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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진리의 길.17(1)

 

 

계율이 청정해야 삼매를 얻는다

 

* 부처님 공부는 조금도 무리한 공부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부처님 공부는 한 마디로 본래대로의 공부입니다. 우리 중생은 본래대로 있는 참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번뇌망상을 일으키고 거기에 따르는 업을 짓고, 인생고의 여러 가지 재난을 스스로 지어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 방금 여러분들이 들으신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은 육조단경六祖壇經의 중심사상은 “귀의 삼신불歸依三神佛하라” 또는 “삼보에 귀의하고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을 깨달으라”는 사상과 같은 것입니다.

 

* 참선의 근본 가르침은 부처님 당시부터 있어 왔지마는, 적어도 문리를 배제하고 오직 마음만 닦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달마 스님 때부터서 특히 강조되어 왔습니다. 달마 스님 가르침의 핵심은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입니다. 이입사행론은 이입理入이라, 먼저 이치로 들어가고, 또 행입行入이라, 우리가 실천궁행實踐躬行으로 이른바 행동으로 옮긴단 말입니다. 이치理致로 들어간다고 하는 말은, 달마스님께서 하신 말씀을 인용한다면 “일체중생이 동일진성同一眞性이라”, 일체 모든 중생이 다 한가지의 성품性品이란 말입니다.

 

* 우리가 보통 상식으로 중생衆生이라 할 때는 사람만 중생이라 생각하지마는, 또는 일반 동물만 중생이라 생각하기 쉽지마는 부처님 가르침은 그보다 훨씬 광범위합니다. ‘중생’이라 하면 유정중생有情衆生은 다시 말할 것도 없고 또는 “무정중생無情衆生이라” 동물이 아닌 식물이나 그런 것이 다 중생 가운데에 포함됩니다. 또 “무색중생無色衆生”이라, 모양도 없지마는,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관념이라든가 우리의 사고도 없을 무無자, 빛 색色자, 모양이 없는 중생에 해당합니다.

 

* ‘중생’이라 하면 유정중생과 무정중생 그리고 무색중생 모두를 다 포함합니다. 그래서 “일체중생一切衆生 동일진성同一眞性이라”, 동일진성이라는 말이 무엇인가 하면 일체중생 모두가 다 하나의 참다운 성품이라는 것입니다.

 

* 우리 중생은 현상적인 상相만 보기 때문에 우리 중생과 깨달은 분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 중생은 현상적인 상만 보는 것이고, 깨달은 분은 근본성품根本性品을 봅니다. 바다에 비하면 바다 물결만 보는 것이 우리 중생인 것이고, 깨달은 분들은 그 물자체物自體를 본단 말입니다. 즉 성품性品을 봅니다.

 

* 현상계現象界 모두가 다 중생에 포섭이 됩니다. “모든 중생이 동일진성이라”, 하나의 참다운 성품이란 말입니다. 진성이라 할 때도 여러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법성法性ㆍ법신法身ㆍ불성佛性ㆍ불심佛心 또는 자성自性ㆍ본래면목本來面目 등 모두가 참다운 성품, 진성眞性에 해당합니다. 조사祖師님들이 우리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말씀을 많이 하셨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표현이 되지마는 뜻은 같고 표현만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일체중생 동일진성이라”는 달마 스님 말씀은 모든 것이 다 하나의 성품이라는 뜻입니다.

 

* 우리 범부들은 자꾸만 분할해서 봅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미운 것이 있고 좋은 것이 있고, 이렇게 나누어 봅니다. 성자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본래 성품을 본다면 모두가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범부와 성자는 그러한 구분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삼동결제를 하는 것도 잘못 보는 범부중생凡夫衆生의 망념妄念을 떠나서 모든 생명의 본래 자리, 실상 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공부에 큰 뜻이 있는 것입니다.

 

* 근래 중국에 허운虛雲 대사란 분이 계셨습니다. 허운 대사는 위대한 선지식善知識입니다. 허운 대사는 백이십세까지 장수를 했습니다. 일천구백오십구년에 돌아가셨으니까 얼마 안된 분입니다. 교학적으로도 굉장히 공부를 많이 한 분인데 신심信心도 독실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보타산普陀山에서 오대산五臺山까지 갈 때 삼년배행三年拜行을 하셨습니다.

 

* 삼보일배三步一拜, 도보로 세걸음 세걸음 보행하면서 땅을 향해서 오체투지五體投地 한번씩 하는 것이 삼보일배행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리 범부 중생들은 얼마나 업장이 무겁습니까?

 

* 실상實相에서 본다면, 본래는 업장도 없습니다. 그러나 중생의 몸을 받아 나와서 삼계를 윤회하는 중생차원에서는 굉장히 업장이 무거운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깊이 참회하는 분들은 삼보일배하는 배행이 참으로 숭고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렇게 안해도 되지만, 그것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허운대사는 삼년 동안 한 데서 자고 한 데를 걸으면서 그때그때 조금씩 얻어먹고 하면서 세걸음 떼고 또 한번 땅에 대고 오체투지하며 오대산까지 가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공부는 얼마만큼 진실하게 했는가를 미리서 짐작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 중국 당나라 때나 수나라 때, 인도까지 가서 법을 구하는 스님네(求法僧)가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의 혜초慧超대사도 구법승 가운데 한 분입니다. 그때 중국에서 인도까지 가려면 사막을 넘어야 하고 파미르고원을 넘어야 합니다. 또 히말라야 산맥과 파미르고원은 고도가 평균 오천미터입니다. 그런데 도보로 가니까 꼬박 가는 데만 삼년이 걸렸습니다. 삼년 걸려 무난히 다 가는 것이 아니라, 국경을 몇 십 개나 넘어야 합니다. ‘십진구퇴十進九退라’, 열 사람쯤 가면 보통 아홉 사람은 물러나거나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렇게 생명을 담보하고 법을 구했습니다.

 

* 부처님 당시의 법문이나 그 뒤의 역대 조사가 해놓은 훌륭한 법문들이 한꺼번에 중국으로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이 것 들어오고, 저 것 들어오고 했기 때문에 무슨 경經을 보면, 그 속에 여러 가지 다른 경 말씀이 많이 있는데, 어떻게 볼래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나머지 불경 속에 들어 있는 경을 다 보기 위해, 경을 다시 또 모셔와야 했습니다. 가는 데만 꼬박 삼년 걸리고 또 인도에 들어가서도 그냥 말(語)이 안 통하니까 역시 그쪽 말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또 몇 년 걸립니다. 외국 갔다 온 사람들은 짐작이 되실 겁니다. 외국어 실력이 없으면 얼마나 불편한가를 말입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라고 해도 그냥 빈 걸음으로 올 수가 없습니다. 불경을 또 몇십 권 짊어지고 와야 됩니다. 갈 때도 삼년 걸리고 거기서 머물면서 공부도 하고 말도 배우고 하는 데 사오년 걸리고 올 때도 지루했겠지요. 한번 갔다 오면 보통 이십년 걸립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 경전을 중국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부할 때 조금 무엇이 불편스럽다든지 또는 재가불자들이 집안에서 공부할 때도 공부하지 않고,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쉬는 게으른 이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 부처님 가르침은 성인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범부가 성인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그냥 아무렇게나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반드시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을 띠고 태어났습니다.

 

* 달마 스님 말씀과 같이 “일체 중생이 동일진성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꿔서 말하면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입니다. “금생에 그렁저렁 편히 살고 부처가 안되면 그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부처가 못되면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삼계三界를 윤회합니다. 윤회전생합니다.

 

* 우리 불자님들, 깊이 느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니까 부처가 안되고 그렁저렁 살면 업業만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사람 몸 받은 것도 과거 전생에 사람 몸 받을 정도로 다섯가지 계율정도는 닦았기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십선계十善戒를 닦았으면 천상에 태어났겠지요. 눈에 보이는 세계만 긍정하는 사람들은 천상이라 하면 천상이 어디 있을 것인가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방편方便으로 말씀하셨겠지, 방편법문方便法門이겠지”,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방편이 아닙니다.

 

* 우리 인간이 허망무상虛妄無常하지만, 이와 같이 이렇게 있듯이 천상天上도 역시 허망무상한 것입니다. 실상세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천상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저승에서 헤매는 영가생활이 분명히 있습니다. 제가 너무나 까다로운 말씀을 해서 여러분들이 긴장을 하시니까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마음을 푸셔서 부처님 공부는 한편으로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고 옹색한 것 같지만 사실은 제일 쉬운 공부입니다.

 

* 우리는 부처를 어디 다른 데서 구할 것이 없습니다. 본래 우리 마음의 본성이, 본성품이 바로 부처입니다. 마음을 떠나서 참다운 법신부처가 없고 부처를 떠나서 우리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귀가 닳도록 자주 듣지만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를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님한테 있는 불성이나, 달마 스님한테 있는 불성이나, 우리 불성이나 또는 개(犬)한테 있는 불성이나 다 똑같습니다.

 

* 천지우주는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실은 모두가 다 불성뿐입니다. 그러기에 화엄경에서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이라”, 부처와 중생이 모두 차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자꾸 갈라서 분할을 시킵니다. 분할시켜서 둘이나 셋으로 보는 것이 중생일반입니다. 그리고 본래적인, 근원적인 생명 자체를 깨달은 것은 역시 성인聖人이고 부처입니다.

 

* 성인이나 부처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닌가 하시겠지마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제일 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부처가 된 것은 아닙니다. 저도 공부하는 중입니다. 어째서 쉬운 것인가 하면, 천지우주의 본래자리가, 본래면목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본래로 우리가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 자리, 본래면목 자리를 따르는 것이 우리 건강으로 보나, 우리 마음으로 본, 제일 편하고 제일 쉽습니다.

 

* 우리는 모두가 부처기 때문에 남편도 아내를 부처같이 생각하고, 아내도 남편을 부처같이 생각하고, 아들딸들을 부처같이 생각해야 됩니다. 애써서 부처같이 보려고 해야 합니다. 친구지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부처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화두공안話頭公案을 참구參究하고 염불念佛하고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일체중생이 부처인 것을 재확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 저는 불행한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불행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 같은 사람이 조금 더 법력法力이 있으면, 저런 분들을 다 구제해 줬으면 참 좋겠는데, 그런 법력이 없어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하다 못해 예수 같은 법력만 있어도 만져서 낫기도 하고 또 가만히 보고 있어도 낫기도 하고 그러겠지요. 그러나 그런 법력이 없으니까 여태까지 “팔십 다 먹어 가면서 중생들한테 빚만 지고 참 게으름만 많이 피었구나” 하고 참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 공부를 하는 것은 우리가 본래 부처가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이 공부가 어렵다고 해서 기피하면 큰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재가불자님들도 이십명 정도 결제結制를 하신다고 하니까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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