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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진리의 길4.(1)

 

 

진여불성과 하나 되는 길

 

* 불교는 정말로 우리 인생의 보배로운 가르침이지만, 부처님을 간절히 생각하고 또 부처님의 명호를 외는 염불의 가르침과 우리의 이상향인 극락세계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참다운 종교적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만큼 염불과 극락세계라는 것은 아주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은 정토삼부경에 있는 하나의 경입니다. 그래서 관무량수경의 전체 내용이 어떤 것인가를 대강 말씀드리면, 관무량수경의 관은 볼 관觀자, 무량수는 한도 끝도 없는 그런 영생의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 아미타불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무량수불입니다. 영생의 생명이란 뜻입니다. 아미타불이란 것은 상대적 존재가 아니라, 생명 자체, 우주 생명 자체, 또는 우리의 본래면목 자체가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따라서 아미타불의 이름은 그때그때 경우에 따라 굉장히 많습니다. 영원한 생명 자체라, 이런 때는 무량수불인 것입니다. 아미타불 가운데는 자비나 지혜나 모든 공덕이 한량없이 많다. 한량없이 지혜 공덕이 충만해 있다, 이런 차원에서 의미할 때는 무량광불입니다.

 

* 무변광불이라, 끝도 가도 없이 광대무변해서, 한도 없는 우주의 모두를 포섭해 있다는 이른바 공간성을 초월한 그러한 생명입니다. 이런 때는 무변광불입니다. 이렇게 아미타불에 대해서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청정하다고 해서 청정광불, 헤아릴 수 없다 그래서 부사의광불, 또 한도 끝도 없는 행복이라 해서 감로왕불입니다. 영생의 생명수가 감로수 아니겠습니까? 영생하는 생명 자체이기에 감로왕불입니다. 이와같이 이름 자체에 불교의 공덕이 모조리 다 포괄되어 있습니다.

 

* 아미타불은 우리의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극락세계도 분명히 우리 불교인들의 이상세계일 뿐만 아니라, 일체 존재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 인간 존재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이 극락세계로부터 와서 극락세계로 간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방편을 떠나 사실 그대로 말하면, 이 세계 이대로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이런 것도 우리가 이야기하기가 곤혹스럽지 않습니까? 혼란스럽고 여러 가지 제약이 많은 이런 사바세계가 어떻게 해서 극락일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것도 우리가 이야기하기 곤혹스럽지 않습니까? 혼란스럽고 여러 가지 제약이 많은 이런 사바세계가 어떻게 해서 극락일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것도 여러분들이 의심을 품을 수 있지요. 그러나 이런 것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론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우리 불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는 무엇인가? 외도와 불교(정도)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삼법인三法印입니다. 삼법인이 있으면 정법이라 말하고, 삼법인이 없으면 정법이 아닌 외도라고 합니다. 그럼 삼법인은 무엇인가? 먼저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모든 것은 결국 무상합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어느 것도 고정된 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리고 덧없다는 말입니다. 인연 따라 이루어진 것은 고유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 인간 존재의 눈에 비치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바꿔 말해서 유위법입니다. 상대 유한적인 법은 모두가 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나투는 것입니다.

 

* 따라서 그것은 상만 있는 것이지, 성품이 없단 말입니다. 여러분들 금강경을 자주 보셔서 아시겠지만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입니다. 상대 유한적인 법이나 대상화시킬 수 있는 그런것은 여몽환포영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거품같이 실체가 없습니다.

 

* 일체 만법은 허망무상한 것입니다. 인연 따라 이루어진 것은 제행무상입니다. 다른 종교나 철학에는 제행무상같은 명백한 가르침이 없습니다. 따라서 외도와 정도의 차이가 거기에 있습니다. 인연 따라 이루어진 현상적이고 상대유한적인 것은 모두가 무상합니다. 고유한 것 없이 순간순간 변화해 마지 않습니다. 공간성도 시간성도 없습니다.

 

* 무엇이 있다는 것은, 어느 공간에 고유하게 존재하고 어느 시간이 있어야 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인식의 패턴이란 것은, 내내야 그런 시간성 공간성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현대 물리학에서 가장 천재적인 아인슈타인 등이 제행무상이란 소식을 방불하게 말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연기법을 방불하게 설명합니다.

 

*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도, 일체 존재란 것은 상대적으로 있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있지가 않다고 말합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도 역시 일체 존재의 운동량을 바르게 측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위치를 측정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대체로 어름어름하게 측정이 되겠지마는, 전자라든가 중성자같은 미시적인 단계에 이르면 측정이 안되는 것입니다. 운동량을 바르게 측정하려면 위치를 측정할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대체로 확률적으로 말하는 것이지,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이 있으니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도 소멸한다는 연기법의 사상과 상대성의 이론은 서로 상응하는 도리입니다.

 

* 모두가 서로 어울려서 모양을 내는 것이지, 단독으로 모양 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인연 따라 인과 연이 합해져서 모양을 내는 것이지, 고유한 것은 절대로 없습니다. 아무튼 천재적인 현대 물리학자가 우리 불교의 인연법을 그대로 말했습니다. 물론 다는 말을 못하겠지요. 왜 다 말을 못하냐 하면, 그 사람들은 인연법의 가장 근원적인 것은 무엇인가, 이런 것은 모른단 말입니다. 인연뿐만 아니라 가장 근원적인 원인이 무엇인가, 이것까지도 분명히 깨달은 분이 부처님이고 역대 조사입니다. 가장 근원적인 것을 모르면, 불교가 성립이 안됩니다.

 

* 제행무상이라, 고유한 것은 아무 것도 없이, 모두가 상대적으로 잠시간 상을 냈을 뿐입니다. 상은 현상적이기 때문에 실체가 아닙니다.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아까 금강경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입니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나 거품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있지 않습니다.

 

* 제법무아입니다. 모든 존재는 무아라, 나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나라고 할 것이 없으므로 내 소유가 없습니다.

 

* 부처님 법은 명백합니다. 금강경에서 보면, 부처님 말씀은 여어如語라, 진리 그대로 말씀했단 말입니다. 또는 진어眞語라, 진리만 그대로 말씀했단 말입니다. 또는 불이어不異語라, 다른 것은 절대로 말씀하시지 않았단 말입니다. 또는 불광어不誑語라, 어느 누구도 속이는 말씀이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 법은 진리 그대로 말씀하시고 바로 그것이 진리고, 또 진리 아닌 것은 조금도 없고, 또는 우리 중생을 속이는 말 역시 조금도 없습니다.

 

* 부처님 말씀 보고 결정설決定說이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사자후같이, 사자의 포효하는 소리같이, 모든 외도나 모든 삿된 것을 절복折伏시킵니다. 따라서 부처님 말씀은 결정설이라, 꼭 사실대로 말씀했습니다. 결정설이 무엇이냐 하면,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實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불성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 사람은 유정중생이니까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일반 다른 동물이나 다른 식물은 어떻습니까? 불교에서 일체 중생을 말할 때는, 인간만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두두물물 산하대지, 우주공간에 떠 있는 온갖 물체 등 그 어떠한 것도 일체 중생의 범주에 다 들어갑니다. 모든 중생이 다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지고 있다는 것은, 심장에 가지고 있거나 다른 데 가지고 있거나 하는 부분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 불성이란 것은 물질이 아니고 하나의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분명히 있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불성이란 것은 우리 마음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인 동시에, 우주의 생명입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가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모든 존재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그 말씀은, 부처님의 사자후같은 결정설이고 확실하고 단호한 진리이기 때문에, 여래상주무유변역如來常住無有變易이라 합니다. 그 여래는 바로 부처님인데, 부처님이 항시 계시면서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오늘 계시다가 내일 안 계시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과거나 현재나 언제나 부처님은 존재하는 생명 자체입니다.

 

* 모든 것이 공해 버린 실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은 반야심경에 여실히 나와 있습니다. 물질을 구성한 지수화풍 그런 것도 다 공한 것이고, 또는 우리 관념을 구성한 수상행식受想行識등 모든 것이 다 비어 있습니다. 이른바 오온개공五蘊皆空입니다. 오온개공은 현대 물리학보다 훨씬 철저한 우주물리학입니다. 모든 것이 공한 그 자리는 불생불멸이라, 모두가 공해 버렸거니, 그 남(生)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무엇이 있고 저것이 있고 그래야 생사가 있고 죽음(死)도 있고 남(生)도 있는 것이지, 모두가 공한 그 자리, 제법이 공한 그 자리는 생사가 없습니다. 또는 더러운 것도 청결한 것도 없습니다. 물질이 되어야 더럽고 깨끗하고가 있을 것인데, 물질이 아닌 순수 생명이기 때문에, 더럽고 또는 청결할 것이 없습니다. 또한 동시에 더하고 덜함도 없습니다.

 

* 우리가 염불하고 극락세계를 추구할 때는, 이것저것 다 떠나서 순수하게 감성感性으로 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적어도 부처님의 교리를 따질 때는, 정말 명석하고 철학적인 사색이 필요합니다. 사유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고도한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칸트철학이나 니체철학도 미처 모르는 소식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공부를 많이 하셔서 칸트의 물자체物自體(Ding an sich)란 개념도 아시지요? 물질이 본래 무엇인가, 이것이 물자체인데, 칸트 말이, 그 물질이 본래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른바 중생 인식 주관으로는 볼 수가 없는 그 자리가 바로 물자체입니다.

 

* 우리 인간이 본다는 것은, 우리 인간 존재, 인간 정도의 업장을 가진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는 것이지,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사실의 실상을 보시는 것인데, 우리 중생들은 지금 가상을 봅니다. 허상을 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유한적인 존재란 것은, 결국은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나 거품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그와같이 인연 따라 생겨난 것, 이것은 제법이 무상한 것이고,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고유한 것이 없고, 때문에 나라고 할 것도 없고 내 소유라 할 것도 없습니다.

 

* 나라는 것도 진리에서 보면 허망한 것이구나, 내가 허망한데 하물며 나한테 붙어 있는 권속이나 재산, 지위 같은 것도 또한 허망한 것이구나, 이렇게만 분명히 알아도 우리가 집착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확실히 아는 것은 아직은 아닙니다. 깊은 수행을 통해서 체험해야 하는 것인데, 체험을 못한다 하더라도 우선 이론적으로라도 따지고 따지다 보면 결국은 모두가 다 무상한 것이고, 또는 무상한 것이니까 나라고 할 것도 없고 내 소유라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거기까지만 가 버리면, 제법이 공이라는 도리는 알아서 공소식을 안다 하더라도, 영생불멸한 극락세계를 우리가 긍정하기는 어렵단 말입니다.

 

* 불교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열반적정涅槃寂靜입니다. 모든 것을 다 초월해서 영생의 행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모든 존재는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제행이 무상하고, 그러기 때문에 제법이 무아라, 나라는 것이나 저것이나 어떤 것이나 고유한 존재가 없습니다. 따라서 내 소유도 없는 것이고 내 권속도 잠시간 인연 따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 금생에 만나 있다 해서 내생에 꼭 같이 만날 것도 아닙니다. 아무튼 금생에 잠시간 인연 따라서 모두가 만나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법이 나랄 것도 없고 내 소유라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허망무상한 것은 허망무상하지만, 허망무상의 진실, 본체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영생 불멸한 불성 열반입니다. 영생 불멸한 그 자리가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의 본체는 이대로 있는 현상의 실체 자체가 영생 불멸의 실체입니다.

 

* 우리 인간 존재의 실상, 그 허망무상한 본래의 참다운 자리가, 이른바 부처님의 법신이고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관무량수경에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염불수행자 인중분다리화念佛修行者 人中芬陀利華라, 가장 청정하고 향기로운 연꽃이 분다리화입니다. 그래서 염불수행자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참답고 향기로운 연꽃같은 그런 존재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외도와 정도를 알면 더욱 좋겠지요. 그러나 그런 철학적인 깊은 것을 모른다 하더라도 그냥 우리가 영생 불멸한 실상 자체의 이름을 외우는 자는, 그대로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향기로운 연꽃과 똑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위기승우觀世音菩薩 大勢至菩薩 爲其勝友라, 그런 관세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 등 위대한 보살들이 그의 가장 훌륭한 친구가 됩니다.

 

* 부처님의 심오한 뜻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염불하는 사람은 그냥 보통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뜻을 모르고 한다 하더라도 염불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 가운데 가장 향기로운 연꽃인 것입니다. 동시에,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이나 또는 보현보살이나 그런 보살들이 가장 훌륭한 벗으로 삼는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무아미타불 또는 아미타불이 이 세상의 모든 개념 가운데 가장 고귀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적인 전문 용어로 말하면, 무생청정보주명호無生淸淨寶珠名號라, 생사를 초월한 보배같은 그런 명호란 말입니다.

 

* 이 세상에서 가장 깊고 가장 행복스럽고 가장 위대한 이름이 나무아미타불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다 떨쳐 버리고서 우주의 실상 자체를 의미합니다.

 

* 따라서 그런 최상의 이름을 갖는 부처님이니까, 그 이름 가운데 부사의한 공덕이 있습니다. 어떤 공덕이 있는가 하면, 삼세제불이 옹호할 것이고, 또는 동시에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기도 하고 가장 무섭기도 하고, 가장 자비스럽고 가장 지혜로운 길이기 때문에, 어떤 신장이나 나쁜 귀신이나 좋은 귀신이나 하늘의 천상에 있는 천신들이나, 모든 존재가 다 나무이마타불을 숭앙하고 받들어 지킵니다. 따라서 뜻도 모르고 나무아미타불 한 번 왼다고 생각할 때도, 그 나무아미타불의 공덕으로 해서 모든 신장이 우리를 다 지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이름이 나무아미타불입니다. 가장 권위가 있기 때문에, 나쁜 것들은 얼씬도 못합니다.

 

* 우리는 그러한 부처님의 부사의한 명호를 간직할 수 있는 인연을 가졌습니다. 불교를 믿는다 해도, 염불은 방편 가르침이고 화두를 들고 선방에서 애쓰고 의단疑團을 품고 해야 참다운 가르침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염불 공부와 비교할 때는, 사실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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