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850801-태안사 하계용맹정진 2일째-90호.zip
* 1985년8월2일 태안사 하계용맹정진 3일째 법문
불성(佛性) 하나로 돌아가야 참선이 된다.
만법귀일(萬法歸一),타성일편(打成一片)
인류역사(人類歷史)가 이룩된 이후에 작고 크고 중요한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문제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몇 가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류의 의지(意志)로도 해결 못한 그러한 문제들입니다. 그것을 무엇인가 하면 인간(人間)이 무엇인가 하는 그 문제, 인간성(人間性) 문제라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배우고자 하는 불교 외에는 해결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本性)은 무엇인가? 인간은 대체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 이런 문제를 불교(佛敎) 외에는 해결 못하고 있습니다. 또는 우리 대상이 되는 물질세계(物質世界), 그 복잡다단한 물질세계, 물질의 근본은 무엇인가? 이 문제 역시 해결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인간성과 아울러 물질과의 관계성(關係性). 인간성과 물질은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인가? 이것도 역시 아직 해결을 못해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교뿐입니다.
비록 우리 불법(佛法)에서 이것이 해결되어 있다 하더라도 잘못 배우면 이것을 모르고 지나갑니다. 헌데 이런 문제를 떠나서 우리 현대 인간의 불안의식(不安意識)을 해소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성(人間性)의 본바탕도 불성(佛性)이다.
가사 우리가 교육자(敎育者)가 되어서 교육을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인간성(人間性)이 무엇인가 하는 인간성의 문제를 몰라가지고서 참다운 교육이 되겠습니까? 바람직한 인간상(人間像). 이것을 만들어야 할 것인데. 따라서 교육자도 마찬가지고, 또는 법조인(法曹人)도 참다운 인간 사회를 구성 할 수 있는 그런 규범(規範), 이런 규범을 세우려면 인간의 성능(性能)을 알아야 됩니다.
어떤 분야이던 간에 참다운 생활. 참다운 기구, 참다운 단체. 이러한 것을 구성하려면 인간성 문제가 앞서야 되겠습니다. 인간성 문제가 모호해서는 항상 불안스러워서, 항상 의심 때문에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안심인명을 못하면 우리 행복(幸福)을 바랄 수가 없습니다.
‘인간성(人間性)은 대체로 무엇인가’ 하는 이 문제는 그전에 우리 인간이 미개(未開)할 때는 일반사람들은 그때는 몰라도 무방하다 하고 성자(聖者)나 철학자(哲學者)나 그런 사람한테만 맡겨 버렸습니다.
허나 현대(現代)는 복잡(複雜) 다기(多岐) 합니다. 종교도 다종교시대라, 불교(佛敎), 기독교(基督敎), 이슬람교, 각종교가 이렇게 착종(錯綜)해 있습니다. 또는 각 주의(主義), 사상(思想) 역시 범람해 있습니다. 그런 때는 우리 인간 자체의 문제 해결이 없이는 갈래의 가닥을 못 잡습니다.
가닥을 못 잡으면 따라서 불안스럽고, 자기 개인도 불안스럽지만은 자기 가정도 불안스럽고, 인간이 구성한 사회도 불안스럽습니다. 우리 국가(國家)가 지금 혼란스러운 것이 원인(原因)이 어디에 있습니까? 물량(物量)이 부족해서 혼란스럽습니까?
물량이 부족한 것도 아닌 것이고 인구수가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문제는 바른 사상(思想), 바른 견해(見解)가 없어서 그럽니다. 가령 우리가 지급 피차 옥신각신 싸우고 있는 여당 야당 보십시오. 다 대학을 나오고 박사도 있고 훌륭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야당을 구성하는 분들이 바른 견해가 있고, 또는 여당을 구성하는 분들이 바른 견해가 있다고 하면은 바른 견해끼리는 서로 싸울 수가 없습니다. 무엇인가 그분들이 바른 견해가 아니란 말입니다. 바른 견해 비슷한 것 같지만 실은 참다운 바른 견해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 옥신각신합니다.
참다운 인간상
이것은 한 말로 표현하면은 참다운 인간상,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인간상인가? 이것을 잘 몰라서 그러합니다. 이러한 것을 명쾌히 해결한 가르침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인간의 본바탕은 부처입니다.
물질(物質)은 무엇인가?
그럼 물질은 무엇인가? 저번 시간에도 언급을 했습니다만 물질은 분석하고 분석하고 쭉 들어가 보면 결국은 물질이 안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에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가사 성분(成分)을 분자(分子)로 분석하고, 분자를 또 역시 원자(原子)로 분석하고, 이렇게 들어가 보면 원자는 무엇인가?
원자라는 것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양자(陽性子)를 중심으로 해서 전자(電子)가 빙빙 도는 것이 원자 아닙니까? 산소는 8개의 양성자와 8개의 중성자로 구성된 핵을 중심으로 해서 8개의 전자가 돌고 있습니다. 원자핵를 중심으로 해서 몇 개의 전자가 도는 가에 따라서 각 원소의 구분이 있습니다.
그러면 원자핵을 이루는 양자는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의 광명(光明)의 파도(波濤) 뿐입니다. 전자 역시 광명의 파동(波動)뿐입니다. 이것은 하나 에너지의 그림자에 불과하지 실존(實存)이 아닙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부처님 [금강경(金剛經)] 말씀에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있는 것, 우리 눈에 보이는 것, 모든 것은 다 몽환포영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거품에 불과합니다. 이런 말이 그냥 비유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거품이요. 그림자요. 꿈이요. 허깨비에 불과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두운 지혜, 탐심(貪心)이나 진심(瞋心)이나 어리석은 치심(癡心)이나, 이러한 삼독심(三毒心)이 가리워서 우리는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바로 본 분이 부처님의 혜안(慧眼)이요. 부처님의 불안(佛眼)입니다.
무한(無限) 공능(功能)의 장(場)
물질이라 하는 것은 저 구경적인 끝에 가서는 하나의 장(場)만, 알 수 없는 장만 남을 뿐입니다. 순수에너지의 장만 남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허무한 장이 아니라, 거기에는 모든 공능(功能)을 다 갖춘 광명(光明)의 장(場)입니다. 일체 인과율(因果律)이 거기에 다 포함 되어 있고, 양전하 음전하 그런 전하 들이 발생할 수 있는 에너지가 충만 되어있는 그런 장입니다. 일체 만유가 생성 소멸할 수 있는 그런 장입니다. 이런 장에서 무슨 힘의 동력(動力)을 받아서 양자(陽子)가 생기고 전자(電子)가 생깁니다.
순수(純粹)한 장이 순수한 광명(光明)의 그런 장(場)이 어떻게 도는가, 어떻게 진동하는가, 거기에 따라서 양자가 생기고 전자가 생깁니다. 그런 것이 이렇게 모이고 저렇게 모여서 분자가 되고 이렇게 세포(細胞)가 됩니다.
사대(四大) 오온(五蘊)은 공취(空聚)
부처님 말씀에 사람 몸을 가리켜서 공취(空聚)라, 벌공(空)자, 모을취(聚)자, 공(空)이 모아진 것이, 텅 빈 공간성(空間性)이 모아진 것이 몸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사람의 몸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라. 현대적인 원소론으로 말하면 산소(酸素), 수소(水素), 질소(窒素). 탄소(炭素) 이것들을 중심으로 하는 각 원소가 모아진 세포(細胞)가 우리 몸입니다.
앞서 제가 말씀하는 바와 같이 일체 물질 근원이 원자데, 원자 그것이 그림자 같이 별것이 아닌지라, 원자 그것이 이렇게 모이고 저렇게 모여서 세포가 이루어진 우리 몸은 이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내 마음은 무엇인가? 내 마음 이것은 금생에 배우고 느끼고 생각하고 이것이 우리마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만 생각할 때는 인간은 참으로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내 몸뚱아리는 각 원소가 모아서 순간도 그치지 않고 변화(變化) 무상(無常)한 하나의 세포에 불과하고, 내 마음 역시 금생에 나와서 배우고 느끼고 생각하고 이것이 모아서 내 마음이란 말입니다. 이렇게만 생각할 때는 인간은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
허나 그런 마음의 본바탕 본 근원 그것이 부처입니다. 부처 가운데는 어제 말씀한 것과 같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영생(永生)하고 일체 행복(幸福)을 다 갖추고 있고, 모두를 다 알 수가 있고 할 수가 있고, 또는 청정(淸淨)하고, 이런 것이 우리 불성(佛性)의 부처의 속성입니다.
이런 가르침이 불교 이외는 없습니다. 기독교의 인간관(人間觀)을 보십시오. 예수는 다 알았겠지마는, 아무튼 기독교 교리로 해서는 사람은 무엇인가 하면은 이것은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만들었다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기에다 생기(生氣)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런 식으로 유도가 되는 가르침을 전개하는 그러한 인간 존재론은 이것은 현대 진화론(進化論)을 이길 라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공자(孔子)님의 가르침도 훌륭하고 또는 공자님 역시 인간의 생사를 다 알았겠지요. 그러나 이것이 체계로 나와 있는 것은 인간의 전생도 모르고 내생도 모릅니다. 사람이 대체로 어디서 왔는가? 죽어서 어디로 갈 것인가? 논어(論語)나 맹자(孟子)나 주역(周易)은 제아무리 봐도 이런 가르침은 안 나옵니다.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만이 인간성이 무엇인가, 내가 무엇인가, 이 문제 또는 물질의 문제, 물질도 조금 전에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물리학에서는 저 끝으로 가서는 결국은 물질이 안 되어버린다 말입니다. 안 된 그것. 그 무엇. 우주가 이런 것이 다 텅 비어서 하나의 장만 남는데 장 그것이 우리불교에서 말하는 이것이 소위 불성(佛性)입니다. 물질이 아닌 저 근원의 근본 순수에너지, 이것이 불성입니다.
만법귀일(萬法歸一)타성일편(打成一片)
따라서 마음의 근원도 불성. 일체 물질의 근원도 역시 불성입니다. 똑같은 불성이거니 마음과 물질의 관계 역시 같은 불성 하나로 딱 귀일(歸一)되버립니다. 불교(佛敎)에서 공부할 때에 타성일편(打成一片)이다. 때길타(打)자, 이룰성(成)자, 한일(一)자, 조각편(片)자, 이것이 무엇이고 하면 우주(宇宙)전부를 하나로 모아버린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어야 우리 정신(精神)이 하나로 모아져서 의심(疑心)없이 공부가 됩니다. 이럴까 저럴까 물질의 근원은 무엇인가? 사람이 무엇인가? 이와 같이 의단(疑團)을 품어서는 마음이 분열(分裂)되어 갑니다. 하나로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우주를 통 모아서 하나로 만들어 버린다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성 하나로 우주를 하나로 만들어 버린다 말입니다.
개(犬)가 있건 소(牛)가 있건 또는 강도(强盜)가 있건 누가 있건 내내야 근본(根本). 근원(根源)은 불성뿐입니다. 천지(天地) 우주(宇宙)는 오직 부처뿐입니다. 다만 중생(衆生)이 어두워서 그 부처를 못 볼 뿐입니다.
염불선(念佛禪)
이렇게 알고서 불성(佛性) 거기에서 한걸음도 안 나서고, 불성 그 경계(境界)를 딱 집중(集中)하는 그것을 유지하는 그것이 참선(參禪)입니다. 우리가 같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을 외운다 하더라도 관세음보실님은 저만큼 내 밖에 계신다. 우리가 기도(祈禱)를 모시면 우리가 부르면 관세음보살님은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우리 고난(苦難)을 구제한다. 이것은 방편적인 신앙(信仰)입니다. 이것은 참선이 못됩니다.
허나 관세음보살님은 이것은 우리 인간을 비롯해서 모든 중생의 근원적인 생명, 모든 생명의 대명사가 관세음보살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닦으면 그때는 그것이 선이 됩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 아미타불 역시 아미타불은 극락세계에 계신다. 우리가 기원 드리면 그때 우리를 구제한다. 이런 식의 신앙 이것은 방편적인 신앙입니다.
내 본 생명이 부처다. 선오(先悟)을 하고 닦는다.
그러나 내 이름, 내생명의 참 이름, 우주의 이름 이것이 아미타불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아미타불을 불으면 바로 선이 됩니다. 따라서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어제 말씀한 것처럼 이것은 불도(佛道)의 정문(正門)입니다. 불도의 첩경(捷徑)입니다. 불도의 지름길 불도의 정문 이것이 참선인데, 비록 지금 내가 범부일망정 이론적으로는 우리가 부처가 되어버린단 말입니다.
부처가 먼저 딱 되어버리고서 되버린 기분으로 닦아야 만이 이것이 참선입니다. 부처가 저기에 있고 내가 여기에 있다 이래버리면 참선은 못 되는 겁니다. 내가 지금 탐심(貪心)도 많이 있고 진심(瞋心)도 많이 있고 내 마음이 어리석어서 분별시비(分別是非)도 많이 하고 그렇더라도 ‘내 본 생명 이것은 부처다.’
또는 지금 인간이 봐서 내가 범부(凡夫)인거지 부처가 보면 역시 나도 부처다. 이같이 부처가 되버린 경계, 그런 자부심(自負心)에서 즉 말하자면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천상천하에서 제일 높은 내가 부처다.’ 이와 같이 되고서 관음보살(觀音菩薩)이나 화두(話頭)나 주문(呪文)이나 이렇게 외우면 이것이 참선입니다.
허나 비록 이뭣고<시심마(是甚麽))>를 하고 또는 판때기 이빨<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든다 해도 역시 내가 부처인지를 모르고서 바른 정견(正見)이 없으면 그때는 참선은 못됩니다.
우리는 인류문화, 이렇게 복잡한 문화. 이렇게 우리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문화. 이런 문화 가운데서 내 인간성 모르면 바로 못살아갑니다. 불안스러워서 못삽니다. 우선 도시(都市)에 계시는 분들 여기에 대부분입니다마는 도시 그야말로 고층건물에 한번 들어 앉아보십시오. 얼마나 우리 인간이 외소 하는가 말입니다. 그 복잡한 기계문명, 우리가 전기(電氣)를 몰라보십시오. 얼마나 불안스러운가.
또 입법기구, 사법기구, 행정기구, 그런 기구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기구에 따른 우리의 압박감(壓迫感) 이런 사회에서 우리가 인간성을 모르고서는 바로 못살아갑니다. 안심하고 못살아갑니다.
내 인간성은 모두를 초월해 있다.
따라서 비록 우리는 그러한 것에 대해서 우리가 압박을 느낀다 하더라도 ‘내 인간성은 모두를 초월해 있다’ 분명히 사람마음은 초월(超越)해 있습니다. 공간(空間) 시간(時間)도 초월해 있고, 또는 인과율(因果律)도 초월해 있습니다. 조금 전에 제가 말씀한 것처럼 일체물질이 원자 아닌 것이 있습니까? 우리 인간성의 본바탕이 불성인지라 불성은 그런 원자도 초월해 있습니다. 원자로 구성해있는 순수 에너지 이것이 인간성입니다.
우리가 지금 남도 미워하고 남을 사랑도 하고 그 마음의 근본마음 이것이 불성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성만 딱 파악하면 그때는 모두를 초월해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우리가 그런 불성은 증명(證明)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수행(修行)이 필요할망정 먼저 우리는 그런 불성을 인증(認證)을 해야 합니다. 인정하고서 불성에 안주(安住)해서 염불(念佛)도 하고, 주문도 외우고, 화두도 외이고, 그래야만이 이들이 참선이 됩니다.
삼생성불(三生成佛)
어제 좌선(坐禪)하는 실습을 설명하다가 다 못한 점을 더 말씀 곁들이겠습니다. 우리가 역시 이론적으로는 제아무리 정밀한 세밀한 체계가 선다 하더라도 실질 면에서 우리가 수행을 못하면 증명(證明)을 못합니다. [화엄경(華嚴經)]을 보면은 공부하는 과정을 이렇게 3단계로 구분해 있습니다.
맨 처음에는 견문생(見聞生)이라, (볼견(見)자 들을문(聞)자 날생(生)자) 우리가 입문을 들어서 영생의 성불의 세계를 안다 말입니다. 견문생이라. 아직은 수행도 못하고 귀로만 듣고 구이학(口耳學)이란 입으로만 말한 것을 우리가 듣는다 말입니다. 이것이 견문생이다.
그 다음엔 해행생(解行生)이라. (플해(解)자 행할행(行)자) 조금 자기가 공부를 해서 그때는 자기가 해석을 한다 말입니다. 그렇구나 이렇게 하면 쓰겠구나 이와 같이 납득을 합니다. 허나 납득한 그것으로 해서는 생사해탈(生死解脫)을 못합니다. 과거도 못보고 미래도 못 봅니다. 따라서 공간성은 못 넘어섭니다.
우리는 아무리 입으로 많이 안다 하더라도 또 아무리 해석을 잘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해서는 생사를 초월 못합니다. 그것으로 해서는 참다운 힘이 못나옵니다.
그 다음엔 증입생(證入生)이라. (증명할증(證)자 들입(入)자) 자기 체험으로 해서 그때는 스스로 느낍니다. 증입생 되어야만 비로소 그때는 참다웁게, 아! 그렇구나! 이것이 옳구나! 이렇게 되어야지 환경의 여러 가지 유혹(誘惑)에 끌리지 않습니다. 또 애증(愛憎)이라, 사랑과 미움에 끌리지가 않습니다.
구두선(口頭禪)으로는 해탈(解脫)을 못한다.
그래서 우리 참선도 구두선(口頭禪)이라. 입으로는 별 말을 다합니다. (입구(口)자 머리두(頭)자) 구두선이라, 그러나 구두선 그것으로 해서는 해탈(解脫)을 못합니다. 그것으로 해선 자기 마음의 불안(不安)을 불식을 못시킵니다.
거기에서 제가 조금 전에 말씀한 것처럼 견문생(見聞生), 다음에 있는 해행생(解行生)이라 해석을 깊이하고, 실제 우리가 행동한다 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증입생(證入生) 이라, 증명해서 우리가 들어갑니다. 증입생 되어야 만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 하는 그러한 참다운 영생의 행복(幸福)을 맛보는 것입니다. 참선 이것은 증입생 되기 위해서 증명하기 위해서 참선하는 것입니다.
심리와 생리가 같이 맑아야 불성을 느낀다.
비록 우리 심리(心理)가 맑아서 아! 그렇구나! 한다 하더라도 우리 생리(生理)가 맑지 않으면 참선은 하지 못합니다.
어제 제가 말씀드릴 때에 음식을 주의하십시오. 고기를 먹으면 안 됩니다. 그런 말씀 드렸습니다. 물론 고기를 먹고 참선을 지도하는 분도 계십니다만 이것은 하나의 방편에 불과한 것이지 사실 안 먹어야합니다. 왜 그러야하면 개고기를 먹으면 개의 세포가 우리의 몸을 오염(汚染)시킵니다. 돼지고기를 먹으면 돼지세포가 우리 몸을 오염시킵니다.
여러분도 한번 자시고 해보십시요. 청정(淸淨)해야만 맑아야만 그때는 맑은 물이, 중천(中天)에 달이 밝다 하더라도 물이 잔잔하고 맑지 않으면 비칠 수가 없듯이 우리마음은 거울같이 맑아야 합니다. 그런데 개나 소나 돼지와 같은 고기로 오염시켜보십시오.
내 가슴에는 지금 한 오라기도 오염된 것이 없다. 이와 같이 명쾌한 마음이 되어야지 도(道:진리)는 가까이 옵니다. 부처님 계율(戒律)은 그래서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은 다 옳습니다. 우리가 섣부른 범부지(凡夫知)로 해서 옥신각신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지혜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다 보신 분입니다. 우리 생리(生理)나 심리(心理)를 다 보신 분입니다. 섣부른 범부지로 우리가 비판(批判)해서는 안 됩니다. 해보면은 다 옳습니다.
저번에 미국 무슨 의학(醫學) 지(誌)을 보았는데 거기에 보면 심장병(心臟病) 환자의 반수 이상이 고기를 먹어서 그런다고 합니다. 조금 전에 제가 말씀한 것처럼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런 세포가 우리 몸에 들어와서 좋을 리가 만무합니다. 생리면으로나 심리면으로나 좋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참선이라 하는 성불(成佛)의 첩경(捷徑), 가장 압축된 성불의 지름길, 이런 길을 가기 위해서 비장(悲壯)한 각오(覺悟)를 하신 분들이 하찮을 그런 것 때문에 방해를 받으면 되겠습니까? 음식은 참 주의하여야 합니다.
가사 마늘과 파나 그런 오신채(五辛菜:부추,파,마늘,흥거,생강)도 먹지 말라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이것도 율본에 계율책에 이것도 엄격히 금지가 됩니다. 지금은 더러는 어느 절에선 마늘과 파를 함부로 먹는 절도 있습니다.
허나 부처님 계율에는 그것을 먹으면 생담발음증애(生膽發淫增啀)이라, (낳을생(生)자 담담(膽)자) 담도 생하고, 발음(發淫)이라 (발발(發)자 음탕할음(淫)자) 음심이 더 발동하고, 물론 스태미나는 더 낫겠지요. 또 증애(增啀)라, (더할증(增)자 성낼애(嘊)자) 우리 진심(瞋心)이 더 성내는 마음이 발동한다. 이런 말씀은 명문(銘文)으로 다 계율(戒律)에 있습니다.
그리고 냄새가 얼마나 징그럽습니까? 안 먹는 사람이 파, 마늘 먹는 사람 옆에 가서 맡아보면 굉장히 싫은 것입니다. 헌데 우리 주변에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무수히 신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 신들은 후각(嗅覺)이 사람들보다도 훨씬 예민합니다. 그런 신들이 그런 냄새를 맡을 때는 좋은 신은 그런 악취(惡臭) 때문에 우리 주변에 올 수가 없습니다. 무수한 신들이, 앞서 말한 것처럼 좋은 향을 피우면 향훈(香薰)을 맞고서 우리 주변에 오고, 나쁜 신들은 좋은 향을 싫어합니다.
꽃도 부처님 앞에 올리면 꽃 냄새는 그런 부처님, 우주에 변만(遍滿)된, 우주에 충만된 부처님의 기운이나 좋은 신들은 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귀신들이나 악귀들은 꽃 냄새를 싫어합니다. 꽃을 받치는 것도 그런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꼭 성불해야 될, 금생에 못하면 몇 생후라도 꼭 성불해야 될 우리는 충실한 불자입니다. 따라서 앞서 말한 것처럼 부처님께서 성불하기 위해서 우리한테 제정한 계율은 지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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