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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진리의길 2권 1.(2)

 

 

 

* 바른 견해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을 여의는 것입니다. 그래야 만법이 나온 바도 멸한 바도 없음을 압니다. 생사에 걸리는 수행은 바른 견해의 수행이 못됩니다.

 

* 스스로 자증(自證)한 부처님의 지혜[聖智]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간혜(乾慧)는 비록 지혜는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 선정(禪定)의 지혜를 얻은 바가 아니므로, 생사를 면 할 수가 없습니다.[未能免生死] 생사를 면하는 길은, 철저하게 본래 생사가 없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 옹졸한 마음이 뭉치고 뭉쳐서 병소(病巢)가 됩니다. 병소 속에도 부처님은 들어 있습니다. 마음이 탁 트이면 병이 없어집니다. 정말로 부처님을 믿으면 마음이 확 열리게 되고, 확 열리면 병이 떨어집니다.

 

* 부처님 지혜, 곧 성지는 이론과 더불어서 본체를 증명해야 합니다. 이 증명의 길이 참선이고 염불입니다. 증명이 안 되면, 닦아 얻은 바가 없는 것입니다. 간혜는 부처님 진리를 이론적으로만 아는 것이며, 간혜에 머물면 방편 공부밖에 아닙니다. 힘을 얻지 못하고 생사의 길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부처님 지혜는 체증(體證)공부입니다.

 

* 삼매는 심신과 생리를 정화시킵니다. 간혜만 얻더라도 고통이 덜하고 바른길을 갑니다. 간혜지를 얻어서 염불해야 합니다.

 

* 진진찰찰 구청구설(塵塵刹刹 俱聽俱說)이라, 법계의 모든 유정 무정은 모두 법을 설하고 법을 듣습니다. 바로 보면, 일체 존재가 부처님 아님이 없습니다. 모든 소리가 염불이고, 설법 아님이 없습니다.

 

* 무아는 불교의 대요체이며 대강령입니다. 무상이기 때문에 무아일 수밖에 없습니다. 무아이기 때문에 아(我)아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생명이고 하나의 부처입니다. 왜 무아가 불교의 대강령일 것인가? 불교는 아를 떠나고자 하는 수행이고 염불입니다. 그래서 아를 떠난 것이 부처입니다.

 

* 인생의 가상(假相)은 허망하나, 실상(實相)은 항상 존재합니다. 참 나는 대아요 진아요 본래면목입니다. 참 나는 불성으로 이루어진, 생멸을 떠난 영원한 존재입니다. 진아, 곧 참 나를 알아야 안락이 옵니다. 참 나를 알기 위해 염불을 하고 참선을 합니다.

 

*문(聞) 사(思) 수(修)로 불법 공부를 해야 합니다. 무상이 무상으로 안 보이니 문제입니다. 무상을 자기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이것이 문 사 수입니다. 문(聞)은 많이 듣고 간직함입니다. 사(思)는 행동으로 참다운 자기 것으로 하는 것이며, 수(修)는 닦는 행위입니다. 염불과 참선입니다. 가장 하기 쉽고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것이 염불입니다. 참 염불은 천지우주가 이대로 부처님뿐이라고 보고 아미타불을 외우는 것입니다.

 

* 부처님을 빼놓지 않아야 참선이 됩니다. 따라서 불심에 입각해야 참선이 된다는 점에서, 참선과 염불은 둘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선시불심(禪是佛心) 교시불어(敎是佛語) 계시불행(戒是佛行)이라 하지 않습니까? 선은 부처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 말씀이며, 계는 부처님행위입니다.

 

* 일체만유가 부처님과 더불어 하나다. 즉 일체 만유가 부처님이라고 보는 것이 염불이고, 곧 염불선이 됩니다.

 

* 모든 것은 부처님뿐이다. 불성뿐이라고 믿고 생각하면서 염불하면, 단순한 칭명염불이 아니라 염불선이 됩니다.

 

* 마음이 불심에 안주해 있으면, 어느 곳이나 선방(禪房)이다 해서 무처선(無處禪)이고, 어느 때고 선을 할 수 있다 하여 무시선(無時禪)입니다. 염념보리심 처처안락국(念念菩提心 處處安樂國)이라 했습니다. 생각마다 부처님을 생각하고 진리를 생각하면, 모두 극락세계라 했습니다. 실은 티끌 하나도 부처 아님이 없고, 오막살이도 극락 아님이 없습니다.

 

* 염불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한 소리 뿐의 염불이 아니라, 부처님을 생각하고 기리는 마음이 겸비되어야 합니다.

 

* 천안통(天眼通)으로 삼매에 들어 천지우주와 하나가 되어야, 불성을 봅니다. 불성을 봐야, 사물을 바로 보게 됩니다. 사물을 바로 보는 불안청정(佛眼淸淨)한 눈을 가져야 합니다.

 

* 불성에 안주하기 위해서는, 자기 견해의 유한성을 알아야 합니다.

 

* 불성을 느끼고 염불하면, 심장이 연꽃처럼 피어납니다.

 

*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면 병도 낫습니다.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중생을 자식으로 생각하십니다. 법화경 등 여러 경전에서, 부처님은 중생을 “모두 내 아들[皆是吾子], 중생을 가엾게 여기시기를 갓난아이같이 여긴다[哀愍衆生 如赤子]”라고 하셨습니다. 천지우주가 부처님뿐이라고 느끼고 염불하십시오.

 

* 실로 우리의 능력은 본래로 부처님이기에, 석벽무애(石壁無碍)라, 돌 벽도 뚫고 나갑니다.

 

* 불성광명이 마음 따라 움직입니다. 우선(右旋)하면 전자[斥力]가 나오고, 좌선(左旋)하면 자력(磁力) 곧 인력(引力)이 생깁니다. 여기에서 금진(金塵)이라는 원자핵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 나옵니다.

 

* 대승(大乘) 공부는 이 몸 이 대로를 광명으로 봅니다. 광명은 내 몸이나 내 마음의 근본입니다. 동시에 광명은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이요 공덕장이라, 일체 작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천지우주나 내 몸이 광명덩어리입니다. 우리는 바야흐로 위대한 광명인 부처님 진리를 증거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광명은 온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자체입니다.

 

* 인생행로의 지표가 인연법입니다. 인연법에 따라 인생이 진행, 발전, 소멸하기 때문입니다.

 

* 부처님 은혜의 알맹이는 인연법입니다. 그것은 인(因)도 연(緣)도 과(果)도 부처님이기 때문입니다.

 

* 물리적 원칙, 화학적 법칙이 모두 인연법입니다. 모이고 흩어지고 생성하고 파괴되는 모두가 인연법을 벗어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연법은 뛰어난 과학입니다.

 

*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인지라, 사람을 봐도 부처요, 개를 봐도 부처입니다. 부처로 생각해도 손해가 없습니다.

 

* 가장 좋은 생각, 가장 좋은 행동, 가장 좋은 말이 부처입니다. 그 중에 염불은 바로 이런 소중한 부처님 이름을 외우는 수행이므로 수행중의 수행이 됩니다. 진리자체·생명자체·광명자체·우주자체를 사모 찬탄하는 수행입니다. 염불선은 어느 때나 할 수 있고, 누구나 하기 쉬워,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부처님 경전 이백 부 이상에서 염불을 말씀하셨습니다.

 

* 부처님은 사랑 가운데 사랑이요, 님 가운데 님입니다. 어이하여 사랑 가운데 사랑인가? 가장 사랑하는 내 생명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왜 님 가운데 님인가? 내가 목마르게 그리워하며 찾아가야 할 내 생명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 부처님은 일체 만유의 님이요, 평생 우리가 닦다가 종국에는 돌아가야 할 필경의 의지처 입니다.

 

* 부처님을 자기님으로 사랑하는 선법, 이것은 벌써 자기감정에 만족한지라, 찾으면 찾을수록 더 그립습니다.

 

* 성불하면 점수(漸修)가 필요 없지마는, 그렇지 못하면 점수가 필요합니다.

 

* 계행 청정으로 생리가 정화되어야, 법성을 맛보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그래서 계로써 스승을 삼으라 하셨습니다.

 

* 선정해탈을 얻고 멸진정(滅盡定)을 증(證)해야 성불입니다. 멸진정은 모든 번뇌와 망상을 없앴다 해서 멸진입니다.

 

* 중생은 망상을 내 마음으로 하고, 자성이 바로 참된 법신인 줄을 모릅니다.[衆生妄想爲心,不知自性是眞法身] 자기의 참 법신은 우주에 변만(遍滿)한 부처님인 것입니다.

 

* 중생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과 더불어서 터럭끝 만큼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관무량수경에 이 마음이 바로 부처요[是心是佛], 이 마음으로 부처를 만든다[是心作佛]고 했습니다.

 

* 문득 본성을 깨닫는 것은 쉬우나, 무수생의 습기(習氣)는 하루아침에 제거하기가 어렵습니다. 깨달음에 의지해서 닦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이것이 점수(漸修)입니다.[理卽頓悟, 事非頓除]

 

* 우리 생리가 정화되지 않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생리와 심리를 정화시키는 것이 계행입니다. 계율이 앞서야 삼매에 들 수 있습니다.[身不淸淨, 三昧不現前]

 

* 삼매로 마음이 정화되어 업이 녹아지면, 자연의 천고(天鼓)소리를 듣습니다. 천고는 맑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우주의 음입니다.

 

* 나무의 혼도 순수생명으로 목신(木神)이고, 산의 신은 산신(山神)입니다. 모든 자연이 생명입니다. 혼은 순수생명을 말합니다.

 

* 불성과 하나가 될 때 삼명육통을 합니다. 꼭 삼명육통을 못해도, 오래도록 부처님을 안 떠나고 공부하면, 광촉(光觸: 부처님 광명과 접촉)이 되어 업장이 소멸됩니다.

 

* “제가 과거세에 무슨 죄로 이리도 추녀로 태어났습니까?” 하고 기도하자, 부처님께서 광명으로 감싸서 어루만져 주시자, 추녀가 미녀로 되었다는 추녀개용(醜女改容)의 고사가 있습니다.

 

* 부처님의 광명은 소경도 벙어리도 나을 수 있습니다.

 

* 부처님 광명을 접할 수 있는 길은 삼매입니다. 부처님 파장과 내 생명의 파장이 맞을 때, 부처님 광명을 접할 수 있습니다.

 

* 광명을 느끼면 순식간에 나을 수 있습니다. 공부가 짙어지고 정화될수록 부처님 광명이 커집니다. 그래서 부처님광명이 우리 몸에 접촉되고, 우리를 감싸기도 합니다. 심월고원 광탄만상(心月孤圓 光呑萬相)이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마음 달이 홀로 둥근데, 일체 만상이 모두 광명에 든단 말입니다. 만상이 광명에서 나와 광명으로 갑니다.

 

* 영원한 광명인 적광색(寂光色), 적광명(寂光明)은 우리 눈에는 안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있습니다.

 

* 존재와 나는 하나입니다. 연축자재(延縮自在)하며, 내 하나의 생각이 온 우주에 미칩니다.

 

* 내게 있는 불심자리를 관조하는 것이 묵조선입니다.

 

* 너와 나의 구별이 없어야 동체대비(同体大悲)이며, 상이 없어야 참 자비입니다.

 

* 일체만유를 원융무애(圓融無碍)의 진여불성으로 보는 견해가 정견입니다.

 

* 불안을 해소하고 안심입명(安心立命)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따라서 너와 나를 둘로 보는 이원론으로는, 불교도 아니고 안심도 얻지 못합니다.

 

* 현상과 근본이 합해진 것이 불교입니다. 바닷물이 바람에 의해 일어나 파도가 되지만, 바람이 자면 파도는 없고 바다만 있습니다. 순수생명이 곧 마음이고 마음이 곧 부처입니다.

 

* 불교인은 부처님의 본원력(本願力)을 믿어야 됩니다. 우리를 성불하게 하는 부처님의 원(願)을 믿어야 됩니다. 우주에는 우리를 불성으로 이끄는 인력이 있음을 믿어야 됩니다. 우리를 부처로 만들려는 원의 힘이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음도 믿어야 됩니다.

 

* 삼계가 부처뿐인데 누구를 나무라겠습니까? 관무량수경에 부처님은 입일체중생심상중(入一切衆生心想中)이라는 법문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어디 계시는가? 모든 중생의 마음 가운데 계십니다. 곧 내 안에 내 마음속에 계십니다. 또 나는 부처님 안에 있습니다. 부처님과 나는 뗄 수 없는 하나입니다.

 

* 몸은 우리의 업장에 붙어 있는 짐입니다. 자기 업장에 알맞은 몸을 받습니다. 몸은 업장의 소산입니다. 자기 몸을 보며 업장을 짐작하는 것입니다.

 

*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무슨 경이나 그 경이 최고의 경이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경이 성불의 법입니다. 그래서 정통조사는 “이 한 가지만 법이다.”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 염불은 부처와 중생을 하나로 인식하고, 이것을 안 떠나려는 것입니다. 염불을 놓치지 마시고, 염불을 통해 부처님과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불성과 접근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