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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자료/남호 송성수님의 100일 염불수행

97일 오통보살, 성상법사, 요파, 가구

 

 

오통(五通) 보살

 

천축 계두마사(鷄頭摩寺)의 오통 보살이 신통력으로 극락세계에 가서 아미타 부처님을 뵈옵고 여쭈었다.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정토에 나기를 원하오나 성상(聖像)을 뵈옵지 못하여 안타까워하오니, 한 번 강림하시기 원하나이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네가 먼저 가라, 내가 뒤따라가겠느니라.”고 하셨다.

오통보살이 돌아와 보니 벌써 성현들께서는 와 계셨다. 한 부처님과 오천보살이 각기 연화에 앉아 계셨고 또 나무 위에 계시기도 하였다. 이에 그 형상을 묘사하여 전국에 널리 퍼뜨렸다.

 

중국 수(隋)나라 때 스님 혜해(慧海)가 강도 안락사(安樂寺)에 머물면서 지성으로 염불을 하였는데, 그때 스님 도전(道銓)이 제주에서 아미타불 상(像)을 모셔왔다.

그 미묘하고 공교함이 세간에는 없는 것이었다. 그 상의 내력을 물었더니, 이 상은 천축 계두마사의 오통보살이 극락세계에 가서 그려 온 것이라 하였다. 혜해가 감격하여 지성으로 예배하고 우러러보니 신령한 광명이 찬란하게 비추었다. 이에 그 상을 본떠 그려서 극락에 왕생하기를 간절히 발원하였는데, 그 후 대수롭지 않은 병이 있더니 밤에 문득 일어나 서방을 향하여 예배한 후에 가부좌하고 새벽에 입적하였다.

 

성상(省常) 법사

 

법사는 송나라 태종, 진종 때의 절강 소경사(昭慶寺) 주지로 있으면서 여산의 혜원 대사의 도행을 흠모하여 정토 수행의 결사[淨行社]를 결성하였다.

 

그때 왕문정공(王文正公) 단(但)이 맨 먼저 귀의하여 적극 선창 인도하자 재상과 고관과 대작 학사 대부들이 제자로 자칭하며 결사에 가입한 자가 120여 명이나 되었다. 스님들은 수천 명이었고 서민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었다.

 

 

요파(姚婆)의 염불

 

중국 당나라 때의 여인 요파는 상당 사람인데, 범파(范婆)란 이가 염불을 권하였으므로 요파는 집안일까지 버리고 일심으로 염불만을 하였다.

 

임종 때 아미타불께서 공중에 강림하시고, 관음 · 세지 두 보살님이 모시고 있는 것을 뵈옵고 요파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범파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찌 부처님을 뵈올 수 있었겠나이까? 부처님께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범파와 작별하고 오겠나이다.”하였는데, 범파가 잠깐 만에 와 이르렀다. 요파는 서서 그대로 조용히 갔다.

 

가구(可久)의 염불

 

중국의 송나라 때 가구(可久)가 명주(明州)에 있으면서 항상 법화경을 외워 정토에 나기를 원하므로 별명이 구법화(久法華)라 일컫더니, 원우 8년(1093) 세수 80세로 앉아서 입적했는데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서 말하기를 “내가 극락에 가서 모든 경치를 보니 경에서의 말씀과 똑 같았고, 이 세상에서 정토의 업을 닦는 이는 그곳의 연화대 위에 이름이 기록되는데, 금대(金臺)에 기록된 이는 성도 광교원의 훈공(勳公), 명주의 손십이랑(孫十二郞), 나 가구(可久)였고, 은대(銀臺)에 기록된 이는 명주의 서도고(徐道姑)이었다.”하고 다시 죽었다.

 

5년 뒤 서도고가 운명할 때에는 기이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였고, 12년 뒤 손십이랑이 운명할 때에는 하늘 풍악이 울리어 가구의 말이 모두 들어맞았다 한다.

 

-《연종집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