뭣이고 그런 것은 어디로 간곳이 없단 말입니다.
슬픔과 고통과 아픔으로 해서 맞이할 수밖에 없는 그것이 우리 죽음인데, 그래서 현명한 사람들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삼세윤회 하는 여기서 죽고 또 태어나고 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 그런 것을 우리가 초월(超越)할라고 애쓴단 말입니다.
우리 불교(佛敎)가 또 그런 가르침입니다. 다른 종교(宗敎)도 내세(來世)나 또는 전생(前生)이나 그런 것을 아주 완전히 무시한 종교는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히는 잘 모른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만이 삼세윤회라.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우리 생명이 나고 죽고 하는 그런 도리를 분명히 안단 말입니다.
우리 불교(佛敎)인들은 그런데 가서 우리 참 커다란 자량(資糧)이 있습니다. 인생을 그대로 불교는 다 보고 그대로 말씀한 법문(法門)이란 말입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는 분명히 과거에도 생명이 존재했고 금생에도 있다가 내생도 존재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나고 죽고 하는 이런 정도로 해서는 불교가 못 되는 것입니다.
불교의 하나의 기본적인 도리인 것이지 참다운 도리는 우리가 나고 죽고 하는 윤회를 우리가 떠난단 말입니다. 극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선(參禪)을 하고 염불(念佛)을 하는 것도 금생에 더욱더 잘살고 내생에 가서 천상(天上)에 가서 태어나고 또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더 잘나고 똑똑하고 재주 있고 이렇게 태어나게 시리 하기 위해서 참선하고 염불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본 근본적인 도리는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가 윤회를 극복한단 말입니다. 카르마의 구속을 벗어난단 말입니다.
윤회를 벗어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있으나 인제 우리가 흔히 가장 쉽게 아는 삼학도(三學道)라, 우리가 도덕적으로 완벽을 기하는 계율(戒律)을 지키고 말입니다. 윤리도덕(倫理道德)적으로 우리가 완벽을 취하는 계율을 지키고, 계율을 지키는 것은 우리 인간의 도덕인 동시에 하나의 우주(宇宙)의 도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생물을 죽이지 말라. 고기를 먹지 말라. 우리불자님들 고기를 대체로 많이 자시겠지요. 가급적이면 자시지 않아야 됩니다. 똑같은 생명입니다. 그걸 먹어서 사람의 꼭 피가 되고 살이 되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 계율(戒律)가운데 가장 허두의 중요한 것이 불살생계(不殺生戒) 아닙니까. 같은 생명을 내 생명을 본래는 다 같은 생명인데 나한테 있는 생명을 북돋우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우리가 해코지 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기에 불살생계에서 나와 있는 부처님 법문을 보면 우리가 육식(肉食)을 하고 다른 생명을 죽인다고 생각할 때에 단불종(斷佛種)이라, 불종자를 끊어버린단 말입니다. 자비로운 종자를 끊어버립니다.
우리가 낚시질을 많이 해서 고기를 많이 잡고 고기를 많이 먹고 한 사람들은 다른 동물들이 보면 벌써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몰라도 모든 존재는 본래 불성이기 때문에 다 영감(靈感)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가 다른 생물(生物)을 함부로 하고 고기를 많이 먹으면 다른 동물들이 우리를 보고서 싫어한단 말입니다.
산에 가서 공부를 해봐도 정말로 계행(戒行) 잘 지키고 있으면은 그 묘한..., 까마귀나 까치나 모두가 옆에 와서 그렇게 친절히 해요.
우주(宇宙)란 것은 신비(神秘)에 가득 찬 것인데 우리 중생들이 잘 못살아서 그런 신비를 수용을 못합니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우리가 완벽을 기한단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금생에 서로서로에게 꼭 필요한 것이고 또는 동시에 우리가 윤회(輪廻)를 벗어나는 기회로 도덕적(道德的)인 생활 계행(戒行)이 꼭 필요합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 마음을 항시 진리(眞理)에 지향해서 우리 마음을 하나로 통일을 시킨단 말입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기본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지 우리 마음이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윤회를 벗어나는 참다운 성품을 아는 그런데 까지는 미치지 못한단 말입니다. 우리마음을 항시 부처님쪽으로 불성 쪽으로 우리 마음을 모은단 말입니다.
우리는 참선을 하고 염불을 많이 하는 그것은 상당히 어렵고 우리가 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할란가 모르겠습니다만은 사실은 제일 쉬운 것입니다. 제일 쉽습니다.
참선도 바르게 하면은 하면 할수록 몸도 마음도 가볍게 다 그러는 것입니다. 잘못 길들여서 억지로 해야 몸도 상하고 그러는 것이지 그 본래 불성 우리 불성(佛性)이라는 것은 만능(萬能)의 자리인데 그 만능의 자리와 우리가 가까워진다고 생각 할 때에 얼마나 우리 몸이나 마음에 좋겠습니까.
우리가 화두공안(話頭公案)을 든다 하더라도 단순히 그냥 억지로 의심(疑心)만 하면 참다운 참선(參禪)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부처님을 우리가 분명히 구해서 부처님 자리를 가고자하는 간절한 마음이 밑바탕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염불(念佛)도 그냥 노는 입에 단순히 염불이 아니라, 이른바 공염불(空念佛)이 아니라, 여기나 저기나 우주에 가득 찬 부처님을 우리가 생각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은 어디가 있고 어디가 없는 그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느 때 어디에나 존재하는 우주의 참다운 생명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을 그렇게 바로 믿어야 됩니다. 부처님은 그냥 그렁저렁한 하나의 성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는 또 만능의 자리란 말입니다. 만능의 자리, 그 만능의 자리란 것이 필요합니다. 어떠한 것이나 그 가운데는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눈에도 안 보이는 원자력 가운데 가서 무시무시한 힘이 있는 것 보십시오. 그런데 우리 불성생명의 자체는 그 보다 더 훨썩 고성능(高性能)의 것입니다. 생명은 이것은 바로 우주의 생명이기 때문에 어떠한 에너지나 뭣이나 다 불성(佛性)이 들어 있단 말입니다. 불성이,
따라서 천지우주(天地宇宙)는 결국은 일여평등(一如平等)의 진여불성(眞如佛性)뿐입니다.
그런 자리를 정말로 눈에다가 불을 켜고 우리가 확실히 느껴야 됩니다. 그 불성은 하나의 청정미묘(淸淨微妙)한 빛이란 말입니다.
물질도 저 원자나 그런 단계에서는 방사선이라, 하나의 그것이 광명으로 다 화하고 마는 것입니다. 물질이라는 것은 쪼개고 쪼개고 분석해 놓고 보면은 끝에가서는 다 에너지 단계에서는 빛입니다.
빛인 것인데, 더구나 우리의 불성 우리의 본래성품(本來性品)은 하나의 청정미묘한 빛이란 말입니다. 간격도 없는 하나의 빛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공부를 해서 우리마음이 정화(淨化)되면은 차근차근 그런 빛의 여명(黎明)이 우리한테 비춰오는 것입니다.
그 성자(聖者)들은 그런 빛하고 완연히 하나가 딱 됐습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은 빛하고 잘못 살면은 거리가 차근차근 멀단 말입니다.
즉 그와 같이 참선염불(參禪念佛)이라는 것은 우리중생의 중생심을 지향(指向)해서 차근차근 본래적인 마음자리로 본래 성품자리로 우리가 가까워진단 말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그리워 한다는 부처님한테 지향하는 그런 - 어려운말로 하면 갈앙심(渴仰心)이라, 간절히 그리워하는 그마음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그 부처님은 눈에 안 보이는 생명이기 때문에 눈에 안보이면서 우주의 성품을 이루는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 부처님 불성자리가 물질 같으면은 요만치 가다가 또 저만치 가고 그와 같이 순서 있게 조금씩 조금씩 가겠지만은 하나의 비교할수 없는 생명자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간절하게 부처님을 갈앙(渴仰)하고 흠모(欽慕)한다고 생각 할 때는 우리마음은 초월(超越)하고 우리마음은 비약(飛躍)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본원(本願)이라. 본원이라, 근본 본(本)자, 원할 원(願)자 본원이란 말입니다. 우주란 것은 부처님의 본원으로 꽉차있습니다. 무슨 본원인가?
모두를 다 모든 중생을 다 부처가 되게시리 하는 그런 원(願)이란 말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란 것은 모든 존재 사람뿐만이 아니라 다른 동물이나 식물이나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부처가 되게시리 하는 원이 우주에는 있습니다. 바꾸어서 말하면 우주(宇宙)의 목적의식(目的意識)이란 말입니다. 우주의 목적의식,
우주는 그냥 만연히 이렇게 봄이 오고 여름 되고 그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주란 것은 산천초목(山川草木)과 더불어서 산하대지(山河大地) 모두가 다 부처가 지금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가 되는 기왕이면은 지름길은 어떤 것인가? 지름길이 아까 말씀드린바 같이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도덕적인 행동을 될수록 원만하니 도덕적으로 우리가 바로 살아야 우주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 같이 우선 살생(殺生)만 두고 본다 하더라도 다른 생명을 함부로 죽이면은 우주의 도리에 안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만치 우리마음이 독해지고 또 그만치 걸림이 생기고 다른 동물들하고 서로 원수가 지고하지요.
우리 눈앞에 있는 어느 것이나 닭 한 마리나 돼지 한 마리나 모두가 다 과거전생(過去前生)에 우리생명과 같이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어느 고기를 먹는다고 생각 할 때에 과거전생에는 친구가 되고 어버이가 되고 그렇게 되었던 즉 말하자면 그런 관계들 그런 존재들 고기를 먹는 것입니다.
저번에 서울 제가 올라 갈때에 승용차로 갔는데 돼지를 싫은 차를 서울 가는 동안에 한 댓 번이나 만났어요. 더구나 요새 그 돼지는 순 고기만 먹을라고 기르기 때문에 말입니다. 정말 참 그렇게 트럭 뒤에서 서로 비비고 서로 몸부림치고 그래요 모두가 다.
생명인 한에는 우리와 똑 같습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런 고기를 먹어야 할 것인가. 그런 고기 먹는다고 그래서 우리가 오래 삽니까?
우리 불자님들은 부처님을 믿을 때에는 온전히 믿어야 됩니다. 온전히 믿으면은 우리가 훨썩 좋습니다.
지금 이른바 문명병(文明病)들은 그런 고기를 많이 먹고 영양과다가 되어서 문명병이 생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부처님법대로 살면은 제일 편합니다. 제일 편하다가 정말로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염불참선(念佛參禪)으로 해서 몸도 마음도 가뿐히 우리가 영생(永生)의 고향(故鄕)에 간다고 생각할 때에 얼마나 좋겠습니까. 극락세계(極樂世界)는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는 우리 인생의 고향입니다. 모든 존재의 고향입니다. 어느 누구나가 안가고 베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기 때문에 늦게 가나 빨리 가나 꼭 극락세계는 가야 되는 것입니다. 게으름 부리면은 늦게 가고 게으름 안 부리고 잘 닦으면은 빨리 가고 그러겠지요.
성자(聖者)의 길 따라서 그런 성인들 길 따라서 생활하는 것이 우리한테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고 행복(幸福)을 보장하는 그런 길입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주(宇宙)는 부처님의 원력(願力)으로 충만(充滿)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원력을 부처님의 원력을 우리가 상기하고 생각하고 간절히 그리워하는 갈앙심, 갈앙심 가지면은 우리 생명이 비약한단 말입니다.
하나로 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명이 그냥 비약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다웁게 닦으면 단 일곱 살 먹어서도 도인(道人)이 된단 말입니다.
다라표 비구는 14살에 출가해 가지고서 16살 먹을 때까지 공부해 가지고서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했단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우리는 필요 없는 것을 너무나 많이 배우고 필요 없는 생각을 너무나 많이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을 모으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정말로 우리 마음을 그때그때 자나 깨나 우리가 운전을 하나 밥을 먹을 때나 누구하고 재미있게 이야기 할 때나 항시 우리 마음으로는 부처님을 따르는 마음이 흘러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염불(念佛)도 정말로 지성(至誠)으로 하면은 그때는 우리 입에서 광명(光明)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성도스님이나 또는 소강스님들은 한번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하면은 입에서 광명이 나온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염불해서 그와 같이 내입에서 정말로 하여튼 광명이 나온다는, 우리가 못 나올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마음을 모아서 공부를 해야 그래야 본래 갖추어 있는, 그러기 때문에 불교(佛敎)에서 본래(本來)란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나중에 배워서 우리가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처란 것은 원래 본래로 부처란 말입니다. 본래 부처인 것을 우리가 잘못 살아서 부처가 중생이 되고, 중생이 잘살면 바로 성인이 되고 부처가 된단 말입니다.
자민대사(慈愍大師,680-748), 자민대사는 굉장히 위대한 분입니다. 우리나라로는 신라 8세기 때 분입니다. 저는 자민대사를 그 어른법문을 많이 봐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제가 그 양반을 그 어른을 좋아하는 것은 그이가 공부하실 때에 중국은 당나라 8세기 때 분인데 그이가 계실 때에 의정대사란 분이 인도에 갔다 왔단 말입니다.
중국에서 모다 당나라 때에는 인도에 가서 법을 배워가지고 오지 않습니까. 의정대사(義淨大師)가 자민스님 보다도, 자민대사는 경(經)이나 계율(戒律)이나 참선(參禪)이나 모든 것에 능통(能通)하기 때문에 자민삼장(慈愍三藏) 그래서 삼장법사(三藏法師)입니다. 현장법사(玄奘法師, 622-664)도 삼장법사이지만은 자민스님도 삼장법사입니다.
삼장은 경장(經藏) 논장(論藏) 율장(律藏)을 다 통달(通達) 했단 말입니다. 삼장법사인데 이이가 의정대사가 인도에 갔다 오니까 자기도 가고 싶어서 아주 그야말로 참 못내 갈망한단 말입니다.
인도에 한번씩 갔다 올라면은 한 20년 걸립니다.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20년 동안 걸려야 인도에 갖다 제대로 돌아올 수가 있고 또 법을 배워가지고 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 20년 걸리는 것은 맨 처음에 가는데만 한 3년 걸립니다. 그 고비사막을 넘어야 되고 히말라야 산을 넘어야 되고 말입니다.
그러고 인도까지 갈려면 한 30여개 국의 국경을 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세상같이 비자 내기가 쉬울 때도 미국만 갈려도 굉장히 복잡합니다. 더구나 옛날에 비자도 뭣이고 없는 그러한 미개한 때인데 그럴 때 30개 나라의 국경을 넘어서 간단 말입니다.
그래 중국(中國)서 가더라도 꼭 3년이 걸립니다. 3년이 걸려도 다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열사람 출발하면은 십진구퇴(十進九退)라. 아홉 사람쯤은 쓰러지고 죽고 도로 못 가게 되서 돌아온단 말입니다.
그런 길이기 때문에 좀처럼 마음을 내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 길을 3년 동안 우리 불자님들 3년 동안 공부를 오로지 하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없으시겠지요.
저 같은 사람은 몇 번 3년 동안을 해봤지만은 공부를 부지런히 못해서 크게 얻은 것이 없습니다. 없으나 해보면 상당히 지리 합니다. 3년도, 그런데 3년 동안 나그네 길 위에서 허비한단 말입니다.
그 고비사막은 사막을 가 보신 분들은 아시지만 사막 길이라는 것이 바람이 불면 있던 길도 없어지고 없든 산도 생기곤 한다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무수한 여러분들이 구법승들이 인도에 갈려고 출발했으나 중간에 쓰러지고 죽고죽고 해서 그 사막 길 위에 먼저 쓰러지고 돌아가신 해골들이 있고 한다고 그래요.
그런 길을 3년을 가야 됩니다. 3년을, 3년 가면 또 인도에 가서 인도 말 배워야 되겠지요. 인도 말 배운 다음에 또 거기서 공부를 해야 되겠지요. 그래서 거기서 인도 말 배우고 공부하고 또 돌아올 때 3년이라.
합하면 한 20년 걸려버린단 말입니다. 그 아까운 청춘 다 가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불경(佛經)을 번역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가 얼마나 해택을 보고 있습니까. 불경을 하나하나 모두가 그와 같이 또 중국에서 고승들이 인도에 들어가서 20년 동안 그런 각고의 뼈를 깍는 고생을 해가면서 들여온 불경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자민스님이란 그분은 아까 말씀마따나 의정대사가 갔다 온 것에 대해서 감격해서 말입니다. 나도 한번 꼭 가야 되겠다. 이렇게 마음먹지만은 같이 갈 동기가 별로 없단 말입니다. 좀처럼 맘먹겠습니까. 그러나 가까스로 동기가 생겨서 출발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육지로 가서 육지로 바로 온 분도 있고, 또는 바다로 갔다 육지로 온 분도 있고 그래요 모두가 다, 그래서 자민대사는 나는 바다로 가야 되겠다. 그래서 바다 길로 해서 스리랑카로 돌아서 말입니다.
바다 길도 하여튼 아주 참 견고한 배가 있는 때가 아니기 때문에 풍파를 만나면 또 돌아오고 그러겠지요. 풍파 때문에 배가 침몰이 되고 말입니다.
그러니 몇 번이고 하여튼 중국에서 출발해가지고 또 바람 불면 할 수없이 돌아와서 또 가야되고 말입니다.
그렁저렁해서 가는데 3년 걸린단 말입니다. 3년 걸려가지고 처음에 갈 때도 결심을 많이 품었겠지만 고생이 너무 지나치면 사람이 결심을 품어도 결심이 차근차근 흐미 해지고 않겠습니까.
인도에 가서 인도 말 배워야 되고 배워가지고서 그냥 올 수가 있습니까. 될수록 하여튼 자기 힘으로 해서 짊어질 만치 또 불경을 가져와야 됩니다.
낙타에다 싫고 어디다 싫고 그래가지고서 가져와야 되겠지요. 기왕 생명 걸고서 갔으니까. 그래서 중국 가서 인도에 가서 배우고 불경을 많이 얻어가지고 부처님 사리를 얻어 가지고 온단 말입니다.
올 때는 육로로 오니까 히말라야 산을 넘어야 되어요. 히말라야 산은 고도 평균 5천 미터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여튼 워낙 고생이 심하니까 내가 이렇게 공부해서 뭣할 것인가? 세상이라는 것은 이와 같이 고생 밖에는 없는 것인가? 어떤 공부를 해야 고생 없이 공부를 빨리 할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해서 항시 생각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마치 그렇게 하다가 간다라 지방, 간다라 지방은 북인도 지방인데 그때 간다라에 가서 관음굴(觀音窟)이라. 관음굴이란 굴이 있었다고 그래요.
굴속에 들어가서 내 지혜(智慧)로 해서는 내가 잘 모르니까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부처님 감응을 받고서 내가 지혜를 받아야 되겠구나.
그래서 거기서 7일 동안 단식(斷食)을 하고서 기도(祈禱)를 모셨어요. 기도를 모시니까 정말로 이렛만에 관음보살께서 자비로운 모습을 나토시면서 말씀을 하시더라고 그래요. 그래서 관음보살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대는 마음이 아주 순진하고 마음이 그야말로 아주 순결한 분이기 때문에 그대는 마땅히 염불(念佛)로 해서 공부를 하는 것이 그대는 훨썩 빠르다는 그런 말씀을 관음보살님한테서 얻었단 말입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밥도 안 먹고 기도를 모시고, 기진맥진 했는데 관음보살 친견하고서 그 말씀을 들은 뒤에 순식간에 피로가 싹 다 풀려버린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그런 경험을 더러 가지신 분들이 없으십니까? 우리가 공부를 정말로 지성으로 한다고 생각 할 때에 어느 순간 그 지성스러운 마음 때문에 우리 모든 갈등이나 그런 것들이 다 싹 순식간에 가셔가는 그런 것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꼭 그런 경험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참 정말로 우리라는 것은 본래 부처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현재 된 대로 해서 그대로 우리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근본은 바로 부처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부처님한테 간절히 우리 모두를 다 바치고서 기원 드린다고 생각 할 때에 또는 부처님이라는 것은 바로 만능의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부처님한테, 부처님이 감응할 정도가 되면 그때는 순식간에 우리 모든 갈등이 다 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민삼장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아주 처음에는 차라리 내가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어떨가 하는 그런 비관적인 맘도 품고 또 히말라야 산을 넘어서 중국으로 올라면은 고비사막을 넘어야 되고 아주 그야말로 참 심난하겠지요. 그것이,
그러나 관음보살의 영고(靈告), 관음보살의 신령스런 말씀을 들은 뒤에는 하여튼 짐을 짊어져도 무거운 줄을 모르고 몸도 마음도 가푼하게 중국에 들어오니까 중국 당나라 현종황제는 대사께서 잘 돌아오셨다고 하면서 자민삼장이라는 호(號)도 주고 말입니다. 그야말로 참 삼장법사라는 호를 저마다 못 받는 것입니다. 중국에서도 몇 사람뿐인 삼장법사(三藏法師)라는 호를 받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인도에 다녀와서 『정토자민집』이란 책을 내놓았어요. 냈는데, 그이가 아주 말씀을 조금도 숨김없이 아주 정직하게 하는 분이기 때문에 그렁저렁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 양반을 좋게 안 본단 말입니다.
불교에서 가장 큰 거짓말이 무엇인고하면은 이것은 그냥 보통 사기나 그런 거짓말이 아니라 도(道)를 깨닫지 못하고 깨달았다고 하거나 어떠한 깊은 삼매(三昧)를 증명(證明)하지 못하고 증명했다는 그런 거짓말 이것을 굉장히 큰 사기(詐欺)로 봅니다.
그래 세상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없지가 않단 말입니다. 그 당시도 못 깨닫고 깨달았다하는 도인 행세하는 그런 스님도 많이 있고 말입니다. 또는 어느 경계를 자기가 증명도 못하고 했다고 한단 말입니다.
누가 대접하면 공부를 많이 했다고 그래야 체면이 서겠지요. 그러나 그 보통사람들의 사기는 그야말로 별로 큰 사기가 아니지만 그러나 성자(聖者)를 사기하는 그런 것은 가장 큰 거짓말로 세워서 사실은 못 깨닫고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이라든가 또는 어느 경계를 못 증명하고 증명했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은 우리 승려에서 다 쫓겨나는 것입니다. 대망언(大妄言) 그래서 그나 사람들이 다 위장을 잘 하니까 그렁저렁 넘어갈랑가 모르겠지만 그래서 자민삼장도 그와 같이 조금도 에누리 없이 그런 사람들을 공격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도 도(道) 진리(眞理)를 시기한 그런 분들이 꽤 많이 있었던가 그런 분들한테 미움을 사서 그래서 그 양반 돌아가신 뒤에는 그 양반 책을 다 태워버렸어요. 거두어서,
다행히 우리 한국(韓國)의 동화사에서 자민집이 나왔다 그래요. 그것도 일본사람이 발견했습니다. 일본 불교학자가 상당히 정도가 높은 논문을 작성해서 말입니다. 자민집이란 것을 내서 얻어 봤습니다만 그걸 보니까 정말로 하여튼 자민삼장이란 분은 굉장히 위대한 분입니다.
그분이 아까 말씀마따나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염원(念願)을 받고서 그이가 염불하는 공부를 창도(唱導)했지만은 그 양반 식의 염불은 계행(戒行)과 참선(參禪)과 염불(念佛) 세 가지가 똑같이 겸비가 돼있습니다.
일반사람들은 더러는 염불은 염불만, 참선은 참선만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자민삼장의 염불은 참선과 염불과 계율과 같이 다 겸비가 되어있단 말입니다.
사실은 자민삼장 말씀마따나 참선염불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어째서 둘이 아닌가 하면은 우리가 본래(本來)로 부처인데 부처가 지금 되어가지 않습니까. 부처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무슨 방법을 어떻게 취하는 것인가. 그런 방법적인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떻게 하거나 학문(學文)도 많이 배우든 안 배우든 일자무식(一字無識)이건 간에 우리마음이 오로지 부처님한테 가서 부처님한테로 우리 마음이 오로지 모아지면 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선방(禪房)에서 오로지 좌선(坐禪)하는 것도 역시 부처님이 되는 한 공부가 될 것이고 또는 선방에 우리가 안 들어간다 하더라도 자기 집에서나 어디서나 우리마음을 통일을 시켜가지고서 우리마음이 오로지 일념(一念)으로 되면 그만치 부처가 되어가는 지름길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주문을 외이든 염불을 하든 또는 좌선을 하고 있든 그런 방법적인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마음이 얼마만치 순수(純粹)하니 통일(統一)이 되는가? 즉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민삼장 아까 말씀마따나 참선과 염불과 계율이 원래 나란히 가는 다 겸비해가는 그런 쪽으로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염불한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하는 식은 대체로 칭명염불(稱名念佛)입니다. 이름만 그냥 죽자고 이름만 외인단 말입니다. 이름만 주로 외우고 또 중국의 4세기 때 혜원대사 그분도 염불(念佛)을 창도한 분인데 그분은 그냥 속으로 염불만 하고서 그이는 앉아서 좌선만 주로 한단 말입니다. 이른바 염불화두(念佛話頭)라. 화두를 염불로 한단 말입니다. 그런 식이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주로 가정에서는 아무래도 염불을 하기가 제일 손쉽지 않습니까. 염불을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역시 아까 제가 말씀드린 자민삼장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소리를 안 내도 무방하고 우리마음이 하여튼 부처님한테 가있으면 되는 것이니까 그러나 일반사람들은 소리를 안 내면은 우리 마음이 자꾸만 산란스러우니까 마음을 모으기가 어렵겠지요.
그래서 그런 때는 염불(念佛)도량, 여러분들은 안 보셨는가 모르시지만 우리가 막 승려가 될 때는 2-3십대에 큰절에 가면 염불당(念佛堂)이 있어요. 스님네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북을 치고 말입니다.
신도님들이 몇백명 모여서 한철 90일 동안 공부를 합니다. 90일 동안 하고나면 대체로 공부가 상당히 된 기분들이란 말입니다. 지금은 그런데가 없으니까 좀 아쉽게 생각합니다만 앞으로 가능하면 어디다 하던지 간에 그런 염불당을 만들어서 그러니까 한철, 한철이라는 참선하시는 분들로서는 90일입니다. 90일 동안 하여튼 북을 치고 하면 재미도 지고 그런 것 같아요. 저는 보기만 하고 안 해보았습니다만
그래서 자민삼장은 그렇게 위대한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앞으로 공부하는데도 그런 분들 자기 생명을 바치고서 도를 구하는 구도인(求道人)들의 행적을 따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너무 제가 말씀을 많이 하면 무덥고 더러는 여러분들이 지루하실 것이고 제가 말씀을 줄여서 끝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우리가 상(相)을 떠나지 못하면 우리 마음은 불안의식을 우리가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불안을 떠나야 참다운 종교인데 불안을 떠나기 위해서는 그 허망한 현상-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있어지고 하는 허망한 현상-사실은 제법공(諸法空)밖에는 아닌 꿈이요 허깨비요 그런 것에다 우리마음을 구속을 받지를 마시고 말입니다.
아! 그런 것은 모두가 허망한 것이구나! 그 불성에다가 진여불성(眞如佛性)에다가 우리마음을 딱 안주를 시킨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안심입명(安心立命)을 할 수가 있는 것이고 또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만능(萬能)의 자리이기 때문에 정말로 나한테는 모두를 다 할 수가 있고 도두를 다 알 수가 있다. 분명히 그러는 것인데 우리가 개발을 못한단 말입니다. 개발하는 작업이 이제 참선(參禪)이고 염불(念佛)입니다.
그래서 염불을 한다 하더라도 일본사람식으로 그냥 이름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생명이 하나의 생명이다. 부처님은 하나의 우주를 다 통할(統轄)해 있는 하나의 진정한 찬란하고 영롱한 광명(光明)이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주(宇宙)에 충만(充滿)한 그런 광명을 상상하면서 이미지를 우리가 부각(浮刻)을 시키면서 염불(念佛)을 하시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20000702-성륜사 법성당-청화대선사 설법
20000702-정안 김성도 촬영
20050923-DVD작업-본정 김영동
20080627-녹취-주안 한동일
20080705-재정리-본정 김영동
'3. 청화 큰스님 법문집 > 4. 금강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76호 성륜사 하안거 결제법문 (0) | 2009.07.06 |
---|---|
제75호 1999년 10월18일 불교TV 법문 (0) | 2009.07.05 |
제73호 순선안심법문(純禪安心法門)-03 (0) | 2009.07.03 |
제72호 순선안심법문(純禪安心法門)-02 (0) | 2009.07.02 |
제71호 순선안심법문(純禪安心法門)-01 (0) | 2009.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