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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자료/남호 송성수님의 100일 염불수행

59일 원효스님

 

원효(元曉: 617~686)대사는 세속의 성이 설 씨(薛氏)이며, 압량군 남쪽 불지촌의 북쪽 밤골 사라수(娑羅樹) 아래에서 태어났다. 불지촌을 혹은 발지촌(發智村)이라고도 한다. 사라수를 세간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법사의 집은 본래 이 골자기의 서쪽에 있었다. 어머니가 아이를 배어 달이 찼는데 마침 이 골짜기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하게 되었다. 급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쳐 놓고 그 안에 누어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그 나무를 사라수라고 불렀다. 그 나무 열매 또한 보통 밤과는 달라서 지금까지도 사라율(娑羅栗)이라고 부른다.”

 

스님의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이요, 또는 신당(新幢)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처음에 어머니 꿈에 별똥별이 품속으로 들어와 임신 하였고, 출산을 하게 되자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으니, 이때가 바로 진평왕9년(617)이었다.

 

스님은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남보다 뛰어나서 스승으로부터 배우지도 않았다. 출가하고서 그 집을 내놓아 초개사(初開寺)라고 이름 지었고, 나무 옆에 절을 세워 사라사(娑羅寺)라고 하였다. 스님이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수행한 것과 불교를 널리 편 업적은 모두 《당전(唐傳)》과 그의 행장에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는 다 검토하지 않고 다만 《향전(鄕傳)》에 실린 한두 가지 기이한 일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스님이 어느 날 상례를 벗어난 행동을 하며 장안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誰許沒柯斧 我所支天柱

 

다른 사람들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태종 무열왕이 그 말을 듣고 말했다.

“이 대사가 귀한 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고 싶어 한 것 같구나. 나라에 위대한 현인이 있으면 그 이로움이 막대할 것이다.”

이때 요석궁에 과부 공주가 있었다. 왕은 궁리(宮吏)를 시켜 원효를 불러오게 하였다. 궁리가 왕명을 받들어 원효를 찾아보았더니, 이미 남산을 거쳐 문천교(蚊川橋)를 지나고 있었다. 원효는 궁리를 만나자 일부러 물속에 빠져 옷을 적셨다. 궁리는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말리고 그곳에서 머물러 가게 하였다.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어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태어나면서부터 지혜롭고 영민하여 경서와 역사에 널리 통달하였다. 신라의 10현(賢) 중 한 사람이었다. 방음(方音)으로 중국과 신라의 풍속과 물건 이름까지도 통달하여 육경(六經)과 문학에 토(吐)를 달고 풀이[訓解]하였으니,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전수하여 끊이질 않고 있다.

 

원효대사가 계율을 어겨 설총을 낳은 이후부터는 속인의 의복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불렀다.

우연히 광대들이 굴리는 박[瓠]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기괴하였으므로 그 형상을 따라 도구를 만들었다. 《화엄경》의 “온갖 걸림 없는 사람은 한 번에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라는 구절을 따서 무애(無碍)라 이름 짓고 노래를 지어서 세상에 유포시키며, 스스로 노래하고 춤을 추며 교화하고 읊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이 때문에 가난한 집과 몽매한 무리들이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야말로 참으로 컸다.

 

원효대사가 남긴 위대한 업적은 민중을 위한 보살의 삶과 더불어 방대한 저술이다. 무려 193권이라는 많은 저술 가운데 온전하게 현존한 저술이 약 20여권이고 일부분만 잔존하는 저술이 약 12종 가량이며, 그 외에는 모두 산실되어 없어졌다. 정토경전의 부류는 《무량수경종요》, 《아미타경소》, 《미타중성게》가 온전히 남아 있어서 이것만이라도 무척 다행한 일이다. 《무량수경종요》는 일본에서 보존되다가 뒤늦게 알려졌다.

 

 

대사는 분황사에 계시면서 주로 저술에 힘썼고, 《화엄경소》를 지을 때 제40위 십회향품에 이르러 마침내 붓을 놓았다고 한다.

대사는 신문왕6년(686)3월30일 혈사(穴寺)에서 입적하였으니, 세수 70세였다.

 

대사가 입적하자 설총이 유해를 잘게 부수어 참 얼굴[眞容]을 빚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며 사모하여 슬픔의 뜻을 표하였다. 그때 설총이 옆에서 예를 올리자 소상(塑像)이 갑자기 돌아보았는데, 지금까지도 돌아본 채 그대로 있다. 일찍이 원효가 거주하던 혈사 옆에 설총의 집터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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