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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자료/남호 송성수님의 100일 염불수행

58일 혜숙스님

 

혜숙(惠宿)대사는 신라 진평왕(579~632)때의 스님이다. 스님이 애장왕 9년(808)무렵에 미타사(彌陀寺: 지금의 경남 진주에 있던 절)를 창건하여 최초로 염불을 수행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유사》권5 욱면비염불서승(郁面婢念佛西昇)조에 실려 있고, 스님의 기록은 《삼국유사》권4 이혜동진(二惠同塵)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 있다.

 

스님 혜숙이 화랑 호세랑(好世郞)의 무리에서 자취를 감추자, 호세랑이 화랑의 명부에서 이름을 지워 버렸다. 혜숙은 적선촌(赤善村: 지금의 안강현 적곡촌)에서 20여년이나 숨어 살았다.

그때 국선 구참공(瞿旵公)이 일찍이 교외로 나와 사냥을 하고 있었는데, 어는 날 혜숙이 길가에 나가 말고삐를 잡으며 부탁하였다.

 

“소승도 따라가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공이 허락하자 혜숙은 이리저리 내달으며 옷을 벗어젖히고 앞을 다투었다. 그러자 공은 매우 기뻐하였다. 그들은 잠시 쉬며 앉아서 피로를 풀며 고기를 삶고 구워서 먹기를 권하였다.

혜숙도 같이 먹으면서 조금도 꺼려하는 기색도 없더니, 이윽고 앞으로 나와 말하였다.

“ 여기 맛있는 고기가 있는데, 좀 더 드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공이 말하였다.

“좋소.”

혜숙이 사람을 물리치고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서 쟁반에 담아 올리는데, 그의 옷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공이 깜짝 놀라며 말하였다.

“어째서 이렇게 하오?”

혜숙이 말하였다.

 

“처음에 저는 공이 어진 사람이라서 자신의 경우를 미루어 만물에 까지 통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공을 따라 온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는 일을 보니 살육만을 탐하여 남을 해쳐 자신을 봉양할 뿐인데 어찌 이것이 어진 사람이나 군자가 할 일이겠습니까? 공은 우리와 같은 무리가 아닙니다.”

마침내 혜숙은 옷을 털며 가 버렸다. 공은 몹시 부끄러웠고, 그가 먹던 것을 보니 쟁반위에 신선한 고기가 그대로 있었다.

 

공이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여 조정에 들어와 왕에게 아뢰었다. 진평왕이 그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혜숙을 맞이하게 하였는데, 혜숙은 일부러 여자의 침상에 누어 자는 척 하였다. 사신은 이를 더럽게 생각하고 7, 8리를 되돌아오다가 길에서 혜숙을 만났다. 사신이 물었다.

“어디서 오십니까?”

혜숙이 말하였다.

“마침 성안에 있는 시주 집의 7일재(七日齋)에 갔다가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오.”

사신이 그 일을 왕에게 아뢰자, 사람을 보내 시주 집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그 일도 또한 사실이었다.

 

얼마 후 혜숙이 갑자기 죽자, 마을 사람들이 이현(耳縣)동쪽에 묻어 주었다. 그런데 그 마을 사람 중에 이현 서쪽에서 오는 이가 있었다. 그가 길에서 혜숙을 만나자 물었다.

“어디를 가십니까?”

그러자 혜숙은 말했다.

“오랫동안 이곳에 살았으니 다른 곳을 좀 유람이나 하려고 가는 중입니다.”

이들은 서로 인사하고 헤어졌다.

혜숙은 반리쯤 가다가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그 사람이 이현 동쪽에 도착하여 혜숙을 장사지낸 사람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는 혜숙을 도중에 만난 일을 모두 말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무덤을 파 보았더니 혜숙의 유해 대신에 짚신 한 짝만이 있을 뿐이었다. 지금 안강현의 북쪽에 혜숙사(惠宿寺)라는 절이 있는데, 그가 살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또한 부도(浮屠)가 남아 있다.

 

이것이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이며, 그리고 이 미타사 창건의 기록을 들어 신라에서 최초의 염불 수행이 뿌리내린 효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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