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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16. 진리의 길(3)

 

 

 

* 서기 사백년전 나오신 분으로 플라톤이 있습니다. 그분의 중요한 말씀 중에 ‘동굴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 요지를 말씀드리면 중생들은 동굴 안에 갇혀 있어서 어두워 판단을 잘못하고 동굴 안에서 흐리멍덩하게 감각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철인이나 성인은 동굴 밖에서 태양을 중심으로 광명세계에서 바르게 판단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즉 철인이나 성자는 태양의 밝은 빛으로 보니까 사실을 바르게 본다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 플라톤이 위대한 것은 팔십 세가 되도록 결혼도 않고 독신으로 살면서 오직 진리만을 위해 봉사하다가 청정하게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의 말씀처럼 우리 중생은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좋다 궂다”하는 중생 차원의 감각적 견해를 가지고 옳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바른 판단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바른 견해가 아니라 전도몽상입니다. 성자의 청정한 눈으로 봐야지, 번뇌가 없는 눈으로 봐야지 바로 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전도몽상을 떠나버린 성자의 마음과 중생의 잘못 보는 견해를 대비해서 말씀했습니다.

 

* 중생이 바로 보지 못하는 핵심적인 이유는 눈에 보이는 물질을 사실로, 그대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바로 알지를 못합니다. 불교의 본래적인 말씀으로 하면 사실은 물질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거부반응을 느끼시겠지요.

 

* “아 내 몸도 있고 타고 온 차도 있고, 물질인데 물질이 왜 없다고 하는가” 하시겠지요. 없다는 말씀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면 자동차, 몸뚱이면 몸뚱이, 세포면 세포, 금패물이면 금패물이 우리가 생각한 대로 있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 과학적으로 보면 금패물이나 몸뚱이나 세포가 모두 원소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또 원소 차원으로 본다면 우리가 보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성자가 본다면 원소 차원을 훨씬 넘어서 원소의 근본바탕이며 모든 존재의 근본 바탕이 바로 불성이기 때문에 불성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즉 물질은 물질이 아니고 불성입니다.

 

* 일체 존재가 불성으로 되어 있다고 느껴야 모든 성인들이 우리한테 말씀하신 실상을 우리가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뭘 부르고 참구하든지 간에 우리가 감각적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물질 뿐’이라는 생각을 떠나서 찾아야 모든 존재의 실상을 파악하는 바른 수행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행의 길들 중에서 제일 쉬운것이 이행문易行門입니다.

 

* 그래서 그 쉬운 이행문은 어떻게 들어가는가 하면 인간의 마음에 대한, 부처님에 대한, 우리의 근본생명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야 합니다.

 

*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하고, 기도를 하더라도 깨달음의 본고향에 대한, 부처님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해야 합니다. 부처님을 향한 하염없는 흠모심欽慕心이 없으면 우리 마음은 비약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빨리 정화되지 못합니다. 부처님께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 그렁저렁 공부해서는 전생에 잘못 살고 잘못 배운 습習이 빨리 녹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사무치게 본래의 자리, 우리 생명의 근원자리인 실상 즉 불성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없으면 가고 싶은 고향에 갈 수가 없습니다.

 

* 플라톤도 역시 에로스, 즉 간절한 그리움이 있어야 현상적인 것을 떠나서 참다운 실상으로 우리 마음을 돌이킬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기독교에서의 “오, 주여”하고 하느님을 흠모추구하는 것도 그런 태도에서는 우리와 같은 것입니다. 다만 기독교도 하느님이라는 개념 자체가 부처님 가르침 같이 하느님이 모든 것을 다 포섭하고 “모든 것이 본래로 하느님 아닌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때는 불교와 같습니다.

 

* 그러나 그 사람들은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창조한 하느님은 따로 있고 자연계나 인간은 별도로 있고, 그렇게 보는 것이 기독교에서 보는 하느님의 개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지금 모든 것을 포섭하고 화해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같이 화합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대한 성인으로 봐야 합니다.

 

* 우리 불자님들은 일신교一神敎를 믿는 그 사람들 같이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불교나 힌두교는 범신론汎神論입니다. 범신교는 넓을 범汎자 귀신 신神자인데 모두가 신이 아님이 없다고 보는 종교입니다.

 

* 자연이 곧 신이고 신이 곧 자연입니다. 어느 것이든 다 이른바 생명 자체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또 이론적으로 따져보면 기독교나 이슬람이나 유태교도 범신론이 안될 수가 없습니다. 이론적으로 정당하게 추구하면 모두가 다 범신론이 됩니다. 일체 존재가 다 신이 아님이 없다, 일체 존재가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서로 다툴 것이 없습니다.

 

*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제일 쉬운 문은 부처님을 생명으로, 부처님을 하나의 우주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우주 생명으로 받아들일 때는 내 마음이 어떤 형태가 되든 우리 마음의 본체도 똑같이 바로 우주 생명입니다.

 

* 천지우주가 다 진여불성이거니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도 부처님은 균등하게 들어 있습니다. 불교의 표현으로 일미평등一味平等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마음이나, 어떤 누구 마음이나, 우리한테 잠재해 있는 본래성품은 다 일미평등한 불성입니다.

 

* 불성자리를 믿는 것이 또한 대승적大乘的인 신앙입니다. 모든 존재의 근본을 믿는 것이 대승적인 신앙이고 대승적인 신앙을 가져야 비로소 참선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냥 선방에 들어가서 화두 의심하고 명상하고 염불해야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자리가 근본자리, 본래면목자리에 놓여 있어야 비로소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 어떻게 공부하시든지 간에, 화두를 하시든 묵조를 하시든, 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을 외우시든지 간에 여러분 마음이 본래 생명의 본체자리인 진여불성에 입각하면 모두 다 참선인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도 어떤 제한이나 위축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 아무리 선방에 앉아 애쓰고 가부좌를 틀고 공부한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견해인 “일체 존재가 부처 아님이 없다” 또 “내 마음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하고 똑같은 마음이다”라고 확신을 못하면 참선이 아닙니다.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하면 부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고 호법 선신도 보호하겠지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본래면목자리에 입각하지 않고 명호만 부르는 것은 염불참선이 못됩니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고 천지우주가 다 부처님 덩어리다”, 이렇게 확신하고 명호를 불러야 염불선이 되고 참된 염불이 되는 것입니다.

 

* 법문을 듣는다거나 불경을 보면서 공부를 선택할 때 지도하는 스님 또는 선사가 근원적인 문제에다 즉 우주만유의 실상에다가 마음을 두고, 본체를 여의지 않는 공부를 이끌었다면 남을 그릇되게 지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름이 높고 사회적으로 신뢰받는 분이라고 하더라도 만일 근원적인 문제, 생명의 실상 자리를 중요시하지 않는 분이라면 자기 공부가 미숙할 뿐만 아니라 남을 잘못 인도하는 이른바 ‘한 소경이 많은 소경’을 이끄는 것 같아서 굉장히 큰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공부하시는 분들은 그 점을 잘 감별하셔야 됩니다.

 

* 참선을 좀 하신 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윤회는 일반 사람들이나 생각할 일이지 참선하는 사람은 윤회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치로는 부처님 가르침의 윤곽을 알고 진여불성에 대한 체계를 세웠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우리 존재는 과거의 업에 얽매여 있습니다. 알기는 알아도 아직 미운 놈은 밉고 자기에게 좋게 해준 사람은 좋고 합니다. 이것이 과거 생의 업입니다. 금생에 죽을 때 지어놓은 업을 다 없애지 못하면 중생계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 지금 나라는 존재가 어떠한 존재인가, 나라는 존재의 업장이 얼마나 무거운가에 대해서 깊이 자기 반성을 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삼십종호 팔십수형호三十種好 八十隨形好라, 얼굴은 모든 자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닮아야 합니다. 그런데 잘못 살아서 부처님을 닮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겁장엄百劫莊嚴이라, 무량세월동안 남에게 베풀고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해서 얻으신 모습입니다.

 

* 우리는 누구를 보든, 어떠한 경우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고 부처님 사상대로 부처님 본체를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예컨대 집에서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이나 딸도 미울 때는 그냥 미워집니다. 진심瞋心도 내고 때리기도 하는 등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받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상에서 보면 좋은 일을 하나 나쁜 일을 하나 다 부처님 화신입니다. 조금도 부처님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단 말입니다. 애완용 개를 기른다 하더라도 근원자리에서 보면 역시 부처님 화신으로 봐야 본연대로 본 것이 됩니다.

 

* 부처님 가르침은 선방이나 절같은 특정 장소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나 최선의 생활방법이 됩니다. 그래야 나쁜 업을 짓지 않고 선업을 쌓을 수 있습니다. 직장이나 자기 동료, 부하직원도 부처님 화신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상만 보고 성품은 못 봅니다. 본체를 못봅니다. 본체를 봐야 성불할 것인데 현상만 가지고 좋다 궂다 따지고 시비분별하면 공부를 성취할 가망이 없습니다. 여러 보살님들께서는 깊이 새겨들으십시오.

 

* 지금 우리 중생은 모든 전도몽상을 여의고, 시비분별을 여의셔야 됩니다. 모든 것이 고향을 못 보게 가로막는 장벽이 되고 우리로 하여금 전도몽상 속을 헤매이게 만드는 동굴이 됩니다. 우리는 전도몽상이라는 동굴 속에 우리를 가둬 두는 무명에 싸여 있습니다. 무명을 떠나 참다운 생명의 고향자리를 향하셔야 합니다. 우리 생명의 고향 자리가 바로 부처님 자리입니다. 또한 그 고향자리의 이름이, 생명 자체의 이름이 아미타불입니다.

 

* 거꾸로 보고 바로 보지 못하는 전도몽상을 여의고 우리의 고향, 성불의 고향자리에 빠르게 가는 길이 ‘아미타불’ 염불수행으로 ‘나무(南無)’를 넣어서 부르시면 ‘나무아미타불’입니다. 여러 불자님들께서는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우리 생명의 고향에 모두를 바칩시다.

 

* 관세음보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장보살도 또한 같습니다. 부처님의 공덕이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나무아미타불 이름하나”만으론 표현을 못합니다. 하나의 부처님, 곧 아미타불 부처님뿐인데 아미타불의 공덕에다 또 각각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름은 수없이 많아도 부처님은 오직 하나의 부처인 아미타불뿐입니다. 아미타불 이외의 부처님은 아미타불의 별명입니다. 이름(명호)에 따라서 각각 뿔뿔이 따로따로 하나씩 다른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온 우주에 하나인데 역할 따라서 이름(명호)만 여러 부처님이 있는 것입니다.

 

*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부르든지 간에 모두 다 하나의 우주 생명입니다. 이렇게 아시고 부르면 그만큼 우리 마음도 빨리 넓어지고 동시에 부처님이 우리한테 베풀어지는 공덕도 훨씬 큽니다.

 

* 부처님의 공덕이 우주에 충만해 있어서 명호를 한번 부르면 부른 만큼 부처님의 가피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지독히 미워하면 그 미운 기운이 미워하는 그 사람한테 가는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고 남을 저주하면 틀림없이 그 사람한테 염파念波의 파동이 간단 말입니다. 또 그 사람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그 사람을 위해 기도를 모시면 그 사람한테 그러한 기운이 가는 것입니다.

 

* 우리가 저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는 아들, 딸들에게 기도를 모시면 일본에 있는 자기 아들한테 그 기운이 가는 것입니다. 기도해 준 대상에게 가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한다면 그런 정성스런 그 기운이 그 사람에게 갑니다. 정성들인 만큼 갑니다.

 

* 우주는 부처님 기운으로 공간도 없이 충만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흠모하고 부처님 이름을 외울 때에는, 중단없이 염불을 하면 부처님을 생각하는 공덕이 커져 갑니다. 차츰 우리 마음이 부처님 기운으로 꽉 차 버리면 성불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부처님기운이 꽉 차게 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을 생각하는 염불 공부를 끊임없이 해야 됩니다. 가거나 오거나 자거나 누울 때나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하고 주무시면 자기는 잠자버려서 모르지만 옆 사람이 들으면 잘 때도 나무아미타불을 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공부를 하셔야 잠재의식에 때묻어 있는 몹쓸 생각이나 업장을 녹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업장이 무겁습니다.

 

* 사람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벌써 허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생노릇 하는 것 자체가 허물입니다. 허물을 벗기는 가장 쉬운 문이 이행문 곧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일입니다. 끊임없이 염불하는 것을 염념상속念念相續이라 합니다.

 

* 이렇게 하셔서 마음이 통일되고 사무쳐야 업장이 녹습니다. 이렇게 하셔서 금생에 꼭 윤회를 벗어나, 내생까지 안가고 금생에 전도몽상을 벗어나 성불하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2001년 12월, 부산순례단 친견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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