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무주당 청화(淸華)큰스님/1. 청화 큰스님의 행화

3. 정중무상의 인성염불과 청화선사의 염불선

 

 

4.(차차석)정중무상의 인성염불과 청화선사의 염불선.hwp

 

정중무상의 인성염불과 청화선사의 염불선

 

                                                                   차차석(동방불교대학원대 불교문예학과)

 

-. 목차

1. 들어가는 말

2. 정중무상의 인성염불과 그 특징

3. 청화설 염불선의 개념과 특징

4. 정중무상과 무주당 청화의 사상적 상통점

5. 맺는 말

 

 

 

 

1. 들어가는 말

일반적으로 남종선의 계보는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있다. 보리달마에서 혜가 – 승찬 – 도신 – 홍인(601-674)으로 이어지며, 홍인 문하에서 대감혜능과 대통신수가 나와 각각 남종과 북종의 분기점이 된다. 그런데 5조 홍인의 문하에서 16명의 제자들이 출현했는데, 그중의 한명이 資州智詵(609-702)이다. 사천성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한 智詵 – 處寂(665-732 혹은 648-732) - 無相(684-762) - 無住(714-774)로 이어지는 법맥이 있다. 『역대법보기』에 의해 남종선의 정통으로 분류되고 있는 이들의 법맥 중에서 무상을 정중종이라 부르고, 무주를 보당종이라 부른다.

이들 중에서 정중무상은 사천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독특한 선풍을 떨치며 세인의 존경을 받았다. 무상의 속성은 김씨이며, 원래 신라의 왕족이었다. 출격장부의 의지가 있어서 출가하며, 중국에 들어가 당화상으로 불리던 처적의 지도를 받았다. 중국의 선종사서에서는 그를 김화상이라 불렀는데, 그런 점은 화엄종의 초조인 두순, 홍주종의 조사인 마조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3명 밖에 없는 일이었다. 승속이 그를 존경하고 친밀하게 느꼈다는 점을 표현하고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정중무상은 유명한 선사임에도 불구하고 引聲念佛이라는 독특한 수행법으로 유명하다. 인성염불이란 一聲, 즉 한 목소리로 호흡과 함께 길게 숨을 내쉬면서 소리와 함께 부처님을 念하는 실천행이며, 목소리에 집중하여 생각이 끊어지면 三句의 法要를 설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인성염불은 칭명염불과 달리 念을 sati 혹은 anusati(隨念)의 개념으로 활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인성염불 자체가 법요를 설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는 점에서 방편염불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유명한 3구의 설법을 통해 대중을 교화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본고는 정중무상의 인성염불과 그러한 과정을 통해 지향하고자 하는 선사상의 특징에 주목하고자 한다. 특히 인성염불이 칭명염불과 같이 타방정토설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고, 선의 본질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청화선사의 염불선과 상통할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탐색해 보고자 한다. 그런 점은 매우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두 가지의 난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은 시간적으로 일천 몇 백 년의 시차가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정중무상과 청화선사의 사상을 비교한다기 보다는 사상적 영향관계, 내지는 사상의 유사성 여부를 탐색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둘째는 공간적인 차이이다. 정중무상이 신라출신이라 하더라도 그가 주로 활동하거나 그의 사상 형성에 직간접의 영향을 미친 것은 중국, 그중에서도 사천지방이라는 점이다. 공간의 차이는 문화의 차이, 사고의 차이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다만 동북아의 문화적 공통, 즉 한자문화권이라는 점과 선종의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지만 근본적으로 커다란 두 가지의 문제를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자와 선종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사상적인 친연관계를 지닐 수 있다고 강변할 수 있다. 직접적인 관계성은 언급할 수 없겠지만 사상적, 혹은 사유체계상에서 두 선사의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말하자면 선종의 전개라는 유구한 역사 속에서 선사상이 지니는 공통의 DNA를 발견할 여지는 없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 점을 염두해 두고 두 사상가의 사상적 특징을 일별하고, 두 사상의 동이점을 점검해 보기로 한다.

 

 

2. 정중무상의 선사상과 인성염불

 

1) 정중무상의 사상적 특징

김무상의 선사상은 三句說法과 그 핵심인 無念으로 정의할 수 있다. 삼구설법의 핵심은 無憶, 無念, 莫忘인데, 『역대법보기』에 나오는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김화상은 매년 12월과 정월에 사부대중 백천만인과 함께 受緣할 때, 도량처를 嚴設하고 자리에 올라가 설법했는데, 먼저 引聲念佛하여 一氣의 생각이 다 소진하게 하고, 소리가 끊어지고 생각이 멈추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無憶하고 無念하며 莫妄하라. 無憶은 戒이며, 無念은 定이고, 莫妄은 지혜이다. 이 세 구절의 말은 바로 총지문이다.’”

 

라고 설했다. 이 중에서 無憶, 無念, 莫忘을 삼구설법이라 하며, 정중무상의 특징적인 선사상이라 평가한다. 그런데 이 삼구의 내용에 대해서는 좀 더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간단한 설명만으로는 그 내용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圭峰宗密(780-841)의 『圓覺經大疏鈔』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3구라고 하는 것은 무억, 무념, 막망이다. 마음으로 이미 지난 것을 追憶하게 하지 않고, 또한 미래의 영고성쇄 등의 일에 대해 앞서서 염려하지 않게 하며, 항상 이러한 지혜와 상응하여 혼미하지도 착각하지도 않도록 하는 것을 莫忘이라 한다. 혹은 바깥의 대상을 憶念하지 않고, 내면의 마음을 想念하지도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寄託함이 없는 것이다. 막망은 이상과 같다. 戒定慧란 차례로 3구에 배정한다. 비록 종지를 열어 연설한다고 하더라도 방편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종지가 귀결하는 바는 이 3구에 있다.”

 

이상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무억이란 이미 지나간 일을 추억하지 않는 것이다. 무념이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영고성쇄 등에 대해 앞서서 걱정하지 않는 것이다. 막망이란 항상 지혜와 상응하여 혼미하지도 착각하지도 않도록 하는 것이다. 혹은 바깥의 대상에도 끄달리지 않고, 내면의 생각에도 구애받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의탁함이 없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결국 지나간 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므로 집착할 이유가 없으며, 아직 오지 않은 일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걱정할 이유가 없다. 중요한 것은 현재 이 시점에서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 늘 깨어있는 마음을 지니고 사는 자세라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설명은 결국 반야사상의 3공사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즉 외경에 끄달리지 않는 것은 法空이고, 내면의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은 我空이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어떠한 것에도 의탁하지 않는다는 것은 空空이다. 적어도 반야사상에 입각해 정립된 사상이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역대법보기』의 「무상전」에서는 무상이 주장한 3구를 3학에 배대한 것은 달마대사의 가르침을 직접 계승한 것이요, 지선선사나 處寂(당화상)의 가르침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 특징을 밝히고 있다.

 

“이 三句의 말은 총지문이다.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戒門이고, 定門이며, 慧門이다. 無念이 바로 계정혜를 구족하는 것이다. 과거, 미래, 현재의 간지스 강의 모래와 같이 많은 부처님들도 모두 이 문으로 들어온다. 다른 문이란 있을 수 없다.”

 

이상의 인용문에서 말하고 있는 3학의 핵심은 念不起이다. 이미 무억, 무념, 막망의 三句를 계정혜 3학으로 해석한 바가 있는데, 3구와 3학을 동일하게 본다면 논리적으로 3구의 핵심은 念不起가 된다. 이때 念은 妄念이며, 집착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그런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한 단어로 말하면 無念이라 말한다. 따라서 결국 3학은 무념이란 단어에 포괄된다.

그렇다면 無念의 구체적인 개념은 무엇인가? 『역대법보기』의 「무상전」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오고 있는데, 그 내용에 의거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두 사람이 함께 다른 나라에 갈 때, 그 아버지는 책을 가지고 가르친 것과 같다. 한 사람은 책을 찾아 읽고 그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非法을 행하지 않았다. 한 사람은 책을 찾아 읽었지만 가르침에 의거하지 않고 여러 가지의 악행을 일삼았다. 일체중생이 무념에 의지한다면 이는 孝順하는 아들이다. 문자에 집착한다면 불효하는 아들이다. 또한 말하길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술에 취해 누워있는데, 그 어머니가 와서 부르며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자 하지만 그 아들은 술에 취해 혼미하기 때문에 그 어머니를 욕하는 것과 같다. 일체중생은 무명의 술에 취해 자신의 견성성불을 믿지 않는다. 또한 『기신론』에서 말하길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이 있다. 無念은 바로 심진여문이고 有念은 심생멸문이다.’”

이상의 인용문을 정리하면 첫째 孝順으로 비유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무념에 의지하느냐 아니면 문자에 집착하느냐이다. 이 경우 사용된 無念이란 단어의 개념은 선정에 의거한 수행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어떻게 수행하느냐 하는 방법론에 의거한 분류라 볼 수 있다. 둘째 無明이라는 술에 취해 자신의 견성성불을 믿지 않는다는 분석이다. 셋째 『기신론』을 인용해 무념을 심진여문, 유념을 심생멸문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 경우 무념은 망상과 분별을 탈각한 경지의 심리상태라 정의할 수 있다. 바로 이 경우의 무념은 염불기이며, 무념이 중요한 이유는 “念不起는 거울의 표면이 만상을 비출 수 있는 것과 같으며, 망념이 일어난다는 것은 鏡背가 만상을 照見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무념을 거울에 비유한 설법은 『화엄경』이나 『능가경』 등의 대승경전이나 달마의 『이입사행론』, 홍인의 『수심요론』, 『능가사자기』 등의 문헌에 응용되고 있다. 모두 반야사상을 토대로 전개되는 사상이다.

정중무상도 無念을 중시했는데, 결국 삼구설법의 핵심은 무념이란 점이다. 그리고 무념의 개념을 心眞如, 無明心의 탈각, 자신의 견성성불을 믿는 것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은 『유마경』이나 『대승기신론』에서 설하고 있는 無分別을 말하는 것이라 본다. 그리고 이러한 경론의 영향을 받아 무념을 종지로 삼았던 사람은 혜능의 제자인 하택신회이다. 그는 『돈오무생반야송』에서 ‘無念爲宗 無作爲本’을 강조한다. 물론 無念爲宗은 육조 혜능의 법어집인 『육조단경』에서도 핵심적인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면 사상의 영향관계를 고려해 본다면 정중무상이 하택신회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선후관계를 고려한다면 이러한 분석에 문제는 없다. 그러나 『역대법보기』라는 책은 보당종의 정통성을 현창하기 위해 편집된 책이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하택신회가 주장하는 무념설과 傳衣付法說을 의식하고, 그러한 주장을 교묘하게 응용하면서 보당종이 달마의 정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택의 무념설을 수용하면서도 무념을 중심에 두고 삼구설법과 삼학의 일치를 주장하는 독창적인 사상을 펼치게 되었다고 본다. 하택신회는 무념을 중심으로 三學一致를 주장하지만 그것은 空寂靈知라는 철학적 입장에서 설파된 것이다. 반면에 무상의 삼학일치설은 三句의 적극적인 실천에 주안점이 놓여 있다는 점이다. 필자 역시 그러한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2) 인성염불의 특징과 목적

『역대법보기』에 의하면 무상은 매년 12월과 정월에 사부대중 백천만인을 위해 수계의식을 거행했는데, 이때 높은 좌석에 올라가 설법을 하기에 앞서 引聲念佛을 했다고 한다. 인성염불이란 一氣의 숨을 모두 뱉게 하고 목소리가 끊어지고 생각이 사라지면 그 다음에 설법했다는 것이다. 대강의 내용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다만 이때 인성염불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다만 생각을 집중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즉 목소리를 끌어들여서 外緣을 끊고, 소란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인데, 법을 설하는 것이 끝나면 息念坐禪을 시켰다고 한다. 무상의 수계의식도 당시 일반적으로 시행되어 오던 전통적인 방식에 의거한 것이라 간주되는데, 다만 인성염불을 활용한 행화의 방법이 매우 독창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전례는 북종선이나 남종선 계열의 초기 선사들의 행법에서 쉽게 볼 수 있다.

日本의 불교학자 宇井伯壽는 무상이 인성염불로 도속을 교화했기 때문에 염불선 계열로 분류하기도 한다. 중국의 杜繼文 등은 염불을 선정에 들어가는 문으로 간주하는 것은 동산종의 계열에선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보당종 계열의 특색으로 본다. 그러나 우두종 계열의 法持(635-702)는 觀想念佛을 수행했지만 무상의 인성염불은 그가 제시한 三句의 설법과 직결되어 無念에 이르는 구체적인 실천법이라는 점에서 實相念佛 내지 無相念佛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무상의 인성염불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인가에 대해서는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다. 다만 종밀의 『원각경대소초』권3에서 소개하고 있는 南山念佛門禪宗을 통해 그 일단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 문파도 사천성을 중심으로 전파되었는데, 그런 점에서 정중무상과 시기적으로나 지역적으로 중첩된다. 여하튼 이들은 일자염불의 실천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원각경대소초』에 의하면 그들의 행법에 대한 소개는 다음과 같다.

 

“傳香이라는 것은, 처음 대중을 모아 하는 예참 등의 의식은 김화상 문하와 같다. 법을 수여하고자 할 때는 傳香(향을 전함)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의 신표로 삼는다. 즉 화상이 향을 손으로 제자에게 건네주면 제자는 다시 그것을 화상에게 올리며, 또 화상은 다시 제자에게 돌려주고, 이렇게 3번 반복한다. 모인 사람들도 모두 이렇게 한다. 存佛이란 것은, 바로 법을 수여하고자 할 때 먼저 법문의 도리와 수행의 취지를 설명하고 그런 뒤에 一字念佛하게 한다. 처음에 목소리를 길게 뽑으며 생각에 의지하지만 뒤에 점차 목소리를 없애서 희미한 소리나 소리가 없어지면 부처님을 마음 속 깊이 念한다. 意念이 아직 거칠 것 같으면 또 다시 반복하여 부처를 마음에 두고 念한다. 생각 생각마다 부처를 念想한다면 부처는 항상 마음속에 있는 것이니 念想 없이 어떻게 得道할 수 있겠는가?”

 

이상의 인용문을 살펴보면 남산염불종에서는 관상염불을 통해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다만 일자염불이나 인성염불이나 방법에 있어서는 유사했다는 점이다. 생각을 집중해 부처를 觀想했다는 것은 인성염불을 통해 無念에 들어가고자 했던 무상의 의도와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무상이 무념의 상태에 들어가고자 했다는 것은 실상염불 내지 무상염불에 속한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중 無相의 대중교화를 알려주는 것으로 『無相五更轉』이 있다. 五更轉이란 俗講 등에서 교화의 수단으로 활용했던 것인데, 화택신회의 「남종정사오경전」, 「화택화상오경전」, 그리고 「유마오경전」, 「달마오경전」 등이 있다. 무상의 선사상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무상오경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핵심 단어는 淺, 深, 半, 遷, 催이다.

 

一更 淺 衆妄諸緣何所遺 모든 망상으로 일어난 일체의 인연은 어디에 두었는가?

但依正觀且忘念 다만 정관에 의지하고 또한 망념을 잊는다면

念念眞如方可顯 생각 생각마다 바야흐로 진여가 나타나리라.

二更 深 菩提妙理誓探尋 깨달음의 미묘한 이치를 맹세코 찾으리니

曠徹淸虛無去住 분명하고도 淸虛하여 가고 머뭄이 없으니

證得如如平等心 여여한 평등심을 증득하세.

三更 半 宿昔塵勞從此斷 지난날의 모든 塵勞 이제부터 끊으니

先除過去未來因 먼저 과거와 미래의 원인을 제거하고

伐喩成規超彼岸 가르침에 의지하여 피안으로 가세.

四更 遷 定慧雙行出蓋纏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아 번뇌를 벗어나고

了見色空圓淨體 물질이 공하고 원만한 청정한 본체를 了見하니

澄如戒月瑩晴天 맑고 맑기는 계율의 달이 맑은 하늘에서 빛나는 것과 같네.

五更 催 佛日嶷然妙境界 부처의 태양이 높으니 미묘한 경계로다.

過透四禪空寂處 4선의 공적한 곳을 통과하니

相應一念見如來 일념에 상응하여 여래는 만나는 구나.

 

이상 오경전의 내용은 얕은 염불에서 시작하여 깊은 염불로 넘어가며, 얕지도 깊지도 않은 중간의 염불인 삼경을 거쳐서, 힘차게 옮기는 염불인 사경으로 가며, 빠른 재촉의 염불로 해탈과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인성염불의 실천과 맥락을 함께 하는 것으로 본다.

 

 

3. 청화설 염불선의 개념과 특징

한국의 불교계에서 당대를 대표하는 선객 중의 한 분이었던 무주당 청화선사는 염불선을 주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염불선이라고 하면 염불과 선의 결합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그러한 전통은 송대 이후 동북아 불교권에서 일반화 되어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고려말기에 이미 선정일치의 선풍이 유입된다. 조선시대의 걸승들이 평생을 간화선에 매진하면서도 말년에는 염불과 참선을 병행한 것도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청화의 염불선은 단순히 칭명염불과 참선의 병행이나 칭명염불을 통해 일행삼매에 들어가는 수행의 방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念佛이란 단어에서 念을 관조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사상적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단순한 칭명염불과 선적 수행의 결합이 아니라 참선의 본질을 살리면서도 대중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적 고민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그런 점이 선정일여의 사상적 흐름 속에서 독특한 수행의 세계를 개척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점이다. 그런 점을 전제하고 청화선사가 주장하는 염불선의 개념은 무엇이며, 그 특징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선에 대한 청화선사의 입장

염불선의 개념을 정리하기 전에 먼저 선의 종류에 대한 청화선사의 입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을 전반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 선결요인이기 때문이다. 청화선사는 선의 종류를 다섯 가지로 구분해 이해하고 있다. 외도선, 범부선, 소승선, 대승선, 최상승선이 그것이다.

물론 이상의 다섯 가지 중에서 가장 주목하는 것은 최상승선이며, 최상승선 안에 여래선과 조사선이 있다고 본다. 이 둘 중에서 여래선은 부처님의 경전에 의지하는 것이요, 조사선은 불립문자 교외별전의 格外의 도리를 보다 철저하게 탐구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편의적인 것이며, 본래는 구분할 필요가 없이 상통하는 것이라 이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최상승선이란 본래 부처로서 일체의 無漏功德이 원만히 구족함을 信解하고 닦는 선이란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즉 최상승선이 될 때는 모든 공덕을 다 원만히 갖추고 있다는 점을 믿는 것이며, 나아가 아공과 법공을 믿고 功德叢林이나 現法樂住가 모두 다 갖추어져 있다고 믿는 것이라 말한다.

본래 부처로서 일체의 무루공덕을 구족하고 있다고 신해한다는 것은 본래성불의 자리를 믿는 것이라 재차 강조한다. 참선하는 사람들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일체의 번뇌와 때 묻지 않은 모든 공덕을 원만히 갖추고 있다”고 믿을 때 안심법문이 된다고 말한다. 본래 부처임을 믿어야 한다는 것은 깨달음의 당처는 본래 수행과 무관하게 본래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며, 수행을 통해 그것을 본래 그대로 드러내는 것일 뿐이라는 중국 선종의 핵심을 청화선사의 독자적인 안목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청정한 일심은 분별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는 점에 핵심이 있다. 즉 현상은 망상과 분별의 산물이다. 따라서 마조는 도는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고 다만 오염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데, 그것은 망상 때문이라 본다. 따라서 마음과 경계를 요달하면 망상이 생기지 않으며, 망상이 생기지 않으면 그것이 무생법인이라 말한다. 이러한 설법의 전통은 이미 그 연원이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동시에 청화선사의 가풍이 남종선의 큰 지평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상사 차원에서 본다면 본래의 부처란 존재 일반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생명의 가치이며, 불교적인 용어로는 불성이라 이해할 수 있다. 불성은 본래 그대로 존재하지만 그것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지 못한 사람이 그것의 존재를 믿을 수 있도록 하는데에서 최상승선의 의미를 찾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청화선사는 최상승선만이 문제라고 강조한다. 최상승선 안에 모든 禪法이 포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都序』나 『보조국사어록』에도 그 전거가 나온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풀이하고 있다. 즉

 

若頓悟自心 本來淸淨 元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此心卽佛 畢竟無異. 依此而修者 是最上乘禪. 亦名如來淸淨禪 亦名一行三昧 亦名眞如三昧. 此是一切三昧根本

 

이라는 문장이다. 우리들의 본질은 본래 청정하여 번뇌가 없으며, 무루지혜의 성품을 본래 스스로 구족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무루지혜의 성품이 부처이며,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신해하며 수행하면 그것이 최상승선이요 청정여래선이며, 일행삼매요 진여삼매라는 것이다.

또한 선의 방법을 청화선사는 세 가지로 구분한다. 공안선, 묵조선, 염불선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주류가 된 것은 주지하다시피 화두선(공안선)이다. 하지만 청화선사는 염불선을 중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염불선에 대한 입장은 차후에 살펴보기로 하고, 좀 더 선에 대한 청화선사의 입장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앞에서 선의 종류를 열거하고 그중에서 최상승선이 가장 중요하며, 참선하는 수행자들이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그 최상승선에 염불선도 포함이 된다는 점이다. 결국 이러한 선사의 입장은 조사선이나 여래선과 함께 선사가 강조하고자 하는 염불선이 수행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수행법임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염불선도 역시 원래 최상승선의 도리입니다. 그러나 극락세계가 저 십만억 국토를 넘어서 있다. 또는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 우리 마음 밖에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참다운 염불도 못되고, 염불선도 못됩니다. 부처님께서 극락세계가 밖에 있다고 말씀 하셨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우리 마음이나 부처가 내 밖에 있어서 애쓰고 생각하면은 우리를 돕는 가피를 주신다고 생각하셨을 리는 만무합니다.”

 

이상의 인용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염불선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타방정토를 중시하는 염불선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외재적인 어떤 초월자에 의지하여 참선하는 것을 염불선이라 규정하는 것에 적극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다 본질에 천착하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화두도 무자나 이 뭣고나 또는 板齒生毛나 모두가 다 일체 有漏的인 상대 유위법을 떠나서 오직 佛心만을 잡으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공안이나 염불이나 모두 다 같은 것입니다.”라 말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공안이나 염불이나 모두 수단적인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청화선사의 안목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오히려 묵조선이니 공안선이니 따지는 것 자체가 분별이며, 본질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배제하기 어렵게 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히고 있다.

 

“고인들 말씀에 무슨 공부 방법이든 ‘得正하면 可也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수행법에 있어서 주문을 외우든 화두를 참구하든 묵조하든 염불하든 득정하면 가야라, 바른 도리 바른 원리를 얻으면 좋다는 말입니다. 꼭 염불해야만 좋고 꼭 묵조해야만 좋은 것이 아니라 어느 행법을 취하든지 간에 그 본분사, 본래면목 자리, 진여불성 자리를 안 놓치는 것을 得正이라 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바른 도리를 얻지 못하면 꼭 화두만 든다고 선이 되는 것도 아닌 것이고, 또는 꼭 묵조만 한다고 선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요는 본체를 안 여윈, 본체에 걸맞는 공부가 참다운 공부요 참다운 선입니다.”

 

인용문을 통해서도 익히 알 수 있듯이 형식이 본질을 지배할 수 없으며, 오히려 형식은 본질을 체득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오히려 유연해야 한다는 선사의 자유스러운 기풍을 읽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선사가 강조하는 염불선이란 용어도 불필요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불선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면 아마도 그것은 소통과 誘導라는 현실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종교인의 고뇌가 내면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된다. 필자가 그렇게 미루어 짐작하는 이유는 선사의 다음과 같은 설법 때문이다. 즉

 

“우리 불성은 원래 원만무결한 것이지만 중생은 宿業 따라서 그렇지 않기 때문에 정서나 의지로 참구하는 쪽 보다 화두를 疑團으로 參究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고, 확신을 위주하고 의단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화두 없이 默照하는 것도 좋겠지요. 어느 쪽으로 가나 다 성불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겠지요. 자기 근기에 맞으면 더 빠르고 쉬울 것입니다. 또는 정서가 수승한 사람들은 이것저것 별로 따질 필요가 없이 다만 근본 성품인 생명의 실상을 인격적으로 그리워하는 欽慕心을 냅니다. 원래 부처인지라 어떤 누구나가 다 부처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누구나 다 한 결같이 염불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첫째 불성은 원만무결하지만 중생의 숙업은 차이가 있다. 둘째 그렇지만 정서가 수승한 사람들은 생명의 실상을 인격적으로 음모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셋째 부처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누구나 있는데 그것이 염불의 마음이다. 세 가지로 정리했지만 첫째와 둘째의 내용은 일반적인 내용이라 특별한 것이 없다. 그렇지만 세 번째 생명의 실상을 부처로 정의하고, 누구나 그 부처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염불하는 마음이라 정의한 점이다. 이 경우 염불은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회귀심이거나 본래의 부처를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렇게 본다면 타방정토설에 입각한 염불이 아니며, 단순히 유심정토설에 입각한 염불도 아니다. 회귀와 구현이라는 근원성과 진취성을 동시에 표출하고 있다고 읽을 수 있다. 그런 점이 염불선을 주장하는 청화선사의 독특한 가풍이 아닌가 인식된다.

 

2) 염불선의 개념

최상승선과 염불선을 동일하게 간주하는 청화선사의 입장은 혹자들의 의혹어린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염불선이 칭명염불을 통해 일행삼매에 들어가거나 혹은 타방정토설에 입각한 염불과 선의 융합으로 생각하는, 선입견이나 오해에 닫힌 사람들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선사가 강조하고자 하는 염불선은 오히려 유심정토설에 가까우면서도 본질로의 회귀와 본분사의 구현이라는 진취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그런 점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서 선사가 강조하는 염불선의 개념을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선사는 염불이란 용어가 초기불교 이래 전승되어 오는 것으로 본다. 그러면서 “우리가 부처이기 때문에, 또 부처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염불은 따지고 보면 내가 참 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가 부처를 생각하기 때문에 역시 禪이 됩니다.”라 말한다. 이 경우 염불에서 念은 anussati(隨念)의 의미에 가까우며, 결국 이 때 사용되는 念은 붓다의 모습이나 성질 또는 덕성을 間斷없이 念念相續하며 照見하는 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청화선사는 참나 혹은 본분사, 진여불성을 조견하는 것으로 念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라 생각된다.

책의 성격에 대해서는 검토가 있어야 하겠지만 청화대선사의 법어집인 『실상염불선』이란 책에 의하면 선사가 염불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는 “念佛은 本來是佛이니 自性淸淨心을 念함을 의미함. 일체만유가 부처요, 둘이 아닌 不二佛이기 때문에 언제나 부처를 여의지 않는 不離佛이다.”라 정의하면서, 부처를 마음 밖에다 두고 (염불)할 때는 방편염불에 그치고 만다고 본다. 결국 염불이라 할 때 그 대상이 되는 부처는 다름 아닌 자성청정심이라 규정한다. 그런데 그 부처는 모든 존재의 바탕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존재 그 자체는 부처 아닌 것이 없으며, 주객을 넘어 너나 없는 부처의 세계를 연출한다. 따라서 그 부처는 나와 둘이 아니며, 나를 벗어나 별도의 세계에 존재할 수 없다고 인식한다.

그런 점은 염불의 의의를 밝히는 설법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염불이라 할 때의 念이란, 사람 사람마다 마음에 나타나 있는 생각을 염이라 하고, 佛은 사람 사람마다 갖추고 있는 깨달은 근본 성품을 말합니다.”라 설한다. 여기서 청화선사가 말하고자 하는 염불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읽을 수 있다. 그것은 깨달음의 근본성품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때 깨달음의 근본성품이란 覺性이다. 필자는 이러한 각성을 가능성과 희망으로 해석하고 싶은데, 그것은 각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 깨달음의 근본 성품을 구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위대하다는 것은 각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그 각성을 인식하고 개현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선사는 염불하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염불은 부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고, 부처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를 떠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업장 때문에 자꾸만 떠나 버리니까 우리가 떠나지 않기 위해서, 내가 부처임을 재확인하기 위해서 염불하는 것입니다.” 본래는 중생 그대로가 부처의 화현이지만, 그래서 부처와 내가 둘이 될 수 없는 것이지만 업장 때문에 둘로 구분하려고 하거나 부처, 즉 나의 본질을 망각하고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염불을 통해 우리 각자의 본질이 부처란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요, 그 부처와 내가 분리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선사의 설법은 수행의 목적이나 교육의 본질적 의미와 상통한다. 이미 완성태로 내포하고 있는 중생이지만 각각의 업력에 따라 망각의 바다를 유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헤엄질은 자칫 본질의 세계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여기서 멀어진다는 것은 바로 실존적 고해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성보다는 야수성에 의존해 사는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선사는 이상과 같은 염불의 의미를 『대지도론』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다. 즉 “念이란 사람마다 現前하는 한 생각이다. 佛이란 사람들의 本覺의 眞性이다. 현전의 한 생각으로 본각의 진성을 깨달으면, 바로 이것을 上根人의 念佛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부처와 둘이 아니며, 부처와 不離하는 실천행이다.”란 구절이다. 필자는 이상의 구절을 『대지도론』에서 찾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의미상 상통하는 내용은 『대지도론』 도처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예컨대 “무엇을 염불이라 합니까? 대답해 말하길 ‘수행자가 일심으로 염불하면 여실한 지혜를 얻으며, 대자대비를 성취한다. 때문에 착오, 추세, 다소, 심천이 없다고 말하는데 모두 진실하기 때문에 다타아가탁이라 한다.’”고 말한다. 분별하는 마음을 벗어나 주객불이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며, 따라서 대자대비의 종교적 실천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질의 체득과 그 작용으로서의 실천을 중시하는 경향은 청화선사가 염불을 중시하는 이유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선사는 염불의 방법에 네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칭명염불, 觀像염불, 觀想염불, 實相염불이다. 이중에서 선사가 말하는 염불선과 직결되어 있는 것은 실상염불이다. 실상염불이란 “현상적인 假有나 허무에 집착하는 無를 다 떠나서 중도실상의 진여불성 자리, 이른바 法身 자리를 생각하는 염불인 것입니다. 따라서 진여불성 자리를 생각하는 실상염불이 참다운 본질적인 염불입니다. 이른바 법의 실상, 내 인간 생명의 실상, 우주 생명의 실상, 이것을 우리가 관찰하는 것입니다. 관찰은 뚫어지게 안보이니까 볼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생각만 해도 觀이라는 뜻이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라 개념을 규정하고 있다.

청화선사가 염불선과 결부시켜 주목하는 것은 실상염불이다. 선사는 다음과 같이 그 상관성에 대해 언급한다. “‘내 몸의 본질도 역시 부처고, 산이나 내나 천지 우주가 모두가 다 부처 아님이 없다. 부처뿐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염불하면, 이것이 실상염불이 되는 것이요, 또한 동시에 염불선이 됩니다.” 염불의 방법이 다양하지만 그 속성이 다르다고 인식한다. 즉 본질을 추구하는 염불, 즉 실상염불이 바로 선사가 중시하는 염불선 그 자체라 본다. 따라서 거듭 동일한 이치를 역설한다. 즉 “실상염불은 모든 상을 떠나서 이름도 떠나서 부처님의 진리, 중도실상의 이른바 우주에 두루해 있는 부처님의 참다운 생명의 실상, 그 자리를 생각하고 하는 염불입니다. 따라서 실상염불이 되면 그때는 바로 염불참선이 됩니다. 실상염불은 염불선과 둘이 아닙니다. 실상염불은 부처님의 법신이 무량무변하고 萬功德을 갖춘 중도실상의 원리를 관조하는 것입니다.”라 강조한다. 실상염불을 떠나 염불선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청화선사의 염불선은 남종선과 마찬가지로 반야사상에 입각해 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선사 자신도 설법 중에 많은 반야사상의 경론을 인용하고 있다.

또한 중도실상의 본질을 참구하는 것이 염불선의 핵심이라는 점이며, 그런 점을 남종선의 4조 도신선사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을 인용해 설득하고자 한다. 선사는 “염불이 바로 念心이며, 求心이 바로 求佛이다. 왜냐하면 식에는 형체가 없고 부처에는 相貌가 없다. 만일 이러한 도리를 알 것 같으면 바로 安心이다. 항상 염불을 기억하되 반연이 일어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사라져 형상이 없으며, 평등하여 불이한 것이다.”란 구절이 그것이다. 이때의 염불은 마음의 본질을 관조하는 것이거나 實相을 관조한다는 점에서 청화선사가 주장하는 염불과 상통한다. 그런데 마음의 본질이나 실상을 관조하여 안심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보는 도신선사의 주장은 일체의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조금도 분별하거나 思念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대품반야경』에서 강조하는 “無所念을 염불이라 이름한다”고 할 때의 염불이며, 이 경우 염불하는 마음은 無所念이다. 여기서 念은 분별하는 망상을 의미하며, 철저하게 공 무집착의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이미 4조 도신 이래 청화선사가 강조하는 염불선과 상통하는 염불의 개념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도신의 염불은 일심을 통찰하는 것이란 표현상의 문제점을 넘어서, 철저하게 泯然無相의 입장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청화선사와 차이를 느끼게 한다. 그것은 일심을 구현 내지 실현하기 위한 보다 구체적인 실천 방법이 미약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신선사의 선사상에서 염불선의 사상적 근원을 찾고자 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청화선사의 사상적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4. 정중무상과 무주당 청화의 사상적 상통점

이상에서 정중무상과 무주당 청화의 선사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시대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두 사상가의 활동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두 사상가를 평면적인 잣대로 비교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할 뿐만 아니라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떠한 종교사상이라도 문화적 자연적 환경을 배제하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상가의 공통분모를 찾아낼 방법은 없는 것인가? 시공의 차이를 넘어 두 사상가가 공유하는 사상적인 DNA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결책으로 수행의 방법에 있어서 절대적 영향을 미친 것이 무엇이며, 그런 점을 두 사상가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에 주목했다. 예컨대 무엇보다 두 사상가는 염불선이란 단어를 활용하고 있거나 혹은 염불선이란 단어와 적어도 무관할 수 없다면, 염불선을 이해하고 완성하기 위한 수행의 방법 속에서 무엇인가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 따라서 필자는 매우 거칠지만 몇 가지 시각에서 두 사상가의 동이점을 분석해 보려고 한다.

첫째 두 사상가는 반야사상에 입각해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수립하고 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정중무상은 『유마경』, 『대승기신론』, 『대품반야경』 등의 사상적 영향을 받고 있다. 특히 4권 『능가경』의 영향이 『금강경』이나 『유마경』의 사상적 영향으로 전환되는 것이 남종선이라 본다면 후대에 전개되는 선사상 역시 근본은 반야사상이라 말할 수 있다. 특히 무상의 사상 속에 하택신회의 영향이 내재하고 있다는 점은 전술한 바가 있는데, 그런 점을 감안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동시에 청화스님 역시 반야사상의 영향 속에서 자신의 사상체계를 수립하고 있다. 실상염불이나 염불선의 개념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철저하게 무집착 공의 입장에 서 있다. 그러면서도 대중성을 담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염불선이란 용어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특히 청화선사는 『대지도론』을 즐겨 인용하고 있는데, 『대지도론』에서 사용되고 있는 염불의 개념 역시 반야지혜의 입장에서 佛身이나 功德의 無自性 空을 관조하는 것이 참다운 염불이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청화선사의 염불선 개념과 상통한다고 본다.

그런데 두 사상가는 모두 선사상의 바탕 위에서 각자의 사상체계를 수립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반야사상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인데, 중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동북아의 불교사상은 그 핵심에 반야사상이 자리잡고 있다. 남종선의 사상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점은 선을 南北으로 나누어서 南宗이라 할 때, 남종의 개념과도 직결되어 있다. 즉 남종이라 할 때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런 의문에 대해 타이완에서 활동한 印順法師는 몇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먼저 남인도에서 전래된 종지를 남종이라 보는 것인데, 여기에는 『능가경』과 반야경론이 포함된다. 또한 중국 남방의 불교학을 지칭하는데 강남 지방에서 삼론학에 의거해 성립된 종파불교를 의미한다. 이 경우 화엄종을 제외한 삼론종, 천태종, 선종은 남종에 속한다. 그런데 이러한 남종의 정신은 다름 아닌 실용성을 추구하는 것이라 본다. 즉 윤리나 도덕, 관념 등 예로부터 전래되어 오는 제도의 구속을 받지 않고, 당시의 상황에 적합한 실용성을 추구하는 정신이 내재되어 있는데, 그러한 것은 반야사상과 중국전통 사상인 筌蹄의 논리가 융합된 결과로 본다. 정중무상이 인성염불에 대해 설명하면서 달마 이래의 전승이며, 지선선사나 당화상의 가르침이 아니라 한 것은 法古創新의 남종정신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청화선사가 전래의 선사상을 수용하면서도 시대정신에 부응해 염불선을 주창한 것 역시 법고창신의 정신을 잘 발휘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두 사상가는 충실한 남종의 정신적 계승자라는 공통분모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 살펴보았듯 청화선사도 4조 도신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의 설법을 많이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능가사자기』에 의하면 도신 자신이 언급하고 있는 염불의 개념이 『대품반야경』에 의거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無所念이란 念佛을 말하는 것이다. 무엇을 무소념이라 하는가? 바로 염불하는 마음을 무소념이라 한다. 마음을 떠나 별도의 부처가 있을 수 없다. 부처를 떠나 별도의 마음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청화선사 역시 이러한 도신의 설법을 응용해 중생 그대로가 부처요, 생명의 본질이란 설법을 도처에서 설하고 있다. 그런 점은 역시 청화선사가 반야사상을 기반으로 남종선을 계승하되, 시대상황에 맞추어 적절하게 변형한 것으로 보아야만 할 것이다.

둘째 선종의 발생지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의 불교사에 입각해 본다면 염불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葛兆光은 5조 홍인시대에 수행의 방법과 사상이란 시각에서 보면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念佛과 守心이라 말한다. 그리고 염불이란 염불에 專心하는 방법으로 마음의 초점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그러나 강조광의 주장은 도신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에서 이미 염불이란 단어를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역기서 중요한 것은 염불선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는 점이다.

염불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가 있다. 칭명염불, 觀像염불, 觀想염불, 실상염불이다. 이들 중에서 觀像염불이란 부처님의 존상을 관념하는 것이며, 觀想염불은 부처님의 상호와 공덕을 관념하는 염불이고, 실상염불은 부처님의 법신이나 理體를 관조하는 염불이다. 특히 觀想염불을 定業염불이라 하고, 칭명염불을 散業염불이라 한다. 또한 정업염불과 산업염불은 有相念佛이라 하고, 實相念佛은 無相念佛이라 한다. 칭명염불을 산업염불이라 하고, 나머지는 定業염불이라 할 때, 정업염불에서 定은 선정에 속하기 때문에 일종의 염불선이라 본다. 정업염불을 염불선이라 규정한다면 결국 이 경우의 念은 관조의 의미가 된다. 이상의 분석이 틀리지 않았다면 정중무상과 청화선사는 공히 염불선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 중에서 청화는 실상염불의 염불선을 강조한다. 무상은 인성염불에 의거해 삼구설법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역시 실상염불의 염불선에 포함된다. 차이가 있다면 정중무상은 보다 철저하게 무집착 공의 반야사상에 입각해 절대적인 無念의 경지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차이는 사상의 발전과 시대적인 환경의 변화라는 현실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 말할 수 있다.

셋째 그런데 청화선사는 실상염불에 대해 설명하면서 “念佛은 本來是佛이니 自性淸淨心을 念함을 의미함. 일체만유가 부처요, 둘이 아닌 不二佛이기 때문에 언제나 부처를 여의지 않는 不離佛이다.”고 말하는데, 필자는 여기서 不離佛이란 용어에 주목하고자 한다. 내가 부처와 분리되어 있지 않은 동일체라는 인식은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정립,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와 윤리의식을 고취할 수 있다. 그런 점은 청화선사가 염불선을 통해 불교라는 종교의 사회적 기능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고뇌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무상선사가 無念을 심진여문으로 보고, 각자의 현재의식을 중시하는 것과 상통한다. ‘지나간 것은 이미 지나가버렸으니까 억념할 이유가 없으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염려할 이유가 없으니, 오직 이러한 지혜에 상응해 각자의 현실과 현재의 서 있는 자리를 살필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은 청화의 실상염불에서 ‘자신은 언제나 不離佛’이라 생각하는 것이 바로 염불이라 말하는 것과 상통한다.

넷째 정중무상의 인성염불은 망상을 끊고 생각을 모우기 위한 방편으로 소리를 끌어올리는 引聲의 방법을 겸용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가 말하는 염불은 무억, 무념, 막망의 삼구설법에 있다. 그렇다면 그때 관조의 대상이 되는 佛이란 무념이며, 念不起이다. 심진여문을 무념이라 말했지만 거기에는 법신이니 불성이니 하는 관념조차 들어갈 여지를 주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무념이 될 수 없다. 또한 문자에 집착하는 것을 有念이라 보고 있다는 점에서 무념은 철저한 관조이며, 논리를 초월해 직관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 그러나 청화선사는 引聲이란 방법을 활용하지 않는다. 남종의 돈오선에 의거해 본질을 관조하라고 말할 뿐이다. 이때 관조의 대상인 佛은 법신이나 불성, 혹은 생명의 본질 등으로 이해하는데, 그런 점은 선사상의 경험과 사상적 발전의 결과를 충실하게 활용한 결과라 말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念佛에서 念은 관조라는 의미로 사용하거나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칭명염불에서 사용되는 염불의 개념과 그 궤적을 달리하고 있다.

 

5. 맺는 말

이상에서 정중무상과 청화선사의 사상적 공통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다. 두 사상의 특징을 우선적으로 고찰하고, 사상적 친연성이나 공통점을 찾아보고자 했던 것은 청화선사의 교화의 폭이 그만큼 크다는 점을 알리고자 하는 의도도 없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러한 점 보다는 염불선이라 단어가 지니는 세간의 오해를 해소해야 한다는 점 역시 내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간화선의 전통이 강한 한국에서, 염불선이란 도구에 의지해 대중교화에 헌신했던 청화선사를 간화선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단이라 평가할 수도 있었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본질은 외면한 채, 피상적인 표피만 보고 청화선사의 본래면목을 폄하하거나 곡해했다. 그런데 그러한 곡해는 청화선사의 선법이 간화선의 정통에서 벗어났다거나 혹은 간화선 보다 하열한 선법을 활용한 것이라 공격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 오해나 곡해를 불식시키는 것은 후학들의 임무가 아닐 수 없다.

청화선사의 본래면목을 확연하게 살펴보고, 그러면서도 그 위대성을 세상에 알리는 길은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청화선사가 주창한 염불선의 진면목을 분명하게 밝히고, 그러한 사상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어디까지 그 연원을 소급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염불선이라 단어도 청화선사가 처음 사용한 단어가 아니며, 이미 역대의 유명한 조사들이 활용한 단어임을 밝혀줄 수 있다면 오해의 깊이나 폭은 점차 엷어지거나 좁아져서 곡학아세의 어리석음을 벗어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정중무상과 무주당 청화선사의 사상적 특징과 그 동이점을 고찰하면서 이상에서 밝힌 연구의 목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면적으로 보면 정중무상과 청화선사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무의미하거나 무모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두 불교사상가의 비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은 청화선사의 염불선이 선정일여의 입장에서 보는 염불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통은 이미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다. 그리고 두 분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대중을 교화하는 일이나 수행의 방편으로 염불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사상적인 친연성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이미 살펴보았듯이 염불선의 핵심은 실상염불이며, 이 경우의 염불은 관조의 의미라는 점이다. 관조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간화선에서 화두를 본다는 의미의 看과 의미상 상통한다. 현대의 백화문에서도 책을 읽는다고 할 때 看書라고 하기 보다는 念書라는 단어가 보다 보편적이다. 念書에서 念이란 글자는 ‘읽는다’는 의미로 해석하지만 역시 책의 깊은 내용을 觀照한다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보편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청화스님이 사용한 염불선은 그런 점에서 본다면 칭명염불처럼 부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부처의 공덕이나 부처의 본질을 관조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따라서 언어가 초래하는 오해나 이미지를 가지고 선사를 평가해선 안된다고 본다.

정중무상도 불세출의 선사이며, 그 덕화는 티베트에까지 미쳤다고 한다. 청화선사는 굴곡진 한국의 현대사에서 폭넓은 교화를 실천하신 위대한 선사이다. 그러나 관조를 통해 본질을 통찰하고자 했던 염불선의 핵심을 이해하고 나면 청화선사는 남종선의 충실한 계승자 중의 한분이란 점을 알 수 있게 된다. 더하여 전통에 사로잡히지 않고,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교화하고자 했던 선사의 자비심을 느끼게 된다. 만일 두 사상가의 사상이 동일하다면 청화선사는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정중무상과 같은 사상적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시대상황에 맞추어 그것을 재해석하고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평가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법고창신이란 바로 이런 경우에 적합한 단어라 생각된다. 그리고 불교라는 종교가 존재하는 한 이런 정신적 계승과 작업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참고문헌

『대지도론』(대정장25)

『전등록』(대정장51)

『역대법보기』(대정장51)

『능가사자기』(대정장85)

『원각경대소초』(卍속장경14)

이영자 역, 『선종사상사』, 문학생활사, 1987.

정성본, 『중국선종의 성립사 연구』, 민족사, 1991

『신라선종의 연구』, 민족사, 1995.

변인석, 『정중무상대사』, 한국학술정보, 2009.

본정 편, 『실상염불선』, 광륜출판사, 2013.

성륜불서간행회 편, 『원통불법의 요체』, 성륜사, 1993.

鈴木大拙, 『禪宗史硏究』권2, 岩波書店, 昭和26.

宇井伯壽, 『禪宗史硏究』권4, 岩波書店, 昭和41.

印順, 『中國禪宗史』, 중국 江西人民出版社, 1999.

葛兆光, 『中國禪宗思想史』, 중국 北京大學出版社, 1995.

楊曾文, 『당오대선종사』, 북경 중국사회과학출판사, 1999.

杜繼文, 魏道儒 공저, 『中國禪宗通史』, 중국 江西人民出版社, 1996.

조준호, 「초기 부파불교에 나타난 염불과 선」, 2014, 청화사상연구회 청화사상학술세미나 자료집

박경준, 「대지도론에 나타난 대승의 염불과 선」, 『인도철학』제42집, 2015.

 

 

4.(차차석)정중무상의 인성염불과 청화선사의 염불선.hwp
0.05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