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절대로 못난 것이 아닙니다. 겉이야 어쨌든, 마음은 석가모니와 같습니다. 불교는 일체 공덕을 다 할 수 있는 대아가 내게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불교는 만능의 불성공덕을 믿고, 광대무변한 불성공덕을 자아내서, 우리 스스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 불교입니다. 나한테 들어 있는 생명의 핵심인 마음은 죽지 않습니다. 오염이 되어 있을 뿐 죽지 않습니다. 우리 주인공은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영원불멸입니다.
* 수분각(隨分覺)이라, 보살 초지(菩薩初地)에서 십지(十地)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도 역시 각 경에, 어디에 올라가면 얼마만큼 공덕이 있다는 말씀이 소상히 다 있습니다.
목적지가 정해져 있더라도, 목적지에 이르는 방법 차서(方法次序)가 없다면, 방법계제(方法階梯)가 없다면, 목적지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불경에는 성불의 목적지를 분명히 밝혔을 뿐 아니라, 방법 계제도 소상히 밝혀 있기 때문에, 공부하기가 사실은 쉬운 것입니다.
* 어느 한 법, 주문·화두·염불이나, 부처님 법에 입각한 정당한 법을 간택했으면, 다음 문제는 이러한 한계를 알아야 합ㄴ다. 그래야 내 공부가 어디에 머무르지 않고서 차근차근 올라가서, 이른바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 구경지(究竟地)라, 우리 깨달음이 완성되어 원만무결(圓滿無缺)한 자리입니다. 구경지는 다시 더 갈 수 없는 최상의 깨달음입니다. 묘각(妙覺) 또는 대각(大覺), 또는 정각(正覺)이라고도 합니다. 구경각(究竟覺), 심심미묘(甚深微妙)해서 묘각(妙覺)이라고도 하고, 위없는 깨달음이라고 해서 무상각(無上覺)이라고도 하고, 또는 가장 바른 깨달음이기 때문에 정각(正覺)입니다.
* 정각에 이르러야만이, 우리 중생은 인간에 태어난 것이 되며, 우리 중생이 본래 갈 수 있는 참다운 고향에 완전히 이른 것입니다.
* 정각에 이르지 못하면, 비록 십지(十地)까지 시각(始覺)을 떠나서 수분각(隨分覺) 십지까지 올라왔다 하더라도, 인연이 다하면 생사윤회를 다시 합니다.
* 묘각에 이르러 온전히 번뇌를 녹이고서, 자기 본래 성품인 불성과 우주의 본래 성품인 불성과 하나가 딱 되어버리면, 그때는 다시 윤회가 없습니다. 비로소 환고향(還故鄕)을 했다고 합니다.
* 비록 우리가 훌륭한 행법을 취해서 공부를 한다고 하더라도, 도덕적 계율이 앞서지 않으면, 공부 성취가 굉장히 더딘 것입니다.
* 지우불(止于佛), 불리불(不離佛)이 참선입니다. 참선은 부처님에게 머물러서, 부처를 떠나지 않는 것이 참선이란 말씀입니다. 진리와 떨어져서, 부처님을 떠나서는 참선이 못됩니다.
* 일체만유의 참 모습이 관세음보살이라 생각하고 염불해야 합니다.
* 상(相)이 문제가 아니라, 성(性)에 머물러야 참선입니다.
* “하느님이 나와 일체만유의 근본이다”하고 하느님을 불러도 참선이 됩니다.
* 불교의 살 길은 원통불교, 원통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통불교(通佛敎)란 특수한 종파에 기울어져 치우치지 않고, 부처님 경전이나 여러 조사, 정평도인들이 수용해서 온 불교 교리나 행법을 차별하지 않고, 법집에 구속되지 않음을 말합니다. 나아가 모든 종교가 그 근원은 같은 진리로 인정하고 배척하지 않음이 통종교입니다.
* 정평(定評)도인들은 모두 원통 종교였습니다. 아집(我執) 법집(法執)이 없어야 참 불교입니다.
* 무자 화두도 본래 자리, 즉 불성, 실상자리를 참구해야 참선입니다.
* 다 부처인데 왜 새삼스럽게 공부하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부처요, 우주가 나와 더불어 하나인 자리를 증명하지 못하면, 부처의 공덕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론적으로 아는 간혜지로는 생사를 면할 수 가 없습니다.
* 몸과 마음을 항시 우주의 도리에 맞추는 것이 참선입니다. 그래서 참선은 쉽습니다. 의심이나 염불선이나 무엇을 하든지 간에, 마음자세는 천지우주의 도리에 맞추는 것이 참선입니다.
* 분명한 지혜는 실상지혜이며, 이것이 정견입니다. 또한 이 실상을 보는 지혜는 공(空)지혜, 곧 반야 지혜입니다. 반야 지혜, 곧 반야바라밀은 첫째로, 무릇 있다고 하는 것 모두를 비어 있음으로 보는 지혜입니다. 즉 우주의 실상을 보는 지혜입니다. 둘째는, 빈 가운데에 바로 불성이 가득 차 있음을 보는 지혜입니다. 셋째는, 천지우주를 모두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지혜입니다.
* 성불은 여실히 닦으면 결코 먼 길이 아닙니다. 본래시불이라, 우리 본래면목이 바로 부처요, 자성청정심이라, 우리 마음이 우리 자성이 불성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법무돈점(法無頓漸)인데, 인유리둔(人有利鈍)이라, 사람에게 예리함과 둔탁함의 심천(深淺)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확실히 부처님이 보장한 부처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성불을 않고는 안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불승(一佛乘)이라, 하나의 부처, 하나의 생명인 것입니다.
* 부처님 당시의 수행법은 관법이었습니다. 물을 보라, 태양을 보라고 하는 법문이 관무량수경에 나옵니다. 관조나 관법도 그 자리를 보려고 애써야 합니다.
* 천태지의(天台智顗)선사는 “우리 마음을 공가중(空假中)에 머물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가중에 머물게 하라는 말씀은, 실상에 두고 공부하란 뜻입니다. 곧 항상 마음을 실상에 머물러 불법을 공부하란 뜻입니다.
* 부처님의 철저한 수행정진을 들어서, 일마척맥(一麻隻麥)이라, 삼씨 한 알, 보리 한 톨로 정진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잘 먹고 편안히 공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언제 이루거나 결코 성불을 해야 합니다. 일체중생 개당작불(一切衆生皆當作佛)이라, 성불은 중생의 의무입니다.
* 업장이 가벼울수록, 영생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우리의 불성 가운데는 다보여래(多寶如來)라, 지혜도 원만, 자비도 원만, 공덕도 원만구족해 있습니다. 우리의 환희심도 환희광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 공부하는 사람은 목표를 해탈에 두어야 합니다. 일상삼매를 행동화하면 일행삼매가 됩니다.
* 불법자체가 원통입니다. 따로 있지가 않았습니다. 정통조사는 법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천지우주가 원통무애(圓通無碍)요, 통달무애(通達無碍)라, 진리에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 참선은 대기대용(大機大用)이라, 본체만 가지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문자를 떠나고 헤아림을 떠나 있습니다. 이런 소식들은, 그야말로 고함[喝]을 지르거나 방[棒]을 치지 않고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 영생해탈(永生解脫)의 열반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또한 그 곳을 향한 가르침 역시 분명히 있습니다. 다만 중생이 모르고 게을러서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 자기가 갖추고 있는 열반사덕(涅槃四德)의 덕성을 못 느끼면, 참다운 불자가 못 됩니다. 부처님은 우리한테 그런 덕성을 먼저 일러 주시고, 그런 덕성과 하나가 되도록 수행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 우리는 지금 참선을 할 시대입니다. 왜냐하면, 참선을 해야만이 참다운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를 증명하여 생사를 해탈할 수 있고, 참다운 스승, 참다운 어버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참선에 미도주작(未到走作)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공부는 미처 이루지 못하고, 기분만 앞선 채 서두르는 것을 미도주작이라 합니다. 참선할 때는 마음이 차분해야 호흡도 조용해집니다. 호흡과 참선은 상관성이 있습니다. 호흡법도 중요합니다.
* 공부 열심히 하는 어느 불자가, “제 평생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불러도, 그 시간이 너무나 짧습니다.” 그래요. 젊은 사람이 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 공가중(空假中)은 불성을 논리화 시켜서 보았기 때문에, 생명적 역동성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은 생명을 화석화 시키지 않고, 생명 그대로 공부하는 법이기 때문에, 우수한 참선법이며 염불법(念佛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태양의 체는 청정법신(淸淨法身)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에 해당하고, 태양광명은 원만보신(圓滿報身)노사나불(盧舍那佛)에 해당하고, 태양의 그림자는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석가모니불에 해당합니다.
*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자리는 아미타불의 타(陀)에 배대하고, 원만보신 노사나불은 아미타불의 미(彌)에 배대하고, 일체존재·일체만유는 아미타불의 아(阿)에 배대 시켰습니다. 그러나 천백억화신의 아(阿)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청정법신의 공(空)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하나의 불빛을 볼 때, 겉으로만 보이는 것은 아(阿)이지만, 그 안에는 성(性)과 공(空)이 다 들어 있습니다.
공(空) 가운데도 공(空)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성(性)과 상(相)이 다 있습니다. 소위 삼위일체(三位一體)란 말입니다. 또 법신·보신·화신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하나의 부처입니다. 셋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삼신일불, 아미타불은 소박하게 방편적으로 저 서방 정토의 극락세계에 계신다. 이렇게 생각하십니다마는, 방편을 떠나서 제일의적(第一義的)으로 해석할 때는, 천지우주가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 관세음보살은 무엇인가? 관세음보살은 천지우주인 아미타불의 자비의 상징입니다. 또 문수보살은 무엇인가? 천지우주 아미타불의 지혜가 바로 문수보살입니다. 부처님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하나의 개념으로 표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덕 따라서 그때그때 이름이 붙습니다.
병고를 다스릴 때는 약사여래, 하늘에 있는 성수(星宿-별)들을 다스릴 때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칠성여래)입니다. 칠원성군(七元聖君)이라, 이와 같이 돌멩이나 티끌 하나도 모두가 다 부처님의 화신입니다.
* 단도직입하면 바로 마음이 부처인데, 마음 그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달마 대사 관심론(觀心論)에 보면, 마음을 맨 처음 풀이 했습니다. 인간이 무엇인가? 마음 그것이 기묘한 것이어서, 우리가 생각할 때는 별것도 아닌 것 같은데, 결국 마음을 파고 들어가면, 의식(意識)·말라식(末羅識)·아뢰야식(阿賴耶識)·암마라식(菴摩羅識)이고, 결국 부처가 되어 버립니다.
* 화엄경(華嚴經)에 보면, 우주라는 것은 종횡으로 얽히고 설켜 있습니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 덩어리입니다. 하나의 생명 덩어리 인데, 나만 잘 살고 남이 못 살면 균형이 깨집니다. 균형이 깨지면 소리가 납니다. 우리는 천지우주의 도리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 현상이나 실상 모두를 종합적으로 수렴한 법문이, 천태지의 선사의 법문이요, 또 금타 대화상의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입니다. 따라서 이 법문은 우주만유를 하나의 도리로 통달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체험은 미처 못 한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개운하고 풍요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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