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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진리의 길 2권2. 사바세계가 극락정토입니다.(5)

 

 

 

* 불교는 일체 만법을 가지고 있으므로 다 용납할망정, 주(主)된 수행법은 부처님을 생명으로 구해서 생각하고 갈앙 흠모하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종(從)적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 부처님이나 성자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 것은, 그만큼 우리 업장이 두텁기 때문입니다. 산천초목, 천지우주가 모두 생명이고, 유정 무정이 모두 설법하고 설법을 듣고[塵塵刹刹俱說俱廳]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인간은 무명에 가려 못 듣고 못 보고 못 믿습니다. 믿음은 지혜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깊이와 지혜의 광명은 비례합니다.

 

* 불성 광명은 사바세계의 유한한 광명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를 갖춘 광명입니다. 즉, 물질은 일차 광명을 부정하는데서, 무명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광명체인 중생들의 생각하는 힘이 모이고 모여서 원자(原子)를 만드는 것입니다.

 

* 부처님을 생명으로 구하는 길은, 부처님 이름을 외우는 것입니다. 즉, 염불이 부처님을 생명으로 구하는 길이기 때문에, 부처님이나 우주의 본의에 가장 합당한 길입니다.

 

* 아미타불은 우주 만유의 대명사이고,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의 공덕, 아미타불이 활용하는 힘, 만유를 다시 부처님한테 이끌어 가는 부처님입니다.

 

* 참선할 때는 부처님을 천지 우주로 보고, 그 전부를 내가 다 감싸서 내 마음에 넣어 버리겠다는 기백으로 공부해야, 차근차근 마음의 지평이 열립니다. 양자강 물을 한꺼번에 들이마시겠다는[一口吸盡西江水] 그런 기운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기백과 마음을 열어 놓고, 그 다음에는 광대무변한 광명을 상상하면서 부처님 이름을 외웁니다. 이것이 염불선입니다.

 

* 부처님이름을 자꾸 부르면, 향광장엄(香光莊嚴)이라, 우리 몸에서 영원한 빛이 발합니다. 명호를 부르면 얼굴에 이상하게 빛이 납니다.

 

* 우리 마음이 광명으로 충만하면 성불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 이름을 지극청정보주명호(至極淸淨寶珠名號)라, 보배 같은 광명에 빛나는 이름이라 합니다. 이런 천지 우주를 부처님의 일상(一相)으로 보고, 그것이 끊어지지 않게끔 이어가는 일행삼매를, 화두로 하면 화두선, 염불로 하면 염불선이 됩니다.

 

*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 등은, 모두 부처님 자리, 실상 자리를 의미합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님 법입니다. 염불을 많이 하면, 시냇물 소리가 염불소리로 들려옵니다. 바람 소리가 들려와도, 그 바람 소리가 신묘한 음악 소리로 들려옵니다. 나쁜 소음도 신묘(神妙)한 멜로디로 들려옵니다.

 

* 당신은 지금 부처로서 만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마음은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청정불안(淸淨佛眼)으로 보면, 산은 그냥 산이 아니고 법성의 산이며, 물은 그냥 물이 아니고 법성의 물입니다. 이와 같이 참선은 가상 가명(假相假名)을 떠나 실상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 화두·기도·참선 어느 것도, 부처님 자리를 안 놓쳐야 화두가 되고 기도가 되고 참선이 됩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은, 모두 이 부처님 자리를 안 놓치기 위해서 있습니다. 무자선(無字禪)의 무자(無字)가운데에도, 부처님과 천지 우주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을 지향하는 마음, 부처님을 향하는 마음을 찰나도 안 놓쳐야 합니다.

 

* 참 자유는 인과율을 믿고 공을 체달(體達)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공을,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본성이라 하고, 과학적으로 표현하면 에너지라 하고, 생명적으로 표현하면 부처님입니다. 이 자리를 증명하기 위해서 참선이 있고 염불이 있습니다. 이 자리를 증명하려면, 자기 업장이 녹아야 합니다.

 

* 무가정(無假定)의 원리를 모르면 겸손해야 합니다. 가(假)란 현상계입니다. 현실계의 바탕은 공입니다. 공을 보는 안목으로 보면, 물질(物質)은 즉공(卽控)입니다. 이대로 비어 있습니다. 공과 가는 둘이 아닙니다. 에너지가 물질이요, 법공불이(法空不二)라, 중도입니다. 공 가운데 색이요, 색 가운데 공이므로 중도입니다. 그러므로 에너지나 공은 죽음이 없습니다. 무한 가능성을 구비한 것이 공(空)입니다. 참선은 이와 같은 구경지(究竟智), 제일의적(第一義的) 지혜를 문제로 삼습니다. 방편이 아닌 실상 지혜를 문제 삼습니다.

 

* 참선은 참다운 자기[眞我], 대아(大我), 부처님을 문제로 삼습니다. 이와 같은 문제를 안 떠나야 참선입니다. 우주의 근본, 나의 근본을 안 떠나야 참선입니다. 자기 존재의 바탕을 묻는 것이 참선입니다. 다른 말로, 천지우주의 도리에 따르면 참선입니다. 불성은 천지우주를 구성하는 순수에너지입니다.

 

* 본래 부처인 자리를 지키고 그 자리를 안 떠나야 참선입니다. 제불지소호념(諸佛之所護念)이라, 모든 부처님께서 다 생각하고 지키고 보호하는 가르침입니다. 삼세제불이 항시 지키고 계시는 그 자리를 안 떠나야 참선입니다. 실상자리에 안주해야 참선입니다.

 

* 염불이란 본바탕·부처·실상을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불명호(佛名號)나 관세음보살 명호는 참 나의 대명사입니다. 내가 참 나를 외우는 것이 염불입니다. 우주의 본바탕을 외는 것이 염불입니다. 그 자리가 부처님인데, 부처님을 외우는 것이 염불인데, 어찌 이것이 방편이겠습니까? 아닙니다.

 

* 염불은 내 본질을 내가 재인식한다는 것입니다. 화두도 자기의 바탕을 보는 것입니다. 화두와 염불은 똑같이 부처님을 자기 생명·자기자성·자기의 본바탕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둘이 아닙니다.

 

* 참선이란, “부처님은 무엇인가? 나와 부처는 무엇인가? 우주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한 공부입니다. 때문에 팔정도(八正道)를 순간도 잊음이 없이 느껴야 합니다. “부처님밖에 없다”라는 생각을 해야 정견(正見)입니다. “천지우주가 이대로 부처님뿐이다.”가 정념(正念)입니다. 바른 견해[正見]·바른사유[正思惟]·바른억념[正念]이 되어야, 바른 참선[正念]이 됩니다. 나 하나의 상(相)도 못 지우면, 참선 못합니다. 다 놔 버려야 참선입니다.

 

*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가?” 본질은 부처입니다. 부처라는 생각을 떠나면 참선이 못됩니다.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이런 문제가 풀려야 ‘이뭣고?’선이 됩니다. 모든 화두를 의심할 때는 “본래면목이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모든 화두의 근본자리가 본래면목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화두는 모두가 어떤 화두나 결국 불성자리를 말하고 있으니, 화두는 “불성이 무엇인가?”와 같습니다. 염불선은 자타력 겸수(自他力兼修)의 선법입니다. 동시에 염불선은 부처님을 연모하는 선법입니다. 중생이 부처이기 때문에, 내가 부처임을 믿는 것이 염불입니다. 대상을 떠나 본체에 부처를 설정하고, 그것을 안에서 구하면 참된 염불이요, 염불선입니다.

 

* 염불선은 타력의 입장이 포함된 종합적인 선법입니다. 염불선은 자기가 부처임을 믿고, 자기 내부에서 부처를 구하는 것입니다.

 

* 불안한 시대는, 우리의 신앙대상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흠모의 정(情)이, 우리 감정순화에 중요합니다. 법화경 수량품에는 심회연모갈앙어불(心懷戀慕渴仰於佛)이라, 부처님을 사모하되 목마르게 부처님을 우러러 생각하라 했습니다. 자기 신앙 대상을 그리워하면, 우리 마음이 감성적으로 비약해서 올라갑니다.

 

* 최상승선은 아집과 법집을 떠난 선입니다. 간화선·묵조선과 본래부처[本來是佛] 자리를 안 놓치고 하는 염불선등이 최상승선입니다. 마음자리나 생명자리나 같은 말입니다. 여기에서 마음이란 부처를 말하는 마음, 곧 우주대(宇宙大)의 마음을 말합니다. “천지우주가 마음뿐이다”라고 믿고 해여 참선입니다. 나 하나의 상도 못 지우면 참선이 못됩니다.

 

* 부처님 명호는 화두식으로 말하면, 부처님이 우리에게 주신 화두입니다.

 

* 화두는 현성공안(現成公案)이라, 바른 마음에서 본다면, 우주만유가 다 화두가 되는 것입니다.

천지우주만유가 화두라고 할 때는, 화두와 염불의 경계가 사라집니다. 만물이 부처라고 보고 부처를 생각하는 현성공안은, 바로 부처님 염불이 되기 때문입니다.

 

* 명호는 모두가 하나의 생명 자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일체만유가 부처라고 믿고 염불하는 것이 참된 염불입니다. 이때 명호는 특정 부처님으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하나의 생명, 하나의 부처로 봅니다.

 

* 자비와 지혜가 본래 하나의 성품이기에 같이 길들여야지, 한 쪽을 무시하면 공부가 더디게 됩니다. 그래서 자비와 지혜, 정(定)과 혜(慧)가 함께 추구되어야 합니다. 화엄경에도, 육조단경에도, 보조어록에도 정혜쌍수(定慧雙修), 정혜균등(定慧均等)을 말씀했습니다.

 

* 부처님지혜는 반야지혜입니다. 또 반야지혜는 제법공의 지혜입니다. 현상계는 모두가 한 번 지나가는 일과성(一過性)입니다. 제법공을 알 때도, 빈 단공(但空)으로만 알면 불교허무주의가 됩니다. 참된 반야바라밀은 공의 알맹이까지 아는 지혜라야 합니다.

 

* 우리 중생이 보는 그 자리만 공인 것이지, 시간성과 공간성을 초월한 생명자리는 항상 존재합니다. 이 자리가 부처님 자리·실상자리·진여불성자리입니다.

 

* 물질과 중생의 업력은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상념파(想念波)입니다. 우리의 상념파가 금생의 이 몸을 만들었습니다. 어머니의 태에 들어갈 때는 우리의 식(識)밖에 없습니다. 상념파가 바로 식입니다.

 

* 우리 불교에서 보면, 물질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진여불성광명(眞如佛性光明)뿐입니다. 물질이나 염파, 상념파는 실은 없습니다. 그야말로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있는 것은, 공이 아닌 공인 진공(眞空)과, 참된 유가 아닌 묘유(妙有), 즉 중도실상입니다. 불교의 반야라는 것은 모두 마음뿐입니다. 모두 진여불성뿐입니다. 불교의 가장 핵심 공부는 반야입니다. 그래서 참선은 참된 실존인 반야를 닦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최선을 다해서 우리 마음상태를 진리에 두어, 반야지혜와 더불어서 살아야 합니다.

 

* 무자 화두를 한다하더라도, 반야지혜와 더불어서 해야 참다운 참선입니다 염불을 해도 반야 지혜와 더불어서 “모두가 비어있고, 모두가 흠도 간격도 없이 부처님의 진여광명뿐이다.” 이렇게 해야 참다운 염불입니다. 왜 참선이나 염불이 실상에 안주해야 하는가? 그것은 실상지인 반야지를 여의지 않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천지우주의 실상을 보는 지혜가 실상지, 곧 반야지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텅 비어 있고 오직 부처님만 존재하고, 진여불성만 존재한다.” “오직 마음뿐이다” 이런 마음을 지속시켜야 됩니다.

 

* 중생은 지금 고황(膏肓)에 든 병, 곧 무명병에 걸려 있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어두운 병입니다. 무지의 병이란 것은, 내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병입니다. 내 생명이 무엇이고 내 몸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가장 근원적인무지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명의 제거에 있습니다. 그 방법이 반야지를 밝히는 참선염불에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실상지혜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믿어야 합니다. 실존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