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진리의 길 2권2. 사바세계가 극락정토입니다.(4)

 

 

* “아무리 불러도 부처님은 뭘 모르고 내 마음만 겨우 밝아진다.”가 아닙니다. 부처님은 일체공덕을 갖춘 천지우주의 생명이기 때문에, 부르는 만큼 다 아십니다. 우리가 절을 올려도 다 보십니다. 우리가 부를수록 좋아 하십니다. 제불칭찬익(諸佛稱讚益)이라, 여러 부처님이 우리를 칭찬하십니다.

 

* 염불을 하면 부처님의 광명이 우리를 보호하고 비추어 줍니다. 이것이 염불의 십종 공덕 가운데 삼광조호익(三光照護益)입니다. 또 심다환희익(心多歡喜益)이라, 우리 마음이 염불을 하면 환희심을 느낍니다. 염불은 자기 마음에 진동을 일으키고, 그 마음의 파장[염파]이 다른 사람까지 정화시킵니다. 또 우주까지도 정화시킵니다. 그래서 맑은 마음은 사회를 정화시키는 사회참여가 됩니다.

 

* 염불을 하면 지구보덕익(知具報德益)이라, 우리 마음이 고마워져서 일체 중생에게 덕을 베풀고,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또한 상행대비익(常行大悲益)이라, 항상 자비심을 내서 자비행을 합니다.

 

* 염불은 또 입정정취익(入正定聚益)이라, 성불이나 극락세계(極樂世界)로 이끕니다. 삼정취(三定聚) 가운데서 사정취(邪定聚)는 극락을 못 갑니다. 부정취(不定聚)는 반반으로 갈지 못 갈지 모릅니다. 정정취만이 확실하게 갑니다. 이것이 삼정취입니다.

 

* 닦아가는 행(行)과 교리를 풀이하는 해(解)가, 나란히 상대해 가야 합니다. 이것이 행해상응(行解相應)입니다. 닦는 경지가 바로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아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마음이 정화될 수 없습니다. 행해(行解)가 상응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론적으로 아는 것일지라도,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 이름만 외는 염불이 칭명염불입니다. 대무량수경에 많이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름만 외워도 성불이 되고 극락세계에 왕생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름만 외워도 꼭 성불이 됩니다. 왜 그럴까? 원래 부처님 명호 속에 부처님공덕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부처님 명호는 보통 이름과 다릅니다.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라, 부사의한 공덕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 부처님 이름은 부처님께서 친히 무량공덕(無量功德)을 거기에 만든 진리의 이름이기 때문에, 이름만 불러도 성불을 합니다. 우리 마음에 부처님 생각하는 마음만 남으면, 그때 성불합니다. 조금도 틀림없는 말씀입니다.

 

* 부처님의 만덕을 갖춘 원만덕상·원만상호를 관하는 것이 관상염불(觀像念佛)입니다. 법당에서 한다면, 부처님을 우러러보면서 앙모하면서 합니다. 원만덕상을 보면서 하는 염불입니다.

 

* 부처님의 무량 공능·공덕을 상상하면서 하는 염불이 관상염불(觀想念佛)입니다.

 

* 실상염불은 곧, 진리를 생각하면서, 관조하면서 하는 염불입니다. 진리를 아직 모르지마는, 진리를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망상이며 가상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실상(實相)인지라, 실상을 생각하면서 합니다. 실상을 못 본 우리가 어떻게 실상을 보면서 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 실상은 어떻게 생겼는가? 불생불멸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하며 영생상주 하는 진여불성입니다. 부처님이나 도인(道人)의 말씀에 의지해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지해서 생각한단 말입니다. 진실로 실상은 그리거나 말로써도 담을 수가 없습니다. 즉 이언진리(離言眞理)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실상을 관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의언진리(依言眞理)입니다.

 

* 진공묘유는 허공 가운데 가득 차 있지만, 무엇인가 몰라도 묘한 무엇이 있습니다. 다만 텅 비어 있을 뿐만 아니라, 허공 가운데에 가득 차 있는 무엇입니다. 이것이 중도실상입니다. 실상의 이름을 구태여 말하자면, 도요, 부처요, 보리요, 여래요, 진여입니다.

 

* 실상염불은 어렵기는 하나, 부처님 이름에 가장 합당한 염불입니다. 아미타불하면, 그 아미타불이란 이름[名號]과 실상은 거의 계합하고 거의 합당합니다.

 

* 아미타불은 무량수불청정광불무량광불무대광불이라고도 하며, 실상에 걸맞은 이름입니다.

 

* 실상염불을 할 때는, 우리 마음을 천지우주로 해방을 시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주 가운데 가득 차 있는, 찬란한 그 무엇을, 광명을 생각해야 합니다.

 

* 실상을 생각하면서 하는 염불이라야 염불선입니다. 관상(觀像)·관상(觀想)·칭명염불(稱名念佛)등은 염불선이 못됩니다. 원래 염불선은 우리 마음이 실상에 안주하면서, 한시도 진리에 머물러서 진리를 떠나지 않는 염불입니다.

 

* 부처님 이름을 외우되, 우리 마음이 부처님 진리를 안 떠나야만이 실상염불이고 염불선입니다. 실제로 공부할 때는 그렇게 하기 어려우므로 관념상으로 “내 본바탕 역시 부처고, 우주가 모두 부처님뿐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그냥 이름만 불러도, 그때는 실상염불입니다.

 

* 부처님이름만 불러도 되지마는, 기왕이면 이름과 실체, 이름과 내용이 딱 맞으면, 더욱 쉽게 성불하게 됩니다. “염불하는 이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벗이 된다.”는 말은, 우리가 염불을 하면 즉시에 보살들이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우리의 벗이 되어 우리 주변에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보살이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굽어보시고, 우리의 벗이 되어 우리 주변에 있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 “염불은 일체법을 거기에 거두고 있다.[念佛三昧總攝一切佛法]”는 말씀이 있습니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다 성불하는 문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주종은 역시 염불하는 법입니다. 왜 그러한가? 사실은 모든 수행법은 염불을 모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염불하는 마음이 바탕이고, 선법의 여러 가지는 염불심에 쌓아 놓은 장식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나도 염불심으로 무생인을 얻었다[我本因地以念佛心得無生忍]”고 하셨습니다.

 

* 염불하는 법을 주로해서, 부분적으로 화두나 기타 묵조나 이런 행법들이 있습니다. 염불은 그래서 부처님이 가장 많이 말씀하시고, 정통 도인들도 다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모든 수행법 특히 참선법은, 모두 실상에 안주해서 이루어지므로, 염불은 수행의 기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염불이 밭[田]이라면, 수행법은 각종 종자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염불은 우리의 지혜·지성·감성·의지를 조화롭게 하는 공부입니다. 염불은 그 안에 여법(如法)한 정견(正見)을 세워야 하고, 지속적인 염념상속으로 이어가는 의지를 동원해야 삼매에 들 수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부처님을 ‘님’으로 보고 연모 갈앙하는 신심, 곧 감성적 추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知)·정(情)·의(意)가 모두 조화롭게 동원되어야 합니다.

 

* 삼매란 무엇인가? 우리 마음이 정법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참선할 때는 선이나 삼매나 같은 말이 됩니다. 삼매를 번역하면 곧 선정이 됩니다. 또는 정수(正受)가 삼매입니다. 사물을 바로 감수함입니다. 또 삼매는 조직정(調直定)이라, 구부러진 마음을 곧게 함이 삼매입니다. 또는 정심행처(正心行處)라, 우리마음을 정심(正心)에 딱 머물게 함을 말합니다. 잡다한 생각을 떠나서 마음을 쉬어 우리 마음을 한 군데로 하는 것, 즉 심일경성(心一境性)이 삼매입니다.

 

* 삼매의 종류에는 먼저 항시 앉아서 하는 상좌삼매(常坐三昧)가 있습니다. 또 도량 또는 부처님 주위를 뱅뱅 돌면서 하는 상행삼매(常行三昧)가 있는데, 이것을 반주삼매(般舟三昧)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불립삼매(佛立三昧)가 있습니다. 삼매에 들면 부처님이 눈앞에서 보입니다.

 

* 반주삼매 때 부처님을 뵙기 위해 부르는 부처님은, “보보성성염념유재아미타불(步步聲聲念念唯在阿彌陀佛)”하거나, “관세음보살”이라 합니다. 오직 아미타불만 있다는 말입니다.

 

* 반주삼매경의 의거, 한 달에 한 번씩 반주삼매에 앉아 보면, 극락세계가 훤히 보입니다. 참선 공부하려면, 꼭 이와 같이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 반행반좌 수행도, 앉기 어려운 사람에게 좋습니다. 비행(非行), 비좌(非坐)삼매도 있습니다. 불교는 이슬람이나 기독교식이나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 가지만 고집하지 않습니다.

 

* 소중한 것은 마음뿐입니다. 또 자기의식뿐입니다. 물질문명도 모양[相] 때문에 생겼습니다. 지옥법계는 우리 중생에게는 안 보입니다. 안 보이니까 부인하고, 권선징악을 위해 방편으로 말했겠지 하지마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 제법공(諸法空)의 경계에서는 사람도 없다고 말해야 합니다. 공에서 보면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도 임시로 가짜로 있다고 할 때는, 지옥도 분명히 있습니다. 현상계가 없다고 할 때, 천지우주는 텅텅 비어서 부처님 광명뿐입니다. 다만 이(理)나 불(佛)에서 안 보고 차별적으로 본다고 할 때는, 사람도 있고 지옥도 있습니다. 이나 불에서 본다는 말은, 모두 실상에서 본다는 것입니다. 진여·본래면목에서 본다는 말도 됩니다.

 

* 내 마음은 바로 불성이기 때문에, 바로 불성과 연결된 하나입니다. 불성은 내 마음이고, 불성은 또 바로 생명입니다. 이런 생명을 하나의 원리로 구하면, 바싹 말라서 무미건조하고 납득이 안 갑니다. 부처님은 생명이기 때문에, 흠모 추구하는 감성으로 구해야 합니다.

 

* 모든 고등 종교는 신앙대상을 생명으로 구합니다. 불교에서 신앙대상을 생명으로 구하는 것이 수행법의 중추입니다. 기타 방법은 하나의 개별적 특수 행법에 불과합니다. 염불선은 부처님을 바로 생명으로 보고, 흠모 추구하는 마음으로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수행법입니다. 때문에 염불은 모든 행법이 지녀야 할 갈앙심을 갖추어야 합니다. 따라서 모든 수행법의 기본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화두를 드는 것이나 묵조 등은, 참선의 도리에 비추어 볼 때 하나의 특수 방법이지, 기본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무자(無字)등의 화두는 개성에 따르는 특수 방법이고, 벼리[網]는 생명자체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으로 구하는 행법이 기본적인 불교의 수행법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