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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1. 실상 염불선

10. 3. 선(禪)의 방법(方法)

10. 3. 선(禪)의 방법(方法)

 

1) 공안선(公案禪)(화두선話頭禪)

2) 묵조선(黙照禪)

3) 염불선(念佛禪)

 

1) 공안선(公案禪)

 

선(禪)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 않습니다마는 우리가 보통 아는 바 공안선(公案禪) 즉 화두선(話頭禪)입니다. 우리 한국은 주로 화두선으로 되어 있습니다. 조계종은 특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파에서는 좀 다르겠지요. 그러나 조계종에서는 참선을 한 번도 안한 분도 선을 말하면 '화두만 선이다'고 얘기를 합니다. 선방에서 한 철도 안 나본 학자들도 참선에 대한 논문을 쓸 때는 으레 공안선 화두선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참선에 대해서 논할 때는 자기 스스로 몇 철이나 참선공부를 해 본 사람이 말해야지 참선을 안 해본 이가 선(禪)을 말하는 것은 마치 헤엄칠 줄 모르는 사람이 수영(水泳)법을 말하는 것과 같이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2) 묵조선(黙照禪)

또 묵조선(黙照禪)은 화두 없이 그냥 잠자코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불심(佛心)경계를 관조(觀照)하는 것입니다. 묵조(黙照)가 나올 때에 그 연기유서(緣起由緖)를 보면 분명히 불지(佛智)인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를 관조(觀照)하는 것이며, 묵조란 뜻도 잠잠히 묵묵히 비춘다는 무념무상의 도리로, 일체 무루공덕(無漏功德)을 갖춘 본래면목 경계를 비추는 선인 것인데 뒤에는 덮어놓고서 묵묵하니 앉는 것으로만 압니다. 그러니까 근본 뜻도 잘 모르고 혼침 등 병통이 많이 생깁니다.

 

그러나 공안선도 가사, 조주 무자(趙州 無字)의 화두의 연원을 보십시다. 어떤 승(僧)이 조주(趙州 778~897)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불법의, 중도(中道)의 도리를 이치로라도 안다면 그런 질문은 할 턱이 없습니다. 진리를 이치로 알아버린 사람이 그런 질문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한 천년(千年) 전이라서 지금 사람들같이 논리적으로나 합리적으로 생각을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말씀으로는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이라, 일체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했으니 개도 역시 중생인지라 마땅히 불성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사람 같으면 그래도 선악의 분별이 있기 때문에 불성이 있다고 할런지 모르겠지만 개란 껌껌하게 미혹되어 먹을 것이나 암놈 수놈밖에는 모르는 개한테 무슨 불성이 있을 것인가?' 그렇게 의심이 안 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일체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는 말을 듣고도 역시 현실로 눈앞에 보이는 개가, 어두운 업장 많은 그런 짐승이 무슨 불성이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에서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겠지요. 그 물음에 따라서 조주 스님이 "무(無)라 " 없다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부처님께서는 있다고 하셨는데 왜 조주 스님이 없다고 하는 것인가? 그러면 참말로 없는 것인가? 우리는 이 ‘공안선(公案禪)’의 뜻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럴 때는 우리 마음자리를 선행적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마음이 본래 부처인데, 어째서 부처가 나타나지를 못하는 것인가? 이것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산란심(散亂心) 때문입니다. 파도가 치면 중천에 휘영청 밝은 달그림자가 물 위에 제대로 비칠 수가 없겠지요. 똑같습니다. 우리 마음도 역시 산란스러우면 참다운 지혜가 못 나옵니다. 안정이 되어야 바른 지혜가 나올 수 있는 것이고, 특히 진여불성, 우리 본심자리는 정말로 산란심이 딱 정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호흡도 산란심과 정비례합니다. 마음이 산란스러우면 호흡도 그 마음만치 산란스럽고 호흡이 고요해지면 마음도 고요해지고, 또 역으로 마음이 고요해지면 호흡도 고요해집니다. 그러기에 덮어 놓고 하는 분들이 많지만 호흡법도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 마음도 어느 문제에다가 의심을 골똘히 품게 되면 우리 마음이 모아지고 정화(淨化)가 되겠지요. 그러나 수승한 근기가 된 사람들은 빨리 모아지는데 보통 근기는 그 의심 때문에 굉장히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남을 믿는 것은 기분이 좋지만 남을 못 믿을 때는 괴롭지 않습니까? 그와 똑같이 의심도 제일의제(第一義諦) 본래면목 자리를 안 놓치고 의심하고 불성자리를 분명히 참구(參究)하는 태도로 의심한다면 빨리 모아지지만 단순히 의심하는 의심으로는 더딘 것입니다.

 

수승한 근기를 갖추면 빨리 하나가 되어서 몸도 마음도 개운하니까 별 문제시가 안 되는 것입니다만 업장이 많은 사람들은 의심한다는 것이 괴로우니까 그 때문에 상기(上氣)가 되고 별별 병이 나오게 됩니다. 앞서, 칠각지(七覺支)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칠각지 법문은 정(定)과 혜(慧)가 쌍수(雙修)가 되는 법문 아닙니까? 정과 혜가 균등(均等)이 되어야 합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진여불성자리는 정과 혜가 본래로 구족원만하게 갖추어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우리 마음자리가 정만 있고 혜가 없다면 정만 닦아도 되겠지요. 또 혜만 있고 정이 별로 없다거나 치우치게시리 무엇이 더 많다고 한다면 한 가지만 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마는 우리 마음자리 불성은 원래 정과 혜가 균등하게 원만히 갖추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부하는 인행적(因行的)인 수행법도 정과 혜가 가지런히 나가야 됩니다.

 

마치 새가 두 날개가 있어야 하늘을 잘 날을 수 있고, 수레에 양 바퀴가 있어야 바로 가듯이, 공안선의 화두를 든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정혜균등(定慧均等)이 되어 있는 것인가?’ 점검을 하여야 하고 남의 공부도 그렇게 점검을 해 주어야 됩니다. 그러면 정혜균등한 것은 좋지만 어떻게 균등할 것인가? 좀 어려운 문제입니다. 무엇을 혜(慧)라고 할 것인가? 불경이나 조사어록이나 많이 외우는 것을 혜라고 할 것인가? 우리 공부하는 분상의 혜는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

보조 국사 어록에 적이상조(寂而常照)라, 적(寂) 곧, 고요한 것은 바로 정(定)에 해당합니다. 모든 번뇌가 없어져버린 자리입니다. 그러나 번뇌가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면 바보 아닙니까? 이른바 무기(無記)인 것입니다. 꼭 반야의 혜가 있어야 합니다. 반야의 혜는 모든 상을 다 떠나버린, 훤히 열린 바로 밝은 마음자리인 것입니다.

 

앞으로 현대 물리학을 말씀드릴 적에 이 마음의 광명자리를 현대 물리학적으로 증명한 것을 소개하겠습니다만 사실 우리 마음은 본래가 바로 지혜 덩어리요, 본래 빛, 광명 덩어리입니다. 후불탱화(後佛幀畵)를 보십시오. 부처님의 광명이 삼천대천세계를 다 비추고 도로 정수리로 들어가는 모습, 특히 정상에 광명이 들어오고 나가는 상징화가 그려져 있지 않습니까? 부처님뿐만 아니라 우리 중생도 똑같이 광명이 나와서 천지 우주를 다 비추는 것인데 우리가 번뇌에 가리어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가 예수의 부활(復活)입니다. 꼭 그들은 자기들만 있는 중요한 보배같이 부활설을 내세우나, 예수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이 다 부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지면 죽는 것입니까?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뱀이 허물 벗듯이 몸뚱이 허물만 벗는 것이지, 우리 생명 자체는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부활이 아니라 바로 영생 자체가 우리 인간인 것입니다. 그네들은 그런 도리를 잘 모르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가 죽은 뒤 삼일(三日)만에 어느 신도한테 모습으로 나타냈겠지만 예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달마 대사 전기를 본 분들은 알지 않습니까.

 

달마(菩提達磨)대사가 소림굴(少林窟)에서 9년 간 계시고 모든 교(敎)는 배격하여 문자(文宇)를 세우지 말라 하였는데, 그 때에 중국에는 번역 불교가 성행하여 구법승(求法僧)들이 인도에 가서 천신만고 가져온 목숨보다 소중한 경전인지라, 경을 외우고 풀이하는데 세월 다 보내버리는 것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경을 번역하고 풀이하고 연구하는 것은 좋은데, 정작 마음 닦는 법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었습니다.

 

따라서 자기가 '중국에 와서 할 일은 무엇인가? 사명은 무엇인가? 마땅히 경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경의 본뜻을 중요시해야 할 것 아닌가? 경의 본뜻은 무엇인가? 결국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오직 우리 마음 가리켜서 마음 깨달으면 본래 마음자리, 본래 자기, 참다운 대아(大我)가 곧 부처다' 그래서 달마 스님이 중국에 와서 참다운 진리는 문자 밖에 있다고 설파한 것입니다.

 

그러나 2조 혜가(慧可) 선사한테 『능가경(楞伽經)』 4권을 전수했던 것입니다. 잘 모른 사람들은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라, 경전은 필요 없다'고 말하지만 달마 스님이 전법(傳法)의 표신(表信)으로 가사(袈裟)와 『능가경』 4권을 혜가(慧可) 선사한테 전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경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경을 중요시한 것입니다. 경을 중요시하고 숭상한다는 것은 많이 외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경의 진의(眞義)인, 마음 닦고 바른 행동 취하고 삼매에 들어 바른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다시 공안선 말씀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화두를 드는 공부에 있어서 도인이나 선지식들이 말씀한 혜(慧)를 어떻게 놓치지 않을 것인가? 오직 마음을 모으는 정(定)과 더불어 어떻게 혜를 세울 것인가? 혜(慧)는 따지는 혜가 아니라 다 버리는 혜인 것입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하니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리요'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관념도, 좋다 궂다 하는 것도, 이 현상계도 본래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없다고만 생각하면 무기(無記)에 빠집니다. 그냥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에 훤히 빛나는, 조금도 막힘이 없는, 우주 삼천대천세계에 무장무애(無障無碍)한 진여연기(眞如緣起)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불성(佛性)이 상주(常住)하는 것입니다.

 

저는 라즈니쉬에 대해서 그의 방만한 행위 때문에 배격해버렸습니다만 그가 어떻게 공부를 했던 간에 천재이기 때문에 그의 저서 가운데 아주 좋은 대문이 있었습니다. '눈을 감을 때나 눈을 뜰 때나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모든 것을 빛으로 생각하라'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눈을 뜨나 눈을 감으나 언제나 누구를 보나 모두를 다 광명의 화신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모두가 광명입니다. 금덩어리나 다이아몬드만 빛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투명한 마니보주(摩尼寶珠)같은 빛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불안청정(佛眼淸淨)한 부처님의 차원에서는 진여불성 자체가 바로 광명이기 때문에 모두를 다 빛으로 안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도인들이 깨달은 분상에서 '심월고원(心月孤圓)하니 광탄만상(光呑萬像)이로다, 마음달이 훤히 우주를 비추는데 광명이 우주를 다 삼키고 있구나!'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깨달을 때에는 그런 경계가 되어야겠지요. 천지 우주가 그야말로 송곳 끄트머리나 냄새나는 똥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의 순수한, 심심미묘한 광명으로 빛나있다는 말입니다.

운문(雲門 864~949) 선사도 "여하시불(如何是佛)이니꼬?" 부처가 무엇인가? 라고 묻는 어느 스님네 대답에 "간시궐(乾屎橛)이니라" 마른 똥막대기라는 말입니다. 하필이면 마른 똥막대기 뿐이겠습니까? 가장 더러운 것도, 가장 좋은 것도 모두가 다 부처가 아님이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공안선의 '이뭣고' 선이나, '무자(無字)'선이나 어떤 선을 하나 제일의제(第一義諦) 자리를 안 놓치는 것이 이른바 혜(慧)가 됩니다. 그러면 정(定)은 무엇인가? 정은 그 자리를 지속적으로 간단(間斷)없이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시심마(是甚麽)선'의 시초를 보면 혜를 어떻게 드는[擧〕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밝기는 해와 달보다 더 밝고, 검기는 칠보다 더 검고' 이른바 명암을 초월한 것이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 중생분상에서는 검은 것을 생각하면 혼침이 빨리 와버립니다.

 

참선하면서 눈을 감고 해보십시오. 참선이 익은 분들은 문제가 아니겠지만 초심자는 그냥 혼침이 와버립니다.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밝기는 해와 달보다 밝고 검기는 칠보다도 더 검은 그 무엇이, 하늘을 받치고 땅을 괴고 이미 천지를 감싸고 두루하는 것이, 명암(明暗)을 초월한 밝은 생명이 나와 더불어 있다'고 참구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머리에 있습니까? 가슴에 있습니까? 발에 있습니까? 어느 처소에 부분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몸뚱이 전체가 불성 덩어리인 것입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천지 만물 두두물물이 불성 덩어리인 것입니다. 진여불성이 연기(緣起)한 현상이기에 현상 그대로 진여불성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뭣고' 선 곧 '시심마'선에서도 천지를 하나의 광명 덩어리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화두나 '시심마'선이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 무엇인가? 는 본래면목 자리가 무엇인가? 라는 말입니다. 달마 스님께서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 부처가 무엇인가? 또는 본분사(本分事)가 무엇인가? 이런 데 따라서 천칠백(千七百) 공안이 나왔습니다. 따라서 참구(參究)하는 마음 자세 역시 그 자리를 안 놓쳐야 선인 것입니다. 묵조선도 똑같습니다.

3) 염불선(念佛禪)

그 다음에 염불선(念佛禪)이라,

저는 이번에 문제의식으로 삼은 것이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어떤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아닙니다. 돈오돈수도 옳고 돈오점수도 옳습니다. 다 말씀을 했습니다. 육조단경을 보더라도 돈오돈수란 대목도 있고 돈오점수라고 문자로 표현은 안했지만 그 의미로는 벌써 돈오점수가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부질없는 갈등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개념적인 해석을 잘 해버리면 갈등될 필요도 없습니다. 돈오돈수를 무슨 뜻으로 말했던가? 뜻으로 생각할 때는 같은 뜻이 되어 버립니다.

 

또는 여래선과 조사선의 문제입니다. 이것도 괜히 부질없이 싸우는 것입니다. 부처가 말한 것이 옳은가? 조사가 말한 것이 옳은 것인가? 다 옳습니다. 다만 부처님이나 조사 스님이나 때에 따라, 너무 집착하면 집착하지 말라, 또 너무 집착을 안 해서 허무감에 빠져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무기에 떨어지면 곤란스럽기 때문에 이럴 때는 이것저것 점차로 닦아야 한다고 나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석하면 되는 것이지 그런 표현된 문제 가지고 괜히 쓸데없는 낭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갈등(閒葛藤)이라, 한가로운 희론(戱論)에 불과합니다.

 

또는 염불이 옳은가? 참선이 옳은가? 또는 주문이 옳은가? 또는 참선과 염불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저한테 문의하는 젊은 스님네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이런 기회에 미흡하나마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면 자기가 내키는 법문이라 좋게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므로 마땅히 권위 있는 경론을 전거로 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염불선(念佛禪)도 역시 원래 최상승선 도리입니다.

그러나 '극락세계가 저 십만 억 국토를 넘어서 있다. 또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우리 마음 밖에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참다운 염불도 못되고, 염불선도 못됩니다. 부처님께서 극락세계가 밖에 있다고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우리 마음이나 부처가 내 밖에 있어서 애쓰고 생각하면은 우리를 돕는 가피를 주신다고 생각하셨을 리는 만무합니다.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라,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요, 시방여래시법계신(十方如來是法界身)이라, 부처는 바로 우주를 몸으로 합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근본 뜻을 헤아려야 하는 것입니다.

 

원래, 극락세계나 나무아미타불이나 정토(淨土) 법문을 말씀하신 경은 주로 『무량수경(無量壽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경(阿彌陀經)』인데 그런 경을 착실히 보아도 압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착실히 잘 안 보고 말을 합니다. 착실히 본다면 한 경(經) 내에서도 방편과 진실이 아울러 있습니다. '극락세계가 저 밖에 있다'고 말씀해 놓고도 같은 경(經) 내에서 '그대 마음이 바로 극락세계다. 닦으면 그대로 극락이다'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근(下根) 중생은 방편설(方便說)만 가지고 따지며 시야비야(是也非也)합니다.

따라서, 참다운 염불도 '본래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닌 자리'를 확인시키기 위해서,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고 내 마음이 부처기 때문에,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부처 이름을 자꾸만 외워야 자기 암시가 되어 가까워지겠지만 부처님 이름을 외지 않고서 분별하는 생각만 할 때는 우리 마음이 부처와 가까워지겠습니까? 화두도, ‘무자’나 ‘이뭣고’나 또는 ‘판치생모(板齒生毛)’나 모두가 다 일체 유루적(有漏的)인 상대 유위법을 떠나서 오직 불심(佛心)만 잡으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공안이나 염불이나 모두 다 같은 것입니다.

 

묵조(黙照)도 청정미묘하고 일미평등한 진여불성을 관조하니까 같은 것이고, 또는 공안도 제일의제(第一義諦)인 한 물건 자리를 참구하는 것이니까 같은 것이고, 염불도 부처가 밖에 있다고 생각하고 행복스러운 극락이 십만 억 밖에 있다고 생각할 때에 방편이 되는 것이지만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요 만법이 본래 부처일 때는 바로 선(禪)인 것입니다.

 

외도(外道)와 정도(正道)의 차이는 무엇인가? 외도는 마음 밖의 도를 구합니다. 별스런 재주 있는 짓을 다해도 마음 밖의 무엇을 생각하면 외도인 것입니다. 행복도 불행도 화합도 모두가 다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행동 바르게 하고 진리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스려야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다스리는 방법은 무엇이 좋은가? 산을 생각하고 물을 생각하고 무엇을 생각하더라도 마음의 본래면목을 생각하는 것같이 빠르고 쉽고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본래 정서(情緖)와 지혜(智慧)와 의지(意志)가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전생의 숙업 따라서 정서가 좀 더 많은 사람, 또는 의지가 더 강한 사람, 또는 지혜가 더 밝은 사람 등으로 비중의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정서나 지혜나 의지가 조화롭게 갖추고 있으면 모르거니와 우리 중생들은 조화롭지가 않습니다. 오직 부처님만이 지혜나 의지나 정서가 다 조화롭고 완벽한 것입니다.

 

우리 불성은 원래 원만무결한 것이지만 중생은 숙업(宿業) 따라서 그렇지 않기 때문에 지성적인 사람은 정서나 의지로 참구하는 쪽보다 화두(話頭)를 의단(疑團)으로 참구(參究)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고, 확신을 위주하고 의단을 싫어하는 사람은 화두 없이 묵조(黙照)하는 것도 좋겠지요. 어느 쪽으로 가나 다 성불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겠지요. 자기 근기에 맞으면 더 빠르고 쉬울 것입니다. 또는 정서가 수승한 사람들은 이것저것 별로 따질 필요가 없이 다만 근본 성품인 생명의 실상을 인격적으로 그리워하는 흠모심을 냅니다. 원래 부처인지라 어떤 누구나가 다 부처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누구나 다 한결같이 염불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화두하는 분도 기도를 할 때는 아미타불을 외우고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영가천도 할 때는 또 부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우리 마음의 뿌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 뿌리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바로 자연의 도리며 몇 만생을 윤회해도 필경에는 부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거니 이 몸뚱이를 비롯한 모든 집착 때문에 공부를 잘못하는 것이지, 일체 분별망상이 없을 때는 바로 선정(禪定)에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인들 말씀에 무슨 공부 방법이든 '득정(得正)하면 가야(可也)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수행법에 있어서 주문을 외우든 화두를 참구하든 묵조하든 염불하든 득정하면 가야라, 바른 도리 바른 원리를 얻으면 좋다는 말입니다. 꼭 염불해야만 좋고 꼭 묵조해야만 좋은 것이 아니라 어느 행법을 취하든지간에 그 본분사, 본래면목 자리, 진여불성자리를 안 놓치는 것을 득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바른 도리를 얻지 못하면 꼭 화두만 든다고 선이 되는 것도 아닌 것이고 또는 꼭 묵조만 한다고 선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요는 본체를 안 여읜, 본체에 걸맞은 공부가 참다운 공부요 참다운 선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에 인간들이 합리적으로 잘 생각을 못하니까 맨 처음에 화두공안을 내세운 도인들이 필요에 의해서 시설한 것이지만 뒤에 사람들은 부질없는 분별시비를 합니다. 묵조도 '고인들의 어구(語句)나 기연(機緣)에 대해서 이것저것 희론(戱論) 곧, 부질없는 분별시비를 하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 본래 부처인지라 적연이응(寂然而應:寂然常照)해서 가만히 잠자코 있으면은 저절로 맑아져서 부처가 될 것이 아닌가?' 이렇게 그 당시에는 필요하니까 나왔던 것입니다.

대혜(大慧宗杲) 1089~1163) 스님도 위대한 도인인데, 그냥 묵묵하니 고목(枯木)처럼 앉아서 꾸벅꾸벅 혼침에 떨어지니까 마땅히 무엇인가 참구를 해야 하겠기에 그래서, 화두선을 역설했고, 그리고 선사들의 어구에 치우쳐서 따지고 부질없는 의심을 하니까 천동정각(天童正覺 ?~1157) 스님이 묵조선을 창도했던 것입니다.

염불은 부처님 당시부터서 염불(念佛) ․ 염법(念法) ․ 염승(念僧)이라고 무슨 경전에나 다 나와 있고 원래, 우리가 부처이기 때문에 또 부처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염불은 따지고 보면 내가 참 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래부처가 부처를 생각하기 때문에 역시 선(禪)이 됩니다.

 

그런데 깊은 고려 없이 염불은 하근기(下根機) 중생이 하는 것이라고 하면 문제가 큽니다. 우리네 할머니나 어머니들이 천념(千念)을 헤아리면서 애쓰고 몇 십 년 동안 염불한 분도 어느 스님네가 "염불은 근기가 낮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화두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해버리면 염불을 그만두고서 억지로 화두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시간 낭비인 동시에 병통이 생기기 쉽습니다.

 

근세에 수월(水月音觀 1855~1928) 스님은 일자무식인데도 천수다라니(千手陀羅尼)로 깨달은 분 아닙니까? 모두가 다 부처라 생각하고서 노력하면 되는 것이지 섣부른 졸도(拙度)법문은 소경이 길을 인도하는 격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공안선, 묵조선, 염불선 이런 수행법에 부질없이 시야비야 하는 것이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는 데서 저는 이와 같이 새삼스럽게 역설하게 되는 것입니다.