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무주당 청화(淸華)큰스님/4. 청화 큰스님의 친필노트

미주불자를 위한 설법 초안 (2)

 

 

 

 

7. 세계 기독교인구가 17억쯤 되고 이슬람교도도 10억쯤이나 된다고 합니다. 다른 종교인까지 합하면 아마 종교인구만도 40억 정도나 되겠지요. 그런데도 오히려 인류의 평화와 행복은 머나먼 지평선 너머 아득하기만 하고 갈등과 전쟁과 각종 범죄는 줄어들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심각한 근원적인 병폐와 불행들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것은 오로지 자기 스스로와 일체만유의 생명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무지 무명에 그 근원이 있는 것입니다.

 

고도로 발달한 현대의 첨단과학도 물질의 근원은 무엇이고 인간의 마음은 무엇이며 물질과 마음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심각한 한계에 부딪히고 인간의 마음은 갈수록 삭막한 불안과 좌절을 절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8. 이러한 가장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떠나서 다른 데서는 찾을 길이 없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불교를 믿는 자랑과 보람과 한없는 환희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개인적인 구제나 사회적인 구원이나 어떠한 어려운 문제이든 간에 그 근원적인 해결은 일체 생명의 실상을 밝힌 부처님 가르침인 반야바라밀 곧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지혜만이 능히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째서 이러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주만유의 일체존재를 모조리 한결같은 일미평등(一味平等)한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견해로는 하나님은 저편에 있고

 

9. 나는 여기에 따로 있다고 하며,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도 서로 뿔뿔이 대립적으로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다 이원적이고 상대적인 가르침입니다. 물론 예수나 마호메트나 그분들도 성인들이라 그 분들의 근본 뜻은 모든 존재를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로 깨달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적어도 현행 기독교도, 이슬람교도들의 신앙과 인생관은 이원적인 상대성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먼저 우리의 신앙 대상인 부처님에 대하여 방편설이 아닌 대승적인 명확한 개념정리를 해야 합니다.

우주의 생명 자체인 부처님을 법신(法身), 보신(保身), 화신(化身)의 삼신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법신 부처님은 바로 인생과 우주의 생명의 실상자체를 의미하고, 보신부처님은 법신 부처님에

 

10. 갖추어진 성품 내용인 자비, 지혜, 행복, 능력 등이 원만 무결한 공덕을 의미하고, 화신 부처님은 법신에 보신공덕을 갖춘 부처님이 인연 따라 형상화되는 모든 존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한 우리 인간이나, 일체 동물, 식물, 해와 달과 별들, 우주의 모든 존재들은 다 한결같이 화신 부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 부처, 저 부처로 분할 할 수 없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동일한 생명체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인데 방편으로 중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법신, 보신, 화신 등 삼신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삼신일불(三身一佛)이라 하며, 이러한 진여불성이 인연 따라 우주만유의 삼라만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진여연기(眞如緣起) 또는 법계연기(法界緣起)라 하고 줄여서는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합니다.

 

11. 진여불성인 부처님은 더하고 덜함이 없고 생(生)하고 멸(滅)함이 없으며, 시간, 공간과 인과율을 초월한 생명자체이기 때문에, 인연 따라 이루어지는 일체만유도 또한 동일한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주에는 진여불성 곧 부처님일 뿐 다른 존재는 없습니다. 그리고 불성(佛性)이나 불심(佛心)이나 법성(法性)이나 법계(法界)나 다 같은 부처님을 의미합니다.

 

가사 물질의 원자를 구성한 전자 또는 양자 중성자 등도 그것들이 어느 공간 속에 고정되어 있는 고유한 존재는 아니고 순수 에너지라 할 수 있는 진여불성이 인연 따라 진동하여 마이너스 성품을 띌 때는 전자라 하고 플러스 성품을 가질 때는 양자이고 중성(中性)인 경우에는 물리학자들이 중성자라고 이름 지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결합하여 산소나 수소 등의 각각 원소가 되는

 

12.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원소들이 인연 따라 결합하여 세포를 이루고 사람 몸뚱이가 되었건, 하늘에 별이 되었건, 공기가 되었건 현상만 변했을 뿐, 에너지 자체는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순수에너지 차원에서 볼 것 같으면 천지는 나와 더불어 뿌리가 같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하나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령 자기를 냉혹하게 배신한 사람이 있다면 그를 당장에 때려죽이고 싶도록 미워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 사람도 자기 업에 따라 허망한 가상(假相)으로는 미운 짓을 했지만은 실상(實相)인 진여불성의 입장에서는 불구부정(不垢不淨)하여 조금도 오염되지 않는 나와 더불어 동일한 하나의 생명이 아닌가라고 통찰할 때는 불현듯 미운 마음이 가시게 되

 

 

13. 는 것입니다.

백인이나 흑인이나 황인종간의 인종적인 해묵은 갈등도 또는 국제간의 분쟁이나 어떠한 대인 관계의 불화나 다 근본성품자리에서는 동일한 생명이라는 동체대비(同體大悲)로 달관할 때에만이 비로소 근원적인 해결책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연과 인간과의 문제, 곧 나무와 흙이나 물, 공기 등도 다 근본적으로 유기적인 동일한 생명체입니다. 같은 생명체이기에 자연을 훼손하면 바로 보복을 받게 되고 자연을 존중하고 보호하면 그만큼 우리가 혜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 사회의 심각한 자연공해의 환경오염 문제나, 노사 간의 갈등이나 단체 간의 괴리나 가정의 불화 등 우리 사회의 어떠한 어려운

 

14. 문제라도 부처님의 가르침 앞에서는 마치 눈송이가 화로 안에서 즉시 녹아버리듯이 이른바 홍로점설(紅爐點雪)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듯 유물주의와 형식주의에 병든 현대사회는 불교와 같이 일체만유가 동일율(同一律)의 동일 생명체임을 철저히 규명한 가르침만이 진정한 구제의 등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불교인들은 선택된 선량(選良)들입니다. 여러분들이 불교를 공부해 나가면 공부할수록 더욱 절실하게 불교인의 긍지와 은혜를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현재의 자기 입장이 못나고 가난하고 학식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본질적으로는 추호도 흠축(欠縮)이 없는 부처님인 것입니다.

부처란 지혜나 자비나 행복이나 능력이나 모든 공덕을 원만히 갖추고 있는 생명의 광명(光明)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본래가 바로 부처님이요 진리요

 

15. 생명이요 광명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재물이나 명예나 이성간의 애욕 등 그 무엇으로도 불안한 인간의 마음을 충족하게 채워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인간은 생명의 고향인 부처님을 지향하여 부처님이 되고자 노력하고 정진할 때만이 비로소 진정한 평안과 환희와 영생의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