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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자료/남호 송성수님의 100일 염불수행

51일 영명스님

 

영명(永明: 904~975) 선사는 중국 북송시대의 선승이다. 청원(靑源)선사로부터 아래로 11세(世)이며 천태 덕소(德韶)선사의 법을 이었다. 법명은 연수(延壽)이고 호는 포(抱)이다. 영명사(永明寺)에 오래 머물렀으므로 세상에서 영명선사라 일컬었다. 또 오월의 충의왕이 지각선사(智覺禪師)라는 호를 내렸다. 법안종(法眼宗)에서는 제3조(祖)가 되고, 정토종에서는 제6조가 된다.

 

스님은 출가하기 전에 어느 고을의 태수(太守)로 있었는데, 한재를 만나 가을이 되었어도 거둘 곡식이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였다. 그것을 본 태수는 정부에 보고하여 결재를 받기 전에 창고를 열고 비상용의 곡식을 풀어 백성을 건졌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는 간신이 있어 ‘조정의 허가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관곡을 소모한 것은 반드시 그 이면에 부정한 지출이 잠재할 것이며 공용을 빙자하여 사용하였다.’는 거짓 상소로 사형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황재는 태수의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상을 주고 벼슬을 높여 주었다. 그러나 이에 인생무상을 느끼고 벼슬을 버리고 출가하여 늘그막에 스님이 되었다.

 

처음에 취암 영명(翠巖永明)을 섬기며 온갖 대중 시봉을 갖추어 받들었고, 그 후 천태산으로 가서 석 달 동안 지낼 적에는 날짐승이 머리에 앉고 옷소매에 둥지를 쳤다고 한다.

천태산 국소를 뵈옵자, 곧 큰 그릇임을 알아차리고 법을 전하면서 이르기를 ‘그대와 왕과는 인연이 있으니, 앞으로 크게 불사를 이룰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그와 같았다.

 

처음에는 명주 자성사(資聖寺)에 있다가 영은산을 거쳐서 혜일산 영명사에 있었는데, 대중이 항상 2천명이 넘었다.

영명사에서 15년 동안 있는 사이에 제자 1,700인을 제도하였고, 천태산에 들어가서는 1만 명에게 계(戒)를 주었다. 평생염불을 하며 정토왕생을 원하였고, 저녁에는 별봉(別峰)에 가서 행도염불(行道念佛) 할 적에는 옆의 사람들이 하늘 음악[天樂]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귀신에게 시식하고 방생하기를 말할 수 없이 많이 하였고 40만 본의 미타탑(彌陀塔)을 찍어서 보시하며, 또 승속에 염불을 권장하여 정토종을 널리 퍼뜨리는데 전략하였다. 세상에서는 미륵보살이 화생하였다고 칭송하였다.

 

매일 108가지의 일과 조목을 정하여 지키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염불만도 10만 번씩이었다. 생전에는 《법화경》을 1만 3천 번 외웠고, 특히 《법화경》을 들에서 암송하면 양떼가 감응하여 엎드려 들었다고 한다.

 

무주의 어떤 스님이 여러 해 동안 영명스님의 탑을 돌았는데 누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병을 앓다가 명부에 들어갔더니 전각 왼쪽에 어떤 스님의 탱화가 있는데, 염라대왕이 무수히 예배하는 것을 보고 물었더니, 맡아보는 관리가 말하기를, ‘그는 영명선사인데 염불을 잘 수행하여 지금은 극락세계에서 상품상생하여 계시오.’ 라고.......”

 

《종경록》100권, 《만선동귀집》6권, 《유심결》1권 등 60여부 외에도 많은 저술을 남겼다.

고려 광종(光宗)과는 서신 거래가 많았는데, 그의 문하에서 인가를 받은 고려 스님들이 36인이나 되었다. 원공(圓空)국사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송 태조 개보 8년(975) 8월 6일 새벽에 일어나 분향하고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향수 72세였다.

선사는 선정쌍수(禪淨雙修)를 주장하였는데, 특히 사료간(四料簡)이 유명하다. 앞의 ‘참선과 염불’에서 이미 해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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