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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자료/염불수행대전

6. 정토법문(17)

 

 

* 우익대사는 「석가여래께서 아미타불은 극락으로 중생을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하셨다. 48대원으로써 깊은 믿음과 발원으로 중생을 맞이하여 극락세계에 왕생케 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영원히 불퇴전(不退轉)의 지위에 오르게 하는 분이다.」라고 하였다.

* 우익대사는 「아미타불은 만 가지 공덕을 갖춘 위대한 명호이다. 부처님 명호를 부르면 부처님의 만 가지 공덕을 갖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아미타불을 부르는 그 공덕은 아무리 다해도 다함이 없다.」라고 하였다.

 

* 달마대사는 〈관심론(觀心論)〉에서 「해탈을 구하는 이가 삼독(三毒)을 돌려 삼취정계로 삼고, 육적(六賊)을 돌려 육바라밀을 이루면 자연히 모든 고통을 여의게 된다.」라고 하였다.

* 삼취정계(三娶淨戒) : 착한 법을 모두 행하라는 섭선법계(攝善法戒), 계율을 잘 지키라는 섭률의계(攝律義戒),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라는 섭중생계(攝衆生戒)를 말함.

 

* 원효대사는 「섭률의계와 섭선법계만 있고 섭중생계가 없다면 오로지 자리행(自利行)만 있는 것이 되어 이승(二乘)에 머물 뿐이며, 섭중생계만 있다면 이타행(利他行)만 있고 자리행이 없게 되는 까닭에 범부와 다를 바 없는 것이 되어 보리(菩提)의 싹을 돋아나게 할 수 없다. 삼취정계를 다 갖추면 무상보리(無上菩提 : 위 없는 깨달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어서, 이 삼취정계야말로 불사약(不死藥)인 감로(甘露)이다. 따라서 섭률의계는 단(斷)의 덕목이고, 섭선법계는 지(智)의 덕목이며, 섭중생계는 은(恩)의 덕목이기 때문에, 이 삼덕(三德)의 과(果)를 얻으면 그것이 바로 정각(正覺)을 이루는 길이다.」라고 하였다.

 

* 남회근 선생은 「선종을 보면, 임제종으로부터 위앙종, 조동종, 운문종, 법안종 등에 이르기까지 교리(敎理)에 통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경전의 교리에 전부 통달하고서, 마지막으로 그것을 버리고 선(禪)을 배운 겁니다. 지금 사람들은 경전도 연구하지 않고 입만 떼면 선종을 말합니다.」라고 하였다.

 

* 화두(話頭)라고도 불리는 공안(公案)에는 1,700가지의 공안이 있다. 이 수는 〈경덕전등록〉에서 1,701선사의 수행 이력을 수록했기 때문에 유래되었다. 연지대사는 그의 저서 〈선관책진(禪關策進)〉에서 이러한 공안이 무려 1,700가지나 된다고 하고, 이 숫자는 〈경덕전등록〉에 실린 조사(祖師)의 수가 1,700인 것에 근거한다고 밝혔다.

 

* 남회근 선생은 「위의(威儀)란 사나운 모습이 아닙니다. 또 혐오스러운 모습을 띠는 것이 아닙니다. 공덕이 성취되어 어디에 가더라도 기개(氣槪)와 도량(度量)이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원섭(圓攝) : 원만히 끌어들이다. 원만히 거두어들이다. 원만히 거느리다.

* 해라(該羅) : 모조리 포함하다. 죄다 망라하다.

 

염불은 귀로 듣고 입으로 외우기 때문에 성스러운 공덕이 끝이 없다. 아뢰야식에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부처의 씨앗이 되어 억겁의 중죄를 단박에 없애고 위없는 깨달음을 증득한다.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것은 소선근小善根이 아니라 다공덕多功德임을 믿어 알지니라. - 대지율사〈阿彌陀經義疏〉

 

* 인광대사는 「무량겁 이래로 선근(善根)을 깊이 싶어온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처럼 불가사의한 법문을 들으며, 나아가 단박에 믿음을 내어 극락왕생을 발원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 정공법사는 「옛날 조사(祖師)들께서는 부처님 명호를 염송할 적에는 마음으로부터 나와야 하고, 입에서 나와야 하고, 귀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렇게 하면 쉽게 마음을 모을 수 있어서 잡념이 쉽게 들어오지 못한다고 가르쳤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염불하는 중간에 스스로 끊어지게 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였다.

 

* 〈인천보감(人天寶鑑)〉에 「영지사(靈芝寺) 원조율사(元照律師 : 대지율사 지칭)는 전당(錢塘)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숙세의 인연이 익어져 나이 열여덟에 경에 통달하여 출가하였으며, 사미로 있을 때 이미 대중을 위해 경을 강의하였다. 계율을 배우면서는 배울만한 스승이 없다고 늘 탄식하였다. 당시 신오처겸(神悟處謙)법사는 천태(天台)의 도를 깊이 터득하고 있었다. 율사가 찾아뵙고는 “참으로 나의 스승이시다.”하고 청을 해서 문하에 있게 되었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춥거나 덥거나 날마다 몇 리 길을 걸어와 배웠다. 처겸법사는 강론을 할 때마다 반드시 율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어쩌다 조금 늦어져 대중들이 시간이 지났다고 강론을 청하면 언제나 “강을 들을 사람이 아직 오지 않았다.” 고 말했으니 그는 이토록 율사를 사랑하였다.

 

율사가 익혀왔던 것을 버리고 법사를 따르려 하니 법사가 말하였다. “요즘 들어서 율(律)의 가르침이 점점 약해지는데 그대는 뒷날 반드시 종장이 될 것이니 꼭 법화(法華)를 밝히고 사분율(四分律)을 널리 펴도록 하여라. 나의 도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율사는 마침내 많은 종파를 널리 연구하고 그중에 율을 근본으로 삼았는데 단지 말로만 하지 않고 실천에 옮겼다. 일찍이 남산도선(南山道宣)율사에게 귀의하여 하루 여섯 차례씩 예배를 드리고 밤낮으로 도를 닦았다. 발우를 들고 걸식을 다녔는데 옷이라고는 큰 베옷 하나만 걸쳤을 뿐이었고, 정오가 지나서는 밥을 먹지 않았다. 발우 하나와 옷 세벌 뿐 바랑 속에 쓸데없는 물건은 없었다. 기도를 하면 언제나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아 메뚜기를 없애달라고 빌면 메뚜기가 경계 밖으로 떠나고, 비가 오게 해달라고 빌면 장맛비가 내렸다. 술고방공(術古龐公)이 율사에게 비를 빌도록 명하였는데, 축원이 입에서 끝나기도 전에 천둥이 치며 소나기가 쏟아지니 공이 말하였다.

 

“우리집안은 대대로 불법을 섬기지 않았는데 지금 율사를 만나고 보니 귀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태사(太師) 사월왕(史越王)이 율사의 비(碑) 뒷면에 이렇게 썼다. “유학을 하는 사람은 유학으로 자기를 묶고, 계율을 하는 사람은 계율로 자기를 묶는 것이 공부하는 이들의 큰 병통이다. 그런데 유독 율사만은 3천 가지 몸가짐과 8만 가지 세세한 행을 갖추어 흠잡을 데 없는데도 늘 정혜(定慧)의 테두리를 껍질 벗듯 초탈하였으니 율장 중에 진짜 법왕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수백 년 뒤까지도 사람들을 분발케 하니, 그를 남산율사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평가하나 그 공은 배가 된다고 하겠다. 만일 지난날 율사에게 하여금 승복을 입게 하지 않았더라면 반드시 유교의 우두머리로서 특출한 조예를 가진 사람이 되었을 터인데, 아까운 일이다.” 율사가 돌아가신지 26년이 되도록 그 남긴 향기가 없어지지 않자 조정에서는 ‘대지율사(大智律師)’라는 호를 내리고 탑을 ‘계광(戒光)’이라 이름 지어 시호를 하사하는 은혜를 주었다. 이 일은 유공(劉公)의 글에 언급되지 않았기에 비의 뒷면에 써둔다.“」라고 하였다.

 

만약 임종하는 사람의 집안 권속 중의 한 사람이라도 병든 사람을 위하여 큰 소리로 한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임종하는 사람은 오역죄를 제외한 나머지 업보는 모두 소멸 될 것입니다. 오역죄를 지어 무간지옥에 들어갈 죄가 비록 지극히 무거운 것이어서 억겁을 지나도 결국 벗어나지 못하지만, 이 사람이 임종할 때 다른 사람이 그를 위하여 염불을 해주면 오역죄도 점점 소멸할 것입니다. 하물며 중생들이 스스로 염불하는 것이겠습니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복덕을 얻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죄업도 소멸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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