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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진리의 길.17(2)

 

 

* 공부하실 때에 꼭 주의해야 할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암증선暗證禪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공부를 스스로 점검을 못하고 어두운 가운데 암중모색暗中摸索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부처님 공부를 치우치게 해서 공부에 여러 가지 차서次序가 있는 것을 모릅니다. 가령 ?수능엄경首楞嚴經?을 두고 말한다면 ?수능엄경?에서는 선禪의 골수骨髓라 해서 선수禪髓라고 합니다. 왜 선수인가 하면 ?수능엄경?에 보면, 우리가 참선할 때는 어떤 것을 먼저 해야 되는지의 참선의 차서가 갖추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먼저 해야 되는지의 참선법이 다 들어 있습니다.

 

* 참선의 차서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암중모색하는 암증선을 경계해야 합니다. 또 우리가 과거 전생에, 숙생宿生에 많이 닦아서 일언지하一言之下에, 한마디로 깨달아 버리면 좋을 텐데 보통차원普通次元에서는 그렇게 안됩니다. 역시 분분단단分分段段으로 닦아서 올라가야 합니다. 모두가 부처님이 아님이 없다는 그러한 돈오頓悟 다음에는 암중모색할 것이 아니라 공부해서 올라가는 차서를 알아야 합니다. 예컨대, 음식을 어떻게 먹어야 되고, 생활은 어떻게 해야 우리 공부가 빠를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부처님 법대로 잘 따르면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합니다. 암중모색할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 안개가 끼어 있으면 앞뒤가 잘 안보입니다. 우리 공부도 똑같습니다.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앞뒤를 훤히 알고 지금 내 공부가 얼마만큼 되어 있는가, 앞으로 어떤 지표에 따라서 공부할 것인가를 안다면 암중모색하지 않습니다. 암중모색하면 공연히 교만심만 일어납니다. 가령 어느 경계에도 이르지 못해 가지고 무엇인가 한계를 모르니까, 자기 공부가 웬만히 되었다고 교만심을 내는 것입니다.

 

* 문자선文字禪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것저것 불경을 많이 봐 가지고 예를 들면, 능엄경楞嚴經도 법화경法華經도 보고 구사론俱舍論도 보고 해서 공부하는 차서에 따라서 올라가는 한계는 안다고 하더라도 그 아는 것으로 해서 공부가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증명證明을 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닦아서 그 자리를 증명해야 참다웁게 아는 것인데, 그냥 이치, 이론으로만 알아 가지고는 닦아지지를 않습니다. 이런 것을 불가佛家에서는 문자선, 또 구두선口頭禪이라 합니다. 문자선과 구두선을 안해야 합니다.

 

* 야호선野狐禪입니다. 야호는 들여우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진리를 증명하지 못하고도 증명했다고 하고, 어떤 경계를 성취했다면서 공부를 했다고 말합니다. 여우가 꾀가 많아서 거짓이 많지 않습니까? 사람도 짐승도 속이는 간교한 꾀가 많습니다. 여우처럼 교활하게 속이고 공부를 했다고 하는 것을 야호선이라 합니다.

 

* 우리가 공부를 할 때는 암중모색하는 암증선을 경계해야 하고, 문자만 알고 입으로만 알고서 실제로 닦지 않는 문자선ㆍ구두선을 안해야 하고 깨닫지 못하고서 깨달았다 하거나 또는 수승殊勝한 경계를 체험도 못하고 체험했다 하는 야호선을 안해야 합니다.

 

* “모든 존재가 본래로 오직 하나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이렇게 확실히 알고 또 “지계청정持戒淸淨이라”, 꼭 계율이 청정해야 됩니다. 어떤 분들은 마음만 닦으면 그만인 것이지 계율이사 다 마음 따라 가는 것인데, 아무렇게 살든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가 이렇게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 닦는 공부는 여러 가지로 복합적으로 계행도 거기에 곁들어 있어야 되고 지혜도 거기에 곁들어 있어야 되며, 선공덕善功德도 복합적으로 합해져야 이른바 공부가 이루어집니다.

 

* 음식만 함부로 먹어도 절대로 공부가 안됩니다. 근래에 우리 스님들이 음식을 함부로 먹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처님 뜻이 아닙니다. 또 공부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는 남녀 이성간의 성적性的인 문제도 절대로 금해야 됩니다.

 

* ?수능엄경?에 보면, “부단음심不斷淫心이라”, 사람이 음심을 끊지 않으면, 남녀 이성간의 음탕한 마음을 끊지 않고서 선정에 들려고 한다면 “여증사작반如蒸沙作飯이라”, 모래를 삶아서 밥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나 같다고 하였습니다. 모래를 삶으면 밥이 되겠습니까? 우리 재가불자님들, 명심하셔야 됩니다.

 

* 우리는 지금 욕계에 살고 있습니다. 욕계라는 것은 색계만도 못하고 무색계만도 못합니다.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를 초월해서 참다운 해탈을 하는 것입니다. 욕계의 특징이 무엇인가, 욕계의 두드러진 특징은 우리 식욕과 남녀 이성간의 욕심입니다.

 

가정에서 화목하게 생활을 하시는데 이런 말씀 드리면 “아, 자기가 성자니까 우리네 가정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가정에 부부관계가 형성되면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냥 문란스럽게 서로 사는 데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같은 법의 도반道伴, 똑같은 법의 도반이 되어서 같이 성불의 길로 나아가는 데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렇게나 그냥 문란하게 사는 것이 부부의 본질이 아닙니다. 금생에 부부가 된다는 것도 굉장히 소중한 인연 아니겠습니까? 과거 전생에도 부부간 또는 형제간이었기에 금생에도 부부간이 되었습니다.

 

* 우리 인간 존재의 본래 사명 자체가 성불입니다. 그러므로 성불하기 위해서는 모든 초점을 거기에 맞추어야 합니다. 따라서 내외간도 가급적이면 식욕 문제라든가, 남녀이성 문제는 절제하고 도반으로서 공부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내외간의 참다운 도리인 동시에 우리 불자들의 빼놓을 수 없는 의무인 보살행이기도 합니다.

 

* 저는 조주趙州 스님 이야기를 가끔 합니다마는, 조주 스님은 백이십세를 사신 분입니다. 대체로 장수하신 분들을 보면, 덕이 많습니다. 물론 전생에 자기 업 따라서 금생에 수명을 받기도 하지만, 대체로 덕이 많은 분이 오래 사는 것 같아요.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산다는 것은 자기 혼자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남의 덕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 우리가 옷을 입고 하루에 몇 번씩 공양을 먹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다 벌어서 농사를 지어서, 길쌈을 해서 입고 먹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따지고 보면 남의 덕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절도 부처님 도량을 만들기 위해서 불자들이 시주를 하고 목수가 고생하고 여러 사람들이 공을 들여서 이와 같이 절이 만들어져 수행이 가능한 공간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산다는 것은 사실은 ‘살려 주는 것’ 이지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 우리 생명은 절대로 분할이 안됩니다. 여기 몇 백 명 불자님이 계십니다마는, 우리가 개별적 존재로 각각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붙어 있습니다. 하나의 생명으로 모두가 붙어 있습니다. 눈에 안보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이나, 공기나, 나무나 다른 어떤 돌멩이나 모두가 우리 생명하고 별도로 끊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소 차원元素次元, 원자 차원原子次元에서는 모두가 다 붙어 있습니다. 생명은 따지고 보면, 근본 바탕에서 본다면,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다른 생명을 해코지하면 자기 자신한테 그냥 보복이 옵니다. 다른 생명을 우리가 존중하면 그 공덕이 바로 자기한테 옵니다.

 

* 우리가 삼동결제三冬結制하고 스님네는 선방에서 오로지 좌선坐禪공부를 합니다마는, 우리가 생각할 때는 젊은 스님들도 많이 계시는데 마땅히 사회에 참여해서 사회봉사도 하고 해야 할 것인데, 젊은 사람들이 선방에서 자기 좋다는 식으로 공부만 한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 산중에 가서 혼자 토굴에서 공부한다 하더라도 공부하는, 마음을 맑히는 그것이 벌써 우주를 맑히는 것입니다. 선방에 있으나, 자기 방에 있으나, 어디에 가 있으나, 우리가 공부하면 우리 생명 자체가 모두 다 같이 연결되어 있어서 자기 혼자 공부가 아니라 공부하는 그것이 우주 전체를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 부처님 공부하는 법은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어느 것도 모두 다 본래 부처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일정하게 꼭 어느 식만 옳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좁은 공부나 배타적인 공부는 어느 식만 옳다고 할 수 있겠지마는, 적어도 부처님 공부는 부처님이 어디에 별도로 계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일매지게 똑같이 모두 부처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화두를 참구하는 것도 또는 염불을 하는 것도 또는 주문을 외우는 것도 모든 것이 다 본래의 자리, 본래면목 자리를 안 여의고 한다면 다 옳은 공부입니다.

 

* 지금 여러분들, 요즘 저 아프기나스탄 사태를 대강 보시고 짐작이 되시겠지마는, 그 사람들 싸움은 지금 주로 기독교, 유태교, 이슬람교 세 가지 종교의 싸움입니다. 이 세 종교는 어떤 것인가 따지고 보면, 창조주 하느님이 있고 모든 존재는 다 창조받은 피조물입니다. 그와 같이 하느님과 중생간을 나누어 봅니다. 그렇게 나누어 보는 특징을 지닌 세 종교들입니다. 제가 지금 비방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로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의 근거로 본다면 결국 셋이 똑같은 것입니다. 똑같은 것, 같은 것 가운데서도 꼭 자기 식으로 믿는 것만 옳고 자기 식으로 믿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서 철학적으로는 근본주의라고 합니다. 또는 원리주의라고도 합니다. 우리 불교용어로는 ‘법집法執’이라 하겠습니다. 화두를 공부한 사람들은 “꼭 화두만 의심해야 성불한다”, 또 염불하는 사람들은 “꼭 염불만 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런 것도 결국 하나의 법집인 것입니다.

 

* 불교는 아시는 바와 같이 제일 쉽고 마음 편한 공부입니다. 나한테 부처가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여래장如來藏이라는 것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가 나한테 들어 있단 말입니다.

 

* 부처란 것은 무엇인가? 부처란 만덕萬德의 자리입니다. 만덕의 자리란 말은 지혜나 행복이나 자비나 능력이나 다 들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을 여래장이라고 합니다. 여래장이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여래장이나 부처님이나 마음이나 다 똑같은 뜻입니다. 그러니까 확실히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여래장이나 법성이나 법신이나 불성이나 다 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족하더라도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다”, “일체존재가 본래로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공부를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기 인연 따라서 화두를 의심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주문을 하든지 상관없이 다 성불합니다.

 

* 철저한 절제 생활을 하면서 공부하면 틀림없이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보실 것입니다. 법희선열이 무엇인가? 불교 용어로 말하면 ‘경안輕眼’이라, 몸도 마음도 가뿐하고 편안하다는 말입니다. 몸도 마음도 가뿐할 뿐만 아니라 가슴도 시원하고, 눈도 시원하고 머리도 시원한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수명도 길어집니다. 자기 피가 청정해지니까 다른 병이나 유행병流行病도 침범을 못하는 것입니다. 피가 오염될 때 몹쓸 병들이 생기는 것인데 무슨 병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 피가 오염되어서 결국 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암도 마찬가지입니다. 욕심을 절제하고 주의하십시오. 욕심도 굉자아히 큰 해독을 우리한테 주는 것입니다. 욕심 때문에 지금도 금생에 사람으로 왔고 또 그대로 살면 내생도 마찬가지입니다.

 

* 부처님 말씀대로 실천하십시오. 부처님 말씀은 우리를 최상의 행복으로 인도하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시면, “법희선열이라”, 법에 따르는 기쁨이, 한도 끝도 없는 행복감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렇게 법희선열을 맛보고 계시면 며칠 동안, 몇 십일 동안 공부해도 시간가는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건강에도 좋고 집안에도 좋고 다 좋습니다. 이렇게 하셔서 꼭 금생에 성불하시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2001년 11월 성륜사 동안거 결제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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