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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자료/남호 송성수님의 100일 염불수행

57일 인광대사

 

인광(印光: 1861~1940)대사는 휘가 성량(聖量)이고 자가 인광이며, 법호는 ‘항상 부끄러워하는 중’이라는 뜻으로 ‘상참괴승(常慚愧僧)’이라 하였다. 섬서 출생인데 어려서 형님으로부터 유가의 책을 배워 이것이 성현의 학문이라며 자못 자부하여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修)의 불교 배척론에 적극 찬동하였다. 나중에 병으로 몇 년간 고생한 뒤에야 비로소 큰 잘못임을 깨달았다.

 

대사는 나이 21세(1881)에 도순(道純)화상을 스승으로 출가하였고, 이듬해 해정(海定)율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그 전에 호북 연화사에 잠시 들렸다가 햇볕에 말리는 불경 중 용서(龍舒)의 정토문(淨土文) 파본을 우연히 읽어 보고 염불 법문을 알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눈에 병이 있어 거의 실명의 위기를 맞았는데, 이때 육신이란 고통의 근본임을 깨닫고 일심으로 염불을 하였는데 눈병이 갑자기 나아 버렸다. 그로부터 한평생 오로지 정토에 귀의하여 스스로 수행하며 남을 교화하는 방편 법문으로 삼았다.

 

나중에 북경 홍라산 자복사(資福寺)가 오로지 정토 법문을 수행하는 염불 도량이라는 소식을 듣고 26세 때 스승을 하직하고 그곳으로 가서 수행하였고, 2년 후에 보타산 법우사에서 6년 동안 정진하였으며, 출가한 지 30여 년 동안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시종 자취를 감추고 드러내지 않았다. 대사는 권속을 좋아하지 않아 천하사해를 모두 스승으로 삼았고, 설법은 《편지설법》으로 대신하였으며, 또 사찰의 주지가 되지 않는 것이 본래 굳건히 세운 서원이었으나 그 지팡이가 이르는 곳마다 책임이 따랐고 모두 명산대찰이 되었다.

 

1937년 겨울 영암사로 자리를 옮겨 3년간 안거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대사가 입적하여 극락왕생한 곳이 되었다. 대사는 입적하기 전에도《편지설법》 에서 “나는 곧 죽을 사람인데.......” “지금 이미 80세로 아침에 저녁을 기약하기 어렵소.”라는 말씀을 하였는데, 그 해 겨울 10월 28일에 산중의 모든 직책 담당자들을 모아 놓고, “영암사의 주지 자리는 오랫동안 비워 둘 수 없으니, 묘진(妙眞)스님이 맡는 게 좋겠다.”고 하여, 대중이 모두 찬성하고 11월 9일에 취임 날짜를 정하자 대사가 너무 늦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다시 초나흘로 잡자 그래도 늦는다고 하여 초하루로 택하자, 그제야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초사흘 저녁에 평소처럼 묽은 죽을 올리자 다 드신 뒤에 진달(眞達)스님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

“정토 법문은 별로 기특한 것이 없네. 단지 간절하고 지성스럽게만 염불하면 부처님의 자비로운 영접으로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에 왕생하지 않는 자가 없다네.”

초나흘 새벽 1시 반 침상에서 일어나 앉으면서 “염불하면 부처님을 보고 틀림없이 극락에 왕생한다.”라고 말한 뒤에 큰소리로 염불하였다. 2시15분에 물을 찾아 손을 깨끗이 씻은 뒤 반듯이 일어서서 말하였다.

 

“아미타불께서 영접하러 오셨으니, 나는 이제 가겠다. 모두들 염불 열심히 하고 간절히 발원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하여야 한다.”

말을 마치고 서쪽을 향해 몸을 단정히 하고 의자에 옮겨 앉았다. 3시경 묘진 스님이 도착하자 “도량을 잘 유지하며 정토 법문을 널리 펼치고 다른 거창한 법문을 배우려 하지 말라.”고 부촉하였다. 그 뒤에는 단지 입술만 약간 움직일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다섯 시가 되어 대중들이 큰소리로 염불하는 가운데 편안히 극락정토로 돌아가셨다.

 

초닷새 오후 두시 감실 안에 모실 때에도 얼굴 기색이 살아 계신 듯하였다. 세수가 80세이고 승랍은 60세였다. 수없이 많은 사리가 나와 영암사에 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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