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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진리의 길 2권2. 사바세계가 극락정토입니다.(6)

 

 

* 일체만유가 다 공입니다. 지구도 은하계도 별들도 내 몸도, 대상적인 모두가 텅텅 비어 있습니다. 인연소생법 아설즉시공(因緣所生法 我說卽是空)이란 법문이 있습니다. 인연으로 생긴 모든 것들은, 곧바로 공이다 하셨습니다.

 

* 칸트도, 우리의 인식을 밖에 있는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주(認識主)인 내 주관에 있다고 했습니다. 밖에 무엇이 있기에 그렇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주관이 그렇게 보니까 그렇게 인식된다는 말입니다. 미웁게 보는 것도, 미운 사람이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밉게 본다는 말입니다. 모든 인식이 자기 주관에 의존해 있습니다.

 

* 생각하고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념(一念)이 됩니다. 공부는 하루 이틀 단 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생겁(多生劫)에 물들고 버릇이 된 습관을 지극한 마음으로 닦아내기 위해서는, 생각이 다할 때까지 부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공부는 어거지입니다. 주문·염불·화두로 쌓인 나쁜 버릇을 없애기 위해 억지로 닦아내야 합니다. 애써야 합니다. 공부를 계속 하다 보면 결국 자기한테 하나로 뭉쳐옵니다. 심신탈락(心身脫落)이 되어, 몸도 마음도 떨어져 내려서, 상쾌하게 텅텅 비어옵니다. 그때는 가슴도 머리도 시원해집니다. 심신탈락이라는 말은 마음에 잡념이 없어져서 생각이 비어지고, 몸은 더 이상 없는 듯 상쾌해진다는 뜻입니다.

 

* 필요 없는 군생각을 놓아 버리십시오. 다 놓아 버리면, 눈살도 펴지고 가슴도 펴집니다. 잡념 때문에 병이 생기고, 번뇌 때문에 몸이 무겁고, 욕심 때문에 나의 참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열어 버려야 참선이 됩니다. 행복은, 우리 마음의 본래면목 자리, 그 원만한 자리를 생각하고 파내는 일, 그 길 이외에는 절대로 없습니다.

 

*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하니,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이라, 생각 생각에 생각을 하다 무념처에 이르면, 자기 눈에서나 입에서나 코에서나 귀에서나 자기 몸 전체에서, 자마금색이, 오색찬란한 광명이 항시 빛나는 것입니다. 참다운 무량의 보배인 불성보배는 영원불멸합니다.

 

* 마음이 하나로 딱 모아지면 일념무심(一念無心)이 우주를 움직입니다. 스스로를 본래 부처로 모시고 아미타불을 자꾸 부르면, 자기 암시가 되어서 자아를 텅 비울 수 있습니다. 염불이라는 것은, 자기 본래면목 자리를 생각하고, 자기 생명 자리, 자기 부처자리를 생각하면서 명호를 부르는 것입니다.

 

* 염불선은 부처님을 믿고, 그리워하고 사모하며 우러르는 마음을 계속 간직하며 명호를 부르는 것입니다. 염불선은 자기본성[自性]이 본래면목인 부처라고 믿고, 자기 생명으로 믿고 명호를 부르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한시도 잊지 않고 참선하는 것이 염불선입니다. 천지우주와 내 마음이 부처임을 안 놓치는 것이 염불선입니다. 염불선은 자기 본성을 부처로 믿고 부르는 것이므로, 자성선 또는 불성선이라고도 합니다.

 

* 부처님을 믿어야, 부처님 공덕이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믿지 않으면, 내면에 아무리 불성이 가득 차 있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부처님 광명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더라도, 공덕을 다 얻을 수가 없습니다.

 

* 자기가 부처라는 사실을 온전히 믿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순식간에 위대한 힘이 나옵니다.

 

* 진여불성 쪽으로 가려고 할 때, 내가 배운 것과 잠재의식이 자꾸 반발을 합니다. 참선은 우리 마음을 부처님한테 모으고 공부해야 참선입니다. 만일 부처님한테 모으지 않으면 외도입니다. 천지우주가 부처님이라고 믿고, 화두나 염불을 해야 합니다.

 

* 생명자체, 내 생명의 근원 자리에 마음을 모아야 참선이 됩니다. 즉 불심에다 마음을 모아야 참선입니다.

부처님이라는 우주의 실상, 진리에다 마음을 모아야 참선입니다. 강한 구도심과 신앙심으로 실상자리를 안 떠나야 참선입니다.

 

* 제법공을 모르면, 중생차원에서 위선을 면치 못합니다. 왜 공(空)한가? 인연생이라 공합니다. 비었습니다. 잠시 인연으로 결합해서 생긴 것이라 공입니다. 시간적으로 무상하고, 공간적으로 비었습니다. 공간적으로도 비었다는 말은 무아입니다. 오직 부처님, 불성만 온 우주에 가득 차 있습니다.

 

* 현대 물리학은 모든 것은 제로[Zero]로 돌아간다고 증명했습니다. 모두 공으로 돌아갑니다. 현대 물리학은 석공관(析空觀)으로 물질을 분석해 들어가면 광명밖에 없다고 공을 말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공은 즉공(卽空)입니다. 즉공이란, 지금 현상 이대로 비었다는 말입니다. 공에 와서, 공 속에서 살다, 공으로 돌아갑니다.

 

* 부처님 가르침은 공에만 머무르지 않고, 모두 다 중도실상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불교의 공은 다만 공[但空]인 허무의 공이 아니라, 공의 빈자리에는 실상으로, 광명으로, 불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비었어도 비지 않는 중도실상입니다.

 

* 중도실상이란, 참다운 실상은, 중생이 보듯이 있는 것만이 아니고, 반야사상이 말하듯이 비어 있는[즉 잘못 봐서 비어있다고 중생 눈에만 빈 듯이 보이는]것만도 아니고, 진여불성은 빈 듯 보이는 그 자리에 충만해 있다는 사상입니다.

 

* “산은 산, 물은 물”은, 범부심에서 보면 영롱한 산이고 영롱한 물이라는 뜻입니다. 중생 눈에는 이렇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청정불안(淸淨佛眼)에서 보면, 그냥 산이나 물이 아니고, 법성(法性)의 산, 법성의 물이라는 말입니다.

 

* 참선은 어떤 공부나 가상(假相) 가명(假名)을 떠난 실상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 참선 공부는 방편설을 제해 버리고,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다, 이 꽃 이대로 부처고, 저 나무 저대로 부처다.”

 

* 우리가 지금 눈으로 못 봐도, 현상계의 삼라만상과 일체존재가 그대로 우주의 실상자리요, 불성자리요, 바로 부처님입니다. 이렇게 미고 하는 공부가 참선입니다.

 

* 참선 공부는 마음을 열고 하는 공부입니다. 마음을 연다는 말은, 천지우주에 다 나를 개방하고,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는 빈자리에서 참선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시비분별을 버리고, 대소(大小) 친소(親疎)를 버려야 합니다. 천하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리에서 참선해야 합니다. 마음을 닫아 놓고, 너와 나가 있고, 이것과 저것이 있고, 걸림이 있는 공부는 참선이 못됩니다.

 

* 참선 공부는 마땅히 자기 생명을 걸고 해야 합니다.

자기 목숨을 건다는 말은, 현상적인 상, 몸뚱이는 안중에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 만법유식(萬法唯識)이란 말은, 물질은 티끌 하나도 본래 없고, 오직 마음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유식관(唯識觀)이란 우주 전체가 오직 마음뿐이라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 일진법계관(一眞法界觀)이라는 것은, 우주만유가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여불성 뿐이라고 관하는 것입니다.

 

* 법화경에 일색일향(一色一香)이 무비중도(無非中道)라 하였습니다. 모두가 중도 아닌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 반야경의 도리는 모두가 즉공(卽空)의 도리를 말합니다. 왜 모두 즉공인가 하면, 모두 인연생이라, 잠시 동안 이루어진 것입니다.

 

* 진여불성 자리는 본래 공만이 아니고, 공이 아닌 실상이요, 진공묘유의 자리입니다.

진여불성이란 말은, 우주만유가 진실하여 진(眞)이며, 변함이 없다하여 여(如)입니다. 불성이 바로 진여이기에 진여불성입니다. 진공묘유는 공이 아닌 공이어서 진공이라 하고, 있는데 유(有)가 아닌 유[실재의 유]여서 묘유라 합니다. 진공묘유만이 영원한 실상이고 중도실상입니다.

 

* 눈에 보이는 것은, 잠시간 그림자 같이 모양을 낸 것이지, 실다운 모양이 있지 않습니다.

진공 따로 있고 묘유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 공간성이 없고 물질이 아닌 진여불성이, 연에 따라 땅[地]이 되고, 물[水]이 되고, 불[火]이 되고, 바람[風]이 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여불성을 깨닫는 차원에서 통찰한다면, 그대로 공인 것입니다.

 

* 모두가 인연생이고, 또 순간 찰나도 머물지 않습니다.

 

* 물질은 어떻게 모양을 내도 즉공입니다.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이라, 인연으로 생긴 것은 그 즉시에 공인 것입니다.

 

* 즉공무생(卽空無生)이라, 본래 남도 죽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불생불멸입니다.

 

* 어떤 공부나 반야공이 전제되어야, 선이요 염불이며 참다운 주문입니다. 반야공이 전제가 안 되면, 모두 방편설이 됩니다.

 

원교(圓敎)라는 것은, 이사무애(理事無碍)한 중도실상을 설한 법문입니다. 부처님의 일대사 인연은 중도실상의 원융무애한 도리에 있습니다. 원융무애한 법이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입니다. 중도는 진공묘유의 실상 도리입니다. 비공비유(非空非有)가 중도입니다.

 

* 법보화(法報化) 삼신도 별개가 아니고, 삼신일불(三身一佛)입니다.

 

* 가(假)인 동시에 중(中)이요, 또 공(空)이 공인 동시에 중(中)입니다. 천태삼제(天台三帝)의 말씀입니다. 가는 현상이고, 중(中)은 중도(中道)이고, 중도는 또 공입니다. 공은 또 공이면서 중인 셈입니다.

 

* 청정무비한 무량 공덕을 갖춘 불성자리를 훤히 생각해야 참선이 됩니다.

훤히 트인 그 자리에다 마음을 두면 그것이 혜(慧)가 되고, 그 자리를 안 떠나면 염념상속(念念相續) 정(定)이 됩니다. 이것이 정혜균등(定慧均等)입니다. 정혜균등이 안 되면 선정에 못 듭니다.

 

* 앉으나 서나 남하고 이야기 할 때나, 마음 저변에서는 영원적인 생명의 자리인 그 자리를 여의지 않아야 합니다. 이 자리가 실상자리·불성자리입니다.

 

* 마음을 한 경계에 머물게 하고, 산란치 않게 함이 정각지(正覺支)입니다.

 

* 망념을 버리고 일체법은 놔 버리고[捨離], 마음을 평심탄회(平心坦懷)케 함이 행사각지(行捨覺支)입니다.

 

* 마음이 안 열리는 것은, 참선에서 정혜가 균형조화를 못 이룬 탓입니다. 정혜조화법(定慧調和法)이 칠각지법입니다.

 

* 무원삼매(無願三昧)나 무소구행(無所求行)은, 최선을 다할 뿐 그 외 무엇을 바라지 않습니다.

 

* 우리는 절대로 죽음이 없습니다. 허환상(虛幻相)인 이 몸만 죽고 나고 할 뿐입니다. 본래로 죽음이 없음을 믿으셔야 불자입니다.

 

* 원망의 마음을 공으로 통찰할 때, 도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원망을 제법공의 본체로 돌려 도에 나아감을 보원행(報寃行)이라 합니다.

 

* 고생을 통해서 고생을 극복함으로써, 공부가 나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