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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진리의 길. 22(2)

 

 

 

강옥구 종파간의 갈등과 더불어 종교간의 갈등이 많은데요, 어떻게 그들이 서로 이해하고 서로 화해할 수 있을까요?

큰스님 각기 서로 다른 종파나 종교도 연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사,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반야심경이나 법화경이나 화엄경이나 중요한 불경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빈다. 그래야 불교사상의 핵심을 알 수 있겠지요. 그와 아울러 불교인도 기독교의 성전인 바이블도 공부하고 이슬람의 코란도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공부하되 명상을 떠난, 곧 망상과 가상을 떠난 그 자리에다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두어야 바로 이해하게 됩니다.

 

바이블을 본다 하더라도 자기 소견으로 자기가 배운 것만 가지고 본다면 문자에 걸리고 이것저것 걸려 버리는데 그렇지 않고서 명상을 떠나서 “이름이라는 것은 다 가짜인 것이고, 그때그때 몇천년 동안에 왜곡되기도 하고, 보태거나 깎기도 했을 것인데 과연 예수의 본뜻이 무엇이겠는가. 마호멧의 본뜻이 무엇인가”,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해본다면 설사 표현이 좀 어색하다 하더라도 그 속에 들어 있는 알맹이를 잡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사실은 불경에도 방편이 많이 있습니다. 같은 경 가운데도 방편과 진실을 가리는 지혜가 필요한데 그 기준이 반야의 등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반야의 등불이라는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피차가 불경도 공부하고 다른 경전도 공부함으로써 갈등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진리라는 것은 불교가 있고 기독교가 있기에 비로소 진리인 것이 아닌 것입니다. 본래로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영생불멸한 우주의 도리입니다.

 

강옥구 그러면 예수님이나 마호멧을 보살로 여기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큰스님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역시 그분들이 자기 개인적인 이기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지만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을 가지고 출발했고 또 오랜 세월 동안 무수한 사람들을 그런대로 구제를 했으니 마땅히 보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기본적으로 불교의 진리에서 본다면 모두가 본래로 다 부처 아닙니까? 잘나도 부처요 못나도 부처요 또 강도질을 해도 현상적인 가상으로 봐서는 구분된다 하더라도 본 성품에서 보면 부처란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런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숭앙하고 또한 한 생애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을 구제하려고 도덕적인 봉사행을 다한 분들을 마땅히 보살의 후신이라고 보아야 하겠지요.

 

강옥구 큰스님께서는 어려서 기독교를 믿으셨다고 하던데요.

큰스님 저는 기독교를 깊이 연구해서 믿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바이블을 정성껏 보기도 하고 제 방에서 기도도 하고 스스로 명상도 했습니다. 톨스토이와 같이 순수한 진리성으로 기독교를 믿는 쪽으로 지낸 분들의 책이 좋아서 읽기도 하는 그런 미숙한 정도였습니다.

 

강옥구 그러면 큰스님께서 출가하신 인연은 어떠한 인연이셨는지요.

큰스님 철학을 좋아해서 동서양 철학서적을 이것저것 약간 섭렵했습니다. 동양철학을 보면서 물론 불교서적을 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불교입문서도 보고 법화경도 보고 승려가 되기 전에 나름대로 불교의 윤곽은 잡았었습니다. 그런 후에 제 집안의 육촌 동생이 절에 있으면서 공부하기 좋은 곳이 있다고 해서, 아, 그러느냐고 하고서 바로 따라 나섰습니다. 절에 가서 공부도 하고 수양도 좀 하려고 마음먹었었는데 워낙 위대한 스승을 만났기 때문에 그냥 미련없이 다 뿌리치고 출가해 버렸지요.

 

강옥구 스승이신 금타스님의 어떤 점이 위대하시다고 보셨습니까?

큰스님 그 어른에게서는 어떤 점에서 보든지 자기 개인이라는 생가은 전혀 없고 진리의 불덩이 같이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어른의 법문에서 제가 기독교나 현대과학에 있어서 막혔던 문제가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다 풀렸으니까요. 오랜 동안의 회의가 풀리니까 젊은사람으로서는 환희용약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수행론이 철저해서, 이런 방법을 취하면 꼭 성불할 수 있다 하는 방법론에 대한 확신이 서게 되니 다른 길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강옥구 그러면 그 수행론 중에 장좌불와長坐不臥나 일종식 같은 것이 있습니까?

큰스님 그런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 수행론에도 장좌불와나 일종식 같은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 수행론은 중도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절대로 무리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 사람 근기 따라서 수행하도록 되어 있으나, 기본적인 출가수행자의 계율이 가사, 출가수행자는 오후불식午後不食이라 하여 오후에는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잠도 아침에 한번 일어나면 밤에 취침할 때까지 눕지 말라는 것입니다. 장좌불와하라는 강요는 않습니다. 장좌불와는 개별적으로 과거에 하신 분들 따라서 자기가 용맹심을 내서 하는 것입니다. 다만 오후불식은 철저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고 잠도 병자가 아닌 한에는, 한번 일어나면 취침시간이 아닌 한 앉아서 공부할 것이지 자리에 눕지 말라는 것이 있습니다.

 

강옥구 큰스님께서는 사십여년간을 일종식 하시고 장좌불와 하셨습니까?

큰스님 저는 그렇게 철저한 셈은 아니었지요. 그러나 하여튼 원칙을 그렇게 세웠습니다.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면 그렇게 편해요. 그리고 토굴생활을 하다 보니까 혼자 여러 끼니 해 먹기도 귀찮스럽고 하루 한끼만 먹으면 몸이 굉장히 가볍습니다. 몸이 가볍다는 것은 그만큼 피순환이 잘된다는 것이고 또 피순환이 왕성하니까 병균이 범하지 못하겠지요. 사실은 삼세 부처님은 하루 한 끼니예요. 그러나 승가생활에서 아침에 배고플 때는 죽을 먹어도 무방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칙은 일종식이지요.

 

저도 역시 원칙은 지켰으나 어디에 초청되면 애써 대접하는데 안 먹으면 미안스러우니까 더러 먹기도 했습니다. 또 잠도 젊어서는 어거지로 상을 내서 앉아서 버티었으나 지금은 몸뚱이도 쇠약해지고, 이제는 앉으나 서나 공부에 망상도 별로 나올 때가 아니고, 몸뚱이도 분명 내 마음이 머물고 있는 집이라서 너무 무리하면 그만치 장애가 될 것이고 해서 지금은 될수록 안 눕는 쪽으로 원칙은 세워놓고 고집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피로하면 눕기도 하는 편이기 때문에 장좌불와는 아니지요. 그러나 젊어서는 고집을 부리고 장좌불와 한다고 했고 토굴생활도 아마 그래저래 근 삼십년은 했으니까 수행자로는 꽤 많이 한 편이라 생각합니다.

 

강옥구 그러면 토굴생활 하시는 동안 쭉 묵언하셨습니까?

큰스님 거의 다 묵언이었지요. 토굴생활이라는 것이 혼자이니까 저절로 묵언이 되지요.

 

그러나 한 사년동안 오로지 묵언 지키고 안나오기도 했고 어떤 때는 일년만에 나오기도 하고 반년만에 나오기도 하고 그랬지요. 그래서 오로지 묵언이라고는 할 수는 없었습니다마는 거의 묵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묵언도 저같이 많이 한 사람은 드물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고, 또한 토굴이라고 해서 흙을 파놓고 그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조그만 움막 같은 집에서 사는 것을 토굴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철저히 검소하게 생활했었습니다.

 

강옥구 그러면 토굴에서는 어떻게 식사를 하셨습니까?

큰스님 그러니까 제가 먹는 것은 낮에 한 때인데 아궁이에 불을 땔 때는 밥을 해서 먹기도 하고 반찬은 깨와 소금을 볶아 섞은 것이나 김가루를 간장으로 버무린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산중생활에 김치 같은 것을 누가 갖다 주어도 오래 놔두면 그냥 쉬어버리고 며칠 먹으면 없어져 버리니까 못 먹는 때가 보통이었지요.

 

강옥구 그렇게 사십년을 사셨어요?

큰스님 단무지 같은 것도 누가 가끔 갖다 주기도 하고 또 조금씩 얻어다 먹기도 하고 그랬었습니다. 사실은 그런 정도가 아니라 보리 미숫가루만 먹고 삼개월간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 때는 제가 삼십대라서 미숫가루를 물에 타서 먹어야 배도 차고 먹은 것 같이 돼요. 그렇게 하루에 한 컵씩 먹고 삼개월동안 지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둥글레 가루만 먹고 삼개월동안 지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생쌀을 물에 불렸다가 한 숟갈씩 먹기도 하고, 하여튼 제 토굴생활이라는 것은 표현하자면 비참한 생활이었지요. 그래서 어떤 때는 내가 내 몸뚱이를 너무나 학대하지 않는가 하여 몸에 대해 가엾은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마는 역시 저에게는 유익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강옥구 그러면 그런 수행방법을 큰스님께서는 권장하십니까?

큰스님 권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다분히 유익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공부에 힘을 얻어야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사, 이렇게 앉아 있으면 조금도 몸에 부담이 없고, 마음이 절로 고요해지고, 가만히 있으면 있는 만큼 더 맑아지고 그런 때는 별로 에너지 소모가 안되니까 건강에 별로 지장이 없겠지요. 그래야 되지 혼침도 미처 참지 못하고 망상만 피우고 그럴 때는 에너지 소모가 많이 되니까 지장이 있겠지요. 그런 제가 철두철미하게 다 바르게 살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요즈음에는 저같이 토굴생활을 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권고할 생각은 없습니다.

 

강옥구 그때 큰스님께서 수행하실 때 염불선을 하셨습니까?

큰스님 그렇습니다. 저는 금타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은 뒤에 선방에도 몇 철 다녀봤지만, 너무 위대한 분을 스승으로 모셨기에 달리 스승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내공부 내가 혼자 할 것이지 누구를 찾아가서 또 배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토굴로 갔었습니다.

그리고 사십대에는 모범적인 선방을 만들어 사람을 길러도 보려고 토굴에서 나와보았지만 그것이 잘 안되었습니다. 안되는 것은 제 역량이 부족도 하고 인연이 아직 성숙되지 않아서였겠지요. 그래서 다시 토굴로 들어가고 또 나와보고 그러다가 육십 넘어서 온전히 나왔지요. 이제 가까스로 십이삼년밖에 안됩니다.

 

강옥구 큰스님께서 미국에 이루고 싶으신 모범적인 선원에 대한 말씀도 해주십시오.

큰스님 저는 부처님 당시의 정통선을 미국에 뿌리 내리고 싶어요. 정통선이란 화두선에도 안 치우치고 묵조선에도 안 치우치고 염불선에도 안 치우치고 모두가 본래 불심 자리, 중도실상의 불성 자리만 안 떠나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식으로 선을 밝히고 싶어요. 그렇게 한다면 크리스찬이나 이슬람도 자기들이 믿는 신앙의 대상이 진정으로 공변된 진리만 된다면 누구나 다 마땅히, 누구나 다 모두 성불이 되겠지요.

 

그리고 생활규범만은 부처님 당시의 청규대로 하고 싶습니다. 일반 대중들은 제가 하는 대로 따르라고 그렇게 무리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학교도 다녀야 되고 현대 학문도 배워야 되고 운전도 해야 하기 때문에, 저처럼 방안에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같이 하루에 한끼 먹기는 어렵겠지요. 그러나 오후불식만은 꼭 지켜야겠는데 그 분들이 따라오겠는가 안 따라오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강옥구 오후불식을 재가불자에게도 권장하십니까?

큰스님 재가불자들은 육재일이 있습니다. 육재일 동안은 출가한 사람과 똑같이 하루에 일종을 합니다. 재가불자도 한 달 가운데 여섯 날을 출가한 셈치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칙은 재가불자도 청규를 다 지켜야 하는 것인데 가정이 있어서 그렇게 안되니까 한 달에 육일이라도 지키라는 의미가 되겠지요. 그래서 육재일이 나왔는데 그날만은 내외간에도 같은 잠자리에 들지 않고 고기도 안 먹고 허튼 말도 않고 하루 한끼만 먹고 오로지 부처님 공부만 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식으로 하면 주님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문화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이렇게 서로 교류가 됩니다. 주님만 생각해야 한다는 주일이 육재일이 되겠지요. 저는 미국에서 하는 경우에도, 좀 무리가 되고 배고프면 우유라도 좀 마시더라도 오후불식만은 꼭 하는 것이 우리 출가수행자가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스리랑카 절들은 지금도 우후불식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루 한 끼니만 먹게 되면 분위기가 굉장히 긴장됩니다. 그런데 하루 세끼 꼬박 먹으려면 성가시기도 하고, 사람 위장이 많이 먹어 놓으면 몸도 무겁고 게을러지고 비대해지기 쉽고 합니다. 그러니까 적게 먹으면 먹는 양에 비해서 흡수를 많이 하는 셈이지요. 그리고 피도 맑아지는 것입니다. 많이 먹으면 배설을 많이 하니까 흡수하는 비율은 적어집니다.

 

그리고 또 최초의 인간은 음식을 안 먹었습니다. 광명을 몸으로 하였으니 광명은 불생불멸의 생명이기 때문에 먹을 필요가 없지요. 부처님 경전에 보면 최초의 인간은 식식識食이라, 마음으로 음식을 참았다는 뜻입니다. 환희 하는 행복을 음식으로 하고, 법희선열法喜禪悅을 음식으로 하고, 법을 음식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법에 대해서 환희심으로 충만하다면 그때는 안 먹어도 마음이 충만하지만 마음이 답답하고 막히고 남 미워할 때는 필요없이 자꾸 먹어지지 않습니까?

 

강옥구 재가불자들에게는 참선하는 시간이 몇 시간이 가장 좋을까요?

큰스님 출가불자는 사분정근이라 해서 표준시간이 새벽 두 시간, 오전 두 시간, 오후 두 시간, 밤 두 시간 합이 여덟 시간입니다. 조금 정진을 더 한다면 열 시간도 하고 열두 시간도 합니다. 그러나 재가불자는 그렇게 하기가 곤란스럽겠지요. 태안사泰安寺 재가불자 선방에서 참선하는 시간은 여덟 시간 표준입니다. 새벽 두 시간, 오전 두 시간, 오후 두 시간, 밤 두 시간입니다. 태안사에서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한 이십 여명씩의 재가불자들이 꼭 참선을 합니다. 출가불자 선방은 위에 있고 재가불자 선방은 밑에 있습니다.

 

앞으로 여기에서도 저희 계획대로 되면 올 겨울쯤에는 재가불자, 출가불자가 다 같이 정진을 하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올 여름에는 가급적이면 법당을 지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법당을 선방으로 써야 하거든요. 그러면 사십명 정도는 충분히 앉을 수 있겠지요. 그러니 법당이 따로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강옥구 용맹정진에 대해서도 말씀을 해 주십시오.

큰스님 보통은 겨울에 부처님 성도재일을 계기로 해서 한 칠일 동안 용맹정진을 하고 성도재일에 해제를 합니다. 여름에는 그때그때 상황 따라 대중끼리 상의해서 결정을 합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용맹정진을 잘 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어서 안하는 데도 있습니다. 일주일 동안 안자고 안 눕고 배긴다는 것이 어렵긴 합니다. 그러나 해보면 되는데 습관을 바꾸려면 대단히 어렵겠지요.

 

그리고 근본 정통선을 익혀야만 참다운 선정의 힘도 얻을 수가 있는 것이고 도력도 나오는 것입니다. 정통선으로 해서 사선정四禪定ㆍ사공정四空定ㆍ멸진정滅盡定까지 못나간다면 우리 자성이 갖추고 있는 무량 공덕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원래 우리 자성 가운데는 삼명육통三明六通 등 무량공덕이 갖춰져 있는 것인데, 삼매三昧(Samadhi)로써 습기를 녹여야 무량공덕이 나올 것인데 습기를 못 녹이고서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혜해탈만 해서 아는 것은 제법 알지만, 선정해탈로 삼매에 못 들면 습기를 못 녹이니까, 자기 버릇을 못 떼어서 원래 갖추어 있는 무량공덕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결국 부사의한 신통 공덕을 무시하게 되겠지요. 그래서 불교가 다시 옛날 도인들처럼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어서 자기 스스로 불을 내어 자기 몸을 태우는 정도의 도력이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현대 물질사회에 젖은 사람들이 따르게 될 것이고, 제도하기도 쉽기 때문에 사선정ㆍ사공정ㆍ멸진정인 근본선을 한사코 닦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 육성 같은 아함경을 보면 여러 군데에 언급되어 있습니다만 일본 사람들이 해놓은 번역도 보면 아함경 풀이하는 데 있어서 그런 대목은 역설을 잘 안했어요. 삼매에 관해서 지금 현대인들은 참 인색합니다. 학자 분들은 거의 삼매에 대해서 아예 관심을 안 두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강옥구 그런 것은 자신들이 경험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큰스님 대개 교리로써 한 체계를 세워놓으면 그것으로 다한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란 결국 기도를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우리 마음이 일념이 되고 업장이 녹아서 삼매에 들어야 합니다. 불교나 기독교나 바른 깨달음, 바른 계시를 받으려면 꼭 그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요단강 하반에서 사십일 동안 금식기도 했다는 것도 그 때에 깊은 삼매에 들었겠지요. 또 마호멧이 힐라산 동굴에서 삼년 동안 지낸 것도 깊은 삼매에 들었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어떤 누구나가 꼭 성자가 되려면 그런 과정이 필요한 것인데, 과정이 없이 성자가 되려고 하니까 무리가 생기고 폐단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강옥구 큰스님, 저희 같은 사람도 가능할까요?

큰스님 달마와 내가 둘이 아닙니다. 겉에 형상은 다르다 하더라도 근본 성품은 조금도 차이가 없다고 보아야지요. 누구나가 삼명육통을 다 할 수 있고, 위대한 공덕이 있는 성자와 내가 조금도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것이 불법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닦고 안 닦고, 또는 얼마만큼 닦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선근이 깊지 못하면 자꾸만 후퇴합니다. 닦다가도 조금만 피로하면 “편히 잘 살 것인데 괜스레 사서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다른 스님들은 편하게 승려 생활을 잘하는데 무슨 필요로 그렇게 까다롭고 옹색하게 하느냐고 해요. 딴은 그 말도 아예 삼매정진을 무시한다면 옳은 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강옥구 그리고 법문에 무문관無門關이라 할 때 문이 없는 문으로 번역하는 것이 보통인데 큰스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큰스님 그것이 오류는 아니지요. 제법이 공이니까 문이 없는 문이라 할 수 있고 구체화시키면 명상을 떠난, 제법이 공인 도리를 깨닫는 관문이라고 생각해야 무문관이 되겠지요. 그래서 제법공의 관문을 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강옥구 그리고 또 금타스님께서는 반야심경을 번역하실 때 본래 낳지 않았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보통은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고 번역하는데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큰스님 금타스님께서는 본체에서 철저히 보기 때문에 그런 말씀이 되셨겠지요. 현상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고 볼 수 있지만 본체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상주부동常住不動이라, 언제나 변치 않는 불성뿐이니까 말입니다. 본체에서 보다 철저하게 보았다는 것이 되겠지요.

 

강옥구 제가 그 차이를 보고 의문이 있었습니다.

큰스님 그런 것이 금타스님의 특이한 부분입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 공이 철저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하면 모호한 말입니다.

 

강옥구 그렇지요. 그러면 낳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 되지 않습니까?

큰스님 그렇습니다. 그래서 모호합니다. 현상계느 실존에서 보면 있다고 볼 수도 없는 것이고, 제법이 공이라는 도리에서 보더라도 마땅히 본래로 공이라는 것 아닙니까? 제가 가끔 인용합니다만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기독교 신도인데 참다운 실존은 하느님 앞에서만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뒤집어서 불교식으로 생각해보면 깨달은 분상에서 보아야 참다운 실존을 체험한다는 뜻이 되겠지요. 그 외는 모두가 참다운 실존이 못되고요.

 

그래서 현상적인 것에 따르는 것은 키에르케고르 말에 의하면, ‘죽음에 이르는 병’ 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나 너나 모두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철인들은, 특히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이전에 헤라클레이토스는 우주의 본체를 불로 보았습니다. 곧 하나의 광명으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하겠습니다.

 

강옥구 십삼세기 수피의 위대한 스승 위군아랍이라는 분도 우주의 본질을 광명으로 보았거든요.

큰스님 그렇습니다. 최근 라즈니쉬 같은 분도 훌륭한 천재이기 때문에 모든 본질을 광명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스스로 광명을 온전히 체험을 못한 것 같아요. 그런데서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광명이 어떻게 해서 지수화풍 사대로 나왔는가 하는 그런 것은 금타스님께서 비로소 밝혔습니다. 그 문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수화풍 사대라는 것이 현대말로 하면 각 원소나 원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런 것이 어떻게 해서 나왔는가 하는 것을 ‘우주의 본질과 형량’이라는 저술에 자세히 밝혔습니다. 그러니까 물질이 아닌 순수한 에너지를 극미라고 하는데 극미의 합성인 금진金塵이 좌편으로 돌면 인력引力인 자기磁氣가 발생해서 양성자가 되고 순수에너지인 금진이 우편으로 선회하면 그것이 척력斥力이 되어서 전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금진이 음양에 따라서 양성자가 되고 전자가 되고 또 그것들의 결합여하에 따라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문제를 밝힌 것은 금타스님의 불세출의 공이라고 생각됩니다. 순수 에너지로부터 물질이 어떻게 나왔는가, 물질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까?

 

아인슈타인도 통일장의 원리를 알려고 애썼지만 결국은 모르고 죽었습니다.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 성자가 아닌 범부는 물질이 아닌 순수에너지를 체험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자체를 중도실상의 생명으로 체험을 못한다는 말입니다. 번뇌를 녹여서 성자가 되어야만 중도실상의 생명을 체험할 것인데, 아인슈타인이 위대한 과학자는 되어도 성인은 아니니까 번뇌에 가리어서 통일장이 무엇인가 분명히 있기는 있다고 자기가 유추는 했어도 확실히 체험은 못하고 말았지요.

 

금타스님께서 쓰신 금강심론金剛心論을 보면 그런 대목이 있어요. 중생의 육안은 번뇌에 때묻은 오염된 육안이기 때문에 우리가 금진의 세계를 알려고 할 때는 중생의 욕계번뇌를 없애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천안통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욕계번뇌의 뿌리를 뽑으면 천안통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부터도 천안통이 못나온다는 것은 아직은 욕계번뇌를 미처 뿌리까지는 못 뽑았다는 것이 되겠지요.

강옥구 큰스님께서 겸손의 말씀이 아니신지요?

큰스님 아닙니다. 역시 저도번뇌의 뿌리가 뽑히려면 천리만리지요. 평생동안 노력해야지요. 번뇌의 뿌리가 뽑히면 발이 하늘로 뜬다는 말씀이 경론에 있습니다.

 

강옥구 정말로 발이 하늘로 뜰까요?

큰스님 예. 전혀 무게를 못 느낀다느 것이지요. 사실로 무게가 있지도 않는 것인데 나라는 관념, 번뇌 때문에 상을 내고 무게를 느끼는 것입니다. 일체유심조라, 관념이라는 것이 모든 걸 창조합니다. 남을 미워하면 우리 몸에서 ‘아드레날린’이란 독스러운 호르몬을 낸다고 하지 않습니까? 마음이 흐뭇하면 ‘엔도르핀’호르몬을 내고.

 

강옥구 보통 표현할 때, 사랑하는 사람은 몸이 가벼워서 날 것 같다는 표현도 있지요.

큰스님 그렇습니다. 순수하게 사랑하면 그만큼 우리를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부리면 그만큼 집착하는 마음 때문에 세포가 오염이 됩니다. 모든 집착을 다 여의면 본래가 공인지라 무게를 못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하늘로 오라갈 수 있기 때문에 도인들은 세속인들이 교만심을 내면 공중에서 십팔신변十八神變이라, 열여덟가지로 신통을 하지요. 요즘 사람들은 이런 말을 옛날 신화처럼 여겨요. 그러나 현대 물리학적으로 충분히 변증할 수가 있습니다. 원래 에너지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제로를 천만번 곱하고 더해도 제로는 제로이듯이 원래 무게가 없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대류권 내에서 번뇌에 가려 무게를 느끼는 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염불을 해도, 광명은 바로 지혜이기 때문에 광명을 안 놓치고 명호를 외워야 정혜쌍수定慧雙修가 되고 지관일치止觀一致가 됩니다. 성자의 말은 모두에 통달합니다. 지관일치라든가 정혜쌍수라는 의미를 화두만 열심히 의심하면 정혜쌍수라고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정혜쌍수가 못됩니다. 이치에 맞게 해야지요. 진리를 관조하는 지혜와 지속적인 선정이 함께 나아가야 정혜쌍수가 되는 것입니다.

 

강옥구 그러면 엣날에 벽돌로 거울을 어떻게 만드냐는 고사가 있었지요. 그것이 바로 선수후오先修後悟를 비유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큰스님 사실은 그렇게도 볼 수가 있지요. 선오후수를 경각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비유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다른 뜻도 포함해서 얘기하지만 결국 그렇게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이 됩니다. 부처님께서 일관되게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말입니다. 길을 갈 때는 먼저 길목을 알아야 되겠지요. 실천에 앞서서 이론이 있어야지 이론 없이 실천만 있으면 맹종이 되는 것이고 빗나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꼭 이론이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석존께서 밝혀놓으시고 무수한 성자가 탄탄대로를 닦아 놓으신 그대로 따라가면 되는 것인데 길목도 연구하지 않고서 동서를 헤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안심법문이라는 것은 편안하게 되어 있는 길, 환한 길을 가면 되는 것이지 억지로 이것인가 저것인가 상대적인 의심을 해서는 마음만 피곤할 뿐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꿈같다고 했으면 분명히 꿈같다고 보려 하고 그림자를 그림자로 여겨서 집착을 뿌리치면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뿐하고 공부가 잘 풀리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 이대로 있다고 인정하고 공부하는 것과 이 몸뚱이 본래로 비었다고 공부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강옥구 큰스님, 그럼 무엇보다도 반야심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겠네요.

큰스님 예, 반야심경 공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처님께서도 반야바라밀을 알아야 대승이라고 하셨습니다. 반야가 있어야 불법佛法입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죽듯이 반야를 떠나는 것은 마치 물밖에 난 고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또 용이 구름이 있어야 하늘로 올라가듯이 우리 수행자가 결국 반야를 얻지 못하면 소승이요 속물인 것입니다. 반야 없이 하는 일은 실다운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참선이나 기도나 화두나 다 그렇습니다. 일체 만유가 연기법으로서 진여불성이라는 생명의 실상으로부터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것이니까, 잠시간 나온 것은 고유한 것이 없고 서로 상관적인 것이고 순간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유한 내가 없고 네가 없기 때문에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인 것입니다. 억지로 부처님께서 욕심 내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본래 법 자체가 공이요, 무아요, 무소유라는 말입니다. 그런 견지에서 행해야 보살행이 되는 것이고 반야바라밀인 것입니다. 바라밀이라는 것은 바로 보살행입니다. 계행을 지키든 보시를 하든 참선을 하든 기도를 모시든 반야바라밀의 조명이 있어야 비로소 참다운 창조적인 생명의 비약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강옥구 큰스님, 오늘 오랜 시간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의 고향?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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