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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주당 청화(淸華)큰스님/4. 청화 큰스님의 친필노트

미주불자를 위한 설법 초안 (3)

 

 

 

 

 

 

 

 

 

 

15. 생명이요 광명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재물이나 명예나 이성간의 애욕 등 그 무엇으로도 불안한 인간의 마음을 충족하게 채워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인간은 생명의 고향인 부처님을 지향하여 부처님이 되고자 노력하고 정진할 때만이 비로소 진정한 평안과 환희와 영생의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우주 자체입니다. 따라서 봄이 가서 여름이 오고 가을이 저물어 겨울이 찾아오는 것도 모두가 다 우주 스스로의 법칙과 도리, 곧 부처님의 근본 서원에 따라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이나 인간이나 본래가 같은 생명의 부처이고, 일체 모든 형상도 또한 부처님의 행위인데, 다만 우리 중생들이 번뇌에 가리어 근본 성품을 깨닫지 못하고 겉에 뜬 허망한 가상(假相)만 보는 것이며, 성자(聖者)들은 무지와 번뇌를

 

16. 여의고 여실히 근본성품을 깨달아서 무명 번뇌에 헤매는 중생들을 구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나가 다 본래가 부처이니 더디고 빠른 차이는 있을지라도 한결같이 성불을 지향하지 않을 수 없으며, 우주 자체의 본원(本願), 곧 근본서원이 바로 법회 때마다 서원하여 외우는 이른바 사홍서원(四弘誓願)인 "중생무변서원도, 번뇌무진서원단, 법문무량서원학, 불도무상서원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허망한 현상인 가상(假相)과 허구적인 개념인 가명(假名)에 집착하고 물질의 노예가 되어 진리를 믿지 않고 게으름을 부린다면 금생에도 부처가 되지 못할 뿐 아니라 몇 천 만생을 더 윤회(輪廻)하면서 생사고해(生死苦海)를 거듭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기독교계의 일부에서 요란하게 떠

 

17. 들어 대고 있는 "시한부 종말론"같은 것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번뇌 망상으로서 결국 눈 먼 소경이 여러 소경들을 이끌고 지척거리다가 다 함께 허방에 빠지고 말듯이 종말론자 그네들 스스로가 시한부 종말의 비참한 운명을 면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일체 중생을 평등한 사랑으로 영생의 고향에 인도하려는 예수의 거룩한 가르침과도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우리 몸뚱이나 일체 존재 색(色)의 성품이 바로 진여불성 공(空)이요, 진여불성 공(空)이 인연 따라 형상화되는 것이 바로 일체 존재 색(色)입니다. 그리고 허망한 가상(假相)과 가명(假名)을 여읜 공(空)의 실체가 바로 진여불성인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몸뚱이에 대하여 너무 집착을

 

18. 말으십시오. 이 몸뚱이는 과거 전생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미래 내생에도 이대로 있을 것도 아니며, 현세에도 시시각각으로 신진대사 하여 마지않는 전변무상(轉變無常)한 허망한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생들은 자기 몸뚱이를 금덩이보다도 더 소중히 생각하여 지나치게 아끼고 보살피는 이 몸뚱이 때문에 남과 다투고 죽이고 죽고 울고 웃고 하는 그 몸 자체가 일초전의 몸과 일초 후의 몸이 같지가 않습니다. 어느 순간도 같은 모습으로 동일한 공간에 존재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 몸이나 모든 존재 그대로 공(空)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한 바와 같이 물질이 아닌 에너지가 그 진동 여하에 따라서 전자, 양자 등이 되고 그것들이 결합하여 산소, 수소 등 각각 원소가 되고 다시 그것들이 결합하여 우리 몸을 비롯한

 

19. 모든 존재가 있게 되는 것인데, 결국 영을 몇 천 번 보내거나 곱해도 영은 영일 수밖에 없듯이, 공(空 : 에너지)의 결합체인 이 몸뚱이가 절대로 내 것이라고 고집할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는 바로 그대로 공(空)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금강경'에도 "일체 유위법(有爲法)은 꿈이요 허깨비요 거품이요 그림자와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 인생의 지상명제는 나와 남이 다 함께 부처가 되는 자기 성불과 중생제도를 위하여 허망한 몸뚱이일망정 합리적으로 잘 관리하고 어느 때 어디서나 성불의 필수요건인 윤리도덕 곧 계율의 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생들과 성인들과의 차이는 성인들은 일체 생명의 실상인 동일한 진여불성을 깨닫고 바로 그 자리에 입각하여 생활하기 때문에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의

 

20. 진정한 계율과 윤리 도덕에 합당하며, 범부 중생들은 근본 성품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일체 모든 현상에 집착하여 무절제한 파계(破戒)와 업(業 : Karma)을 짓고 한량없는 고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공자나 노자나 예수나 마호메트 등의 성현들도 비록 석가모니와 같은 완벽한 깨달음을 성취했다고는 못할지라도 다 한결같이 허망 무상한 환상들에 집착하지 말고 영생불멸한 근본 성품에 돌아가라는 가르침은 동일합니다. 따라서 다른 종교인들이 불교를 비방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네들 스스로의 교조(敎祖)와 교리에 위배되는 이율배반(二律背反)의 무지한 소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현실생활이 각박하고 어수선하여 금생에 당장에 빨리 견성 오도하여 성자(聖者)까지는 못 된다 할지라도, 우선 이치와 도리 만으로라도

 

21. 우주 만유가 바로 동일한 생명인 진여불성이구나… 바로 통찰하면 모두가 한결같은 부처님 뿐인데…

 

이렇게 느끼고 이해하기만 하여도 우리 몸과 마음도 한결 가뿐해지고 밝아져서 이내 성불의 대도(大道)를 지향하게 되며, 불보살들과 호법선신들이 우리를 가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인 생명의 공덕을 자비나 지혜나 행복이나 능력 등 모든 것이 원만하게 갖추어진 부사의한 보배로운 생명자체이기 때문에 우리의 신행(信行)과 정진으로 우리 마음이 정화되어 진여불성과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능력과 행복은 더욱 더 증진 발전되는 것입니다.

 

우주의 본질인 진여불성은 우주에 충만한 생명의 광명입니다. 우주 그대로 빛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자연적으로 우리의 몸도 마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