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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자료/남호 송성수님의 100일 염불수행

56일 철오선사

 

 

철오(徹悟:1741~1810)선사는 청나라 때 스님이다. 휘가 제성(際醒)이고 자는 철오 또는 눌당(訥堂)이며, 별호는 몽동(夢東)이다. 북경 동쪽 하북성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특출하고 기이하였으며, 자라면서 책읽기를 좋아하여 경전과 역사를 비롯하여 여러 서적을 두루 열람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22세 때 큰 병을 앓으면서 허깨비 같은 육신이 덧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출가할 뜻을 품었다. 병이 낫자 방산현에 가서 삼성암(三星庵)의 영지(榮池)스님아래 귀의하여 삭발하고 출가하였다. 이듬해 수운사(岫雲寺) 항실(恒實)율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그 다음해부터는 향계사(香界寺)의 융일(隆一) 법사에게서 《원각경》을, 증수사(增壽寺)의 혜안(慧眼) 법사에게서 법상종 강의를, 그 뒤 심화사(心華寺)에 가서 편공(偏空) 법사 아래서 《법화경》, 《능엄경》, 《금강경》등을 배웠는데, 모두 원만히 이해하여 그 요지에 막힘이 없었다.

 

건륭33년(1768) 겨울에 광통(廣通)의 수여순(粹如純)노옹을 참방하여 인가를 받고 마침내 임제의 36세(世)이자 경산(磬山)의 7세 법손이 되었다.

건륭38년(1773)부터 수옹(粹翁)의 뒤를 이어 광통에 주석하면서 대중을 거느리고 참선하며 후학들을 채찍질하고 격려하였으며, 14년 동안 그 명성이 남북으로 널리 퍼지고 선풍을 크게 떨쳤다.

 

선사가 언제나 제자들에게 상기시킨 가르침은 “영명연수 선사께서는 선종의 거장이면서도 오히려 마음을 정토에 귀의하여 아미타불 명호를 하루 10만 번씩 염송함으로써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며 수행하셨다. 그런데 하물며 지금 같은 말법시대에 더더욱 받들어 따라야 할 것이 아닌가?” 하며, 선사도 마침내 마음을 정토에 깃들이고 연종(蓮宗=淨土宗)을 크게 주창하였다. 낮에 잠시 동안 손님을 맞이하고 그 외의 시간은 오로지 아미타 부처님께 예배 올리며 염불을 지속할 따름이었다.

 

선사는 선종과 정토종의 요지에 모두 정밀하였고 심오한 부분까지 환히 통달하였다. 대중과 더불어 정성껏 수행하여 연화 정토종의 기풍을 크게 떨치자 사방 원근에서 모두 그 교화를 우러러 따르고 승속이 모두 마음으로 귀의하였다. 선사는 당시에 법문으로 최고 제일이었고, 대중을 거느리며 울력도 똑같이 생활화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10년, 가경 15년(1820) 2월에 만수사에 찾아가 은사이신 수(粹)조사의 부도탑에 참배하고 산사(山寺)를 돌봐 준 재가신도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다음과 같이 부촉하였다.

“허깨비 같은 세속 인연 길지 않으며 인간 세상 참으로 덧없습니다. 짧은 인생 허송세월하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각자 모두들 마땅히 염불 공부에 노력 정진하여 앞으로 극락정토에서 서로 반갑게 만납시다.”

 

그해 3월에는 자복사로 되돌아와 당신의 다비에 필요한 물품을 미리 준비해 두도록 대중에게 분부하였고, 10월 17일에는 대중을 모두 불러 모아 사원의 일을 하나하나 당부한 뒤에 염불 공부를 열심히 닦도록 격려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극락정토에서 서로 함께 만나세. 나는 곧 서방정토로 돌아가겠네.”

이에 대중들이 선사에게 세상에 좀 더 머무르시도록 권청하자, 선사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백년 인생이라 해도 나그네처럼 잠시 붙어사는 신세에 어차피 언젠가는 되돌아가야 하는 법! 내가 성인의 경지 극락정토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스승을 위해 경행으로 여기고 환송해야 할 터인데 어찌 붙잡으려 애쓰는가?”

그리고 12월 17일 신시(오후3시~5시)에 대중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다.

“나는 이제 이미 문수, 관음, 대세지 세 보살님을 친견했었네. 오늘은 다시 부처님께서 친히 오셔서 나를 맞이하여 데려 가려 하시네. 나는 이제 가네. 잘들 있게.”

 

대중들이 아미타불 명호를 더욱 큰 소리로 세차게 염송하는 가운데 선사는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 합장 하신 뒤 이렇게 또 말하였다.

“위대하고 거룩하신 명호 ‘나무아미타불’을 한 번 염송하면 한 번 염불한 만큼의 부처님 상호를 친견하게 된다네.”

그리고는 마침내 손을 미타인(彌陀印)으로 바꾸어 짓더니 편안하고 상서롭게 입적하였다. 세수 70세, 승랍 49세였다.

 

그때 대중들은 공중에 특이한 향기가 가득히 퍼짐을 느꼈다. 입적한 유해를 이레 동안 받들어 공양하는데도 얼굴 모습이 마치 살아계신 듯 자애롭고 온화하며 생기가 넘쳤다. 머리카락이 흰색에서 검은 색으로 바뀌고 빛과 윤기가 특이하게 빛났다. 14일 동안 감실(監室)에 모시고 21일 만에 다비(茶毘)를 봉안했는데 사리 백여 개가 나왔으므로 보동탑(普同塔)에 안치하였다.

저서로는 선종, 교종, 율종에 관한 법문들과 《염불가타(念佛伽陀)》가 세상에 전한다.

 

또 스님은 다른 법문과 염불 법문을 비교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1. 무릇 도를 잘 알고 난 뒤에 도를 닦기 시작하고 도를 닦은 후에는 도를 증득하는[夫見道而修道 後道而後證道]것이지. 이는 모든 성인이 함께 거치신 길이요 만고불멸의 확정된 이론이다. 교종에서 반드시 원만한 이해가 크게 열려야[大開圓解]하고, 선종에서는 첩첩관문을 곧장 꿰뚫어야[直透重關]한다.

 

그러나 정토 염불하나만큼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 십 만억 국토를 지나서 극락이 있고, 아미타불이라는 부처님이 현재 설법하고 계신다. 단지 그곳에 왕생하길 발원하고 그 부처님 명호만 지송하면 된다. 그 밖의 다른 지견이나 깨달음의 법문을 구할 필요가 없다.

 

2. 다른 법문의 수도는 반드시 깨달아 안 뒤에 법에 따라 갈고 닦아 익히며 마음을 다잡아 선정을 이루고[攝心成定], 선정으로 말미암아 지혜가 터지고[因定發慧], 지혜로 말미암아 미혹을 끊어야[因慧斷惑]한다.

그러나 이 정토법문은 다만 믿음과 발원하는 마음으로 부처님 명호만 지송하고 한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경지에만 이르면 된다.

 

3. 또 다른 법문의 수도는 먼저 모름지기 현재의 업장을 깨끗이 참회하여야 한다. 그러나 정토 법문을 닦는 이는 업장을 지닌 채 왕생할 수 있고 염불 한 마디에 80억 겁 동안의 생사 윤회하는 중죄가 소멸한다.

 

4. 다른 법문에서는 번뇌를 죄다 끊어야 한다.[견혹(見惑), 사혹(思惑)이 조금이라도 남으면 윤회를 면치 못한다.]

그러나 염불 법문은 곧장 삼계를 벗어나면서 극락에 왕생한다. 그러므로 정토 법문에서는 깨달음의 법문을 구할 것이 없고, 지혜가 터지길 기다릴 필요도 없고, 번뇌를 말끔히 끊을 필요도 없다.

이 때문에 공부하는 수행자들은 마땅히 세심하게 살피고 음미하여 신중히 선택해야 한다.”

-《철오선사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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