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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진리의 길 2권2. 사바세계가 극락정토입니다.(3)

 

 

* 불경에 “우리에게 들어 있는 무한의 공덕을 믿으면, 바로 선정에 들어간다[卽時入必定]”는 말이 있습니다.

 

* 우리 중생은 의심을 하고, 믿지를 못합니다. 나한테 있는 무한력을 믿으면, 즉시에 삼매에 들어간다는 것인데도, 못 믿으니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염불이든 주문이든 화두든, 부처님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어 의심이 없어야 참선이 됩니다.

 

* 부처님 정기는 우주에 충만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성자들은 꼭 뇌 속에 들어 있는 뇌세포만 가지고 쓰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너지를 그대로 끌어다 쓰는 것입니다.

 

* 조동종의 선이나 임제종의 선이나 훌륭한 선들입니다. 그런데 그것만 선이고 다른 것은 선이 아니라 하면, 그것은 불교를 너무 협소하게 생각하는 법집입니다. 선은 바로 불심을 의미하고, 불심을 여의지 않는 것이 선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공안을 참구한다 하더라도, 불심을 여의지 않아야 선이 되지, 상대적인 문제나 의심하고 참구한다면, 참다운 선이 못됩니다. 마음이 분열되기 때문입니다.

 

* 묵조선도 잠자코 비추어 본다 하더라도, 진여불성자리, 중도실상의 생명 경계를 분명히 관조해야지, 고목처럼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 가만히 있다면, 오히려 망상이 나오기 때문에 무기(無記)에 떨어지고 졸기도 하여, 진정한 참선이 못됩니다.

 

* 내 마음의 자성, 내 마음의 본체가 바로 부처님이고, 우주 만유의 실상이 바로 부처님이라고 생각할 때는, 바로 염불선이 되는 것입니다.

 

* 염불이라는 것은 부처를 염하는 것으로, 부처 자체가 바로 중도실상의 생명의 본체이기 때문에, 거기에다가 마음을 붙이고 생각 생각에 부처를 여의지 않으면, 우리의 나쁜 버릇이 점차로 없어집니다.

 

* 화두를 참구하는 것도, 생명의 실상에 마음을 두기 위해서입니다. 무자 화두(無字話頭)나 이뭣고[是甚麽]화두나, 모두 다 우주의 본래면목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 수행법 모두가 현상적인 허망상(虛妄相)을 여의고, 또한 망상인 가명(假名)을 여의는 것입니다. 이른바 이름과 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허망상을 떠나고 가명을 떠나면, 벌써 그 자리가 본래 부처인지라, 부처의 지혜가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 불교에서 행하는 수행법인 염불이나 주문이나 화두나 간경(看經)이나, 모두가 다 오온개공을 깨닫는 방편입니다. 오온개공이 되면, 다만 공이 아니라, 그 공의 실체가 진공묘유인, 중도실상의 생명의 본체가 나타나게 됩니다.

 

* 어떻게 해야 참선이 되는가? 내 마음이나 다른 사람 마음이나 다른 동물마음이나, 우주의 일체 유정 무정 모든 존재, 일체 만법의 본 성품이 부처라고 생각하면 선이 됩니다. 그래서 선 가운데는 일체 모두가 다 포함되어야 합니다.

 

* 불교의 선에서 마음을 말할 때는, 인간 마음뿐 아니라, 다른 동물이나 식물이나 일체 존재 모든 것의 근본 성품자리를 말합니다. 이런 모든 것의 근본 자리를 여의지 않으면, 참선이 아님이 없다는 말입니다.

 

* 중도실상 자리가 무엇인가? 우리 중생이 보듯이 허망무상한 상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텅 비어서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조금도 치우침이 없이 모두를 다 초월한 자리이며, 모든 성자들이 체험하는 참다운 생명자리입니다. 즉 일체 가상을 떠나서, 인생과 우주의 본래생명의 실상 자리가 중도실상 자리입니다.

 

* 초심자는 먼저 이해를 하고 닦는 선오후수(先悟後修)가 되어야 바른 수행이 됩니다. “우리가 아직 번뇌에 가리어 체험은 못했지마는, 모두가 바로 보면 진여불성(眞如佛性)아님이 없다. 중생이 보는 것은 실재가 아니고 허망이다.” 이렇게 이해한 다음에 염불을 하거나 화두를 들면, 우리 마음이 실상경계를 지향하게 되어, 필경에 실상을 깨닫게 됩니다.

 

* 중도실상 자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먼저 바른 견해, 정견으로써, “아, 부처님은 바로 우주 자체구나. 우주의 생명이구나.” 이렇게 이해하고 나가면, 차근차근 공부가 익어집니다. 끈기와 용맹 정진의 정도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더라도, 중도실상의 생명의 경계와 계합(契合)하게 됩니다.

 

* 육바라밀의 수행을 닦을 때도, 중도실상의 도리를 함께 닦아야 합니다. 보살의 수행은 지혜[반야지]와 더불어서 해야 바른 수행이 되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물질을 베풀 때도, 이 물건도 공이요,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없다.” 이렇게 상을 떠난 반야지혜의 자리에서 보시해야 합니다.

 

* 우리가 참다운 실상의 지혜가 되어야, 참다운 불법이 됩니다. 그렇지 못하면 참선도 못됩니다.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부달성공(不達性空)하면, 좌선무익(坐禪無益)이라, 모든 성품이 비었다는 데에 이르지 못하면, 좌선을 해도 이익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가상 가명입니다. 공부할 때는 가상과 가명을 부정해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대긍정이 됩니다. 대긍정이라는 것은, 모두가 부처라는 중도실상입니다.

 

* 천지우주는 오직 하나의 상, 오직 절대의 상입니다. 둘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일상삼매입니다. 천지우주는 진리의 한 덩어리입니다. 즉 천지우주는 하나의 진리라는 말입니다. 곧 천지 우주의 본바탕인 불성이 오직 하나이어야지, 마음이 둘 셋으로 분열되면 안 됩니다.

 

* 일상삼매(一相三昧)란 모든 존재를 하나로 봅니다. 즉 진공묘유(眞空妙有)로 봅니다. 실상관은 천지우주를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상관은 일상삼매(一相三昧), 하나의 상으로 보는 참선입니다. 어찌 네가 있고 내가 있겠습니까? 모든 참선은 일상삼매로 일행삼매해서 삼매에 드셔야 합니다.

 

* 천지우주를 한 덩어리로 보는 견해를 일상삼매(一相三昧)라고 하고, 이것을 계속 이어가는 것을 일행삼매(一行三昧)라 합니다. 염념상속이 못되면 선정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 일상삼매 일행삼매라야 참다운 선입니다. 모든 존재의 뿌리를 하나로 보는 삼매가 일상삼매입니다. 모두를 진공묘유(眞空妙有)로 보는 삼매입니다. 무량광명으로 보는 삼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의 부처님으로 보는 삼매입니다.

 

* 마음이 염념상속 못해서, 결정신심, 즉 퇴전이 없는 신심을 얻지 못한다[心不相續 故不得決定信心]는 불경의 말씀이 있습니다. 중간에 자꾸 생각이 끊어지면, 결정적인 신심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즉 무간도(無間道)에 들 수가 없습니다. 천지우주가 부처님뿐이라는 생각을 이어감이 무간도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분명히 그럴 때가옵니다. 하염없이 부처님만 생각합니다.

 

* 해탈도에 이르러 불성을 봅니다. 우리 자성이 불성이기 때문입니다. 자성이란 것은 찬란한 내 생명의 고향이요, 내 마음의 고향입니다. 즉, 내 생명의 주인공이 자성입니다. 이것이 또한 견성오도입니다.

 

* 습관성, 즉 번뇌의 뿌리를 뽑는 자리가 승진도(勝進道)입니다. 해탈도에 입각해 정진을 더해 가는 것입니다. 이른바 보임수행(保任修行)입니다. 그리하여 완전무결한 성불대각의 자리가 옵니다. 그러므로 먼저 참선·염불로 일상삼매 일행삼매를 이루어 무간도에 들어가야 합니다. 무간도에 들어가야 행복을 느낍니다.

 

* 정도와 외도의 차이가 무엇인가? 정도는 일체 만법을 자기 마음의 소산, 즉 소조(所造)로 봅니다. 자기 마음 안으로 봅니다. 부처나 극락·우주를 자기 마음 안으로 봅니다. 즉 우주를 일원적으로 봅니다. 그러나 외도는 자기 마음 밖에서 법을 봅니다. 마음과 물질이 별도로 있다고 봅니다. 마음밖에 태양이 있다고 보면, 이것이 외도입니다. 내 마음밖에 내가 있다고 보면, 외도입니다. 외도는 우주만유를 이원적으로 봅니다.

 

* 한 마음속에 천지 우주를 다 넣어버려야 정도입니다. 마음 밖에서 도를 구하면 외도고, 일체를 마음에서 구하면 정도입니다. 또 외도선은 인과를 믿지 않습니다.

 

* 공안선, 화두선에서 의심하는 것은 다 근본 문제, 내 자성을 문제로 의심하겠지만, 의심하는 것은 꽤 괴로운 것입니다. 사람의 심리 활동에서 믿는 마음은 편합니다. 의심하는 것은 괴로울 뿐 아니라, 의심하는 수행을 하면, 부처님한테 오로지 바쳐 버리는 마음이 감소됩니다.

 

* 도인된 셈치고, 나도 부처도 모두 부처라고 믿고 닦아야, 이것이 최상승선입니다. 나도 비고 천지도 비어 있으니 역시 나와 부처가 둘이 아닙니다. 아공(我空)·법공(法空)으로 해서 다 비었지만, 다만 빈 것[但空]이 아니라, 부처나 똑같이 무량공덕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닦아야 합니다.

 

* 방편염불은 흔히 하는 염불로, 즉 부처를 자기 밖에서 구하는 염불이고, 부처님을 믿고 하는 염불이 염불선입니다. 즉 자기 자성, 마음의 본질이 부처요, 우주가 바로 부처요 극락세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미혹되어 고생이 충만한 사바세계로 보입니다.

 

* 부처의 안목으로 보면, 이대로 내가 선 자리가 바로 극락입니다. 이것을 믿고, 즉 실상을 믿고 하는 진실 된 염불이 염불선입니다. 더 간추려 말하면, “천지우주가 부처님이고, 내 마음도 부처님이다. 내 마음의 바탕도 부처님이다. 극락세계도 또한 내 마음 속에 있다.”고 느끼면서 하는 염불이 염불선입니다.

 

* 부처님께서 가장 많이 말씀하신 것이 염불입니다. 약 이백 부 이상의 불경 가운데서 염불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미타불은 내 자성인 동시에, 우주만유의 본체요, 모든 부처님 진리의 대명사입니다.

 

* 잘 먹고 잘 입는 것이 행복으로 느껴지는 때는, 아직 욕계 번뇌가 끼여 있습니다. 번뇌가 떨어지면 음식에도 별로 생각이 없고, 경안지(輕安地)를 지나 희락지(喜樂地)에 이르면 원리애욕(遠離愛慾)이라, 비로고 애욕에서 벗어나게 되어 감사해서 눈물이 주룩주룩 납니다.

 

* 애욕을 떠나면 무미하다 할지 모르나, 희락지의 그 행복은 어디다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수선불공(修禪不空)이라, 선을 닦으면 행복할 뿐만 아니라, 공에도 안 떨어집니다. 공을 말로 추상적으로 말할 때는 공에 치우치지만, 닦아서 얻은 공은 안 치우치고, 바로 진공묘유, 불성을 얻는 것입니다.

 

* 불성은 무한의 힘이 있는지라 선을 닦으면 자기도 모르는 영원적인 무한의 힘이 자기도 모르게 다가옵니다. 명중호지익(冥衆護持益)이라, 염불을 하면 명중(冥衆-신중)들이 좋아서 우리를 지킵니다. 동시에 염불을 하면 서서히 부처가 되어 갑니다.

 

*. 가을에도 피는 병솔나무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