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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진리의길. 15(2)

 

 

 

* 마음의 바탕은 똑같이 다 불성이고 자성입니다. 성인들은 자성ㆍ불성을 바르게 깨달은 분들이며, 중생은 참 마음인 불성 자리에 가다 가다 못간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제 일로 덮이고 가리워져 있어서, 지혜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지옥에 있는 마음입니다. 그 지옥은 사고할 틈이 없습니다. 너무 고통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간지옥無間地獄이라 합니다. 그런 지옥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가 어쩌다가 다행히 사람이 되었습니다.

 

*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라, 눈먼 거북이가 바다에서 떠돌다가 나무 토막 만난 격입니다. 물론 엄격히 말하면 우연도 아닙니다마는 어쩌다가 우리가 다행히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부모님한테 감사하고 모든 존재에 감사해야 됩니다. 저같은 사람은 나이가 많아지니까, 모든 분들의 은혜에 뼈저리도록 감사를 느낍니다. 힘이 부치니까, 자기가 쓰는 이불 하나도 치우기 힘듭니다. 하기야 손자가 있고 며느리가 있고 하면 되겠지만, 그런 신세는 못되지 않습니까?

 

* 우리 마음은 그야말로 불성이고 자성이고 참다운 마음입니다. 그래서 염불하는 것은 내 마음의 근본 자리, 내 마음의 근본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근본은 물질이라든가 어떤 무생물이 아닙니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우리에게 마음이 있으니까, 살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 금생今生에 살다가 인연이 다 해서 마음이 떠나 버리면, 몸뚱이 밖에 무엇이 남습니까? 물질만 남습니다. 물질이라는 것은 사실은 실존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실체實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은 잠시간 우리 마음에 덮인 업이 각 원소를 긁어모아서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존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행무상이라 하지 않습니까? 몸뚱이나 다른 물질이나 모두가 다 순간순간 변화하여 무상하단 말입니다.

 

* 일반 중생들은 없는 것을 그대로 보지를 못하니까,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중생의 병이 있습니다. 자기 재산이나 권세나 모두가 다 잠시 지금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실존적으로는 있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실제로 있다고 보기 때문에, 자기 가족을 위해서, 자기 몸뚱이를 위해서, 허망한 자기 명예를 위해서, 소중한 자기 생명을 낭비를 합니다.

 

* 부처님 말씀은 간단명료합니다. 그렇게 복잡하고 어렵지가 않습니다. 우리 중생이 무명심 때문에 잘못 살고, 무지 무명을 못 떠나서 말로 생각으로 몸으로 스스로 업을 짓고, 자기가 한 대로 당한단 말입니다.

 

* 부처님 상을 보면, 부처님께서 오른 손을 이렇게 하고 계십니다마는, 이것이 무외시인無畏施印입니다. 중생의 공포를 덜어주시는 서원을 상징하는 모습입니다. 왼손을 아래로 하신 것은 여원인與願印입니다. 중생이 바라는 대로 다 주겠다는 부처님의 서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부처님 서원은 참 철저합니다.

 

* 부처님한테서는 어떻게 그런 자비가 나오는가? 천지 우주가 오직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의 뿌리가 같습니다. 모두가 다 광대무변한 마음입니다. 광대무변한 마음인 것을 모르고 욕심을 내면, 그만큼 우리 마음이 좁아집니다. 옹졸해집니다. 좁아지면 얼굴도 찌푸려지고 동시에 우리 몸에도 해가 옵니다.

 

*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면으로 보나, 우리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나, 가장 도움이 되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자기 건강이나 가족이나 사회를 위해서나, 정치를 위해서도 최상의 가르침입니다. 인간이 본래 타고난 근본적인 성품은 이처럼 고귀하건만, 금싸라기 같은 불성 보배를 바로 쓰지 못하고 인생을 허무한 곳에 쓰고 있습니다.

 

* 화두란 것도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중국 송나라 때 나왔습니다. 화두를 지금 놔야 한다는 당위성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우리 불자님들도 깊이 생각하십시오. 소홀히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화두를 자기 할아버지가 했다든가, 금생에 자기 스승이 했다든가, 또는 전통적으로 우리 종단에서 했다든가 하는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인습적으로 묵수墨守해서 덮어놓고 따라갈 그럴 때가 아닙니다.

 

* 지금은 정보화 시대입니다. 정보화 시대는 지적인 정보를 가지고 정사正邪를 따져야 합니다. 비판해서 가려야 합니다. 화두라는 것은, 중국 송나라 때 대혜종고 스님이 비로소 정형화시켰습니다. 또 송나라 때도 다 화두를 한 것이 아니라, 대혜종고 스님 일파에서만 화두를 정형화시켜 유도했습니다. 그 당시도 저사抵死해서 화두를 반대한 스님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는 화두 없이 잠자코 마음을 관조하자는 조동종의 천동정각天童正覺이었고, 또 하나는 “기왕에 화두를 할 바에는 아미타불 넉자 화두를 해라”하시고 나선 분은, 대혜종고 스님과 같은 시대의 진헐청요眞歇淸了스님이었습니다.

 

* 진헐스님은 “기왕에 화두를 할 바에는 아미타불 넉자화두(四字名號)를 해라. 아미타불이라는 것은 우리 마음의 본래면목이기 때문에, 또 우리 마음의 본래 자리를 깨닫는 것이 불교이기 때문에 참선을 하는 것이니까, 기왕에 화두를 할 바에는 의심만 주로 하는 쪽이 아니라 부처님을 일백 퍼센트 신뢰하는 아미타불 화두를 하라”하면서, 아미타불 화두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송나라를 지나 명나라 때가 되었습니다.

 

* 명나라 때는 송나라 때보다 고승이 훨씬 많이 나왔습니다. 바로 화두를 한 그 파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화두를 반대했습니다. 고승들의 종파는 같은 화두파였는데, 그 분들은 다 화두를 반대했습니다.

운서주굉雲捿袾宏스님, 감산덕청憨山德淸스님, 지욱우익智旭藕益스님, 자백진가紫柏眞可스님, 이 네 분이 명나라 때 사대 고승입니다. 사대 고승이 다 한결같이 염불 쪽에다 역점을 두고서 불교를 창도하신 분이란 말입니다.

 

* 우리 한국에서는 어찌하여 “화두 아니면 참선이 아니다”,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송나라 때가 한국으로 치면 고려 때에 해당합니다. 당시 중국에는 대혜종고스님이 이끄는 세력이 제일 강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법을 배울 때 그 중 세력이 제일 강한 쪽에 가서 배우려고 하겠지요. 그래서 그 화두하는 쪽에 가서 배워 왔습니다. 그때는 마침 한국은 고려 말엽으로 불교가 정치 세력과 밀착되어, ‘신돈’ 같은 사람이 나올 정도로 부패 타락했습니다.

 

* 새로운 정치 지배세력인 이씨 조선이 서고, 이조 오백년 동안에는 고려 때 불교의 잘못으로, 부패한 과보로 배불排佛이라, 유교인들에게 핍박을 당해서 스님들이 도성 안에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불교가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중국은 원나라ㆍ명나라ㆍ청나라 때가 불교가 가장 왕성할 때였는데, 불행히도 명나라 때 불교가 우리나라에 못 들어왔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일제 강점기 삼십육 년간이나 또 팔일오해방 이후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부처님 가르침이 제대로 발전을 못했습니다.

 

* 어떤 스님네는 화두를 한 번도 안해 보고도, 또 참선도 안 해 보고도, “화두 아니면 참선이 아니다”고 합니다. 한국 선방의 모습이 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선방에서도 화두 아니면 참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한 것도 아니고, 석가모니가 한 것도 아니고, 육조대사가 한 것도 아니고, 지금 참선의 교과서 같은 육조단경에도 화두란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 일체삼신 자성불一體三身自性佛이라, 우리 마음이 본래로 자성이고 불성입니다. 이러한 불성이 끝도 가도 없이 꽉 차 있는 이 자리를 청정 법신이라고 하며, 이 자리가 내 마음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 청정법신 가운데는 만공덕萬功德이 차 있는데, 이것을 “자비다, 지혜다”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신報身이라고 합니다. 이 법신, 보신을 근거로 이루어지는 것, 즉 현상적인 만유가 화신입니다. 이 모두가 다 우리 마음에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계발만 못하는 것이지, 우리한테 몽땅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 우리가 한 글자를 안 배워도 우리한테 다 들어서, 이것을 불교 용어로 원만구족이라 합니다. 다 들어 있는 내 마음입니다. 학교 갈 수 없으면 안 가도 무방합니다. 우리한테 모두가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육조 혜능스님 같은 분도 대도인이고 육대조사지만, 일자무식이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석가모니께서도 여러 가지 학문을 배우셨지만, 다 놔버리고 육년 고행에 참선을 했지 않습니까? 오직 명상만 했습니다.

 

* 여러분께서도 석가모니만 못할 이유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석가모니께서 갖추고 계시는 지혜나 덕성을 다 갖추고 계십니다. 또한 방법도 쉽습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생각을 한 생각도 안 놓치고 나간다면, 그냥 삼매에 듭니다. 삼매에 들면, 삼매 가운데서 우리 마음의 본래면목 자리, 불성을 깨닫게 됩니다. 학문적으로 못 배웠다 하더라도 슬퍼할 것이 없습니다.

 

* 우리 마음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저 같은 팔십 노장이나 어린아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 같은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여불성은 더하고 덜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생사도 없어 영원히 죽지 않고 불생불멸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하여 오염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삶의 고뇌가 심해도 오염이 안 됩니다. 그 불성은 바로 우주의 참다운 생명의 빛입니다. 우리 중생의 눈에는 안 보이지만 불자님들이 일심정념一心正念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외운다면, 마음이 모아져서 차차로 얼굴도 빛나고 눈도 빛나고 부처님 광명도 볼 수 있습니다.

 

* 염불 회향문에 이런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광명변조光明遍照라, 천지 우주에는 오직 부처 광명으로만 충만해 있습니다. 부처님 광명이나 우리 마음의 본성이나, 모든 존재의 근본 모습은 한계가 없습니다. 물리적인 빛에는 한계가 있지마는, 생명의 빛은 한계가 없습니다. 끝도 가도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차근차근 닦아 깨달아 가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서서히 광명이 찾아 옵니다. 광명이 빛나면 우리 몸도 가벼워지고 마음도 가벼워지고 행복도 충만해집니다.

 

* 부처님 가르침은 가르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요익饒益한 것을 우리한테 축복하는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광명이 우주에 두루 충만해 있어도, 우리 중생이 외면하면, 있는 것도 다 찾지 못합니다. 어린애가 어머니에게 졸라야 사탕도 사 주고 젖도 주시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 중생염불불환억衆生念佛佛還億이라, 중생이 부처님을 간절히 그리워해야, 부처님도 중생을 그리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생각하고 이름을 부르고 하셔야 됩니다. 그것은 허망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고구정녕히 타일러 주신 것입니다. 어느 모로 보나, 어느 면으로 보나, 닦기도 좋고 공덕도 빠르고 말입니다. 혜원대사慧遠大師가 말한 고공이수高功易修라, 공이 높고 또 닦기가 쉽단 말입니다.

 

* 극락세계란 것이 우리 근본 고향이어서, 우리 중생은 누구나 다 근본적인 향수가 있습니다. 근본적인 향수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 생명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그리움인 것입니다. 그런 간절한 그리움이 있기 때문에, 그런 그리움에 편승해야 됩니다. 부처님한테 대한 간절한 마음으로 내 고향, 내 생명의 근본 자리, 즉 부처님을 간절히 그리워하고 추구해야 합니다.

 

* 부처님은 모든 행복과 공덕이 약속된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싫다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운 갈앙심으로 부처님을 간절히 부르십시오.

 

* 이 가을에 명상을 하셔야 됩니다. 이 서늘한 가을에 우리의 그리운 고향을 찾기가 제일 좋습니다. 가을은 정말 부처님께서 베풀어 주신 참 은혜로운 시절 인연입니다. 이 서늘한 가을에 우리 생명을 낭비하지 마시고, 하기 쉽고 공이 많은 염불로 본래면목 자리를 훤히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가을은 부처님을 부르는 계절입니다.

 

[2001년 10월, 성륜사 사천왕 점안식법어]

* 달맞이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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