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라, 모든 존재는 어느 순간도 고유한 존재가 없습니다. 우리 세포도 역시 일초의 몇 천 분의 일초 동안도 세포가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신진대사하며 변화합니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조금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어느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존재란 것은 다 그러합니다. 다만 중생이 잘못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육안의 참다운 실상을 회복해서 천안통天眼通을 통해야 비로소 존재의 본바탕을 보는 것입니다.
* 우리 중생은 제 아무리 정밀한 현미경을 놓고 본다 하더라도, 물질이라는 한계내에서 보는 것이지, 물질을 떠나 버린 저쪽 세계는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모든 존재가 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 같다는 이 소식을, 아무리 섭섭해도 꼭 깊이 생각해 두셔야 합니다. 오직 문제는 생사해탈이라, 우리가 꿈을 깨서 참다운 진리를 향해 가는 것입니다.
* 우리 불자님들, 기왕에 실상염불을 하시려면, 제일 고도의 경지의 마음으로 염불을 하십시오. 실상염불이란 것은 그냥 마음으로 소리만 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본 바탕을 그대로 생각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 온 우주 전체가 다 부처입니다. 이 사람을 보나 저 사람을 보나 이것을 보나 저것을 보나, 길 가다 독사를 보나 무엇을 보든지, 그 모든 것이 본래가 부처입니다. 모든 것을 부처로 보는 것이 실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 불자님들, 우리의 본래 성품은 참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염불을 하시려면 그렇게 바르게 싨아염불을 하십시오. 실상염불을 해야 비로소 참다운 공功이 있단 말입니다. 실상염불의 공은 어디에다가 비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을 보나, 좋은 사람을 보나 나쁜 사람을 보나, 복 있는 사람을 보나 인상이 나쁜 사람을 보나 어떤 것이나 다 부처님으로 생각을 하면, 그때는 서로 상통이 됩니다.
* 내외가 살 때도 부인이 남편을 부처로 보고 남편이 부인을 부처로 보면, 그보다 더 좋은 관계가 어디 있겠습니까? 친지나 사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어떤 것을 보더라도 다 부처로 보는 실상염불을 하는 것이, 부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바라시는 염불법입니다.
* 부르노라고 하는 십육세기에 살았던 분이 있습니다. 도미니꼬 교회의 유명한 수사입니다. 또 니콜라스 콘돌라스라는 신학자가 있어요. 그분은 이른바 범신론자汎神論者였습니다. 기독교는 하느님만 믿는 일신론 아닙니까? 우리 불교 또는 힌두교와 같이 천지사물 일체존재와 우주자연이 바로 신이라고 하는 것이 범신론입니다. 그래서 자고로 이 범신론과 일신론 사이에서 서로 잦은 다툼이 있어 왔습니다.
* 신부인 니콜라스라고 하는 분은 추기경을 지낸 분인데, 교황 다음가는 높은 지위에 있던 분인데도 일신교가 아닌 범신론을 주장하셨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같은 그리스 철학을 공부해 가지고 거기에서 영향을 받았겠지요. 부르노라는 수사 역시 이 니콜라스라는 선배를 따라서 일신론이 아닌 범신론을 주장했습니다. 그 당시는 카톨릭측에서 범신론을 주장하는 사람을 제일의 이단으로 몰았습니다.
그래서 로마 교황청으로 잡혀가서, “그대가 살려면 이 범신론 주장을 포기하라”고 강요받았습니다. 용기가 없고 신념이 약한 사람이라면, 화형당하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그걸 면하기 위해서 “신념을 포기하겠습니다” 그러면 될 것을, 그 수사는 신조가 굳은 사람이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칠년이나 감금을 당했는데도, 그분은 칠년동안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칠년 후에 화형을 당했지요.
* 얼마 전에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한 신문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이 분한테 대해 로마 교황청에서 재판을 한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동설이라는 것을 주장했는데, 그 당시는 지동설과 천동설로 다툼이 많았습니다. 당시 카톨릭 사회에서는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하는 천동설이 지배했었습니다. 그것이 카톨릭의 세계관으로 확립되어 있었으므로,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하면 그 권위가 무너지고 세계관이 흔들리겠지요? 그래서 그 당시에는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전부 종교재판에 몰아서 화형시켰습니다.
* 갈릴레오도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따라 지동설을 주장했기 때문에 감감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 분은 부르노와 달리 신념이 약했던지, “지동설이 잘못되었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현혹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비판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자기 신념을 꺾었습니다. 그러니까 화형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팔년이나 감금당했습니다. 재판을 받을 때가 칠십세였는데, 칠십팔세로 죽을 때까지 집에서 감금당했습니다.
* 갈릴레이가 재판을 받고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요. 자기는 지동설을 주장했는데, 그 주장을 폐기하라고 해서 표면적으로는 폐기를 했지만, 자신의 신념을 부정할 수는 없어서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독단주의, 도그마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무섭습니다. 그 독단주의를 없애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 앞으로 종교를 어떤 방식으로 믿든지 간에, 절대로 독단적인 사고를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독단주의를 지양해서 정말로 성자의 바른 자세로 종교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그 현상적인 문제는 상대적인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아셔야 합니다. 어떤 문제라도 세상의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은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독단을 부리지 않기 위해서는, 모두를 다 그 근본 자리에서 원래의 생긴 대로 보는 것입니다.
* 우리 중생은 그 본래 있는 대로 보지를 않습니다. 자기 업대로 보지요. 유명한 일수사견一水四見이란 말이 있습니다. 똑같은 물을 상대할 때도, 우리 중생들은 먹는 물로 봅니다. 귀신은 물을 피로 봅니다. 고기는 물을 자기가 사는 집으로 봅니다. 천상사람들은 물을 영롱한 구슬, 보배로 보고, 부처님은 물을 신묘한 불성으로 봅니다. 중생은 업의 거울로 사물을 보는 것이지, 사실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대로 보는 것은 실상관입니다. 실상관이란 우주를 부처님이 보시는 대로 보는 것입니다. 조금도 가림이 없이 전부를 다 하나의 불성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처님의 견해대로 보는 것입니다.
* 우리 중생은 둘로 나누고 셋으로 나누어 보느네, 부처님의 참다운 혜안, 부처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두가 다 하나로 보입니다. 간단명료합니다. 다만 부처님이 하나로 보는 견해를 중생들 자신이 모르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업장이 무거운 사람들은 정말로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의심하고, 자기가 가진 견해대로, 보고 배운 지식대로 봅니다.
* 우리 불자님들은 업장이 가벼운 분들입니다. 따라서 업장이 가벼운 사람들은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如語)하시고, 참다운 진리를 말씀(眞語)하시고, 헛된 말씀(不異語)을 하지 않으시고, 우리 중생을 속이는 말씀(不誑語)은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정말 온전히 인정하고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되지 않겠습니까?
* 부처님 말씀을 따르려면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견해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부처님 소견을 따르는 것은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라 하는데,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다 쉽습니다. 육조혜능이란 스님은 위대한 도인인데 일자무식입니다. 그분은 전혀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도통하고 보니까 빛이 충분히 비치어 우주가 훤히 드러납니다. 우주가 하나의 생명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분한테 법문을 들으러 수천명이 아주 멀리서 오고 그러니까,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여러분, 저같은 사람 말을 들으려고 멀리서 자주 오지 마십시오. 부처님 법문이 제일 간단하고 확실하고 명백한 가르침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꼭 믿어 버리면 두 번 다시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로 믿으십시오” 하셨습니다.
* 제 법문을 들으러 오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꼭 신인信認하시고 바른 신앙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러면 다시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말씀은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심작시불心作是佛이라, 우리 마음으로 부처를 이룬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과 위대한 부처님의 마음을 대비해 보아도 조금도 차이가 없는 생명의 실상입니다.
* 달마스님께서 이조 혜가스님께 하신 법문도 마음의 실상을 그대로 보이신 것입니다. 이조 혜가스님이 달마스님께 가서, “스승이시여,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이 마음을 해결해 주십시오”하시니까, 달마스님이 “그대 불안한 마음을 내 놓아라. 그러면 내가 그 불안한 마음을 가시게 해주마”하셨어요. 그러나 혜가스님이 불안한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찾아봐도 안보여요.
* 아파하는 마음이 어디에 있고, 미워하는 마음이 어디에 있고, 좋아하는 마음이 어디 따로 있단 말입니까? 좋아하는 마음도 모양이 없고, 미워하는 마음도 모양이 없고, 똑똑한 척하는 마음도 모양이 없습니다. 모양이 없으면서 분명히 존재하고, 한도 끝도 없는 것을 구합니다. 김씨나 박씨나 예수나 맹자나, 그 마음은 모양이 없습니다. 모양이 없다는 것은, 사실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모양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얼마만큼 크다고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마음은 어디 국한되게 크고 작은 것으로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도 끝도 없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 입정入定 후에 삼매에 든다고 생각할 때, 그 때 마음은 사실 허공과 똑같은 것입니다. 허공이 한도 끝도 없지 않습니까? 마음은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성자는 한도 끝도 없는 그 마음, 그 마음 자리를 열어서 온전히 간직한 분인 것이고, 우리 중생은 내 마음, 내 몸뚱이 내 심장이 있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마음을 열어서 마음이 한도 끝도 없이 광대무변한 사람은 몸뚱이도 제 것이 아닙니다.
* 범부와 성자를 구별한다면, 범부는 꼭 제 몸, 제 집, 제 가정만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회봉사를 권하고 역설한다 하더라도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을 못 벗어납니다. 남한테 베풀더라도 자기 몫은 남겨두고 남한테 베풀어야겠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자는 조금도 주저가 없습니다. 주저함이 없으니까, 주린 범한테도 순간 자기 몸을 몽땅 바쳐 버립니다. 설산동자雪山童子가 진리를 구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나뭇가지에 올라가서 나찰귀신羅刹鬼神한테 조금도 주저없이 자기 몸을 던져 버렸습니다.
* 과거 전생의 석가모니부처님은 십이겁十二劫 동안을 앞당겨 성불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몸뚱이를 개인적인 존재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연 따라 잠시간 모양을 나툰 것이지, 어느 누구 것이라고 소속이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내 몸이나 자기 남편 몸이나 아내 몸이나 인연 따라 잠시간 모양을 나투었고 금생에 잠시간 만난 것이지, 꼭 내생에서도 다시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 영원히 만나는 것은 극락세계에 가서 가능합니다. 극락세계에서는 영원히 한곳에서 만납니다. 구회일처俱會一處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말씀 믿고 부처님 믿고 염불 많이 하면 일념왕생一念往生이에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임종때 그 순식간에 업장을 다 녹여 버립니다. 그 때 극락세계에 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절대로 자기 소견 하나로 옳다고 고집하지 말고, 모든 문제를 부처님 법에 비추어서, 부처님 법으로 해결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본체ㆍ본바탕ㆍ주체성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인생관과 세계관을 바르게 세우셔야, 함부로 덤벙거리지 않게 됩니다.
* 천지우주가 일미평등一味平等입니다. 모두가 다 무차별하게 부처뿐이에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부처님의 사상대로 생각하는 것이고, 또 우리의 불안의식을 온전히 없애는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우리 중생의 최상의 행복을 위한 그런 말씀입니다.
*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할 때는, 본바탕은 정말로 부처라고 생각할지라도, 인간생활은 역시 업장 많은 생활이기 때문에 괴로움이 많습니다. 제아무리 자기가 옳게 생활한다 하더라도, 옆에서 미혹중생이 많아서 여러 가지로 혼란스럽고 불공정하고 무서운 산업사회 아닙니까?
* 어려운 세계에 휘말리지 않고, 칠년 동안이나 옥중에서 끝끝내 자기 신념을 바꾸지 않고 불에 타서 죽은 이탈리아 수사修士 부르노같이, 우리가 부처님만 믿는 군건한 신앙심만 있다면, 그것 자체가 어디 있으나 바로 그것이 최상의 사회적인 봉사가 됩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사회봉사는 물질로 남한테 베풀고, 어려운 데 가서 같이 도와주고 일해 주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 이를테면 선방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은 남들이 해 주는 것을 다 먹고 쓰고 하기 때문에 어떻게 생각하면 봉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 중생들한테 신세만 끼치는 존재라고 생각할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 생명은 끝도 없는 바닷물같이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우주 에너지가 어떻게 진동하고 운동하는가에 따라서 전자가 생기고, 결합에 따라 물질이 생기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생명 자체는 에너지 불변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항시 그대로 영원히 존재합니다.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고,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업속, 생명자체, 에너지의 실제 자체는 항상 그대로 있습니다.
* 산중 선방에서 가만히 눈감고 참선하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 마음을 정화시키고 있으면, 그것이 바로 우주를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산에서 공부하면 사회봉사와 아무런 관계가 없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깨달음과 사회봉사는 둘이 아닙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 자리를 깨달아 버리면, 그 때는 집에 있으나 산중에 있으나 어디에 있으나, 결국은 그 사람의 행동이나 말이 사회적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공헌하는 것입니다.
* 가령 많은 돈을 절에 시주하고 사회에 봉사한다 하더라도, 저는 저고 나는 나다, 이와 같이 구분을 짓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래 못갑니다. 불교로 말하면 유주상보시有住相布施라, 상相을 떠나지 않는 보시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반야바라밀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지혜 아닙니까? 반야바라밀은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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