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불성의 마음자리
이남덕 그 동안 몇 차례에 걸쳐 편집담당자를 통해 큰스님을 모시고 싶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습니다만 이제야 월간 ?불광?에 큰스님의 수행과 정진에 대한 이야기를 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선 여쭈어 보고 싶은 것은 큰스님께서는 사십 팔년의 법랍을 가지고 계시면서 무려 삼십 여년의 토굴 생활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반 신도들 중에는 스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으리라고 생각되는데 실례의 말씀인 줄 알고 있지만 이번 기회에 스님의 출가담이나 은사 스님 그리고 그 동안의 수행담 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제 출가 담에는 그렇게 흥미진진한 내용은 없습니다. 단순하고 평범하지요. 그때가 내가 스물다섯이었는데 인연상황이 출가를 안하면 안 되게끔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삶에 대한 회의도 느낄 때였고, 문학도로서 시도 쓰고 그러면서 많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출가한 처소가 보통의 대본산이라든가 그런 곳이 아니었고 그 당시로서는 한국에서 가장 고행주의자라고 꼽히는 분이 계신 백양사 운문암으로 출가했습니다. 운문암 생활이란 것은 철저히 원시불교, 부처님 당시의 생활을 따랐습니다. 일과는 아침엔 두시 반에 기상을 해요. 침구도 요때기 하나밖에는 없습니다. 이 요를 평소에는 접어서 좌복으로 삼고 잘 때는 펴서 침구로 쓰는 것입니다. 또, 세수대야에 물을 떠다 놓았다가 일어나면서 바로 수건을 축여 냉수마찰을 하지요. 아침 예불도 법당에 들어가서 하는 게 아니라, 사실 기름도 아깝고 초도 구하기 힘들 때니까 아끼기 위해서 그랬겠지만 다 법당 밖에서 드렸습니다. 단지 점심 때 마지공양만 안에서 드렸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결제 때가 아니면 대개 작업을 한 두 시간 정도 합니다. 나무도 때야 하고 채소밭도 가꿔야 하니까 그렇게 작업을 하는데 결제 때는 작업이 전혀 없어요. 결제가 아니고 보통 때, 작업이 너무 많으면 젊은 사람들이 견디기 힘드니까 간식으로 고구마를 쪄서 먹은 적도 있는데 밤에는 참선만 하지요. 그런 생활입니다.
이남덕 스님께서는 또 오랜 기간 장좌불와로도 유명하신데요.
큰스님 출가해서 당장 장좌불와를 한 것은 아닙니다. 처음 한 일 년 쯤은 안했습니다. 그런데 출가해서 참선생활을 하다보니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피로도 싹 풀리고 해볼 만하다고 느꼈습니다. 그 당시에도 장좌불와를 하는 스님들이 있었어요. 장좌불와를 하면은 밤에 전혀 자지 않아요. 처음엔 그분들을 따라서 한번 해봐야겠다고 한 것이 해보니 할 만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평생 장좌불와를 해야겠다고 원력을 세우고 해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젊을 때는 억지로 계속 해왔습니다만 나이가 들수록 힘이 듭니다. 요즘은 내가 무슨 상을 두고 할 필요가 있겠는가 생각하고 가끔씩은 눕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일종식하고 장좌불와는 내 평생의 원력입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될 수 있는 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남덕 스님의 그런 생활태도가 요즘의 젊은 수행자들이나 저희들 재가불자들에게 시사하고, 말씀없이 가르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스님께서도 그런 생활을 익히시고 가지게 된 배경에는 스승이신 금타 스님에게 힘 입으신 바 크리라고 보는데, 금타 스님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큰스님 금타 스님은 근본불교를 철저히 행하신 분입니다. 또, 불교 역사를 공부하신 분이고 천재적인 분이어서 현대 물리학이나 철학을 웬만한 학자만큼 하신 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같은 백양사에 계시던 송만암 스님의 중국적인 전통을 지키려는 태도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말하자면 부처님 당시의 모습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종교란 진리의 가장 핵심적인 요체를 따르는 것이지 무슨 종파라든가 어떤 교파를 초월해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금타 스님은 기독교라거나 도교라거나 하는 모든 종교의 지식체계를 수용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원통불교라고 했고, 회통불교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의 예수나 노자나 공자 등의 성자들을 보살십지로 위치를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견성오도하면 보살초지를 증득하는 것이고 그 다음부터는 성자의 품계가 있어, 예를 들면 공자ㆍ예수는 보살 오지를 수지했고, 원효나 진묵대사는 보살 팔지라고 했습니다. 노자는 보살 칠지라고 했지요. 또 서산대사나 보조국사는 보살 사지라고 봤어요. 그와 같이 불교라고 해서 더 높게 쳐주지도 않고 전체를 통 종교적으로 보셨어요. 저는 금타스님의 생활과 사상에 대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남덕 많은 다른 스님들은 우리 불교의 전통은 화두선이라고 생각하고 이 공안참선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이에 스님께서는 화두선만이 아닌 여러 참선수행 방법을 제시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염불선을 주장한다는 오해도 받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시지요.
큰스님 나더러 수행방법에 대해서 전통적인 화두선을 안하고 염불선을 한다고 하는데, 나는 염불선을 주장하진 않습니다. 화두선이 참선이 아니라고 한 적도 없는데 다만, 그것만이 참선이고 다른 방법들은 아니라고 하면 그것에는 반대한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그렇게 본다면 부처님도 참선을 안하신게 됩니다. 또 달마스님이나 육조 스님도 참선을 안한 것이 됩니다.
화두도 하나의 참선법이고 묵조도 염불도 하나의 참선법입니다. 화두란 중국의 당에서부터 송나라까지 연간에 만들어졌는데 그 이전에는 어떤 참선을 했겠습니까? 아마 그 이전에 참선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겁니다.
달마조사 관심론을 보나 육조단경을 보나 그때의 참선은 진여불성을 관조하는 법을 참선이라 했습니다. 반야관조라고, 육조단경의 마지막 부촉품의 허두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어요. “그대들이 만약 부처님의 일체종지를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통달해야 한다.” 그것은 화두가 아니거든요. 그것은 일종의 관정이지요. 그렇다면 일상삼매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천지 우주 모든 것을 하나의 부처로 보는 것이에요. 사람뿐만이 아니라 흙이나 동물이나 우주에 있는 일체의 것을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것이 일상삼매입니다.
또 일행삼매라는 것은 천지 우주의 모든 것을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그 자리를 끊이지 않고 지속시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린다면 일상삼매라는 것은 불교의 반야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반야의 지혜라는 것은 천지 만물을 끊이지 않는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것이요, 그 자리를 끊이지 않고 지속시키는 그것이 일행삼매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바꿔서 말한다면 정혜쌍수요, 일상삼매의 참다운 반야의 지혜와 일행삼매의 끊임없이 지속시키는 선정을 합하면 정혜쌍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통적인 도인들, 원효라거나 달마 스님이라거나 육조 스님, 조금 더 근래에 와서 보조 스님이나 서산대사께선 모두 정혜쌍수를 말합니다. 우주의 진리 자체가 정혜균등으로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잘 알다시피 지혜와 자비, 이 지혜와 자비가 우주에 들어 있는 하나의 공덕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에게도 이 지혜와 자비가 원만하게 충족되어 있습니다. 그 두 가지가 우리 인간들에게 갖춰진 인간성의 공덕으로 본다면 이미 갖춰져 있는 그것들을 드러내는 것이 참된 수행입니다. 우리 공부도 우주의 공덕에 맞춰서 해야 합니다.
화두를 든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본래 면목ㆍ진여불성의 자리 즉, 참다운 지혜와 선정의 정혜쌍수가 돼야지 그렇지 않고 덮어놓고 의심만 하면 화두를 잘못 든 경우가 됩니다. 이런 정혜쌍수의 수행일 때 화두도 참다운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참선과 참선 아닌 것을 우리는 뚜렷이 구별해야 합니다.
이남덕 스님 수행 말씀을 들으니까 제가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서 너무 생각되는 바가 많습니다. 희망을 가져야겠다고 생각됩니다.(웃음)
스님께서 금타 스님의 유고를 정리하셔서 책으로 낸 것이 금강심론인데 그 책을 읽으며 어렵게 생각되었던 것들이 조금은 풀리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선 더 알고 싶어 할 사람들이 많을 듯 하지만 이미 스님의 저서 정통선의 향훈, 원통불법의 요체 그리고 설법집 마음의 고향 등에 잘 나와 있으니까 더 여쭙지 않겠습니다.
스님의 거의 모든 설법집이나 저서들에는 현대 물리학이나 제반 과학, 생물학이나 심리학 등을 다 포함합니다만 특히 현대 물리학에 치중하셔서 불법과의 관계를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어떻게 현대의 첨단 물리학이 불법과 상통하는지를 스님께서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십시오.
큰스님 예, 저는 물리학도도 아닐뿐더러 제가 인용한다고 하는 것도 아주 천박한 수준에 머뭅니다만, 제가 생각할 때는 부처님 법은 아주 철두철미한 과학인 동시에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철학이요 영생불멸한 행복을 우리에게 보장하는 가장 훌륭한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왜 불법이 그러한가. 불법의 대강大綱은 연기법이요 인연법이 아닙니까? 연기법을 떠나서 불법은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최초로 깨달으신 물리학에 있어서 가장 큰 강령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상대성이론입니다. 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이론도 현대 물리학의 핵심적인 이론입니다. 그런 것들이 다 이 연기법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불법이나 현대 물리학의 입장에서 볼 때, 일체 존재는 인연을 따라서 잠시간 현상적으로 나타날 뿐이고 고유한 존재는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아끼는 몸뚱이도 계속 변화해 가고 있는 과정이지 고유한 것이 아닙니다. 인연 따라서 이와 같은 세포가 구성되어서 순간순간 전변하는 하나의 현상일 뿐이지 고유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도가 높다는 다이아몬드는 어떻습니까?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탄소라는 것의 단단한 결합체로 보이지만 실상을 보면 그 안에서 탄소가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가 원소라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도 다시 전자라든가 양성자, 중성자로 나눕니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무엇입니까? 현대 물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들은 하나의 에너지의 파동으로 보지 물질이 아닙니다. 에너지란 시간성도 공간성도 없는 것입니다. 이 시간성도 공간성도 없는 것에다가 우리 중생들이 다이아몬드라는, 몸이라는 상을 내는 것입니다. 제로(0)를 몇 천 번, 몇 만 번 곱해봐야 제로인 것입니다. 그림자를 천 번 만 번 포개봐야 그림자입니다. 에너지가 만들어낸 이 여러 가지 것들은 그야말로 상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그러기에 오온개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현상계의 물질전부와 관념계의 개념 전부가 오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연법으로 본다면 단지 인연따라 잠시 상을 냈을 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에서 아상ㆍ인상ㆍ중생상ㆍ수자상 이 네 가지 상이 없으면 결국은 부처님이고 성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래로 상이 없는 것입니다. 본래로 상이 없는데 ‘나’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 중생들이 탐ㆍ진ㆍ치 삼독심에 가리워 잘못봐서 분별심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인들이 수행 이전에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이 내 몸뚱이인데 그것이 본래 없는 것이라고 하니 쉽게 수긍하지 않습니다. 수긍을 해도 여전히 아집我執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법집法執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아무리 훌륭한 정치체제 아래에서도 이 아집, 법집이 있다면 참다운 행복도 생활도 없습니다.
이렇듯 성자가 보면 분명히 없는 것인데, 다행히 현대 물리학자들도 없다고 본다 이겁니다. 어떻게 보면 세계적인 천재들이 불교의 교리를 증명해 놓은 것입니다. 적어도 이런 부분에서는 불교교리를 포교하기가 참 쉬워진 것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느껴졌던 제법공도리, 이를 현대 물리학자들이 풀어준 것 아닙니까? 저는 이것을 춤이라도 출 듯이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서툰 지식입니다만 어디 가서도 이 현대물리학을 얘기하고 다닙니다.
이남덕 스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니까 현재 우리들이 살고 있는 모습은 상처투성인 것 같습니다. 물질만능주의랄까 이런 상처들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으로써 참선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느끼게 되는 것도 같습니다. 재가불자들의 참선생활에 대해서 그 필요성을 말씀해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지 방법에 대해서 말입니다.
큰스님 예, 제가 오랫동안 서투른 현대 물리학을 얘기했던 것 같군요. 하지만 이 공空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얘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싫든 좋든 간에 이 반야공 소식을 공부해야 합니다. 이 공 소식은 우리가 공부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본래로 공인데 중생들이 번뇌로 낸 상에 걸려서 본래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라는 것은 우리가 우선 이상을 쳐부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령 우리가 기복적인 기도를 올린다고 해도 이 공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마음을 비운다고 하듯이 ‘나’라는 생각을 비우고 해야 가피가 훨씬 깊은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지금 암에 걸려 있다고 합시다. 불교에서 보면 이 암균도 공입니다. 천지만물이 다 공인데 이 암균도 공인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암균도 본질은 진여불성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진여불성의 자리에다가 마음을 두고 기도를 드린다고 생각하면은, 본래로 있지도 않은 것에 암균이라고 상을 낸 것에 불과하므로 그 근본인 진여불성을 앎으로 자연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설사 기도를 하는 것이 들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 기운은 본래로 하나인 이 우주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원융무애한 하나의 생명, 진여불성으로 된 한 몸이기에 우리가 가령 흙을 오염시키면 당장 그 피해가 우리에게 돌아오듯이 공덕도 나누어집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름에 있어서 출가승은 하기 편하고 재가자들은 하기 힘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부처님의 사상은 가장 따라하기 쉬운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기보다 미운 사람을 풀어보는 것이고, 장사하는 사람이 자기 집에 오는 손님을 부처님 보듯이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사상을 따라하는, 바로 반야바라밀을 실천하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순수한 참선을 하거나 생활을 하는 중에도 영생불멸한 이 진여불성의 자리에 있으면 됩니다.
이남덕 마지막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이 문제는 구체적인 우리의 역사적 상황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우리민족이 지금 당장 처해 있는 남북분단이란 문제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 불교도들이 통일에 이바지할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큰스님 좋은 말씀이십니다. 어쨌든 인연으로만 본다고 해도 인연깊은 우리 한 민족이 갈라져 있는 상황에서 통일이라는 것은 가장 필요한 목표가 되겠지요. 제가 아무리 제법공諸法空을 말하고 다녀도 아버지는 아버지고 어머니는 어머니듯이 민족은 우리 민족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통일은 많은 기술적인 문제들을 필요로 합니다. 이데올로기라든가 종교문제도 아닙니다. 또 남북대화를 해왔던 전통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런 기술적인 부분은 남북의 당사자들이 잘 알아서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다만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마음에 대한 것입니다. 남이나 북의 당사자들이 서로 대하는 마음의 자세라는 부분 말입니다.
서로 대하되 진리에 입각해서 만나야 합니다. 진리에 입각하지 못할 때 결국 자기 개인의 허튼 소견이 나오게 되고, 또는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합니다. 허심탄회하게 지금까지 가져왔던 주의주장을 떠나서 열려 있는 마음자세가 중요하리라고 봅니다.
그럴 때 우리같이 산중에서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의 바람도 힘이 되는 것이요, 이북에도 그런 힘이 미치는 것입니다. 일체 만물이 모두 하나이고 또 일체유심조라고 하듯이 간절한 바람은 그것이 크든 작든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맡은 바 일을 하면서 최선을 다해 기원하면 되리라고 봅니다. 다만 최선을 다한 바람도 부처님사상, 반야바라밀에 근거한 바람일 때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생각을 버리고 이북도 이북이라는 입장을 버리고 모두가 하나라는, 우주라는, 민족이라는 공통된 입장을 가질 때 그것이 통일을 이루는 가장 가까운 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남덕 좋은 말씀 오랫동안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월간 ?불광?, 1994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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