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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주당 청화(淸華)큰스님/1. 청화 큰스님의 행화

2. 2015년 청화사상학술세미나. 염불선과 선정계위

 

3.(조준호교수)15년 염불선과 선정계위.hwp

 

염불선과 선정계위

 

조준호(고려대 철학연구소)

 

목 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청화선사와 염불선정계위

Ⅲ. 초기와 부파불교의 염불선정계위

1. 초기경전의 염불선정계위

2. 부파불교의 염불선정계위

3. 심사(尋伺 : vitakka-vicārā)와 선정계위의 문제

4. 심사와 염불선정의 문제

Ⅳ. 마치는 말

 

 

Ⅰ. 들어가는 말

 

근본적인 의미에서 이제 염불을 선으로 보아야함은 경론을 통해 증명되었다. 이는 초기불교와 인도불교의 전반 그리고 현재의 여러 불교전통에서 보더라도 지극히 타당하다. 그렇다하더라도 현재까지 대부분의 염불 연구자에 있어 염불과 선정계위에 대한 논의는 생소하게 받아들인다. 마찬가지로 염불수행에 대한 선행연구에 있어서도 선정계위와는 상관없는 정토사상과 관련한 정토학 차원이 대부분이다. 특히 동아시아 정토종에 관한 연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더 나아가 염불(선정)수행을 정토종이나 대승을 넘어 초기불교로 귀결시킨 연구는 본 논자에 의해 아주 최근에 이루어진 일이다. 그리고 염불의 기원과 전개가 선정수행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도 논증되었다. 때문에 본래부터 염불선이었고 실제로 염불선의 다른 이름들이 이미 경론에 많이 사용되어왔음도 밝혀졌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염불선학 정립을 위한 새로운 과제가 대두된다. 불교 사상사 또는 불교 수행사에 있어 염불과 선정계위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정토학 연구자들에 따르면 염불과 선정계위를 논의는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사실 칭명염불이 중심이 된 정토종의 염불 행법으로는 도저히 생각해 볼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아시아 조사선이나 간화선 우위의 불교 환경속에서 적용된 염불화두법에서 또한 선정계위를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때문에 동아시아 한중일 삼국의 불교사에서 단계 또는 계위를 제시한 염불화두법을 찾아 볼 수 있다고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인도에서 불교가 일어난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염불과 선정계위가 비중있게 논의된 경우가 있는가? 논자의 과문한 탓이겠지만 과거 종학 차원이나 일본 정토계 종단의 정토학 그리고 현대 불교학에서도 찾기 힘들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대단히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 한국의 근현대 불교사에 있어 금타화상과 청화선사의 경우이다. 모두 염불선 차원에서 불타의 근본선(根本禪)인 구차제정(九次第定)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외에 한국의 근현대 선승들 가운데에서 붓다의 근본정인 구차제정에 관심을 보인 경우는 드물 것이다. 근본정인 구차제정은 불교의 궁극과 직결된 불교 출발 이래 가장 중요하고 핵심에 놓여있는 선정사상이다. 놀라운 사실은 청화선사는 이러한 한국불교상황에서 붓다의 근본선에 대한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 염불선의 선정계위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논자는 붓다가 성도한 구차제정의 사상이 제대로 수용될 때 한국불교의 수행문화는 온전해질 것이라 확신한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먼저 불교교리사 또는 수행사에 있어 염불과 선정계위의 문제에 어떠한 굴곡이 있었는지를 집중적으로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로써 선정속의 염불의 위상을 다시한번 확인하며 염불선의 계위를 논의함으로써 장차 염불선의 차제적인 수행법을 체계화시키고 정착시키기는 토대가 될 것이다. 결국 청화가 보여주었던 바와 같이 염불선정을 통해 지엽말단이 아닌 불교의 핵심을 관통하는 줄기와 본령을 회복하자는 데에 본고의 목적이 있다.

 

 

Ⅱ. 청화선사와 염불선정계위

 

청화선사는 많은 설법에서 염불선을 수도(修道)의 위차(位次)로 자주 반복해서 설한다. 예를 들면, 아비달마의 사가행(四加行) 또는 사선근(四善根)에 이어 유식오위(唯識五位)를 염불선 수행에 적용시킨다. 더 근본으로 돌아가서 모든 불교의 공통인 구차제정(九次第定)과 같은 수행계위 또는 선정계위로 염불선정을 연결시킨다. 그는 사선으로 시작하는 구차제정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하고 있다.

 

4선정법(四禪定法)에도 말씀이 나옵니다만 아함경(阿含經)에서 보면 석존께서 보리수하에서 성도하실 때도 사선정 멸진정(滅盡定)을 닦아서 대각(大覺)을 성취했습니다. 또 열반 드실 때에도 역시 멸진정을 거쳐서 4선정의 삼매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리고 아라한도 초선(初禪) 2선 3선 4선을 거쳐 멸진정에서 아라한도를 성취한다고 여러 군데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달마 스님께서 중국에 오시기 전까지는 대체로 선이라 하면 4선정 멸진정 법을 닦았습니다.

 

그러면 달마 스님 뒤에는 필요가 없는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근본불교(根本佛敎)가 필요가 없다면 마땅히 4선정 멸진정이 필요가 없어 폐기를 해야겠지요. 그러나 근본불교도 필요하다면 4선정 멸진정을 꼭 참고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사선정과 사무색정을 설명하면서 현재의 한국불교 상황을 다음과 같이 통탄하고 있다.

 

관법(觀法)을 관법 외도(外道)라고 폄(貶)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마는 부처님의 모든 수행법도 관법이요 6조 스님까지 한결같이 관법인데 관법이 외도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이 지금 한국 불교의 미숙한 풍토입니다. 참 통탄할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법집(法執), 불경에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주관적으로 아무렇게나 국집하는 그런 법집을 떠나야 합니다.

 

논자가 알기로 현재까지 근현대 우리나라의 실참수행자 가운데 이토록 석가모니 붓다의 구차제정의 중요성을 진지하게 인지한 예는 찾아 볼 수 없다. 대부분 동아시아 선자(禪者)들이 그래왔듯이 중국에서 성립된 조사선에 경도되어 있어 붓다의 근본선에 특별한 주의를 보내지 않는다. 경론을 통해 설령 어느 정도 알았더라도 간단하게 소승법 정도로 무시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청화는 사선과 구차제정을 근본선(根本禪)으로 바로 순선(純禪)이라하고까지 규정한다. 사선과 구차제정은 분명 붓다로 시작하는 불교의 정통선(正統禪)이다. 현재 잡다한 선법으로 혼란을 야기하고 있는 한국 불교계는 근본으로 돌아가 붓다의 사선과 구차제정으로 신중하게 걸러낼 필요가 있다. 이에 반해 청화선사는 일찍부터 사선을 포함한 다양한 수도의 위차로서 끊임없이 염불선을 검증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순히 이론이 아니라 자신의 실제수행에서 기어코 증험(證驗)하려는 치열한 구도정신이 어디에서나 물씬하다.

 

드디어 청화선사는 오랜 수증 체험에 따라 구차제정 가운데 제2선에서부터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에 이르기까지 염불선정의 계위를 다음과 같이 설한다.

 

제2선 : ...... 이때 더욱 올라가면 우리 중생 같은 이런 몸이 아니라 광명신(光明身)입니다. 몸이 광명이기 때문에 그때는 몸뚱이 때문에 피차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음식도 먹고 싶으면 생각만 하는 걸로 배가 부르니까 많이 먹을려고 음식 때문에 다툴 필요도 없지요. 아무튼 이렇게 올라가면 광명의 몸이기 때문에 하등의 갈등이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광명신(光明身)이지만 광도(光度)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3선 : 그렇게 돼 가다가 3선정(三禪定)이라, 여기 올라가면 오로지 한 마음만이 있습니다. 그때는 마음도 광명도 하나입니다. 이 밑에는 같은 광명신이지만 몸도 광명이 되어서 광명이 그때는 하나의 광도가 차이가 있단 말입니다. 허나 3선정 지위에 올라가면 차이가 없습니다. 다 순수광명인 동시에 그때는 마음도 같습니다. 다만 같으나 아직은 부처의 지위는 못되어 있습니다.

 

공무변처정 : 이렇게 되어 가다 그때는 우주가 텅 비어서, 광명도 하나의 질료가 있는 광명이 아니라 그야말로 참 텅 비어 있는 하나의 순수 광명인 것이고, 즉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입니다.

 

이같은 염불선정계위의 설명은 불교교리사 또는 선정사상사로 볼 때 매우 놀라운 제시이다. 이는 아직까지 체계화되지 않은 염불선학(念佛禪學)을 정립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주제로 염불선학의 기초가 될 것이다. 즉 앞으로 대승의 염불선정계위 사상과 비교 연구를 통해 염불선정과 불교의 근본선인 사선과 사무색정 등을 포함한 구차제정이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에 대한 체계적인 염불선정학 또는 염불선학의 정초를 확립하기 위한 바탕이 될 것이다.

 

 

Ⅲ. 초기와 부파불교의 염불선정계위

 

1. 초기경전의 염불선정계위

염불선정을 설하는 초기경전에서도 염불(buddhānussati)은 '다섯 가지 정(定)‘ 중의 하나이며 마음을 늘 염불 삼매에 매어 두어야한다고 하는데 전거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너는 부처님을 보거나 보지 않거나, 친한 비구들을 보거나 보지 않거나 간에, 너는 수시로 ‘다섯 가지 환희의 자리(五種歡喜之處)’를 닦아 익혀야 한다. 어떤 것이 그 다섯 가지인가? 너는 여래에 대한 일인 '여래·응공·등정각·명행족·선서·세간해·무상사·조어장부·천인사·불세존'이심을 또 법에 대한 일과 승가와 제 자신이 지켜야 할 계와 자신이 행해야 할 보시를 때에 따라 억념하라 ․ ․ ․ ․ ․ ․ 이와 같아서 석씨 난제야, 이 ‘다섯 가지 선정(五支定)’에 머물거나 다니거나 앉거나 눕거나 나아가 처자와 함께 있을 때에도, 항상 이 ‘삼매에 대한 기억(三昧念)’을 마음에 매어 두어야 한다.

 

선정과 삼매의 맥락에서 염불은 ‘다섯 가지 환희의 자리’ 중의 하나라고 할 때 환희의 원어는 초선의 선지 가운데 가장 중심인 pīti(喜)의 역어일 것이다. 또한 이렇게 환희의 대상을 ‘처(處)’로 옮긴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는 일반적으로 염불로 pīti가 일어난다는 다른 경전과 다를 바가 없다. 이처럼 여래10호의 염불을 설하면서 직접적으로 정(定)과 삼매가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역에서 정과 삼매는 모두 samādhi의 의역과 음역일 수 있고, 정의 경우는 사무색정(四無色定)이나 멸진정(滅盡定) 등에 쓰이는 samāpatti가 그 원어일 수 있다. 선(禪)으로 옮겨진 jhāna(Sk.dhyāna)나 samādhi 그리고 samāpatti는 선정사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용어이다. 어떤 경우이건 염불을 말하는 경전에서 염불을 선정과 삼매로 규정하고 있다. 다시말해, 왜 ‘염불선’ 또는 ‘염불선정’인지를 불교의 시작부터 이미 분명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재가자에게 염불의 일상삼매를 설하고 있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다음으로 염불선과 선정계위를 논의하기 위해서 먼저 모든 불교경전에 공통되는 구차제정(九次第定)의 기본인 사선(四禪)의 정형구를 살펴본다.

 

初禪(paṭhamajjhāna) : 모든 감각적인 욕망(kāma)으로부터 벗어나(vivicca) 불선법(不善法 : akusala dhammā)로부터 벗어났지만, 거칠고 세밀한 사유분별(尋伺 : vitakka와 vicāra)은 있다. 감각적인 욕망이 벗어난 것(vivicca)으로 희열(pīti)과 행복감(sukha)이 일어나는 초선을 성취하여 거기에 머문다.(Idha bhikkhave bhikkhu vivicca 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ṁ savicāraṁ vivekajaṁ pīti-sukhaṁ paṭhamaj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第二禪(dutiyajjhāna) : 거칠고 세밀한 사유분별이 가라앉고(vūpasa mā) 안으로 확고해지며(sampasādana) 마음이 집중된 상태(cetaso ekodibhāva)가 이루어지면서 거칠고 세밀한 사유분별이 없게(avitakka avicāra)된다. 마음이 집중된 상태, 즉 三昧(samādhi)에서 오는 희열감과 행복감이 있는 제2선을 성취하여 거기에 머문다.(Vitakka-vicārānaṁ vūpasamā ajjhattaṁ sampasādanaṁ cetaso ekodi-bhāvaṁ avitakkaṁ avicāraṁ samādhijaṁ pīti-sukhaṁ dutiyaj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第三禪(tatiyajjhāna) : 희열이 사라지는 것으로(pītiyā ca virāgā) 평정한 마음에 머물러 念(sato)과 正知(sampajāno)가 갖추어지는 것에 머문다. 그러면서 온 몸으로 행복감을 느끼면 성인들이 말하는 ‘평정한 마음과 念을 지니고 행복감에 머문다’라는 제3선을 성취하여 머문다.(Pītiyā ca virāgā upekhako viharati sato ca sampajāno, sukhañ ca kāyena patisaṁvedeti yan taṁ ariyā ācikkhanti : ‘upekhako satimā sukha-vihārī ti’ tatiya-j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第四禪(catutthajjhāna) :행복감이 없어지고(pahānā) 괴로움도 없어지고(pahāna), 이전에 있었던 기쁨과 근심도 제거된다(atthagama). 그리하여 괴로움도 그치고(adukkha) 행복감도 그친(asukha) 평정심에 의해 念이 청정해진 제4선을 성취하여 머문다.(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 pubbe va somanassa -domanassānaṁ atthagamā adukkhaṁ asukhaṁ upekhā-sati -pārisuddhiṁ catutthaj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이러한 인도 기원의 경전을 장아함(長阿含)의 ?중집경(衆集經)?등에서는 다음과 같이 한역되었다.

有四法謂四禪 於是比丘 除欲惡不善法 有覺有觀離生喜樂 入於初禪 滅有覺觀內信一心 無覺無觀定生喜樂 入第二禪 離喜修捨念 進自知身樂 諸聖所求憶念捨樂 入第三禪 離苦樂行先滅憂喜 不苦不樂捨念淸淨 入第四禪.

 

이러한 사선은 염불선정에 대표적인 선지(禪支)가 추출되어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이는 염불선정과 관련해서만이 아닌 열반으로 발전해가는 단계를 설명하는 경전에도 비슷하게 설해진다. 여기서는 염불선정과 관련한 대표적인 경전 하나를 들면 다음과 같다.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다음과 같이 여래를 수념(隨念)해야만 한다. ‘세존(世尊)은 아라한(阿羅漢)이시며,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신 분이시며(正等覺 / 正遍知), 지혜와 덕행을 잘 갖추신 분이시며(明行足), 피안으로 잘 가신 분이시며(善逝), 세상을 잘 아시는 분이시며(世間解), 위없는 분이시며(無上士), 하늘과 인간을 잘 이끄시는 분이시며(調御丈夫), 하늘과 인간들의 스승이시며(天人師), 깨달으신 부처(佛)로 세존(世尊)이시다’라고.

 

마하나마여, 이처럼 성스러운 제자가 여래를 수념(隨念)할 때 그의 마음은 탐욕에 얽매이지 않고, 성냄에 얽매이지 않고, 어리석음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렇게 될 때 마음은 여래에 확고하게 고정되고 그의 마음은 정직해진다. 마하나마여, 이렇게 여래를 발단으로 마음이 정직해진 성스러운 제자는 의미의 밝아짐[의명(義明 : atthaveda)]과 법의 밝아짐[법명(法明 : dhammaveda)]을 성취한다. 이러한 법은 환열(pāmojja)에 큰 희열(pamudita)을 성취하게 한다. 다시 큰 희열은 환희로움(pīti)이 있게 하고 환희로움은 ‘몸의 경안(輕安 : passaddhakāyo)’이 있게 하고, 몸의 경안은 행복[樂 : sukha]을 느끼게 하고, 행복한 마음은 삼매[samādhi]에 들게 한다. 마하나마여, 이것을 가리켜 성스러운 제자가 평정심이 없는 사람 가운데 평정심[visama]을 얻었다하고, 악의(惡意)가 있는 사람들 가운데 악의 없음에 머문다하고, 법의 흐름[dhammasota]에 이미 들어서 수념을 닦는다고 한다.

 

이처럼 염불을 설하는 경전은 내용 상에 있어 사선의 차제적인 전개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 경전은 훗날 상좌 불교의 대표적인 논서로 붓다고사(Buddhaghosa)가 저술한 <청정도론(淸淨道論 : Visuddhimagga)>에 인용된 경전이다. 여기서 붓다 수념 즉 염불선정은 사선의 계위에서 각각 대표되는 선지(禪支)의 순서를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환열[pāmojja / pāmujja] → ② 큰 희열[pamudita] → ③ 환희로움[pīti] → ④ 몸의 경안(輕安 : passaddhakāyo) → ⑤ 행복[樂 : sukha] → ⑥ 삼매[samādhi]

① 환열에서 ⑤ 행복[樂]까지는 초선에서 제삼선까지의 선지(禪支)이고, ⑥ 삼매는 제이선에서 제사선에 공통되는 선지이다.

부파마다 사선에 대한 각 단계마다 선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상좌부의 Vibhaṅga 논서는 초선은 오지(五支) - ① vitakko ② vicāro ③ pīti ④ sukha ⑤ cittekaggatā, 제2선은 삼지(三支) - ① pīti ② sukha ③ cittekaggatā, 제3선은 이지(二支)로 ① sukha ② cittekaggatā 그리고 제4선은 이지(二支)로 ① upekha ② cittekaggatā이다. 같은 상좌부이지만 후대에 성립한 Abhidhmmatthasaṅgaha에서는 사선을 오선(五禪)으로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초선은 오지(五支)로 ① vitakko ② vicāro ③ pīti ④ sukha ⑤ cittekaggatā, 제2선은 사지(四支)로 ① pīti ② vicāro ③sukha, ④ cittekaggatā, 제3선은 삼지(三支) 로 ① pīti ② sukha ③ cittekaggatā, 제4선은 이지(二支)로 ① sukha ② cittekaggatā 그리고 제5선은 이지(二支)로 ① upekha ② cittekaggatā를 든다.

유부의 대표 논서인 중현논사의 『순정리론(順正理論)』에서는 초선을 오지(五支)로 ①심(尋) ② 사 (伺) ③ 희(喜) ④ 락(樂) ⑤심일경성(心一境性), 제2선은 사지(四支)로 ① 내등정(內等淨) ②희(喜) ③락(樂) ④ 심일경성(心一境性), 제3선은 오지(五支)로 ① 행사(行捨) ② 정념(正念) ③정혜(正慧) ④ 수락(受樂) ⑤ 심일경성(心一境性) 그리고 제4선은 사지(四支)로 ① 행사청정(行捨淸淨) ② 염청정(念淸淨) ③비고락수(非苦樂受) ④ 심일경성(心一境性)로 정리한다. 대승의 대표적인 논서인『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은 초선은 오지(五支)로 ① 심(尋) ② 사 (伺) ③ 희(喜) ④ 락(樂) ⑤심일경성(心一境性), 제2선은 사지(四支)로 ① 내등정(內等淨) ② 희(喜) ③락(樂) ④ 심일경성(心一境性), 제3선은 오지(五支)로 ① 사(捨) ② 염(念) ③ 정지(正知) ④ 락(樂) ⑤ 심일경성(心一境性) 그리고 제4선은 사지(四支)로 ① 사청정(捨淸淨) ② 염청정(念淸 淨) ③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 ④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다.

 

초기경전에서 설명되는 사선의 각 선의 단계에 따른 선지는 부파마다 조금씩 다르게 분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설일체유부와 대승 아비달마에 나오는 것이 Pāli 논서나 주석서보다 더 초기경전에 적합한 분류라 판단된다.

이러한 차제적 선정 단계는 염불선정과 선정의 발달 과정을 잘 시사해준다. pāmujja(歡悅)에서 pīti(喜)와 sukha(樂) 그리고 samādhi(三昧)로의 순차적인 선지는 바로 사선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초기불교경전에 석가모니 붓다의 염불의 선정계위를 찾을 수는 없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시기적으로 현재 이 세상에 출세해 있는 붓다가 스스로 제자들에게 자신과 관련한 염불의 수행위차를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때문에 사선 등의 직접적인 선정계위를 적시하기보다 간접적으로 각각의 계위에서 일어나는 선지(禪支)를 중심으로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2. 부파불교의 염불선정계위

 

붓다의 반열반 이후에 전개된 부파불교 시대에 염불과 선정계위를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부파불교는 말 그대로 교리 등의 상이한 이해에 따라 분파하여갔다. 하지만 제파의 공통점은 경전에 나타난 붓다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법(法 : dhamma)에 대한 철학적 연구에 몰두하였다. 때문에 아비다르마(Abhidharma) 또는 아비담마(Abhidhamma)라는 말이 기본적으로 ‘법에 대한’이라는 뜻을 가진 이유이다. 즉 이 시기에는 삼보 가운데 불보나 수행적 측면에서 염불선정보다는 법보의 이론적 타당성 연구에 집중했다는 의미이다. 때문에 초기불교 전통을 잇는 현존하는 아비달마 논서에서 염불에 대한 비중있는 논의를 많이 찾아 볼 수 없는 이유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후에 대승불교의 시작이 불보 중심의 철학적 불타관과 함께 수행론으로 염불선정이 다양한 측면에서 강조되는 것과 비교된다.

 

이러한 부파불교의 아비달마 환경에서 과연 염불선정이 어떻게 설명되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아비달마 전적에서 염불의 선정이 석가모니 붓다의 근본 선정인 사선과 관련하여 논의되고 있는가도 문제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와 비교하면 현격하게 적고 초기불교 경전보다도 오히려 내용적으로 빈약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불과 선정계위에 대한 중요한 단서로 분석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상좌 불교의 대표적인 논서인 <청정도론(淸淨道論 : Visuddhimagga)>에서 붓다고사(Buddhaghosa)가 염불을 설명하는데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불타 수념 즉 염불을 앞에서 인용한 초기경전을 새롭게 설명하면서 염불과 선정계위에 관계를 분명히 보여주는데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탐욕(rāga) 등에 매이지 않아서 덮개[蓋 : nīvaraṇa]들을 제어하고, 그의 마음은 선정 주제[業處 : kammaṭṭhānā]를 향하고 정직한 마음이 될 때 ‘붓다의 덕성’[buddhaguṇa]에 심(尋 : vitakka)과 사(伺 : vicārā)가 일어난다. 붓다의 덕성에 대한 계속되는 심사(尋伺)는 희(喜 : pīti)가 일어난다. 마음에 희가 함께할 때 경안(輕安 : passaddhi)의 가까운 원인으로서 희는 몸과 마음을 방해하는 것을 가라앉혀 고요하게 한다. 몸과 마음을 방해하는 것을 가라앉혀 고요하게 될 때 몸과 마음에 있어 행복감[樂 : sukha]이 일어난다. 행복감으로 마음은 붓다의 덕성을 대상으로 마음이 삼매(三昧 : samādhi)에 든다. 이러한 차례의 선지(禪支 : jhānaṅgā)들이 한 찰라에 일어난다. (하지만) 붓다의 덕성은 심심미묘(甚深微妙 : gambhīra)하기 때문에, 그리고 ‘여러 가지 종류의 덕성[nānappakāraguṇā] ’에 수념하기 때문에 이러한 선[jhāna]은 단지 근접삼매(近接三昧 : upacāra samādhi)에만 이르고 본삼매(本三昧 : appanā samādhi)에는 이르지 못한다. 이러한 근접의 선[jhāna]은 그 자체로 불타수념(佛陀隨念)으로 알려졌다. 왜냐하면 근접삼매의 선 붓다의 공덕을 수념하는 것과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

 

상좌불교의 대표적인 논서는 초기경전에서처럼 10호와 같은 부처님의 덕을 계속 염불하면 탐진치로부터 사로잡히지 않고 바른 마음 자세가 되어 희열(喜), 경안(輕安), 락(樂)등의 선지(禪支)들이 차례로 일어나 삼매에 든다는 점은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그 전에 “붓다의 덕성’[buddhaguṇa]에 심(尋 : vitakka)과 사(伺 : vicārā)가 일어난다. 붓다의 덕성에 대한 계속되는 심사(尋伺)는 희(喜 : pīti)가 일어난다.”라는 구절은 염불선정과 관련하여 초기불교에서 찾아볼 수 없다. Visuddhimagga내에서 붓다고사가 스스로 인용한 바로 앞의 초기경전에도 없는 구절을 부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인용구의 비판적 분석을 위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염불은 초기경전에서와 같이 선정 범위에 있다. 때문에 삼매(三昧 : samādhi)나 선[jhāna] 그리고 근접삼매(upacāra samādhi)등의 용어를 염불 설명을 위해 사용한다.

둘째, 초기경전의 선정계위와 같이 심(尋 : vitakka), 사(伺 : vicārā), 희(喜 : pīti), 경안(輕安 : passaddhi), 행복감[樂 : sukha] 그리고 삼매(三昧 : samādhi)의 순서로 전개되는 선지를 보여준다.

셋째, 문제는 초기경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염불과 관련하여 심(尋 : vitakka)과 사(伺 : vicārā)의 언급과 더 나아가 심사(尋伺)를 조건으로 희(喜 : pīti)가 일어난다고 한다.

넷째, 결국 염불은 본삼매(appanā samādhi)에는 도달할 수 없고 다만 사선의 첫 단계인 초선 이전의 근접삼매(upacāra samādhi)까지 가능하다고 한다.

다섯째, 이유는 붓다의 덕성은 심심미묘(甚深微妙 : gambhīra)하기 때문에, 그리고 ‘여러 가지 종류의 덕성[nānappakāraguṇā] ’에 대한 수념이기에 염불은 본삼매(appanā samādhi) 에 들 수 없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Visuddhimagga에서 염불은 선정 계위에 있어 초선 진입을 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염불과 선정계위에 대한 <청정도론>의 설명에 있어 무엇이 문제가 될 수 있는지를 먼저 간략하게 정리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청정도론>에서 염불선정을 초선 이전의 근접삼매(upacāra samādhi)만이 가능하다고 하는 점은 앞에서 본 바처럼 초기경전에서 수념(隨念 : anussati)의 범위를 사선 등을 포함한 수행주제로 보고 있는 점과 배치된다는 점이다.

둘째, 염불을 선정범위라 인정하면서도 초기경전에 없는 근접삼매나 본삼매라는 삼매개념을 들어 초선에 진입하지 못한다고 한다는 점이다.

셋째, 초기경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심사(尋伺 : vitakka-vicārā)로 여래 9호를 설명하고 있다. 이는 염불과 선정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초기경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상좌불교만의 적용이다. 즉 염불이 여래 9호의 수념(隨念 : anussati)일 때 anussati를 vitakka-vicārā로 바꾸어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넷째, 상좌불교와 같이 anussati를 vitakka-vicārā로 설명한 예는 다른 부파나 대승불교에서 찾아보기 힘들고 또한 교리적이나 수행론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첫째로 <청정도론>의 입장은 초기경전에서 수념(隨念 : anussati)이 사선과 사무색을 수행주제로 보고 있는 점에 배치된다는 점이다. 초기경전에서 '수념의 대상' 또는 '수념의 수행주제' 또는 ‘수념의 장(場)’으로 anussatiṭṭhāna라는 말이 한정적으로 쓰인다. 이는 사마타 수행 주제로 40가지가 제시되는40업처(業處 : Kammaṭṭhāna)라는 말처럼『淸淨道論(Visuddhimagga)』에서 anussatiṭṭhāna도 같은 쓰임새의 용어이다. 초기경전에서 anussatiṭṭhāna의 내용으로 여섯 가지가 한정적으로 제시된다. 여섯 가지는 흔히 제사선 이후에 발현되는 숙명지(宿命知), 제삼선(第三禪)의 행복감, 광명상(光明想 : ālokasañña) 그리고 부정관(不淨觀)과 백골관(白骨觀)과 제사선(第四禪)이 그것이다. 사실 사선 계위에 있어 sati는 나타나지만 anussati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선정 수행을 anussati라고 한정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는 ‘이전에 경험했던 일을 떠올려 지속적으로 재현시키는 행법’으로서 anussati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숙명지가 그 대상이고 제3선의 행복감과 광명상 그리고 부정관과 백골관 등이 제시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전에 선정체험의 내용을 떠올려 그러한 본질로 우리의 마음을 바로 연결시켜 염염상속 계속적으로 지속시키는 행법이다. 염불의 경우 이전에 숙지된 여래 9호의 총체성(總體性)을 떠올려 관념으로 지속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총체성의 관념이 제2선의 희(喜 : pīti), 제3선의 행복감[樂 : sukha] 그리고 제4선을 아우르는 삼매(三昧 : samādhi)의 선정 계위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 때문에 같은 경전에서 이같은 여섯 개의 anussati의 대상 또는 주제를 선과 삼매수행의 정학(定學 : adhicitta)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로 보면 <청정도론>의 입장은 anussati로서 염불 또한 제3선이나 제4선에 수행주제로 포함될 수 없다는 점과 배치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부파불교 이전의 초기경전에서 정학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사선이고 구차제정이다.

둘째로 이렇게 사선을 anussati의 수행대상이나 주제로 설하는 초기경전에 반하여 염불이 초선 이전의 근접삼매(upacāra samādhi)까지만 가능하다는 주장에 있어 근접삼매는 초기경전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후대 상좌부의 삼매개념이다. 초선부터를 정(定 : samādhi)으로 보았던 것에 반하여 상좌부는 다시 초선 이전에 새로운 samādhi개념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후대에 제시된 개념을 가지고 초기경전의 선정 단계로 재단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셋째로 마찬가지로 상좌부는 염불과 선정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 심사(尋伺 : vitakka-vicārā)로 여래 9호를 설명하고 있다. 이같은 적용은 초기경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상좌불교만의 설명법이다. 염불의 buddhānussati는 원래 여래 9호를 anussati한다는 것이지 9호에 대한 심사한다는 것, 즉 buddha-vitakketi나 buddha-vicāreti가 아니다. 상좌부는 염불이 여래 9호의 수념(隨念 : anussati)일 때 anussati를 vitakka-vicārā로 바꾸어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초기불교에서 용례를 찾기 힘들 것이며 또한 이러한 용어를 동의어로 보기도 힘들 것이다.

 

선정수행의 계위에서 심사는 제2선에서 제거된다. 무심무사(無尋無伺 : avitakka-avicāra)가 그것이다. 초기불교 선정론에 의하면 초선에서 말[vācā]가 소멸한다. 그렇게 되면 구두로 불명(佛名)이나 여래10호의 칭명 또는 칭명염불은 아예 초선에도 진입할 수 없다고 보아야한다.

넷째 상좌불교와 같이 anussati를 vitakka-vicārā로 설명한 예는 초기불교에서나 다른 부파나 대승불교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다른 부파나 대승에서는 염불의 buddhānussati로서 사선을 말하고 있다.

 

 

3. 심사(尋伺 : vitakka-vicārā)와 선정계위의 문제

 

이처럼 <청정도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상좌불교의 불교교학과 수행이론에서 심사에 대한 긍정적 설명이 이채롭다. 이후 설명되겠지만 현재 미얀마 불교에서 위빠사나나 염불선정 등의 수행 상에 있어 이러한 점이 계승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초기경전에서 심사를 어떻게 설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한다. 초기경전에서 심사는 행온(行蘊) 가운데 하나이다. 심사는 선법(善法 : kusala dhammā)과 불선법(不善法 : akusala dhammā)으로 모두 적용된다. 그렇지만 초기경전에서 심사는 범부들의 번뇌의 조건이 되는 ‘일상적인 사유분별 작용’으로 많이 설해진다. 그리고 선정 수행의 계위와 관련해서는 초선에는 유지되지만 제2선에서 지멸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다음의 인용되는 초기경전은 불교심리 전개론으로 심사의 발생기원과 조건을 잘 보여준다.

 

“눈(cakkhu)은 色(rūpa)을 緣하여 眼識(viññāna)이 있고 이들 세 가지 和合으로 觸(phassa)이 그리고 다시 觸에서 覺[受 : vedanā]이 일어난다. 그는 그의 覺에 대한 想이 일어나고, 想(saññā)이 일어난 것에 思가 일어나며(vitakketi), 思(vitakka)가 일어난 것에 念(papañca)이 일어나고, 念이 일어난 때문에 分別(papañca-saññā-saṅkha)이 일어난다. 이렇게 일어난 분별은 그를 (쉬지 않고) 몰아쳐 과거․미래․현재에 걸쳐 눈에 보여지는 색과 함께 계속된다.”

 

편의상 빠알리 경을 상응하는 아함에서 사용한 한역어를 택하여 옮겼는데 vitakka는 이처럼 심(尋) 이외에도 사(思)나 각(覺)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일상적으로 주관(根) ․ 객관(境) ․ 의식(識)의 세 가지가 화합(三事和合 : tiṇṇa saṅgati)하여 조건적으로 전개되는 범부들의 일상적인 정신활동을 설명한다. 인용한 경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cakkhu ②rūpa ③viññāna ④phassa vedanā ⑥saññā vitakka⑧papañca ⑨papañca-saññā-saṅkhā

①六根 ②六境 ③六識 → ④六觸 → ⑤六覺(受의 다른 한역어) → ⑥六想 → ⑦六思 → ⑧六念 → ⑨六分別

 

여기서 심[vitakka]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papañca는 흔히 희론(戱論)이라는 한역어가 많이 사용하지만 허위(虛僞)나 망상(妄想)으로도 한역되었다. 붓다는 삼업(三業)의 구분 가운데 심사는 구행(口行)에 해당시킨다. 다시말하면, 심사는언어를 통한 사유분별’을 의미한다. 그리고 심사가 조건이 되어 희론에 이어 papañca-saññā-saṅkha로 전개된다는 것인데 다시 말하면, 언어를 통한 사유분별이 확대재생산되어 조작과 왜곡 활동으로서 번뇌를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즉 심사는 범부들이 일상에서 번뇌 망상으로 나아가는 조건적 심리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심사는 사선에 들어 제2선에서 멈춘다. 하지만 초선에 이르기까지는 유지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구행으로서 심사가 언어를 통한 사유분별로 설명되는 이유는 언어를 매개로 전개되는 우리의 일상적인 논리적 사유, 분석적 사유, 추론적 사유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초선에서 언급되는 심사는 욕망에 따른 일상의 두서없는 사유분별로서 심사가 아닌 오개(五蓋)의 정지를 조건으로 하는 안정되고 질서 잡힌 심사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심리적 국면은 이전과 다른 질서잡힌 의식의 통일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후에 유심유사삼매, 무심유사삼매 그리고 무심무사삼매라는 말처럼 굳이 삼매를 붙힌 복합어로 사용하는 용례도 보여준다. 때문에 이 때의 심사는 선지로 불선법이 아닌 선법의 심사로 보아야할 것이다. 그런데도 사선의 계위에서 보여주듯이 심사는 계속 지속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지멸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심사는 제2선에서 제거된다.

 

어떠한 경우라도 제2선에서 작용을 멈추는 심사는 선법과 불선법이든 일체를 포함한다고 보아야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언어적 사유분별이 지속하는 한 진정으로 삼매의 경지에 도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승의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심사를 잔물결이 출렁이는 것에 비유하는 각관풍(覺觀風)이라 한 이유이다. 마찬가지로 보기 드물게도 상좌불교권의 스리랑카의 학승인 Walpola Rahula도 심사가 있는 한 진정한 심일경성(心一境性: cittekaggatā)의 삼매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유식의 무착(無着)이 심사를 ‘manojalpa’(mental babble, 마음의 재잘거림)으로 설명하는 것을 인용하고 있다. 논자는 Walpola Rahula의 선정수행과 관련한 심사의 문제는 지극히 합당한 견해라고 본다. 이 점에 있어 염불선자였던 청화선사도 선정수행 상에 있어 심사의 문제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선사는 <구사론>의 5위75법이라는 제법분별을 설명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심사를 설명하고 있다.

참선할 때는 심사(尋伺)를 잘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내나야 참선할 때 가장 골치 아픈 것이 분별시비 아니겠습니까, 분별시비를 떠나 버려야 삼매에 듭니다. 심사가 없어야 삼매에 듭니다. 그리고 공부 하다보면 거치른 분별(尋)은 좀 떠났다 하더라도 미세한 분별(伺)은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선정 가운데서 2선정에 들어가야 심사(尋伺)가 끊어집니다. 그때는 말도 별로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분별하고 '좋다 궂다 네가 있고 내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있어야 말이 나오는 것이지 모든 분별이 없어져 버리면 말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선사는 심사를 분별시비의 사유로 그리고 심과 사의 구분과 말[언어]과 관련있음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더 나아가 선정 수행 시 심사는 어디까지나 경계해야 관찰 대상이 되어야지 수행 주관으로 떨어져서는 안 됨을 말한다.

여기서 심사에 대한 대승불교와 대승 이전의 불교와의 이해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대체로 현재에도 수행 도상의 심사라도 긍정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상좌불교에 비해 대승불교의 심사에 대한 이해는 부정적이다.

 

4. 심사와 염불선정의 문제

 

이처럼 초기불교 심리론과 청화선사에 이르기까지 심사는 ‘언어적 사유분별활동’을 말한다. 때문에 심사는 삼행 가운데 구행(口行)인 것이다. 하지만 상좌불교는 초기불교의 여래 9호에 대한 anussati를 언어적 사유분별활동으로 적용시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앞에서 인용한 <청정도론>에서 “붓다의 덕성’[buddhaguṇa]에 심(尋 : vitakka)과 사(伺 : vicārā)가 일어난다. 붓다의 덕성에 대한 계속되는 심사(尋伺)는 희(喜 : pīti)가 일어난다.”라는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때문에 <청정도론>에서 염불선정의 방법론으로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심사의 기능으로 각각의 붓다의 명호(名號)가 붙여지게 된 이유와 근거(karana)를 장황하게 설명한다. <청정도론>의 전체 23장 가운데 제7장의 대부분이 각각의 수념(anussati)방법론으로 사유분별 또는 분별사유 차원으로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청정도론>에서 제시하는 여래9호의 첫 번째인 아라한 명호에 대한 5가지 정의에 있어 첫째, 아라한은 멀리 떠났기 때문에, 둘째, 적을 물리쳤기 때문에 셋째, 바퀴살을 부수었기 때문에 넷째, 필수품을 공양받을 만하기 때문에 다섯째, 숨어서 악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세존은 아라한이라고. 계속해서 다시 다섯 가지 명제에 대한 세부적인 이유와 근거를 분별사유한다.

 

이렇게 <청정도론>에서부터는 각각의 명호(名號)가 붙여지게 된 이유와 근거(karana)를 사유분별 또는 분별사유하는 것을 염불선정 즉 buddhānussati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여래9호에 대한 염불선정은 높은 계위로 발전할 수 없다. 앞에서 인용한 <청정도론>의 인용구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덕성[nānappakāraguṇā] ’에 대한 수념이기에 염불은 본삼매에 들 수 없다”고 하며 근접삼매까지로 한정하는 결정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때문에 상좌불교는 여래9호를 중심으로 하는 염불선정을 초선 이전의 근접삼매 정도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염불과 관련한 중요한 선정수행개념인 anussati를 심사 개념으로만 한정적으로 적용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염불이란 심사가 수행 주관(主管)이 되어 명호에 대한 근거와 이유를 여러 측면에 따지는 사유분별이 아니다. 여래 9호의 경우, 전체 9호이든 개개의 명호이든 간에 떠올린 붓다 덕성의 총체성(總體性 : totalitat)을 지속적으로 관조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anussati라는 말이 쓰인 이유이다. 그래서 청화선사의 경우, 이러한 부처 본성 또는 부처의 근본적인 덕성의 총체성을 일상(一相)으로 염염상속 지속시키는 일행(一行)을 삼매로 또한 설하였던 것이다.

 

총체성이란 ‘본질을 구성하는 보편적인 규정들의 총합’을 가리키는 말인데 『금강심론(金剛心論)』에서 말하는 ‘일합상(一合相)의 통관(通觀)’의 일합상과 비슷한 말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청화선사가 『지도론』을 인용하여 염불선을 설명하는 ‘현전일념(現前一念)’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 것처럼 염불이란 총체성이나 일합상에 대한 현전일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대중설법 시 “부처님은 우주 실존의 대명사구나, 이렇게 느끼면서” 공부하라는 표현이 또한 그것일 것이다. 다시 이렇게 금타와 청화에 이르러 설명하는 염불선 행법은 오히려 초기불교 경전으로 돌아가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석가모니 붓다의 직제자로 알려진 산디타(Sandhita) 비구는 염불선정수행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녹음이 찬란하고 우거진 보리수 아래에서 ‘부처에 대한 일상(一想 : Ekaṃ buddhagataṃ sañña)’에 전념(專念 :patissato)하는 경지를 성취하였다.

지금부터 31겁(劫)의 전에도 그러한 상(想: sañña)을 성취하였는데, 바로 그러한 상(想)으로 인해 일체의 유루(有漏)를 멸진(滅盡)하였다.

 

보리수 아래에서 좌선의 염불수행을 보여주는 한 비구의 토로는 초기불교의 염불과 선정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아주 귀중한 단서로 인용된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청화선사가 염불선을 설명하는데 있어 『지도론』의 ‘현전일념(現前一念)’은 바로 붓다의 제자가 ‘부처에 대한 일상(一想 Ekaṃ buddhagataṃ sañña)에 전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산디타 비구는 시간을 초월하는 오랜 염불선정으로 궁극적인 무루지(無漏智)의 성취를 선언하고 있다.

 

주석서에 따르면 산디타는 전생 기억으로 석가모니 붓다 이전의 31겁 이전의 과거불인 Sikhi 부처님 때부터 염불선정을 말하고 있다. 즉 염불선정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고유명사격의 특정한 한 부처님이 아닌 시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붓다 본성인 불성에 대한 선정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여기서 염불선정은 심사(尋伺)가 아닌 심사의 이전 지분인 상(想)과 관련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음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념의 patissato는 위빠사나를 포함한 모든 선정수행에 가장 핵심적인 용어인 sati의 다른 말이다. 즉 부처의 일상(一想)에 대면(對面)하는 전념이 바로 염불선정[buddhānussati]임을 말해주고 있다. 위빠사나에서 sati는 기본적으로 관찰대상과의 대면 상태와 관련한다. 그래서 Gethin이 말하는 것처럼 또다른 초기경전인 Niddesa의 경우 직접적으로 사념처 또는 위빠사나 수행을 anussati와 관련시키고 있음을 말한다. 이처럼 염불선정에서 말하는 일상(一想)은 오온(五蘊)의 상온(想蘊)을 말하며 육육법(六六法)으로는 심사(尋伺)로 발전하기 이전의 단계를 말한다. 때문에 초기경전에서 선정수행과 관련하여 마음에 유지시켜할 심상으로 십상(十想)이 설해지기도 한다. 더 나아가 구차제정에 이르기까지 상(想)은 중요하다. 초기불교의 산디타의 염불 행법은 청화 염불선에서 말하는 일상(一相)을 연상하게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염불선정의 행법 상에 있어 심사(尋伺) 이전의 상(想)은 서로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청화선사는 “실상염불(實相念佛)은 부처님의 법신(法身)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하고 만공덕(萬功德)을 갖춘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리(理)를 관조(觀照)하는 것입니다”라고 여러 설법에서 반복적으로 설한다. 부처님의 만공덕의 리(理)를 관조(觀照)한다는 것은 바로 부처 본성 또는 부처의 근본적인 덕성의 총체성을 일상(一相)으로 염염상속 지속시키는 일행삼매를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상좌부의 염불처럼 만공덕과 같은 9호의 각각의 명호에 대한 호칭 이유에 대해 하나하나 따지는 분별로서 사유를 염불선이라 하지 않는다. 대신 청화선사의 염불선은 붓다의 만공덕의 리(理)를 일상으로 관조(觀照)하는 행법이다. 청화는 그러한 점에서 여러 부처님의 명호와 관련한 실상염불선의 방법론을 자상하게 설하고 있다. 초기경전에 염불선정은 좌선의 기초행법과 함께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과 같은 모든 일상사에서 닦아야한다.

 

이처럼 염불선정은 심사의 분석적 사유분별이 아닌 여래 덕성의 총체성을 상념으로 지속시킨다는 것이다. 이같은 맥락은 초기경전에 비구나 재가인이 두려운 장소나 위험에 처할 때 염불을 하라고 권유하는 경우와도 일치한다. 염불을 설하는 여러 경전에서 넓은 벌판을 가다가 두려움이 생겨 마음이 놀라고 털이 곤두서는 때에, 몸의 온갖 고통이 갈수록 더해갈 때, 병환에 고통스러울 때 또는 수행자가 텅 빈 한처나 빈집에서 마음이 놀라고 온몸의 털이 곤두설 때에 염불을 권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 처하여 여래9호에 대한 분석적 사유분별이 온전하게 가능할까는 의문이다. 놀라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유분별할 경황이 없을 수도 있다. 인간에게 있어 두려움과 공포는 대개 상념으로 온다. 이러한 상황의 극복은 대치(對峙)되는 상념이 효과적이다. 하지만 여래 9호의 분석적 사유분별은 무력하기 쉽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공포와 위험의 긴박한 상황에서 이유와 원인을 따지는 분별 자체가 힘들다.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 붓다는 여래의 덕성과 위신력의 상념으로 극복할 것을 권한 것이다. 즉 인간 삶의 많은 상황이 의지적인 사유분별보다 상념이 더 우세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상념으로 이미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심리적 상황은 의지적 사유분별로 쉽게 무마되거나 벗어나기가 힘들다.

 

붓다가 위험한 장소나 두려운 장소에 가는 제자들에게 여래9호에 대한 심사(尋伺)가 아니라 anussati를 권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염불을 설하는 대부분의 경전에서 ‘9호라는 불성에 anussati하면 두려움이 곧 없어질 것이다’라는 맥락이 그것이다. 비유적으로 유명한 잡아함 <당경(幢經)>에서처럼 재래의 신화를 비유로 들어 아수라와 전쟁에서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이면 제석천 등의 깃발을 '쳐다보아라(ullokayata)'라는 말로 anussati를 설명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깃발은 상념을 위한 상징적 의미이다. 결국 염불선정의 anussati 행법은 <청정도론>에서처럼 심사(尋伺)의 작용으로 이해할 수 없음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이같이 여래 덕성[불성]의 총체성을 상념하는 염불선정은 기본적으로 불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바탕해야 한다. 때문에 경전에서 ‘여래9호의 불성(佛性)에 대한 믿음에 의지한 불타선정임을 분명히 말한다. 경전의 많은 곳에서 붓다의 성질, 즉 불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설해진다. 그리고 흔들림없는 확고한 믿음은 맑음과 동의어라는 의미에서 불괴정(不壞淨 : avecappasāda)이라 하기도 한다. 나아가 믿음에 의지한 선정은 홀로 좌선하는 수행이 요구된다고 한다. 다시말해, 여래9호라는 불성의 믿음에만 만족하고 더 이상(uttarim) 수행(좌선)하지 않으면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선리(禪理)를 경험할 수 없다고 한다. 경전은 불성의 확고한 믿음에 따른 좌선 수행은 ① 환열[pāmujja] → ② 환희로움[pīti] → ③몸의 경안(輕安 : passaddhakāyo) → ④ 행복[樂 : sukha] → ⑤ 삼매[samādhi]와 같은 차례의 상승일로를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이는 그대로 사선의 조건적 발생을 보여준다. 문제는 불성에 대한 믿음은 있을 수 있으나 염불 선정으로 발전할 수 없다고 한다는 점이다. 결국 마음이 삼매에 들지 못하고 삼매에 들지 못하기 때문에 ‘제법의 현현(顯現) 체험(dhammā pātubhavanti)’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여래 덕성이라는 불성의 믿음이 염불선정으로 그리고 제법의 현현이라는 반야지혜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더 나아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염불선이 바로 신앙에 바탕한 선법임을 설하는 청화선사와 그대로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청화선사는 마치 참선은 신앙을 부정하는 것처럼 이야기되는 선수행 풍토에서 신앙에 바탕한 선법을 강조했다는 점은 특별하다.

 

현재 유통되는 선법이나 불교명상 가운데 불교신앙이 실종되었음을 지적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본질적으로 신앙에 바탕한 염불선의 위상은 한국불교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론적으로 앞에서 anussati의 성격을 ‘이전에 이미 익힌 내용을 다시 떠올려 그러한 본질로 우리의 마음을 바로 연결시켜 염염상속 계속적으로 지속시키는 것’이라고 논의했듯이 염불선정의 경우에서도 이전에 숙지된 여래 9호에 담긴 의미의 총체성(總體性) 또는 일합상을 떠올려 관념으로 지속시키는 것이라 정리할 수 있다.

 

 

Ⅳ. 마치는 말

여기, 2400년 또는 2300년 동안의 하나의 비밀이 있다. 붓다의 반열반 이후 약 100여년 또는 200년 지난 뒤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불교교리사 또는 신앙사 또는 선정사(禪定史)에 비밀이 되었다. 비밀은 다음과 같다. 왜 초기경전에서 ‘염불이 선정’으로 설해지고 있는데 아비달마불교를 비롯한 인도불교의 거의 모든 부파에서 염불선정을 사선 등의 구차제정과 관련하여 심도있게 전개시키지 못했는가?

 

아비달마 논서에서 염불선정은 비중있게 취급되지 않는다. 교조인 붓다와 관련하여 가장 다채롭고 심도있게 전개될 법한데도 그렇지 않다. 이 점에서 만약 염불선정이 부파불교에서부터 붓다의 근본선인 구차제정과 연계되어 논의되고 수행되었더라면 불교 교리나 신앙 그리고 선정사의 전개 양상이 사뭇 달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불교교리사에서 구차제정과 관련한 염불선정 수행의 내용이나 체계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현대의 불교학에서도 문제제기를 한 경우를 논자는 아직 발견할 수 없다.

 

논자는 염불선정계위를 논의하는데 있어 염불선과 관련한 청화선사의 구차제정의 설명에 이르러 다시금 이러한 의문을 풀어보려 노력하였다. 그리고 본고가 보여주는 것처럼 왜 구차제정과 관련한 선정계위가 제대로 논의되거나 수행의 주제로 전개될 수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가 점차 밝혀지게 되었다. 즉 불교교리사에서 크게 쟁점이 되지 않아 주목을 받을 수 없었던 문제가 2400년 또는 2300년 동안 묻혀있다가 이제야 그 비밀이 풀려진 듯한 느낌이다. 과연 정답이 될 수 있는지는 계속되는 현 논자나 다른 연구자의 후속논문에서 점차 분명해 질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본 논자의 답은 다음과 같다.

초기경전은 ‘염불이 곧 선정’이다. 붓다의 반열반 이후에 전개된 여러 부파에서도 초기경전의 ‘염불이 선정’임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초기불교의 근본선인 사선과 관련시키지는 않는다. 초기불교의 근본선이 사선이라면 당연히 관련시켜 설명해야하는데 불구하고 그렇지 않다. 왜 부파불교는 그리하였을까? 여기에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숨어있는 비밀이 있다. 가장 큰 요인은 교리의 엄밀한 정합성을 따지는 아비달마 불교는 염불과 선정과 관련하여 문제에 부딪혔을 것이다. 무슨 문제인가?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염불선정이 시간이 지나면서 언제에서부터인지 구두(口頭)의 칭명(稱名) 요소가 가미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현재 초기불교전통에 있는 상좌불교권에서 염불선정이라지만 좌선의 도입부나 중간에 있어 칭명으로 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염불선정수행 풍토에서 염불을 선정계위와 관련하여 설명해야 할 아비달마 불교에서 교리의 정합성이라는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커다란 선리 상의 문제가 부파불교 논사들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는 본 논문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대표적으로 상좌불교의 논서에서도 잘 나타나나 있다.

초기경전에서 근본선인 사선의 처음인 초선에 들게 되면 말[vācā]이 소멸한다. 초기불교의 선리(禪理)에 따르면 “초선에 도달하면 말이 지멸된다”(S. Ⅳ. 217 등)고 한다. 그렇다면 말 즉 칭명이 개입된 당시 염불이라면 당연히 초선조차도 관련지어 설명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 염불은 분명히 선정으로 설해지고 있다는데 문제이다.

 

여기서 아비달마불교는 궁여지책으로 교리의 정합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초선 이전의 ‘선정 개념’을 창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어느 부파가 가장 먼저 초선 이전의 새로운 선정개념 또는 선정계위를 제출했는지는 아직 결정할 수 없다. 본 선정에 도달하기 전의 상좌불교의 근접삼매(upacāra samādhi), 그리고 한역 다른 부파의 미도선(未到禪 : anāgamya-samādhi) ․ 미지정(未至定)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선정개념의 창안에 따라 부파불교는 이제 선리의 정합성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초선 이전에는 말[vācā]이 작용하고 계속적으로 말과 언어 그리고 심사가 직결된 여래 9호의 염불선정으로 맞추게 된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 말과 직결된 언어적 사유분별인 심사(尋伺)로 염불한다고 주석하였던 이유일 것이다. 심사(尋伺)는 다름 아닌 말과 직결된 언어적 사유분별이다. 초기불교의 선리에 따르면 초선에서 말이 지멸되고 제2선에서 ‘무심무사(無尋無伺)’라 한다. 달리 말하면, 말이 지멸됨으로써 일어나는 조건적 소멸을 말한다. 결과적으로 <청정도론>은 염불선정의 anussati를 심사 작용으로 풀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염불과 선정 관계의 교리적 정합성이라는 모양새는 맞추었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염불선정의 무한한 가능성과 여지가 일찍이 봉쇄되어 버렸다. 가정하건데 염불선정이 일찍이 아비달마시대부터 제대로 행해졌다고 한다면 불교본래의 염불선정으로 인해 신앙의 질과 수준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매우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염불선정, 그 자체로 함장되어 있는 많은 가능성, 특히 불교신앙과 선정의 내용이 풍부해질 수 있는 것이 차단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청화선사의 염불선의 의미는 무엇인가? 청화선사는 염불이 곧 선정으로, 더 나아가 염불선을 선정계위로 설명하고 있다. 불교교리사와 선정수행사에서 대단히 새로운 시도이다. 선사는 사선에 이어 사무색 등의 구차제정과 맞물려 염불선정계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그 동안 오랫동안 묻혀있던 염불과 선정의 관계를 복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염불선정 수행의 무한한 가능성을 다시 열어 놓았다는 의미이다. 선사는 2400년 또는 2300년 동안에 묻혀버린 염불선정 계위문제를 일깨워주었다. 이는 동아시아 전통의 정토종 칭명염불과는 다른 차원의 염불선정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정법은 오히려 불교의 근본선법에 더 돌아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청화선사의 염불선정계위가 갖는 역사적인 의미는 초기불교를 잇는 아비달마 불교에서 굴곡된 염불선정을 근본으로 복원시키고 있다. 마찬가지로 동아시아 정토종에서 칭명염불과 분명한 대비점을 갖는 함의가 있다. 정토종식 칭불(稱佛)은 기본적으로 소리내어 말하는 발화(發話) 때문에 깊은 선정의 단계로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내적인 이유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선종과 정토종이 병립해 온 양상을 보여주었겠지만 청화는 구차제정으로 향하는 염불선정계위로 정토종을 넘어 바로 불교의 근본 염불선정으로 바로 연결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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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준호교수)15년 염불선과 선정계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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