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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자료/염불수행대전

2. 왜 이름을 부르는가

 

 

늘 부처님의 이름만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차라리 고통스런 지옥에 머물지언정

잠시라도 부처님 이름을 듣지 못하는

천상天上에는 나지 않겠나이다.

2. 왜 이름을 부르는가

 

누구에게나 이름이 있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동식물이나 사물에게도 이름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거나 불러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말도 다름 아닌 자신의 이름입니다.

교육 현자에서 많이 느낀 사실이지만, 교사가 아이들과 가장 빠르게 친해지는 비결은 바로 그들의 이름을 자주 불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있어 이름은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걸까요.

 

우리나라 선비들은 부모님이 지어주신 자기 이름을 신성시하여 가급적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름대신 자字나 호號와 같은 제2의 이름을 따로 만들었고 이름보다 훨씬 자주 사용했습니다. 조선시대 이황李滉의 이름은 황滉이고, 자字는 경호景浩이며, 호는 퇴계退溪입니다. 또, 이이李珥의 이름은 이珥이며, 자字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입니다. 추사秋史 김정희의 경우, 호號만 해도 200개가 넘었고(이름과 호를 무려 343개나 만들어 썼다는 기사가 최근 조선일보에 실렸음), 다산 정약용은 호號가 열 개정도 됩니다. 이렇게 이름 외에 자字나 호號를 굳이 여러 개씩 만들어 썼던 가장 큰 이유는, 이름을 되도록 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선비의 이름은 과거시험이나 재판 등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쓰였고, 또 선비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도 부모와 스승에 국한 되었습니다. 심지어 국왕도 선비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자字나 호號 또는 관직명을 사용하여 대신 불렀습니다. 선비들도 이럴진대, 한 나라의 왕은 어떠했겠습니까. 왕의 이름은 족보 등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절대 쓰지 않았습니다.

 

신하들이 올리는 상소문이나 외교문서 ․ 과거시험 답안지 ․ 교지敎旨 등을 작성하거나 궁궐 ․ 관청 등의 이름을 지을 때 왕의 이름이 들어가면 큰 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왕의 이름은 언어생활에서 아예 사용되지 않는 생소한 글자를 쓰거나 혹은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호 이외에도 우리 민족에게는 제2의 이름이 참 많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아명兒名이, 성년식成年式을 치르고 나서는 자字가, 나라에 특별한 공功을 세운 사람에게는 봉군封君이나, 시호諡號가, 문인이나 예술가들이 시서화詩書畵를 지을 때에는 필명筆名이나 예명藝名 등의 아호雅號가 스님들은 법명法名이, 천주교인들은 세례명洗禮名이 제2의 이름이었습니다.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읊었습니다. 어떤 사물에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그 사물은 비로소 의미 있는 존재, 본질적인 존재가 됩니다. 이렇게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 등은 큰 의미를 가진 성스러운 행위인 것입니다.

 

잠실의 불광사佛光寺를 창건하신 광덕光德스님은 「말이라는 것은 단순히 음성의 표현을 넘어 말이 담긴 의미를 실현시키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은 단순히 목의 성대가 진동해서 일정한 법칙에 의해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 깊이 깃든 진리의 파동입니다. 말은 말로 끝나는 공허한 것이 아닙니다. 말은 생각의 표현이며 생각은 마음의 진동이고, 마음에는 일체성취의 위덕威德을 지니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말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은 진리공덕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도 할 것입니다. 말은 믿음의 표현이며 깊은 마음의 형성으로서 말하는 말에는 그 내용을 이루게 하는 임이 있는 것입니다. 특히 진리를 긍정하는 말, 자성공덕自性功德에 부합되는 말은 진리자체의 발동으로서 그만큼 구체적 실현력을 지닌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진리 실상을 긍정하는 말은 진리의 힘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라고 하였습니다.

 

남회근 선생은「소리는 앞뒤, 좌우, 상하, 내외, 시방十方에서 장애가 없기 때문에 청정 원만하게 통달하여 도道의 경계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엄마’라는 단어입니다. 아기가 ‘엄마’ 하고 부르는 일만큼 기쁜 일이 어디에 있을까요. 아기가 엄마를 부르더라도 엄마는 기쁜 마음으로 아기를 쳐다보고 달려가는데, 하물며 일체의 지혜와 한량없는 자비심을 가지신 부처님을 우리가 일념으로 부를 때에는 어떻겠습니까. 일찍이 아미타불의 후신後身이라 숭앙받는 중국 당나라의 선도善導화상은 이런 게송을 남겼습니다.

 

입으로 늘 부처님을 부르면 부처님께서 곧바로 들으시며

몸으로 늘 부처님께 예경하면 부처님께서 곧바로 보시며

마음으로 늘 부처님을 생각하면 부처님께서 곧바로 아시니

중생이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생각하면 부처님도 그리하신다.

 

우리가 입 밖으로 내는 말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잘 될 거야’와 같이 좋은 말을 만 번 이상 하면, 그 말은 진언眞言이 되어 알 수 없는 큰 힘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미타불이라는 이름은 모든 부처님들께서 한결같이 찬탄하시는 이름이고, 또 수많은 성현들과 선지식들께서 아미타불의 이름을 친히 부르며 서방정토에 왕생하시기를 발원하신 것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중생들에게도 아미타불을 부를 것을 간절히 권하셨고, 또한 아미타불이라는 명호는 수천 년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공경심을 가지고 우러르며 불렀던 이름입니다. 그러하기에 아미타불은 사람의 이름과는 달리 무량한 공덕이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서聖書〉에도 기독교의 창조신인 야훼(여호와)나 그의 독생자이신 예수의 이름을 부르라는 대목이 곳곳에 보입니다.

사도행전 2장 21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하였고, 요엘2장 32절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하였으며, 로마서 10장 13절에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이사야 12장 4절, 디모데후서 2장 22절, 고린도전서 1장 2절, 열왕기상 18장 24절, 사도행전 4장 7절 등 많은 곳에서 여호와나 예수의 이름을 부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말씀과 관습을 기록한 이슬람교의 성전인〈하디스〉에는 「알라(하느님)은 100에서 하나 부족한 99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느니라.

 

마음을 다해 알라의 이름을 외운 사람은 낙원에 들어갈 것이니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슬림은 99개의 묵주(Tasbih)를 돌리며, 알라의 이름을 자주 부릅니다. 그 행위는 알라의 이름을 기억하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그렇게 함으로써 높은 수준에 도달하려는 노력입니다. 하디스는 알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축복이라고 가르칩니다. 예를 들면, 부부 관계를 가질 때에, “오 알라여! 당신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을 사단(사탄)이 빼앗지 못하도록 우리를 지켜 주소서.”라고 알라의 이름을 부르면 그때 얻게 될 아이는 사단이 켤코 해치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슬람교의 최고 성전인 꾸란(코란)에 「일러 가로되, 자비로우신 알라께 구원하라. 너희가 무슨 이름으로 알라를 부르든 알라의 이름은 가장 아름다우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서 보면, 부처님을 비롯한 위대한 성인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종교에 상관없는 보편적인 수행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불보살의 이름을 불호佛號, 명호名號, 성호聖號, 덕호德號, 존호尊號라고 합니다. 부처님 이름 속에는 굉장히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의 이름에는 세속적인 복이나 출세를 바라는 뜻 내지 도덕적인 가르침 등은 담겨 있을지 몰라도 공덕은 담겨 있지 않습니다. 공덕이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은, 그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나에게 아무런 공덕도 생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이름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이름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무량한 세월동안 헤아리기 어려운 실다운 공덕 즉, 일체의 선법善法과 육바라밀과 팔정도八正道와 선정禪定 등을 무수히 쌓아 세워진 것입니다.

 

정공법사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은 부처님이 갖고 계신 공덕을 자신의 공덕으로 바꾸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남회근 선생은 「일체의 모든 불보살의 이름은 마음대로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 가운데는 불보살의 발원과 공덕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하기에 부처님의 이름은 지극히 성스럽고 존귀하며 따라서 인간과 천인들을 우러러 찬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늘 부처님의 이름만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차라리 고통스런 지옥에 머물지언정 잠시라도 부처님 이름을 듣지 못하는 천상天上에는 나지 않겠나이다.」

천상은 우리 인간이 사는 사바세계보다 수명이나 복덕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로서 안락하고 즐거움이 가득 찬 세계입니다. 그러한 천상에서 살더라도 만약 부처님의 이름을 듣지 못한다면 차라리 부처님의 이름을 들을 수 있는 지옥을 택하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이름을 들을 수 없어, 성불은커녕 언젠가 복이 다하면 다시 삼계를 윤회하고, 그러면 다시 타락하기 때문입니다.

 

불화佛畵나 불경佛經 또는 성현들의 초상화나 책들을 공경하고 정성으로 대하면, 공덕이 될 뿐만 아니라 선신善神이나 신장神將들이 지켜주고 보호해줍니다. 하물며 불보살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것이겠습니까.

 

이러한 만덕홍명(萬德洪名 : 만 가지 덕을 갖춘 위대한 이름인 아미타불을 뜻함)을 우리가 일념으로 부를 때에 우리에게 공덕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즉, 부처님의 이름과 같이 무량한 공덕을 함축하고 있는 이름은, 우리가 그 이름을 간절하게 부를 때에는, 우리가 부처님의 공덕을 무한정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불선念佛禪을 주창하셨던 청화스님은 「부처님 이름은 그 자체가 불가사의하다.」고 하셨고, 원효대사는 「부처님 이름은 만겁이 지나도 (그 공덕은) 다함이 없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익대사는 「부처님 이름을 한 번 부르면, 한 번의 소리가 불가사의하다. 부처님 이름을 열 번, 백 번, 천 번, 만 번, 무량하고 무수히 많게 부처님 이름을 부르면 소리소리 마다 모두 불가사의하다.[持一聲 則一聲不可思議 持十百千萬無量無數聲 聲聲皆不可思議也]」라고 하였습니다.

수천 년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경과 찬탄의 대상이 되어 온 부처님의 이름․․․․․․

이 책은 부처님의 이름을 간절하게 그리고 일심으로 부르면 어떠한 공덕이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수행법인 염불이 얼마나 불가사의한 것인지도 알려줍니다. 염불은 더 이상 무식한 노인들이나 읊조리는 저급한 수행법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다만, 의심하는 마음만 없으면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재물, 그리고 나를 사랑해주고 보살펴주는 사람이나 가족은 우리가 죽을 때에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생전에 쌓은 많은 선행善行들은 죽을 때 도움은 되지만 구경究竟이 아닙니다. 유루인有漏因 또는 유루복有漏福에 불과합니다. 이 말의 뜻은 이 책을 읽다 보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나무아미타불’을 많이 불러 다 함께 극락에 왕생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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