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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진리의 길 2권2. 사바세계가 극락정토입니다.(1)

 

 

사바세계가 극락정토입니다.

 

* 부처님의 안목(眼目)은 순수한 생명만 보는 것입니다. 일체만유(一切萬有)가 비어 있는 제법공(諸法空)의 자리를 분명하게 믿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분명히 이런 지혜가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갖추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 중요한 것은, 또 공부를 했더라도 주의하고 경계할 것은 증상만(增上慢)에 걸려 있지 않는가 생각해보고, 내 경계가 우선 이치로 아는 해오(解悟)인가, 체험으로 아는 증오(證俉)인가 찾아보아야 합니다. 습기를 다 뽑아 버린 참다운 구경각(究竟覺)에 가야, 공부를 마치는 것입니다.

 

* 수행자의 마땅한 도리로서 사성행(四聖行), 네 가지 도리가 있습니다. 첫째로 분소의(糞掃衣)입니다. 똥 묻었던 옷을 입어라, 음식도 간소히 먹으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수하좌(樹下坐)라, 나무 밑에 앉아라 입니다. 우리의 간소한 생활이 도에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몸 따로 마음 따로가 아니라, 몸과 마음은 원융일체입니다. 셋째로 부란야(腐欄耶)라, 똥오줌을 약으로 먹으라는 것입니다. 넷째로 상걸식(常乞食)이라, 항상 걸식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평생을 걸식하고 얻어 자셨습니다.

 

* 무량 충만한 불성자리, 깨달음의 가피에 우리 마음을 집중시켜야 참선이고, 집중해서 실상자리를 안 놓치려고 염불을 하면 염불선이 됩니다.

 

* 부처님은 생명의 광명입니다. 우주에는 부처님의 무량광명이 충만해 있습니다. 그래서 나무아미타불도 뜻풀이로 하면 무량광불이라, 또 청정광불이라고도 부릅니다. 다만 중생이 어리석어서 그 자리를 못 봅니다. 그 자리에 가기 위해 염불하고 참선합니다.

 

* 부처님은 모든 생명의 근원생명입니다. 모든 존재의 근본자리, 본래면목입니다. 우리가 내 몸에 집착하고 모양에 집착하고 상에 집착해서는, 우리 인생의 참다운 행복은 없습니다. 해탈하여 본래 생명 자리로 가기 위해서는, 모두가 일원적인 생명, 하나의 불성자리를 떠나지 않는 참선· 염불의 길을 가야합니다.

 

* 우리 행복은 모양에 있지 않습니다. 죽지 않고 늙지 않고 병들지 않는, 영원히 변치 않는 무량공덕을 갖춘 자리, 그 영생불멸하는 마음자리에 있습니다. 이 마음자리를 얻기 위해 염불하고 참선 수행을 합니다.

 

* 염불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우리한테도 부처님같이 무량한 공덕이 갖춰져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 불이불(不二佛)이라,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깨닫기 위해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 불리불(不離佛)이라, 우리 업장이 무겁기 때문에,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라고 알더라도,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생각을 유지하고, 확신하기 위해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 화두나 주문이나 염불이나, 자기 본래의 고향자리, 자기가 떠나오고 다시 돌아갈 그 자리를 생각합니다. 돌아갈 곳, 고향자리란 바로 진여불성 자리, 실상자리입니다. 우리가 주인공 자리, 진여불성 자리를 지키면서 염불하면 바로 염불선입니다. 실상자리, 본래면목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서, 화두나 염불을 안 하고 실상자리를 딱 지키고 있으면, 그것이 바로 묵조선입니다.

 

* 건강과 공부는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본래로 둘이 아닙니다. 모두가 일체유심조이고, 물질은 텅 비어 있습니다. “모두다 진여 광명불성이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텅 빈 그 자리, 불성자리를 생각하면서 아미타불 또는 다른 명호를 부르는 것이 염불선입니다.

 

* 참선 수자들은 음식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재가불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몸뚱이는 너무 잘 입고 잘 먹어서는 절대로 이롭지 않습니다. 마음역시 혼탁해집니다. 우리가 시초에 광음천(光音天)에서 올 때는, 우리 몸은 광명신이고, 음식이나 질료, 물질은 안 먹었습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께서 하루 한 끼만 자셨습니다. 참선 수행자는 오후 불식, 하루 일종식(一種食)을 지켜야 합니다. 실상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머물게 하고 참선 한다면, 사실은 적게 먹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먹는 것 때문에 그 비용과 그 시간이 얼마나 많이 듭니까? 삼세제불이 일종위주(一種爲主)로 하신 것은, 일반사람들도 따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재가불자들도 육재일(六齋日)을 지켰습니다.

 

* 나의 본 성품이자 우주의 본성품인, 훤히 밝은 광명만 존재하는 진여불성 자리를 놓치지 않고 염불할 때, 마음도 이웃도 우주도 참으로 정화됩니다.

 

* 가상이 아닌 실상, 이른바 진여불성의 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두고 염불한다면, 이것이 바로 염불선입니다.

 

* 시초의 본 성품 자리는 진여불성·법성·중도실상입니다. 참선은 바로 본 성품 자리를 안 여의는 것입니다.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그 자리에 마음을 두고, 염불을 하면 염불선이 되고, 화두를 하면 화두선이 되고, 주문을 하면 주문선이 됩니다.

 

* 중생들은 상 때문에 중생자리를 떠나지 못합니다. 아(我)·인(人)·중생(衆生)·수자상(壽者相)등, 무엇을 하나 아(我)를 내세웁니다. 그래서 실상(實相), 진리를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도신 선사는 “부처님을 생각하면 우리가 바로 부처고, 분별시비하면 중생이다”고 했습니다. 내 마음이 부처임을 믿는 그 마음이 염불선입니다.

 

* 부처를 우리 마음 밖에다 두고 명호를 부르면, 방편염불(方便念佛)에 그칩니다. 염불이되, 염불선은 못 됩니다. 부처님이 저 극락세계에 계신다 해도 방편염불입니다. 부처님은 우주의 생명으로 계신다, 우주에 두루 계신다, 이렇게 생각해야 참다운 부처님이고, 참 염불이 됩니다. 참 염불이 곧 염불선입니다.

 

* 시방여래(十方如來)는 시법계신(是法界身)이라는 법문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우주 어디에도 계시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면, 우리 마음 그대로 부처님의 무량공덕(無量功德)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부처님 생각을 안 떠나면 염불선입니다.

 

* 신앙이란 의심 없이 온전히 믿는 것입니다. 믿어야 부처님 공덕이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자성청정심, 우리 마음이 본래는 청정심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나쁜 생각도 하고 남을 미워도 하지만, 우리 본마음이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본 성품은 오염이 안 됩니다. 본래시불이니 자성청정심을 염(念)하는 것이 참다운 염불입니다.

 

* 중생들은 부처님을 밖에다 두고, 부르고 외우면 복을 준다는 식으로 염불을 합니다. 이것은 참선이 못됩니다. 오로지 바로 내 마음이 부처요, 우주가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해야 진정한 염불선이 됩니다.

 

*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 주여”를 외친다 해도, 역시 하느님은 저 하늘 위에 계신다고 소박하게 믿어 버리면, 참선도 안 되고 신앙도 못 됩니다. 하느님은 바로 내 마음 속에, 우주에 두루 계신다고 믿으면, 그때는 “오, 주여”를 해도 참선이 됩니다.

 

* 본래의 바탕, 본 성품을 여의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참선이 되는 것이고, 근본 성품·근본바탕을 떠나면, 무엇을 하든지 참선이 될 수 없습니다.

 

* 우리에게도 무한 지혜인 부처님 지혜가 무진장으로 있습니다. 이것을 믿고 염불해야 참 염불이 되고 염불선이 됩니다. 몸은 유한해서 늙고 죽으나, 불성은 늙지 않습니다.

 

* 우주에는 불성광명이, 진여불성이 빈틈없이 가득 차 있습니다. 언제 어디에나, 또 내 몸에도 부처님의 청정광명이 가득 차 있습니다. 염불하실 때도 그 자리에는 부처님이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 부처님 명호는 그 공덕 따라서 다를 뿐입니다. 만약에 내 부처님 네 부처님 따로 있다면, 어찌 부처님이라 하겠습니까? 다만 부처님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자비도 지혜도 다 원만해서 하나의 개념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무량공덕 중에서, 자비 쪽으로는 관세음보살로, 지혜 쪽으로는 문수보살, 이렇게 공덕에다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하나의 부처님이 계시는데, 공덕에다 각각 명호를 붙인 것입니다.

 

* 염불은 꼭 명호[이름]만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염불 소리를 안 내고, 부처님 모양만 바라보아도 부처님을 닮습니다. 사실 우리는 부처님을 닮아가야 됩니다. 부처님상호는 삼십이상이라, 만덕을 갖추면 부처님 같은 상호가 됩니다.

 

* 부처님의 눈은,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고 수용하고 포섭하는 눈빛입니다. 부처님을 닮아가는 염불이 관상염불입니다. 관상염불에는 생각하는 관상염불(觀想念佛)과 보는 관상염불(觀像念佛)이 있습니다.

 

* 실상염불은 모든 상을 떠나서, 부처님의 진리, 중도실상, 이른바 우주에 두루 존재하는 부처님의 참다운 실상자리를 생각하는 염불입니다.

 

* 실상염불이 되면 염불참선이 됩니다. 실상염불은 실상선과 둘이 아닙니다. 실상염불은 부처님 법신이 무량무변하고 만 공덕을 갖춘 중도실상의 원리를 관조하는 것입니다.

 

* 일심으로 법신불을 실상으로 관조하는 것이 인행삼매(因行三昧)고, 그렇게 열심히 염불에 들어 마음이 선정에 드는 것이 과성삼매(果成三昧)입니다.

 

* 삼매에 들어야 근본번뇌를 없앨 수 있습니다. 삼매에 들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정진이 필요합니다.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을 지속시켜야 합니다. 삼매에 들면 우리 업장이 녹아, 부처님 광명이 눈앞에 훤히 비치고, 마침내 부처님 실상에 계합(契合)하게 됩니다.

 

* 화두를 드나, 티벳처럼 ‘옴마니반메훔’을 외우나, 염불을 하나 무방합니다. 간경자 혜안통투(看經者 慧眼通透)라, 부처님 경만 읽어도 됩니다. 불경도 모두 다 부처님 근본 성품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본체에서 안 떠나면 성불이 됩니다.

 

* 염불을 계속하다 보면, 나중에는 가만히 있어도, 자기 몸 전체가 염불이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바람 불면 바람소리가 염불로 들리고, 물소리도 부처님 음성으로 들립니다. 화두도 무(無)라 하면, 바람소리도 무자 화두로 들립니다.

 

* 밥을 먹을 때나 길을 갈 때나, 염불이나 화두가 항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면, 기분이 대단히 좋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삼매에 들 수 있습니다.

 

* 아미타불은 법신·보신·화신, 삼신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아(阿)는 화신을 의미하고, 미(彌)는 보신을 의미하며, 타(陀)는 법신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