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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진리의 길4.(2)

 

 

우리가 선방에서 몇 십 년 동안 화두를 들고 이것이 무엇인가 저것이 무엇인가, 의단을 품는다 하더라도, 염불하는 마음이 화두하는 마음 밑바닥에 깔려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공부가 이어지는 것이지, 그냥 덮어 놓고 의심한다 해서 그것이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염불하는 마음이 왜 깔려야 하는 것인가, 참선이란 것은 내 마음의 주인공을 찾는 것이 아닙니까? 이른바 본체를 여의지 않는단 말입니다. 육조혜능대사의 가르침도, 선이라는 것은 본체를 안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두를 들어도, 본체를 떠나 버리면 그건 선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뭣고’ 화두를 드나, ‘똥막대기’ (乾屎厥)화두를 드나, 어떻게 들든 간에 똥막대기나 이뭣고나 그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산란스런 마음을 통일시켜, 본래 우리 생명이 부처이고 아미타불인데, 부처를 찾고자 해서 우리가 임시로 의심을 품은 것이지, 의심 그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화두를 드는 것도 좋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화두를 빨리 타파해서 의심이 없는 자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말이 전도가 되었습니다. 또한 의심 그것에 무엇이 붙은 것도 아니고 신앙이라는 것은 사실 의심이 있으면 안 됩니다. 의심이 있으면 신앙이라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백퍼센트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달마스님도 의심하란 말 한 마디도 안 하셨고,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더라도 의심을 내란 말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마조스님이나 백장스님이나 또는 임제스님이나 의심을 내란 말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중국 남송때 대혜스님이 비로소,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깨닫고 우리 주인공을 찾는 그런 하나의 방편으로 해서 의심하란 것이지, 절대로 목적은 아닙니다.

 

육조 혜능스님이나 그 뒤에 마조스님ㆍ백장스님ㆍ황벽스님ㆍ임제스님 그 분들은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곧장 사람 마음을 가리켜서 바로 깨닫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쪽의 선법은 그때부터 차근차근 이울어지고, 남송때 대혜종고스님이 낸 화두법이 당시에 융성했단 말입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고려때입니다. 불행히도 고려때 그런 법이 한국으로 수입되었습니다. 그때 중국은 송나라ㆍ원나라ㆍ명나라 아닙니까? 그 명나라때 불교가 상당히 융성했습니다.

 

명나라 때는 사대 고승이 있습니다. 누구인가 하면 운서주굉雲棲株宏ㆍ자백진가紫柏眞可ㆍ감산덕청憨山德淸ㆍ지욱우익智旭藕益하는 분들인데, 그분들 모두가 다 화두를 염불로 했습니다. 아미타불을 화두로 했습니다. 그런데 아미타불을 화두로 하는 염불선이 그 때 한국에 들어 왔으면 오직 좋으련만, 그 때가 불행히도 이조 오백년 때입니다. 우리 불교인들이 중국과 교류를 했습니까? 이조 오백년 때는 중국 불교와 한국 불교가 교류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조 오백년 동안은 전체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불교의 교화를 위해서나 우리 참선을 위해서나, 굉장히 큰 손해를 본 것입니다. 그 오백년동안 중국과 교류를 못했습니다. 명나라 때 사대 고승들이 염불하는 그런 풍조가 한국에 쑥 들어왔으면, 지금 한국 선방에서 그 화두한다고 끙끙 앓고 의심만 하는 그런 풍조는 있을리 만무합니다.

 

저는 화두를 비방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화두를 빨리 타파해서, 백퍼센트 의심없는 그 자리를 믿으라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요즘에 염불하는데 기왕이면 염불선을 하고 싶다, 그런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염불선의 체계 문제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말이 많이 있습니다. 염불을 꼭 자기식으로 해야 한다는 그런 분도 있고 여러 가지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염불은 꼭 고유하니 어떤 음정에 따라서 그렇게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소리 내도 좋고 안내도 좋고 다 좋은 것입니다. 계행 지키면서 염불하면 더욱 조혹, 계행을 지키지 못하면 못한 대로 염불해도 좋습니다.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또는 소리를 내고 안내고 상관없이 염불 하는 것은 어느 때나 좋습니다. 장사할 때나 밥 먹을 때나, 밥 먹을 때 소리내는 것은 어렵겠지요. 염불이라 하는 것은 부처를 생각하는 것이므로 소리를 안 내고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염불이란 것은 소리를 내고 안내고 상관없이 언제나 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빨리 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식으로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극락세계에 가서 보면, 극락세계에서 꼭 어떤 식으로 하란 법은 절대로 없습니다. 극락세계란 것은 그야말로 모두가 다 광명정토光明淨土라, 우리 사람같은 존재가 극락세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모두가 광명세계입니다. 몸도 광명 몸입니다. 그 물질이 아닌 광명으로 만들어진 무량의 몸입니다. 물질 아닌 몸이니까, 극락세계 중생은 개체個體인 동시에 바로 전체全體입니다. 자기 몸과 우주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의 몸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사실 극락세계 중생뿐만 아니라, 우리 중생도 우리 존재도 우리가 똑바로만 본다고 생각할 때는, 제법의 공자리를 느끼고 사실을 사실대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법의 공자리를 느끼고 불생불멸한 그런 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이 몸도 역시 개체인 동시에 전체입니다. 개체와 전체는 절대로 따로따로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과법을 알면 그냥 짐작할 수 있는 문제 아닙니까? 이른바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 중중무진이란 것은 모두가 다 한 고리로 얽혀 있다는 말입니다.

 

우주 전체가 하나의 몸인 것을, 우리 중생은 전체를 못 보니까 나 따로 너 따로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인연법이 가장 중요한 것은, 모두가 다 본래로, 우리가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본래로 하나의 몸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성품을 보지 못하고 중생의 상만 보니까, 나 따로 너 따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바로 볼 수만 있다면, 저절로 참다운 자비가 나옵니다. 참다운 무주상행無住相行을 하지 말라 해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데, 남한테 베풀면서 나라는 상을 내겠습니까? 따라서 그 근원적인 문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염불한다 할 때 일반 보통염불과 염불선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염불선이란 근원적인 문제, 본체를 여의지 않고 염불하면 그것이 염불선이 됩니다.

절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마음으로 그와같이 정말로 깨닫지를 못해서, 내가 증명證明을 못해서 천지와 내가 둘이 아니다는 소식은 모른다 하더라도, 천지 우주는 본래로 불생불멸이고 참다운 진여불성 자리가 바로 내 자성이기 때문에 진여 불성 자리를 안 여의고 염불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염불선이 됩니다.

 

부처님은 내 밖에 계신다, 이렇게 생각해서 할 때는 염불선이 못됩니다. 보통 염불은 됩니다. 그러나 그와같이 염불선이 못된다 하더라도, 또 염불을 열심히 하다 보면 마음으로 모아진단 말입니다.

마음이 모아지면 본래가 둘이 아닌지라, 결국 그때는 우주의 본체와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로 혼란한 시대입니다. 산업사회란 것은 무서운 사회입니다. 현재 우리가 너무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비하는 그 물질이란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인데, 사람 욕심은 한계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히 무시무시한 경쟁사회가 안될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사람은 사람끼리 화해할 수도 없고, 갖가지 폐단도 나오고 또 환경 파괴가 나오고 그러겠지요. 모두가 다 바른 진리를 모르는 무명심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폐해입니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는 가장 중요한 과제가 무엇이냐 하면, 모든 존재의 근원에다 우리 마음을 두는 일입니다.

 

생명의 본체에다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생명의 본체 이것이 불성이고 법신이고 또 진여불성이라, 부처님께서 마르고 닳도록 말씀하신 법신ㆍ진여ㆍ불성 또는 실상ㆍ실재, 또는 주인공, 이런 말씀이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입니다. 거기에 마음을 두어야 참다운 대승불교가 됩니다. 그 자리가 바로 열반이고 바로 극락입니다.

 

불생불멸한 진리를 바로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대로 사바세계가 극락세계입니다. 또는 우리 몸 이대로 나무아미타불입니다. 왜냐하면 전체 우주의 생명과 내 생명이 분열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 통일되어서 깊은 삼매에 들어서 정작 진여불성과 하나가 된다고 생각할 때는,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천지와 내가 둘이 아니고, 우주가 하나의 생명으로 다 통일되어 버립니다. 여기까지 꼭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생사윤회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선이 염불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잘못된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삼매는 참선과 거의 같은 뜻입니다. 우리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켜서 우주의 본생명 진여불성과 하나되는 것이, 이른바 참선의 목적입니다. 삼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이 삼매에 든다는 것은, 산란스런 마음을 쉬어서 우주의 본바탕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삼매 또는 참선 가운데서 가장 쉬운 방법이 무엇인가? 기왕이면 우리 불자님들 쉬운 방법으로 하시고 싶어 하시겠지요? 가장 쉬운 방법이 염불삼매입니다. 해 본 분들은 짐작하시겠지만, 우리 마음을 통일 시키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별별 생각이 다 나오지 않습니까? 그 생각을 하나로 모아 가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렇게 어려우니까 화두란 법도 나왔단 말입니다.

 

천재적인 분들이나 과거전생에 업장이 가벼운 분들은, 마조나 임제나 백장같이 그냥 바로 직지인심이 가능합니다. 그냥 바로 내가 부처란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범상凡常한 사람들은, 잡다한 정보과다 시대에서는 좀처럼 우리 마음을 통일시키기가 어렵습니다. 이른바 삼매참선에 들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때 가장 쉬운 방법이 염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두참선할 때도 병에 많이 걸립니다. 참선통이란 말입니다. 그와 같이 화두에 따르는 병은 있는데, 병을 다스리는 법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참선할 때 상기上氣가 되고 여러 가지 병이 많지 않습니까? 병 다스리는 것을 부처님 법으로 하면 참 쉽습니다. 이것저것 다 놔두고서 염불하면 다 고쳐집니다.

 

머리가 상기되어서 곧 깨질 듯해도, 의심하는 마음을 놓고서 천지 우주가 무량의 공덕을 갖춘 부처님으로 충만해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무아미타불 염불할 때면 다 풀립니다.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우리가 부처님 공부하 f때는 행복감이라든가 몸도 마음도 가볍고 그런 것을 느껴야 되겠지요. 법에 대한 기쁨도 없이 공부하기는 곤란스럽습니다.

 

극락세계의 이상향, 그 장엄한 세게, 우리 고향에다 마음을 두고 생각할 때, 우리 갈등은 바로 해소되는 것입니다. 아미타불은 영원한 무생청정보주명호라, 이름 자체에 일체 공덕이 갖춰져 있어서, 마음만 모아지면 참선병이라든가 세간의 병을 다 치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같은 사람은 나이를 많이 먹어서 그때그때 곤란스러울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무던히 많이 살았으니까, 생명이 혼수에 빠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때도 부처님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지속시키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다 풀려갑니다.

이 우주란 것이 그 부처님의 공덕으로 충만해 있어서, 정말로 마음이 부처님한테 모아지면, 차를 타면 차 엔진도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하고 있고, 바람불면 바람소리도 나무아미타불 하고 있습니다. 시냇가에 가면 시냇물도 나무아미타불, 신묘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염불을 하다 말다 하다 말다 하지 마십시오. 소리 낼 때는 내도 좋고 안낼 때는 안내도 좋지만, 소리 내는 것이 더욱 좋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소리를 나쁜 귀신들은 제일 두려워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쁜 것들이 우리한테 침범을 못합니다. 동시에 선신들은 법을 지키려고 해서, 우리가 염불하면 우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나 가장 소중한 공부방법이, 또는 우리 마음을 가장 쉽게 통일시키는 방법이, 바로 염불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법희라, 법에서 느끼는 행복, 또는 선열이라, 마음이 통일되면 통일된 데서 느끼는 행복이 굉장히 큰 것입니다.

 

어느 때나 극락세게는 꼭 가야 하는 것이고, 우리가 깨달아 버리면 바로 이대로 이 자리에서 극락세계의 영원한 행복을 다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극락세계의 이미지를 놓치지 마시고, 나무아미타불 염불해서 다시없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2000년 11월, 서울 동산반야회 초청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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