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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진리의 길. 22(1)

 

 

온 세계에 한국 불교의 진면목을

 

 

강옥구 큰스님, 이렇게 인터뷰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달마 스님께서 동쪽으로 오신 큰 뜻이 있는데, 큰스님께서 이렇게 미국으로 오신 의미는 무엇인지요?

 

큰스님 예, 제가 온 것은 거창하게 달마 스님께서 오신 것에 비교될 수는 없습니다. 달마 스님께서는 공부가 다 성취된 뒤에 동토지방을 제도할 원력으로 오셨고, 저는 미숙한 채로 미국불교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해서 왔습니다. 미국에서는 한국불교가 아직도 제대로 정착을 못했다는 판단이 서고, 미국의 각국 불교들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서로 화합도 안 되어 있는 것 같아서 융합적인 차원에서 누군가가 조절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나이도 많고 능력도 부족하나마 미국에서 한국불교의 구심점 역할을 감당해 가면서, 각 종파간의 여러 가지 집착 때문에 분열되고 갈등되어 있는 관계를 해소하는 데 다소라도 도움이 될까 하는 그런 뜻으로 온 셈입니다. 또한 미국은 선진국으로서 세계의 석학들이 많이 모이고 문화교류가 활발한 곳이기 때문에 불교의 진면목을 세계에 알리는 데 효과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강옥구 그러면 갈등을 해소하고 분열을 화합하는 가르침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큰스님 예, 그냥 무턱대고 무원칙으로 분열을 지양시킬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원리가 앞서야 되겠지요. 그런 면에서 부처님 가르침 자체가 그런 분열을 지양시킬 수 있는 충분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부처님 가르침인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 곧 반야의 지혜라는 것은 모든 개별적인 차별, 분별을 초월하여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파악하는 실상實相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현상적으로 경험하는 문제들은 모두가 실체가 아닙니다. 자기 몸뚱이라든지 자기 관념이라든지 대상물 모두가 실제가 아닙니다. 불교말로 하면 이른바 오온개공五蘊皆空입니다. 오온에는 인간이라든가 모든 것이 다 들어가는데, 오온은 본래로 실존이 아니요, 가상假相인 것이고 허망상인 것이기 때문에 공空인 것입니다. 오온개공을 또 제법공諸法空이라 합니다. 일체만유가 다 제법인데, 제법이 본래로 다 공한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물리학적으로 분석한 뒤에 공이 아니라 바로 즉공卽空이라는 말입니다. 색즉공色卽空이라 할 때 색은 바로 물질인데, 물질이 바로 공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내 몸뚱이도 이렇게 있다고 집착하고 있는 이대로 공이란 뜻입니다. 또한 우리 관념도 그대로 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중생이 인식하는 모두가 허망한 것이지요. 잘못 보는 것으로써 실재가 아닌 것이고, 진리는 반야바라밀인 중도실상입니다. 중도실상中道實相은 원융한 생명의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중도실상의 생명관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고 대화도 하고 행동해야 분열 갈등을 지양하고 모든 일을 진리의 조명 아래서 올바르게 생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강옥구 그러면 오온개공으로 모든 것이 비었다면 거기에서는 어떠한 수행법을 따라야 하나요?

큰스님 불교 수행법은 다 오온개공을 근본으로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허망상을 부정하고 소멸시키는 수행법입니다. 가사, 염불수행을 한다 하더라도 염불이라는 것은 부처를 염하는 것으로써 부처 자체가 바로 중도실상의 생명의 본체이기 때문에 거기에다 마음을 붙이고 생각생각에 그 자리를 여의지 않을 때에야 우리 나쁜 버릇은 점차로 없어지는 것이고 분별시비 하는 허망한 마음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중도실상, 생명의 실상에다 마음을 두기 위해 화두가 있는 것입니다. ‘무자無字’ 화두나 ‘이뭣고’ 화두나 모두 다 우주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를 문제시하고 그 자리에서 우리 마음을 여의지 않기 위해서 화두를 참구하는 것입니다. 주문을 외우고 경을 보는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법 모두가 현상적인 허망한 상을 여의고 또한 망상인 가명假名을 여의는 것입니다.

 

이른바 명상名相, 즉 이름과 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허망한 상을 떠나고 가명을 떠나면 벌써 그 자리가 본래 부처인지라 부처의 지혜가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 하는 수행법인 염불이나 주문이나 화두나 간경이나 모든 것이 오온개공을 깨닫는 방편입니다. 오온개공이 되면 다만 공이 아니라 그 공의 실체가 진공묘유眞空妙有인 중도실상의 생명의 본체가 나타나게 됩니다.

 

강옥구 보통 미국에서 선禪이라 하면 일본의 선, 주로 임제선이나 조동종의 선을 의미하는데, 큰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염불이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뜻하시는지요.

 

큰스님 조동종의 선이나 임제종의 선이나 다 훌륭한 선이지요. 그런데 그것만 선이고 다른 것은 선이 아니라고 하면 불교를 너무나 협소하게 해석하는 법집法執이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선은 바로 불심佛心을 의미하고 불심을 여의지 않는 것이 선이기 때문에 가령 화두 공안公案을 참구한다 하더라도 불심을 여의지 않아야 선이 되는 것이지 상대적인 문제를 의심한다든가 참구한다고 할 때는 마음이 분열되어 참다운 선이 못됩니다.

 

또 조동종 계통의 묵조선黙照禪에서도 잠자코 비추어 본다 하더라도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 중도실상의 생명경계를 분명히 관조해야지 그저 묵묵히 고목처럼 무념무상으로 가만히 있다고만 할 때는 오히려 망상이 나오기 쉽고 무기無記에 떨어지기도 하여 진정한 참선이 못되는 것이지요.

 

또한 염불을 하더라도 염불의 본뜻이 부처를 생각하고 일체가 부처임을 깨닫는 것이기에, 극락세계에만 부처님이 계신다는 생각으로 우리의 마음을 떠나서 마음밖에 부처를 대상적으로 설정하고 구할 때는 염불선念佛禪이 못됩니다. 그러나 내 마음의 자성, 내 마음의 본체가 바로 부처님이고 우주 만유의 실상이 바로 부처님이라고 생각할 때는 바로 염불선이 되는 것입니다.

주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참다운 진언眞言의 경계, 참다운 우주 만유의 본질자리는 부처인 것이고 내 마음과 더불어 둘이 아니라고 분명히 생각하면서 그 자리를 여의지 않으면 주문을 외운다 하더라도 참선이 됩니다.

따라서,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화두를 참구하든, 묵조하든, 염불하든, 주문을 외우든, 또는 경을 읽든 다른 종교의 여러 가지 수행법을 공부하든지 간에 우리 마음이 본질적인 생명의 실상자리, 생명의 본질 자리를 안 떠나면 다 선이 된다고 해야 이른바 법집이 아닌 참다운 선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옥구 그러니까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하는 그런 자리를 바로 보면 염불을 하든 경을 읽든 모두 다 선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큰스님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을 국한시키면 안됩니다. 우리 마음이나 다른 사람 마음이나 다른 동물 마음이나 우주의 일체 유정무정 모든 존재, 일체 만법의 본 성품이 부처라고 생각해야 참선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 가운데는 일체 모두가 다 포함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안 떠난다”고 할 때 잘 모르는 분들은 단순히 “우리 마음인 인간성만 부처인 것이고 다른 것은 부처가 아니지 않는가”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선에서 마음을 말할 때는 우리 인간의 마음인 동시에 다른 동물이나 식물이나 일체 존재 모든 것의 근본성품 자리를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성품 자리만 여의지 않으면 모두가 참선 아님이 없다는 말씀이지요.

 

강옥구 그러면 중도실상의 자리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나와 모든 중생과의 차리가 없다는 자리를 의미합니까?

 

큰스님 예, 그렇습니다. 그 자리는 어디에도 안 치우치고 모두가 다 포함된 셈이지요. 우리 중생이 보듯이 허망 무상한 상만 있다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텅 비어서 없다는 것도 아닌 것이고, 조금도 치우침이 없이 모두를 다 초월한 자리며 모든 성자들이 체험하는 참다운 생명 자리입니다. 일체 가상을 떠나서 인생과 우주의 본래 생명의 실상 자리가 이른바 중도실상 자리입니다.

 

강옥구 그러면, 참선에서도 중도실상 자리를 보는 것이 중요하니까 초보자가 선을 공부하고 싶을 때 중도실상에 대한 이해가 앞서야겠군요.

큰스님 예, 그렇습니다. 초심자가 처음에 중도실상을 관조한다 하기는 좀 어렵겠지요. 그렇지만 이해는 할 수 있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우리 중생이 아직은 번뇌에 가리어서 중도실상의 생명의 자리를 체험은 못한다 하더라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고 무수한 성자가 증명했고 성인들이 말씀한 공변된 자리니까 이해는 할 수 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초심으로 공부할 때도 반드시 먼저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리고 중생들에게도 이해를 하도록 까지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먼저 바른 이해를 하고 닦는 선오후수先悟後修가 되어야 바른 수행이 됩니다. 이른바 정견正見이 없는 공부는 부질없는 분별을 하여 마음이 헷갈리게 되니 참다운 수행이 되지 못합니다. 바른 이해 곧 “우리가 아직은 번뇌에 가리어 체험은 못했다 하더라도 일체 모두가 바로 보면 진여불성 아님이 없다, 어떠한 존재나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허망한 것이고 성자가 보는 실상자리만이 참다운 것이다.” 이렇게 먼저 이해한 다음에는 염불을 하든 화두를 들든 우리 마음이 그러한 실상경계에 지향하게 되어 필경 실상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가사,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을 외운다 하더라도 바른 도리, 중도실상의 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할 때는 부처님을 마음 밖에서 대상적으로 구하는 것이 되겠지요. 그러나 이해를 해버리면 아직은 자기가 바로 증명은 못했다 하더라도 “아, 부처님은 바로 우주 자체구나, 우주의 생명이구나” 이렇게 나가니까 단박에 체험은 못한다 할지라도 그 경계를 지향해서 공부가 차근차근 익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문을 외우든 다른 방법으로 공부를 하든지 간에 바른 이해를 하고서 중도실상의 생명 자리를 지향해서 나가려고 할 때는 그 사람의 근기와 용맹정진의 정도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점차로 공부가 익어져 중도실상인 생명의 본체와 계합契合하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강옥구 미국에 있는 우리 재가 불자들, 그리고 보통 모든 사람들이 중도실상 자리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큰스님 중도실상 자리를 아직 체험하지 못한 일반 사람들은 이해하기가 어렵겠지요. 그리고 업장이 무거운 사람은 도저히 자기 분상에서 납득이 안되니까 아예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업장이 가벼운 사람은 납득이 빠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붓다나 도인들은 가장 정직하고 총명하고 바로 깨달은 분인데 그분들이 옳다고 했으니 그대로 옳은 것이 아니겠는가”이와 같이 전폭적으로, 이른바 수희찬탄隨喜讚嘆하는 마음으로 바로 수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희찬탄이 되어야 하며 그렇게 하도록 까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야 됩니다.

 

자기가 미처 체험을 하지 못했어도 무수한 성자가 증명한 것이고 우주의 모든 진리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 성현들이 역설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같이 어리석은 사람들이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편달해 가면서 일반 사람들도 거기에 나아가도록 해야지요. 그리고 염불이나 주문이나 화두나 그 사람 근기에 맞추어서 생각생각에 다른 생각을 않고서 지속적으로 공부하도록 까지 가르쳐야 됩니다. 그렇게 공부하다 보면, 하루 하면 하루 한 만큼 업장이 녹아짐에 따라서 중도실상의 경계가 점차로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강옥구 그러면 초심자에게 있어서 육바라밀 수행은 어떠할까요.

큰스님 예, 누구에게나 육바라밀의 수행이라든가 삼학도의 수행이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근기에 따라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지요.

또 육바라밀 수행을 한다고 할 때도 먼저 중도실상 도리를 이해하고 닦아야 육바라밀이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육바라밀이라는 것은 보살의 수행이기 때문에 지혜와 더불어서 닦아야 보살행이 됩니다.

 

가사, 우리가 남한테 물질을 베푼다 하더라도 주는 내가 있고 받는 저 사람이 있고 주는 물건이 있고 그런 대상적인 차별을 한다든가, 또 물질이 많다든지 적다든지 아깝다든지 그런 생각을 내면 보살의 보시는 못되는 것입니다.

 

보살의 보시는 상을 떠나야 되는데 상을 떠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른 이해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바른 이해라는 것은 반야바라밀 곧 반야의 지혜로 일체 존재가 다 본래로 공이란 도리를 아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도 본래 공이요, 너라는 것도 공이요, 내가 남에게 베푸는 물질도 공이요, 모두가 공이라는 제법공 도리를 분명히 알고서 베풀고 계행도 지키고 해야 참다운 보시오 참다운 계육이며 육바라밀이 되는 것입니다.

 

강옥구 그러면 달마스님께서 양무제梁武帝를 꾸중하신 것은 바로 양무제가 그러한 바른 지혜가 없이 보시를 베풀었기 때문일까요?

큰스님 그렇게 봐야지요. 양무제가 느꼈다면 절을 많이 짓고 불사도 많이 한 그런 공덕을 자랑삼아 얘기할 수 없겠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상을 떠나는 무주상無住相 수행입니다.

 

강옥구 큰스님, 상을 떠난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큰스님 상을 떠난다는 것은 우리 중생이 잘못 보는 가상이라든가 허망한 관념을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누구나가 다 분별 망상을 하고 있습니다. 나라고 생각하는 것도 망상인 것이고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망상인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반야의 지혜로써 생각할 적에는 무아無我ㆍ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입니다. 잠시간 인연 따라 나라는 모양이 있고, 너라는 모양이 나오고, 내 재산이 있고, 내 집이 있는 것이지 본래 제법공 도리에서 본다면 나라는 것도 없고 내 소유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야의 지혜인 무아ㆍ무소유의 자기를 분명히 느끼는 가르침, 다시 바꾸어 말하면 가상이나 가명을 떠난 그 자리에 입각해야 육바라밀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달마스님께서 양무제를 꾸짖은 것도 역시 양무제가 상에 집착을 하였기에 상을 타파하는 의미에서, 본래로 제법이 무상하고 공한 참다운 진여의 자리에서 그렇게 질타를 하셨겠지요.

 

강옥구 달마스님께서 펼치신 법문이 안심법문이라고 하던데요. 큰스님께서 펼치시는 법문도 안심법문인지요?

큰스님 그렇습니다. 안심법문입니다. 상을 못 떠나면 안심이 못되니까요. 상을 못 떠나면 자기 몸에 대해 항시 불안스럽고 자기 지위에 대해서 불안하고 내가 언제 죽는가 하는데 대해서 불안하고, 그런 사람들은 안심이 못되니까요. 안심법문이 되려면 역시 반야바라밀이 전제가 되어야 안심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혜가慧可 스님께서 달마 대사에게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라고 하니까 달마 대사는 “아 그래, 그대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와봐라!”하셨습니다. 불안한 마음이 어디에 모양이 있겠습니까? 남 미워하는 마음이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마음이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욕심있는 마음이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마음이란 것은 본래 조금도 상이 없는 것인데 우리 중생이 괜히 상을 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선 안심이 되려면 없는 것을 없다고 보는, 제법이 공이라는 도리에 입각해야 안심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 수행에서 반야바라밀이 되어야 대승이 됩니다. 반야바라밀이 못되면 소승에 불과합니다. 누구한테 아무리 많이 베풀어도, 나는 나고 너는 너고 내 것은 내 것이고 그런 차원에서는 소승입니다.

 

강옥구 그러니까 대승과 소승을 구별하는 기본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라는 말씀이지요?

큰스님 그렇습니다. 일반 상식적인 차원에서는 그저 남에게 베풀면 대승인 것이고 자기만 생각하면 소승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불교의 가르침에서 생각하면 엄연히 그런 구분이 있습니다. 반야의 지혜가 깃들어 있으면 대승인 것이고 반야의 지혜가 없으면 소승인 것이고 범부인것입니다. 결국 반야의 지혜가 없으면 세속을 미처 못 벗어난 이른바 속물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강옥구 반야심경 독해讀解에서 반야의 인因이 되고 반야의 과果가 된다는 것이 바로 반야에 의한 연기緣起라고 볼 수 있을까요?

 

큰스님 법계연기나 반야연기는 같은 뜻입니다. 우주 자체가 바로 반야고 법계가 바로 반야의 지혜인 것입니다. 우주라는 것은 반야의 지혜 곧 법계 또는 불성이 인연 따라서 현상으로 나온 것입니다. 무명이라는 것도 우리 중생이 잘못 보아서 무명인 것이지 본래로 무명이 바로 반야인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그러면 그것은 현상적인 상만 보니까 그렇게 말하겠지요. 그러나 그 사람의 본바탕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부처라는 말입니다. 부처가 잠시간 저와 같이 나쁜 짓을 하는 모습으로 나에게 비쳐 온 것이지 본바탕은 바로 부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 모두가 다 반야에서 온 것이고 반야의 가상인 것인데 우리 중생들은 그것을 잘못 보고서 겉만 보니까, 좋다 나쁘다 하는 것입니다.

 

 

강옥구 한국불교ㆍ중국불교ㆍ일본불교를 비교해 볼 때 한국불교의 특징이 바로 안심법문을 따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큰스님 어느 불교나 안심법문을 따라야 합니다. 안심법문을 못 따르면 상을 못 떠나니까 안심법문이 못되는 셈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참다운 실상의 지혜가 되어야 참다운 불법이 됩니다. 그렇지 못하면 참선도 못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법문도 있어요. "부달성공不達性空하면 좌선무익坐禪無益이라“, 모든 성품이 비어있다는 것에 이르지 못하면 좌선을 해도 이익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두가 가상 가명이니까 우리가 공부할 때는 가상과 가명을 부정해버려야 됩니다. 그러면 대긍정이 됩니다. 대긍정이라는 것은 모두가 부처라는 중도실상입니다.

 

강옥구 우리나라에도 그런 예가 있었습니다만 원효 스님이나 경허 스님 같은 분들은 계戒를 넘어서는 경우가 있는데요. 그것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그리고 지금 미국에서 여러 수행자들이 계를 넘어서는 경우가 많은데요. 큰스님께서는 그런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큰스님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역시 도덕성이라는 것은 가정으로 보나, 사회로 보나, 인류사회에서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종교는 어떤 종교에서나 철저한 도덕성은 철두철미한 당위요 의무로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세간적인 도덕은 삼강오륜을 지켜라, 부모한테 효도해라, 무엇을 하지 마라, 하는 것이고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불교도 근본적인 윤리는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진여불성은 나와 남이 차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위해서 남을 희생시키는 그런 이기심을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라고 생각할 때는 자기를 위해서 남을 희생도 시키고 핍박도 할 수가 있겠습니다마는 자기와 남이 본래로 하나라고 생각할 때는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할 수도 없고, 원수간이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가사, 누가 누구를 살해했다 하더라도 인연 따라서 잠시간 현상적인 겉만 죽인 것이지, 본래 생명은 모두 낳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죽일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부모를 살해했다 하더라도 본바탕에서 보면 생사가 본래 없고 자타가 없는 것인데 그것이 무슨 큰 문제가 될 것인가? 인연 따라서 그런 것이지 이렇게 생각하면 그 사람을 원수라고 해서 다시 보복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령, 음식을 먹을 때도 제 몸뚱이가 중요하고 맛에 취하니까 부처님께서 먹지 말라는 것도 먹는 것이지, 맛도 허망하고 제 몸뚱이도 허망하고 소리도 허망하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할래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때는 당위적으로 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부가 미처 미숙할 때는 본 성품을 못 깨달으니까, 내가 있고 네가 있고, 고기가 있고, 맛이 있고 또 좋은 술이 있고 그런 상을 미처 못 떠나므로 그런 것에 구속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효 스님께서 무애행을 취했다 하는 것도, 그 분이 요석공주와 관계할 때는 미처 철저한 도인이 못 되었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자가 되면 벌써 이성을 떠납니다. 그때는 범할래야 범할 수도 범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어느 성자가 함부로 색을 범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성자가 미처 온전히 못된 때라면 그것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됐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했으리라고 생각이 되고, 그 뒤에 일반 중생을 제도할 적에 여러 무애행을 했다는 것은 원효 대사가 음식을 중생과 더불어 먹는다든지 이런 일 저런 일 무애행은 중생들 교화하는 편의에 따라서 그렇게 했겠지요.

 

도인인지라 원효대사의 눈으로 볼 때 고기도 고기로 안 보이는 것이고, 내가 지금 먹어야 할 것인가 안 먹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도 구미가 당기고 먹고 싶어서 먹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중생제도에 필요할 때에는 부처님께서 하지 말라는 계율 중 큰 것은 범할 수가 없으나 사소한 것은 범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경허 스님 같은 분도 많은 사람들이 도인이라고 숭앙하기도 하고 경허어록을 보면서 빈축하는 분도 있습니다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해탈이라고 할 때에는 지혜해탈과 선정해탈이 있습니다. 지혜해탈은 지혜로 해서 막힘이 없다는 말이고 선정해탈은 오랫동안 선정에 들어 습기를 없애서 중생의 생리까지 정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해탈만 되어서는 신통은 못나오는 것이고 또 습기가 미처 못 녹아서, 과거 전생의 업장 따라서 어느 경계에 부딪히면 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처 습기는 다 못 녹였다 하더라도 법을 바로 해석했다고 하면 자제할 수가 있으니까 함부로 범할 수는 없겠지요. 자제를 못한다면 그것은 딱한 일이지요.

 

지혜해탈만 했다 하더라도 법은 막힘이 없어 남녀도 본래 차별이 없는 것이고 모두가 원래 허망무상한 것이라고 분명히 느낀다고 생각할 때는 자제할 수가 있겠지요. 자제를 못하면 그때는 수행자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선정해탈을 했다면 벌써 생리가 정화되어서 그렇게 할래야 할 수가 없으니까 전적으로 범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구분이 필요합니다.

옛 스님들께서도 가사, 지혜해탈은 하였는데 선정해탈은 못해서 미처 습기를 다 못 녹여서 그렇게 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수행자들이 해탈을 못한 분상에서 무애행이라고 함부로 하면서 일반 중생들의 빈축을 산다면 안되겠지요. 마땅히 비판을 받아야 하지요.

 

강옥구 스승을 구하는 일이 참 어려운 일 같습니다.

큰스님 예.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강옥구 그러면 배우는 사람들은 어떠한 기준으로 스승을 구해야 합니까?

큰스님 정견正見이 있는가 없는가, 다시 말하면 반야바라밀을 분명히 느끼고 명상 즉, 가명과 가상을 떠났는지 못 떠났는지, 그 사람 몇 마디를 들어보면 짐작이 되겠지요. 달마 스님도 양무제 말 몇 마디 듣고서 “저 사람은 아직 상을 못 떠났구나”, 하고서 그렇게 질타를 했겠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에 걸려 있고 자기 수행법에 걸려 있고, 자기 문중에 걸려 있고 자기 종파에 걸려 있는 그런 사람들은 미처 아직은 명상名相을 못 떠난 셈 아닙니까? 아무리 사회에서 숭앙한다 하더라도 아직 상에 걸려 있으면 바른 정견이 없는 것이니까, 그 사람이 바른 정견이 있는가 없는가를 기준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문제는 그 사람 행동이 욕망을 떠났는가 못 떠났는가를 보면 됩니다. 깨달은 사람 같으면 이른바 식욕ㆍ음욕ㆍ수면욕 같은 욕계 번뇌를 응당 떠나야 하겠지요. 욕계 번뇌를 못 떠났으면 그것은 삼계 가운데 욕계도 미처 못 떠났으니까 성자라고 볼 수 없는 문제이고 또 남의 스승이라고 자타가 공경할 수가 없겠지요.

따라서, 스승이라고 할 때에는 바른 정견 곧, 반야의 지혜, 바른 지혜와 더불어 행으로 해서 욕계번뇌를 떠나야 합니다. 삼독심을 온전히는 못 떠낫다 하더라도 욕심이 있는가 없는가, 진심이 얼마만큼 닦여졌는가, 하는 것이 기준으로 되어야겠지요.

 

강옥구 그러면 그러한 스승을 찾지 못했을 때에는 혼자서 공부하는 것이 더 좋을까요.

큰스님 그렇습니다. 열반경에서도 “그대 스스로를 스승으로 삼고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며, 법을 스승으로 삼고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했듯이 우리가 오직 부처님 법을 스승으로 공부하면 됩니다. 부처님 법이 없으면 가늠할 수가 없으나 부처님 법은 있으니까, 부처님 법에 의지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가늠해 본다면 오류를 범하지 않고, 깊이 생각해보면 “아! 그렇구나 아! 그렇구나”하고 짐작이 되니까요. 우리 마음은 본래가 무량무변한 지혜 공덕을 갖춘 부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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