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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진리의 길.3(1)

 

 

부처님께서 바라시는 실상염불

 

* 종교는 아시는 바와 같이 유위 공덕有爲功德을 떠나는 공부입니다. 불교는 그것을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으로 말합니다. 상대적이고 유한적인 것은 유위법이며 상대적인 것을 떠나 무제한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무위법이라 합니다.

 

* 종교라는 것은, 어느 종교나 다 제한적인 것을 떠나서 무제한적인 것,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 가르침입니다. 특히 우리 불교는 생사해탈이라는 거창한 명제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생사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개념적으로는 불교외에 없습니다.

 

* 종교의 본뜻에서 보면 해탈이라는 뜻이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다 들어있다 하더라도, 직설적으로 바로 생사를 떠나버리는, 즉 죽거나 사는 한계를 뛰어넘어 버리는 가르침은 실로 불교외에는 없습니다.

 

*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마음을 열지 못하면 생사를 떠나는 커다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 무슨 종교나 마음을 열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그러나 애를 너무 많이 쓰기 때문에 잘못하게 되면 집착을 하게 됩니다. 집착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 역사적으로 볼 때, 불교는 그렇게 잔혹한 사건을 자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중세 기독교 사회는 숭고한 예수님의 뜻과는 달리 처참하고 암담했습니다. 특히 카톨릭에서 행한 종교재판은 잔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십육, 십칠세기까지 십년동안에 이단자로 몰려서 불에 태워져 죽은 사람이 십만명이 됩니다. 십만명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입니까?

 

* 일본 불교사를 볼 때도 종파가 나눠지면서 법화경을 신봉하는 종파, 염불을 주로하는 염불종 등, 종파이기주의의 대립이 첨예했습니다. 염불종과 법화종ㆍ천태종 사이에서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스님들끼리 서로 싸워서 귀를 베고 코를 베고 했습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 독단, 그 도그마, 집착이란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 여기저기 집회에 다니면서 많이 보고 있습니다만, 가령 염불을 한다고 하면 염불한다는 것이 얼마나 쉽습니까? 그야말로 부처를 생각하고 부처님 이름을 부르고 싶을 때 부르고, 부르기 싫으면 속으로 외우고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꼭 자기식으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소리도 꼭 자기식으로 내야 한다고 합니다. 같은 염불종도, 특히 일본 불교에서 있는 것입니다만, 생각은 말고 꼭 소리만 내서 하라는 종파가 있습니다. 진종眞宗의 경우에는 꼭 소리만 내서 하라고 합니다.

 

* 염불하는 법으로는 먼저 관상염불觀像念佛이 있습니다. 관상염불은 부처님의 원만스런 모습을 관찰하는 염불 방법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얼마나 산란스럽고 분별심이 많습니까? 산란하고 분별심이 많아서 그냥 염불만 하면 마음이 통일이 안돼요. 그래서 부처님의 원만 덕상을 상상하거나 보면서 하는 염불이 관상염불이에요. 가령 관음상을 모시고 참배하면서 또 우러르면서 염불을 하면 훨씬 마음이 차분하고 공부가 더 잘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불상은 우리의 마음을, 그 순수한 마음을 지속시키는 데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상을 상상하지 말고 소리만 내야 된다 하면 어찌되겠습니까?

 

* 실상염불實相念佛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진리 자체를 우리가 상상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진리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실상염불은 우리 눈에 보이는 대상이 아닙니다. 보이진 않지만 이 우주는 부처님 생명이란 말입니다.

 

* 관무량수경에 훌륭한 말씀이 있습니다.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하는, 아주 고도한 진리를 담은 말씀입니다. 즉 모든 부처님은 우주를 몸으로 합니다. 이런 말씀은 방편을 떠나버린, 진리 그대로의 말씀입니다. 우주 자체가 부처님의 몸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이것이 바로 대승불법이 됩니ㅣ다. 우주 자체가 오직 하나의 생명이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우주를 몸으로 한다고 생각할 때는, 산도 부처님, 물도 부처님, 곤충도 부처님, 다 부처님 아님이 없습니다.

 

* 중생과 부처의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중생은 자꾸만 나누어 봅니다. 어째서 그런 것인가? 중생은 겉에 있는 상만 보고 집착합니다. 나라는 상, 너라는 상, 밉다는 상, 사랑한다는 상, 그런 상만 집착하는 것이 중생입니다.

 

* 성자는 모든 존재의 본 바탕을 봅니다. 본 바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똑같습니다. 불교에서 많이 인용하는 수파水波의 비유가 있습니다. 물과 파도의 비유입니다. 바람에 따라 파도가 일파만파로 갈라져도, 결국엔 똑같은 물입니다. 그것과 똑같이, 부처님은 광대무변한 우주바다의 물에 비유할 수 있고, 중생의 번뇌나 모든 분별심은 파도에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파도와 물이 다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파도가 천파만파 부서지더라도, 이 파도는 결국 물입니다.

 

* 우리 중생이 인과의 법칙에 따라 산이 되고 하늘의 별이 되고 인간이 되고 금수가 되더라도, 똑같이 모두가 다 우주의 법인 그 부처님 몸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반야심경을 보나 금강경을 보나, 전부다 그런 도리와 성품과 현상의 관계가 담겨 있지요. 중생은 현상만 보는 것이고, 성자는 그 본바탕을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상염불은 가장 고도한 염불로써, 우주의 실상, 우주의 본바탕을 관찰하면서 하는 염불입니다.

 

* 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더라도, 덮어 놓고 “부처님은 저 밖에 계시다가도 우리가 염불하면 우리한테 와서 도와주시겠지” 하는 것은 타력염불他力念佛입니다. 보통 그렇게 많이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애써서 나무아미타불하고 관세음보살하고 외면, 부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가호를 주시고 복을 주시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소박한 방편 염불입니다. 염불은 염불이지만 참다운 염불이 아닙니다.

 

*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꼭 권하고 싶은 염불은 실상염불입니다. 우주의 진리에 따르는 염불이 실상염불입니다. 소승법은 부처님께서 편의에 따라, 중생의 그릇에 따라, 중생 근기에 맞게 하신 말씀이지요. 그러나 진리는 절대 둘이 아닙니다. 소승이나 대승으로 나눈 것도 하나의 방편인 것이지, 하나의 진리가 있을 뿐입니다.

 

* 우리가 염불을 하든 의단을 품고 화두 공부를 하든, 그 본뜻은 모두가 부처님이 되어가는,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이 되는 데 있습니다. 왜 꼭 부처님이 되어야 하는가? 부처님이 되지 못하면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생은 누구나가 다 한도 끝도 없는 행복을 추구하고, 아는 것에도 기왕이면 세상만사 다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 인간은 어떤 면으로나 최선의 것을 추구합니다. 우리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입니다. 즉 우리 인간의 본바탕이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이 부처이기 때문에 한도 끝도 없이 다 구하는 것이지요. 부처라는 것은 어느 면으로 보나 완벽한 존재 아닙니까? 자비로 보나 지혜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어떤 면으로 보나 완벽한 것이 부처입니다. 따라서 우리 본성이 부처라서 한도 끝도 없이 다 구하는 거예요.

 

* 상대 유한적인 것은 어떻게 다 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한계가 없으나 물질도 한계가 있고 자원도 한계가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여기에 치열한 경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나 종교라는 것은, 이렇게 갈망해 마지않는 눈에 보이는 존재를 모두 허망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실로 있다고 보지를 않는 것입니다.

 

* 불교에서는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합니다. 제법이라고 하는 것은 주위에서 존재하는 모든 현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현상이 공입니다. 또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이라고 합니다. 유위법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상대적이고 유한적인 것인데, 마치 꿈이요 도깨비요 그림자요 거품과 같은 것입니다.

 

* 꿈이 형상이 있습니까? 꿈을 꿀 때는 실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꿈을 깨고 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그림자는 빛이 비치고 모양이 있으면 모양에 따르는 그림자가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보이지만, 또 분명히 없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중생이 너요 나요 밉다 좋다 하는 것은 그림자 같고 꿈같다는 것입니다.

 

* 본래가 꿈이고 허깨비 같은 것을,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없는 것인가? 우리가 깨달아서 성자가 되면 허망하게 보일 것인데, 우리 중생은 미운 사람은 꼭 밉게 보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스럽게만 보입니다. 그것은 중생의 착각입니다. 그것은 중생이 잘못 보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서 잠시간 허망상虛妄像을 보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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