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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1. 실상 염불선

13. (1)실상관(實相觀)

(1)실상관(實相觀)

 

다시 말씀드리면 '나라는 이 몸뚱이나 너라는 몸뚱이나 천지(天地) 우주(宇宙)에 있는 모든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비어 있다'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자리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만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本來) 비어 있는 무량무변(無量無邊)한 자리에 무량공덕(無量功德)을 갖춘 청정적광(淸淨寂光)이 충만(充滿)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마음을 매는 것이 실상관(實相觀)입니다. 즉 일체만유(一切萬有)는 생멸변화(生滅變化)하는 것이나 실로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존재로서 영원히 상주(常住)하는 것임을 체달(體達)하는 관법(觀法)입니다.

 

(2) 제법실상(諸法實相)

 

* 유불여불(唯佛與佛) 내능궁진(乃能窮盡) 제법실상(諸法實相) -법화경방편품(法華經方便品)-

* 삼세제불(三世諸佛) 개이제법실상(皆以諸法實相) 위사(爲師) -지도론(智度論)-

* 제제법실상(除諸法實相) 여잔일체법(餘殘一切法) 실명위마(悉名爲魔)

-지도론(智度論)-

 

* 제보살종초발심(諸菩薩從初發心) 구일체종지(求一切種智) 어기중간지(於其中間知)제법실상혜(諸法實相慧)시반야바라밀(是般若波羅蜜) -지도론(智度論)-

 

* 제법실상지(諸法實相之) 어미만제경(語瀰滿諸經) : 고(故) 혹(或)은

제법개공(諸法皆空)을 제법실상(諸法實相)

-성실론(成實論)-

혹(或)은 열반(涅槃)을 제법실상(諸法實相),

정토문(淨土門)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제법실상(諸法實相),

법상종(法相宗)은 원성실성(圓成實性)을 제법실상(諸法實相),

유부종(有部宗) 은 고(苦)·공(空)·무상(無常)·무아(無我)를제법실상(諸法實相) -사익경(思益經)-

 

* 제법실상(諸法實相) 즉시열반(卽是涅槃)

 

*『불장경 상(佛藏經 上)』에 하명제법실상(何名諸法實相) 소위(所謂) 제법필경공(諸法畢竟空) 무소유(無所有)

 

*『대승현론 삼(大乘玄論 三)』 대성수연선교(大聖隨緣善巧) 어제경중설명부동(於諸經中說名不同),

고어열반경(故於涅槃經) 명위(名爲) 불성(佛性),

즉어화엄경(則於華嚴經) 명위(名爲) 법계(法界),

어승만경중(於勝鬘經中) 명위(名爲) 여래장(如來藏),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능가경(楞伽經) 명위(名爲) 팔식(八識), 불심(佛心),

수릉엄경(首楞嚴經) 명위(名爲) 수릉엄삼매(首楞嚴三昧),

법화경(法華經) 명위(名爲) 일도(一道), 일승(一乘),

대품경(大品經) 명위(名爲) 반야(般若), 법성(法性),

유마경(維摩經) 명위(名爲) 무주(無住), 실제(實際)

여시등명(如是等名) 개시불성지이명야(皆是佛性之異名也).

 

* 혜심자행약기(慧心自行略記)에 차일실리지명(此一實理之名) 대보리(大菩提) 역명(亦名) 필경공(畢竟空), 역명(亦名) 여래장(如來藏), 역명(亦名) 중도(中道), 역명(亦名) 법신(法身), 역명(亦名) 법성(法性), 역명(亦名) 진여(眞如), 역명(亦名) 진제(眞諦), 역명(亦名) 제일의체(第一義諦) 수유여시(雖有如是) 종종이명(種種異名) 단실상지일리야(但實相之一理也)

 

3. 염불(念佛)의 이명(異名)

1) 즉심염불(卽心念佛;관심염불(觀心念佛))

 

즉심염불(卽心念佛)은 유심(唯心)이 미타(彌陀)고 내 몸이 정토(淨土)라고 알아서 관(觀)하며 자기 심(心)중의 불(佛)을 염(念)하는 것을 일컫는 말로 심(心)은 법계(法界)에 주변(周邊)하여 두루한 것으로, 예컨대 미타(彌陀)는 10만억 불토를 지나서 있다고 설(說)하지만 오히려 나의 심불(心佛)의 나타남이라고 한다. 본래 우리의 심성(心性)은 청정한 불체(佛體)로 오직 무명(無明)번뇌 때문에 덮여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 나타나지 않는 것을 일컬어 10만억국토를 떨어져 있다고 했을 뿐이다. 그래서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시심작불(是心作佛) 시심시불(是心是佛)’이라고 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제팔(第八) 상관(像觀)에 “시심작불(是心作佛) 시심시불(是心是佛)”의 문(文)에 의하여 심불동체(心佛同體)로서 심(心) 외(外)에 불(佛)이 없다고 해(解)하여서 심(心)에 약(約)하여 불(佛)을 관(觀)함을 설(說)해 있고. 관경(觀經)의 관불(觀佛)은 약심관불(約心觀佛)로서 즉본구(卽本具)의 미타(彌陀)의 의정(依正)을 관(觀)하여 아(我) 심성(心性)에 훈(熏)하고 관성(觀成)하면 즉본구(卽本具)의 진현(眞顯)이라 설(說)한다. 이는 곧 관칭쌍수(觀稱雙修)의 염불(念佛)이다.

 

지례(知禮)스님은 이심불동체(以心佛同體) 명심시불(名心是佛) 관생피과(觀生彼果) 명심작불(名心作佛) 의재(意在) 즉심염불(卽心念佛) 급(及) 모과수인(慕果修因)이라 했고, 일념(一念)의 염불처(念佛處) 삼제원융(三諦圓融)이라, 아심법계(我心法界) 아미타여래역법계(阿彌陀如來亦法界) 고(故)로 능념(能念)의 심외(心外)에 소념(所念)의 불(佛) 무(無), 또한 소념(所念)의 불외(佛外)에 능념(能念)의 심(心) 무(無), 능소무고(能所無故) 즉공법계(卽空法界)이다. 다 같이 법계(法界)이므로 미타(彌陀)도 삼천구족(三千具足) 아심역삼천구족(我心亦三千具足) 각구호융(各具互融)의 체(體)이므로 즉가(卽假)이다.

 

또한 즉가(卽假), 즉공(卽空)의 의(義)있음은 기(其) 체성(體性) 비공(非空)· 비가(非假)인 중도법계(中道法界)이기 때문에 여차일념(如此一念) 염불(念佛) 처(處)에 삼제원융(三諦圓融)하다고 함. 또한 삼제(三諦)의 이(理) 분명(分明)히 모르는 이도 아심(我心)이 법계(法界) 이므로 서방미타(西方彌陀)는 아심중(我心中)의 미타(彌陀)이며 아(我)는 미타심중(彌陀心中)의 중생(衆生)이라 생각하여 염불(念佛)해야 하며 차(此) 염불(念佛)의 공(功)이 적(積)할 때 점차로 삼제(三諦)의 이(理) 분명(分明) 차시(此是) 즉심염불(卽心念佛)의 안심결정(安心決定)이다.

* 필정(必定): 인능념시불무량력공덕(人能念是佛無量力功德) 즉득입필정(卽得入必定)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이행품(易行品)-

“필정(必定); 불퇴전(不退轉)”

 

2) 본원염불(本願念佛)

 

본원염불(本願念佛)은 선도(善導:중국 당나라 613~681) 스님은 제18대원(第十八大願)을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명호(名號)로 부르는 것을(念佛)을 정토(淨土)에 태어날 수 있는 원(願)이라고 해석하여, 어떤 나쁜 사람도 구제받을 수 있다고 했다. 본원의 구제의 목표가 되는 것을 본원의 실기(實機)∙정기(正機)라 하며 본원의 서원인 염불(念佛)을 본원(本願)의 행(行)이라고 하고,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찬양(讚揚)하는 것을 본원공덕취(本願功德聚)라 한다.

 

다음은 지아유월지(至阿惟越地)라, 이것은 공부해서 얻은 불퇴지(不退地)라, 다시 후퇴가 없는 자리입니다. 법성을 증명해야 후퇴가 없겠지요. 이 아유월지에 이르는 데는 난행문(難行門)과 쉬운 문 이행문(易行門)이 있습니다. 이것은 용수보살의 십주비바사론에 있습니다. 우리 공부하는 사람 중에는 자기 힘만 믿고 어렵게 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부처님한테는 본원(本願)이라, 근본적으로 부처님께 깃들어 있는 만 중생을 성불케 하는 원(願)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그 본원이라는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우주에는 인력(引力)과 척력(斥力)이 있지 않습니까? 그 인력과 척력도 역시 부처님한테 들어있는 공덕인 것입니다. 인력 그것은 모든 중생을 근본으로 이끄는 힘인 것입니다. 그냥 보통 물리학적인 의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명으로 생각할 때는 모든 중생을 중심으로 이끄는 부처님의 원력인 것입니다. 이른바 우주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을 간절히 생각하고 흠모하며 부처님 이름을 외운다고 생각할 때는 우주에 본래 있는 인력에 우리가 편승하는 것입니다. 우주 어디에 인력이 없는 곳이 있습니까? 그 인력은 우리 중생들을 근본으로 이끌어가는 힘이란 말입니다. 생명적으로 말하면 부처님께서 영생불멸하는 생명의 실상으로 부터서 우리 중생을 영생으로 이끌어가는 힘 이것이 인력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 힘만 믿고 고생스럽게 가는 것 보다는 그 힘을 동경하고 따른다면 우리는 그 힘에 편승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도 빨라지고 불안한 마음도 해소가 되는 것입니다.

 

3)지혜염불(智慧念佛)

 

지혜염불(智慧念佛)이란 나무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6자(六字)의 명호(名號)는 그 체(體)가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의 진실(眞實)∙원만(圓滿)의 지혜(智慧)가 되기 때문에 그 명호(名號)의 염불(念佛)을 지혜염불(智慧念佛)이라고 한다.

 

4. 염불삼매 (念佛三昧)

 

○ 염불삼매(念佛三昧) : 인행삼매(因行三昧)와 과성삼매(果成三昧)의 이종(二種)이 유(有)함.

1. 인행삼매(因行三昧) : 일심(一心)으로 불명(佛名)을 칭(稱)하든지 또는 일심(一心)으로 불(佛)의 상호(相好)를 관(觀)하든지 또는 일심(一心)으로 법신(法身)의 실상(實相)을 관조(觀照)하는 수행법(修行法)을 인행(因行)의 염불삼매라 함.

2. 과성삼매(果成三昧) : 인행(因行)의 염불삼매가 성숙(成熟)되면 마음이 선정(禪定)에 들어가고 혹은 시방불(十方佛)이 현전(現前)하며 혹은 법신(法身)의 실상(實相)에 계합(契合)되는데 이를 과성(果成)의 염불삼매라 함.

 

이제 염불삼매(念佛三昧)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염불삼매에는 인(因), 과(果)의 두 경계가 있습니다. 일심으로 부처님의 상호를 관하는 관상염불(觀像念佛)을 하거나 또는 일심으로 법신의 실상(實相)을 관(觀)하는 실상염불(實相念佛)을 하거나 혹은 일심으로 부처의 명호를 외우는 행법을 인행(因行)의 염불삼매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명(佛名)을 외운다 하더라도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꼭 법신자리를 믿어야 참다운 염불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닦아갈 때 염불인 것입니다.

또 우리가 견성하기 전에, 인행의 염불삼매가 성숙되면 마음이 선정에 들어가서 혹은 시방불(十方佛)이 현전(現前)하며 혹은 법신의 실상 이른바 진여불성에 계합되는데 이것을 과성(果成)의 염불삼매라 합니다. 따라서 염불로도 견성(見性)하고 천수경으로도 견성하고 마음에서 업장만 녹아지면 다 견성합니다.

그러나 '시방불이 현전(現前)한다, 부처가 앞에 나온다.'는 말이 표현될 때는 또 의단을 품습니다. 부처란 상(相)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나올 것인가? 부처가 상이 있으면 참다운 부처가 못되겠지요. 우리는 이런 때도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상이 없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이 아무것도 없는 허무가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이 허무가 아니기 때문에 부처의 화신으로 6도중생(六道衆生)이 나오지 않습니까?

본래 실상은 색즉공(色卽空)이라, 본래의 몸뚱이 이대로 바로 공이지만 이것이 아무것도 없습니까? 따라서 부처님도 역시 필요한 때는 바로 부처님 상호를 우주에 가득 차게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을 보면 부처님의 몸은 크기가 육십만 억 나유타신(那由陀身)이라 합니다. 나유타는 헤아릴 수 없는 무량수입니다. 그렇게 한도 끝도 없는 큰 몸이 부처님 몸이라는 말입니다. 그 뜻은 바로 시방여래 시법계신(十方如來 是法界身)이라, 우주가 바로 부처님 몸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경을 볼 때도 경의 말에 너무나 집착을 말고서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또는 작게는 바늘구멍 가운데에도 부처님은 들어가신다고 말합니다. 바늘구멍 가운데에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허공세계(虛空世界)란 것은 그냥 공간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무량의 공덕을 갖춘, 상이 없는 세계가 바로 허공입니다. 보통으로 생각할 때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허공이라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허공은 그것이 아닙니다. 무량공덕을 갖춘, 상(相)을 떠난 무량무변(無量無邊)의 경계(境界)를 바로 허공(虛空)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일모공중에 무량불찰이 광연안립(一毛空中 無量佛刹 曠然安立)이라, 조그마한 터럭 가운데도 한없는 부처님 세계를 다 원만히 갖추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작고 적은 것으로 부처님 법은 비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장무애란 것은 작고 큰 것이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물질이 아닌 순수생명자리, 무량공덕을 갖춘 그 생명자리가 우주에 가득 차 있습니다. 우주에 가득 차있는 그것은 ‘작다’, ‘크다’를 초월해 있습니다. 따라서 티끌 가운데나 삼천대천세계 어디에나 특별히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성품(性品)으로는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성품으로는 다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할 때 무진 애를 쓰고 공부는 하는데 그럴만한 인연이 성숙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앞이 확 열려서 부처님이 분명히 앞에 나오십니다. 더러는 부처님 상호가 방안에 가득 찰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러한 영상(影像)에 집착하고 맙니다. 그러면 공부가 그냥 악화가 됩니다.

 

실상무상(實相無相)이라, 실상(實相)은 상(相)이 없습니다. 또한 일정한 고유(固有)한 상(相)이 없다고 해서 허무(虛無)가 아니라 만상(萬象)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를 모신다거나 그런 분들은 경험을 더러 하실 것입니다. 어떤 때는 금색(金色)으로 훤히 빛나는 부처님도 보이는 것이고 어떤 때는 밤인데도 훤히 밝아서 방안이 다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때에도 집착하면 안 됩니다. 부처가 그뿐만 되는 것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우선 닦아나가는 수행법(修行法)인 인행(因行) 공부를 하다가 좀 하기 싫거나 빨리 성취하고 싶고 대접을 받고 싶은 사람들은 오래 못 닦습니다. 오랫동안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독지옥(孤獨地獄)이라, 우리가 외로운 것도 지옥같이 괴로운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니체(Nietzsche) 말대로 '고독은 그대 고향이다. 고독한 가운데 그대의 고향을 가라' 이런 말은 우리한테 감동을 줍니다. 고독을 못 참으면 삼매에 어떻게 들겠습니까? 고독을 못 참으면 무슨 필요로 승려가 되겠습니까?

도반(道伴)이 좋기는 좋으나 너무나 밀착하면 공부에 방해가 됩니다. 그 사람 때문에 관심을 두어야 되겠지요. 대중이 좋으나 공부가 익은 다음에는 또 방해가 됩니다. 달마(達磨)의 9년 면벽(面壁)을 생각해 보십시오. 석존(釋尊)의 6년 고행상(苦行像)을 상기해 보십시오. 얼마나 고독했을 것인가 말입니다. 우리는 짐짓코 우리가 선택해서 출가사문이 된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인간이니까 습기 때문에 고독한 때는 친한 사람도 만나고 싶겠지요. 그러나 냉철하게 자기를 추스려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인행삼매(因行三昧) 이것은 처음에 일심(一心)으로 부처님 이름을 외운다던지 또는 일심으로 부처님의 상호를 관찰한다던지 또는 일심으로 법신불(法身佛)을 실상(實相)으로 관조(觀照)하는 것을 말하고 과성삼매(果成三昧)는 그렇게 일심으로 함으로 해서 인행이 성숙해서 마음이 선정에 든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 마음은 항시 산란스러워서 선정에 들기가 어렵습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우리의 근본번뇌를 없앨 수 있는 것인데, 따라서 삼매에 들려면 오로지 지속을 시켜야 됩니다.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을 지속시켜야 마음이 한 곳으로 모아지고 그래야 선정에 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삼매에 들어가면 우리 업장이 녹아져서 부처님의 광명신(光明身)이 자기 앞을 훤히 비추고 동시에 부처님의 실상에 계합(契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과성삼매라, 인행삼매가 근본이 되어 그 결과로 열매가 맺어서 염불삼매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하실 때 여러분들은 어느 것이나 좋습니다. 화두를 드나 또는 티벳의 불교처럼 ‘옴마니반메훔’을 외우나 염불을 하나 어느 것이나 다 무방하고 또는 간경자혜안통투(看經者慧眼通透)라, 부처님 경만 읽어도 됩니다. 불경도 모두가 다 부처님의 근본성품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경만 읽어도 마음을 본체에서 안 여의면 성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좋지만, 본(本) 성품(性品)을 관조(觀照)하는 그 마음을 지속(持續)시켜야 됩니다. 동시에 부처님 이름의 실상에 계합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과성삼매라, 앞서 말한 인행삼매가 근본이 되어 가지고서 결과 열매가 맺어서 염불삼매를 성취합니다.

우리가 불경을 보고 조사어록을 보면 불념이념(不念而念)이라,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을 안 해도 절로 부처님을 생각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화두도 한 달이고 일 년이고 하면 불거이거(不擧而擧)라 화두를 안 드는데도 저절로 화두가 들린단 말입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하다가 말아버립니다. 그래서 무슨 공부나 끈기가 필요합니다.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염불도 계속하다 보면 나중에는 불념이념이라, 가만히 있어도 자기 몸 전체가 염불이 되는 기분이란 말입니다. 바람 불면 바람소리가 염불로 들리고, 물소리도 부처님 음성으로 들리게 됩니다. 화두도 무(無)라, 무(無)라, 하다 보면 바람소리도 무자화두로 들린단 말입니다. 선방에서 대중이 다 자는데 가만히 들으면 화두하는 사람은 잠자면서도 “무(無)라, 무(無)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도록 까지 해야 됩니다.

 

불념이념 불거이거라, 그렇게 익어지면 놓아버려도 놔지지가 않고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염불이나 화두를 오래 일심(一心)으로 한 사람들은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밥을 먹으나 길을 가나 항시 염불, 화두가 떨어지지 않고 그렇게 이어지면 기분이 굉장히 좋아집니다. 우리 피가 맑아져서 항시 시원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까지 해야 삼매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온전히 증명을 할 수 있지요.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꼭 삼매에 들어가도록 까지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과거 우리네 할머니나 어머니들은 천 팔십 개로 꿰인 염주를 들고 몇 시간이고 헤아리면서 염불을 합니다.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뭘 저렇게 미련하게 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할머니나 어머니들의 얼굴을 보면 자비심이 가득히 넘칩니다. 왜 그럴 것인가? 오직 일심으로 염불을 하니 삼매가 가까워진 것입니다. 이렇게 지속(持續)을 시키는 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는 부처님 공부는 자기한테 가장 유익한 공부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성불을 해야 합니다. 일체중생 개유불성(皆有佛性)이요 개당작불(皆當作佛)이라, 본래 부처거니 부처가 돼 버려야지, 부처가 될 바에는 다툼도 많고 전쟁도 많은 이 불안스러운 금생에 되어야 인간계의 여러 재앙도 막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