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8 호>
2001년 4월 18일 BBS 광주불교방송개국 6주년 기념법회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
광주불교방송국 기념법회에 즈음해서 축복(祝福)의 합장(合掌)을 드립니다. 아울러서 사장님 이하 임직원 여러분들의 부처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홍포(弘布)하시는 공덕(功德)에 대해서 충심으로 찬탄(讚嘆)과 감사의 합장을 드립니다.
부처님 법(法)은 특별히 우리가 들추어내서 이것이다. 이렇게하기 이전에 부처님 법은 바로 우주(宇宙)의 법입니다.
부처님 법을 떠나서 근본원리의 우주의 법이 없는 것이고 우주의 도리를 떠나서 부처님 법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씀들 합니다만은 불교(佛敎)에서 이른바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라. 대총상법문이란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대총상법문이란 것은 그 어느 것도 본체론(本體論)적인 의미라든가 또는 현상적(現象的)인 의미라든가 모든 실존적(實存的)인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는 가르침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또 중생(衆生)의 그릇 따라서 시기상응(時期相應)한 법문이라, 시기상응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그 시대 적합한 법문(法門)인 동시에 각기 중생의 그릇 따라서 거기에 알맞은 법문이라는 뜻이 시기상응한 법문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은 그러면은 시기상응한 법은 어떠한 구도로 되어있는가? 이것은 흔히 경전(經典)에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만은 3시기, 부처님 법의 심천(深淺)따라서 세 가지 시기로 구분해서 말씀을 합니다.
맨 처음에 가장 정도가 낮은 것은 이른바 유교(有敎)라. 있을 유(有)자, 가르칠 교(敎)자, 유교입니다.
유교라는 것은 우리 중생들이 보는, 중생들의 견해(見解)따라서 이해 할 수 있는 그러한 정도에 맞추어서 중생들은 나도 있고 너도 있고 또 중생들의 감각에 따라서 거기에 대상(對相)적으로 비추어지는 세계(世界)가 있지 않겠습니까. 자연계(自然界)라든가 여러 가지, 가지가지의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범주(範疇)에 속해있는 그런 법, 이것이 이른바 유교, 있을 유(有)자, 가르칠 교(敎)자, 유교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유교 이것은 하나의 상식적(常識的)인 이른바 소박(素朴)한 그런 가르침이 되기 때문에 우리 중생들이 미처 깊은 심오(深奧)한 가르침을 모르고서 상식적인 상대유한적인 범위에 있을 때는 해당이 되지만은 좀 더 심오한 가르침을 위해서는 이것은 유교로 해서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른바 과학적(科學的)으로 깊이 탐구(探究)를 한다든가 또는 철학적(哲學的)이나 종교적(宗敎的)으로 깊이 명상(瞑想)을 한다든가 그런 차원(次元)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유교는 거기에 합당한 가르침이 못됩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공교(空敎)라, 이른바 빌 공(空)자, 가르칠 교(敎)자, 공교말씀입니다.
우리가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든가 금강경(金剛經)이나 반야 600부나 그런 가르침은 대체로 공교의 가르침을 주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제법공(諸法空)이라든가 또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든가 그러한 금강경에 있는 공(空)도리 말씀들은 공교에 해당한 셈인데 이 공교도 역시 우리가 상식적인 견해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 중생들 소박한 생각으로 해서는 분명히 있는 것이고 자타(自他)의 구분이 있는 것인데 그 모든 것이 본래로 공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은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눈에 보이는 존재를 차근차근 분석해서 나중에 끄트머리에 가서 다 비어버리는 분석할 석(析)자, 빌 공(空)자, 석공(析空)이 있는 것이고 그런가 하면은 당체즉공(當體卽空)이라.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반야심경도 내내야 색즉공(色卽空)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당체, 당체가 바로 공이라는 이런 것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중생들이 느끼는 분석(分析)해서 알아차리는 석공에 대응해서 체공(體空)이라. 몸 체(體)자, 빌 공(空)자, 체공이라고 그럽니다.
반야심경 공(空)이나 금강경 공(空)이나 그런 공들은 모두가 다 체공인 셈입니다.
그래서 그 공을 석공과 아울러서 보다 근원적인 공(空)도리 체공과 이런 도리를 말씀한 법문은 이른바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공교(空敎)에 해당하고 그러나 부처님 말씀은 공교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제가 허두에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을 말씀을 했습니다만은 그 근원적(根源的)인 부처님의 제법실상(諸法實相)도리, 부처님께서 조금도 방편(方便)을 쓰시지 않고서 그대로 말씀하신 제법(諸法) 그대로 중도실상(中道實相)아님이 없다. 이런 도리를 말씀한 그러한 법문은 이른바 중도교(中道敎)라,
따라서 중도교가 부처님께서 하시고 싶은 본원적(本源的)인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제 말씀도 이러한 세 차원으로 해서 소박한 우리 중생들이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견해(見解)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유교(有敎), 그런가 하면은 본래로 비어있는 자리, 제법이 공 도리로 말씀해있는 그런 공교(空敎) 그와 동시에 이른바 대총상법문 이라고 하는 조금도 방편이 없이 방편가설(方便假說)이 없이 법의 실상 그대로 말씀한 중도교, 이러한 것을 가려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비유담으로 보면은 삼수도하(三獸渡河)라고 그래서 삼수도하라, 토끼나 말이나 소나 이러한 덩치로든가 능력으로 3가지 종류의 짐승이 시냇물을 건너는데 인도에서 비유를 들었으니까 주로 갠지스강이 되겠지요.
갠지스강을 건너는데 토끼란 놈은 가볍고 덩치도 작고 그러니까 물에 둥둥 떠서 건넌단 말입니다. 그래서 법에 비기면 마치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러한 중생들이 느끼는 상대유한적인 그런 차원에서 말씀하신 법문이 토끼가 물에 둥둥 떠서 물에 깊이는 헤아리지도 못하고서 그냥 겉으로만 진리(眞理)를 느끼는 그러한 이른바 아까 말씀드린바 유교라, 그런 것에 해당할 수가 있는 것이고,
또는 말이라는 놈도 덩치도 좀 크고 무게가 무겁고 하니까 그러니까 상당히 물에 잠겨서 그 시냇물의 바닥까지는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가운데쯤이나 중심을 차지 해가지고서 건너는 그런 정도란 말입니다. 이것은 이른바 공교(空敎)에 해당하고,
또는 소나 코끼리나 그런 덩치가 크고 무거운 것들은 대체나 그때는 바닥을 뚜벅뚜벅 바닥까지 닿도록 까지 걸으면서 걷는단 말입니다.
그것은 이른바 법의 깊이로 말 하면은 토끼가 걷는 것은 법의 표면이니까 이른바 소승적(小乘的)인 또는 범부(凡夫)적인 그런 차원(次元)을 말하는 것이고 또는 가운데 만침 중간쯤이나 그렇게 떠서 건너는 말 정도는 이것은 이른바 공교(空敎)라. 모든 존재가 본래로 비어있다는 그런 정도의 가르침을 말씀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코끼리나 소나 그런 것이 바닥을 강바닥을 제대로 밟고 건너는 것은 마치 법의 근원적인 것을 조금도 방편가설(方便假說)이 없이 오로지 중도실상(中道實相)의 그런 이치(理致)를 깨닫는 그런 정도의 법문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서 부처님 경전(經典)의 말씀을 하면은 삼수도하라, 토끼라든가 또는 말이라든가 소나 코끼리나 세 가지 동물의 법(法)의 심천(深淺)을 깊고 옅은 것을 상징하면서 시냇물을 건너가는 그런 것을 비유담으로 말씀을 했습니다.
헌데 우리가 흔히 말씀을 하기를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그런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대도무문이라, 대도(大道) 큰 도는 본래 일정한 고유한 문이 없단 말입니다.
스님들도 대도무문이란 말을 더러 가끔씩 쓰지 않습니까. 그러나 대도무문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쓰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대도무문이라는 것은 모든 법(法)을 총망라해서 조금도 흠절이 없는 원만(圓滿) 무결(無缺)한 그런 뜻을 가리켜서 대도무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대도무문에 따르는 말씀은 무문관(無門關)이라는 선(禪)의 참선(參禪)의 논장(論藏)에 가 있습니다만 무문관에 있는 것을 보면, 대도무문(大道無門) 천차유로(千差有路)라. 대도라 하는 것은 큰 진리(眞理)라 하는 것은 본래 문이 없지만은 또 인연(因緣)이 따르면 그때는 천차유로라, 천 가지 만 가지의 길이 있단 말입니다.
투득차관(透得此關)하니 그 대도의 무문이란 문이 없다는 관문을 두드려서 통과를 할 라고 생각할 때는 건곤독보(乾坤獨步)라, 건곤이라는 것은 천지(天地) 아닙니까. 독보라, 홀로 독(獨)자, 걸을 보步자, 천지를 조금도 장애(障碍)없이 천지만물(天地萬物)이 모든 것에 조금도 막힘이 없이 무장무애(無障無礙)한 그러한 경계(境界)가 이른바 건곤독보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그런 대도라는 것은 끝도 갓도 없이 광대무변(廣大無邊)한 것이고 또는 무량(無量)의 공덕(功德)을 갖춘 자리인데 그건 저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무문관이라 하는, 요새 우리 승가(僧家)에도 무문관을 지어가지고서 가서 6개월 코스로 공부도 하고 1년 코스로 독방에서 공부도 하고 이렇게 되지 않습니까.
아무튼 무문이란, 본래 문이 없는 그러한 도리를 우리가 통과한다고 생각 할 때에 건곤독보라, 모든 것에 막힘이 없단 말입니다.
즉 다시 말씀드리면은 제법공(諸法空)도리, 제법공도리를 깨닫는 것이 무문관을 통과 하는 것입니다. 제법공도리를 통과하지 못하면은 무문관을 통과를 못하는것이 되겠지요.
그러면 제법공도리는 어떠한 것인가? 아까도 얼핏 언급을 했습니다만은 사실은 제법공도리 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논리적(論理的)으로 우리가 사견(私見)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체험(體驗)으로 해서 아는 것이 이른바 아까 말씀 드린바와 같이 몸 체(體)자, 빌 공(空)자, 바로 체공(體空)이란 말입니다.
현대과학(現代科學)적으로 물질(物質)을 분석(分析)해서 원소(元素)가 되고 원자(原子)가 되고 소립자(素粒子)가 되고 한 것은 하나의 석공(析空)적인 것이 되겠지요.
사실 물질(物質)을 언급했으니까 말하는 것이지 물질이라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본래로 없는 것입니다.
불자님들이나 또는 일반 여기계신 분들이나 불교(佛敎)를 공부할 때에 물질이 어째서 없을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해서 납득하기가 참 곤란스럽습니다.
우리 중생들 견해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내 몸도 물질인 것이고 우리가 모두가 다 물질가운데 생활을 하는 것인데 그나 물질이 없다고 할 때는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이 무슨 살맛이 있을 것인가.
우리가 싸우는 것도 모두가 다 물질 때문에 싸우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물질은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옛날에는 납득이 안 갔지만은 현대정밀 물리학(物理學),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적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에 물리학자는 물질이 없다는 것을 지금 느끼고 있습니다.
그 원자구조(原子構造)론, 라터포드나 보아라든지 그런 분들의 원자 구조론을 보면은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가 없는 전자현미경(電子顯微鏡)으로 가까스로 추측 할 수 있는 정도의 그런 걸로 해서 원자구조를 알 수가 있다는 것인데 원자구조가 마치 태양을 중심으로 해서 각 위성들이 태양의 주변을 뱅뱅 도는 그런 도리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도저히 볼래야 볼 수도 없는 모든 존재, 모든 물질의 근원적인 아주 미세(微細)한 단계까지 가서 보면은 그런 것이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지구(地球)라든가 달들이 태양의 주변을 돌고 있는 것이나 구조가 다 비슷비슷 똑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장 작은 알갱이 이른바 전자(電子)라든가 양자(陽子)라든가 중성자(中性子)나 그런 것은 그러면 어떠한 것인가. 그런 것은 순간순간에 이루어 졌다가 소멸(消滅)되었다가 또 상호전환(相互轉換)되었다가 그 조그마한 물질이라도 그것이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모르거니와 가만히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순간순간 소멸되고 이루어지고 또 서로 바꾸어지고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현대물리학적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물질이라는 것은 조금도 측정 할 수가 없습니다. 측정 할 수가 없으니까 이른바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원리(不確定性原理)라. 그 운동량(運動量)이나 위치(位置)나 이런 것을 정확히 측정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질에 대해서는 사실은 지금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가 관측(觀測)이 되고 또는 실험(實驗)이 되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온전히 있어야 관측할 수가 있는 것이고 실험할 수가 있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끄트머리에 가서 지금 현대물리학적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끄트머리에 가서는 도저히 그것이 관측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실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음양(陰陽)이 부딪히면 마이너스 플러스가 부딪히면은 그때는 텅비어버리고 에너지만 남는단 말입니다.
따라서 물질(物質)의 근원(根源)은 결국은 다 공(空)으로 되어버린다. 물질이 종당에 가서는 다 비어버린다. 이런 것이 지금 현대물리학의 결론입니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은 다 비어버렸으니까 그 이상 또 알 수 없단 말입니다. 무엇이 있다는 것은 시간 공간적으로 존재가 있어야 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시간 공간적으로 존재 할수 없는 것은 현대물리학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과학은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다 비어버린 그 연원은 무엇인가? 저쪽 끝 피안(彼岸)은 무엇인가? 물질의 근원적인 것은 무엇인가? 아까 제가 허두에 말씀드린 대총상법문이 여기에 해당되는 법문이 되겠습니다.
다 비어버린 그 자리, 제법공이 비어버린 그 자리,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은 가까스로 제법공(諸法空)도리를 증명합니다. 증명하나 공이 아닌 자리, 공의 저편은 무엇인가?
그 물질이 비어버렸으면 물질은 그러면은 근원적인 물질의 실체는 무엇인가? 가장 미세한 원자력(原子力)이 비어버렸다고 생각 할 때에 따지고 보면 결국은 우리 몸도 비고 다 비어있는 것입니다. 금덩어리나 다이아몬드나 결국은 다 본래로 비어있단 말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衆生)이 제한(制限)된 시각(視覺)으로 보는 것이니까 나같이 보이고 너같이 보이고 금으로 보이고 다이아몬드로 보이는 것이지 정말 정밀과학(精密科學)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사실은 그대로 다 비어있단 말입니다. 분석(分析)한 뒤에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 모든 존재들의 근원이 이른바 원자구조(原子構造)라,
그런 원자들이 주로 움직이고 서로 상호전환(相互轉換)되고 상호작용(相互作用)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렇게 아끼고 그렇게 소중하니 건사하고 간직한 우리 몸뚱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것도 원자구조의 그러한 관계성을 떠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는 플라톤, 플라톤은 유명한 사람 아닙니까. 서구 철학(哲學)이나 서구종교(宗敎)나 그러한 것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그런 분들의 영향을 안 받은 것이 없습니다.
지금 기독교(基督敎) 신학(神學)도 역시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간명해서 훌륭한 체계지만은 신앙(信仰)으로 체계가 설 때는 역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그런 분들의 교리(敎理)를 갖다가 체계를 세웠단 말입니다.
그럴 정도로 지금 서구의 모든 서양의 모든 것은 대체로 그리스문화, 그리스의 철학을 참고로 안 한 것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헌데 그 플라톤이, 플라톤의 공화국 가운데가 있는 말씀입니다마는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라, 동굴의 비유라는 것은 동굴은 내내야 굴 아닙니까. 굴속에 있는 비유를 들어서 말씀한 것인데 그건 무엇인고 하면은 일반 사람들은 지금 동굴 속에 갇혀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도 깨닫지 못하고서 우리가 범부중생(凡夫衆生)인 한에는 동굴에 갇혀있다고 봐야 되겠지요.
그래서 일반사람들은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동굴에 갇혀있는 그런 존재나 마찬가지고 또는 깨달은 분들은 이른바 태양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태양과 동굴의 비유라고 말씀을 합니다.
헌데 따라서 일반사람들은 동굴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사실대로 보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의 불행(不幸)이라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를 못하는 데가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가 바로 보면은 분명히 모두가 다 제법이 공이다. 비어있는 것인데 우리 중생들은 중생의 업장(業障)에 가린 대로 보이는 것인데 따라서 그것은 바로 볼 수가 없는 그런 차원인데 그런 차원에서 보는 것이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또는 미움도 있고 사랑도 있고 그런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가르침은 그냥 덮어놓고 남을 사랑하라. 또는 자기 것을 무주상(無住相)으로 보시(布施)해라. 그런 말씀을 부처님은 하신 적이 없습니다. 꼭 다 모두가 깊은 철학적인 깊은 도리가 전제가 되어있단 말입니다.
나와 남이 본래로 둘이 아니기 때문에 나와 남이 본래 둘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는 자동적으로 남한테 해꼬지 할 수가 없는 것이고, 아, 나와 남이 둘이 없거니 자기만 위해서 이득을 취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아까도 플라톤의 비유를 말씀을 했습니다만은 역시 우리중생들은 지금 동굴 속에서 동굴의 어두운 가운데서 시야도 없고 바로보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철인(哲人)들이라든가 깨달은 분들이 할 일은 무엇인고 하면은 동굴에 들어 있는 그런 중생들을 위해서 바른 견해, 동굴에 들어있는 그대들이 보는 것은 바로 보는 것이 아니니까 바로 봐야 된다. 바로 보기 위해서는 동굴에서 나와서 태양광선에 비추어서 밝은 세상에서 바로 봐야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이른바 깨달은 분들이 철인(哲人)들이 할 일이라고 플라톤이 말씀을 했어요.
헌데 역시 우리 중생(衆生)들은 현상(現象)만 가지고 따집니다.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상(相)만 가지고 따진단 말입니다. 근본성품(根本性品)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다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섭상귀체(攝相歸體)라, 섭상귀성(攝相歸性)이라, 모든 상(相)을 거두어서 본체(本體)로 가는거란 말입니다.
일반 중생과 깨달은 분들은, 중생은 상만 가지고서 상(相)의 범주(範疇)내에서 시야비야하고 갈등합니다만은 깨달은 성자(聖者)들은 성품(性品)을 깨달아서 성품에 입각해서 모두를 다 제자리로 하고 판단도 하고 그런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상 이것은 근원적으로 본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제법이 공이라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본원적(本源的)인 도리기 때문에 제법공(諸法空)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나라는 상, 너라는 상 또는 곱다는 상, 밉다는 상, 이런 것은 모두가 다 사실은 허망(虛妄)하단 말입니다.
허망한 것을 우리는 즉 말하자면 속아 사는 것입니다. 속임수에 그대로 우리가 속고 있단 말입니다.
금강경(金剛經)에서 있는 법문(法問)아닙니까만은 아상(我相)이나 나라는 상이나, 인상(人相)이나 너라는 상이나, 중생상(衆生相)이나 중생이라는 상이나, 또는 수명(壽命)이 짧다 길다하는 수자상(壽者相)이나, 이런 상은 모두가 다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 허망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상이 있으면은 그때는 중생(衆生)인 것이고 범부(凡夫)고, 이런 상이 없어야 그래야 비로소 성인(聖人)이고 부처란 말입니다. 그 명백히 금강경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은 쉬운데 우리 중생들은 사실은 그렇게 보지를 못하지 않습니까. 지금 상 가운데서 그때그때 자기 마음이 내키면은 그때는 그냥 조금 자기스스로 기분도 좋고 모다 그럴것이지만은 상에 보이는 것이 자기한테 해로우면은 그냥 또 진심(嗔心)을 내고 우리 마음으로 갈등을 일으킨단 말입니다.
그래서 불교(佛敎)를 공부하는 분들은 어떻게 해서 상(相)을 없앨 것인가? 그것이 중요한 불교의 수행력(修行力)이 되겠지요. 오랜 동안 우리가 염불(念佛)도 하고 참선(參禪)도 하고 또는 경(經)도 보고 하면은 차근차근 상이 줄어지기는 하겠습니다.
그러나 단박에 어떻게 하는게 상이 없이 할 것인가? 이런 문제는 스님네 뿐만이 아니라 우리 불자들 또는 일반사람들도 모두가 다 굉장히 마음으로 간구해서 마지않는 중요한 문제 안 되겠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이 말로만 하는 이른바 불교말로 하면은 문자(文字)적 갈등이라. 또는 시비분별(是非分別)하는 아주 차별적(差別的)인 그런데서 머물러 버리면은 참다운 불법(佛法)이 될래야 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냥 우리 중생들이 이론적(理論的)으로만 느끼라는 그런 가르침은 아니지 않습니까. 꼭 교행증(敎行證)이라, 부처님 가르침이 있으면은 또 우리가 가르침대로 실천(實踐)하고 또는 그다음에는 반드시 증명(證明)해야 한단 말입니다.
증명해야만이 우리가 이른바 생노병사(生老病死)라하는 한계상황을 넘을수가 있단 말입니다. 증명(證明) 못하면은 그때는 아무리 알기는 많이 안다고 하더라도 우리 범부의 그런 범주를 넘어설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내내야 끝끝내 범부라 하는 그런 자리를 벗어날 수가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이 문득 깨달아서 범부(凡夫)의 자리를 비약적(飛躍的)으로 초월(超越)해서 깨달은 성자(聖者)가 될것인가?
우리가 생각할 때는 성자가 되는 것은 저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고, 출가(出家)한 분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지 일반 신도(信徒)는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 중생들이 지금 비록 범부노릇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본래로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본래로 바로 부처라는 것이 굉장히 심수오묘(深邃奧妙)한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닦아가지고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로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다른 종교(宗敎)와 불교(佛敎)와의 차이는 거가 있습니다. 또는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의 차이도 거가 있습니다. 본래 부처라는 소식을 납득을 못하면은 사실은 대승이 못됩니다.
본래 부처라는 것은 우리가 공부하지 않고 그대로 준준무식(蠢蠢無識)한 그런 상태라 하더라도 근원적인 부처님 눈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에 청정(淸淨)한 혜안(慧眼)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똑같은 부처란 말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뿐만이 아니라, 또는 석가모니로 부터서 28대 조사 달마(達磨)스님까지 그렇게 많은 훌륭한 조사(祖師)가 나오고 그 외에도 무수한 성자(聖者)가 많이 나왔지만은 그런 성자들이나 현재 우리 범부중생(凡夫衆生)들이나 그 마음상태, 우리 마음상태는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核心)입니다. 이것이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본래 부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을 보면은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제불여래(諸佛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면은 그 모든 부처님은 바로 우주(宇宙)를 몸으로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몸은 바로 우주입니다. 우주를 몸으로 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안 계신 데가 없이 다 계시는 것이고 보다 확실히 말하면은 우주 그대로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또 어떠한 것인가? 모양이 있는 허망무상(虛妄無常)한 모양이 있는 것도 그러는 것인데 하물며 우리 마음은 이것은 마음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든 존재(存在)의 가장 중요한 핵심(核心)이 우리 마음 아닙니까. 마음은 더구나 말할 것도 없이 마음은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아까 제가 물질(物質)론에 관해서 말씀을 드렸듯이 사실은 부처님 가르침은 물질이라는 것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제법(諸法)이 공(空)자리에 어디 가서 물질이 끼어들 수가 있겠습니까.
옛날에는 미처 몰랐지만은 지금 현재는 현대과학(現代科學)도 물질(物質)이 없다는 것을 증명(證明)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부처님이 제자로 봐서는 굉장히 축복(祝福)된 일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다 비어있는 소식을 알려면 통해야 알 것인데, 이걸 증명해야지 비로소 다 비었구나. 스스로 비어있는 것을 훤히 봐져야 할 것인데 통하지 못하면서 우리가 빈 것을 아는 것은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의 공덕(功德)이란 말입니다.
물리학에서 증명 했으니까 우리가 그때는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앞에 있는 탁자는 무엇인가? 이것도 물리학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움직이고 있단 말입니다. 기체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액체나 고체나 모두가 다 움직이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제한된 눈으로 해서 보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우리가 상식적(常識的)으로 알고서 다 알았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상식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에 우리가 통달무애(通達無碍)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성자(聖者)가 되는 길이란 말입니다. 성자가 우리가 안 되고 베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마음은 본래로 부처거니 금생(今生)에 못되면 또 저 내생(來生)에 우리가 몇 생을 윤회(輪廻)한다 하더라도 꼭 부처가 되고마는 것입니다. 게으름 부리면은 더 늣게 더 만생 천생 우리가 윤회해야 되겠지요.
그 우리 불자님들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라, 대총상법문은 우리가 조금도 방편가설(方便假說)이 없이 그대로 한 법문이 대총상법문입니다.
그래서 대총상법문에다가 조금더 부연(敷衍)을 시키면은 어떤 가르침이 되는고 하면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진여법성이라, 모든 존재는 진여불성이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진여불성이 들어가야 이른바 대총상법문이 됩니다.
진여도 역시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가 진여 아닙니까. 진여를 조금 더 부연해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진여법성(眞如法性)이다. 그런 말들을 하지 않습니까.
대승불교(大乘佛敎)의 할아버지라는 분이 이른바 마명대사(馬鳴大師)라, 마명대사라는 분은 12대 조사입니다. 마명대사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라, 대승(大乘)의 신앙심(信仰心)을 일으키는 논장(論藏)을 냈단 말입니다.
거기에 진여법성(眞如法性)이란 말씀이 고구정녕으로 말씀해 있습니다. 우주란 것은 진여불성, 진여불성 이것이 우주의 본체(本體)란 말입니다. 또는 동시에 우리 마음의 본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중생(衆生)들이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진여연기(眞如緣起)라, 우주만유(宇宙萬有)는 다 진여불성자체의 눈으로 해서 우주만유가 되었단 말입니다.
진여불성이 우주만유가 되었다는 그런 법문이 이른바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입니다.
어느 것도 진여불성의 범주(範疇)에 안 들어간 것이 없습니다. 내 마음도 내 몸도 세상 이치 모두가 다 진여불성, 진여법성 속에 다 들어가 있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러기에 시방여래(時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바로 우주란 것은 부처님의 몸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몸은 바로 우주입니다. 어느 것도 부처님의 진여법성의 생명을 벗어난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주란 것이 이대로 바로 부처님의 생명(生命)이란 말입니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주생명(宇宙生命)입니다.
우리 마음과 우주생명은 어떠한 것인가? 우리가 참선(參禪)을 할 때 우리 불자님들도 기왕이면은 참선을 하시고 싶으겠지요. 우리가 참선이라는 것은 문득 깨닫는 가르침이 참선 아닙니까. 쉬운 말로 하면은,
따라서 문득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마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아야 문득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실체(實體)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 마음이나 우리마음이나 절대로 차이가 없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적(時間的)으로 이우러지고 늙어지고 젊어지고 할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어려서 마음이나 늙어서 마음이나 마음은 절대로 늙어지고 젊어지고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또는 과거전생(過去前生)에 마음과 금생(今生)마음이나 이것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마음은 불생(不生)이 불멸(不滅)이라. 불생이 불멸이라,
지금 우리 불교인들이 윤회설(輪回說)을 소홀히 생각을 합니다. 허나 윤회설은 굉장히 심오(深奧)한 가르침입니다.
윤회설 이것은 우리 중생들이 생활상으로 보나 우리 운명(運命)을 개척하는 그런면으로 보나 아주 중요한 심심미묘(深深微妙)한 법문입니다.
윤회설을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근심걱정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과거전생도 내생명이 있었고 과거 그냥 가까운 전생이 아니라 무시이래(無始以來)라, 부처님 가르침은 심오하지 않습니까. 무시이래라, 끝도 갓도 없는 그런 과거로부터서 우리 생명이 내려온단 말입니다.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과거(過去)만 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미래(未來) 역시 끝이 없습니다. 내생(來生) 저 내생 끝이 없습니다. 과거생명이 그대로 이어있고 미래 끝이 없어놔서 그러기에 우리 생명은 불생이 불멸입니다. 원래 낳지 않고 죽지 않는단 말입니다.
원래 낳지 않고 죽지 않거니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금생(今生)에 인연(因緣)이 다해서 우리가 금생에 몸이 기관이 쓰러지고 그대로 정리가 된다 하더라도 그냥 그 즉시에 다른 생(生)을 받는단 말입니다. 죽음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죽음이 본래 없다고 생각할 때 우리가 죽음을 공포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어떻게 인연이 다해서 우리 생명이 쓰러지든간에 교통사고 만나서 죽든지 또는 약을 잘못 먹어서 죽든지 어떻게 죽든지간에 우리 숨이 끊어지자마자 또 다른 생이 이어진단 말입니다. 1초의 시차도 없이 다른 생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생이 불멸입니다. 낳지 않고 죽지 않고 영생불멸(永生不滅)한 것이 바로 우리 생명(生命)이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그와 같이 끝도 갓도 없이 무시무종(無始無終)하고 또는 생멸(生滅)을 초월(超越)한 불생불멸(不生不滅)한 그런 것이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영생불멸(永生不滅)한 생(生)자체가 우리 마음입니다.
이렇게만 생각도 할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공덕, 우리 마음의 공덕을 헤아리면은 정말로 우리가 환희용약(歡喜湧躍)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대체로 말씀만 들으신 분도 계시고 또는 읽은 분도 계시겠지요. 육조단경에서 보면은 우리 마음에는 어떠한 사람 마음에나 그대들 마음가운데 법신(法身), 보신(保身), 화신(化身)이 다 원만히 들어있다. 이렇게 말씀했단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기독교(基督敎)하고 불교(佛敎)하고 여러 가지 화해(和解)도 하고 대화(對話)한다고 애쓰지 않습니까. 그러나 무원칙(無原則)으로 원칙(原則)없이 대화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불교인들도 저쪽 신학(神學)을 공부하고 번역한 복음서도 몇 번이나 보고 그래야 할것이고 또 기독교인들도 우리 가르침을 좀 알아야 됩니다. 적어도 제법공(諸法空)도리는 알아야 서로 피차 말이 통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마음이라 하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육조단경에서도 말씀했지만은 일체삼신자성불(一體三身自性佛)이라, 우리마음 가운데 법신, 보신, 화신이 다 들어있단 말입니다.
사실 기독교(基督敎)의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이라하는 이른바 삼위일체(三位一體)라, 삼위일체법문하고도 역시 불교의 법신, 보신, 화신관은 같이 대응이 됩니다.
우리가 근원적(根源的)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시기로 보나 뭘로 보나 이것이 같이 상통이 될 수 있는 소지가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또는 진리(眞理)라는 것이 원래 동서(東西)를 통해서 본래(本來)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피차 저쪽을 이해를 하고 역사적(歷史的)인 발달(發達)과정을 우리가 따져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아무 우리가 서로피차 갈등이 없이 화해를 할 수가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법신, 보신, 화신이 다 들어있다고 이 말이 그냥 간단한 의미만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만덕(萬德)이 다 갖추고 있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법신, 보신, 화신이라는 것은 만공덕(萬功德)을 다 상징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이것도 역시 기독교 교리를 모두를 다 그 속에 포함시켜 있습니다.
또 그와 동시에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법신, 보신, 화신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또는 불교말로 하면은 사지공덕(四智功德)이라, 삼신사지(三身四智)로 해서 넉 사(四)자, 지혜 지(智)자, 사지공덕을 말하는 것인데, 사지라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의 만공덕을 대비(對比)한 것입니다. 대비한 거란 말입니다.
짧은 시간이고 또 구체적으로 알려드리는 법을, 법상을 말씀드리면은 여러분들 지루하시겠지요. 그래서 더 깊이는 안 들어 갑니다만은 아무튼 만공덕이 부처님한테 부처님 불심(佛心)에 들어있는 만공덕이 법신, 보신, 화신이고 또한 그와 동시에 사지(四智)라, 네가지 지혜(智慧)를 말하는 것인데 간추리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영생불멸(永生不滅)한, 영생불멸한 항상 상(常)자, 영생불멸한 자리를 상이라 말하는 것이고,
락(樂)은 이것은 조금도 불행(不幸)이나 그런 것이 없이 영원(永遠)의 안락(安樂)이라, 영원히 안락스러운 영원히 행복스러운 그러한 경계가 락에 해당하고,
또는 나 아(我)자, 이것은 팔대자재아(八大自在我)라 그래서 모든 신통(神通)이 여기가 다 들어있단 말입니다.
더러 우리 스님네들 가운데도 신통을 말하면은 신통 이것은 외도(外道)나 하는 것이지 우리 정도가 무슨 신통을 해, 그렇게 반문(反問)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그냥 그렁저렁한 마음이 아닙니다. 만공덕(萬功德)이 우리마음에 다 들어 있습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같은 그런 공덕(功德)을 발휘 못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석가모니한테 있는 마음이나 우리 마음이나 결국은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 조금도 차이 없이 똑같단 말입니다. 모두를 다 할 수가 있고 모두를 다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 이것은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양이 없으면서 분명히 있지 않습니까. 데카르트가 말한바와 같이 내가 생각하니까 내가 있단 말입니다.
분명히 명석판명(明晳判明)하게 나라는 존재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것은 모양이 없단 말입니다. 모양이 없이 과거(過去)에도 있었고 현재(現在)에도 있고 또는 미래(未來)에도 있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조금도 흠절(欠節)이 없는 영생불멸(永生不滅)한 마음자리인데, 그것만 아니라 마음은 법신(法身), 보신(保身), 화신(化身)이라, 그러한 부처님의 모든 공능자리가 다 들어있고 또한 만덕이 들어있단 말입니다.
불교인들이 믿는 것은 그와 같이 내 마음 가운데 부처님의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三身)이 다 들어있고 또는 만덕이 들어있는 지혜(智慧)나 자비(慈悲)나 능력(能力)이나 행복(幸福)이나 모두가 다 원만무결한 만덕이 들어있다. 이렇게 확신을 해야 대승적(大乘的)인 신앙(信仰)이 됩니다.
그 다음 문제는 우리가 수행력(修行力)으로 해서 그 자리를 개발해야 되겠지요. 어떻게 개발 할것인가?
기독교에서 하는 가르침은 단순명료해서 우리가 알기도 쉽습니다만은 부처님 가르침은 너무나 가르침이 많아서, 가르침이 많은 것이 시기상응(時期相應)한 법문(法問)으로 해서는 좋지만은 그 가운데서 어느 것을 우리가 골라야 할 것인가?
갑이라는 사람은 갑대로 자기가 배운 대로 말하고 을이란 사람은 을대로 말하고 또는 기독교 같이 오주여! 하고 한번 했으면은 그걸로 해서 그것도 다 포괄되지만은 불교는 부처님의 이름도 얼마나 많습니까.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해야 될 것인가? 미륵보살(彌勒菩薩)해야 될 것인가?
이러저러해서 우리가 수행(修行)론에 대해서 제가 마무리를 해나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 가지 수행법(修行法)이 많이 있지만은 역시 우리 마음의 핵심(核心)은 무엇인가 하면은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선 신앙적(信仰的)으로 내 마음에 부처님의 삼신(三身)과 사지(四智)를 모두를 다 갖추고 있다. 이렇게 대승적인 신앙을 확립을 해야 할 것이고 또 그다음 문제는 어떻게 그 자리를 우리가 증명(證明)할 것인가?
증명 못하면은 못한 대로 끝나면 모르겠지만은 증명 못하면은 그때는 공부를 좀 했다 하더라도 윤회(輪廻)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윤회라는 것은 정확한 업(業)의 사상(思想)입니다. 정확한 카르마의 사상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참 정밀(情密)한 물리학(物理學)이나 수학(數學)하고 똑같습니다. 우리가 하나의 행동하면 하나 행동한 꼭 받습니다.
우리가 행동하나 하면 그것이 그대로 소멸(消滅)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잠재의식(潛在意識)에다 흔적(痕迹)을 두었다가 백세후에나 천세후에나 아무 때 받아도 과보(過報)를 보복(報復)을 받습니다.
따라서 그와 같이 윤회사상(輪廻思想)이라는 것이 그렇게 정확하기 때문에 과거세(過去世)에 자기가 잘못 살아서 금생(今生)에 와서 우리가 고통(苦痛)을 받고 사람을 잘못 만나기도 하고 그럴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로 대해서 비관할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현재(現在) 우리가 지금 바로 예지(叡智)로 판단해서 정말로 무아(無我)의 행(行)이다. 나라는 것이 본래 없는 것이다. 내 모든 행동(行動)을 중생(衆生)을 위해서 다 받쳐야 되겠다.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이렇게 생각하는 그 마음과 또 거기에 따르는 행이 이것이 보상이 되어서 그때는 우리가 미래(未來)를 결정한단 말입니다.
어떠한 불행(不幸) 이것이 우리가 지금 이 불행을 그대로 멈추게 하고서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힘이 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업(業)사상의 이른바 카르마사상의 본질 입니다.
그래서 윤회사상을 확실히 안다고 생각할 때는 슬퍼할 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받는 고생이 아무리 지극하니 어렵다 하더라도 이것도 역시 다른 사람 책임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우리가 과거지어서 금생에 받고 있단 말입니다.
그와 동시에 한 생각 우리가 바꾸면은 우리 생각이라는 것은 그때그때 순간순간 바로 비약(飛躍)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마음은 바로 성자(聖者)의 마음이나 우리마음이나 같은 마음인 것이고 만능의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 생각만 고치면은 그냥 우리가 초월(超越)한단 말입니다.
실존철학(實存哲學)과 야스코스라든가 하이데커나 그런 분들도 역시 초월에 대해서 상당히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상당히 훌륭한 철인(哲人)은 되어도 성자(聖者)가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같이 확실한 말씀을 못했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간단명료(簡單明瞭)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그대로 증명(證明)한 말씀이기 때문에 조금도 찌꺼기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우리 마음이 바로 만능(萬能)을 갖춘 생명자체이기 때문에, 또는 마음 이것은 어느 것에도 본래로 누구나가 다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도둑놈 마음이나 또는 학문적으로 아무런 공부도 않은 그런 사람마음이나 마음은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닌 것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모양이 있다고 그러면은 부처님 마음은 더 크고 우리 마음은 작고 하면은 그때는 비교가 되겠습니다만은 부처님 마음이나 우리 마음이나 과거 몇천년 전에 사람 마음이나 조금도 비교가 안 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모양이 없는 것은 똑같이 우주(宇宙)를 다 감싸고 있습니다. 김가란 사람 마음이나 박가란 사람 마음이나 어느 사람 마음이나 모두가 다 우주를 다 감싸고 있는 광대무변(廣大無邊)한 것입니다. 이른바 허공(虛空)같단 말입니다.
그 마음을 비유해서 허공(虛空)이라, 법성(法性)이라, 또는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라, 실제(實際)라 그러는 것입니다. 법성(法性), 진여(眞如), 중도(中道) 아까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우리 마음을 살려있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불교(佛敎)는 물질(物質)이 본래(本來)없다는 제법공(諸法空)도리에 입각하기 때문에 물질이 본래 없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은 무엇인가? 천지우주(天地宇宙)가 진여불성(眞如佛性)뿐이란 말입니다.
아까 역설한바와 같이 진여불성자리를 그대로 곧이곧대로 수용(收用)해서 믿는 것이 이것이 불교(佛敎)의 참다운 대승신앙(大乘信仰)입니다. 진여불성자리를 바로 믿어야 그래야 이른바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누구한테 법문을 하든지 또는 누구한테 어떤 경우에 무슨 가르침을 주든지 간에 꼭 본체론(本體論)적인 진여불성자리를 딱 집어서 줘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 상(相)만 가르치면은 그때는 마음에 분열만 생기고서 마음이 통일이 안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불안(不安)을 면치 못하고 여러 가지로 갈등과 여러 가지 세간적인 문제라든가 어려운 것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우리 각자가 모두가 다 참다운 주체성(主體性)이 희박합니다. 주체성은 무엇인가?
우리가 보통 자아의 회복이라, 또는 상실된 잃어버린 자기를 만회한다든가 여러 가지 그런 좋은 말씀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허나 그런 것은 따지고 보면은 주체성을 회복한다는 그런 말씀이 됩니다.
그러면 주체성은 무엇인가? 우리 인간이 의지해야 될 근원적인 도리란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 의지해야 될 근원적(根源的)인 도리(道理)는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진여불성이 바로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입니다.
이것은 조금도 어떠한 한계가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과거(過去)나 현재(現在)나 미래(未來)나 우주에 가득차 있는 하나의 우주(宇宙)의 생명(生命)을 말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참선(參禪)공부라 하는 것도 바로 그 자리 우주의 생명, 진여불성의 자리를 우리가 바로 참구(參究)한단 말입니다.
요새 도시에나 각 지방에서 모두 다 명상(瞑想)을 여러 가지 명상이 유행되지 않습니까. 이래저래 명상하는 법이 많습니다만은 가장 고도한 가장근원적인 명상은 역시 부처님 공부, 부처님 명상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우주의 생명자체이기 때문에 부처님 명상을 해야 그래야 명상가운데 명상인 것이고 또는 우리 중생의 한계상황(限界狀況)을 초월(超越)해서 영원적(永遠的)인 영생불멸(永生不滅)한 그 자리까지 우리가 갈수가 있단 말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명상 할것인가? 우리는 그냥 말로나 교리(敎理)나 그런 분야에서는 상당히 애를 많이 씁니다만은 깊은 명상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안두는 분이 있습니다.
헌데 사실은 불교(佛敎)가 명상(瞑想)을 빼버리면은 결국은 증명(證明)이 못 된단 말입니다. 명상을 해야 삼매(三昧)에 듭니다. 삼매에,
삼매란 것은 본래 음으로 하면은 삼마지, 삼마지인데 삼매는 무엇인고 하면은 명상이 좀 수련이 되어서 명상이 더 깊어져서 우리 마음에 산란스런 마음이 없는 정도가 되어야 삼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삼매가 되어야 그래야 우리 근본업장(根本業障)을 녹인단 말입니다. 삼매에 못 들면은 우리는 근본업장을 못 녹입니다. 못 녹이니까 따라서 성자(聖者)가 못되는 셈이지요.
명상 훈련을 많이 해서 우리마음이 산란심이 없는 삼매에 딱 들고, 삼매에 들어서 상당히 오랫동안 공부를 해야, 물론 그 사람 여러 가지 업장(業障)따라서 길고 짧고 그런 차이는 있겠습니다만은 아무튼 삼매를 통과 않고서 우리가 성자는 될 수가 없습니다.
성자라고 말하면은 여러분들이 어렵게 생각을 하실란가 모르겠습니다만은 우리가 성자가 안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가 부처거니 우리 마음은 본래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나 예수마음이나 우리 마음과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비교가 안 된단 말입니다. 똑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자리까지 가지 않으면은 우리는 또 역시 윤회(輪廻)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윤회하지 않고 다행히 금생에 부처님법 만났을 때에 최상의 생활, 우리가 최상의 생활을 말하면은 이것도 출가한 사람이나 할 것이지 일반사람들은 어렵지 않은가? 사실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생활이라는 것이 그 부처님 되는 공부는 사실은 따지고 보면은 제일 쉬운 것입니다.
그런께 불교말로하면 안락법문(安樂法門)이라, 몸도 마음도 가장 편안한 공부란 말입니다.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 편한 것은 어떤 것이 마음 편한 것인가? 부처님 되는 공부 따라서 나가는 것이 가장 마음 편한 것입니다. 마음 편하면 몸도 편합니다. 생리(生理)와 우리 진리(眞理)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나가 다 부처님 되는 공부를 뒤로 미룰 수가 없습니다. 이 순간 현재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것은 부처님공부, 부처님에 대한 생각을 순식간도 안 놓치고서 부처님이라는 본체(本體)에다가 우리 마음을 두고서 이른바 증명하는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삼매에 드는 공부를 해야 한단 말입니다.
염불(念佛)이면 염불삼매(念佛三昧), 화두(話頭)들면 화두삼매(話頭三昧), 다 모두다 성불(成佛)하는 그러한 법입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어떠한 공부를 하든지 간에 내 마음이 본래로 부처다.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모두가 다 부처님뿐이다. 천지우주는 부처님 아닌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바로 우주생명(宇宙生命)이기 때문에 천지우주가 그대로 일진법계(一眞法界)가 모두가 다 화장세계(華藏世界)다. 부처님세계다. 부처님뿐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 그래야 이른바 우리가 본체를 안 여의고 상에 떨어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때 당시에 내내야 상을 거두고서 본 성품으로 가는 가르침 아닙니까. 그렇게 우리가 공부를 할려면 역시 자기스스로 내가 어떤 공부를 어떤 방법을 할 것인가 ? 불경(佛經)을 외인 것도 좋고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염불(念佛)도 좋고 주문(呪文)도 좋고 화두(話頭)도 좋고 다 좋습니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쁘다고 할 수는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하나의 법을 선택했으면 우리가 하루하루를 결제로 알고서, 자기가 가령 화두를 한다고 해서 화두만 좋고 다른 것은 별것이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화두를 참구한다 하더라도 그 부처님자리 생명의 본체 그 자리를 놓치지 않아야 참다운 화두를 하는 공부가 됩니다.
우리가 염불(念佛)을 한다 하더라도 부처님은 저 어디가 계신다. 부처님한테 우리가 기도(祈禱)모시고 염불하면은 부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호념(護念)하신다. 이렇게 타력(他力)적으로 생각할 때는 그때는 참선(參禪)이 못됩니다.
부처님이라는 것이 어디가 있고 어디가 아닌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님인지라, 일진법계(一眞法界) 그대로 부처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하면 그때는 참다운 참선(參禪)이란 말입니다.
주문(呪文)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 차이가 아니라. 우리 마음자세가 본체성(本體性),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인 불성(佛性)을 안 떠나야 그래야 참다운 참선(參禪)인 것이고 참다운 염불(念佛)이란 말입니다.
물질(物質)이 가장 심오한 자리를 하나의 방사광명(放射光明)이라. 방사선(放射線)이라, 이렇게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은 말합니다. 그렇게 우주(宇宙)란 것은 결국은 물질의 가장 근원적인 것이 하나의 방사선이기 때문에 방사광명이기 때문에 우주 이대로 광명(光明)이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또는 우주(宇宙)에는 영원적(永遠的)인 음악(音樂)이 영원적인 멜로디가 항시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공부하는 것은 정말 까다롭고 팍팍하고 지겨운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나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같이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 제일 가장 쉬운거란 말입니다.
공부가 되어 가면 되어갈수록 우리 몸은 더욱 편한 것입니다. 선방(禪房)에서 공부한다고 하더라도 무엇인가 자기한테 안 맞아서 까깝하고 우리가 그러는 것이지, 가만히 선방에 있어 보면은 썽썽한 사람도 선방(禪房)들어와서 몸을 버리고 있단 말입니다.
또 그런가 하면은 잘 닦아서 자기한테 맞는 법(法)을 딱 골라서 바른 자세로 한 분들은 몸이 그렁그렁한 분도 선방에서 그냥 다 깨끗이 씻어지게 낫어버린단 말입니다.
부처님법은 안락법문(安樂法門)입니다. 마음도 편하고 몸도 편한 법문입니다. 또는 깊으면 깊어질수록 우리 환희심(歡喜心)은 더욱 충만(充滿)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주에는 부처님의 광명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도 우주(宇宙)에는 방사광선(放射光線), 방사능(放射能)같은 방사광선이 충만해 있습니다. 전자나 그런 것은 모두가 다 하나의 광자(光子)의 빛의 알갱이의 하나의 집합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주라는 것은 그대로 바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라,
비로자나불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광명변조불(光明遍照佛)이라, 광명변조라는 것은 광명이 우주에 가득 차 있다는 뜻입니다. 두루 편(遍)자, 비출 조(照)자, 부처님이라는 말씀이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광명변조입니다. 우주에 가득 차 있는 광명의 생명이란 뜻이란 말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무엇인가 말입니다. 아미타불은 이것은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아미타불이라는 것이 영원히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를 통해서 영생불멸(永生不滅)하는 바로 생명(生命)자체다. 이런 의미에서 목숨 수(壽)자, 그래서 무량수불이라, 이렇게 하고,
또는 부처님 광명(光明)이 우주(宇宙)에 충만(充滿)해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한도 끝도 없는 빛이 부처란 뜻입니다. 부처란 또 생명(生命)이란 뜻입니다.
한도 끝도 없는 생명이라는 뜻이 무량수불일 것이고, 한도 끝도 없는 광명의 생명이라는 뜻이 무량광불입니다.
따라서 어느 부처님 이름이나 우리가 풀이해서 보면은 모두가 다 그 생명에 충만 되어 있는 하나의 우주생명(宇宙生命)이란 말입니다. 우주에는 그와 같이 하나의 광명이 사실은 우주의 본체(本體)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지면은 귀신(鬼神) 안 됩니까? 저승에 가서 삽니다. 저승도 역시 우리 인간보다는 더 빛이 납니다.
천상(天上)은 무엇인가? 천상은 더욱더 빛이 납니다. 더욱더 빛이 순수합니다.
극락(極樂)은 무엇인가? 극락세계(極樂世界)라는 것은 극락을 가리켜서 광명정토(光明淨土)라, 극락세계는 사람 몸이나 뭣이나 환경이나 모두가 다 찬란하고 황홀한 광명뿐입니다. 광명세계(光明世界)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그런 자리가 본래(本來)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석가모니(釋迦牟尼)같이 달마(達磨)스님같이 위대한 성자(聖者)가 되었다고 생각할 때에는 우리가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가 다 광명(光明)뿐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황홀한 멜로디가 그대로 항시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이나 그런 경전(經典)을 보셨습니까. 천상이나 극락세계는 신묘(神妙)한 음악(音樂)이 항시 흘러있단 말입니다.
우리마음이 설사 어느 순간 헛된 마음 품었다가도 그런 신묘한 멜로디를 들으면은 그냥 즉시로 우리마음이 정화(淨化)가 된단 말입니다.
아무튼 우주(宇宙)라는 것은 행복(幸福)으로, 행복으로 충만 된 그런 삶입니다. 우리 마음이 만덕(萬德)을 갖춘 마음인데 우리가 게으름 부려서 과거세(過去世) 업장(業障)도 짓고 해서 제대로 우리가 개발(開發)을 못해있고 앞으로 할 것은 그러한 모든 것이 원만히 갖추고 있는 내 마음 가운데 가서 벌써 법신(法身), 보신(保身), 화신(化身)을 다 갖추고 있고 또는 지혜(智慧)나 자비(慈悲)나 능력(能力)이나 모두가 다 완전무결(完全無缺)한 것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굳게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믿은 다음에는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수행법(修行法)으로 해서 우리한테 맞는 법, 화두(話頭)나, 염불(念佛)이나, 주문(呪文)이나 다 좋은 것이지만 그런 것이 참선(參禪)이 되기 위해서는 그냥 보통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염불한다 하더라도 그냥 염불이 아니라 그냥 타력적(他力的)으로 부처님 저만치 계신다. 밖에 계신다. 이렇게 하는 염불(念佛)이 아니라 그 염불선(念佛禪), 염불참선(念佛參禪)이 되기 위해서는 우주(宇宙)가 이대로 부처님의 생명(生命)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이고,
또는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한다 하더라도 우주가 바로 다 부처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해야 참다운 참선(參禪)이 된단 말입니다.
그렇지 못하고서 그냥 엉뚱한 의심(疑心)만 하고 있으면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참선이라는 것은 본체성(本體性)을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떠나지 않아야 참선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이른바 광명변조(光明遍照)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라, 이것은 우리 마음자리를 그대로 상징적으로 표현한 부처님입니다. 우리 마음이 바로 광명(光明)으로 충만해 있는, 뿐만이 아니라 우주(宇宙)에 가득 차 있는 광명의 생명이라는 것이 우리마음의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 깨달으면 거리(공간)라든가 그런 것이 아무런 제약이 없습니다. 아마 성자(聖者)들은 그냥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사실은 지금 신통(神通)말씀을 하면은 잘 모르는 사람들은 신통은 외도꾼이나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고 또는 근래에 우리 도가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 경전(經典)에 보면 아시다시피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대로 깨달으면은 누구나가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한 것입니다.
바라표 비구는 부처님 당시에 나이가 겨우 16세인데도 아라한과를 성취해가지고서 화광삼매(火光三昧)라, 자기스스로 몸에서 빛을 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어두운 밤에 방문한다고 생각할 때는 왼손을 이렇게 들어서 왼쪽을 훤히 비추고 오른손으로 그때그때 안내를 하고 말입니다. 그런 분들이 한 두 분이 아닌 것입니다.
제대로만 닦으면 그때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어느 때나 그렇게 될 수가 있는 것을 우선 저 같은 사람자체도 제대로 깊은 삼매(三昧)에 못 들어서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못할 뿐인 것이지 원래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금생(今生)에 할수 있는 것은 그 온전한 신앙(信仰), 만능의 자리가 나한테 갖추고 있다. 만공덕(萬功德)이 내 마음자리다. 이렇게 생각하시고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자기 각자의 인연(因緣)따라서 선택하신 수행법(修行法)을 가지고서 최선을 다해서 가장 행복스러운 성불(成佛)의 길로 용맹정진(勇猛精進)해 나가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불교방송국 기념법회에 즈음해서 사장님이라든가 여러 인연 있는 분들의 공덕에 대해서 다시금 감사의 합장을 드립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20010418-광주불교방송개국기념법회-광주공원시민회관-청화대종사설법
20010418-광주BBS불교방송국 촬영
20060329-DVD작업-본정 김영동
20080901-녹취워드작업-주안 한동일
20080913-워드정리-본정 김영동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작업용으로 큰스님 말씀 그대로 정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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