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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진리의 길. 20(2)

 

 

* ‘반야심경 도리’를 모르면,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자리, 즉 영생불멸하고 또는 행복만이 존재하고 모든 공덕을 갖춘 대아大我, 진아眞我 라든가, 또는 청정무애淸淨無碍하여 조금도 번뇌가 없는 맑은 자리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열반 공덕은 우리가 얻을 수가 없습니다.

 

* 현상에 있는 것은 모두 다 종당에는 죽고 마는 생사의 법을 떠나지 못하고, 인과의 범주에 꽁꽁 매여 있습니다.

 

* 천지 우주에는 근원적으로 광명이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무슨 광명인가? 부처님의 지혜광명, 부처님의 자비 광명이 충만해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부처님 법을 진지하게 공부를 하실 때는, 공부의 정도에 따라서 거기에 비례한 영원한 생명의 본체에 있는 광명을, 우리도 체험을 하고, 보기도 하고, 음미도 하는 것입니다.

 

* 우리 공부가 깊어지면, 깊어진 만큼 광명은 더욱 더 빛나는 것입니다. 정말 온전히 깨달아 확철대오廓徹大悟하면, 그때는 천지 우주가 다 광명 세계로 화化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가 완전한 경계까지는 미처 못간다 하더라도, “천우만다화天雨曼陀華요, 천고자연명天鼓自然鳴이라! 하늘에서는 광명의 꽃비가 내리고, 하늘의 북소리는 자연히 울리도다” 하는 그런 법문을 이해할 것입니다. 이런 영원한 묘음妙音들이, 우주에는 항시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맑으면 맑을수록, 그런 소리도 더욱더 기묘하게 맑아지는 것입니다.

 

* 우리가 생각할 때 인간의 재미는, 서로 좋은 사람끼리 만나고, 또는 음식이나 잘 먹고 옷이나 잘 입고, 또는 지위가 높고, 이런 것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사실은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죽음에 이르는 병’에 불과합니다.

 

* 이런 것은 우리 행복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이런 것은 죽음의 길인 것이지, 참다운 영생의 길은 절대로 못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영생의 행복,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생고를 떠나는 그 자리, 그 자리를 가려고 생각할 때는 “제법諸法이 공空이요”,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요” 하는 자리를 분명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반야 사상, 반야 지혜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영생 해탈’의 자리에는 못 갑니다.

 

* 내가 분명히 빈 것인데, 너라는 것도 분명히 빈 것인데, 나라는 상相, 너라는 상, 중생이라는 상, 또는 시간이 짧다 길다 하는 상, 이른바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상ㆍ인상ㆍ중생상ㆍ수자상, 이런 상이 있는 한에는, 절대로 영생 행복의 극락이나 영생 행복의 해탈은 맛을 볼 수 없습니다.

 

*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해탈의 길, 곧 죽음을 면하는 길은, 어떠한 길도 현상적인 내 몸에 집착하고, 또는 자기가 느끼는 그런 상대 유한적인 사고에 집착하고, 모양에 집착하고 권리에 집착하고 재물에 집착하는 한, 갈 수가 없습니다.

 

* 모양에 집착하는, 이른바 상에 집착하는 한에는, 절대로 우리 인생의 참다운 행복은 없습니다.

 

* 석가모니의 가르침도, 예수의 가르침도 또는 마호멧의 가르침도 이런 가르침입니다. 성자의 가르침은 모두 영생 해탈의 길, 진리의 길, 영원히 죽지 않는 길로 인도하는 가르침입니다. 상을 떠나야 영생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 부처님의 열반은 영생불멸한 상락아정을 올바르게 느껴야 부처님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가셨다 하더라도, 부처님은 절대로 가시지 않았습니다.

 

* 본래면목 자리, 본래 참다운 진여불성 자리에서 볼 때는, 석가모니가 오신 흔적도 없고, 석가모니가 가신 흔적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역시 똑같이 본바탕에서 볼 때는, 가지 않고 오지 않고, 낳지 않고 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불생불멸이요, 불구부정不垢不淨 아니겠습니까?

 

* 예수님이 부활했다 하는 것이 기독교에서는 중요한 교리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에서 볼 때는, 예수님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다 부활하는 것입니다. 또한 부활이라는 뜻보다 훨씬 더 높은 뜻으로, 우리 생명은 불생불멸不生不滅, 즉 본래 죽지 않고 낳지 않았습니다. 죽을 까닭이 없으니, 어디 새삼스럽게 부활을 말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 우리는 죽지 않고 낳지 않는 도리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가 분명히 죽고, 나하고 친한 분들도 다 죽는데, 왜 죽지 않는 것인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헛것이며 그림자인 우리 몸만 그때 그때 사라지는 것입니다. 생명 자체는 절대로 죽음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에 어느 분이 인연이 다해서 금생의 목숨이 끊어진다고 합시다. 그런다 하더라도, 그 분의 목숨은, 생명 자체는 조금도 흠축이 없습니다. 다만 그 사람이 얼마만큼 업을 지었는가의 업장 따라서, 지금 그의 몸이 죽어 있는 상태가 안락스러울 것인가, 또는 고통스러울 것인가 하는 차이 뿐인 것입니다.

 

* 죽음 자체는 절대로 없습니다. 천안통을 통한 분들이나, 천안통天眼通을 미처 못 통했다 하더라도, 귀안鬼眼이나, 귀신의 안목만 두고 본다 하더라도, 죽어서 가는 영혼들이 분명히 다 보이는 것입니다.

 

* 우리 불교인들이, 부활뿐만 아니라 영생불멸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참다운 자기 주인공이고 참다운 마음이라고 믿는다면, 두려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근본적인 진여불성자리, 일체 공덕을 갖춘 그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그냥 쉽게 얻을 수가 없습니다.

 

* 진여불성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마치 이집트의 신화에 나오는 불사조같이-자기 몸을 태워서 재로 하고, 재 가운데서 다시 생명을 소생시키는-되어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참다운 영생의 자리를 얻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그렇게 쉽게 얻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우리 불자님! 우리 불교가 가는 것도, 자기 개인적으로 참다운 해탈을 얻는 것도, 또는 우리나라가 참다운 동방의 빛이 되기 위해서도, 또는 지금 혼란스러운 각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풀기 위해서도, 영생 해탈의 길을 우리 스스로 분명히 믿고 체험하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 우리의 인생은, 앞에도 뒤에도 또는 좌우도, 모두가 다 죽음의 길,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밖에는 사실은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몸도 결국은 죽고 있습니다. 나날이 말라 가는 조그마한 웅덩이에 있는 고기나 똑같습니다.

 

* 세상에 우리 인간이 보는 상이 있는 모든 것은, 또는 가짜 이름의 모든 것은, 우리의 영생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 학문을 안 배웠다 해도, 우리는 슬퍼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자기가 지금 장애인이라 하더라도, 조금도 비굴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일천구백구십년에 왔다 간 영국의 호킹 박사는 자기 몸을 자기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 아닙니까? 말도 잘 못합니다. 그래도 그 사람 표정을 보십시오. 조금도 흐림이 없습니다.

 

* 행복이 모양에 있지 않습니다. 영생 불멸한, 죽지 않고 늙지 않고, 또는 병들지 않는, 영원히 변치 않는 무량한 공덕을 갖춘 그 마음 자리에 있습니다. 그 마음 자리를 우선 우리가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느끼는 정도도, 업장이 무거우면 잘 못 느낍니다.

 

* “나한테 무슨 달마와 같은, 또는 석가모니와 같은 또는 서산 대사와 같은 마음이 있을것인가?” 합니다마는, 조금도 흠이 없는 것이 분명 들어있습니다. 천만 번 되뇌어도 영생 불멸하는 내 생명인 자기가 무량한 공덕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 염불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한테 부처님같이, 무량한 공덕이 갖춰져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불이불不二佛이라,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다는 뜻을 되새기기 위해서 염불을 하시는 것입니다.

 

* 불리불不離佛이라, 우리가 업장이 무겁기 때문에, “아,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겠지”하고 느끼더라도, 금방 딴 생각이 나옵니다. 그래서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생각을 떠나지 않기 위해서, 불리불을 위해 염불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닌 것을 재확인하고 확신하기 위해서 염불을 하고, 그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 지금은 우리가 참선을 해야 할 시대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참선을 해야만이 참다운 자기 본래면목 자리를 증명하고, 이렇게 해야 만이 생사해탈을 할 수가 있고, 참다운 스승, 참다운 어버이가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 참선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세상에서 참선하기가 제일 쉬운 것입니다. 어째서 쉬운 것인가 하면, 참선은 우주의 도리에 그대로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진리라는 것은 역시 진리대로 움직이는 것인데, 우리 지구를 제아무리 파괴 할래야 파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제아무리 오랫동안 버틴다 하더라도, 한번 지구가 소멸할 때가 되면 소멸될 수밖에 없습니다. 삼천대천세계의 달이나 또는 태앙이나, 모두가 다 천지 우주의 진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 진리에 따르면 순풍에 돛단배 같은 것이고, 진리에 못 따르면 그렇게 어려운 것인데, 참선 이것은 우리 인생이 가는 길 가운데서 가장 올바르게, 가장 합리적으로 진리에 따르는 길입니다. 순풍에 돛단배와 똑같습니다.

 

* 우리가 원래 원만무결한 부처인 까닭에 결국은 부처가 됩니다. 본래부터 갖추고 있고 종당에는 부처가 될 존재가 우리 중생입니다. 다만 빨리 될 것인가?또 더디 될 것인가? 하는 그 차이 뿐입니다.

 

* 세상에서 부처님 말씀 따라서 부처가 되는 것이 제일 편한 것입니다. 남을 때리기보다는 안 때리고, 남을 도와주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욕을 하기보다도, 욕설을 않고 좋은 말로 해서 부드러운 말 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인상을 찌푸리는 것보다도, 자비스럽게 미소를 띠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고기를 먹는 것보다도, 안 먹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 망상하는 것보다도 자기 본래면목 자리, 자기 본래 주인공 자리를 생각하고, 우주가 본래 훤히 빛나는 진여불성이고 부처님이기 때문에, 그 부처님 자리를 생각하는 것이 제일 쉽습니다.

 

* 염불 공부를 망념妄念이 일어나지 않도록 염념상속念念相續하여, 일심으로 수행함을 인행因行의 염불삼매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수행이 성취되어 마음이 선정에 들고, 혹은 부처님이 앞에 나타나시며, 또는 법신法身의 실상實相에 들어맞음(契合)을 과성의 염불삼매라 합니다.

 

* 염불삼매경에 이르기를 “염불삼매는 일체 모든 법을 다 포섭하였으니, 이는 성문聲聞ㆍ연각緣覺 이승二乘 경계가 아니니라(念佛三昧, 則爲總攝一切諸佛, 是故非聲聞緣覺二乘境界.)”고 하셨습니다.

[1991년 3월, 불교방송 초청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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