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850802-태안사 하계용맹정진 3일째-91호.zip
* 1985년8월2일 태안사 하계용맹정진 3일째 법문
수행삼법(修行三法):조신, 조식, 조심
헌데 어제 제가 참선이라 하는 것은 조신법(調身法)이라, (고를조(調)자 몸신(身)자) 몸을 고르게 해야 한다. 조식법(調息法)이라, (숨쉴식(息)자) 호흡을 고르게 해야 한다. 또 그 위에다 조심법(調心法)이라, 우리마음을 바로 한다. 마음을 바로 하는 그 문제는 제가 서두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조심법(調心法) : 영원의 영상
우리 마음이 순간 찰나도 떠남이 없이 영원히 IMAGE. 영원한 영상을 우리가 지닌다 말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한 것처럼 불심(佛心)이라 하는 그런 영원한 영상 그것에다 마음을 안주(安住)해야만이 참선입니다.
조신법(調身法):법계정인(法界定印)
헌데 우선 몸 모양을 가부좌(跏趺坐) 이것이 가장 편한 모양, 또는 가장 도업(道業)을 성취하기 쉬운 모양입니다. 어제 말씀한 것처럼 정삼각형 이것은 일체여래지인(一切如來智印)이라 (지혜지(智)자 도장인(印)자), 여래(如來)는 부처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그런 무량한 지혜 완벽된 지혜가 제일 개발하기 쉬운 모양이 법계정인(法界定印)입니다. 우주의 모양, 우주의 생명을 상징한 모양이 법계정인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앉으면 이것이 벌써 우주를 내가 다 가슴에 안은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주의 모양입니다. 법계정인(法界定印)라, 법계(法界)라는 것은 우주라는 뜻입니다. 정인(定印)이라 법계의 모든 기운 거기에 딱 담아 있는 결국 상징적인 모양이라는 것입니다.
가부좌하는 우리 몸자세. 좌선하는 자세 이것은 법계정인입니다. 가장 지혜(智慧)가 발동하기 쉽고 또는 우주의 정력기운을 우주 정기(精氣)를 이렇게 다 모아 놓은 이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모양입니다. 따라서 모양은 부처같이 법당(法堂)에 부처님은 다 이렇게 하고 계시지오.
화안애어(和顔愛語)
우리 모양은 부처님 같이, 우리말은 바른말, 남의 속상하지 않고 자기 마음 편하고, 업장 무거운 사람들은 말만 내면 남 속상하게 하고 자기 마음도 괴롭힙니다. 자손손타(自損損他)라, (스스로자(自)자, 손해볼손(損)자, 또 손해볼손(損)자, 다를타(他)자) 나쁜 말들은 자기 가슴 해치고 남 가슴 해칩니다. 업장(業障)만 자기 가슴에 심습니다.
그러게 부처님 말씀으로 화안애어(和顔愛語)라, (평화로운화(和)자, 얼굴안(顔)자) 밝은 표정, 애어(愛語)라, (사랑애(愛)자, 말씀어(語)자) 불자(佛子)는 마땅히 의무적으로 우리가 꼭 화안애어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우리 가슴이 맑아지고 남의 가슴도 광명을 줍니다. 화안애어라, 밝은 표정 또는 부드러운 유연스러운 말,
우주의 존재 목적의식이 48원이다.
우리가 왜정(倭政) 때 살았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목포(木浦) 광주(光州) 서울 같은 데는 본원사(本願寺)란 절이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일본(日本)에서 나온 절인데 본원사라, (근본본(本)자 원할원(願)자) 이것이 본원(本願)이란 뜻은 근본서원(根本誓願)이라, (맹세할서(誓)자 원할원(願)자) 근본서원이라, 무슨 근본서원인고 하면은 우주가 본래 갖춘 하나의 서원입니다.
우주(宇宙)는 하나의 생명체(生命體)이다. 우주가 바로 부처입니다. 따라서 우주도 하나의 서원이 있습니다. 우주의 바로 목적이 있습니다. 우주의 목적의식(目的意識) 그것이 본원입니다. 우리는 무슨 법회(法會) 끝에나 반드시 발사홍서원(發四弘誓願)이라,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부르는데 사홍서원 이것이 바로 본원입니다.
부처님의 4가지 서원이라, 이것이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해야 되겠다. 무량법문으로 배워야 되겠다. 또는 무상불도(無上佛道)를 위없는 불도를 성취해야 되겠다. 이런 것이 부처님의 우주의 서원입니다. 이것이 본원입니다. 헌데 그런 본원을 좀 더 부연시켜서 말한 것이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의 48원입니다. 48가지로 우주의 서원 우주의 목적을 풀이했습니다.
광촉유연원(光觸柔軟願)
그런 가운데서 33번째 가서 광촉유연원(光觸柔軟願)이라, 광촉은 빛광(光)자, 접촉할촉(觸)자. 광명에 접촉해서 유연(柔軟)이라, 부드러울유(柔)자, 연할연(軟)자, 그래서 유연원이라 말입니다. 광촉유연원이라, 우주의 원래(元來) 원이 있다 말입니다. 부처님의 원래 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면은 우주의 본래(本來) 광명(光明). 부처님의 별명(別名)은 많이 있으나 부처님의 총대명사(總代名詞)는 아미타불(阿彌陀佛)입니다. 비록 부처님의 명호(名號)와 이름이 많이 있다 하더라도 총대명사는 아미타불인데 아미타불 풀이가 이것이 무량광불(無量光佛)입니다. 아미타불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무량광불입니다. 광명이 우주에 가득 차있는 생명(生命)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불룩불룩하고 흥분하기 쉽고 거친 사람들은 그런 광명과 거리가 보다 멉니다. 우주의 본 생명인 부처님의 생명의 광명과 거리가 멉니다. 마음이 유연스럽고 상냥한 사람들은 우주의 광명과 더 가깝습니다. 따라서 그 광명의 정작 접촉(接觸)한 사람들은 그때는 보살(菩薩)입니다.
남의 듣기 싫은 말, 남을 성내게 하는 말, 남을 이간(離間)하는 말, 이런 말을 잘한 사람들은 우주의 광명과 거리가 멉니다. 우리가 멀어서는 되겠습니까? 그래서 유연선심(柔軟善心)에서 그냥 대비심(大悲心)이 발동해서 천지우주가 모두 가 불쌍한 중생뿐이란 말입니다. 또 그냥 감사하고 고마움뿐이다 말입니다.
그리고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나 또는 모든 병고(病苦)에 시달린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내가 구제해야 되겠다. 그런 문제를 다 자기 몸같이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그때는 눈물이 주룩주룩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부드러운 마음 가운데서 눈물이 주룩주룩 나온다 말입니다. 그 눈물은 맑은 눈물이 되겠지요.
이것은 조금 전에 말씀한 것처럼 광명에, 우주의 순수 에너지인 광명에 접촉한 사람들이 그럽니다. 그러기에 보살마음은 앞서 말씀한 것처럼 화안애어(和顔愛語)라, 항시 평화스럽고 항시 중생을 연민(憐愍)은 마음이 있다 말입니다. 중생을 연민하는 마음에서 중생이 듣기 싫은 말을 하겠습니까?
또는 동사(同事)라. 중생과 더불어서 누가 고생하면 따라서 같이 위로해준다는 것입니다. 또는 이행(利行)이라. 중생을 이익 되게 항시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저 삶이 기분 나쁠 것인가? 이러한 것이 애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참선(參禪) 많이 하고 염불(念佛) 많이 하면 저절로 그리 됩니다.
견성오도(見性悟道)
이것은 광명과 차근차근 접근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드디어 불성광명(佛性光明)과 하나가 딱 되면 그때가 견성오도(見性悟道)입니다. 우리는 우주의 순수한 광명. 그 아미타불(阿彌陀佛). 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여기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헌데 앞서 말씀한 것처럼 참선이라 하는 것은 한 말로 말하면 모양은 부처님 같고, 말은 부처님 같은 말, 그런 유연스러운 말, 우리 생각은 부처 같은 생각, 이것이 우리 참선의 가장 이상형(理想型)입니다.
모양<身>은 부처 같은 모양, 말<口>은 부처 같은 말, 생각<意>은 부처님 생각뿐, 이것이 참선의 가장 이상적인 모양입니다. 그럼 부처 같은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나와 남의 구분이 없어서 우주를 하나의 부처덩어리로 본다 말입니다. 이것만이 바로 보는 것입니다.
무아(無我)
우리는 내가 없다. 또는 사대(四大)를 구성한 내 몸이 허망하다. 이런 말에 보통은 많이 저항을 느낍니다. 어째서 분명히 내가 있는데 왜 내가 없다는 말인가? 나와 남이 분명히 있는데 어째서 자타(自他)가 없다는 것인가? 이런 것을 도저히 잘못 느낍니다.
지금 이 가운데는 우리 사회의 지도적인 훌륭한 지성인들이 많이 계십니다. 따라서 좀 어려웁드라도 제가 말씀을 드립니다마는 [마하지관(摩訶止觀)]이란 논장(論藏)이 있습니다. 이것은 천태지의(天台智顗)스님이라, 불교를 석존(釋尊)이후에,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에 가장 세밀하게 체계를 세우신분이 천태지의스님입니다. 헌데 이분 가르침 가운데서 최고의 가르침 이것이 마하지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인간을 해부할 때에 인간을 분석(分析)을 이렇게 했다 말입니다. 무지혜고(無智慧故)라, 지혜가 없기 때문에 (없을무(無)자, 지혜지(智)자, 슬기로울혜(慧)자, 예고(故)자), 계언유아(計言有我)라, (혜아릴계(計)자, 말씀언(言)자, 있을유(有)자, 나아(我)자) 지혜가 없기 때문에 내가 있다고 고집한다는 것입니다.
허나 이혜관지(以慧觀之)라, (써이(以)자, 지혜혜(慧)자, 불관(觀)자, 갈지(之)자) 지혜로써 이 몸을 관찰해 본다고 할 때에, 두족지절(頭足支節)이라, (머리두(頭)자) 우리 머리나 발이나 우리팔뚝이나 이런 사지(四支)를 다 검토해 본다 하더라도 실무유아(實無有我)라, (실다울실(實)자 없을무(無)자 있을유(有)자 나아(我)자) 참다운 내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문제는 어려운 철학적인 문제이니까 두고두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내 머리는 내 머리이지 내가 아닙니다. 내발은 내발이지 내가 아닙니다. 손 이것은 손이지 내가 아닙니다. 내 몸 이것은 내 몸이지 내가 아닙니다. 나는 무엇인가? 어디도 없는, 내가 없단 말입니다. 내 머리에 내가 있는 것인가? 내 몸에 내가 있는 것인가 말입니다. 내 머리 이것은 내 머리지 나는 아닙니다. 내 발은 내 발이지 내가 아닙니다. 나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처유인급중생(何處有人及衆生)이라, 하처(何處)라 어느 곳에, 유인급중생(有人及衆生)이라, 어느 곳에 사람과 중생이 있는가 하면은, 중생업력(衆生業力) 가위공취(假爲空聚)라, 중생의 업력으로 무명(無明)으로 해서 말입니다.
텅 빈 업력기운(業力氣運)이 모여서 사람 몸이 된다.
업(業)이란 것은 우리 인간의 번뇌(煩惱)와 번뇌에 따른 행동(行動)이 업(業)입니다. 우리 인간의 번뇌라 하는 것은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癡心) 이런 것이 번뇌가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삼독심(三毒心)에서 우리가 행위(行爲)한다 말입니다. 남을 미워하면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겠지요. 사랑하면 자기 걸로 만들려고 하겠지요.
이러한 탐심, 진심, 치심 이러한 것이 우리가 행위(行爲)로 옮아져서 그때는 우리 업(業)이 됩니다. 중생업력(衆生業力), 중생이 업으로 해서 가위공취(假爲空聚)라. 가짜로 잠시간 공(空)을 모아서, 산소, 질소, 원자도 다 공(空)입니다.
다만 무엇인가 모르는 하나의 생명체가 빙빙 돌아서 산소가 되고 무엇이 되고 했습니다. 원래는 텅 비어 있습니다. 이런 텅 빈 것들이 업력기운(業力氣運)들이 모여서 사람의 세포가 되고 결국은 하나의 뭉뚱아리가 되었습니다.
중생업력(衆生業力) 가위공취(假爲空聚)라. (거짓가(假)자 하위(爲)자 빌공(空)자 모을취(聚)자 ) 중생이 업력이 공을 모아서 결국은 하나의 뭉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중생의 몸입니다. 따라서 무유재주(無有宰主) 여숙공정(如宿空亭)이라, 저기 빈 정자에 주인이 없다 말입니다.
정자(亭子)를 세워 놓으면 그때그때 우리가 더울 때 이용도 하지만 정작 주인은 별도로 없습니다. 마치 그런 빈 정자같이 빈집같이 우리 몸도 역시 참다운 주인이 없습니다.
무유재주(無有宰主)라. 주지하는 주인이 없는 것이 마치 여습공정(如宿空亭)이라. 같을여(如)자, 잘숙(宿)자, 빌공(空)자, 정자정(亭)자 마치 빈집에 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몸은 원해 주인이 없는 것인데 우리 망념(妄念)이 ‘나’라고 고집을 한다 말입니다.
망념(妄念)이 공취(空聚)인 오온(五蘊)을 나라한다.
우주의 실상(實相)을 바로 못 보는 가상(假相)밖에 못 보는 우리 망념(妄念)이 나다. 이렇게 고집(固執)을 합니다. 이것이 내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닌데 니가 어떻게 내 소유가 되겠습니까? 내 아내 내 남편 모두가 다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그럽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연(因緣)은 분명히 있으니까 자기 아내가 소중하고 자기 남편이 소중합니다. 만은 사실로 봐서는 결국은 없습니다.
내 몸도 내 것이 아니거니 어느 무엇이 내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내 재산 내 자식도 결국은 내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의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인연에 따라서 가까운 인연인 것이니까 우리가 거기에다 충실을 다 해야지요.
이렇게 생각할 때는 그때는 착심(着心)이 안 납니다. 헤어지면 헤어진다. 죽으면 죽는다. 이와 같이 인연생(因緣生)이라 개시(皆是) 일체만유(一切萬有)는 인(因)과 연(緣)을 따라서 잠시간 합했을 뿐입니다.
조식법(調息法):심장세균(深長細均)
우리가 어제 호흡(呼吸)을 해야 된다. 호흡은 보여야 된다고 했는데 호흡을 할 때 ‘내 몸이 실존(實存)한다’ 내 코, 내입, 내 밝은 눈, 이와 같이 이런 것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호흡이 맑아 안 옵니다. ‘내 몸이 텅 비었다’ ‘내 몸이 이렇게 공(空) 무더기다’ 내 몸이 하나의 거품 같은 세포에 불과하다 이렇게 생각할 때 호흡은 맑아집니다.
통신호흡(通身呼吸)
부처님 경전(經典) 가운데서 호흡만 말한 경이 [아나바나경(阿那波那經)]입니다. 이런 경 가운데는 자기 몸을 공관(空觀)이라, 자기 몸을 텅 비었다고 본다면 우리 몸이 털구멍마다 바람이 통한다는 것이다. 즉 말하자면 통신호흡(通身呼吸)이라. 우리 몸 전체로 호흡한다는 것입니다. 호흡을 많이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가만 두고서 자기는 숨을 안 쉬지만 이상하게 호흡은 됩니다.
그전에 저는 요가수트라를 보서고 ‘귀로 호흡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건 어떻게 귀로 호흡을 하는 것인고, 그러나 오랫동안 참선을 해보면 분명히 호흡은 딱 정지(靜止)가 됐는데 신묘(神妙)한 멜로디, 신묘한 음악소리가 귀에만 들려옵니다. 헌데 호흡이 정지가 안 되고 거칠면 신묘한 소리는 귀에 울려오지 않습니다.
분명히 호흡은 이렇게 숨 쉬지 않는데도, 자기 맥도 없는 것도 같고, 또 코를 이렇게 해봐도 무슨 숨소리도 없고, 자기 스스로 의식해 봐도 호흡은 분명히 없는데, 귀에만 신묘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베토벤이나 슈베르트 같은 그런 분들은 분명히 영원의 소리를 다 들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굉장히 기가 막힌 우리 영혼을 맑히는 그런 명곡(名曲)이 나온 것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정말 귀로 호흡하구나! 하고 이렇게 우리가 알아진다 말입니다.
법계호흡(法界呼吸)
호흡법(呼吸法)의 요령은 호흡이 없어야 합니다. 삼매(三昧)도 처음에는 호흡이 거침이다만 나중에 깊이 들어갈수록 호흡이 차근차근 맑아집니다. 호흡이 없어서 결국은 호흡이 완전히 끊어질 단계, 호흡이 끊어져야만이 번뇌도 끊어집니다. 우리 번뇌와 호흡은 그때 같이 상응(相應)합니다. 마음이 거칠어지면 호흡도 거칠고 호흡 거칠어지면 마음도 거칠어집니다.
허나 우리는 마음을 완전히 분별 망상을 떠나기 어렵기 때문에 호흡을 짐짓고 우리가 해보는 것입니다. 허나 조도(助道)를 위해서 (도울조(助)자 길도(道)자) 호흡을 하는 것인데, 호흡은 어제도 말씀했는데 요령 이것은 심장세균(深長細均)이라, 호흡은 깊고 길고 가늘고 고르게 한단 말입니다. 또 그와 동시에 우리는 약간 무리를 해야 합니다. 무리를 안 하면 호흡이 길고 깊게 그렇게 안 됩니다. 어떻게 무리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척 들어앉아서,
쿰박 : 유식(留息),안전호흡
요가스트라로 말하면은 쿰박이라. 우리 한문으로 하면 유식(留息)이라. (머물유(留)자 숨쉴식(息)자) 호흡을 딱 멈추어서 호흡을 딱 가둡니다. 이렇게 딱 숨을 오랫동안 가둡니다. 호흡을 가두면 절로 아랫배로 호흡이 쑥 들어갑니다.
요령은 어떻게 되냐 하면 표준을 말하면 가사 우리 들여 마시는, 우리 입식(入息)이라, 들이 마시는 숨이 2초라면, 호흡을 가두는 시간을 8초, 내쉬는 시간은 4초, 이와 같이 배씩 올라갑니다. 시간 비율이 우리가 숨을 들이 마시는 시간이 2초라고 하면, 앞서 말한 것처럼 내쉬는 시간은 4초, 숨을 가두어서 멈추는 시간은 8초, 이와 같이 처음에는 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차근차근 가두는 시간을 늘여갑니다. 8초, 10초.... 이와 같이 늘여갑니다. 늘여가서 1시간 동안만 딱 가두어서 호흡이 정지되면 그때는 신통(神通)도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가두는 시간을 너무 무리하면 배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곤란스럽습니다. 무리가 안 될 정도로 앞서 말한 것처럼 맨 처음에는 2초, 4초, 8초 가두는 시간 8초 정도 이런 비율 정도로 차근차근 늘여가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절로 앞에 말씀한 것처럼 호흡이 길고 깊고 가늘고 고르게 쉬어집니다. 그러면 거기에 따라서 우리 마음도 차근차근 고요히 맑아옵니다. 이렇게 호흡은 하시기 바랍니다.
방선과 포행{행도(行道)
그리고 방선(放禪)할 때에, 방전은 참선을 쉬는 것입니다. 참선에 들어가면 입선(入禪)이라 들입(入)자, 그만 두는 것을 방선이라 놓을방(放)자, 우리는 지금 방선하는 단계입니다만은 방선 할 때는 죽비(竹篦)를 딱 치면은 역시 합장(合掌)을 합니다. 우리는 도량(道場)에 대해서 감사를 느끼는 것입니다.
입선 할 때는 합장할 필요가 없습니다만 방선할 때는, 물론 합장 안 해도 무방합니다만, 보통 우리는 하도 고마우니까 영원으로 가는 길을 우리가 공부할 때 도량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를 항시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대중(大衆) 우리 법우(法友)에 대해서 우리가 감사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감사의 의미로 해서 방선을 할 때는 죽비를 치면 합장을 합니다. 합장하고 그때는 이제 가부좌(跏趺坐)를 풀고, 손도 긴장을 풀고, 몸도 흔들어서 몸의 거북한 불탁을 다 풀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요가법(yoga法)을 좀 해야 합니다. 요가라 하는 것은 근본은 이것이 우주의 본체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은, 요가법은 3단계로 구분해서, 우리 몸의 긴장을 푸는 압감, 또 한 가지는 우리 호흡법(呼吸法), 한 가지는 이것은 우주와 하나가 되는 삼매(三昧). 이와 같이 구분하는 것인데, 이와 같이 방선 할 때 앞서 말한 것처럼 제가 앞서 말한 그러 자세로 해서 차근차근 몸을 풀어서 목운동. 어깨 운동, 다리운동, 등배 운동 가능하면 물구나무서기 이와 같이 해서 우리 몸을 풀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좌선(坐禪)으로 해서 우리 몸이 거북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한 시간 동안하고 쉽니다만 앞으로 될수록 한 시간하고서 쉬는 시간에도 같이 돌면서 우리 몸을 푸는 행습(行習)을 하겠습니다. 원래 선방에서는 행도(行道) 그래서 포행이라 그래서 같이 모다 10분 동안 이렇게 빙빙 도는 것입니다. 그 동안 용변할 사람은 갔다 옵니다. 이렇게 돌면서 우리 몸의 거북한 점을 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탁이 풀어집니다.
내가 본래 분명 부처구나! 하는 확신
앞서 말한 것처럼 불교 이것은 인류문화(人類文化)에서 가장 앞선 가르침입니다.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 물질의 근원 문제, 이런 문제 해결은 오직 하나의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불도(佛道)에 입문(入門)해 있습니다.
그러한 불법 가운데서 불법(佛法)을 알기 위해 제일가는 지름길 이것이 참선입니다. 참선 하는 법은 부처 같은 모양, 말, 마음씨, 이것이 참선하는 우리의 신구의(身口意)라, 몸과 입과 뜻의 3가지 이것이 하나의 형태입니다. 이렇게 해서 꼭, 이번에 공부하는 동안에 비록 증명은 다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증입생(證入生)은 못 된다 하더라도,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린 견문생(見聞生)이라, 보고 듣는 것, 또는 해행생(解行生)이라, 해석하고 풀이 하는 것, 내가 부처임을 분명 느끼는 것, 해행생만은, 비록 내가 부처를 증명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분명 부처구나’ 하는 확신만은 이 동안에 꼭 갖도록 하시기를 바라면서 말씀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
* 1985082-태안사 하계용맹정진 3번째일 법문 : 청화대종사 설법
*태안사 방송실 카셋 녹음
*녹음테이프 정훈스님 보급
*펜글씨 녹취 : 해인(海印),법륜행(法輪行),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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