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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진리의 길 2권 2. 사바세계가 극락정토입니다.(10)

 

 

 

* 해오(解悟)라는 것은 우선 문자로, 이치로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우선 부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천지우주가 불성뿐이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 염불선은 우선 염자시수(念者是誰)라, “염불하는 자가 누구인가?” 해도 좋습니다. 내 자성이 바로 관세음보살[自性觀音]이라 해도 됩니다.

 

* 관상염불(觀像念佛)은, 부처님 모습을 생각하면서 염불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원만 공덕상을 생각하며 하는 염불입니다. 또는 천지를 관세음보살의 화현으로 보는 염불입니다.

 

* 선의 종류에는 우선 세간선(世間禪)이 있는데 세간선은 외도선(外道禪)이 있고, 범부선(凡夫禪)이 있습니다.

외도선은 인과를 믿지 않고, 유루공덕(有漏功德)을 위하여 닦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번뇌가 있는 그런 공덕을 위해서 닦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범부선이 있습니다. 범부란 것은, 성인과 상대에서 하는 말인데, 성인이 못 되면 모두 범부입니다. 범부는 인과를 믿고 불법을 믿는 가운데서,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사람이 범부입니다. 범부는 불법을 안 믿는 사람은 제외합니다. 그래서 불법을 믿는 가운데서 견성오도를 못할 때는 범부입니다.

 

* 출세간선(出世間禪)에는 소승선 대승선이 있습니다. 소승선은 내가 없음을 , 즉 아공을 믿고[信] 해탈을 위해서 닦는 것입니다. 또 대승선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믿고[信] 해탈을 위해 닦는 것입니다.

 

* 최상승선이 있습니다. 갈래만을 말씀드리면, 최상승선은 여래선과 조사선을 말합니다. 이 둘을 우열로 분별해 보는 분이 있으나, 부처님 법문이나 정통 도인 말씀을 미루어 보면, 이것은 둘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인 것입니다. 다만 지적인 것은 여래선이고, 이적(理的)인 면은 조사선에 해당한다고 비유해 볼 수 있는 정도입니다.

 

* 공안선은 화두선과 같은 뜻입니다. ‘무자 화두’나 또는 ‘뜰 앞의 잣나무’ 또는 ‘이뭣고(是甚麽)’라는 화두나, 모두 나의 본질을 구하는 화두 등을 의심하면서 닦는 선법입니다. 이것은 최상승, 높은 선에 속합니다.

 

* 지적인 사람은 참구하는 화두가 무방하다 하더라도, 부처님한테 모두를 의지하는 사람은 화두에서 정서적 만족을 못합니다.

 

* 묵조선은 화두 없이 그냥 앉아서 자기 마음을 모으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도 설정하지 않고 단전에 힘을 주고서 공부합니다.

 

* 염불선은 방편염불이 아닌 참다운 염불로서, 자기 마음의 본바탕이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다, 동시에 우주가 바로 부처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마음으로 염불하면 염불선이 됩니다.

 

* 참선은 바로 내 부처를 구합니다. 천지우주만유가 바로 부처인 것을 느끼고 생각하면서, 내가 부처가 되는 것을 선이라 합니다.

 

*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다, 내 마음의 본바탕이 부처다.” 이렇게 느끼고 하는 염불은 염불선입니다.

 

* 불리불(不離佛)이 참선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안 떠나고, 즉 부처님을 놓치지 않아야 참선입니다. 만일 실상을 놓치면, 염불선에서는 칭명염불이 되고, 화두선에서는 외도선이 되기 쉽습니다.

 

* 불성을 증명하고 불성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일대사인연입니다. 이 불성을 증명하는 방법이 참선입니다.

 

* 해오를 먼저 해야 참선이 됩니다. 미처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이론적으로 간혜(乾慧)를 해서 부처를 알아야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외도선이 되어 버립니다.

 

* 제법공, 본래시불을 느끼고 들어가야 참선입니다.

 

* 정평도인(定評道人)들은 회통불교를 주장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부처님 가르침 자체가 모두를 하나로 보는 회통불법, 회통사상이기 때문입니다.

 

* 참선하는 사람들은 한 가지 문제만 골똘히 합니다. 좋다 궂다, 밉다 예쁘다, 무엇이 어쩐다는 생각은 다 버려야 합니다. 분별시비도방하(分別是非都放下)라 하지 않습니까? 모두 다 버려야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 불보(佛寶)를 공부하는 분들은, 표현은 다르다 하더라도 근본은 하나로 해서 통일 시켜 버리는 슬기를 가져야, 참다운 불교의 지혜인 반야지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 보조 국사가 법우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대 마음을 산심(散心)에서 정심(定心)으로 돌이켜라. 고요한 바다 모양으로 잔잔한 마음을 만들어라. 그러면 만상의 참 모습은 거기에 비춰 올 것이다.”

 

* 마음이 산란스러우면 마음이 흩어져서 산심(散心)이고, 안정된 고요한 때는 선정에 들어간 정심(定心)입니다. 분별시비하는 흐트러진 마음이 산심이고, 어지러움을 거두어서 하나로 딱 모아진 마음이 정심입니다.

 

* 우리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면, 눈도 밝아지고 머리도 시원합니다. 이런 마음이 익혀지고 익혀지면, 결국 걸음걸음 부처님한테 다가 간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우리의 근본을 보는 것입니다.

 

* 법화경에, 근본을 모르는 인간을 가리켜서 면전궁자(面前窮子), 진리 앞에 가난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이라, 모두가 무상한 것입니다. 무상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으켜 주는 귀중한 스승입니다.

 

* 참선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산란심을 거두어서 고요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산란심을 멈추려고 마음먹으면 더욱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 방편으로 화두를 들어라, 염불을 하라, 주문을 외라 합니다.

 

* 참선을 해 보면, 화두를 들고 가만히 공부해보면, 맨 처음에는 자꾸만 생각이 한 없이 나옵니다. 금생에 지은 경험, 전생에 지은 갖가지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이 잠재의식에 꽉 차 있다가, 좌선하고 있으면 자꾸 나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하루 하면 하루 한 만큼, 이틀하면 이틀 한 만큼 산란스러운 마음이 잠잠해집니다. 맨 처음에는 열이 올라와서 뜨겁고 하다가도, 차근차근 정화가 되면 몸도 시원하고 가슴도 시원합니다. 나중에는 마치 하늘로 떠오르는 그런 기분도 생깁니다.

 

* 극락세계에 대해서 풀이한 법문을 보면, 극락세계 중생의 몸은 무극(無極)허무지신(虛無之身), 무슨 물질이나 무슨 질료가 없이 텅 비어 있습니다.

극락은 우리가 죽어서 저만큼 올라가야만 극락이 있는 것인가? 공부를 하다보면, 그렇지 않다고 느껴지거든요. 어떻게 느껴지는가 하면, 애쓰고 수행을 하다보면, 차근차근 가슴도 시원하게 맑아지고, 눈도 밝아지고 머리도 시원합니다. 잠도 끊어지고, 그야말로 무슨 음식도 생각이 안 나고, 그래서 끄트머리까지는 다 못 갔다 하더라도, 이렇게 되면 결국 텅 비어버리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도인들은 참으로 텅 빈 분이 아닙니까? 마음이 텅 비어서 우주와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몸도 그때는 자기 몸이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몸과 마음이 텅 비어서, 내 것이라는 마음이 없습니다.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닙니다. 극락에 애쓰고 안 가도, 이 자리가 바로 극락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 깨닫고 못 깨닫고, 우리 마음이나 몸이 정화가 되고 안 되고 그 차이뿐이지, 멀고 가까이 있는 그런 차이가 아닙니다. 이럴 때의 행복이나 기분은 뭐로 비교하겠습니까? 오죽하면 부처님을 환희광불(歡喜光佛)이라 했겠습니까? 부처님은 환희광불이라, 기쁨으로 행복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부처님이라는 것은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 중생이 잘못 봐서, 천지우주의 진리에 어긋난 짓을 하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고생을 받는 것이지, 도리에 맞게 계행을 지키고 참선하고 염불하면, 차근차근 가벼워집니다. 가벼워서 그때는 살아 있는 이대로, 이 자리에 선 채로 텅 비어서,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어서, 정말로 무극허무지신(無極虛無之身) 또는 극락세계가 되어 버립니다.

 

* 우리의 망령된 의식 즉 범부식(凡夫識)이 딱 끊어져서 본래 불성식(佛性識)이 계발되지 못하면, 아는 것이 정유리무(定有理無)라, 우리 범부의 망정으로 아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생이 보는 견해는 모두 고(苦) 공(空) 무상(無常) 무아(無我)라, 모두가 다 허무하고 텅 빈 것입니다. 예쁘다 밉다, 좋다 궂다, 내 얼굴 네 얼굴 하지만, 이것은 중생이 보아서 있는 것이고, 근본 이(理)에서 보면 그런 것이 없습니다.

 

* 염불을 하다 보면, 차츰 마음이 넓어져 갑니다. 몸도 가벼워지고 마음도 넓어지며,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닌지라 몸도 가벼워집니다.

마음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대아(大我)라는 아(我)가 들어있고, 또 청정하고 번뇌가 없는 정(淨)이 들어 있고, 불성에 들어 있는 성(性) 공덕인 상(常)이 들어 있고, 또 낙(樂)이라 하는 영원히 안락하고 행복스러운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