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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자료/염불수행대전

1. 근본적인 물음

입으로 늘 부처님을 부르면

부처님께서 곧바로 들으시며

몸으로 늘 부처님께 예경하면 부처님께서 곧바로 보시며

마음으로 늘 부처님을 생각하면

부처님께서 곧바로 아시니

 

중생이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생각하면

부처님도 그리하신다.

1. 근본적인 물음

 

누구는 남자로 태어나고 누구는 여자로 태어납니다.

누구는 일찍 죽고 누구는 오래 삽니다.

누구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누구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납니다.

누구는 몸이 건강한데 누구는 질병이나 장애를 안고 태어납니다.

누구는 총명한데 누구는 한없이 어리석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요.

 

우리는 지구라는 행성에 우연히 태어난 걸까요.

우리는 이 지구에 태어나기 전에 어디에 있었을까요.

우리는 죽으면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기독교의 교리처럼 사람은 한 번 죽으면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 것일까요.

아니면 불교의 가르침대로 끊임없이 육도六道를 윤회하는 것일까요.

 

신이 우주를 창조하였는지

영혼은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

천국과 지옥은 정말 있는지

진화론과 창조론중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전생은 과연 있는 것인지

장애자로 왜 태어나는 것인지

태어나서 얼마 못살고 죽는 아기들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운명이나 팔자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관상 또는 점을 치는 행위들은 미신인지

착한 사람이 왜 고통을 겪고 악한 사람이 왜 부귀영화를 누리는지…

 

이런 많은 의문들에 대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수행을 해온 수행자라면, 또 종교에 몸을 담고 있는 성직자라면 이런 의문들에 대해 답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답을 할 줄 모르거나 자신이 없다면 내려와야 합니다. 이런 의문들에 대해 답을 할 줄 모른다면 성직자로서의 자격이 없는 거겠지요. 남회근 선생은 「유가儒家에 ‘(유학에 대해) 한 가지라도 모르면, 이는 유자儒者의 수치다.[一事不知 儒者之恥]’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물며 출세간법出世間法인 불학佛學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종교에서 가장 큰 죄는 뭘까요.

기독교에서는 가장 큰 죄가 하느님을 망령되이 일컫거나 하느님을 부정하는 등 신성神聖을 모독하거나 부정하는 일입니다. 불교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정법 正法을 비방하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정법은 부처님의 말씀 또는 가르침을 말하는데, 정법을 비방한다 함은 예를 들어, “부처는 없다.” “석가모니가 한 말들은 다 거짓이다.” “불경에서는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 “불경에 나오는 불보살이나 천신들은 다 꾸며낸 것이다.” “대승경전은 부처님의 친설 親說이 아니다.” 등과 같이 불교를 부정하거나 삼보三寶와 대승大乘을 비방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에 못지않게 큰 죄가 바로 대망어大妄語입니다. 대망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불경을 왜곡하여 거짓으로 가르치거나, 잘못 가르치거나, 또는 자기가 부처라고 내세우거나, 부처나 아라한과 같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대망어의 업을 짓는 사람은 무간지옥에 떨어져 무량한 세월 동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을 받는데, 부처님도 그 사람이 지옥에서 나올 때를 알지 못한다고 하셨을 만큼 그 죄가 큽니다. 인광대사는 대망어죄의 경우, 그 죄가 오역죄五逆罪보다 백천만배나 더 크다고 하였습니다.

 

성직자나 수행자들은 이 점을 분명히 알아 함부로 입을 놀리거나 잘못 가르치거나 불경이나 성현의 말씀을 멋대로 왜곡하여 출판하는 일이 절대 없어야 합니다.≪대집경大集經≫에 「경문經文은 하나인데 강의하는 자가 설명을 다르게 할뿐만 아니라, 각기 자기의 견해 見解대로 강의하여 결국 정법 正法을 허물고 어지럽히니 천신 天神이 화를 내어 삼재三災가 한꺼번에 일어난다. [經文是一 講者異說 各恃己見 壞亂正法 天神瞋故 三災俱起]」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직자나 수행자들 그리고 부처님의 말씀을 강설하고 해설하고 출판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귀담아 듣고 가슴에 새겨야 할 구절입니다. 저 또한 이 책을 만들면서 위 구절들을 늘 생각하고 경계하였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사람이 딱 한번 태어난다고 하고, 죽으면 바로 하느님의 심판이 있어서 천국과 지옥으로 가며 거기서 영원히 한다고 합니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참고로 불교 교리의 핵심은 삼세인과三世因果와 육도윤회六道輪廻입니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에서는 윤회를 대체로 인정하고 있었음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생존 당시 윤회설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또 받아들여졌습니다. 3세기 기독교 사상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던 성서학자인 오리게네스는 윤회를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플라톤의 경우 그의 명저 〈국가론〉을 보면 천상이나 지옥에서 온 사람들이 다시 윤회하기에 앞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플라톤은 〈상기설想起說〉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쉽게 얻어지는 지식은 영속적인 자아가 전생에서 이미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쉽게 복구되는 것이다.」 만물의 근원을 ‘수數’라고 주장한 피타고라스는 「내가 떠난 것 같지만 언젠가 다시 돌아와 너희들을 가르칠 것이다.」 고 하면서, 인간의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는 신神과 같은 것이었으나, 지나치게 탐하는 욕심과 결핍된 욕망으로 인해 육체의 감옥 속에 갇혀 영원히 죽지 않는 신의 힘을 잃어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태에 빠진 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서로 나뉘어 떨어져 서로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관계로 변화고 말았기 때문에 죽게 되면 영혼은 육체로 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며, 이 영혼은 다시 아무 육체나 찾아 들어가 태어나게 되는 순환운동에 의해 영혼은 전생轉生된다고 믿었습니다.

 

그 후, 기독교가 로마와 만나게 되었고 급기야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로마의 국교國敎로 자리 잡게 되면서 윤회는 성경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서기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公認하면서 성서에 실렸던 전생과 윤회에 관한 구절들을 삭제하기에 이릅니다. 6세기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독단적으로 윤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553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하여 윤회를 가르쳤던 오리게네스와 그 지지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였습니다. 현재, 유럽에서 기독교 인구가가 급격하게 감소하는 이유들 중의 하나는, 기독교에서 부정하고 있는 윤회를 많은 사람들이 진실이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윤회를 허황된 이야기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윤회는 과학적으로도 증명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한국의 지운知雲스님은 「5세 미만의 아이들을 보면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이 많아요. 그래서 미국의 버클리 대학에서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이라고 해서 전 세계에 전생을 체험한 사람들을 기록한 책이 나왔어요. 그러면 죽어서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지 않고 지옥 가거나 천국 가거나 둘 중에 하나로 결정 되어 있는 그 세계를 얘기 했을 때,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을 어떻게 증명할 것이냐. 기독교는 증명을 못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9살밖에 안 된 아이가 어떻게 영어 등 4개 외국어에 능통할 수 있을까요.

7살도 안 된 아이가 어떻게 교향곡을 작곡할 줄 아는 것일까요.

 

이런 사례들은 무수히 많은데, 만약 전생이 없다면 무슨 방법으로 설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전생이라는 것이 없다면, 무수히 많은 모순들과 직면하게 됩니다.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누리는 복이 다르며 태어나는 곳이 다르고 착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없이 악한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윤회는 엄염한 현실이고 과학이며 진리입니다. 윤회는 이 우주를 관통하는 대원칙이며 우주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한사코 윤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구약성서의 상당부분이 주변 국가들의 신화를 모방하고, 특히 조로아스터교(배화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점, 신약성서의 상당부분이 ≪법화경≫을 비롯한 불경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법화경과 신약성서〉(민희식 지음, 블루리본 출판사)를 보시면 알 수 있고, 인터넷 검색창에 ‘기독교는 불교카피인가?’를 치시면 더욱 상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13세부터 30세까지 인도 등지에서 요가와 불교 등을 배웠다는 것도 점차 사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기독교는 이러한 사실을 극구 부인하면서 불교를 공격하고 무시합니다. 저는 이런 상황들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이 방면에 대한 연구와 노력이 많아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남을 의식하고 남과 비교하며 남과 경쟁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혼탁하고 혼란스럽습니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질병이 속속 생겨나고 있고 전쟁은 그칠 줄 모르며 천재지변이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종말이 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가르칩니다.

 

불교는 이 시대가 말법末法시대라 합니다. 말법은 부처의 가름침은 남아 있지만 수행과 깨달음이 없는 시대를 가리킵니다.≪월장경≫에 「말법시대에는 수억의 중생이 행 行을 일으켜 도를 닦아도 깨달음을 얻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我末法時中 億億衆生起行修道 未有一人得者]」라고 했습니다. 또 이 시대는 ≪금강경≫에서 말한 오탁악세五濁惡世입니다.

물질은 흘러넘치고 삶은 편리하고 안락하지만 갈수록 외롭고 우울하고 폐쇄적인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상대도 없고, 내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고 씻겨주는 영적 지도자나 성직자도 없습니다. 종교가 세상을 걱정해주는 게 아니라 세상이 종교를 걱정해주는 시대가 되어버렸으니까요. 그러하기에 우리는 술과 도박과 TV와 인터넷과 명품에 빠져 삽니다.

 

나를 인정해주고 내 얘기에 귀기울여주고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을 그리워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영적인 가르침에 몹시 목말라 합니다. 내가 죽으면 어찌 되는지, 지옥에 안 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통 없이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을 듣고 싶어 합니다. 종교는 여기에 대답을 해줘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무조건 믿으라고 하면 믿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지식이 많다고 자부합니다. 아는 것이 많다고 우쭐해 합니다. 반면에 과거 우리 조상들은 현대인들에 비해 지식도 적고 무식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은 한문과 유교에만 파묻혀 고리타분하고 편협한 사고방식을 갖고 살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현대인들은 과연 과거의 성현들이 펴낸 〈주역〉이나 〈노자〉나 〈천부경〉등을 능가하는 책을 펴낼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고대에 만든 건축물이나 물건들은 어떨까요. 예컨대, 우리나라 청도기 시대의 유물인 ‘다문세문경多鈕細文鏡(국보 제141호)’을 현대의 과학기술로 만들 수 있을까요. 이 다뉴세문경은 지름이 21.2㎝에 불과한데, 좁은 공간에 무려 1만 3000개가 넘는 정교한 선을 새겨 넣었습니다.

 

선과 선사이의 간격은 0.3㎜에 불과합니다. 또, 선과 골의 굵기는 약 0.22㎜, 골의 깊이는 0.07㎜정도이며 한곳도 빈틈없이 절묘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에밀레종은 또 어떻습니까. 에밀레종을 현대의 과학기술로 만들 수 있을까요. 종 자체는 만들 수 있지만, 그 오묘한 종소리는 절대 재현해내지 못합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상감청자나 불화佛畫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과거에 살다간 우리의 조상님들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옛 사람들의 지혜와 기술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중에 대부분 망상과 집착과 번뇌를 하며 살아갑니다. 탐진치 속에서 온갖 죄를 지으며 삽니다. 그러면서도 두 가지 큰 착각을 합니다.

 

자신은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 쉽게 죽지 않을 거라는 것과, 자신은 늙지 않고 오래 오래 살 거라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노인들을 보고도 자신만큼은 늙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혹시라도 자기가 늙어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되거나 불치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곧바로 자살하면 그만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자살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걸까요. 남회근 선생은 「사람의 몸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이 생명 존재는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교에서는 자살을 계율을 범하는 것으로 여기고 자살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자살은 도리어 당신 자신이 죄에다 죄를 더하는 것입니다. 형기刑期가 끝나지 않았는데 탈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더욱 고통을 당해야 하고 형벌도 가중됩니다. 그러므로 자살은 해탈하는 방법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매일 방송이나 신문에 유명인이나 자신의 이웃이 죽는 소식을 보거나 듣고도 무감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인간계 위에 사천왕천四天王天이 있고, 그 위에 도리천忉利天이라는 천상세계가 있습니다. 십선十善을 닦아야 갈 수 있는 세계로서 욕계欲界에 속합니다. 이 천상세계에 사는 천인들의 수명은 1천세로, 인간세상으로 따지면 10만년입니다. 인간이 100년 정도 사니까, 인간의 한평생이 도리천 천인들에게 하루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하루밖에 못사는 하루살이를 보고 비웃듯, 천인들은 우리 인간들을 비웃을 겁니다.

 

우리는 옛 성현의 말씀과 부처님의 경전을 믿지 않습니다. 도를 행하면 세상의 고통을 면할 수 있다는 도리를 믿지 않습니다. 죽은 뒤에 영혼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착한 일을 하면 좋은 과보를 얻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과보를 받는 진리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이렇게 마음은 닫아두고 뜻은 열지 않다가 목숨이 마치려 할 때엔 두려움과 뉘우침이 함께 일어나나, 미리부터 착한 업을 닦지 않다가 죽음에 임해서 뉘우치니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사람이 죽을 때가 오면 후회와 두려움이 동시에 찾아온다고 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요. 죽음입니다. “보살(성현)은 원인을 두려워하고 범부는 결과를 두려워한다.[菩薩畏因 衆生畏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범부는 결과만 두려워 할 뿐 정작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한 원인에는 무관심합니다. 성현은 원인을 두려워하기에 말과 행동과 마음을 늘 삼가고 살핍니다. 그런 인因을 지었기에 과果는 안 봐도 뻔합니다. 당연히 좋은 과보가 오겠지요. 그러니까 결과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금강경≫에 「부처는 참된 말을 하는 자이고 부처는 진실한 말을 하는 자이고 부처는 실상반야를 말하는 자이고 부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자이고 부처는 서로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이다.[如來 是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誑語者 不異語者]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는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무조건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이 책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옛날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고승들이 출가한 이유는 삶이 무상해서 또는 가족이나 친척들의 죽음을 보고 충격이나 허탈감이 느껴서 또는 인생이나 우주에 대한 의문이 생겨서 또는 불교를 위한 큰 사명감 등이 생겨서 등입니다. 이 사람들은 출가해서 모진 수행의 길을 스스로 걸어갑니다. 그 과정에서 겪는 고통이나 모욕이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꿋꿋이 수행을 해 나가서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과위 果位를 얻는다는 말입니다.

 

과위를 얻는다는 것은 예컨대 초선初禪/ 이선二禪/ 삼선三禪 / 사선四禪이나, 수다원과 須陀洹果/ 斯陀含果/ 阿那含果/ 阿羅漢果, 더 나아가 보살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수행의 첫 단계인 초선初禪의 과위만 하더라도, 모든 욕락欲樂과 불선법不善法으로부터 벗어나 잡념과 망상이 없어지고, 모든 중생을 부처님 화신으로 다시 보게 되며, 몸과 마음의 생리가 바뀌고(검은 머리카락이 다시 나고 여성은 생리를 시작하는 등), 죽으면 욕계欲界를 떠나 색계色界에 태어나는 경지입니다. 하지만 남녀의 음욕은 완전히 떨치지 못했고, 진짜 삼매에 들지도 못한 초보 단계입니다. 하지만 초선의 과위를 증득하는 일도 굉장히 어렵습니다.

 

아무튼, 과위를 얻게 되면 인생과 우주에 대한 의문이 풀리고, 경전에 있는 말씀들에 대해 막힘이 엇이 훤히 알게 되며, 아울러 오신통五神通도 어느 정도 생겨납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과 천인들로부터 공경과 찬탄의 대상이 됩니다. 왕의 국사國師가 되기도 하고 제자들을 길러내기도 하며, 한 종파宗派를 만들어 조사祖師가 되거나 조사의 맥脈을 잇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 책을 남기기도 하고, 또는 설법을 하기도 하며, 제자들이 스승의 어록을 글로 남기기도 합니다. 이들이 갖은 고행을 하면서 수행을 하고 큰 깨달음을 얻은 후 남긴 어록이나 책들이나 일화 등은 온통 거짓말로 가득할까요. 만약 거짓말을 그렇게 남겨놓았다면,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거짓말을 남겨 놓은 것일까요. 한낱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위해서일까요. 중생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면 어떤 벌을 받는지도 누구보다도 잘 아실 텐데 그런 일을 애써 벌일까요.

 

우리, 이제는 우리의 얕은 지식과 어설픈 잣대로 성현들을 함부로 평가하거나 의심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부디, 믿는 마음을 가지고 이 책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아까 제시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는 찾을 수 있을 것이고, 나머지는 직접 수행의 길을 걷다보면 풀릴 것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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